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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피의 제국 2화
Chapter 1. 운명의 굴레 - 선택 (2)


***

이곳에 온 지 이틀째 된 오후 수영은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복도를 기준으로 양쪽에 네 개의 방문이 있었다. 복도 끝으로 나가자 투명한 창문이 길가로 나 있는 작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는 여자들 몇 명이 야한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도 비슷한 모습의 건물이 죽 이어져 있었다. 동네 전체가 사창가였다.
여자들의 말에 의하면 한 가게당 한 명의 관리자와 두세 명의 경호원이 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순찰하는 이는 열 명 정도. 도망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해 줬다. 괜한 시도를 하다 잡히면 더 최악인 곳으로 갈 수도 있고 죽도록 맞을 테니 얌전히 지내라고 했다.
수영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는 남자인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수영은 무의식적으로 가게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나타났는지 검은 옷의 남자가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손님이 없는 낮에는 수영이 가게 구석에 앉아 있는 것을 허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거리에 어둠이 깔리고 슬슬 손님들이 길가에 나타나면 영업에 방해된다고 눈치를 주어서 수영은 방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방에 들어가면 밖에서 문이 잠기고, 수영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윽고 손님을 맞은 여자들이 남자를 이끌고 방 안에 들어가는 소리, 옷을 벗는 소리, 내지르는 신음과 짐승처럼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 대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주로 마음에도 없는 애교를 늘어놓는 여자들과 세상에 불만 가득한 남자들의 투덜거림이었다.
손님들이 새벽까지 이어져서 수영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이 들라치면 곧 여자의 높은 교성에 깨기 일쑤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런 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고통이었다. 방 안에는 TV도, 라디오도 아무것도 없었다. 수영은 책을 펼쳐 들었다. 그거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었다.
수영은 여전히 현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여자였다면, 말로만 듣던 인신매매라는 것을 인정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수영은 남자였고, 여기는 여자들이 몸을 파는 사창가였다. 자신을 이런 곳에 가두어 둔 남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수영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한때는 어머니도 이런 곳에 있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한여름인데도 오싹한 소름이 일었다. 어머니는 선이 곱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 고운 얼굴에도 서서히 고생의 흔적들이 내려앉아 거칠어진 피부와 주름진 얼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을 때 접히는 눈이 처연하게 아름다웠던 분이었다.
어머니는 알고 있을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괴물이 자신을 삼키고 있다는 걸. 수영은 오늘도 귀를 막고, 눈을 꼭 감은 채 잠을 청했다.

저녁을 먹은 뒤로 방에 앉아 있는 수영의 귀에 오늘도 어김없이 여러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여자들의 비명, 남자들이 짐승처럼 헐떡이는 소리, 그리고 의미 모를 말소리. 이상한 건 점점 그런 소리 가운데 자신의 거친 숨소리도 포함되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 수영은 온몸이 저릿함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순간 찰칵,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 들어왔다.
“마스터…….”
신음을 흘리듯 수영은 중얼거렸다. 어두운 불빛 아래 얼굴이 붉어진 수영을 보고 남자는 문을 닫았다.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 두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 남자의 행동에 수영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오랜만이구나.”
남자는 작은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살짝 걸쳐 앉았다. 수영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작은 토끼처럼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주시하며 잔뜩 긴장했다. 남자는 맹수처럼 나른하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수영을 유심히 관찰하다 이내 짙은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네 어미가 우리 가게의 넘버원이었다는 얘기는 들었나? 나는 네 어미를 사랑했다. 그 화사함, 따뜻함, 순수함. 망가뜨리고 싶었지. 그런데 망가지지 않아서 이상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지금도 참 궁금해.”
수영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 걸 보면서 남자는 천천히 일어섰다. 이 좁은 방 안에는 도망갈 곳도 없었다. 화장실도 투명한 유리막으로 나뉘어 있을 뿐 문은 없었다.
“그녀가 차라리 너처럼 남자였다면 아버지 눈에 들기도 전에 내가 가둬놓고 길들였을 텐데…….”
느릿하게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보려 했지만 이미 잠긴 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영의 뒤로 바짝 다가온 남자가 뒤돌아보는 수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구나.”
“저리 꺼져! 이 미친 새끼, 윽!”
수영의 양손을 그러잡은 남자는 수영을 침대에 던지듯 밀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온몸을 간질이는 듯한 감각, 하반신에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자꾸 숨이 찼다. 남자가 내뱉는 숨결이 귓가를 간질이며 오싹한 느낌을 전달했다. 순간 감전된 것처럼 전류 같은 흥분이 몸을 관통했다. 수영은 붉어진 눈가로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개자식아! 나한테 무슨 짓을……!”
그는 수영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목을 한 손으로 모아 쥐고 무릎으로 허벅지를 내리눌렀다. 그런 감각조차 자극으로 전환되어 수영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며 몸을 비틀어 댔다. 분명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수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진정한 공포에 몸을 떨었다.
얇은 면 티셔츠와 반바지는 속옷과 함께 순식간에 벗겨졌다. 남자는 흥분을 감추지 않고 수영의 얼굴을 빙글거리며 바라보다가 혀를 내밀었다.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파충류의 혀에 닿은 것처럼 수영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쯧, 민감한 몸에 약을 지나치게 썼군. 뭐, 어쨌든 즐거운 시간이 되겠구나.”
남자는 웃었다. 진정한 악몽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수영은 눈을 떴다. 지독한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고시원의 방 안이길, 눈 뜨기 전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빛바랜 녹색 잔무늬가 그려진 벽지와 붉은 조명뿐이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문득 탁자 위에 놓인 전자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허억…….”
욱신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키자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남자에게 유린당한 곳이 상상도 못할 만큼 아팠다. 전등이 깜빡이는 것처럼 남자와의 시간이 뇌리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수영은 이를 악물었다.
“흐으윽…….”
자신이 송두리째 뜯기고, 짓밟힌 기분에 해소할 수 없는 분노가 새까만 석유처럼 가슴속에서 쿨럭쿨럭 솟아 나왔다. 그 더럽고 끈적거리는 액체로 온몸이 뒤덮이는 것 같아 숨이 막혀 왔다.
“으윽! 컥…….”
수영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걸어가 변기를 부여잡고 속을 게워 냈다.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노란 위액과 멀건 액체, 밥알 몇 개가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수영은 입을 헹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눕자마자 다시 그 남자와 자신의 신음, 끔찍할 정도의 쾌감이 떠올랐다.
“아아아아아악!”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질렀다. 수영은 미쳐 날뛰었다. 물건을 집어 던지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온 힘을 쥐어짜 발악하던 수영은 곧 엉망이 된 방 위로 쓰러졌다.

남자가 세 번째로 수영을 능욕했던 날 밤, 긴 정사로 몸도 마음도 지쳐 버린 수영에게 남자는 노트북으로 동영상을 보여 줬다. 그의 얼굴은 숨길 수 없는 기대와 흥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수영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동영상은 두 남녀의 정사 장면이었다. 멀리서 초점이 잡힌 듯 얼굴이 흐릿하던 영상은 점점 클로즈업되면서 선명해졌다. 혼미한 정신으로 동영상을 응시하던 수영의 얼굴에는 순간 경악의 표정이 떠올랐다. 시트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친 새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노트북을 향해 달려들자 수영을 막은 남자는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다고 네 어미의 과거가 없어질 것 같나? 어미를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일부러 찾아왔더니 섭섭하군.”
수영의 눈이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듯 붉게 충혈된 것을 남자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반응이 수영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 개새끼야!”
수영이 있는 힘껏 그의 팔을 뿌리치자 남자가 한 발 물러섰다.
“아직 힘이 남나 보군. 네 체력을 고려해서 좀 봐주려고 했더니. 아, 어머니와 아들이 한방에서 뒹구는 설정도 괜찮겠구나. 비록 한쪽은 고인이 됐지만.”
“닥쳐! 죽여 버릴 거야!”
이성을 잃고 남자에게 달려든 수영은 남자의 손에 주먹이 막히자 발로 남자의 정강이를 찼다. 수영의 온 힘이 실린 발길질도 큰 타격이 없었는지 남자는 미간을 꿈틀했을 뿐이다. 그러나 화는 제대로 돋운 듯했다.
“이것 참 색다른 반응이라 재미있구나. 가벼운 앙탈 정도는 봐주려 했지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남자는 순식간에 수영의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흐윽!”
“힘을 많이 뺀 거니 엄살떨지 마라. 정말로 나를 죽이고 싶다면 말이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수영의 양손을 한 손으로 결박한 남자는 수영의 상체를 침대에 눌렀다. 매트에 푹 파묻힌 수영의 몸 위로 올라탄 그는 다른 한 손으로 수영의 비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어미랑 아들이 남자를 나눠 가지면 뭐가 되는 걸까. 구멍동서?”
그 말에 수영은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비웃음을 머금었던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눈이 점차 살기를 띠었다.
“열 받냐? 겨우 네 얼굴에 침 뱉었다고? 너같이 타인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놈들은 모두 박멸시켜야 돼. 퉷.”
수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의 커다란 손이 수영의 얼굴을 갈겼다. 철썩, 철썩, 철썩. 수영의 고개가 돌아가면서 피가 튀었다. 터진 입과 코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개돼지만도 못한 새끼. 사회의 쓰레기. 큭!”
남자의 손이 수영의 목을 움켜쥐었다. 강하게 조르는 힘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그래, 내가 네놈을 죽일 수 없다면 차라리 네가 날 죽여라. 적어도 다시 네놈 멋대로 날 다룰 수는 없을 테니…….’
수영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간 순간 남자의 이성이 돌아왔다. 갑자기 들어온 산소로 수영이 심하게 기침하는 것을 남자는 차가운 눈으로 지켜봤다.
“그래. 이런 것도 나쁘진 않구나. 길들이는 재미가 있으니…….”
남자는 어느새 본래의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수영을 비웃고 있었다.
“경고하는데 또다시 함부로 입을 놀리면…….”
피식, 수영이 그를 비웃으며 말을 끊었다.
“뭘 어쩔 거지? 내가 여기서 더 잃을 게 뭐가 있다고.”
“네 옆방에 사는 년부터 산 채로 장기를 뜯어 주마. 네 눈앞에서.”
흠칫, 수영의 표정이 굳은 걸 확인한 남자는 수영의 머리카락을 잡아채 거칠게 들어 올렸다. 그가 귓가에 으르렁대듯 말했다.
“설마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고 외면하지는 않겠지? 그년 장기 떼다 파는 만큼 네 빚을 감해 줄 테니 어디 한번 또 마음껏 떠들어 보려무나.”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수영은 대답했다. 한껏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좋아. 그럼 질문 하나 하지. 네놈 말고 다른 손님은 왜 못 받게 하는 거지? 네놈이랑 한 번 한 걸 천만 원을 쳐준다고 해도 필요 없으니까 다른 놈들 불러 줘.”
“테크닉도 형편없는 주제에 웃기는군. 네가 날 충분히 만족시켜 준다면 생각해 보지.”
“개새……. 큭!”
수영의 얼굴을 다시 한번 후려친 남자가 낮게 경고했다.
“마지막 경고다. 함부로 입 놀리지 마.”
“당신이랑 한 건 계산하고 있는 거야? 아, 그냥 계산 안 해도 될 거 같아.”
남자는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옷을 갖춰 입었다. 수영은 일어나 앉아 팔짱을 끼고 남자를 주시했다. 다시 도발에 걸려들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만 한마디를 더 보탰다.
“생각해 보니까 당신이랑 한 건 그냥 개에 물렸다고 치는 게 낫겠어. 미. 친. 개.”
쾅. 거칠게 닫힌 문 뒤에서 수영은 웃었다.
‘그래. 미친개가 날뛰어도 나는 나다. 나를 잃지 말자.’
비록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한 줌의 희망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수영은 중학생이었던 어느 겨울 어머니의 야채 장사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몇 날 며칠을 맞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버텼던 오기를 떠올렸다. 여기서 부러질 수 없다고, 독하게 마음먹고 버틴 그 시간 덕분에 어머니가 다시 자리를 털고 나오실 때 믿음직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얻어맞은 얼굴로 집에 들어가도 일부러 아는 척하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수영이 자리를 지키는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게 되자 고맙다고, 단 한 마디를 하셨다. 그날을 떠올리며 수영은 엷은 미소를 띠고 잠이 들었다.

***

“잠깐 나 좀 보자.”
이모라고 불리는 여자는 수영이 보이지 않으려는 상처까지 꼼꼼히 치료하고 식사도 거르지 않도록 잔소리를 하며 챙겨 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말없이 수영을 치료하고 나갔던 그녀가 잠시 후 심각한 표정으로 수영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려운 얘기를 꺼낼 모양인 듯 수영을 보는 표정이 엄격했다. 잠시 심호흡을 한 그녀는 수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갑자기 손을 들어 수영의 뺨을 철썩 때렸다. 간밤의 소동 때문에 붓고 멍이 든 수영의 얼굴에 또 한 번 모진 손자국이 남았다. 여자의 가슴에도 지끈거리는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보는 수영의 눈에는 분노나 울분보다는 의문만이 가득했다. 어머니를 잃고 그 연령대 여인의 손길이 더욱 그리웠던 수영은 비록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일지라도 그 손길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잘 들어. 아까는 일단 네 상처가 먼저고, 네가 지쳐 보여 무슨 말을 해도 귀에 안 들릴 것 같아 참았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 저기 규혁이 책임이니까 나도 신경 안 썼어. 하지만 사장한테 대드는 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칙-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가는 모양을 수영은 눈으로 좇았다. 그녀가 깊이 빨아들였다 내뱉은 담배 연기는 뿌옇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너 때문에 잔뜩 화가 난 사장이 끝방에서 자고 있던 유진이를 끌고 갔어. 소리도 못 지르게 재갈까지 물려서. 나보고 이런 꼴 더 보기 싫으면 네 교육을 잘 시켜야 할 거라고 하더군. 내가 무릎 꿇고 빌며 매달렸는데…….”
그녀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매달렸다.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수영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 애는 자기 동생들이 굶어 죽는 꼴 못 보겠다고 술집에서 일하다가 여기까지 온 애야. 비록 이런 데서 몸 파는 년 소리를 듣지만 주말에는 꼭 동생들 보러 가서 생활비 쥐여 주는 낙으로 사는 애인데…….”
수영은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굳은 믿음 위에 점점 죄책감이 번져 가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어째서 정당한 저항이 이러한 비난의 화살로 돌아와야 하는가. 그자의 악마 같은 짓 때문에 왜 자신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이 수영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애는 어렸을 때 버려져서 그 동생들도 자기 친동생이 아니야. 고아원에서 같이 자란 애들이지. 고아원이 망하고 또 버림받아서 길거리에 나앉게 되자 이런 일을 시작한 거고.”
“유진 누나가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건 몰랐지만 그건 그 미친놈이 한 짓이지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는 피해자라고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이해를 못 하는구나. 너는 절대 여기서 벗어날 수 없어. 네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굴면 네 주변 사람들, 특히 우리 애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거다. 한마디로 우린 공동 운명체인 거지.”
수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정신이 멍해짐을 느꼈다.
“이모! 제가 왜 제 탓으로 다친 것도 아닌 사람 때문에 발버둥도 못 쳐 보고 개미처럼 밟혀야 한다는 거죠? 제가 왜 그 미친놈한테!”
수영은 말로도 표현 못 할 답답함과 분노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이 빠진 수렁은 생각보다 더 깊고, 어둡고, 질척했다. 그것을 깨닫자 어제 잠깐 솟아올랐던 한 줌의 희망이 재로 변해 바람에 흩어져 버렸다.
그녀는 수영을 잠시 쳐다보다 잘 알아들었으리라 판단하고 일어섰다.
“이모. 저기, 유진 누나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녀는 수영이 유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약점이 되는 걸 알면서도 독해질 수 없는 것이 약자의 운명일까.
“싸구려 포르노 배우로 팔려 갔어. 나도 그 이상은 몰라.”
그 남자 말처럼 장기를 뜯어내지 않았음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수영은 허탈하게 웃었다.
“별의별 학대를 당하다가 몸이 다 망가지면 섬이나 어딘가에 팔아 버리겠지. 병에 걸려 일찍 죽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분명한 건 네가 또다시 헛짓거리하면 또 다른 애가 그런 꼴이 날 거라는 거다.”
굳은 표정의 수영을 뒤로하고, 그녀는 문을 닫았다.

***

붉은 루주를 짙게 칠하고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모! 도대체 얘는 뭐야? 왜 이런 애가 여기에 있는 건데? 여기가 무슨 호모들 오는 덴 줄 알아?”
곧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구석에 앉아 있던 수영의 몸이 움찔했다. 가게를 관리하는 이모가 침묵해서 수영에 대한 얘기는 쉬쉬했지만 오늘따라 손님들이 뜸하자 여자들 중 한 명이 신경질을 낸 것이다. 그녀는 친하게 지냈던 유진이 수영과 관련된 일 때문에 가게를 옮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모한테 물어보아도 자세한 사정은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가게 안쪽에 앉아 있던 이모라 불린 여자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너는 들어가 있어라.”
그녀가 고갯짓을 하자 수영은 말없이 작게 난 통로로 사라졌다.
“나도 이해가 안 돼. 쟤가 여기서 하는 일이 도대체 뭐야? 손님을 받는 것도 아니고?”
다른 여자가 수영을 따라 복도로 들어가는 규혁 뒤에서 물었다. 그에게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그가 말없이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자 남은 여자들은 얼굴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