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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피의 제국 3화
Chapter 1. 운명의 굴레 - 선택 (3)
“정말 맘에 안 들어. 처음에는 어린 나이에 무슨 사정으로 여기까지 들어왔나 불쌍했었는데 말도 없고, 민폐나 끼치고. 저 애가 구석에 나와 쪼그려 있는 바람에 분위기도 구질구질하고, 장사도 안되는 것 같잖아. 게다가 곧 떠날 사람처럼 뻣뻣하게 구는 태도도 재수 없어. 도망만 지금 몇 번째야? 그것도 멍청하게 대낮에 그 남자가 안 본다고 뛰어나가다니.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신경질을 냈던 여자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녀는 정말로 수영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녀도, 다른 이들도 처음에는 몇 번이고 이곳에서 도망치려 했다. 다만 진지하게 계획을 짜서 목숨을 걸고 발버둥 쳤던 자신들과는 달리 대낮에 뛰쳐나가는 멍청한 행동에 질렸을 뿐이다.
게다가 그렇게 벌써 한 달 동안 세 번이나 뛰쳐나갔는데 그 꼬맹이를 따라다니는 남자는 그저 말없이 붙잡아 끌고 올 뿐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해 볼 테면 해 봐라, 얼마든지 잡아 와 주마. 그런 태도였다. 자신들이었다면 몇 날 며칠 살려 달라고 울부짖을 때까지 폭력을 퍼부었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아이가 조금 다가오려 해도 한쪽 구석에 묵묵히 서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규혁의 존재가 불편하게 느껴져 여자들이 먼저 접근을 꺼렸다. 위험에 대한 그녀들의 육감은 남달랐기에 굳이 말이 아닌 눈빛으로도 그 경고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들의 사장은 그 꼬맹이한테 불필요한 손길이 닿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과도한 보호, 특별 취급이 역겨웠다.
손님도 받지 않는 주제에 자신과 같은 창녀와 함께 있는 모습이 진저리 치게 싫었다. 지나가는 남자들을 어떻게든 붙잡고 꼬여 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자신처럼 망가지고 타락하길 바라는 추한 마음을 발견할 때마다 그 아이가 더 증오스러워졌다.
자신도 저렇게 순수할 때가 있었다. 잊고 살았던 그 시절을 상기하는 행위 자체가 그녀들에게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 이모라고 불린 여자가 말을 꺼냈다.
“여기에 들어온 이상 마찬가지야. 그건 너희들이 더 잘 알지 않냐? 그러니까 괜히 신경질 부리지 마.”
그녀의 말에 모두 사나운 표정을 풀었다. 그녀의 말대로다. 지금은 자신들과 달라 보인다고 해도 결국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들처럼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그녀들은 모두 침묵했다. 수영의 처지가 자신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동질감, 그에 따른 서글픔과 무기력함, 연민의 감정이 혼합된 무거운 침묵이었다.
규혁은 수영의 방문을 잠근 후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수영이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수영이 방 안에 있는 동안은 이중으로 문을 잠갔다. 두꺼운 창살은 시멘트에 견고하게 박혀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수영이 유리문을 열고 길거리로 나갈 틈을 주었다.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어도 사람은 ‘만약’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마음 자체를 포기시켜야 한다. 몇 번이고 도망쳐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뿐이도록.
그렇게 확인한 사실은 그 누가 알려 준 것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진실이 되는 법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이 아이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될까. 절망할 것인가, 현실에 타협할 것인가. 점점 미치게 될지도 모른다. 또는 셋 다일 수도 있지. 규혁은 그리될 거라 확신하면서도 그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독서만이 수영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위안이었다. 규혁은 가끔 수영의 방에 새로운 책을 가져다 놓았다. 아마 수영이 미쳐서 발악하는 걸 방지하고 자신의 시간에 무뎌지라는 의도일 것이다. 수영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순응할 수 없다는 오기가 샘솟았다.
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머니 속의 동전을 꺼내 보았다. 희미한 불빛 아래 반짝 빛나는 금빛 표면에 새겨진 독수리의 날개가 부러웠다. 아무리 있는 힘껏 달려도 금세 주변 가게에서 남자들이 뛰쳐나와 잡힐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수영은 말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간절히 빌었었다.
‘날개라도 생겨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순간 쥐고 있던 동전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빛 때문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수영에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기의 울림이 아닌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목소리가.
-다른 삶을 살 기회를 주겠다.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감았던 눈을 뜨자 손바닥에 놓인 동전에서 나온 황금빛이 쌍두 독수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살짝 퍼덕이자 금빛으로 빛나는 가루가 반짝이며 떨어지다 사라졌다.
-기회를 잡겠는가?
붉게 타오르는 두 쌍의 눈에 정신을 빼앗겼던 수영은 다시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곧 그 목소리가 전한 의미를 깨닫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잡겠어!”
독수리의 눈이 더욱 붉게 타올랐다. 순식간에 불덩이로 화한 독수리 형상은 수영의 손바닥 위에 놓인 동전으로 흡수되었다.
“아아아악!”
수영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계속해서 느껴지던 통증은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일시에 사라졌다. 수영은 아픔에 감았던 눈을 떴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가게에 딸린 방이 아니었다. 은은하게 켜진 할로겐 조명 아래 고급스러운 벽지와 대리석 바닥으로 장식된 복도였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곳에 서 있는 것인지 수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복도 끝에 살짝 열린 방문이 보였다. 수영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리로 걸어갔다. 묵직한 원목으로 된 문은 살짝 밀자 조용히 열렸다. 그 안으로 발을 들이자 커다란 침대와 한쪽 벽면에 빼곡히 장식된 단도, 장검, 총기 등이 보였다. 반대쪽 벽면은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면 창이었다.
수영은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 반쯤 쳐진 커튼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 위로 길게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숨죽이며 다가간 수영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그 남자였다.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한 독수리 형상의 존재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이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이 남자 밑에 깔려 신음을 내지를 때보다 이자가 어머니의 정사 장면을 낱낱이 찍은 그 비디오를 보여 주며 자신의 반응을 관찰할 때 수영은 진정으로 살의를 품었다.
이자만 없다면 자신도 유진 누나도 다른 사람들도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자가 죽어 없어지는 것, 그것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거다. 이렇게 수없이 생각했던 자신의 마음을 그 존재는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문득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수영은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날카로운 단도를 발견했다. 그 순간 남자를 향한 격렬한 증오와 복수심이 가슴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고요하게 잠든 얼굴 위로 자신을 능욕하던 남자의 광기로 얼룩진 눈빛, 비뚤어진 미소로 일그러진 입가 등이 덧씌워졌다.
떠올리는 것조차 혐오스러운 커다랗고 징그러웠던 양물. 그것이 자신을 꿰뚫었을 때의 감각이 다시금 떠오르자 수영은 망설임 없이 단도를 집어 들었다.
신이 준 단 한 번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두 번은 있을 수 없다. 단도를 남자의 얼굴 위로 집어 든 찰나, 이대로 목에 꽂기만 하면 되는 그 순간이 수영에게는 영겁처럼 느껴졌다.
왜 이 순간 자신은 망설이는 것일까.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기뻐하실까 슬퍼하실까.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던 목소리는 이윽고 한목소리로 합쳐졌다.
‘죽여 버려! 어머니도 이 녀석 때문에 고통받았어. 많은 사람이 이자 때문에 괴로워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하지만 수영은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버러지 같은 인간이라도 살 권리가 있기 때문에? 자신은 누군가의 목숨을 끊을 권리가 없기 때문에? 죄책감? 사람을 죽인다는 두려움 때문에?
수영의 손에 힘이 빠지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슬픔에 잠긴 얼굴 때문이었다.
단도가 대리석 바닥에 ‘쨍’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갑자기 수영의 눈앞에 황금빛 쌍두 독수리가 나타나 수영을 집어삼켰다.
-너는 시험을 통과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수영은 정신을 잃었다.
***
수영의 비명이 들리자마자 규혁은 곧장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자물쇠를 풀었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문의 손잡이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비명이 뚝 끊겼다. 문에서 느껴지던 열기도 사라졌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에 수영은 없었다. 방 안은 쇠창살도 멀쩡하게 달린 채 그대로였다. 규혁은 정신이 나간 듯이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기계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마스터.”
-CCTV를 확인해 봤는데 꺼져 있더군. 무슨 일이지?
“그게……. 수영이 사라졌습니다.”
-농담하나?
“정말입니다.”
끊겨 버린 핸드폰을 쳐다보며 규혁은 한숨을 쉬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순수한 인간적 호의를 보여 주었던 수영의 어머니. 그녀를 닮은 수영을 발견한 이후 그의 탈출을 남몰래 바라 왔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규혁의 시선은 탁자 위에 놓인 종이에 머물렀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생이 너에게 많은 불행을 안겨 주겠지만, 그로 인해 행복해질 것이고 인생을 축복할 것이며 결국 다른 사람들의 인생도 축복하게 될 테니…….]
Chapter 2. 루시엔의 겨울 - 고난 (1)
수영은 작년 늦가을 첫눈이 온 날 제국의 북쪽 끝, 변경의 유형수 마을 라꼬프에서 눈 위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그를 발견한 안시스는 수영을 정성껏 돌봤다. 제국에서는 보기 드문 검은 머리 때문에 수영의 존재는 금세 화제가 되었다.
제국의 대부분은 넓은 평원과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북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점점 높아져 그 끝은 매우 높고 험준한 산맥들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 첫 번째 산맥을 오르면 높은 산줄기들이 끝없이 펼쳐진 산맥의 바다가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뜻의 ‘네바스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산맥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소수의 부족이 흩어져 산다는 것만 알 뿐이다.
안시스는 관리에게 수영이 네바스나에 살고 있는 부족의 일행이라고 설명했다. 아마도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곳까지 흘러온 모양이라고도 덧붙였다. 관리는 매우 흥미로워했지만 수영이 고열로 기억을 잃었다고 하자 실망했고, 곧 관심에서 지워 버렸다.
정말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제국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수영에게 안시스는 먼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수영의 앞 음절을 딴 ‘수아라엔’이라는 이름이었다. 새로운 신분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제국에서 쓰는 형식으로 만든 이름이었다. 수영은 ‘아란’이라는 애칭에 점점 익숙해졌다.
수영은 창고에서 밤새 쓸 장작을 가져오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에 태양이 붉게 타오르면서 점점 지평선 너머로 뒷걸음치고 있었다.
“안시스, 일어나서 죽 좀 드세요.”
20년이라는 길고 가혹했던 유형 생활을 마친 그는 아직 쉰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인처럼 하얗게 센 머리와 깊게 팬 잔주름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얼마 전 초겨울에 쓰러진 그는 차츰 병세가 악화되어 정신을 차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수영은 침대 옆에 앉아 조심히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한 숟갈씩 정성스럽게 죽을 먹였다. 반은 흘리면서도 수영의 인내 때문인지 점점 그릇은 비워졌다. 수영은 안시스를 다시 벽에 기대게 하고 그릇을 치우려고 일어났다. 그때 그가 수영의 손을 붙잡았다. 아픈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악력이었다.
“아란.”
긴장한 얼굴로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한 달은 말하는 것도 힘겨워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한 대화를 해 왔던 그였다. 그러나 오늘 그의 눈은 마치 청년처럼 생기 있게 반짝였다.
“이제 곧 마지막일 것 같구나.”
“아, 안시스!”
어느새 슬픔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수영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떨리는 팔을 들어 수영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곳은 앞으로도 네가 머물 곳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 이곳을 떠나거라.”
“죽는다니……. 그런 말 마세요.”
그는 자애로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죽는 건 슬픈 일이 아니란다. 내 명은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어. 이제 곧 그를, 루시크를 만날 수 있으니 기쁘구나.”
얼마 만인지 모를 고요한 숨소리가 그의 폐부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이곳으로 온 것은 신의 뜻이니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거다. 세상으로 나가거라. 큰 고난과 고통을 만나겠지만 결국은 행복해질 거다. 고난 속에 행복이 있단다. 내 말을 믿으렴.”
그는 눈을 감았다. 침대 옆에서 타오르는 촛불이 고요하게 잠든 안시스의 얼굴을 비췄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모습이 그 위에 겹쳐졌다. 자신도 모르게 항상 그리워하고 궁금해했던 아버지의 정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을 예감하자 가슴이 저려 왔다. 수영은 그 곁에서 떠날 수 없었다.
짹짹, 푸드득. 창가에 작은 새 몇 마리가 지저귀다 인기척에 놀라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영은 침대 모서리에 기대어 잠을 자다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뿌연 시야 너머 문가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누, 누구냐!”
마을에서 보지 못한 전혀 낯선 얼굴이었다. 수영은 안시스의 침대를 막아서며 방어할 만한 물건을 찾다가 불현듯 스치는 예감에 침대 쪽을 돌아봤다. 수영은 안시스의 코밑에 떨리는 손가락을 대었다. 내쉬는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한 발짝 다가오자 음영 진 얼굴이 드러났다.
“간발의 차이로 마지막 인사를 못 드렸군.”
미처 수영이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남자는 성큼 걸어와 안시스의 싸늘하게 식은 이마에 키스했다.
“신의 곁으로 편안히 가시길.”
장례 절차는 간단했다. 마을의 구성원들이 모두 모여 당국의 관리와 그가 부른 사제의 기도를 듣고 장송곡을 부른다. 그리고 시신을 흰 천에 감싸 숲속에 놓아두고 다시 한번 기도한다. 이번에는 대지가 죽은 자를 받아 주길 바라는 기도이다.
제국은 지방마다 장례 관습이 달랐다. 제국 최북단인 이곳에서는 얼어붙은 땅을 팔 수가 없어 눈 위에 천을 감싼 시신을 내려놓는다. 그러면 혹독한 겨울을 나는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그들을 통해 죽은 자는 대지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안시스는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은 모두 일손을 놓고 고인을 추억하며 조용히 지내는 것이 이들의 관습이었다. 수영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천천히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짧았지만 그와의 추억과 정이 든 오두막을 보니 어머니를 보냈던 때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끼익. 수영은 두꺼운 나무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불쑥 찾아온 남자는 의자에 앉아 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안시스의 조카가 수도에서 보낸 사자였다. 안시스는 죽기 전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 수영을 부탁했다고 한다. 남자는 수영을 수도로 데려가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장례는 무사히 마쳤나?”
“네.”
“내일 출발하겠다. 관리에게는 이미 말해 뒀어. 인사할 시간은 주겠다. 출발은 점심 이후로 하지.”
“그렇게 일찍?”
“시간이 없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수영은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열병을 앓은 자신을 간호해 준 안시스에게도 두려움에 차 날을 세웠다. 조금의 접촉에도 소스라쳤다. 그런 수영이 이토록 밝아진 것은 안시스 덕분이었다. 수영은 그의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야 이곳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한다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본 낯선 사내와 단둘이 한 달간 여행해야 한다니 두려움이 앞섰다.
무엇보다 안시스의 예언 같은 유언 때문에 수영은 망설였다. 큰 고난과 고통을 만날 거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지금처럼 그저 아무 일 없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소박한 삶에 만족하며 살 수는 없는 걸까. 하지만 수영은 안시스를 믿었다. 그가 그런 말을 남긴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조카라면 그 또한 믿을 만한 사람일 것이다.
수영은 결국 안시스의 유언에 따라 라꼬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
정든 아이들과 마을을 뒤로하고 수영은 제크라는 이름의 사자를 따라 여정을 시작했다. 제국 북부의 긴 겨울이 이제 막 시작된 11월 초였다. 전혀 다른 세계인 이곳도 수영이 있던 곳과 마찬가지로 사계절과 열두 달이 있었다. 수영의 세계에서 한참 인기 있던 어느 판타지 소설처럼 달이 두 개인 세상도 아니었다.
수영은 자신이 생소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은 인식했지만, 의식하지 않는 한은 마치 한국말을 하듯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지난 1년간 수영은 안시스에게 글을 배워서 지금은 따로 아이들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다. 읽고 쓰는 것도 마치 예전에 알았던 언어를 다시 배우는 느낌이 들어 수영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한 황금빛 독수리 형상의 힘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다른 세계가 아니라 외국에 온 것 같았다. 이 세계 어딘가에 자신이 살던 곳이 있을 것만 같고 지금이라도 가려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은 다른 세계였다. 아직은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지만.
이런저런 상념이 머리를 스치는 동안에도 스무 마리의 늑대가 끄는 썰매는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설원 위로 죽죽 미끄러졌다. 제국의 북부에서는 이렇게 늑대를 길들여서 썰매를 끄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린 새끼를 잘 길들이면 충직하고 용맹하며 잘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여행의 동반자가 되기 제격이었다. 게다가 보다 더 잘 훈련된 녀석들은 스스로 사냥을 해 와 주인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제크는 늑대들을 힘껏 독려하며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최대한 많이 달렸다.
Chapter 1. 운명의 굴레 - 선택 (3)
“정말 맘에 안 들어. 처음에는 어린 나이에 무슨 사정으로 여기까지 들어왔나 불쌍했었는데 말도 없고, 민폐나 끼치고. 저 애가 구석에 나와 쪼그려 있는 바람에 분위기도 구질구질하고, 장사도 안되는 것 같잖아. 게다가 곧 떠날 사람처럼 뻣뻣하게 구는 태도도 재수 없어. 도망만 지금 몇 번째야? 그것도 멍청하게 대낮에 그 남자가 안 본다고 뛰어나가다니.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신경질을 냈던 여자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녀는 정말로 수영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녀도, 다른 이들도 처음에는 몇 번이고 이곳에서 도망치려 했다. 다만 진지하게 계획을 짜서 목숨을 걸고 발버둥 쳤던 자신들과는 달리 대낮에 뛰쳐나가는 멍청한 행동에 질렸을 뿐이다.
게다가 그렇게 벌써 한 달 동안 세 번이나 뛰쳐나갔는데 그 꼬맹이를 따라다니는 남자는 그저 말없이 붙잡아 끌고 올 뿐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해 볼 테면 해 봐라, 얼마든지 잡아 와 주마. 그런 태도였다. 자신들이었다면 몇 날 며칠 살려 달라고 울부짖을 때까지 폭력을 퍼부었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아이가 조금 다가오려 해도 한쪽 구석에 묵묵히 서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규혁의 존재가 불편하게 느껴져 여자들이 먼저 접근을 꺼렸다. 위험에 대한 그녀들의 육감은 남달랐기에 굳이 말이 아닌 눈빛으로도 그 경고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들의 사장은 그 꼬맹이한테 불필요한 손길이 닿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과도한 보호, 특별 취급이 역겨웠다.
손님도 받지 않는 주제에 자신과 같은 창녀와 함께 있는 모습이 진저리 치게 싫었다. 지나가는 남자들을 어떻게든 붙잡고 꼬여 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자신처럼 망가지고 타락하길 바라는 추한 마음을 발견할 때마다 그 아이가 더 증오스러워졌다.
자신도 저렇게 순수할 때가 있었다. 잊고 살았던 그 시절을 상기하는 행위 자체가 그녀들에게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 이모라고 불린 여자가 말을 꺼냈다.
“여기에 들어온 이상 마찬가지야. 그건 너희들이 더 잘 알지 않냐? 그러니까 괜히 신경질 부리지 마.”
그녀의 말에 모두 사나운 표정을 풀었다. 그녀의 말대로다. 지금은 자신들과 달라 보인다고 해도 결국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들처럼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그녀들은 모두 침묵했다. 수영의 처지가 자신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동질감, 그에 따른 서글픔과 무기력함, 연민의 감정이 혼합된 무거운 침묵이었다.
규혁은 수영의 방문을 잠근 후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수영이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수영이 방 안에 있는 동안은 이중으로 문을 잠갔다. 두꺼운 창살은 시멘트에 견고하게 박혀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수영이 유리문을 열고 길거리로 나갈 틈을 주었다.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어도 사람은 ‘만약’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마음 자체를 포기시켜야 한다. 몇 번이고 도망쳐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뿐이도록.
그렇게 확인한 사실은 그 누가 알려 준 것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진실이 되는 법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이 아이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될까. 절망할 것인가, 현실에 타협할 것인가. 점점 미치게 될지도 모른다. 또는 셋 다일 수도 있지. 규혁은 그리될 거라 확신하면서도 그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독서만이 수영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위안이었다. 규혁은 가끔 수영의 방에 새로운 책을 가져다 놓았다. 아마 수영이 미쳐서 발악하는 걸 방지하고 자신의 시간에 무뎌지라는 의도일 것이다. 수영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순응할 수 없다는 오기가 샘솟았다.
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머니 속의 동전을 꺼내 보았다. 희미한 불빛 아래 반짝 빛나는 금빛 표면에 새겨진 독수리의 날개가 부러웠다. 아무리 있는 힘껏 달려도 금세 주변 가게에서 남자들이 뛰쳐나와 잡힐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수영은 말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간절히 빌었었다.
‘날개라도 생겨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순간 쥐고 있던 동전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빛 때문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수영에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기의 울림이 아닌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목소리가.
-다른 삶을 살 기회를 주겠다.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감았던 눈을 뜨자 손바닥에 놓인 동전에서 나온 황금빛이 쌍두 독수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살짝 퍼덕이자 금빛으로 빛나는 가루가 반짝이며 떨어지다 사라졌다.
-기회를 잡겠는가?
붉게 타오르는 두 쌍의 눈에 정신을 빼앗겼던 수영은 다시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곧 그 목소리가 전한 의미를 깨닫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잡겠어!”
독수리의 눈이 더욱 붉게 타올랐다. 순식간에 불덩이로 화한 독수리 형상은 수영의 손바닥 위에 놓인 동전으로 흡수되었다.
“아아아악!”
수영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계속해서 느껴지던 통증은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일시에 사라졌다. 수영은 아픔에 감았던 눈을 떴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가게에 딸린 방이 아니었다. 은은하게 켜진 할로겐 조명 아래 고급스러운 벽지와 대리석 바닥으로 장식된 복도였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곳에 서 있는 것인지 수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복도 끝에 살짝 열린 방문이 보였다. 수영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리로 걸어갔다. 묵직한 원목으로 된 문은 살짝 밀자 조용히 열렸다. 그 안으로 발을 들이자 커다란 침대와 한쪽 벽면에 빼곡히 장식된 단도, 장검, 총기 등이 보였다. 반대쪽 벽면은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면 창이었다.
수영은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 반쯤 쳐진 커튼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 위로 길게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숨죽이며 다가간 수영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그 남자였다.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한 독수리 형상의 존재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이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이 남자 밑에 깔려 신음을 내지를 때보다 이자가 어머니의 정사 장면을 낱낱이 찍은 그 비디오를 보여 주며 자신의 반응을 관찰할 때 수영은 진정으로 살의를 품었다.
이자만 없다면 자신도 유진 누나도 다른 사람들도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자가 죽어 없어지는 것, 그것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거다. 이렇게 수없이 생각했던 자신의 마음을 그 존재는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문득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수영은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날카로운 단도를 발견했다. 그 순간 남자를 향한 격렬한 증오와 복수심이 가슴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고요하게 잠든 얼굴 위로 자신을 능욕하던 남자의 광기로 얼룩진 눈빛, 비뚤어진 미소로 일그러진 입가 등이 덧씌워졌다.
떠올리는 것조차 혐오스러운 커다랗고 징그러웠던 양물. 그것이 자신을 꿰뚫었을 때의 감각이 다시금 떠오르자 수영은 망설임 없이 단도를 집어 들었다.
신이 준 단 한 번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두 번은 있을 수 없다. 단도를 남자의 얼굴 위로 집어 든 찰나, 이대로 목에 꽂기만 하면 되는 그 순간이 수영에게는 영겁처럼 느껴졌다.
왜 이 순간 자신은 망설이는 것일까.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기뻐하실까 슬퍼하실까.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던 목소리는 이윽고 한목소리로 합쳐졌다.
‘죽여 버려! 어머니도 이 녀석 때문에 고통받았어. 많은 사람이 이자 때문에 괴로워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하지만 수영은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버러지 같은 인간이라도 살 권리가 있기 때문에? 자신은 누군가의 목숨을 끊을 권리가 없기 때문에? 죄책감? 사람을 죽인다는 두려움 때문에?
수영의 손에 힘이 빠지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슬픔에 잠긴 얼굴 때문이었다.
단도가 대리석 바닥에 ‘쨍’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갑자기 수영의 눈앞에 황금빛 쌍두 독수리가 나타나 수영을 집어삼켰다.
-너는 시험을 통과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수영은 정신을 잃었다.
***
수영의 비명이 들리자마자 규혁은 곧장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자물쇠를 풀었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문의 손잡이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비명이 뚝 끊겼다. 문에서 느껴지던 열기도 사라졌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에 수영은 없었다. 방 안은 쇠창살도 멀쩡하게 달린 채 그대로였다. 규혁은 정신이 나간 듯이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기계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마스터.”
-CCTV를 확인해 봤는데 꺼져 있더군. 무슨 일이지?
“그게……. 수영이 사라졌습니다.”
-농담하나?
“정말입니다.”
끊겨 버린 핸드폰을 쳐다보며 규혁은 한숨을 쉬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순수한 인간적 호의를 보여 주었던 수영의 어머니. 그녀를 닮은 수영을 발견한 이후 그의 탈출을 남몰래 바라 왔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규혁의 시선은 탁자 위에 놓인 종이에 머물렀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생이 너에게 많은 불행을 안겨 주겠지만, 그로 인해 행복해질 것이고 인생을 축복할 것이며 결국 다른 사람들의 인생도 축복하게 될 테니…….]
Chapter 2. 루시엔의 겨울 - 고난 (1)
수영은 작년 늦가을 첫눈이 온 날 제국의 북쪽 끝, 변경의 유형수 마을 라꼬프에서 눈 위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그를 발견한 안시스는 수영을 정성껏 돌봤다. 제국에서는 보기 드문 검은 머리 때문에 수영의 존재는 금세 화제가 되었다.
제국의 대부분은 넓은 평원과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북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점점 높아져 그 끝은 매우 높고 험준한 산맥들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 첫 번째 산맥을 오르면 높은 산줄기들이 끝없이 펼쳐진 산맥의 바다가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뜻의 ‘네바스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산맥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소수의 부족이 흩어져 산다는 것만 알 뿐이다.
안시스는 관리에게 수영이 네바스나에 살고 있는 부족의 일행이라고 설명했다. 아마도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곳까지 흘러온 모양이라고도 덧붙였다. 관리는 매우 흥미로워했지만 수영이 고열로 기억을 잃었다고 하자 실망했고, 곧 관심에서 지워 버렸다.
정말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제국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수영에게 안시스는 먼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수영의 앞 음절을 딴 ‘수아라엔’이라는 이름이었다. 새로운 신분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제국에서 쓰는 형식으로 만든 이름이었다. 수영은 ‘아란’이라는 애칭에 점점 익숙해졌다.
수영은 창고에서 밤새 쓸 장작을 가져오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에 태양이 붉게 타오르면서 점점 지평선 너머로 뒷걸음치고 있었다.
“안시스, 일어나서 죽 좀 드세요.”
20년이라는 길고 가혹했던 유형 생활을 마친 그는 아직 쉰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인처럼 하얗게 센 머리와 깊게 팬 잔주름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얼마 전 초겨울에 쓰러진 그는 차츰 병세가 악화되어 정신을 차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수영은 침대 옆에 앉아 조심히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한 숟갈씩 정성스럽게 죽을 먹였다. 반은 흘리면서도 수영의 인내 때문인지 점점 그릇은 비워졌다. 수영은 안시스를 다시 벽에 기대게 하고 그릇을 치우려고 일어났다. 그때 그가 수영의 손을 붙잡았다. 아픈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악력이었다.
“아란.”
긴장한 얼굴로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한 달은 말하는 것도 힘겨워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한 대화를 해 왔던 그였다. 그러나 오늘 그의 눈은 마치 청년처럼 생기 있게 반짝였다.
“이제 곧 마지막일 것 같구나.”
“아, 안시스!”
어느새 슬픔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수영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떨리는 팔을 들어 수영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곳은 앞으로도 네가 머물 곳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 이곳을 떠나거라.”
“죽는다니……. 그런 말 마세요.”
그는 자애로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죽는 건 슬픈 일이 아니란다. 내 명은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어. 이제 곧 그를, 루시크를 만날 수 있으니 기쁘구나.”
얼마 만인지 모를 고요한 숨소리가 그의 폐부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이곳으로 온 것은 신의 뜻이니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거다. 세상으로 나가거라. 큰 고난과 고통을 만나겠지만 결국은 행복해질 거다. 고난 속에 행복이 있단다. 내 말을 믿으렴.”
그는 눈을 감았다. 침대 옆에서 타오르는 촛불이 고요하게 잠든 안시스의 얼굴을 비췄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모습이 그 위에 겹쳐졌다. 자신도 모르게 항상 그리워하고 궁금해했던 아버지의 정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을 예감하자 가슴이 저려 왔다. 수영은 그 곁에서 떠날 수 없었다.
짹짹, 푸드득. 창가에 작은 새 몇 마리가 지저귀다 인기척에 놀라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영은 침대 모서리에 기대어 잠을 자다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뿌연 시야 너머 문가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누, 누구냐!”
마을에서 보지 못한 전혀 낯선 얼굴이었다. 수영은 안시스의 침대를 막아서며 방어할 만한 물건을 찾다가 불현듯 스치는 예감에 침대 쪽을 돌아봤다. 수영은 안시스의 코밑에 떨리는 손가락을 대었다. 내쉬는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한 발짝 다가오자 음영 진 얼굴이 드러났다.
“간발의 차이로 마지막 인사를 못 드렸군.”
미처 수영이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남자는 성큼 걸어와 안시스의 싸늘하게 식은 이마에 키스했다.
“신의 곁으로 편안히 가시길.”
장례 절차는 간단했다. 마을의 구성원들이 모두 모여 당국의 관리와 그가 부른 사제의 기도를 듣고 장송곡을 부른다. 그리고 시신을 흰 천에 감싸 숲속에 놓아두고 다시 한번 기도한다. 이번에는 대지가 죽은 자를 받아 주길 바라는 기도이다.
제국은 지방마다 장례 관습이 달랐다. 제국 최북단인 이곳에서는 얼어붙은 땅을 팔 수가 없어 눈 위에 천을 감싼 시신을 내려놓는다. 그러면 혹독한 겨울을 나는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그들을 통해 죽은 자는 대지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안시스는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은 모두 일손을 놓고 고인을 추억하며 조용히 지내는 것이 이들의 관습이었다. 수영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천천히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짧았지만 그와의 추억과 정이 든 오두막을 보니 어머니를 보냈던 때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끼익. 수영은 두꺼운 나무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불쑥 찾아온 남자는 의자에 앉아 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안시스의 조카가 수도에서 보낸 사자였다. 안시스는 죽기 전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 수영을 부탁했다고 한다. 남자는 수영을 수도로 데려가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장례는 무사히 마쳤나?”
“네.”
“내일 출발하겠다. 관리에게는 이미 말해 뒀어. 인사할 시간은 주겠다. 출발은 점심 이후로 하지.”
“그렇게 일찍?”
“시간이 없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수영은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열병을 앓은 자신을 간호해 준 안시스에게도 두려움에 차 날을 세웠다. 조금의 접촉에도 소스라쳤다. 그런 수영이 이토록 밝아진 것은 안시스 덕분이었다. 수영은 그의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야 이곳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한다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본 낯선 사내와 단둘이 한 달간 여행해야 한다니 두려움이 앞섰다.
무엇보다 안시스의 예언 같은 유언 때문에 수영은 망설였다. 큰 고난과 고통을 만날 거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지금처럼 그저 아무 일 없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소박한 삶에 만족하며 살 수는 없는 걸까. 하지만 수영은 안시스를 믿었다. 그가 그런 말을 남긴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조카라면 그 또한 믿을 만한 사람일 것이다.
수영은 결국 안시스의 유언에 따라 라꼬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
정든 아이들과 마을을 뒤로하고 수영은 제크라는 이름의 사자를 따라 여정을 시작했다. 제국 북부의 긴 겨울이 이제 막 시작된 11월 초였다. 전혀 다른 세계인 이곳도 수영이 있던 곳과 마찬가지로 사계절과 열두 달이 있었다. 수영의 세계에서 한참 인기 있던 어느 판타지 소설처럼 달이 두 개인 세상도 아니었다.
수영은 자신이 생소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은 인식했지만, 의식하지 않는 한은 마치 한국말을 하듯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지난 1년간 수영은 안시스에게 글을 배워서 지금은 따로 아이들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다. 읽고 쓰는 것도 마치 예전에 알았던 언어를 다시 배우는 느낌이 들어 수영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한 황금빛 독수리 형상의 힘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다른 세계가 아니라 외국에 온 것 같았다. 이 세계 어딘가에 자신이 살던 곳이 있을 것만 같고 지금이라도 가려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은 다른 세계였다. 아직은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지만.
이런저런 상념이 머리를 스치는 동안에도 스무 마리의 늑대가 끄는 썰매는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설원 위로 죽죽 미끄러졌다. 제국의 북부에서는 이렇게 늑대를 길들여서 썰매를 끄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린 새끼를 잘 길들이면 충직하고 용맹하며 잘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여행의 동반자가 되기 제격이었다. 게다가 보다 더 잘 훈련된 녀석들은 스스로 사냥을 해 와 주인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제크는 늑대들을 힘껏 독려하며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최대한 많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