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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피의 제국 1화
“인생이 너에게 많은 불행을 안겨 주겠지만, 그로 인해 행복해질 것이고 인생을 축복할 것이며 결국 다른 사람들의 인생도 축복하게 될 테니…….”
- 도스또예프스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중1)
Prologue. 눈보라
눈앞에 있던 원수의 얼굴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암흑 속에 파묻혔다. 수영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깜깜하던 사위는 조금씩 밝아졌다. 조금 전 남자의 침실이 아니었다. 수영은 전혀 낯선 곳에 서 있었다.
광활한 회색 하늘과 하얀 눈이 깔린 대지 사이에서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쳤다. 하늘과 대지는 마치 하나가 된 듯했다. 지평선 끝자락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여러 갈래 뻗어 있는 나무는 거친 바람이 휘몰아쳐도 꿋꿋해 보였다. 눈 밑의 대지에 깊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일까.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자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붉은 열매가 눈 덮인 대지 위에 떨어졌다. 선명하게 붉은 열매가 핏방울처럼 점점이 새하얀 눈 위에 새빨갛게 박혔다. 그리고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노랫소리.
“어째서 자작나무들은 그다지도 웅성대며 소리를 내는가.
어째서 백색 줄기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가.
바람 부는 길가에 기대어 서
그다지도 슬프게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있구나.
길을 걸어가며 드넓은 공간에 나는 기쁘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삶에서 알고 있는 전부일지도.
어째서 나뭇잎들은 그다지도 슬픈 얼굴로 날아다니는가.
외피 속의 영혼을 애무하는가.
심장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또다시, 또다시 대답은 없구나.
자작나무에서 떨어져 내 어깨 위로 내려앉은 작은 잎사귀는
나처럼 나뭇가지와 이별하네.”2)
귓가를 울리는 노랫소리는 이윽고 어떠한 의미가 되어 머릿속으로 전달되었다. 서서히 작아지는 노랫소리와 함께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다.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풀썩. 볼에 맞닿은 눈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슬픔에 잠겨 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Chapter 1. 운명의 굴레 - 선택 (1)
딸깍. 수영은 사물함의 열쇠를 열고 평상복을 꺼내 들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급격한 피로에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은 상대하기 힘든 손님도 없었고,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수영은 유니폼의 바지를 곱게 개어 놓고, 셔츠의 단추를 기계적으로 풀어 내리며 멍하게 생각했다.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다.
어머니의 소원은 수영이 대학을 졸업해서 남들처럼 제대로 취직해 번듯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비록 수중에 남은 2천만 원이라는 돈으로는 4년간 등록금을 내기에도 벅찼지만 어떻게든 버틸 생각이었다. 그래야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1년을 보냈다고 기일마다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생활 한 학기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하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정신없이 지나갔다. 성인이 되어 아르바이트할 수 있는 곳이 많아지자 수영이 선택한 것은 술집 서빙이었다. 학기 중에는 대학 근처의 호프집에서 했지만 방학이 되어 좀 더 급여가 센 곳을 찾다 보니 번화가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아는 형의 추천을 받아 고급 바에서 일하게 되어 몸은 덜 고된 대신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했다.
“어, 아직도 안 갔어? 너도 이것 좀 봐 줄까?”
옷을 갈아입자마자 탈의실 겸 휴게실로 사용하는 방에 두 명의 직원이 들어왔다. 이들은 마감조이기 때문에 두 시간 정도 일을 더 해야 했다.
“뭔데요?”
완전히 지쳐 버렸지만 수영은 애써 미소 지으며 잡지를 들여다보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달의 운세. 이 녀석 이거 잘 챙겨 보잖아.”
“수영이 너 생일이 언제냐? 몇 월?”
“4월 말인데요, 아마 황소자리던가?”
“어, 그래. 여기 있네. 이거 은근히 잘 맞는다니까.”
수영은 그가 손으로 짚어 준 운세를 읽어 보았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시기.
초반에는 고생하지만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여유 있게 생활하라.
행운의 단어 : 독수리, 동전, 금.
“이게 뭐라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수영이 얼굴을 찌푸리자,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피식피식 웃었다.
“이 녀석, 여기저기 끼워 맞춰서 나중에 지나면 꼭 이게 맞았다고 우긴다니까. 그나저나 얼른 들어가 봐. 또 마스터가 부르기 전에.”
수영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이 일하고 있는 바는 정확히 말하면 호스트바와 게이바의 중간 형태로 일반 테이블과 별도로 마련된 룸으로 나뉘어 서비스의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룸에 들어가는 서버는 따로 두어 테이블 서버와는 페이가 천지 차이다. 물론 하는 일도 좀 다르겠지만.
수영을 눈여겨보고 오는 손님들이 늘었다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가끔 룸에서 보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오는 건 곤란했다. 룸에 들어갈 수 있는 손님은 남자만 가능했다. 말하자면 룸은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게이바인 것이다. 서버들 외모가 착하다고 소문이 나 테이블에는 여성들이 주로 오지만 복도로 분리된 룸에서는 남자 손님만 받는다. 출입문도 손님끼리 부딪치지 않도록 따로 되어 있어서 신원이 철저히 보호된다.
수영이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 찰나 매니저가 탈의실 문을 벌컥 열더니 수영을 불렀다.
“마스터의 호출. 오늘은 꼭 보자고 하셨다. 얼른 가 봐.”
휴게실에 있던 두 남자는 수영을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매니저가 나가고 한숨을 푹 내쉰 수영에게 위로를 겸한 조언이 들려왔다.
“정 안 되겠으면 그냥 그만둔다고 해. 뭐, 우리야 원래 게이니까. 간혹 이상한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손님들이 점잖은 편이고, 2차 가고 막 그런 거 아니니까 할 만한데 넌 일반이라며. 여기 말고 또 괜찮은 데 있을 거야.”
수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 휴게실 옆에 마련된 방에 들어가자 마스터라고 불리는 남자가 안락의자에 앉아 장부를 훑어보고 있었다.
“오늘도 수고했다. 거기 앉지.”
“…….”
“그래, 저번에 말한 건 생각해 봤나?”
요즘 일하면서 받고 있던 정신적 스트레스의 원인은 바로 그 제안 때문이다. 수영이 침묵하자 남자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일반 테이블은 일을 배우고 반응이 괜찮으면 룸으로 들어가기 위한 중간 과정이야. 일종의 수습 기간이지.”
돈을 많이 주는 데는 역시 이유가 있다. 일반 테이블에서 계속 일하고 싶지만 이 제안을 거절하면 결국 잘리고 말 것이다. 수영이 여전히 침묵으로 대하자 눈썹을 꿈틀한 남자는 이윽고 씩 웃었다.
“그럼 일도 좀 배우고 적응도 할 겸, 일주일에 한 번씩은 어떻겠나?”
남자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수영을 바라보았다. 수영은 방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매니저 형과 상의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만두겠습니다.”
수영은 짧게 목례를 하고 곧장 방을 빠져나왔다.
번화가의 밤은 화려하다. 열대야 현상으로 잠 못 이루는 시간, 유흥업소들은 반짝이는 네온사인으로 취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수영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툭 치고도 모른 척 지나가는 취한 남자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며 생각했다. 곳곳에 도사리는 수많은 유혹. 그것들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항상 옳은 길만 걸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생은 항상 쉬운 길과 쉽지 않은 길 사이에서 선택을 종용한다.
언젠가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목표가 있다면 가끔은 길을 헤맬지라도 결국에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수영이 어떻게 해서든 대학을 다니고자 하는 것은 어머니의 유언도 있었지만 삶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 뛰는 일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이 소망이 수영의 힘든 하루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다.
수영은 문득 방을 정리하면서 발견했던 어머니의 일기를 떠올렸다. 오래전에 잠깐씩 쓰셨던 일기인 듯 누런색으로 바랜 노트가 어머니의 옷가지에 뒤섞여 나왔다. 언제 썼는지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이가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할 때마다 나는 이 아이가 나를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두려웠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그 의미를 알겠느냐마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상처받는 그 눈을 보면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나도 너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단다.’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얘기했다.
‘너의 아버지는 네가 아주 어려서 갓난아이였을 때 병으로 돌아가셨단다. 하지만 매우 훌륭한 분이셨어. 너를 훌륭하게 키워 달라고 부탁하셨단다.’
이 말을 들려주었던 그 이후 아버지한테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면서 과거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부끄럼 없는 미래를 살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는 수영이 어렸을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게 수영이 아는 전부였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서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나 보다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아이가 학교에서 어머니를 주제로 글을 쓴 걸 보여 줬다. 부끄럽게 돈을 벌어 온 것은 과거로도 충분하다. 세상에 대가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가난할지라도 이 아이의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다.
웃음을 팔고 몸을 팔면서 호사를 누리던 그때보다 어머니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아이가 있는 이때가 더 행복하다.]
점점이 떨어진 눈물에 글씨가 번져 갔다. 어머니의 과거에 대한 충격보다도 새삼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키웠는지 알게 되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작은 망설임이 든 순간 어머니를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을 깎아서 지킨 자식이 제 몸 조금 편하자고 작은 유혹에 쉽게 손을 내민다면 저승에서도 어머니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실 것이다.
어머니를 슬프게 해 드릴 수 없다. 이것을 잊지 않는 이상 어머니는 언제나 내 가슴속에 살아 계신 거라고, 수영은 그렇게 다짐했다.
***
청바지에 짧은 스포츠형 머리의 남자가 카페 앞에서 먼저 수영에게 아는 체했다.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남자다운 매력이 돋보이는 그는 수영이 일주일 전에 그만둔 그곳에 알바 자리를 추천해 준 기문이었다. 그들은 카페로 들어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형, 여기까지 무슨 일로……. 혹시 마스터가 연락했어요?”
“애들한테 들었어. 너 그만뒀다며?”
담배를 피워 무는 그를 보면서 수영은 본론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말해 줄 게 있어서 왔어.”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내가 거기에 너를 추천한 건 나오기 전에 자기 자리를 채워야 하는 규칙이 있어서야. 그래야 마지막 달 페이를 주거든. 물론 마스터 마음에 드는 애를 넘겨줘야 하지. 몇 명을 데려가도 퇴짜를 놓기에 사실 너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데려간 건데…….”
순간 오싹한 한기가 수영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래서 마스터가 너를 오케이 했을 때는 솔직히 너한테 찔리는 마음이 들면서도 후련하기도 했지. 너도 알다시피 거기 페이가 세잖아. 룸에 들어가기 전까지 잠깐 일해도 쏠쏠하니까. 먼저 들으면 거절할 거 같아서 룸 얘기는 안 한 거야. 어차피 일하다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어차피 마스터의 제안을 수락하는 건 네 선택이라고 생각했고.”
“그렇죠.”
수영은 찝찝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고 대답했다. 기문은 목소리를 낮추며 수영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근데 최근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어. 이건 매니저 형한테 들은 건데 마스터가 꽤 오래전부터 널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 내가 소개해 준 애들이 정말 괜찮았는데도 불구하고 너를 데려오라고 퇴짜를 놓은 거였대. 더 놀라운 건 네가 예전에 잠깐 있었다는 그 방 건물 말이야…….”
수영은 점점 밝혀지는 놀라운 얘기에 눈을 크게 뜨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스터 앞으로 되어 있대.”
수영은 크게 놀라 할 말을 잃었다. 봄 학기가 시작하기 전 방을 구하러 편의점 근처의 부동산 집에 들렀을 때 아저씨가 유난히 추천했던 방이 있었다. 급하게 세입자를 찾는다고 아주 싸게 준다고 해서 방을 보고 계약을 했었다. 알고 보니 자신과 계약한 자가 건물 주인이 아니어서 수영은 보증금을 온전히 떼인 적이 있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부동산 사장은 이미 잠적한 상태였고, 신분증도 계약서도 모두 가짜라 잡기 힘들 거라 했다.
“너 그 일 때문에 휴학하기로 한 거라며. 아니었으면 이런 바까지 들어올 생각은 안 했을 거 아니야.”
“그렇죠. 아무래도 거의 한 학기 등록금이 날아갔던 일이었으니까. 근데 그게 마스터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그때 경찰도 건물주랑은 아무 관련 없고, 부동산 사장이 사기꾼이라고 했는데요.”
“나도 정확한 건 몰라. 근데 마스터가 너에게 집착하는 것 같다는 건 분명히 알려 줘야 할 거 같아서. 네가 계속 다녔으면 어차피 네 선택이니 상관없는데 어쨌든 그만뒀으니까 말해 주는 거야.”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 왔다. 수영은 찬물을 따랐다. 컵을 쥔 손이 약하게 떨려 왔다.
***
수영은 고시원부터 옮겼다. 패스트푸드 매장과 편의점 알바는 주말까지만 하기로 하고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만약을 위해서 핸드폰 번호도 바꿔 버렸다.
기문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언가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수영은 두 달간 집요하게 자신을 설득했던 남자가 예상외로 다른 알바생을 추천하라는 말도 없이, 순순히 페이를 정산하고 자신을 놓아 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고시원 건물 앞 가로등 아래에서 수영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늦은 시간 고시원으로 돌아올 때 어두운 길목에서 가끔 그 남자가, 또는 정체 모를 괴한이 튀어나와 자신을 끌고 갈 것 같다는 망상이 들 때가 있었다.
수영은 이달의 운세를 들었던 그날 밤, 고시원 앞에서 주운 동전을 꺼내어 가로등 빛 아래 비추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쌍두 독수리가 새겨진 황금빛 동전. 진짜 황금일 리는 없겠지만, 왠지 행운의 단어가 딱 이 동전으로 나타난 것 같아서 수영은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마치 부적을 가지고 다니는 기분이라 마음이 불안하고 쓸쓸할 때면 주머니에 넣어 둔 동전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요즘에는 가끔 정신 차리고 보면 그 동전을 손으로 꽉 쥐고 있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이 파여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또 잠이 안 오면 어쩌지.’
요즘은 방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그 걱정이다. 전에는 눕기만 해도 기절했었는데 지금은 몸이 녹초가 되어 누워도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잠들어도 가위에 눌린 것처럼 곧 화들짝 놀라며 깨곤 했다.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가끔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익숙한 계단을 올라가 방문을 열려는 순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잠가 둔 문이 열려 있었다. 방 안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정신없이 뒤지고 떠난 흔적들이 역력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잠시 망설였으나 수영은 관리인에게 상황을 알리고 신고를 하기 위해 방을 나왔다. 1층 복도에 내려선 순간 누군가가 달려들어 수영의 얼굴에 무언가를 갖다 댔다. 수영은 정신을 잃었다.
수영은 눈을 떴다. 그는 결박당한 채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창고 벽 쪽에 쓰러져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겨우 앉거나 누워 있을만 한 정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기 직전의 가축을 아무렇게나 처박아 둔 것 같았다. 수영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식하고 급격히 혼란에 빠졌다.
검은 양복을 입은 무표정한 남자가 하루 한 끼 멀건 죽 한 그릇과 물 한 잔을 기계처럼 수영의 발밑에 놓아두고 사라졌다. 수영은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르고, 애원하고, 몸부림쳐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기로 3일을 굶자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수영은 손이 묶여 개처럼 고개를 숙이고 죽과 물을 핥아 먹었다. 미칠 듯한 분노와 자괴감이 수영을 사로잡았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이었다. 수영은 잡혀 온 차림 그대로 그 자리에서 볼일을 보았다. 가슴속에는 수치심과 혐오, 분노 등 온갖 감정이 들끓었다. 그러나 곧 지독한 허기와 악취의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도망쳐야겠다는 확고한 의지는 날이 갈수록 무뎌졌다. 이대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가.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시간은 지독히도 느리게 지나갔다. 하루 한 번 들어오는 남자에게서는 조금의 반응도 엿볼 수 없었다.
분노와 증오는 이윽고 공포와 체념으로 바뀌어 갔다. 수영은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을 느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감각이 없는 상태에서 수영은 애원했다. 머릿속을 채운 것은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제발, 나가게만 해 줘…….”
그것은 수영이 열흘 만에 내뱉은 항복 선언이었다. 이 애원을 이틀간 반복하자 밥을 가지고 오던 남자는 어떤 종이를 들고 와 수영의 지문을 찍고 이름을 쓰게 했다. 지독한 악취와 극악의 몸 상태에 정신이 혼미했던 수영이 문서의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악몽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깨끗이 씻긴 상태로 입은 옷도 바뀌어 있었다. 안도한 것도 잠시, 수영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역시 잠겨 있었다. 천장 밑의 작은 창문은 창살로 막혀 있었다. 반투명 유리로 된 칸막이 안은 화장실이었다. 작은 탁자 위에는 깨끗이 빨아 둔 자신의 옷가지와 주머니에 들어 있던 수첩과 잡동사니, 고시원에 있던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어났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열흘 동안 느꼈던 그 깊은 절망, 슬픔, 분노가 갑자기 머릿속을 뚫고 나올 것처럼 격렬해졌다. 수영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 문 열라고!”
10여 분간 고함치던 수영은 힘이 빠져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기력함, 절망감이 다시 한번 그를 덮쳐 왔다. 이런다고 놓아줄 거면 끌고 오지도 않았으리란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곧 미칠 것 같았다.
찰칵. 문이 열렸다. 앉아 있던 수영의 몸에 막혀 문은 작은 틈새를 두고 벌어졌다. 수영은 그 사이로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간단히 설명하지. 너는 네 어미가 진 빚 5억을 대신해서 갚아야 한다. 이건 네 어미가 쓴 계약서. 이건 네가 쓴 계약서다. 네놈한테 그런 돈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잠시 수영의 반응을 살피던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원금이 5억. 이자는 따로 계산한다. 네놈이 돈을 빨리 갚는다면 이자 부담이 줄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평생 여기서 썩어도 다 갚지 못할 테니 상환 속도가 너무 늦어지면 다른 방법을 취할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몸을 팔 수도 있는 거지. 예를 들면 눈이라든가, 신장이라든가.”
“우리 어머니는 빚 같은 거 지지 않았어!”
“네놈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네 어미는 우리 가게 넘버원이었다. 손님이랑 눈 맞아 달아나기 전에는. 그 남자는 네가 제 애가 아니라는 걸 알고 네 어미를 버렸다. 네 어미가 빚을 다 못 갚고 죽었으니 남은 건 네가 갚아야 하지 않나.”
남자는 가져온 봉투를 뒤집어 살짝 털었다.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진들. 어머니의 젊었을 적 모습이었다. 집에는 단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던, 곱게 단장하고 어떤 남자들과 웃고 있는 모습. 모두 몰래 찍은 듯 누구도 정면을 마주하지 않은 사진들이었다.
“가끔 협박용으로 유용하게 써먹던 사진들이다. 너도 몇몇은 눈에 익을 거다. 전직 장관, 국회 의원, 연예인……. 전대 마스터께서 네 어미를 꽤 아꼈었다. 관대하게 이자까지 면해 주셨지. 지금 마스터는 네놈에게 그런 아량을 베풀 이유는 없으니 다른 이들처럼 받겠다고 하시지만. 더 궁금한 것은?”
넋이 나간 듯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수영은 방 안에 혼자였다.
“인생이 너에게 많은 불행을 안겨 주겠지만, 그로 인해 행복해질 것이고 인생을 축복할 것이며 결국 다른 사람들의 인생도 축복하게 될 테니…….”
- 도스또예프스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중1)
Prologue. 눈보라
눈앞에 있던 원수의 얼굴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암흑 속에 파묻혔다. 수영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깜깜하던 사위는 조금씩 밝아졌다. 조금 전 남자의 침실이 아니었다. 수영은 전혀 낯선 곳에 서 있었다.
광활한 회색 하늘과 하얀 눈이 깔린 대지 사이에서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쳤다. 하늘과 대지는 마치 하나가 된 듯했다. 지평선 끝자락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여러 갈래 뻗어 있는 나무는 거친 바람이 휘몰아쳐도 꿋꿋해 보였다. 눈 밑의 대지에 깊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일까.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자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붉은 열매가 눈 덮인 대지 위에 떨어졌다. 선명하게 붉은 열매가 핏방울처럼 점점이 새하얀 눈 위에 새빨갛게 박혔다. 그리고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노랫소리.
“어째서 자작나무들은 그다지도 웅성대며 소리를 내는가.
어째서 백색 줄기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가.
바람 부는 길가에 기대어 서
그다지도 슬프게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있구나.
길을 걸어가며 드넓은 공간에 나는 기쁘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삶에서 알고 있는 전부일지도.
어째서 나뭇잎들은 그다지도 슬픈 얼굴로 날아다니는가.
외피 속의 영혼을 애무하는가.
심장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또다시, 또다시 대답은 없구나.
자작나무에서 떨어져 내 어깨 위로 내려앉은 작은 잎사귀는
나처럼 나뭇가지와 이별하네.”2)
귓가를 울리는 노랫소리는 이윽고 어떠한 의미가 되어 머릿속으로 전달되었다. 서서히 작아지는 노랫소리와 함께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다.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풀썩. 볼에 맞닿은 눈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슬픔에 잠겨 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Chapter 1. 운명의 굴레 - 선택 (1)
딸깍. 수영은 사물함의 열쇠를 열고 평상복을 꺼내 들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급격한 피로에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은 상대하기 힘든 손님도 없었고,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수영은 유니폼의 바지를 곱게 개어 놓고, 셔츠의 단추를 기계적으로 풀어 내리며 멍하게 생각했다.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다.
어머니의 소원은 수영이 대학을 졸업해서 남들처럼 제대로 취직해 번듯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비록 수중에 남은 2천만 원이라는 돈으로는 4년간 등록금을 내기에도 벅찼지만 어떻게든 버틸 생각이었다. 그래야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1년을 보냈다고 기일마다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생활 한 학기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하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정신없이 지나갔다. 성인이 되어 아르바이트할 수 있는 곳이 많아지자 수영이 선택한 것은 술집 서빙이었다. 학기 중에는 대학 근처의 호프집에서 했지만 방학이 되어 좀 더 급여가 센 곳을 찾다 보니 번화가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아는 형의 추천을 받아 고급 바에서 일하게 되어 몸은 덜 고된 대신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했다.
“어, 아직도 안 갔어? 너도 이것 좀 봐 줄까?”
옷을 갈아입자마자 탈의실 겸 휴게실로 사용하는 방에 두 명의 직원이 들어왔다. 이들은 마감조이기 때문에 두 시간 정도 일을 더 해야 했다.
“뭔데요?”
완전히 지쳐 버렸지만 수영은 애써 미소 지으며 잡지를 들여다보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달의 운세. 이 녀석 이거 잘 챙겨 보잖아.”
“수영이 너 생일이 언제냐? 몇 월?”
“4월 말인데요, 아마 황소자리던가?”
“어, 그래. 여기 있네. 이거 은근히 잘 맞는다니까.”
수영은 그가 손으로 짚어 준 운세를 읽어 보았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시기.
초반에는 고생하지만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여유 있게 생활하라.
행운의 단어 : 독수리, 동전, 금.
“이게 뭐라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수영이 얼굴을 찌푸리자,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피식피식 웃었다.
“이 녀석, 여기저기 끼워 맞춰서 나중에 지나면 꼭 이게 맞았다고 우긴다니까. 그나저나 얼른 들어가 봐. 또 마스터가 부르기 전에.”
수영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이 일하고 있는 바는 정확히 말하면 호스트바와 게이바의 중간 형태로 일반 테이블과 별도로 마련된 룸으로 나뉘어 서비스의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룸에 들어가는 서버는 따로 두어 테이블 서버와는 페이가 천지 차이다. 물론 하는 일도 좀 다르겠지만.
수영을 눈여겨보고 오는 손님들이 늘었다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가끔 룸에서 보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오는 건 곤란했다. 룸에 들어갈 수 있는 손님은 남자만 가능했다. 말하자면 룸은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게이바인 것이다. 서버들 외모가 착하다고 소문이 나 테이블에는 여성들이 주로 오지만 복도로 분리된 룸에서는 남자 손님만 받는다. 출입문도 손님끼리 부딪치지 않도록 따로 되어 있어서 신원이 철저히 보호된다.
수영이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 찰나 매니저가 탈의실 문을 벌컥 열더니 수영을 불렀다.
“마스터의 호출. 오늘은 꼭 보자고 하셨다. 얼른 가 봐.”
휴게실에 있던 두 남자는 수영을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매니저가 나가고 한숨을 푹 내쉰 수영에게 위로를 겸한 조언이 들려왔다.
“정 안 되겠으면 그냥 그만둔다고 해. 뭐, 우리야 원래 게이니까. 간혹 이상한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손님들이 점잖은 편이고, 2차 가고 막 그런 거 아니니까 할 만한데 넌 일반이라며. 여기 말고 또 괜찮은 데 있을 거야.”
수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 휴게실 옆에 마련된 방에 들어가자 마스터라고 불리는 남자가 안락의자에 앉아 장부를 훑어보고 있었다.
“오늘도 수고했다. 거기 앉지.”
“…….”
“그래, 저번에 말한 건 생각해 봤나?”
요즘 일하면서 받고 있던 정신적 스트레스의 원인은 바로 그 제안 때문이다. 수영이 침묵하자 남자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일반 테이블은 일을 배우고 반응이 괜찮으면 룸으로 들어가기 위한 중간 과정이야. 일종의 수습 기간이지.”
돈을 많이 주는 데는 역시 이유가 있다. 일반 테이블에서 계속 일하고 싶지만 이 제안을 거절하면 결국 잘리고 말 것이다. 수영이 여전히 침묵으로 대하자 눈썹을 꿈틀한 남자는 이윽고 씩 웃었다.
“그럼 일도 좀 배우고 적응도 할 겸, 일주일에 한 번씩은 어떻겠나?”
남자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수영을 바라보았다. 수영은 방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매니저 형과 상의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만두겠습니다.”
수영은 짧게 목례를 하고 곧장 방을 빠져나왔다.
번화가의 밤은 화려하다. 열대야 현상으로 잠 못 이루는 시간, 유흥업소들은 반짝이는 네온사인으로 취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수영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툭 치고도 모른 척 지나가는 취한 남자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며 생각했다. 곳곳에 도사리는 수많은 유혹. 그것들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항상 옳은 길만 걸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생은 항상 쉬운 길과 쉽지 않은 길 사이에서 선택을 종용한다.
언젠가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목표가 있다면 가끔은 길을 헤맬지라도 결국에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수영이 어떻게 해서든 대학을 다니고자 하는 것은 어머니의 유언도 있었지만 삶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 뛰는 일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이 소망이 수영의 힘든 하루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다.
수영은 문득 방을 정리하면서 발견했던 어머니의 일기를 떠올렸다. 오래전에 잠깐씩 쓰셨던 일기인 듯 누런색으로 바랜 노트가 어머니의 옷가지에 뒤섞여 나왔다. 언제 썼는지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이가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할 때마다 나는 이 아이가 나를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두려웠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그 의미를 알겠느냐마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상처받는 그 눈을 보면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나도 너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단다.’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얘기했다.
‘너의 아버지는 네가 아주 어려서 갓난아이였을 때 병으로 돌아가셨단다. 하지만 매우 훌륭한 분이셨어. 너를 훌륭하게 키워 달라고 부탁하셨단다.’
이 말을 들려주었던 그 이후 아버지한테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면서 과거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부끄럼 없는 미래를 살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는 수영이 어렸을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게 수영이 아는 전부였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서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나 보다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아이가 학교에서 어머니를 주제로 글을 쓴 걸 보여 줬다. 부끄럽게 돈을 벌어 온 것은 과거로도 충분하다. 세상에 대가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가난할지라도 이 아이의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다.
웃음을 팔고 몸을 팔면서 호사를 누리던 그때보다 어머니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아이가 있는 이때가 더 행복하다.]
점점이 떨어진 눈물에 글씨가 번져 갔다. 어머니의 과거에 대한 충격보다도 새삼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키웠는지 알게 되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작은 망설임이 든 순간 어머니를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을 깎아서 지킨 자식이 제 몸 조금 편하자고 작은 유혹에 쉽게 손을 내민다면 저승에서도 어머니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실 것이다.
어머니를 슬프게 해 드릴 수 없다. 이것을 잊지 않는 이상 어머니는 언제나 내 가슴속에 살아 계신 거라고, 수영은 그렇게 다짐했다.
***
청바지에 짧은 스포츠형 머리의 남자가 카페 앞에서 먼저 수영에게 아는 체했다.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남자다운 매력이 돋보이는 그는 수영이 일주일 전에 그만둔 그곳에 알바 자리를 추천해 준 기문이었다. 그들은 카페로 들어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형, 여기까지 무슨 일로……. 혹시 마스터가 연락했어요?”
“애들한테 들었어. 너 그만뒀다며?”
담배를 피워 무는 그를 보면서 수영은 본론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말해 줄 게 있어서 왔어.”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내가 거기에 너를 추천한 건 나오기 전에 자기 자리를 채워야 하는 규칙이 있어서야. 그래야 마지막 달 페이를 주거든. 물론 마스터 마음에 드는 애를 넘겨줘야 하지. 몇 명을 데려가도 퇴짜를 놓기에 사실 너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데려간 건데…….”
순간 오싹한 한기가 수영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래서 마스터가 너를 오케이 했을 때는 솔직히 너한테 찔리는 마음이 들면서도 후련하기도 했지. 너도 알다시피 거기 페이가 세잖아. 룸에 들어가기 전까지 잠깐 일해도 쏠쏠하니까. 먼저 들으면 거절할 거 같아서 룸 얘기는 안 한 거야. 어차피 일하다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어차피 마스터의 제안을 수락하는 건 네 선택이라고 생각했고.”
“그렇죠.”
수영은 찝찝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고 대답했다. 기문은 목소리를 낮추며 수영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근데 최근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어. 이건 매니저 형한테 들은 건데 마스터가 꽤 오래전부터 널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 내가 소개해 준 애들이 정말 괜찮았는데도 불구하고 너를 데려오라고 퇴짜를 놓은 거였대. 더 놀라운 건 네가 예전에 잠깐 있었다는 그 방 건물 말이야…….”
수영은 점점 밝혀지는 놀라운 얘기에 눈을 크게 뜨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스터 앞으로 되어 있대.”
수영은 크게 놀라 할 말을 잃었다. 봄 학기가 시작하기 전 방을 구하러 편의점 근처의 부동산 집에 들렀을 때 아저씨가 유난히 추천했던 방이 있었다. 급하게 세입자를 찾는다고 아주 싸게 준다고 해서 방을 보고 계약을 했었다. 알고 보니 자신과 계약한 자가 건물 주인이 아니어서 수영은 보증금을 온전히 떼인 적이 있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부동산 사장은 이미 잠적한 상태였고, 신분증도 계약서도 모두 가짜라 잡기 힘들 거라 했다.
“너 그 일 때문에 휴학하기로 한 거라며. 아니었으면 이런 바까지 들어올 생각은 안 했을 거 아니야.”
“그렇죠. 아무래도 거의 한 학기 등록금이 날아갔던 일이었으니까. 근데 그게 마스터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그때 경찰도 건물주랑은 아무 관련 없고, 부동산 사장이 사기꾼이라고 했는데요.”
“나도 정확한 건 몰라. 근데 마스터가 너에게 집착하는 것 같다는 건 분명히 알려 줘야 할 거 같아서. 네가 계속 다녔으면 어차피 네 선택이니 상관없는데 어쨌든 그만뒀으니까 말해 주는 거야.”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 왔다. 수영은 찬물을 따랐다. 컵을 쥔 손이 약하게 떨려 왔다.
***
수영은 고시원부터 옮겼다. 패스트푸드 매장과 편의점 알바는 주말까지만 하기로 하고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만약을 위해서 핸드폰 번호도 바꿔 버렸다.
기문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언가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수영은 두 달간 집요하게 자신을 설득했던 남자가 예상외로 다른 알바생을 추천하라는 말도 없이, 순순히 페이를 정산하고 자신을 놓아 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고시원 건물 앞 가로등 아래에서 수영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늦은 시간 고시원으로 돌아올 때 어두운 길목에서 가끔 그 남자가, 또는 정체 모를 괴한이 튀어나와 자신을 끌고 갈 것 같다는 망상이 들 때가 있었다.
수영은 이달의 운세를 들었던 그날 밤, 고시원 앞에서 주운 동전을 꺼내어 가로등 빛 아래 비추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쌍두 독수리가 새겨진 황금빛 동전. 진짜 황금일 리는 없겠지만, 왠지 행운의 단어가 딱 이 동전으로 나타난 것 같아서 수영은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마치 부적을 가지고 다니는 기분이라 마음이 불안하고 쓸쓸할 때면 주머니에 넣어 둔 동전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요즘에는 가끔 정신 차리고 보면 그 동전을 손으로 꽉 쥐고 있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이 파여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또 잠이 안 오면 어쩌지.’
요즘은 방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그 걱정이다. 전에는 눕기만 해도 기절했었는데 지금은 몸이 녹초가 되어 누워도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잠들어도 가위에 눌린 것처럼 곧 화들짝 놀라며 깨곤 했다.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가끔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익숙한 계단을 올라가 방문을 열려는 순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잠가 둔 문이 열려 있었다. 방 안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정신없이 뒤지고 떠난 흔적들이 역력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잠시 망설였으나 수영은 관리인에게 상황을 알리고 신고를 하기 위해 방을 나왔다. 1층 복도에 내려선 순간 누군가가 달려들어 수영의 얼굴에 무언가를 갖다 댔다. 수영은 정신을 잃었다.
수영은 눈을 떴다. 그는 결박당한 채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창고 벽 쪽에 쓰러져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겨우 앉거나 누워 있을만 한 정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기 직전의 가축을 아무렇게나 처박아 둔 것 같았다. 수영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식하고 급격히 혼란에 빠졌다.
검은 양복을 입은 무표정한 남자가 하루 한 끼 멀건 죽 한 그릇과 물 한 잔을 기계처럼 수영의 발밑에 놓아두고 사라졌다. 수영은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르고, 애원하고, 몸부림쳐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기로 3일을 굶자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수영은 손이 묶여 개처럼 고개를 숙이고 죽과 물을 핥아 먹었다. 미칠 듯한 분노와 자괴감이 수영을 사로잡았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이었다. 수영은 잡혀 온 차림 그대로 그 자리에서 볼일을 보았다. 가슴속에는 수치심과 혐오, 분노 등 온갖 감정이 들끓었다. 그러나 곧 지독한 허기와 악취의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도망쳐야겠다는 확고한 의지는 날이 갈수록 무뎌졌다. 이대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가.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시간은 지독히도 느리게 지나갔다. 하루 한 번 들어오는 남자에게서는 조금의 반응도 엿볼 수 없었다.
분노와 증오는 이윽고 공포와 체념으로 바뀌어 갔다. 수영은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을 느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감각이 없는 상태에서 수영은 애원했다. 머릿속을 채운 것은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제발, 나가게만 해 줘…….”
그것은 수영이 열흘 만에 내뱉은 항복 선언이었다. 이 애원을 이틀간 반복하자 밥을 가지고 오던 남자는 어떤 종이를 들고 와 수영의 지문을 찍고 이름을 쓰게 했다. 지독한 악취와 극악의 몸 상태에 정신이 혼미했던 수영이 문서의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악몽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깨끗이 씻긴 상태로 입은 옷도 바뀌어 있었다. 안도한 것도 잠시, 수영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역시 잠겨 있었다. 천장 밑의 작은 창문은 창살로 막혀 있었다. 반투명 유리로 된 칸막이 안은 화장실이었다. 작은 탁자 위에는 깨끗이 빨아 둔 자신의 옷가지와 주머니에 들어 있던 수첩과 잡동사니, 고시원에 있던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어났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열흘 동안 느꼈던 그 깊은 절망, 슬픔, 분노가 갑자기 머릿속을 뚫고 나올 것처럼 격렬해졌다. 수영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 문 열라고!”
10여 분간 고함치던 수영은 힘이 빠져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기력함, 절망감이 다시 한번 그를 덮쳐 왔다. 이런다고 놓아줄 거면 끌고 오지도 않았으리란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곧 미칠 것 같았다.
찰칵. 문이 열렸다. 앉아 있던 수영의 몸에 막혀 문은 작은 틈새를 두고 벌어졌다. 수영은 그 사이로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간단히 설명하지. 너는 네 어미가 진 빚 5억을 대신해서 갚아야 한다. 이건 네 어미가 쓴 계약서. 이건 네가 쓴 계약서다. 네놈한테 그런 돈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잠시 수영의 반응을 살피던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원금이 5억. 이자는 따로 계산한다. 네놈이 돈을 빨리 갚는다면 이자 부담이 줄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평생 여기서 썩어도 다 갚지 못할 테니 상환 속도가 너무 늦어지면 다른 방법을 취할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몸을 팔 수도 있는 거지. 예를 들면 눈이라든가, 신장이라든가.”
“우리 어머니는 빚 같은 거 지지 않았어!”
“네놈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네 어미는 우리 가게 넘버원이었다. 손님이랑 눈 맞아 달아나기 전에는. 그 남자는 네가 제 애가 아니라는 걸 알고 네 어미를 버렸다. 네 어미가 빚을 다 못 갚고 죽었으니 남은 건 네가 갚아야 하지 않나.”
남자는 가져온 봉투를 뒤집어 살짝 털었다.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진들. 어머니의 젊었을 적 모습이었다. 집에는 단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던, 곱게 단장하고 어떤 남자들과 웃고 있는 모습. 모두 몰래 찍은 듯 누구도 정면을 마주하지 않은 사진들이었다.
“가끔 협박용으로 유용하게 써먹던 사진들이다. 너도 몇몇은 눈에 익을 거다. 전직 장관, 국회 의원, 연예인……. 전대 마스터께서 네 어미를 꽤 아꼈었다. 관대하게 이자까지 면해 주셨지. 지금 마스터는 네놈에게 그런 아량을 베풀 이유는 없으니 다른 이들처럼 받겠다고 하시지만. 더 궁금한 것은?”
넋이 나간 듯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수영은 방 안에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