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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틱 러브 1화
프롤로그
서울의 겨울은 추웠다. 그래도 강원도보다 더하겠느냐마는 어쨌든 인간이 맨몸으로 버티기엔 혹한이다. 비인지 눈인지 모를 진눈깨비가 차갑게 뺨을 때렸다. 점퍼에 달린 모자를 앞으로 잡아당겨 보아도 바람이 앞으로 불어서 소용없었다. 녹았다가 다시 얼어 버린 미끄러운 땅을 밟으며 성후는 추위에 빨개진 코를 훌쩍였다. 짐을 한 꾸러미 끌어안은 어깨가 축 처져 볼품없었다.
꾸러미 안에는 지금까지 쓰던 노트북과 머그잔, 메모지와 펜 따위가 들어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회사를 나온 사람의 모양새였다. 이른 시간에 젊은 사람이 돌아다니니 여기저기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꽂혀 들었다. 그 시선들로부터 고개를 돌리듯 성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순간, 발이 미끄러지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창피하여 다시 일어나고 싶었지만 너저분하게 쏟아진 짐을 보고 있자니 그럴 힘도 안 났다. 머릿속에선 팀장에게서 들었던 사형 선고 같은 말이 떠올랐다.
‘박성후 씨는 이제 다음 달부터 회사에 안 나와도 됩니다.’
‘…….’
‘사직서 내시고 짐 싸세요. 해고예고수당은 곧 입금될 겁니다.’
‘…….’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마지막 한마디까지 떠올리고 나자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성후는 발로 상자를 밀어 내며 꾹 참았던 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부장 앞에선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실은 죄송한 마음 따위 1밀리도 들지 않았지만 그래야 했다. 답답하고 울화통이 치밀어 못 살겠더라. 그래, 정말 못 살겠더라. 이렇게 억울할 줄 알았으면 부장의 새카만 가발이나 확 벗겨 버리고 나올 걸 그랬다.
“저기, 괜찮으세요?”
한참이나 일어서지 않는 성후가 이상했는지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왔지만 눈앞이 시뻘게져서 보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그간 있었던 일들이 반복되었다. 부장의 쓸데없는 잔소리와 팀장의 화풀이. 클라이언트들의 말도 안 되는 억지. 그 속에서 죄송합니다만 연발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
하나하나 떠올리자니 가슴을 수어 번 쳐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본래 성격답지 않게 참고, 참고 또 참았던 자신의 결말이 겨우 이거라니.
성후는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내가 뭘 어쨌냐고! 이 망할 것들아─!”
박성후, 31세.
엄동설한에 실직자가 되었습니다.
1. 붕어빵 (1)
1
“다녀왔습니다.”
집에 오는 내내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나오는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저녁 먹으면서 할까. 아니면 내일 아침에 출근 안 하냐는 물음에 지나가듯 대답하고 말까. 아니면 일자리 잃은 가장처럼 출근하는 척 밖으로 나가야 하나. 성후는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리며 신발을 벗었다. 하지만 이내 방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문 앞에서 서성여야 했다.
집 안이 제법 부산스러웠다.
“왔어? 밖에 춥더라.”
“오늘 일찍 왔네.”
부모님뿐만 아니라 딱 한 명 있는 누나도 외출복 차림이었다. 아버지는 오늘 월차를 쓰셨다고 했고 누나도 쉬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니 집에 가족들이 전부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눈 오는 날 다 같이 어딜 가냐는 거였다. 이 시간에 가족들이 외출하는 일은 드물었다. 목도리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며 성후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어디 가? 밖에 눈 오는데.”
대답은 성후의 누나가 했다.
그녀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리모컨을 찾았다.
“어디 가는 게 아니라 갔다 온 거야.”
“어디에?”
소파 사이에 껴 있던 리모컨을 들더니 항상 보는 외국의 권투 경기 채널을 틀었다. 그녀는 다리를 접으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 여기서 오징어와 맥주만 손에 들면 평소 그녀의 생활 방식 중 일부분이 된다. 하지만 귀찮은지 그냥 소파 위에 늘어져 버렸다.
외국 선수의 주먹질을 따라 그녀의 손이 쉭쉭 거리며 움직였다. 레프트, 레프트, 라이트, 훅. 가볍게 휘두르는 주먹인데도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병원 갔다 왔어.”
“병원? 누구 아파?”
“우리 가족 중엔 아니고. 집 앞에서 매일 붕어빵 파시는 할머니 알지?”
알다마다. 가족 중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후네 집은 그 포장마차의 단골이다. 갈 때마다 두어 개씩은 꼭 얹어서 주시고, 혹시라도 길 가다가 마주치면 가면서 먹으라며 뭘 쥐여 주시곤 했다. 나이는 어림잡아도 일흔이 넘어 보이시는데 언제나 혼자 붕어빵을 팔고 계셨더랬다.
성후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누나의 주먹이 성후의 몸을 스칠 듯 위협적이었다.
“그 할머니가 왜?”
“허리 다치셨어. 그런데 알다시피 가족이 없으시잖냐. 그래서 우리 가족이 병원 다녀왔어. 여태 신세 진 것도 많고.”
“아…….”
“아빠 성격 알잖아. 한 번 인연은.”
“……죽을 때까지 인연.”
그렇지, 하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말고 돌연 성후에게 팔을 뻗어 왔다.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단번에 성후의 목을 휘어잡아 팔에 꿰어 버리더니 조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텔레비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보였다. TV 안에서는 근육질 남자 선수 간의 대결. 이쪽은 이제 막 30대 중반이 된 여성과 30대가 초반 남성의 대결…… 아니, 일방적인 공격. 다른 점이 있다면 고작 성별뿐이었다. 매일 방에서 샌드백을 쳐 대는 누나의 힘은 성후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단단한 팔 근육이 성후의 턱을 꾸욱 눌렀다.
“컥, 커헉! 자, 잠ㄲ…… 뭐 하는 거, 야악!”
“그러는 넌 왜 이 시간에 집에 왔냐?”
“아악!”
“바른대로 말해. 셋 센다. 하나, 둘, ㅅ…….”
대답 안 하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 어린 시절부터 누나에게 귀여움을 받아 왔던 성후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그녀가 지금까지 교육을 빙자한 폭력을 얼마나 많이 휘둘러 댔던가. 둘이서 같이 공포 영화를 보고 자는 날에는 방문을 열어 주지 않았고 때때로 엄마 몰래 누나의 학습지를 풀어 줘야 했고, 싫어하는 음식도 먹어 줘야 했다. 그런 데다가 조금이라도 대들었다간 금방 날아차기에 얻어맞곤 했다.
그뿐일까. 혹여나 어디 가서 얻어맞거나 놀림을 받고 집에 오기라도 했다간 불호령이 떨어졌다. 실상은 부모님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이, 멍청아! 받은 대로 안 갚아 주고 오면 집에 못 들어올 줄 알아!’
‘걔네 무섭단 말이야아! 누나가 해 줘!’
‘너한테 못되게 구는 것들은 네가 제압하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바보야! 그래 가지고 앞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 그래!’
참고로 열두 살이었던 그 시절 누나는 히어로 액션 영화에 한창 빠져 있었다. 아마 무엇이 험난하며 세상이 무엇인지 그녀도 잘 몰랐을 거다. 영화에서 그런 대사가 나왔던 게 틀림없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성격 형성은 여자는 제 몸 하나 지킬 줄 알아야 한다며 부모님께서 누나에게 태권도, 합기도, 유도 등등의 운동을 어렸을 때부터 시켜 온 결과다.
성후는 누나의 팔을 꽉 부여잡은 채 꽥 소리를 내질렀다.
“잘렸어! 잘렸다고!”
충격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풀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건지 팔이 스르륵 풀렸다. 성후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잘렸어……?”
진짜로? 그리 묻는 시선에 성후는 문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성후가 품에 한 아름 끌어안고 온 짐 보따리가 있었다. 가족들의 시선이 단번에 문 앞을 향했다.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네. 괜히 속으로 툴툴거렸다. 결국 이런 식으로 밝혀지고 말았다.
누나, 박성아는 텔레비전 볼륨을 낮추더니 말했다.
“보나 마나 성격 때문에 잘린 거 아냐? 그러게 성격 좀 죽이라니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받은 대로 갚아 주라고 가르친 건 누나였잖아!
“그게 설마 이렇게 자제력 없는 애로 크게 할 줄 누가 알았겠니.”
“이번에는 참았어!”
“네, 네. 그러시겠지. 예고수당은 받았냐?”
받았다고 말하자 그건 다행이라며 누나는 혀를 찼다. 네 성격으로는 수당 요구도 못 할 게 뻔하다면서 말이다.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지만 그래 봤자 성후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누나를 향해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 외에 없었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주먹을 내지른다 해도 바로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녀가 폼으로 경호학과를 나와 경찰을 하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때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가 나오셨다.
“성후 잘렸다고?”
“아, 그게…….”
고개를 들 수 없어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어도 혼나는 건 여전히 싫고 무서웠다. 온화한 성격의 아버지지만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알면 충격을 받고 실망하실지도 모른다.
성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잘됐네.”
“네?”
저절로 눈이 반짝 떠졌다.
“마침 어떡하면 좋을지 고민했는데, 성후 네가 하면 되겠구나.”
“뭐, 뭐를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다들 같은 생각인지 옆에서 누나가 무릎을 치며 그럼 되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도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하신다. 이 상황에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건 성후뿐이었다.
혼란스러워진 성후의 눈을 보며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입에서 떨어진 말은 성후의 뒤통수를 두들겨 갈기기에 충분했다.
“붕어빵 장사 말이다.”
“…….”
“당분간 할머니께서 입원해야 하셔서 말이다. 그동안 붕어빵 장사는 어떡하면 좋을지 걱정하시더구나.”
“그러니까, 그 말은…….”
“나랑 성아는 경찰이고, 네 엄마는 부동산 일 하시잖냐.”
“…….”
거친 손이 어깨를 두어 번 도닥여 왔다. 괜찮지? 할 거지? 그리 묻는 시선에 대고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성후도 할머니가 걱정되긴 했다. 학생 때부터 매일같이 겨울만 되면 사 먹었고, 어린 시절 친할머니를 잃어서인지 더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교하며 포장마차 안에 들어가면 어서 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게 너무 좋아서 항상 다녀왔다고 인사드리곤 했다. 차마 모르는 척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건 몰라도 의리를 저버리는 짓은 아버지께서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다. 모범경찰상을 몇 번이나 수상하신 정의로운 분이니 당연하다마는.
성후는 차가워진 뒷목을 슬슬 문질렀다.
“오후에 잠깐 파는 거라면, 뭐어…….”
“그래, 잘 생각했다!”
어차피 거절할 수도 없는 문제라면 그냥 편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붕어빵 파는 것뿐인데. 무슨 일이 있기야 하겠어?
성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후에 일어날 그 모든 일을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2
12월 11일. 공항은 때아닌 소란으로 북적였다. 문 앞을 봉쇄하듯 에워싼 취재진과 팬들로 인하여 인산인해다. 유명 연예인이라도 오는 건가.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며 수군거렸지만 누구에게나 낯익은 이름은 아니었기에 알 수 없었다. 저마다 든 환영 팻말에는 ‘베르나도 알베르티’라는 외국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 배우? 외국 뮤지션? 여러 말들이 오가는 와중에 궁금증을 해소해 주듯 아나운서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현재 이곳 인천 공항은 알베르티 씨를 환영하는 인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지금껏 그 누구도 선보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보여 주겠다며 그는 일전에 뜻을 밝힌 바가 있는데요. 그의 새로운 도전을 기대하듯 팬들의 얼굴에도 한껏 기대가 서려 있습니다. 아, 지금 막 출입국의 문이 열렸습니다!”
아나운서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갔다. 아니, 문자 그대로 뛰어들었다고 말하는 게 맞다. 한마디만 해 달라며 여러 보도국에서 카메라나 마이크를 들이대기 바빴다. 그가 하는 말은 숨소리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듯 녹음기와 수첩까지 빼 들었다.
세간의 주목을 받는 그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취재진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일반 성인 남성보다 족히 한 뼘은 더 큰 키 때문인 것도 있지만 사실 그의 모든 면모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올백으로 넘긴 밝은 블론드 머리카락은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뽑아낸 금실을 보듯 눈부셨다. 또한 새벽이슬을 머금은 숲속 같은 푸른색 눈동자는 어떠한가. 높고 날카로운 콧대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히 오똑한 코끝. 가늘고 가지런한 입매까지.
신이 빚어낸 피조물 중 가히 완벽하다 칭해도 될 정도로 그는 아름다웠다. 한 외모 한다는 연예인들마저 고개를 내젓고 물러설 듯했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롱코트를 깔끔하게 여미고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제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에게 한마디를 내던졌다.
“Tutte risposte parlano con gusto.(모든 대답은 맛으로 말하겠습니다.)”
그날 이후, 여러 신문사는 그에 대한 소식을 실어 날랐다. 타이틀과 내용은 미묘하게 조금씩 달랐으나 그들이 시사하는 것은 같았다.
젊은 이탈리안 미슐랭 스타 셰프, 베르나도 알베르티(Bernardo Alberti). 한국에서 별 세 개에 도전한다. 내년 봄에 명동에서 개점 예정!
3
“흐음. 셰프구나. 근데 얼굴은 하나도 안 보이네.”
알 바 아니지만. 성후는 아침 신문을 휘적휘적 넘기며 커피를 마셨다. 장사하러 가기 전에 뭐라도 좀 읽어 볼까 해서 펼쳐 봤지만, 그다지 볼만한 건 없었다. 매번 9시 뉴스에서 나오는 말들이 모양만 조금씩 달라져서 적혀 있을 뿐이었다.
1면에 실린 건 항상 있는 정치 얘기들. 그 뒤에는 한국을 찾은 유명 셰프에 관한 얘기였다. 선글라스를 낀 모습만 얼핏 찍혀 있었는데 이래서야 어떤 얼굴인지 알 수도 없었다.
찍은 사진 중 멀쩡한 것들을 고르고 골라 신문으로 만들었을 텐데도 이렇다.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눈에 빤히 보였다.
성후는 커피를 내려놓으며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포장마차를 열러 갈 시간이다. 붕어빵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대충 들었지만 불안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선 이론만으로 빵을 구울 수 있을 리도 없을 것이며, 손님이 많아지면 또 어찌해야 할지도 문제다. 서툰 솜씨로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성후는 머뭇거리는 발걸음을 다잡고서 겨우 집을 나섰다.
발치에 두껍게 쌓인 눈이 닿았다. 숨을 한 번 내뱉을 때마다 시야에 뽀얀 입김이 서렸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초췌해진 몰골을 조금이라도 가려 보고자 쓰고 나온 뿔테 안경이 하얗게 흐려졌다.
“하……. 장사만 할 게 아니라, 빨리 직장 찾아봐야 하는데.”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터덜터덜 걸었다. 붕어빵 장사에는 큰 불만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도와 드릴 수 있다면 그저 기쁠 따름이다. 문제는 언제까지 이 장사를 자신이 봐줄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어디에라도 이력서를 넣어 보고 면접이라도 보러 다녀야 할 판에 붕어빵 장사라니. 뜻밖에 태연히 돌아가는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묶여 있는 포장마차의 끈을 풀고 불을 켰다. 제일 먼저 도구들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반죽 통과 팥, 슈크림 통. 그리고 돈 통. 기름과 종이 포장지의 위치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폈다. 할머니의 평소 성격답게 모든 도구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성후는 양손에 입김을 호 불어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그러고는 우선 반죽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달콤한 냄새를 맡자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샛노랗고 예쁜 색감을 자랑하는 슈크림 붕어빵. 그리고 새카만 속이 비치는 오리지널 팥 붕어빵. 바삭바삭한 식감과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 김이 올라오는 갓 나온 붕어빵을 불어 가며 먹으면 얼마나 행복한가.
종이봉투를 꼭 끌어안고 길을 가는 동안엔 품 안이 따뜻해져서 잠시나마 추위를 잊을 수 있다. 겨울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다. 성후 또한 다르지 않았다. 현금은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고 번거롭기만 하지만 겨울에는 꼭 주머니에 몇천 원씩 넣어 다니곤 했으니 말이다.
붕어빵 틀에 기름을 바르고 반죽을 붓고 있으니 그새 손님이 찾아왔다.
“할머니는 관두셨나요? 여기 그 포장마차 아닌가?”
“그 포장마차 맞습니다. 할머니는 사정상 잠시 못 나오게 되셔서 제가 대신 봐 드리는 겁니다.”
단골이 제법 많았다. 이 근방에 붕어빵 파는 곳이 별로 없는 탓도 있었지만, 할머니께서 그만큼 오래 장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에는 누가 살고, 저 학교에는 어떤 아이들이 다니며 요즘 퇴근 때마다 사 가는 직장인은 어떤지……. 이 동네의 모든 걸 꿰고 계셨다. 그런 분으로부터 이 일을 맡아 버려서인지 괜스레 어깨가 무거웠다.
손님들이 거의 다 갔을 무렵 한 남자가 찾아왔다. 까만 코트 안에 단정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딱 봐도 붕어빵과는 인연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저걸 입고 붕어빵을 먹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이었다.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에 자리한 눈은 안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붕어빵 지금 살 수 있을까요?”
“아, 네. 몇 개 드릴까요?”
그는 나와 있는 붕어빵들을 유심히 눈으로 훑더니 말했다.
“우선 골고루 다섯 개씩 주시겠어요? 맛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
이런 사람이 ‘싶어 하는 분’이라며 존칭을 쓸 정도면 어지간히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하긴 붕어빵 심부름마저 타인에게 시킬 정도인데. 성후는 속으로 말들을 꾸역꾸역 삼키며 붕어빵을 포장해 주었다.
남자는 현금을 주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로 뛰어가 버렸다. 그 자태가 어찌나 급한지 잔돈을 거슬러 줄 틈도 없었다. 손에 쥔 3천 원이 그저 무안하게 느껴졌다.
“높은 사람들도 붕어빵이 먹고 싶긴 한가 보네.”
아니면 저런 사람마저 찾아올 정도로 여기 붕어빵이 특별한 건가.
성후는 실수로 태워 버린 붕어빵을 하나 집어 먹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알 게 뭔가. 우연히 지나가다 온 사람일 텐데. 그런 것보다도 지금은 이 여린 붕어빵들이 타지 않게 뒤집어 주는 게 먼저다.
그러다 문득 포장마차 앞에 선 차를 보며 쓴 한숨을 삼켰다. 멋들어진 검은 세단이 아까부터 줄곧 저기에 서 있었는데, 그게 참 얄미웠다. 누구는 한겨울에 붕어빵 팔며 서 있는데 누구는 비싼 외제 차를 끌고 다니다니. 이렇게나 불공평할 수가. 괜히 심사가 뒤틀려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두고 봐라. 건축으로 성공해서 이름을 알리는 디자이너가 되어 줄 테다. 그럼 저것보다 더 멋진 차 끌고 다닐 테다!
“근데 저 차, 아까 그 차 아닌가?”
3천 원 잊고 가 버린 사람이 내렸던 차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한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도 있구나. 아니, 이렇게 무서운 사람도 있구나. 밝은 블론드 머리와 벽안도 압권이지만 분위기 또한 범상치 않았다.
핏이 좋은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가 성후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성후는 그 뒤에 있는 차를 힐끔 쳐다봤다. 설마 저 차 주인인가?
“붕어빵.”
겨울바람과도 같은 낮고 시린 목소리였다. 바리톤의 울림이 마치 귓속으로 녹아드는 듯하여 정신이 멍해졌다. 하지만 곧 그가 손님이란 자각을 하며 성후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몇 개 드릴까요?”
저런 옷 입고, 저런 차 타고 붕어빵 사 먹는 사람도 있구나.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게 생겼는데 말이다. 굳이 예시를 들어 보자면 값비싼 호텔에서 몇십만 원짜리 음식을 사 먹을 것만 같은 사람이다. 그는 열기를 머금은 붕어빵 기계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여전히 그 목소리는 무심하고 차가웠다.
“백 개.”
네, 하고 말하려던 성후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방금 잘못 들은 건 아니지?
“네?”
“붕어빵 백 개.”
아무래도 농담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저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랬다.
성후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 말에 답했다.
“배, 백 개는 지금 당장 못 만드는데요?”
그는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턱을 어루만졌다. 손에 낀 검은 가죽 장갑 또한 값비싸 보였다. 그리고 손목에 채워진 메탈 시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만 이루어진 남자 같았다. 저절로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럼 매일 이 시간, 하나씩 받으러 오겠습니다.”
“도, 돈은…….”
“선급.”
짧게 말하며 그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묵직한 봉투는 파란 것이 아닌 새하얀 종이들로 채워져 있었다. 수표 액수를 보며 성후는 입을 뻐끔거렸다. 이 정도면 백 개가 아니라 천 개는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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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겨울은 추웠다. 그래도 강원도보다 더하겠느냐마는 어쨌든 인간이 맨몸으로 버티기엔 혹한이다. 비인지 눈인지 모를 진눈깨비가 차갑게 뺨을 때렸다. 점퍼에 달린 모자를 앞으로 잡아당겨 보아도 바람이 앞으로 불어서 소용없었다. 녹았다가 다시 얼어 버린 미끄러운 땅을 밟으며 성후는 추위에 빨개진 코를 훌쩍였다. 짐을 한 꾸러미 끌어안은 어깨가 축 처져 볼품없었다.
꾸러미 안에는 지금까지 쓰던 노트북과 머그잔, 메모지와 펜 따위가 들어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회사를 나온 사람의 모양새였다. 이른 시간에 젊은 사람이 돌아다니니 여기저기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꽂혀 들었다. 그 시선들로부터 고개를 돌리듯 성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순간, 발이 미끄러지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창피하여 다시 일어나고 싶었지만 너저분하게 쏟아진 짐을 보고 있자니 그럴 힘도 안 났다. 머릿속에선 팀장에게서 들었던 사형 선고 같은 말이 떠올랐다.
‘박성후 씨는 이제 다음 달부터 회사에 안 나와도 됩니다.’
‘…….’
‘사직서 내시고 짐 싸세요. 해고예고수당은 곧 입금될 겁니다.’
‘…….’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마지막 한마디까지 떠올리고 나자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성후는 발로 상자를 밀어 내며 꾹 참았던 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부장 앞에선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실은 죄송한 마음 따위 1밀리도 들지 않았지만 그래야 했다. 답답하고 울화통이 치밀어 못 살겠더라. 그래, 정말 못 살겠더라. 이렇게 억울할 줄 알았으면 부장의 새카만 가발이나 확 벗겨 버리고 나올 걸 그랬다.
“저기, 괜찮으세요?”
한참이나 일어서지 않는 성후가 이상했는지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왔지만 눈앞이 시뻘게져서 보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그간 있었던 일들이 반복되었다. 부장의 쓸데없는 잔소리와 팀장의 화풀이. 클라이언트들의 말도 안 되는 억지. 그 속에서 죄송합니다만 연발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
하나하나 떠올리자니 가슴을 수어 번 쳐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본래 성격답지 않게 참고, 참고 또 참았던 자신의 결말이 겨우 이거라니.
성후는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내가 뭘 어쨌냐고! 이 망할 것들아─!”
박성후, 31세.
엄동설한에 실직자가 되었습니다.
1. 붕어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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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집에 오는 내내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나오는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저녁 먹으면서 할까. 아니면 내일 아침에 출근 안 하냐는 물음에 지나가듯 대답하고 말까. 아니면 일자리 잃은 가장처럼 출근하는 척 밖으로 나가야 하나. 성후는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리며 신발을 벗었다. 하지만 이내 방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문 앞에서 서성여야 했다.
집 안이 제법 부산스러웠다.
“왔어? 밖에 춥더라.”
“오늘 일찍 왔네.”
부모님뿐만 아니라 딱 한 명 있는 누나도 외출복 차림이었다. 아버지는 오늘 월차를 쓰셨다고 했고 누나도 쉬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니 집에 가족들이 전부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눈 오는 날 다 같이 어딜 가냐는 거였다. 이 시간에 가족들이 외출하는 일은 드물었다. 목도리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며 성후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어디 가? 밖에 눈 오는데.”
대답은 성후의 누나가 했다.
그녀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리모컨을 찾았다.
“어디 가는 게 아니라 갔다 온 거야.”
“어디에?”
소파 사이에 껴 있던 리모컨을 들더니 항상 보는 외국의 권투 경기 채널을 틀었다. 그녀는 다리를 접으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 여기서 오징어와 맥주만 손에 들면 평소 그녀의 생활 방식 중 일부분이 된다. 하지만 귀찮은지 그냥 소파 위에 늘어져 버렸다.
외국 선수의 주먹질을 따라 그녀의 손이 쉭쉭 거리며 움직였다. 레프트, 레프트, 라이트, 훅. 가볍게 휘두르는 주먹인데도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병원 갔다 왔어.”
“병원? 누구 아파?”
“우리 가족 중엔 아니고. 집 앞에서 매일 붕어빵 파시는 할머니 알지?”
알다마다. 가족 중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후네 집은 그 포장마차의 단골이다. 갈 때마다 두어 개씩은 꼭 얹어서 주시고, 혹시라도 길 가다가 마주치면 가면서 먹으라며 뭘 쥐여 주시곤 했다. 나이는 어림잡아도 일흔이 넘어 보이시는데 언제나 혼자 붕어빵을 팔고 계셨더랬다.
성후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누나의 주먹이 성후의 몸을 스칠 듯 위협적이었다.
“그 할머니가 왜?”
“허리 다치셨어. 그런데 알다시피 가족이 없으시잖냐. 그래서 우리 가족이 병원 다녀왔어. 여태 신세 진 것도 많고.”
“아…….”
“아빠 성격 알잖아. 한 번 인연은.”
“……죽을 때까지 인연.”
그렇지, 하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말고 돌연 성후에게 팔을 뻗어 왔다.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단번에 성후의 목을 휘어잡아 팔에 꿰어 버리더니 조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텔레비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보였다. TV 안에서는 근육질 남자 선수 간의 대결. 이쪽은 이제 막 30대 중반이 된 여성과 30대가 초반 남성의 대결…… 아니, 일방적인 공격. 다른 점이 있다면 고작 성별뿐이었다. 매일 방에서 샌드백을 쳐 대는 누나의 힘은 성후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단단한 팔 근육이 성후의 턱을 꾸욱 눌렀다.
“컥, 커헉! 자, 잠ㄲ…… 뭐 하는 거, 야악!”
“그러는 넌 왜 이 시간에 집에 왔냐?”
“아악!”
“바른대로 말해. 셋 센다. 하나, 둘, ㅅ…….”
대답 안 하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 어린 시절부터 누나에게 귀여움을 받아 왔던 성후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그녀가 지금까지 교육을 빙자한 폭력을 얼마나 많이 휘둘러 댔던가. 둘이서 같이 공포 영화를 보고 자는 날에는 방문을 열어 주지 않았고 때때로 엄마 몰래 누나의 학습지를 풀어 줘야 했고, 싫어하는 음식도 먹어 줘야 했다. 그런 데다가 조금이라도 대들었다간 금방 날아차기에 얻어맞곤 했다.
그뿐일까. 혹여나 어디 가서 얻어맞거나 놀림을 받고 집에 오기라도 했다간 불호령이 떨어졌다. 실상은 부모님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이, 멍청아! 받은 대로 안 갚아 주고 오면 집에 못 들어올 줄 알아!’
‘걔네 무섭단 말이야아! 누나가 해 줘!’
‘너한테 못되게 구는 것들은 네가 제압하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바보야! 그래 가지고 앞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 그래!’
참고로 열두 살이었던 그 시절 누나는 히어로 액션 영화에 한창 빠져 있었다. 아마 무엇이 험난하며 세상이 무엇인지 그녀도 잘 몰랐을 거다. 영화에서 그런 대사가 나왔던 게 틀림없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성격 형성은 여자는 제 몸 하나 지킬 줄 알아야 한다며 부모님께서 누나에게 태권도, 합기도, 유도 등등의 운동을 어렸을 때부터 시켜 온 결과다.
성후는 누나의 팔을 꽉 부여잡은 채 꽥 소리를 내질렀다.
“잘렸어! 잘렸다고!”
충격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풀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건지 팔이 스르륵 풀렸다. 성후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잘렸어……?”
진짜로? 그리 묻는 시선에 성후는 문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성후가 품에 한 아름 끌어안고 온 짐 보따리가 있었다. 가족들의 시선이 단번에 문 앞을 향했다.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네. 괜히 속으로 툴툴거렸다. 결국 이런 식으로 밝혀지고 말았다.
누나, 박성아는 텔레비전 볼륨을 낮추더니 말했다.
“보나 마나 성격 때문에 잘린 거 아냐? 그러게 성격 좀 죽이라니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받은 대로 갚아 주라고 가르친 건 누나였잖아!
“그게 설마 이렇게 자제력 없는 애로 크게 할 줄 누가 알았겠니.”
“이번에는 참았어!”
“네, 네. 그러시겠지. 예고수당은 받았냐?”
받았다고 말하자 그건 다행이라며 누나는 혀를 찼다. 네 성격으로는 수당 요구도 못 할 게 뻔하다면서 말이다.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지만 그래 봤자 성후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누나를 향해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 외에 없었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주먹을 내지른다 해도 바로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녀가 폼으로 경호학과를 나와 경찰을 하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때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가 나오셨다.
“성후 잘렸다고?”
“아, 그게…….”
고개를 들 수 없어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어도 혼나는 건 여전히 싫고 무서웠다. 온화한 성격의 아버지지만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알면 충격을 받고 실망하실지도 모른다.
성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잘됐네.”
“네?”
저절로 눈이 반짝 떠졌다.
“마침 어떡하면 좋을지 고민했는데, 성후 네가 하면 되겠구나.”
“뭐, 뭐를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다들 같은 생각인지 옆에서 누나가 무릎을 치며 그럼 되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도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하신다. 이 상황에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건 성후뿐이었다.
혼란스러워진 성후의 눈을 보며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입에서 떨어진 말은 성후의 뒤통수를 두들겨 갈기기에 충분했다.
“붕어빵 장사 말이다.”
“…….”
“당분간 할머니께서 입원해야 하셔서 말이다. 그동안 붕어빵 장사는 어떡하면 좋을지 걱정하시더구나.”
“그러니까, 그 말은…….”
“나랑 성아는 경찰이고, 네 엄마는 부동산 일 하시잖냐.”
“…….”
거친 손이 어깨를 두어 번 도닥여 왔다. 괜찮지? 할 거지? 그리 묻는 시선에 대고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성후도 할머니가 걱정되긴 했다. 학생 때부터 매일같이 겨울만 되면 사 먹었고, 어린 시절 친할머니를 잃어서인지 더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교하며 포장마차 안에 들어가면 어서 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게 너무 좋아서 항상 다녀왔다고 인사드리곤 했다. 차마 모르는 척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건 몰라도 의리를 저버리는 짓은 아버지께서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다. 모범경찰상을 몇 번이나 수상하신 정의로운 분이니 당연하다마는.
성후는 차가워진 뒷목을 슬슬 문질렀다.
“오후에 잠깐 파는 거라면, 뭐어…….”
“그래, 잘 생각했다!”
어차피 거절할 수도 없는 문제라면 그냥 편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붕어빵 파는 것뿐인데. 무슨 일이 있기야 하겠어?
성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후에 일어날 그 모든 일을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2
12월 11일. 공항은 때아닌 소란으로 북적였다. 문 앞을 봉쇄하듯 에워싼 취재진과 팬들로 인하여 인산인해다. 유명 연예인이라도 오는 건가.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며 수군거렸지만 누구에게나 낯익은 이름은 아니었기에 알 수 없었다. 저마다 든 환영 팻말에는 ‘베르나도 알베르티’라는 외국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 배우? 외국 뮤지션? 여러 말들이 오가는 와중에 궁금증을 해소해 주듯 아나운서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현재 이곳 인천 공항은 알베르티 씨를 환영하는 인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지금껏 그 누구도 선보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보여 주겠다며 그는 일전에 뜻을 밝힌 바가 있는데요. 그의 새로운 도전을 기대하듯 팬들의 얼굴에도 한껏 기대가 서려 있습니다. 아, 지금 막 출입국의 문이 열렸습니다!”
아나운서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갔다. 아니, 문자 그대로 뛰어들었다고 말하는 게 맞다. 한마디만 해 달라며 여러 보도국에서 카메라나 마이크를 들이대기 바빴다. 그가 하는 말은 숨소리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듯 녹음기와 수첩까지 빼 들었다.
세간의 주목을 받는 그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취재진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일반 성인 남성보다 족히 한 뼘은 더 큰 키 때문인 것도 있지만 사실 그의 모든 면모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올백으로 넘긴 밝은 블론드 머리카락은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뽑아낸 금실을 보듯 눈부셨다. 또한 새벽이슬을 머금은 숲속 같은 푸른색 눈동자는 어떠한가. 높고 날카로운 콧대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히 오똑한 코끝. 가늘고 가지런한 입매까지.
신이 빚어낸 피조물 중 가히 완벽하다 칭해도 될 정도로 그는 아름다웠다. 한 외모 한다는 연예인들마저 고개를 내젓고 물러설 듯했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롱코트를 깔끔하게 여미고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제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에게 한마디를 내던졌다.
“Tutte risposte parlano con gusto.(모든 대답은 맛으로 말하겠습니다.)”
그날 이후, 여러 신문사는 그에 대한 소식을 실어 날랐다. 타이틀과 내용은 미묘하게 조금씩 달랐으나 그들이 시사하는 것은 같았다.
젊은 이탈리안 미슐랭 스타 셰프, 베르나도 알베르티(Bernardo Alberti). 한국에서 별 세 개에 도전한다. 내년 봄에 명동에서 개점 예정!
3
“흐음. 셰프구나. 근데 얼굴은 하나도 안 보이네.”
알 바 아니지만. 성후는 아침 신문을 휘적휘적 넘기며 커피를 마셨다. 장사하러 가기 전에 뭐라도 좀 읽어 볼까 해서 펼쳐 봤지만, 그다지 볼만한 건 없었다. 매번 9시 뉴스에서 나오는 말들이 모양만 조금씩 달라져서 적혀 있을 뿐이었다.
1면에 실린 건 항상 있는 정치 얘기들. 그 뒤에는 한국을 찾은 유명 셰프에 관한 얘기였다. 선글라스를 낀 모습만 얼핏 찍혀 있었는데 이래서야 어떤 얼굴인지 알 수도 없었다.
찍은 사진 중 멀쩡한 것들을 고르고 골라 신문으로 만들었을 텐데도 이렇다.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눈에 빤히 보였다.
성후는 커피를 내려놓으며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포장마차를 열러 갈 시간이다. 붕어빵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대충 들었지만 불안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선 이론만으로 빵을 구울 수 있을 리도 없을 것이며, 손님이 많아지면 또 어찌해야 할지도 문제다. 서툰 솜씨로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성후는 머뭇거리는 발걸음을 다잡고서 겨우 집을 나섰다.
발치에 두껍게 쌓인 눈이 닿았다. 숨을 한 번 내뱉을 때마다 시야에 뽀얀 입김이 서렸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초췌해진 몰골을 조금이라도 가려 보고자 쓰고 나온 뿔테 안경이 하얗게 흐려졌다.
“하……. 장사만 할 게 아니라, 빨리 직장 찾아봐야 하는데.”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터덜터덜 걸었다. 붕어빵 장사에는 큰 불만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도와 드릴 수 있다면 그저 기쁠 따름이다. 문제는 언제까지 이 장사를 자신이 봐줄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어디에라도 이력서를 넣어 보고 면접이라도 보러 다녀야 할 판에 붕어빵 장사라니. 뜻밖에 태연히 돌아가는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묶여 있는 포장마차의 끈을 풀고 불을 켰다. 제일 먼저 도구들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반죽 통과 팥, 슈크림 통. 그리고 돈 통. 기름과 종이 포장지의 위치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폈다. 할머니의 평소 성격답게 모든 도구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성후는 양손에 입김을 호 불어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그러고는 우선 반죽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달콤한 냄새를 맡자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샛노랗고 예쁜 색감을 자랑하는 슈크림 붕어빵. 그리고 새카만 속이 비치는 오리지널 팥 붕어빵. 바삭바삭한 식감과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 김이 올라오는 갓 나온 붕어빵을 불어 가며 먹으면 얼마나 행복한가.
종이봉투를 꼭 끌어안고 길을 가는 동안엔 품 안이 따뜻해져서 잠시나마 추위를 잊을 수 있다. 겨울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다. 성후 또한 다르지 않았다. 현금은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고 번거롭기만 하지만 겨울에는 꼭 주머니에 몇천 원씩 넣어 다니곤 했으니 말이다.
붕어빵 틀에 기름을 바르고 반죽을 붓고 있으니 그새 손님이 찾아왔다.
“할머니는 관두셨나요? 여기 그 포장마차 아닌가?”
“그 포장마차 맞습니다. 할머니는 사정상 잠시 못 나오게 되셔서 제가 대신 봐 드리는 겁니다.”
단골이 제법 많았다. 이 근방에 붕어빵 파는 곳이 별로 없는 탓도 있었지만, 할머니께서 그만큼 오래 장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에는 누가 살고, 저 학교에는 어떤 아이들이 다니며 요즘 퇴근 때마다 사 가는 직장인은 어떤지……. 이 동네의 모든 걸 꿰고 계셨다. 그런 분으로부터 이 일을 맡아 버려서인지 괜스레 어깨가 무거웠다.
손님들이 거의 다 갔을 무렵 한 남자가 찾아왔다. 까만 코트 안에 단정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딱 봐도 붕어빵과는 인연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저걸 입고 붕어빵을 먹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이었다.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에 자리한 눈은 안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붕어빵 지금 살 수 있을까요?”
“아, 네. 몇 개 드릴까요?”
그는 나와 있는 붕어빵들을 유심히 눈으로 훑더니 말했다.
“우선 골고루 다섯 개씩 주시겠어요? 맛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
이런 사람이 ‘싶어 하는 분’이라며 존칭을 쓸 정도면 어지간히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하긴 붕어빵 심부름마저 타인에게 시킬 정도인데. 성후는 속으로 말들을 꾸역꾸역 삼키며 붕어빵을 포장해 주었다.
남자는 현금을 주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로 뛰어가 버렸다. 그 자태가 어찌나 급한지 잔돈을 거슬러 줄 틈도 없었다. 손에 쥔 3천 원이 그저 무안하게 느껴졌다.
“높은 사람들도 붕어빵이 먹고 싶긴 한가 보네.”
아니면 저런 사람마저 찾아올 정도로 여기 붕어빵이 특별한 건가.
성후는 실수로 태워 버린 붕어빵을 하나 집어 먹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알 게 뭔가. 우연히 지나가다 온 사람일 텐데. 그런 것보다도 지금은 이 여린 붕어빵들이 타지 않게 뒤집어 주는 게 먼저다.
그러다 문득 포장마차 앞에 선 차를 보며 쓴 한숨을 삼켰다. 멋들어진 검은 세단이 아까부터 줄곧 저기에 서 있었는데, 그게 참 얄미웠다. 누구는 한겨울에 붕어빵 팔며 서 있는데 누구는 비싼 외제 차를 끌고 다니다니. 이렇게나 불공평할 수가. 괜히 심사가 뒤틀려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두고 봐라. 건축으로 성공해서 이름을 알리는 디자이너가 되어 줄 테다. 그럼 저것보다 더 멋진 차 끌고 다닐 테다!
“근데 저 차, 아까 그 차 아닌가?”
3천 원 잊고 가 버린 사람이 내렸던 차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한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도 있구나. 아니, 이렇게 무서운 사람도 있구나. 밝은 블론드 머리와 벽안도 압권이지만 분위기 또한 범상치 않았다.
핏이 좋은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가 성후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성후는 그 뒤에 있는 차를 힐끔 쳐다봤다. 설마 저 차 주인인가?
“붕어빵.”
겨울바람과도 같은 낮고 시린 목소리였다. 바리톤의 울림이 마치 귓속으로 녹아드는 듯하여 정신이 멍해졌다. 하지만 곧 그가 손님이란 자각을 하며 성후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몇 개 드릴까요?”
저런 옷 입고, 저런 차 타고 붕어빵 사 먹는 사람도 있구나.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게 생겼는데 말이다. 굳이 예시를 들어 보자면 값비싼 호텔에서 몇십만 원짜리 음식을 사 먹을 것만 같은 사람이다. 그는 열기를 머금은 붕어빵 기계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여전히 그 목소리는 무심하고 차가웠다.
“백 개.”
네, 하고 말하려던 성후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방금 잘못 들은 건 아니지?
“네?”
“붕어빵 백 개.”
아무래도 농담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저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랬다.
성후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 말에 답했다.
“배, 백 개는 지금 당장 못 만드는데요?”
그는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턱을 어루만졌다. 손에 낀 검은 가죽 장갑 또한 값비싸 보였다. 그리고 손목에 채워진 메탈 시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만 이루어진 남자 같았다. 저절로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럼 매일 이 시간, 하나씩 받으러 오겠습니다.”
“도, 돈은…….”
“선급.”
짧게 말하며 그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묵직한 봉투는 파란 것이 아닌 새하얀 종이들로 채워져 있었다. 수표 액수를 보며 성후는 입을 뻐끔거렸다. 이 정도면 백 개가 아니라 천 개는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