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Prologue


“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지자 태영은 귀를 기울였다.
“조건, 수준 맞추다 보니 우리 둘이 얻어걸린 거고, 당사자들보다 한발 앞서 혼주끼리 합의하시고, 어른들 뜻에 맞춰 식 끝내고 나면 당신은 원래 하던 대로 일 열심히 하고, 나는 서정 맏며느리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거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넌 딱 맏며느릿감이다.’ 당신도 아마 그래서 골랐겠죠. 이게 다예요. 지금까지 내가 정리한 생각.”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던 혜선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숨이 찰 만큼 길게 말했지만,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쳐다볼 수 없다. 화난 표정이라도 맞닥뜨리게 된다면 용기가 사라질 것 같아서다. 혜선은 차 앞 유리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 결혼 못 하겠다고 어깃장이라도 놔 볼까 했는데, 어쩐지 그러긴 싫어요. 난 당신 좋거든요. 친구로서도 좋고, 아마 아이들이 태어나면 아빠로서도 충실할 것 같아요. 어차피 결혼은 현실이니까. 조금은 현실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끝. 여기까지. 이제 계약서 작성할까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던 태영의 얼굴은 계약서를 작성하자는 마지막 제안에서는 험악하게 굳어졌다. 일부러 골라 쓴 것 같은 ‘친구’라는 단어도, 그저 좋은 아빠이기를 기대한다는 대목도, 현실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는 결심도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어떤 원인이 있었으니 이런 생각마저 하게 된 것일 텐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니 답답하다.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한 달 전, 친구들과의 농담에서 비롯되었다.



#시작은 농담처럼


첫돌을 맞은 성민의 막내를 축하해 주기 위해 모두가 모인 자리였다. 업무를 처리하고 오느라 조금 늦게 도착한 태영은 이미 수다가 한창인 친구들 사이에 섞여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성민과 예지, 그리고 그들의 분신과 다름없는 삼 형제의 등장으로 환기됐다.
“삼 형제 인사받으세요.”
양손에 두 형제를 이끌고 온 성민은 행복에 겨운 남자의 표상을 보여 주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다. 뒤따라온 예지도 안고 있던 오늘 파티의 주인공을 카펫 위에 내려놓았다.
현과 준은 시키지 않아도 척척 움직였다. 테이블마다 돌며 벌써 열 번도 넘게 했을 큰절을 노련한 동작으로 선보였다.
“동생 생일잔치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잡이 순서 때 잡은 마이크를 손에서 놓지 않은 진은 형들이 하는 모양을 물끄러미 지켜보더니 시선을 들어 아빠를 쳐다봤다.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성민이 팔을 들어 절하는 시늉을 해 보이자 말끄러미 쳐다보던 진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엉덩이를 치켜든 채 절을 했다. 그러곤 형들의 인사말도 따라 했다.
“가바마미.”
테이블에서는 박수와 웃음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벌써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간 다인은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진을 덥석 안아 올리며 뽀뽀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아유! 요고, 요고, 형들 하는 건 다 따라 하는구나, 이제!”
아들의 손을 닦아 주기 위해 다가온 예지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너 요즘 연애한다고 친구랑 조카들 다 버렸지? 흥! 그런 식으로 해 봐, 어디. 얘들이 언제까지 이모만 찾을 줄 아냐? 좀 더 있으면 ‘누구세요?’ 이럴걸.”
“아이고, 또 왜 이러셔?! 지난달에 만났었잖아!”
“이제 한 달에 한 번만 만나기로 한 거야 우리? 월례회야?”
“알았어, 알았어. 연말은 패스하고 새해부터 자주 보자, 자주.”
“아두, 아두.”
이모가 말을 하는 상대가 자신이라고 생각한 듯 진은 열심히 입술을 움직이며 소리를 흉내 냈다.
“연말 또 패스? 또 의료 봉사 가? 언니도 가는 거예요?”
예지는 황당한 얼굴로 다인과 민영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못 산다 아주! 결혼까지 두 달도 안 남았는데 봉사하셔야겠대, 꼭!”
이때다 싶어 끼어들어 푸념하는 지후에게 예지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투덜대는 거 같으면서도 묘하게 자랑 같단 말이야.”
어느새 걸어 나온 민영이 진을 데려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인사 거의 끝났지?”
“응, 여기가 마지막 테이블.”
“애들 여기 두고 가서 좀 쉬어, 옷도 갈아입고. 아까 보니 홀 한 바퀴 다 돌던데.”
“언니는 정말 천사라니까!”
“그럼 나는?”
성민이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예지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남편의 팔을 잡고 돌아선 뒤에야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천사일 때도 있긴 해. 안 집적거리고 얌전히 잠만 잘 때는.”
멀어져 가며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 버린 윤성은 방금 입에 머금었던 샴페인을 뿜었다.
“풉!”
“어머!”
난장판이 된 테이블을 정리하느라 모두는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제 접시에만 몰두해 여념이 없다. 어른들 사이에 끼어 앉아 열심히 허기진 배를 채우는 아이들을, 태영은 흐뭇하게 바라봤다.
“눈을 못 떼셔, 우리 형.”
윤성이 핀잔을 주자 그제야 시선을 돌린 태영은 헤벌어진 입을 겨우 다물며 즐거운 목소리를 냈다.
“진짜 귀엽다. 저런 아들들 있으면 정말 뼈가 가루가 되도록 일해도 행복하겠어.”
“형, 그건 해 보고 나서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성민 형한테 그 말 그대로 한번 해 봐. 뭐라고 하는지…….”
“나 뭐? 어떤 말?”
금세 옷을 바꿔 입고 테이블로 다가온 성민이 비어 있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현이 준이 같은 아들들 있으면 뼈가 가루가 되도록 일하겠다고. 그러니까 지후가 너한테 물어보고 난 뒤에 다시 얘기하래.”
“야, 그게…….”
성민은 윤성의 샴페인을 가져와 한 모금 쭉 들이켜고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게 늘 느끼는 행복은 아니란다, 총각아. 네가 뭘 알겠냐. 우리 태영이 장가를 빨리 보내야 할 텐데……. 이 자식 보면서 어머니는 또 얼마나 애가 타실 거야, 쯧쯧…….”
한탄을 길게 늘어놓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성민에게 태영은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너까지 이러기냐? 도둑놈 주제에.”
“도둑놈이 뭐냐! 급 떨어지는 소리 좀 하지 마.”
“급은 네가 벌써 떨어뜨렸다, 도둑놈아.”
두 동갑내기의 말다툼이 시작되려는 찰나, 민영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톡 끼어들자 나머지들의 시선이 모였다.
“성민 오빠가 왜 도둑놈이야?”
순진한 물음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성민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지후는 몸을 기울여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예지 때문이지 뭐.”
하지만 민영의 목소리는 전혀 은밀하지 않았다.
“아, 예지! 학교 졸업도 못 하구, 불쌍한 예지…….”
눈꼬리를 한껏 늘어뜨린 민영은 탄식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끝이 묘하게 늘어지는 것을 감지한 사람은 역시 지후다. 취했을 때 나오는 습관이다. ‘잉?’ 지후는 민영의 얼굴을 잡고 눈을 들여다봤다.
“샴페인 몇 잔 마셨어?”
“왜에?”
민영이 애교스럽게 되물었지만, 지후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거 몇 잔째야?”
“석 잔?”
눈을 굴려 가며 대답하는 민영 바로 옆에서 효린이 분주히 입과 손을 놀리고 있다.
“맥주, 맥주도.”
입 모양으로는 술의 종류를 알려 주며 손가락을 쫙 펴 다섯 잔이었음을 알렸다. 효린에게 시선을 돌렸던 지후는 세찬 날숨을 뱉어 내며 다시 민영을 바라봤다.
“허! 언제 그렇게 홀짝홀짝 마셨대? 자기 그만 마셔라, 안 되겠다.”
“괜찮아, 나 말짱해.”
“이따 병원 들어가야 한다며! 술 냄새 팍팍 풍기면서 갈래?”
끝내 윽박지르는 지후를, 민영은 새초롬하게 흘겨봤다. 그러곤 무릎에 앉아 쿠키를 쫄쫄 빨아먹고 있는 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진아, 삼촌 때찌 해! 삼촌 나빠. 나쁜 사람이야.”
이모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반짝 든 진은 이모와 삼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삼촌에게 고사리 주먹을 날렸다.
“때찌!”
“아이고 예뻐! 이 삼촌은 이제 나쁜 삼촌이야, 알았지?”
민영은 아이의 뺨에 연신 입을 맞추며 깔깔댔다.
“얼씨구! 자꾸 반항해. 나도 때찌 한다?”
“때려 봐, 때려 봐. 손도 못 올릴 거면서 큰소리는…….”
다시 고개를 든 민영이 호전적인 투로 따지자 지후는 ‘큭’ 짧은 웃음을 터뜨리며 은근한 투로 대꾸했다.
“손은 당연히 안 대지. 입술로 때릴 건데.”
테이블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시에 야유가 쏟아졌다.
“아, 재수 없어.”
“저 사람들 누가 부른 거야?”
“자제 부탁요.”
효린과 재훈, 그리고 다인의 비아냥거림까지 한데 섞여 나온 다음은 문제의 커플과 마주 앉은 태영의 목소리였다.
“아 진짜. 자리 잘못 잡았다. 자리 좀 바꿔 줄 사람?”
“자극 좀 받아서 얼른 해결을 보세요.”
효린은 냉큼 대상을 바꿔 공격했다. 태영이 헛웃음을 웃는데 재훈이 맞장구를 치며 끼어들었다.
“형들은 왜 아무것도 안 해?”
“누구, 우리?”
“내가 뭘 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