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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아는 것도 많다. 그 병원 정신과 속사정을 다 꿰고 계시는구먼?”
상진이 코웃음을 치며 톡 끼어들자 윤희가 곱게 눈을 흘겼다.
“그 과 레지던트들이 그렇게 힘들대. 인원이 없어서.”
“그럼 애초에 많이 뽑으면 되지.”
“애초에 많이 뽑아 놔도 인턴 과정 끝나고 나면 죄다 다른 과로 빠진대요.”
“인기가 없는 과야?”
“아무래도 돈 벌기에 최적은 아니지. 성형이나 피부과에 비하자면.”
“요새 정신병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을 해도 꼭…….”
“내가 틀린 말 했나?”
상진이 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태영은 가벼운 어깻짓을 하며 제 생각을 말했다.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많다, 이 정도로만 말씀하셨어도 충분했어요.”
“꾸미려고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하라며? 코치가 왜 이랬다저랬다 해. 헷갈리게.”
타박은 태영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아버지의 어깃장을 이길 수는 없다. 태영은 체념한 듯 실소하며 숟가락을 놀렸다.
“거기 신 선생이라고 엄청 똑똑한 선생 하나 있다던데.”
윤희가 넌지시 말을 꺼내자 상진이 귀를 쫑긋 세웠다. 태영도 바짝 긴장해 귀를 기울였다.
“정신과에?”
윤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뜬 목소리로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레지던트 3년 차인데, 전문의 딴 2년 선배도 그 선생한테 조언을 구할 정도로 실력이 좋대요.”
지레 움찔했던 태영은 어머니의 시선이 아버지에게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했다.
“그래? 보통이 아닌가 보군.”
“그렇대. 영지 말로는 정신과는 특공부대 같은 느낌이래요.”
“뭐, 소수만 뽑아서 정예로 키운단 소리야? 김 과장 자만심이 반이지 싶다.”
상진이 킥킥대며 비아냥거리자 윤희는 세찬 콧방귀로 응수했다.
“영지 눈이 얼마나 높은데! 당신이 고대하고 있는 작은 며느릿감이 영지 제자라는 걸 잊지 마요.”
“기왕 하는 김에 큰 며느릿감도 부탁하지 그래?”
“그럴까?”
두 중년 부부가 주거니 받거니, 마치 남 얘기 하듯 죽을 맞추자 태영은 시큰둥한 어조로 본인의 존재를 알렸다.
“큰아들 어디 보내셨어요? 저 아직 여기 있는데…….”
윤희는 기다렸다는 듯 아들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고 선생, 서 선생더러 소개나 좀 해 달라고 해 보지. 둘 다 나온 자리에서 싱거운 얘기만 하다 헤어졌니?”
태영은 기가 막혀 실소를 뿜었다. 마치 친구들의 대화를 들은 사람처럼 말하는 어머니 때문이다. 태영이 대답할 말을 생각하기도 전에 상진이 선수를 쳤다.
“어허, 중이 제 머리 깎는 거 봤어?”
“하긴, 그렇지. 영지한테 말해 볼까?”
윤희가 최종적인 의견을 내놓자 태영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어…….”
“속 다 보이게 너무 대놓고는 말고, 넌지시 찔러 보든가.”
하지만 그 기회는 아버지에게 가로채이고 말았다. 태영은 세찬 날숨을 뿜어내며 체머리를 흔들었다.
“대놓고도 하지 마시고, 넌지시 하지도 마세요. 제가 전혀 생각이 없지 않은 이상, 저도 뭐든 하겠죠. 누구 하나 점찍어 두고 물밑 작업 같은 거 하지 마시고 기다려 주시면 좋겠어요.”
담담하게 선언하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을 내려놨다.
“생각이 없진 않단 소리군. 그럼 해 봐, 어디. 이번엔 얼마나 걸릴지, 기다릴 맛 나겠군.”
아들의 단언과 남편의 희망 어린 대꾸가 윤희를 기함하게 했다.
“무슨 프로젝트 시행하는 거야? 무슨 남자들이, 이렇게 모자란 남자들이 어디 있을까. 세상에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네.”
***
다음 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한 태영은 사무실을 서성이는 중이다.
“일찍 나오셨네요?”
놀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마케팅팀 팀장인 태영 다음으로 직급이 높은 차승수다. 태영은 흠칫하며 돌아서서 반갑게 화답했다.
“아, 오늘 좀 일찍 움직여졌네요.”
꾸벅, 묵례로 답한 승수가 제 자리로 가자 태영은 슬그머니 소맷자락 아래에 숨겨진 시계를 확인했다. 8시밖에 안 됐다.
‘매일 이렇게 일찍 나오나?’
궁금증은 속으로만 삼켰다. 감시한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당연히 오해받을 만한 상황이다. 직원들의 근태를 확인하려 이른 시간에 출근한 것은 아닌데 말이다.
사무실 안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커피 머신부터 작동시킨 승수는 곧장 책상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오늘의 주요 업무를 메모해 놓은 스케줄러를 확인하고, 필요한 자료가 담긴 폴더 몇 개를 챙기는 동안 힐끔, 힐끔, 팀장이 서 있는 곳을 곁눈질했다.
창가를 서성이던 팀장은 이제 붙박이 수납장 문을 열고 서 있다. 여분의 소모품들을 넣어 두는 수납장이다. 분주히 시선을 움직이던 팀장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돌아서자 승수는 얼른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팀장의 기척이 느껴지고, 승수의 눈동자는 여지없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이번에 팀장이 향하는 곳은 커피 머신이다.
호텔의 업무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4층의 긴 복도에 스낵바와 휴게실을 겸한 준비실이 구역마다 존재했지만, 애석하게도 마케팅팀 사무실은 준비실과 먼 곳에 있어 직원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았었다. 지금 팀장이 들여다보고 있는 기계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불과 한 달 전 팀원들이 사비를 각출해 구매한 소중한 물품이다.
‘못마땅했나?’
승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팀장의 행동을 지켜봤다.
사무실 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은, 지난 5년간 봐 온 팀장에게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물론 함께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고, 때로는 의견 충돌로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의실이라는 장소에 국한된 일이었다.
팀장은 팀장 업무실이 따로 있고, 팀원들의 사무실과 통하는 문 외에 복도로 바로 나갈 수 있는 문도 있으니, 굳이 팀원들 사이를 지나다닐 필요가 없었다.
통솔력 있는 리더인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팀장의 개인사를 공유하는 팀원은 그가 아는 중에서는 아무도 없다.
학교 후배이자 입사 동기인 선재마저도 마케팅팀 팀장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말했었다. 회장 일가의 사적인 스케줄까지 줄줄 꿰고 있는 수행비서나 다름없는데도 말이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깍듯한 예의를 갖추는 팀장의 태도가 상대방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한 잔 마셔도 되죠?”
느닷없이 날아든 질문에 지레 놀란 승수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요. 드셔도 되죠.”
“내가 마신 건 채워 놓을게요.”
커피를 한 잔 들고 돌아선 태영은 싱긋 웃으며 농을 던졌다. 하지만 승수의 얼굴은 걱정스레 찌푸려졌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날마다 마실 건데?”
장난스레 눈썹을 들썩이는 팀장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승수는 뒤늦게야 농담임을 깨닫고 낮은 탄사를 뿜어냈다.
“아…….”
승수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다시 서성이기 시작하는 팀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즐거운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세 사람이 동시에 문을 통과하며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리님, 굿모닝.”
“반갑습니다.”
쩌렁쩌렁한 인사 뒤에 또 하하, 낄낄, 수다를 시작하는 팀원들에게 승수는 현란한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경민과 상호, 주영이 차례로 입을 다물고 의아한 얼굴로 대리를 쳐다봤다.
사무실 벽에 걸린 난해한 그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태영은 또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8시 30분이다. 딱히 한 일도 없이 30분이 지나 버린 것이다.
“어? 팀장님!”
생각지 못한 곳에서 팀장을 발견하고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러 버린 사람은 경민이었다. 나란히 선 나머지 둘도 휘둥그런 눈으로 태영을 바라봤다.
태영은 얼어붙은 듯 서 있는 팀원들의 면면을 살피다가 멋쩍게 웃었다. 함께 일하는 동안 이런 식으로 마주친 적은 처음이니 놀랄 만도 하다.
“어……. 그럼 회의실 가 있을게요. 천천히 준비하고 오세요.”
말을 마친 태영은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태영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세 사람은 동시에 질문을 쏟아 냈다.
“나 지각한 거 아니죠?”
“20분 전이야.”
“왜? 왜 팀장님 방에 안 계시고 왜 여기서 서성거려, 왜?”
승수는 한시름 앓고 난 사람처럼 ‘후우―’ 긴 한숨을 내뿜고 나서야 팀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난들 아나 이 사람들아! 빨리 회의 준비나 해.”
승수도 궁금하다. 오늘이 무슨 날이기라도 한 걸까. 오늘 아침 팀장은 확실히 달랐다. 언제나 철저히 사무적인 모습으로 업무 준비를 완벽히 끝낸 채 회의실에서 팀원들을 맞이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업무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업무를 다 끝낸 뒤 한가로이 사무실을 노니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 들리진 않았지만, 콧노래 같은 소리도 내지 않았던가.
생각에 잠긴 승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회의 자료를 챙겼다.
“아는 것도 많다. 그 병원 정신과 속사정을 다 꿰고 계시는구먼?”
상진이 코웃음을 치며 톡 끼어들자 윤희가 곱게 눈을 흘겼다.
“그 과 레지던트들이 그렇게 힘들대. 인원이 없어서.”
“그럼 애초에 많이 뽑으면 되지.”
“애초에 많이 뽑아 놔도 인턴 과정 끝나고 나면 죄다 다른 과로 빠진대요.”
“인기가 없는 과야?”
“아무래도 돈 벌기에 최적은 아니지. 성형이나 피부과에 비하자면.”
“요새 정신병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을 해도 꼭…….”
“내가 틀린 말 했나?”
상진이 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태영은 가벼운 어깻짓을 하며 제 생각을 말했다.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많다, 이 정도로만 말씀하셨어도 충분했어요.”
“꾸미려고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하라며? 코치가 왜 이랬다저랬다 해. 헷갈리게.”
타박은 태영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아버지의 어깃장을 이길 수는 없다. 태영은 체념한 듯 실소하며 숟가락을 놀렸다.
“거기 신 선생이라고 엄청 똑똑한 선생 하나 있다던데.”
윤희가 넌지시 말을 꺼내자 상진이 귀를 쫑긋 세웠다. 태영도 바짝 긴장해 귀를 기울였다.
“정신과에?”
윤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뜬 목소리로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레지던트 3년 차인데, 전문의 딴 2년 선배도 그 선생한테 조언을 구할 정도로 실력이 좋대요.”
지레 움찔했던 태영은 어머니의 시선이 아버지에게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했다.
“그래? 보통이 아닌가 보군.”
“그렇대. 영지 말로는 정신과는 특공부대 같은 느낌이래요.”
“뭐, 소수만 뽑아서 정예로 키운단 소리야? 김 과장 자만심이 반이지 싶다.”
상진이 킥킥대며 비아냥거리자 윤희는 세찬 콧방귀로 응수했다.
“영지 눈이 얼마나 높은데! 당신이 고대하고 있는 작은 며느릿감이 영지 제자라는 걸 잊지 마요.”
“기왕 하는 김에 큰 며느릿감도 부탁하지 그래?”
“그럴까?”
두 중년 부부가 주거니 받거니, 마치 남 얘기 하듯 죽을 맞추자 태영은 시큰둥한 어조로 본인의 존재를 알렸다.
“큰아들 어디 보내셨어요? 저 아직 여기 있는데…….”
윤희는 기다렸다는 듯 아들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고 선생, 서 선생더러 소개나 좀 해 달라고 해 보지. 둘 다 나온 자리에서 싱거운 얘기만 하다 헤어졌니?”
태영은 기가 막혀 실소를 뿜었다. 마치 친구들의 대화를 들은 사람처럼 말하는 어머니 때문이다. 태영이 대답할 말을 생각하기도 전에 상진이 선수를 쳤다.
“어허, 중이 제 머리 깎는 거 봤어?”
“하긴, 그렇지. 영지한테 말해 볼까?”
윤희가 최종적인 의견을 내놓자 태영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어…….”
“속 다 보이게 너무 대놓고는 말고, 넌지시 찔러 보든가.”
하지만 그 기회는 아버지에게 가로채이고 말았다. 태영은 세찬 날숨을 뿜어내며 체머리를 흔들었다.
“대놓고도 하지 마시고, 넌지시 하지도 마세요. 제가 전혀 생각이 없지 않은 이상, 저도 뭐든 하겠죠. 누구 하나 점찍어 두고 물밑 작업 같은 거 하지 마시고 기다려 주시면 좋겠어요.”
담담하게 선언하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을 내려놨다.
“생각이 없진 않단 소리군. 그럼 해 봐, 어디. 이번엔 얼마나 걸릴지, 기다릴 맛 나겠군.”
아들의 단언과 남편의 희망 어린 대꾸가 윤희를 기함하게 했다.
“무슨 프로젝트 시행하는 거야? 무슨 남자들이, 이렇게 모자란 남자들이 어디 있을까. 세상에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네.”
***
다음 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한 태영은 사무실을 서성이는 중이다.
“일찍 나오셨네요?”
놀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마케팅팀 팀장인 태영 다음으로 직급이 높은 차승수다. 태영은 흠칫하며 돌아서서 반갑게 화답했다.
“아, 오늘 좀 일찍 움직여졌네요.”
꾸벅, 묵례로 답한 승수가 제 자리로 가자 태영은 슬그머니 소맷자락 아래에 숨겨진 시계를 확인했다. 8시밖에 안 됐다.
‘매일 이렇게 일찍 나오나?’
궁금증은 속으로만 삼켰다. 감시한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당연히 오해받을 만한 상황이다. 직원들의 근태를 확인하려 이른 시간에 출근한 것은 아닌데 말이다.
사무실 안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커피 머신부터 작동시킨 승수는 곧장 책상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오늘의 주요 업무를 메모해 놓은 스케줄러를 확인하고, 필요한 자료가 담긴 폴더 몇 개를 챙기는 동안 힐끔, 힐끔, 팀장이 서 있는 곳을 곁눈질했다.
창가를 서성이던 팀장은 이제 붙박이 수납장 문을 열고 서 있다. 여분의 소모품들을 넣어 두는 수납장이다. 분주히 시선을 움직이던 팀장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돌아서자 승수는 얼른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팀장의 기척이 느껴지고, 승수의 눈동자는 여지없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이번에 팀장이 향하는 곳은 커피 머신이다.
호텔의 업무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4층의 긴 복도에 스낵바와 휴게실을 겸한 준비실이 구역마다 존재했지만, 애석하게도 마케팅팀 사무실은 준비실과 먼 곳에 있어 직원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았었다. 지금 팀장이 들여다보고 있는 기계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불과 한 달 전 팀원들이 사비를 각출해 구매한 소중한 물품이다.
‘못마땅했나?’
승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팀장의 행동을 지켜봤다.
사무실 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은, 지난 5년간 봐 온 팀장에게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물론 함께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고, 때로는 의견 충돌로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의실이라는 장소에 국한된 일이었다.
팀장은 팀장 업무실이 따로 있고, 팀원들의 사무실과 통하는 문 외에 복도로 바로 나갈 수 있는 문도 있으니, 굳이 팀원들 사이를 지나다닐 필요가 없었다.
통솔력 있는 리더인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팀장의 개인사를 공유하는 팀원은 그가 아는 중에서는 아무도 없다.
학교 후배이자 입사 동기인 선재마저도 마케팅팀 팀장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말했었다. 회장 일가의 사적인 스케줄까지 줄줄 꿰고 있는 수행비서나 다름없는데도 말이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깍듯한 예의를 갖추는 팀장의 태도가 상대방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한 잔 마셔도 되죠?”
느닷없이 날아든 질문에 지레 놀란 승수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요. 드셔도 되죠.”
“내가 마신 건 채워 놓을게요.”
커피를 한 잔 들고 돌아선 태영은 싱긋 웃으며 농을 던졌다. 하지만 승수의 얼굴은 걱정스레 찌푸려졌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날마다 마실 건데?”
장난스레 눈썹을 들썩이는 팀장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승수는 뒤늦게야 농담임을 깨닫고 낮은 탄사를 뿜어냈다.
“아…….”
승수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다시 서성이기 시작하는 팀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즐거운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세 사람이 동시에 문을 통과하며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리님, 굿모닝.”
“반갑습니다.”
쩌렁쩌렁한 인사 뒤에 또 하하, 낄낄, 수다를 시작하는 팀원들에게 승수는 현란한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경민과 상호, 주영이 차례로 입을 다물고 의아한 얼굴로 대리를 쳐다봤다.
사무실 벽에 걸린 난해한 그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태영은 또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8시 30분이다. 딱히 한 일도 없이 30분이 지나 버린 것이다.
“어? 팀장님!”
생각지 못한 곳에서 팀장을 발견하고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러 버린 사람은 경민이었다. 나란히 선 나머지 둘도 휘둥그런 눈으로 태영을 바라봤다.
태영은 얼어붙은 듯 서 있는 팀원들의 면면을 살피다가 멋쩍게 웃었다. 함께 일하는 동안 이런 식으로 마주친 적은 처음이니 놀랄 만도 하다.
“어……. 그럼 회의실 가 있을게요. 천천히 준비하고 오세요.”
말을 마친 태영은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태영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세 사람은 동시에 질문을 쏟아 냈다.
“나 지각한 거 아니죠?”
“20분 전이야.”
“왜? 왜 팀장님 방에 안 계시고 왜 여기서 서성거려, 왜?”
승수는 한시름 앓고 난 사람처럼 ‘후우―’ 긴 한숨을 내뿜고 나서야 팀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난들 아나 이 사람들아! 빨리 회의 준비나 해.”
승수도 궁금하다. 오늘이 무슨 날이기라도 한 걸까. 오늘 아침 팀장은 확실히 달랐다. 언제나 철저히 사무적인 모습으로 업무 준비를 완벽히 끝낸 채 회의실에서 팀원들을 맞이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업무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업무를 다 끝낸 뒤 한가로이 사무실을 노니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 들리진 않았지만, 콧노래 같은 소리도 내지 않았던가.
생각에 잠긴 승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회의 자료를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