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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틱 러브 2화
1. 붕어빵 (2)


성후는 숨을 흡 들이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성후를 지그시 내려 보며 서 있었다.
정체 모를 사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과 기이한 위축, 그리고 낯부끄러움이 성후의 몸을 훑었다. 분위기뿐만 아니라 그의 외모 탓이 더 크겠지만 그런 것들은 다 젖혀 두고서라도 성후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눈을 피하기도, 그렇다고 이대로 시선을 계속 마주치고 있기도 이상했다.
그러다 문득 저 차의 주인이라는 게 떠올라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성후는 한구석에 치워 두었던 3천 원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당연하게도 그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고개만 내저었다.
“아까 잔돈 안 받아 가셨어요. 그쪽 친구분이.”
친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그리 말했다.
그는 이번에도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잘생긴 놈은 뭘 해도 낫다고 그마저도 눈이 부실 정도였다. 백금으로 빛나는 머리카락……. 그러고 보면 오늘 아침 기사에도 외국인이 나왔었지, 하며 성후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히터를 틀어 두었음에도 살을 에는 추위가 파고들 즈음에야 그는 겨우 손뼉을 짝 쳤다. 그러더니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 게 아닌가. 그것도.
“부…… 붕, 어빵. 정말 맛있어요.”
조금 전까지의 유창한 한국어가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어눌하게 말이다.
성후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등 뒤에서 복화술을 쓰는 인간이라도 있는 걸까. 기웃기웃해 보아도 그 외의 인간, 아니 생물체는 개미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성후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는지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까만 볼펜으로 꼼꼼하게 적어 둔 글은 영락없는 한국어였다. 그제야 성후는 깨달았다.
‘커닝이었냐!’
조금 전의 유창한 한국어도 전부 커닝이었던 거냐고!
예상해 두었던 말을 꺼내지 못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버벅댔다. 마치 느닷없이 고장 난 기계를 보는 것만 같았다.
“아, 엠(*ehm, 음)……. 저기.”
도와줘요.
딱 그렇게 쓰여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후는 이탈리아어는 문외한이었다. 배운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언어를 어떻게 구사하란 말인가. 물론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아주 기본적인 회화만 가능할 뿐이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영어? 그런 게 지금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것 같은가.
그 남자와 함께 성후의 머릿속 또한 새하얗게 변해 버렸으니. 따끈하게 익어 가는 붕어빵 사이에서 두 남정네는 몇 분 동안이나 시선만 주고받아야 했다. 그의 비서라는 사람이 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죄송합니다. 한국말이 서툰 분이셔서……!”
3천 원을 두고 갔던 비서라는 사람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물론 상사인 그도 사과를 건넸지만 성후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거두어지질 않았다. 흡사 관찰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기분 나쁘게 훑어보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빤히 쳐다보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관찰이었다. 마치 성후에게서 얻어 낼 무언가가 있기라도 하듯. 번뜩이는 영감을 바라는 예술가처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그는 자리를 뜨기 전에 명함을 한 장 주고 갔다. 깔끔한 하얀색 명함에는 그의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이탈리아 이름인지라 읽는 데에 애를 먹었지만 그리 어려운 단어는 아니었다.
“베르…… 베르나도, 알베르티?”

어디서 많이 봤던 이름인데.
포장마차를 접고 돌아가는 길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디서 봤던 이름이더라. 외국 배우에게도 관심이 없는데, 기업인로 보이는 이를 알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도 왜 이 이름이 이다지도 낯이 익을까. 희귀한 이름이 아니라서? 아니면 누나가 보던 프로 레슬링 선수 중에 비슷한 이름이 있었나?
“다녀왔습니다.”
신발을 벗다 말고 성후는 잠시 멈춰 섰다. 그러다가 곧 다급히 거실로 뛰쳐 들어가 나가기 전 내팽개쳐 두었던 신문을 후다닥 펼쳤다. 정치 얘기로 빼곡히 덮인 면과 경제 얘기가 한창인 2면을 넘기고 3면 귀퉁이에 적혀 있는 글귀에 시선을 박았다. 찾았다, 찾았어. 이 이름을 여기서 봤었구나!
대박, 대박. 성후는 입 밖으로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다. 사진으로는 알아보기조차 힘들지만 그 사람이 맞았다. 얼핏 찍힌 옆모습과 철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이름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즉, 조금 전에 붕어빵을 사 갔던 그 사람은 오늘 신문에 나온 유명 셰프가 맞다는 말이다.
성후는 무릎을 탁 쳤다.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셰프씩이나 되는 인간이 왜 붕어빵 먹으러 오지?”
최고급 비프스테이크도 아닌 고작 세 개에 천 원 하는 붕어빵을 말이다. 심지어 백 개나 사 갔다. 아니, 정확히는 예약했다. 그렇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스타 셰프인 것도, 붕어빵을 먹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라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을 받아 버렸다는 데에 있었다.
“할머니께 뭐라고 말씀드리지?”
포장마차에서 얻는 수입은 전부 할머니의 것이다. 수고비나 고마움의 표시라며 몇 푼 쥐여 주실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몇 푼에 한해서다. 얼결에 받아 버린 이 거액의 수표를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잘나가는 포장마차라도 이 정도의 돈을 손에 쥐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돌려주는 게 좋을까. 그렇겠지? 그게 좋을 거야. 성후는 거실을 빙글빙글 돌며 계속해서 혼잣말했다.
이런 돈은 길가에서 주워도 뒤가 찜찜하다고. 맞아. 돌려줘야 해.
“혼자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니?”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성후는 몸을 화들짝 떨었다.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숨을 쉬다가, 이제는 비명까지 질러 대는 그를 보며 어머니는 고개를 내저으셨다. 해고당한 게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나 보구나. 어깨를 도닥여 오는 어머니에게 차마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성후의 둘도 없는 드라마 친구라고 하여도 그렇다.
“엄마 다시 내려가 봐야 하니까, 드라마 녹화해 놔. 알았지?”
“오늘도 늦어? 오늘 그 못된 여자가 거짓말한 거 다 밝혀질지도 모르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엄마도 그거 보려고 엄청 기다렸는데. 집 보고 싶어 하시는 손님이 계셔서 늦을 것 같아.”
밥은 밥솥에 있고 냄비에 어제 먹고 남은 찌개가 있으니 데워 먹으라며 어머니는 다급히 신발을 신고 나가셨다. 휴일이 끝나서 누나도 아버지도 없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아파트, 502호에는 성후만 덩그러니 남아 버렸다.
저도 모르게 등 뒤로 감춰 버렸던 수표가 손바닥을 따갑게 찔러 댔다. 한겨울인데도 손바닥에서만 이상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지갑을 몰래 뒤지다 걸린 것처럼 가슴 한쪽이 불편했다. 역시 이 돈은 돌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붕어빵은 쪼글쪼글해진 천 원짜리 몇 장으로 사 먹는 게 제맛이지. 암, 그렇고말고.
성후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소리에 깼는지 구석에서 자고 있던 고양이, 녹차가 성후의 무릎 위로 다가왔다. 부드러운 털을 긁어 주자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다시 몸을 말고 잘 준비를 한다. 그 나른한 모습을 보며 성후는 씁쓸한 한숨을 삼켜야만 했다.
“좋겠다. 넌 자고 먹는 게 일이라서.”
난 어쩌면 좋냐.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가 따가워서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훑었다. 건조해졌던 모양인지 까진 입술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면 현상 설계(*여러 설계안을 모아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택하기 위해 클라이언트가 여는 것이며 경쟁이 심하다.)라도 찾아서 참여해 봐야 할 텐데. 지금으로선 클라이언트가 만족할 만한 것을 만들어 낼 자신이 없었다. 분명 자신보다 더 젊고 열정이 넘쳐흐르고 독창적인 디자이너들이 압도적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클라이언트들 사이에서 소문이라도 났으면 어쩌나 싶었다. 자신이 했던 행동들을 후회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잘한 짓이라며 머리를 쓰다듬을 생각도 없었다.
“누구 없으려나.”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잘 알지만, 그래도 혹시 없을까.
“원하는 만큼 돈 대 줄 테니 너 원하는 대로 해 봐라, 하는 사람.”
진짜 없을까?
원 없이 자신의 기획대로 진행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람. 모든 걸 쏟아부은 건축물과 인테리어를 만들 수 있게 해 줄 사람…….
“응? 녹차야. 있을 것 같아?”
야아옹.

4

아침부터 하늘빛이 칙칙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처럼 거무죽죽한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거리를 걸어도 상쾌하긴커녕 찝찝함만이 성후의 입 안을 맴돌았다. 이런 날에는 집에서만 뒹굴어야 하거늘, 안타깝게도 그는 아침부터 지갑을 들고 나와야 했다.
발에 채는 녹다 만 눈을 밟으며 목도리 안에 턱을 감췄다. 새빨개진 코끝이 파르르 떨렸다. 콧물이 팽 돌아서 눈을 한 번 찡그렸다가 떴다. 눈앞에는 통화하며 들었던 목적지가 보였다.
어젯밤, 성후는 결국 견디다 못해 그의 명함을 보고 전화를 걸었더랬다. 다짜고짜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히 그렇진 않았다. 그는 서툰 한국어로나마 성후의 말에 답해 주었다.
‘ㄴ, 내일 카페, 만납니다.’
아마 카페에서 만나자는 말일 것이다. 돈을 돌려주고 싶다는 말에 그는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장소는 성후가 정했다. 그가 서울의 지리를 꿰고 있을 리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오던 길에 헤매거나 하진 않겠지?”
덩치 큰 국제 미아에, 그를 미아로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라니. 그런 건 죽어도 사양이다. 이상한 일에는 절대 휘말리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가 그렇게나 유명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되도록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
성후는 창가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른 시간이어서 손님은 별로 없었다. 드문드문 앉아서 일하거나 얘기를 나누는 사람이 전부다. 그들의 목소리 틈으로 원두를 내리는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왔다. 온풍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과 잔잔한 팝송에도 커피 향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코끝을 간질여 오는 온기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짙은 초록색 목도리를 풀어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먼저 주문한 커피가 도착하고 반 정도를 홀짝거리며 마셨을 즈음 잠잠하던 카페 문이 열렸다. 굳이 누구인지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들어서면서부터 장내의 주목을 한 번에 받아 냈다. 그러면서도 성후를 발견하자 당연하다는 듯 다가왔다.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동경 어린 시선도, 사심을 품은 마음도……. 그 모든 게 그에게는 익숙한 듯했다.
새삼 실감했다. 지금 자신이 어떤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 불러냈는가를. 더불어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웃기게도 그 사실에 거리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가슴이 뛰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없는 희귀한 것을 목전에 둔 것처럼 가슴이 저 끝까지 쿵 떨어졌다.
‘어라……?’
내가 왜 이러지? 어제도 봤던 사람인데.
무심코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같은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잠한 가슴께에서는 규칙적인 고동 소리만 어렴풋이 느껴질 뿐이었다.
“Stai bene?(괜찮아요?)”
눈앞에서 빛이 났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조명 빛을 등지고 선 채 그는 성후의 앞으로 허리를 숙였다. 걱정스레 찌푸려진 미간마저 조각 같은 남자였다. 셰프가 아니라 모델이나 배우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성후는 본능적으로 몸을 물렸다.
“네?”
“괜, 찮습, 니까?”
“아아, 네. 괜찮아요, 괜찮아! 앉아요! 싯(sit)!”
부정맥인가 보지. 성후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이 자리가 끝나면 우선 병원에라도 가 보는 게 좋겠다. 심장에 좋은 약은 뭔지 물어보고 영양제도 사면 좋으려나.
가슴을 진정시키듯 옆에 있던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가슴에 전기라도 통한 듯 찌릿하더니 이제는 얼굴과 손목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정말 무슨 병이라도 있는 게 틀림없다고 성후는 생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일을 끝맺고자 다짜고짜 주머니에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어제 받았던 거금의 수표가 들어 있다.
베르나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Oh……’ 하며 미간을 모았다.
“나, 이거 받을 수 없다. 입니다.”
“왜죠?”
한국어 좀 늘었네, 하며 성후는 입술을 삐죽이고는 말을 이었다.
“전 이 돈 못 받…….”
“오, 오오. 성후. lentamente(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해 줘. 입니다.”
하지만 성후는 그가 바란 대로 천천히 말해 줄 수가 없었다. 바빠서가 아니다. 한시라도 이 자리를 뜨고 싶어서도 아니다. 이유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 때문이었다.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동시에 성후의 경계심 또한 짙어졌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말한 적도 없는데?
베르나도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성후의 감정 변화를 빨리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물론 눈을 삐죽거리며 치켜뜨고 있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만 말이다. 그리 둔한 남자는 아닌 듯했다. 베르나도 알베르티라는 남자는.
“어제, 전화 듣다. 입니다.”
그제야 성후는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말한 적이 없긴. 오랜 사회생활로 인한 것인지 입에 붙어 버린 전화 멘트가 있지 않았던가. ‘안녕하세요. 박성후입니다’. 분명 그 인사를 저도 모르게 그에게도 해 버린 게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한 번 들은 이름을 외워 버리는 그도 어지간한 사람이었다.
성후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말했다.
“아무튼, 알베르티 씨. 이거…….”
손가락으로 봉투를 콕콕 찔렀다. 그럴 때마다 베르나도는 자신의 심장을 찔리기라도 한 듯 아픈 표정을 지었다.
“픽 업!”
“오……. Oh, OOOh, 성후. 진정해요.”
“‘저는 이 돈 불편하다, 입니다’라고요.”
“왜…….”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 사람이 알기 듣기 쉽도록 설명하려면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성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듯이 지압했다. 베르나도는 신문에 실렸던 그 지적이고 도시적인 남자의 이미지와는 달리 안절부절못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캐리어를 끌며 공항을 빠져나가던 그 남자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눈앞에 있는 건 부모님께 혼나 울상이 된 것 같은 덩치 큰 어린애 한 명뿐이다.
그렇게나 붕어빵이 먹고 싶은 걸까. 셰프면 붕어빵보다 더 좋은 음식을 많이 해 먹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성후는 그가 이해되지 않아 눈 사이를 모았다.
“그, 뭣이냐. 너무 커요.”
“What?”
“금액이, 어마운트(amount)! 너어어무 크다고!”
너무를 강조하려 팔을 크게 벌려 원을 만들었다.
베르나도는 이해한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내려쳤다. 하지만 이해만 했을 뿐 납득한 것 같진 않았다. 애초부터 성후 또한 그를 완전히 납득시킬 생각으로 보자고 한 건 아니었다. 붕어빵을 수표 주고 사 먹는 사람에게 뭘 바라겠는가. 사는 세계가 다를 뿐이다. 성후는 그저 돈만 돌려주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그가 붙잡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나 좋은 방법 있다, 입니다!”
“네?”
그는 봉투를 다시 품속에 넣더니 지갑을 꺼냈다. 그러더니 이번엔 성후에게도 익숙한 지폐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영롱한 초록빛의 배춧잎이었다. 그와 대화하고 있는 매 순간 그리워지는 그분이 그려진 만 원권이다. 오, 세종대왕님. 성후는 속으로 신음했다.
그는 만 원권을 열 장 내밀며 말했다.
“나눠서 주면 된다, 입니다!”
10만 원씩 백 일 동안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 성후는 자신의 이마를 탁 쳐 버리며 탄식했다.
거참, 계산은 빠르네! 딱 백 일이네!
“아니. 아니이. 제 말은 그게 아니고오!”
“성후, 왜? 입니까?”
왜입니까고 뭐고 간에. 자신이 원한 결말은 이게 아니었다. 하지만 짧은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그에게 짧은 영어밖에 구사할 줄 모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별것 없었다. 포장마차의 본래 주인은 따로 있는 것과 자신이 잠깐만 봐주고 있다는 것. 그 모든 상황을 그에게 간략하게 설명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만들어서 드세요. 요리 잘하시잖아.”
유명 셰프가 붕어빵도 못 만들려고.
성후는 설탕이 녹은 커피를 스푼으로 휘적휘적 저으며 쓴 한숨을 내뱉었다. 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인데 아주 기운이 쭉쭉 빠져나간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베르나도는 눈을 빛내며 흡사 청혼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미묘한 기대와 설렘으로 인해 떨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치 봄을 고대하는 나뭇가지처럼.
“성후, 붕어빵 흥미 있습니다. Mi sono innamorato.”
그의 이탈리아어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성후의 가슴은 또 한 번 저 아래로 쿵 떨어졌다.
톡, 하며 무언가가 터졌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새싹인지 꽃봉오리인지 모를 것이 톡, 톡, 하며 터져 댔다. 봄이 오는 소리였다. 아직 성후는 모르는 봄이 겨울 끝에서부터 다가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이후 베르나도는 한국 음식이 먹어 보고 싶다며 말을 늘어놓았다. 물론 늘어놓았다고 해 봤자 단어와 단어가 띄엄띄엄 연결된 어색한 한국어였지만 말이다. 한국 음식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 소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둥 이왕이면 골고루 먹어 보고 싶다는 둥 참고로 가리는 음식은 없다는 둥. 주절주절 잘도 말했다. 그는 말을 이어 가면서도 성후에게서 단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성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까 이거, 꼬시는 거지?
성후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가 헛기침했다.
“……어차피 시간도 좀 있고.”
‘실직했으니까’라는 말은 슬쩍 삼켰다.
“가끔이라도 괜찮다면야.”
그는 성후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한국말이 서툰 것 같지만 눈치와는 별개인 모양이다. 그는 성후의 양손을 덥석 잡으며 감격에 목소리를 떨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성후!”
“아, 알았으니까 손 좀 놔 주면…….”
“아. 한쿡인은 이럴 때, 이거 한다고 들었어요.”
찰나의 순간이었다. ‘무엇을?’이라고 생각할 틈은 물론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베르나도는 메뉴판을 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막았다. 동시에 성후의 입술에는 그의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박하사탕이라도 먹었던 모양인지 그에게선 희미한 박하 향기가 났다. 겨울보다는 따뜻했고 봄보다는 차가웠다. 청아한 향기가 그의 숨결을 타고 성후의 입가를 간질여 왔다. 마치 꽃잎에 입술을 댄 것만 같았다.
베르나도는 입술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꽃이 핀 듯한 해사한 미소는 오롯이 성후만을 향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여전히 메뉴판은 손님들과 두 사람 사이를 벽처럼 막고 있었다. 마치 이곳만 다른 세상이 된 것처럼.
“난 당신 꼬셨다, 입니다.”
맞죠? 베르나도는 그렇게 말끝을 맺었지만 성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메뉴판이 금세 치워지고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어도 마찬가지였다. 성후를 현실로 끌어 올린 건 돌연 울린 베르나도의 휴대폰 벨소리였다.
숨을 헉 들이켜며 성후는 목을 떨었다.
“이, 이게, 무슨…….”
베르나도가 전화를 받으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아니다입니까?”
“아니에요! 아니라고! 대체 어디서 이런 걸 배워 온 겁니까?”
이런 한국 문화는 어디에도 없다고!
성후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곧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목을 움츠렸다. 입가에는 아직도 그가 남기고 간 온기가 맴돌고 있었다. 남자와, 아니 그 이전에 키스 자체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무심코 조금만 더라고 생각했던 게 부끄러웠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찬물을 또 한 번 벌컥거리며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