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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틱 러브 3화
1. 붕어빵 (3)
성후의 심경 변화를 알아차렸는지 베르나도는 전화도 받지 못한 채 죄스러운 표정만 지었다.
“성후……. 기분 나쁘게 하고, 미안해요.”
그의 순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화도 낼 수 없었다. 애초에 잘못된 문화를 배워 온 것이니 무조건 그의 잘못도 아니다. 성후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참에 다시 배우면 되니까.”
그에게서 받았던 명함을 꺼내 번호를 확인하고 휴대폰 다이얼을 꾹꾹 눌렀다. 곧 그의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그거 내 번호니까 저장하면 돼요. 첫 만남은 마우스 투 마우스가 아니라 번호 교환이면 충분해요.”
“Oh……. 한쿡 영화, 다르군요.”
문화 오류의 근원지가 어딘지 알겠다.
그것은 픽션일 뿐, 실제로 그랬다가는 뺨따귀를 맞는다며 성후는 그에게 설명하였다. 베르나도는 거듭 사과하면서도 미리 공부해 왔던 문화가 전부 잘못된 것이었다는 걸 알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굳이 따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매너 있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거늘. 매너가 너무 좋은 나머지 본질이 흐려져 버렸다.
성후는 애써 맞추려 하지 말고 편한 대로 하라며 조언 아닌 조언까지 했다. 성격에 어울리지도 않게 말이다. 어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그가 제 앞에서 보이는 허술한 면이 마음에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답지 않게 말이 많아지고 키스마저도 괜찮다며 묻어 버리는 거다. 그리고 성후는 그 친절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알지 못했다.
“Capisco. 알겠습니다. 성후……. 카나리아.”
“……네?”
그렇다. 지금처럼.
“아아. 카나리아. 당신은 마음마저 곱습니다. 마치 그대가 만든 pane(빵)처럼!”
이럴 때만 유창한 한국어가 흘러나오는 그를 보며 감탄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솜털이 쭈뼛 돋아나는 말에 몸서리를 쳐야 할지 성후는 감을 잡지 못했다. 그제야 문득 인터넷에서 보았던 이탈리아 남자들에 관한 말들이 떠올랐다. 이탈리아로 여행 혹은 유학을 떠났던 그네들이 뭐라고 했던가.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한결같이 스윗하다 했던가. 그 무성한 소문들을 들으며 말도 안 된다고 웃었더랬다. 설마, 그게 같은 남자에게도 통용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카, 카나리아? 누가요?”
내가?!
하지만 베르나도는 대답하긴커녕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휴대폰이 또다시 울린 탓이었다. 그는 성후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말했다. 먼 길을 떠나기 전 인사를 건네는 연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카나리아. 나는 가야 합니다. 나중에, 전화합니다. 꼭.”
그러곤 누가 붙잡기도 할세라 후다닥 나가 버렸다. 통화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모국어는 조금 사무적이면서도 차가웠다. 그야말로 베르나도 알베르티라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언어와 음성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앞에 앉아 있던 남자는 환상이었던 게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성후는 그가 나간 후 몇 분 동안 얼이 빠져 있다가 느릿느릿 카페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이 멍했다. 한겨울에 꿈이라도 꾼 건가. 입술에 남은 감촉도 그가 내내 자신에게 보내던 눈길도, 행동도 전부 다 현실이라기엔 너무 달콤하지 않은가. 적어도 성후가 아는 현실은 이렇지 않았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고 뺨을 꼬집어 보았다.
“아얏.”
소파에 앉아 있던 누나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혼자서 뭐 해? 내가 꼬집어 줘?”
“돼, 됐거든?!”
“다 큰 놈이 됐거든이 뭐냐? 얼굴 동안이라고 성격까지 어려지네, 이젠.”
성후는 투덜거리려다 그냥 한숨을 삼키는 것으로 대신했다. 대신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누나의 옆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찬찬히 곱씹어 보았다. 그와 대화하는 내내 느꼈던 감각의 정체가 무엇일까.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쿵 떨어지던 그 소리는 대체 뭐였을까. 왜 아직도 뺨이 뜨거운 걸까.
“누나, 있잖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성후는 말을 조심스레 꺼내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TV를 향해 있다곤 하나 귀는 말에 집중하고 있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막, 누구를 보는데 가슴이 쿵 떨어지고 뺨이 화끈거리면, 그게 뭐지? 아니, 그게 그거 아니지? 아니어야 하는데…….”
“뭐야. 또 누구한테 반했냐?”
대답은 허무할 정도로 시원스럽게 나왔다. 그녀는 TV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았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도 성후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나인 박성아이기 때문이다.
“또, 또라니!”
“맞잖아. 틈만 나면 누구한테 반하고 이번에도 실패라면서 밤새 울고. 하루 이틀이어야지.”
성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아무렇지 않은 척 옆에 있던 과자를 한 움큼 집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이 누나는 말이지. 네가 어떤 연애를 하든 상관없는데. 아무리 그래도 누나라서 동생이 우는 꼴은 이제 좀 그만 보고 싶거든? 어떤 놈이야?”
“왜 놈이라고 단정 짓는데에…….”
“그거야 당연히.”
몰라서 묻냐? 그리 말하는 듯한 시선이 성후에게로 돌아왔다.
“너 게이니ㄲ……. 읍, 읍!”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푸하, 뭐 어때! 엄마도 아빠도 지금 집에 안 계신데! 그리고 몇 번이나 말하지만 두 분은 알아도 별말 안 하실 거라니까?”
“그래도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말하지 마! 절대로!”
지금껏 연애해 온 수, 셀 수 없음. 또한 실패한 수도 셀 수 없음. 화려하다면 화려한 전적을 가진 성후지만 그 수많던 연애 하나하나에 진심이었다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다. 연애만 하면 간이며 쓸개며 다 빼 주다가 결국엔 후회한다. 첫 단추가 좋지 않았던 게 큰 이유겠지만 조금은 동생이 독해졌으면 하는 게 누나인 그녀의 바람이었다.
성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걱정 마. 이제 절대 연애 안 할 거니까.”
“얼씨구. 그 말만 열 번은 들었다.”
“이번엔 진짜라고!”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방문을 닫았다. 샤워할 생각도 들지 않아서 그대로 양말만 벗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그때의 일이 떠오르곤 한다. 암흑 속에서도 아득한 꿈속에서도 매번 자신을 괴롭히는 악몽의 원인은 누구보다 미운 사람이며, 누구보다 애틋한 사람이다.
‘선배, 좋아해요! 진심으로!’
미술부 부장이었던 그는 머리를 짧게 잘라 시원스러운 이목구비였으며 언제나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 인기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잘생겼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가 좋았다. ‘아,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구나’라고 어쩌다가 자각해 버린 풋사랑…….
벚꽃이 막 폈을 무렵의 첫사랑이었다.
2. 떡볶이 (1)
1
계기는 언제나 사소한 것들이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그 사람이 웃어 주었다든가, 날아오던 공을 막아 주었다든가, 굳이 택시를 붙잡아 준다든가……. 누나는 항상 쓸데없는 일로 참 잘도 빠져든다고 했지만 성후는 그런 것들이 좋았다. 사소하면서도 작은 배려가 가슴을 뛰게 하였다. 첫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부실에 일찍 도착할 때면 선배와 둘이서만 있는 시간이 참 좋았더랬다.
거친 화구 냄새와 열어 둔 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도 좋았다. 그 사람의 소매 끝에 묻어 있던 물감 자국도, 곁에 다가가면 사각사각 들려오는 스케치 소리도 전부 좋았다. 봄바람은 추웠지만 달아오른 뺨을 식히기엔 적당했다.
‘뭘 그렇게 빤히 보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니요.’
떨리며 흘러나온 목소리가 민망하여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게 웃겼는지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떨리는 어깨를 따라 그의 검은 머리카락도 살랑였다. 그에게서 나는 봄 향기가 너무 좋아서 성후도 그냥 따라 웃어 버렸다.
***
돌연 요란한 노랫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성후는 몸을 화들짝 떨며 옆에 있던 휴대폰을 쥐었다. 아침 8시로 설정해 두었던 알람이 울려 대고 있었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덕분에 잠도 다 달아났다. 물론 더 꾸고 싶을 만한 꿈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미간을 찌푸린 채 이마를 짚었다. 그리 자주 꾸던 꿈도 아니거늘 웬일로 그때 꿈을 다 꾸나 몰라. 콧등이 시려서 이불을 위로 끌어 올리며 꿈을 떨쳐 내듯 눈꺼풀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머릿속에서 꿈이 떠나가는 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휴대폰에 다시금 눈길을 주었다. 자던 사이 문자가 여러 개 와 있었다. 그중에선 처음 보는 번호도 있었는데 확인하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온늘 붕ㅇㅓ빵 먹으러 가겠습니다.]
한국식 타자도 익숙지 않은 듯 메시지 역시 엉망이었다. 띄어쓰기도 잘못 누른 건지 두 번 이상 된 것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글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뭐야. 한국어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아닌가? 공부부터 다시 해야겠네.
[6시 이후로 오세요.]
그에게 답장을 보낸 후 침대에서 일어섰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실직한 뒤로는 귀찮아서 씻기도 싫었거늘 오늘은 비누 향이 왜 이리도 좋은지. 평소에 잘 뿌리지도 않았던 향수에는 왜 또 눈길이 가는지. 고작 붕어빵 팔러 갈 뿐인데 오늘따라 왜 이다지도 패션이 신경 쓰이는지. 알 수 없이 그저 마음만 들떴다.
오랜만에 드라이어를 들어 머리를 말리고 있는 성후를 보며 성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연애는 죽어도 안 하겠다더니……. 어찌 하루 만에…….
일찍부터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성후는 분주히 움직였다. 오랜만에 드로잉북과 펜도 가방 안에 넣었다. 붕어빵만 팔며 그저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 것도 지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디자인에 손대고 싶었다. 회사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손끝이 근질근질했다. 직업병은 어딜 가서도 못 고치나 보다.
현금이 어느 정도 들어 있는 지갑까지 챙긴 후에야 휴대폰을 확인했다. 뭐야, 왜 시간이 이것밖에 안 됐어. 툴툴거리던 목소리를 들은 성아가 말을 툭 내던졌다. 그녀는 이미 경찰 제복으로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마친 후였다.
“누가 보면 데이트하러 가는 줄 알겠네.”
“뭣…….”
“나 간다. 오늘 회식이니까 저녁 혼자 먹어.”
쾅. 닫혀 버린 현관문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아니, 비단 빨리 닫힌 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허를 찔린 탓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행동들, 생각들 전부……. 이것은 마치…….
“아니야! 미쳤어? 미쳤냐고!”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침대에 머리를 박아 버렸다. 이불을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서 중얼거렸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이건……. 사랑이 아니야! 썸 타는 게 아니야!
그런 성후의 생각을 질타하듯 휴대폰이 울렸다. 순간 죄라도 지은 것처럼 몸이 펄쩍 뛰었다. 혹시 베르나도일까 싶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대학 친구였다. 웃기게도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자마자 나온 건 안도가 아닌 아쉬움이었다.
진짜 미쳤나 보다.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성후는 혀를 차며 휴대폰을 받았다. 하도 연애와 선을 긋고 살았더니 욕구 불만이라도 쌓인 걸까. 그도 아니면 이번엔 정말 다를지도 모른다고 마음 한구석에서 당치도 않은 기대라도 품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어. 왜?”
-왜긴 뭐가 왜냐? 이 자식이 회사 때려치웠음 말을 해야 했을 거 아냐!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
-누구겠냐. 너희 누나밖에 더 있냐?
가게에서 만나서 안부를 물었다가 어쩌다 알게 되었단다. 성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하며 책상 의자를 빼서 앉았다. 졸업한 이후로 취업이다 뭐다 하며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와의 통화라 그런지 괜스레 가슴이 설렜다.
물론 이 설렘이 조금 전의 감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또한 성후는 느끼고 있었다. 베르나도를 생각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지금 느껴지는 것은 그저 오랜만에 듣는 친구 목소리를 향한 그리움과 반가움. 그뿐이었다.
성후는 다리를 모아서 좀 더 자세를 편히 하고 앉았다.
-야야, 술 마시자. 나와라.
“나 저녁에 일 가야 돼, 인마.”
-엑. 뭐 하는데? 이제 백수 아니냐? 빽호 새끼 여친이랑 깨졌다고 울고불고 난리 났는데에!
“아…… 뭐, 그런 게 있어. 하여튼 못 가.”
그러니까 너희가 알아서 잘 좀 달래 줘.
성후의 말에 그는 툴툴거렸지만 이내 알겠다며 끊어 버렸다. 시간만 괜찮다면 함께 가서 놀고 마시고 싶지만 웃기게도 그와 상반되는 마음도 존재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연애에 실패한 자신이 친구에게 가서 뭐라고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자신의 마음마저 완전히 치유된 게 아니거늘. 자신의 상처마저 들쑤시지 않는다면 다행이겠다.
거실로 나가 괜히 잘 놀고 있는 녹차를 불러 보았다. 하지만 털실로 유혹해 봐도, 밥으로 유혹해 봐도 저 캣타워가 뭐가 그리 좋은지 다가오지도 않았다.
너도 나 버리냐. 성후는 마음이 삐죽 솟아올랐다가 한숨을 내쉬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 들떴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착 가라앉아 버렸다. 이게 다 누나가 이상한 말을 해서 그렇다.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그냥……. 그래, 그냥 곤란해하는 사람 도와주는 것뿐이지 않나. 봉사 활동! 발룬티어(volunteer)!
“아, 그러고 보니.”
앞으로 그 사람과 자주 만나려면 이탈리아어 공부는 좀 해 둬야 하려나. 유창하진 않더라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끔 말하는 이탈리아 단어조차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으니. 앞을 생각하자면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다.
성후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우선은 공부의 목적으로 그에게 들었던 말을 검색해 볼 심산이었다.
“발음이 뭐였더라. 미……. 미 소노……. 아, 이거 아닌가?”
[Mi sono innamorato.]
연관 검색어에 바로 뜰 정도면 엄청 간단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곧 성후는 후회하게 되었다. 차라리 검색해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리 생각하게 되기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잘못 봤나? 혹시 그때 잘못 들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발음을 들어 보니 그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 잘못 들은 것도 아니며, 잘못 읽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쉽게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문장의 뜻은 타인에게 함부로 내뱉을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또 한 번 쿵 떨어졌다가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인지, 그도 아니면 설렘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 쪽을 부여잡았다. 이러다가 갑자기 심장이 멈춰 버리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근두근두근…….
성후는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숨을 집어삼켰다. 어딘가에서 또 한 번 봄꽃 냄새가 났다. 코끝이 간질간질한 것이 꽃가루라도 흩날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당신에게 반했습니다.]
성후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다 이런 사람들뿐인 걸까. 어쩌자고 이런 말을 쉽게 내뱉는 건지 모르겠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연애도 일도 항상 실패만 반복해 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타인이 주는 사랑에 목말라 있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남들이 하는 행복한 연애라는 것을 자신도 해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니 어찌 되어도 뭐라고 하지 마요.
앞으로 자신은 필사적으로 이 마음을 부정할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결국엔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건 백 퍼센트 당신 탓이다. 그러니 나중에 뭐라고 하기 없기다.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티끌만 한 다정함이었다 하더라도, 그저 해 본 말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런 사소한 상냥함에 목말라 있는 게 박성후라는 인간이니까.
“당신 진짜……. 나중에 후회해도 난 모른다고.”
내 집착이 얼마나 무서운데.
하아, 하며 묵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큰 과제라도 떠안은 듯 온종일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만 생각했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그가 했던 행동마저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흡사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았던 말투와 손짓, 그리고 키스…….
정말로 자신에게 반해서 그런 거라면? 자신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내심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뭐가 달라도 달라지는 게 아닐까. 정말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나타난 게 아닐까.
짝!
성후는 양 뺨을 세게 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키스가 인사인 나라도 있다지 않나. 이탈리아가 그렇다고는 들어 본 적이 없지만, 그에게 있어선 인사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키스할 리가 없지 않은가. 입술이 떨어졌을 때 베르나도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처럼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고, 심지어 떨고 있지도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어떡해.
성후는 소심해진 마음을 억누르듯 가방끈을 꽉 쥐었다. 누가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른다. 알게 된 지 채 이틀 만에 사심을 품느냐고. 세상 모든 사람이 연애 대상으로 보이는 거냐고. 하지만 첫사랑에 데여 버린 마음은 아직도 누군가에게서 치유받길 바라고 있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공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래. 이번에야말로 누군가는 이 손을 잡아 주겠지, 하면서. 갈증 때문에 목이 말랐다.
저 앞에 보이는 포장마차를 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재취업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데 더 큰 짐 덩어리가 어깨에 올려진 기분이다. 별거 없었을 행동에도 의미를 부여하려 하고 뜻을 찾으려 하는 게 싫었다.
‘넌 조금만 잘해 주면 그러더라. 친절과 호감은 구분해야 해.’
언제였더라. 네 번째로 연애에 실패했을 때였던가. 누나가 그렇게 말했다. 첫사랑으로 인해 뻥 뚫려 버린 성후의 가슴을 들여다보듯. 그 한마디에 낯이 확 빨개졌다. 그녀의 말대로이기 때문이었다.
애정 결핍이 낳은 공허함은 상냥함을 바랐다. 어쩌면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은 누구든 좋은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것이 호감인지 단순한 친절인지도 구분 못 하는 게 아닌가.
누나가 혀 찰 만하네.
성후는 포장마차 안에 가방을 내려 두며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손님이 많았더라면 조잡한 상상들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건만 오늘따라 유독 한산했다. 어쩌다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를 손에 꼭 쥐고 오는 아이들 몇 명이 전부였다.
“이 상태로 오늘 그 사람을 만나야 하나?”
그건 좀 그런데. 만나지 말자고 해?
아무렇게나 펼쳐 둔 드로잉북에 스케치하며 턱을 괬다. 마음대로 투시도를 그리다가도 귀퉁이에 평면도도 작게 그려 보았다. 건물을 지탱할 뼈대와 내부의 인테리어가 금세 완성되어 갔다. 깎아 두었던 연필심이 뭉퉁해질 때까지 긋고 또 그었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쉼 없이 움직였다. 머릿속에 있는 디자인을 꺼내 옮기는 손은 거침없었으며 세심하기까지 했다. 몇 년간 디자이너 일을 해 온 만큼 손은 스케치에 익숙해져 있었다. 능숙하기 짝이 없는 손놀림이다. 어느새 건물 한 채가 드로잉북 한 면을 꽉 채울 정도로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도안이 완성되어 갈수록 머릿속은 아득해졌다. 답을 내릴 수 없는 생각이 빙글빙글 돌아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후? 성후?”
“……으음.”
돌연 성후의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나리아?”
성후는 저도 모르게 연필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언제 왔는지 모를 베르나도와 눈이 마주쳤다. 새파랗고 맑은 눈동자에 놀란 성후의 모습이 오롯이 비쳤다.
“어, 언제 왔…….”
“방금 왔다, 예요. 바쁘다입니까?”
“아, 아뇨. 괜찮아요. 그, 곧 접을 시간이니까 따뜻한 데서 기다릴래요?”
허둥거리며 스케치북을 접고 주위를 정리했다. 붕어빵을 건네는 손은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베르나도마저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의 떨림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떨리지. 심장은 왜 또 이렇게 뛰는 건데.
1. 붕어빵 (3)
성후의 심경 변화를 알아차렸는지 베르나도는 전화도 받지 못한 채 죄스러운 표정만 지었다.
“성후……. 기분 나쁘게 하고, 미안해요.”
그의 순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화도 낼 수 없었다. 애초에 잘못된 문화를 배워 온 것이니 무조건 그의 잘못도 아니다. 성후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참에 다시 배우면 되니까.”
그에게서 받았던 명함을 꺼내 번호를 확인하고 휴대폰 다이얼을 꾹꾹 눌렀다. 곧 그의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그거 내 번호니까 저장하면 돼요. 첫 만남은 마우스 투 마우스가 아니라 번호 교환이면 충분해요.”
“Oh……. 한쿡 영화, 다르군요.”
문화 오류의 근원지가 어딘지 알겠다.
그것은 픽션일 뿐, 실제로 그랬다가는 뺨따귀를 맞는다며 성후는 그에게 설명하였다. 베르나도는 거듭 사과하면서도 미리 공부해 왔던 문화가 전부 잘못된 것이었다는 걸 알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굳이 따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매너 있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거늘. 매너가 너무 좋은 나머지 본질이 흐려져 버렸다.
성후는 애써 맞추려 하지 말고 편한 대로 하라며 조언 아닌 조언까지 했다. 성격에 어울리지도 않게 말이다. 어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그가 제 앞에서 보이는 허술한 면이 마음에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답지 않게 말이 많아지고 키스마저도 괜찮다며 묻어 버리는 거다. 그리고 성후는 그 친절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알지 못했다.
“Capisco. 알겠습니다. 성후……. 카나리아.”
“……네?”
그렇다. 지금처럼.
“아아. 카나리아. 당신은 마음마저 곱습니다. 마치 그대가 만든 pane(빵)처럼!”
이럴 때만 유창한 한국어가 흘러나오는 그를 보며 감탄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솜털이 쭈뼛 돋아나는 말에 몸서리를 쳐야 할지 성후는 감을 잡지 못했다. 그제야 문득 인터넷에서 보았던 이탈리아 남자들에 관한 말들이 떠올랐다. 이탈리아로 여행 혹은 유학을 떠났던 그네들이 뭐라고 했던가.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한결같이 스윗하다 했던가. 그 무성한 소문들을 들으며 말도 안 된다고 웃었더랬다. 설마, 그게 같은 남자에게도 통용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카, 카나리아? 누가요?”
내가?!
하지만 베르나도는 대답하긴커녕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휴대폰이 또다시 울린 탓이었다. 그는 성후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말했다. 먼 길을 떠나기 전 인사를 건네는 연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카나리아. 나는 가야 합니다. 나중에, 전화합니다. 꼭.”
그러곤 누가 붙잡기도 할세라 후다닥 나가 버렸다. 통화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모국어는 조금 사무적이면서도 차가웠다. 그야말로 베르나도 알베르티라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언어와 음성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앞에 앉아 있던 남자는 환상이었던 게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성후는 그가 나간 후 몇 분 동안 얼이 빠져 있다가 느릿느릿 카페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이 멍했다. 한겨울에 꿈이라도 꾼 건가. 입술에 남은 감촉도 그가 내내 자신에게 보내던 눈길도, 행동도 전부 다 현실이라기엔 너무 달콤하지 않은가. 적어도 성후가 아는 현실은 이렇지 않았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고 뺨을 꼬집어 보았다.
“아얏.”
소파에 앉아 있던 누나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혼자서 뭐 해? 내가 꼬집어 줘?”
“돼, 됐거든?!”
“다 큰 놈이 됐거든이 뭐냐? 얼굴 동안이라고 성격까지 어려지네, 이젠.”
성후는 투덜거리려다 그냥 한숨을 삼키는 것으로 대신했다. 대신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누나의 옆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찬찬히 곱씹어 보았다. 그와 대화하는 내내 느꼈던 감각의 정체가 무엇일까.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쿵 떨어지던 그 소리는 대체 뭐였을까. 왜 아직도 뺨이 뜨거운 걸까.
“누나, 있잖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성후는 말을 조심스레 꺼내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TV를 향해 있다곤 하나 귀는 말에 집중하고 있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막, 누구를 보는데 가슴이 쿵 떨어지고 뺨이 화끈거리면, 그게 뭐지? 아니, 그게 그거 아니지? 아니어야 하는데…….”
“뭐야. 또 누구한테 반했냐?”
대답은 허무할 정도로 시원스럽게 나왔다. 그녀는 TV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았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도 성후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나인 박성아이기 때문이다.
“또, 또라니!”
“맞잖아. 틈만 나면 누구한테 반하고 이번에도 실패라면서 밤새 울고. 하루 이틀이어야지.”
성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아무렇지 않은 척 옆에 있던 과자를 한 움큼 집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이 누나는 말이지. 네가 어떤 연애를 하든 상관없는데. 아무리 그래도 누나라서 동생이 우는 꼴은 이제 좀 그만 보고 싶거든? 어떤 놈이야?”
“왜 놈이라고 단정 짓는데에…….”
“그거야 당연히.”
몰라서 묻냐? 그리 말하는 듯한 시선이 성후에게로 돌아왔다.
“너 게이니ㄲ……. 읍, 읍!”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푸하, 뭐 어때! 엄마도 아빠도 지금 집에 안 계신데! 그리고 몇 번이나 말하지만 두 분은 알아도 별말 안 하실 거라니까?”
“그래도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말하지 마! 절대로!”
지금껏 연애해 온 수, 셀 수 없음. 또한 실패한 수도 셀 수 없음. 화려하다면 화려한 전적을 가진 성후지만 그 수많던 연애 하나하나에 진심이었다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다. 연애만 하면 간이며 쓸개며 다 빼 주다가 결국엔 후회한다. 첫 단추가 좋지 않았던 게 큰 이유겠지만 조금은 동생이 독해졌으면 하는 게 누나인 그녀의 바람이었다.
성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걱정 마. 이제 절대 연애 안 할 거니까.”
“얼씨구. 그 말만 열 번은 들었다.”
“이번엔 진짜라고!”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방문을 닫았다. 샤워할 생각도 들지 않아서 그대로 양말만 벗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그때의 일이 떠오르곤 한다. 암흑 속에서도 아득한 꿈속에서도 매번 자신을 괴롭히는 악몽의 원인은 누구보다 미운 사람이며, 누구보다 애틋한 사람이다.
‘선배, 좋아해요! 진심으로!’
미술부 부장이었던 그는 머리를 짧게 잘라 시원스러운 이목구비였으며 언제나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 인기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잘생겼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가 좋았다. ‘아,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구나’라고 어쩌다가 자각해 버린 풋사랑…….
벚꽃이 막 폈을 무렵의 첫사랑이었다.
2. 떡볶이 (1)
1
계기는 언제나 사소한 것들이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그 사람이 웃어 주었다든가, 날아오던 공을 막아 주었다든가, 굳이 택시를 붙잡아 준다든가……. 누나는 항상 쓸데없는 일로 참 잘도 빠져든다고 했지만 성후는 그런 것들이 좋았다. 사소하면서도 작은 배려가 가슴을 뛰게 하였다. 첫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부실에 일찍 도착할 때면 선배와 둘이서만 있는 시간이 참 좋았더랬다.
거친 화구 냄새와 열어 둔 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도 좋았다. 그 사람의 소매 끝에 묻어 있던 물감 자국도, 곁에 다가가면 사각사각 들려오는 스케치 소리도 전부 좋았다. 봄바람은 추웠지만 달아오른 뺨을 식히기엔 적당했다.
‘뭘 그렇게 빤히 보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니요.’
떨리며 흘러나온 목소리가 민망하여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게 웃겼는지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떨리는 어깨를 따라 그의 검은 머리카락도 살랑였다. 그에게서 나는 봄 향기가 너무 좋아서 성후도 그냥 따라 웃어 버렸다.
***
돌연 요란한 노랫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성후는 몸을 화들짝 떨며 옆에 있던 휴대폰을 쥐었다. 아침 8시로 설정해 두었던 알람이 울려 대고 있었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덕분에 잠도 다 달아났다. 물론 더 꾸고 싶을 만한 꿈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미간을 찌푸린 채 이마를 짚었다. 그리 자주 꾸던 꿈도 아니거늘 웬일로 그때 꿈을 다 꾸나 몰라. 콧등이 시려서 이불을 위로 끌어 올리며 꿈을 떨쳐 내듯 눈꺼풀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머릿속에서 꿈이 떠나가는 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휴대폰에 다시금 눈길을 주었다. 자던 사이 문자가 여러 개 와 있었다. 그중에선 처음 보는 번호도 있었는데 확인하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온늘 붕ㅇㅓ빵 먹으러 가겠습니다.]
한국식 타자도 익숙지 않은 듯 메시지 역시 엉망이었다. 띄어쓰기도 잘못 누른 건지 두 번 이상 된 것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글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뭐야. 한국어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아닌가? 공부부터 다시 해야겠네.
[6시 이후로 오세요.]
그에게 답장을 보낸 후 침대에서 일어섰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실직한 뒤로는 귀찮아서 씻기도 싫었거늘 오늘은 비누 향이 왜 이리도 좋은지. 평소에 잘 뿌리지도 않았던 향수에는 왜 또 눈길이 가는지. 고작 붕어빵 팔러 갈 뿐인데 오늘따라 왜 이다지도 패션이 신경 쓰이는지. 알 수 없이 그저 마음만 들떴다.
오랜만에 드라이어를 들어 머리를 말리고 있는 성후를 보며 성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연애는 죽어도 안 하겠다더니……. 어찌 하루 만에…….
일찍부터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성후는 분주히 움직였다. 오랜만에 드로잉북과 펜도 가방 안에 넣었다. 붕어빵만 팔며 그저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 것도 지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디자인에 손대고 싶었다. 회사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손끝이 근질근질했다. 직업병은 어딜 가서도 못 고치나 보다.
현금이 어느 정도 들어 있는 지갑까지 챙긴 후에야 휴대폰을 확인했다. 뭐야, 왜 시간이 이것밖에 안 됐어. 툴툴거리던 목소리를 들은 성아가 말을 툭 내던졌다. 그녀는 이미 경찰 제복으로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마친 후였다.
“누가 보면 데이트하러 가는 줄 알겠네.”
“뭣…….”
“나 간다. 오늘 회식이니까 저녁 혼자 먹어.”
쾅. 닫혀 버린 현관문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아니, 비단 빨리 닫힌 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허를 찔린 탓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행동들, 생각들 전부……. 이것은 마치…….
“아니야! 미쳤어? 미쳤냐고!”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침대에 머리를 박아 버렸다. 이불을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서 중얼거렸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이건……. 사랑이 아니야! 썸 타는 게 아니야!
그런 성후의 생각을 질타하듯 휴대폰이 울렸다. 순간 죄라도 지은 것처럼 몸이 펄쩍 뛰었다. 혹시 베르나도일까 싶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대학 친구였다. 웃기게도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자마자 나온 건 안도가 아닌 아쉬움이었다.
진짜 미쳤나 보다.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성후는 혀를 차며 휴대폰을 받았다. 하도 연애와 선을 긋고 살았더니 욕구 불만이라도 쌓인 걸까. 그도 아니면 이번엔 정말 다를지도 모른다고 마음 한구석에서 당치도 않은 기대라도 품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어. 왜?”
-왜긴 뭐가 왜냐? 이 자식이 회사 때려치웠음 말을 해야 했을 거 아냐!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
-누구겠냐. 너희 누나밖에 더 있냐?
가게에서 만나서 안부를 물었다가 어쩌다 알게 되었단다. 성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하며 책상 의자를 빼서 앉았다. 졸업한 이후로 취업이다 뭐다 하며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와의 통화라 그런지 괜스레 가슴이 설렜다.
물론 이 설렘이 조금 전의 감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또한 성후는 느끼고 있었다. 베르나도를 생각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지금 느껴지는 것은 그저 오랜만에 듣는 친구 목소리를 향한 그리움과 반가움. 그뿐이었다.
성후는 다리를 모아서 좀 더 자세를 편히 하고 앉았다.
-야야, 술 마시자. 나와라.
“나 저녁에 일 가야 돼, 인마.”
-엑. 뭐 하는데? 이제 백수 아니냐? 빽호 새끼 여친이랑 깨졌다고 울고불고 난리 났는데에!
“아…… 뭐, 그런 게 있어. 하여튼 못 가.”
그러니까 너희가 알아서 잘 좀 달래 줘.
성후의 말에 그는 툴툴거렸지만 이내 알겠다며 끊어 버렸다. 시간만 괜찮다면 함께 가서 놀고 마시고 싶지만 웃기게도 그와 상반되는 마음도 존재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연애에 실패한 자신이 친구에게 가서 뭐라고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자신의 마음마저 완전히 치유된 게 아니거늘. 자신의 상처마저 들쑤시지 않는다면 다행이겠다.
거실로 나가 괜히 잘 놀고 있는 녹차를 불러 보았다. 하지만 털실로 유혹해 봐도, 밥으로 유혹해 봐도 저 캣타워가 뭐가 그리 좋은지 다가오지도 않았다.
너도 나 버리냐. 성후는 마음이 삐죽 솟아올랐다가 한숨을 내쉬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 들떴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착 가라앉아 버렸다. 이게 다 누나가 이상한 말을 해서 그렇다.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그냥……. 그래, 그냥 곤란해하는 사람 도와주는 것뿐이지 않나. 봉사 활동! 발룬티어(volunteer)!
“아, 그러고 보니.”
앞으로 그 사람과 자주 만나려면 이탈리아어 공부는 좀 해 둬야 하려나. 유창하진 않더라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끔 말하는 이탈리아 단어조차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으니. 앞을 생각하자면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다.
성후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우선은 공부의 목적으로 그에게 들었던 말을 검색해 볼 심산이었다.
“발음이 뭐였더라. 미……. 미 소노……. 아, 이거 아닌가?”
[Mi sono innamorato.]
연관 검색어에 바로 뜰 정도면 엄청 간단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곧 성후는 후회하게 되었다. 차라리 검색해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리 생각하게 되기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잘못 봤나? 혹시 그때 잘못 들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발음을 들어 보니 그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 잘못 들은 것도 아니며, 잘못 읽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쉽게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문장의 뜻은 타인에게 함부로 내뱉을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또 한 번 쿵 떨어졌다가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인지, 그도 아니면 설렘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 쪽을 부여잡았다. 이러다가 갑자기 심장이 멈춰 버리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근두근두근…….
성후는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숨을 집어삼켰다. 어딘가에서 또 한 번 봄꽃 냄새가 났다. 코끝이 간질간질한 것이 꽃가루라도 흩날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당신에게 반했습니다.]
성후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다 이런 사람들뿐인 걸까. 어쩌자고 이런 말을 쉽게 내뱉는 건지 모르겠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연애도 일도 항상 실패만 반복해 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타인이 주는 사랑에 목말라 있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남들이 하는 행복한 연애라는 것을 자신도 해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니 어찌 되어도 뭐라고 하지 마요.
앞으로 자신은 필사적으로 이 마음을 부정할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결국엔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건 백 퍼센트 당신 탓이다. 그러니 나중에 뭐라고 하기 없기다.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티끌만 한 다정함이었다 하더라도, 그저 해 본 말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런 사소한 상냥함에 목말라 있는 게 박성후라는 인간이니까.
“당신 진짜……. 나중에 후회해도 난 모른다고.”
내 집착이 얼마나 무서운데.
하아, 하며 묵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큰 과제라도 떠안은 듯 온종일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만 생각했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그가 했던 행동마저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흡사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았던 말투와 손짓, 그리고 키스…….
정말로 자신에게 반해서 그런 거라면? 자신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내심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뭐가 달라도 달라지는 게 아닐까. 정말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나타난 게 아닐까.
짝!
성후는 양 뺨을 세게 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키스가 인사인 나라도 있다지 않나. 이탈리아가 그렇다고는 들어 본 적이 없지만, 그에게 있어선 인사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키스할 리가 없지 않은가. 입술이 떨어졌을 때 베르나도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처럼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고, 심지어 떨고 있지도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어떡해.
성후는 소심해진 마음을 억누르듯 가방끈을 꽉 쥐었다. 누가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른다. 알게 된 지 채 이틀 만에 사심을 품느냐고. 세상 모든 사람이 연애 대상으로 보이는 거냐고. 하지만 첫사랑에 데여 버린 마음은 아직도 누군가에게서 치유받길 바라고 있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공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래. 이번에야말로 누군가는 이 손을 잡아 주겠지, 하면서. 갈증 때문에 목이 말랐다.
저 앞에 보이는 포장마차를 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재취업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데 더 큰 짐 덩어리가 어깨에 올려진 기분이다. 별거 없었을 행동에도 의미를 부여하려 하고 뜻을 찾으려 하는 게 싫었다.
‘넌 조금만 잘해 주면 그러더라. 친절과 호감은 구분해야 해.’
언제였더라. 네 번째로 연애에 실패했을 때였던가. 누나가 그렇게 말했다. 첫사랑으로 인해 뻥 뚫려 버린 성후의 가슴을 들여다보듯. 그 한마디에 낯이 확 빨개졌다. 그녀의 말대로이기 때문이었다.
애정 결핍이 낳은 공허함은 상냥함을 바랐다. 어쩌면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은 누구든 좋은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것이 호감인지 단순한 친절인지도 구분 못 하는 게 아닌가.
누나가 혀 찰 만하네.
성후는 포장마차 안에 가방을 내려 두며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손님이 많았더라면 조잡한 상상들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건만 오늘따라 유독 한산했다. 어쩌다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를 손에 꼭 쥐고 오는 아이들 몇 명이 전부였다.
“이 상태로 오늘 그 사람을 만나야 하나?”
그건 좀 그런데. 만나지 말자고 해?
아무렇게나 펼쳐 둔 드로잉북에 스케치하며 턱을 괬다. 마음대로 투시도를 그리다가도 귀퉁이에 평면도도 작게 그려 보았다. 건물을 지탱할 뼈대와 내부의 인테리어가 금세 완성되어 갔다. 깎아 두었던 연필심이 뭉퉁해질 때까지 긋고 또 그었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쉼 없이 움직였다. 머릿속에 있는 디자인을 꺼내 옮기는 손은 거침없었으며 세심하기까지 했다. 몇 년간 디자이너 일을 해 온 만큼 손은 스케치에 익숙해져 있었다. 능숙하기 짝이 없는 손놀림이다. 어느새 건물 한 채가 드로잉북 한 면을 꽉 채울 정도로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도안이 완성되어 갈수록 머릿속은 아득해졌다. 답을 내릴 수 없는 생각이 빙글빙글 돌아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후? 성후?”
“……으음.”
돌연 성후의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나리아?”
성후는 저도 모르게 연필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언제 왔는지 모를 베르나도와 눈이 마주쳤다. 새파랗고 맑은 눈동자에 놀란 성후의 모습이 오롯이 비쳤다.
“어, 언제 왔…….”
“방금 왔다, 예요. 바쁘다입니까?”
“아, 아뇨. 괜찮아요. 그, 곧 접을 시간이니까 따뜻한 데서 기다릴래요?”
허둥거리며 스케치북을 접고 주위를 정리했다. 붕어빵을 건네는 손은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베르나도마저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의 떨림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떨리지. 심장은 왜 또 이렇게 뛰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