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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틱 러브 4화
2. 떡볶이 (2)
놀란 가슴을 미처 추스르지도 못했다. 그 상태에서 준비되지 못한 마음만이 요란하게 뛰었다. 이것이 두려움인지 설렘인지도 알 수 없었다. 성후는 다급히 등 뒤로 손을 감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베르나도에게서 등을 돌려 심호흡을 했다.
“성후,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그 한마디 내뱉는 것마저 고역이었다. 꼴사나웠다. 이제는 그를 볼 때마다 이럴지도 모른다는 게 더 한심했다. 혼자서 의식하고 혼자서 기대하고 또 혼자서 실망할 생각인가. 질리지도 않나. 자신을 향해 비난을 퍼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래서야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나. 이번에는 절대 이 마음을 사랑이라 착각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고백하지 않을 거다.
나랑 연애는 안 맞는 거라고!
성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섰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보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베르나도는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 듯 잠시 눈가를 찌푸렸지만 곧 다시 웃었다. 그는 어눌한 발음으로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었다. 발음이 제법 어려운 탓인 듯했다.
“떡. 뽀. 끼. 먹습니다.”
“떡볶이? 이 근처에 맛있는 분식집이 어디 있더라.”
그냥 떡볶이보단 즉석떡볶이가 더 낫겠지? 셰프인 만큼 단순히 먹거리 관광을 위해 한국에 온 것은 아닐 테다. 성후는 문득 신문에서 읽었던 글을 떠올렸다. 명동에서 개점 예정이라고 했던가. 한국에 온 이유는 우선 무엇인지 알겠다. 어쩌면 이것저것 음식을 먹어 보려는 것도 그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시 좀 더 경험 될 만한 게 좋을 거다.
성후는 포장마차 문을 닫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베르나도의 시선이 일순 가방…… 아니, 가방에 욱여넣은 드로잉북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무엇이 그리도 신경 쓰이는지 제법 진중한 눈빛이었다.
심지어 턱을 손가락으로 짚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까지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성후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자신과 별 상관없는 일일 거라 생각한 이유도 있지만 마음을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성후는 예상이 빗나갔다는 걸 빨리도 깨달아야 했다. 가게에서 떡볶이와 튀김 등을 주문하자마자 베르나도가 돌연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카나리아……. 아니, 성후. 디자인합니다?”
아마, 할 줄 아느냐고 묻는 것일 테다.
성후는 베르나도를 따라서 자신의 가방에 시선을 한 번 주었다가 말했다.
“아, 네. 뭐어. 직업이 인테리어 디자이너거든요.”
그 말에 그는 대번 눈을 빛냈다. 마치 눈앞에서 황금알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나 상냥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 주던 것과는 달리 조금은 짙으면서도 차가웠다. 영락없는 경영가처럼 보였다. 찾았다. 꼭 그리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성후는 베르나도의 눈매가 저리도 날카로워진 것을 처음 보았다. 낯설진 않았다. 오히려 이 표정이 진짜 베르나도에 가까운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일합니까?”
성후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굳이 감출 일도 아니기에 사실대로 말했다.
“아니요. 지금은 붕어빵 장사만 하고 있는데……. 왜요?”
그에 베르나도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È destino.(운명이군요.) 우리, 같이 일합시다.”
그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음식이 눈앞에 차려지고 익어 가는 와중에도 수저를 들 수 없었다. 베르나도의 시선은 성후의 대답을 바라듯 고정되어 있었다. 차마 저 시선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항상 부드러운 눈빛만 받아 왔기 때문일까. 숨 막힐 듯 옭아매는 눈빛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베르나도 알베르티라는 인간의 일부분을 훔쳐본 것만 같았다.
떨리는 숨을 남몰래 들이마셨다. 차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자신감 결여 때문인지, 낯가림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 탓인지. 성후는 뚫어지라 쳐다보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귓가가 화끈거려서 죽을 맛이었다. 특히나 의식하고 있는 상대가 저리 쳐다보고 있으니 더 부끄러웠다. 안절부절못하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이, 일한다니, 뭘…….”
“인테리어. 카나리아에게 맡기고 싶다, 예요.”
그 순간 신문에서 봤던 글이 다시 한번 머리를 스쳤다. 명동에서 개점한다더니. 아직 건물은 다 완성되지 못한 모양이다. 구미가 당겼다. 백수 생활 중에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오케이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고작 이름과 직업뿐인데 자신의 밑천을 다 보일 순 없었다. 자고로 모든 일엔 밀고 당기기가 중요한 법. 덥석덥석 물어 버리는 쉬운 인간으론 보이기 싫었다.
성후는 괜히 으음,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시간을 끌었다.
그동안 베르나도는 능숙하게 성후와 자신의 접시에 떡볶이를 퍼 담았다. 어묵과 떡, 양상추를 골고루 담고 매콤달콤한 빨간 국물을 위에 끼얹었다. 뿌연 수증기가 접시 위에서 흩어졌다. 고춧가루와 고추장의 매콤한 향기가 식욕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대답 천천히 된다, 입니다. 기다릴 수 있어요.”
“하지만, 개점 예정 날짜가 이미 잡혀 있는 게…….”
포크로 떡을 푹 찍으며 베르나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년 봄입니다.”
시간 촉박하잖아.
성후는 헛숨을 삼켰다. 기다리긴 뭘 기다린단 말인가. 현장 답사는 물론이며 디자인 도안을 구상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각 업체에 연락도 넣어야 한다.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면 봄 따위는 금방 코앞까지 다가올 것이다. 심지어 식당 인테리어는 경험이 부족하기에 개인적으로 알아볼 것도 많이 필요했다.
성후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이, 이번 주 내로 답 드리겠습니다.”
“Oh. 성후, 친절하군요.”
“……모두를 위해서죠.”
대답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가게 주인인 베르나도가 타격을 받는다. 그뿐이랴. 만약 자신이 거절하면? 뒤늦게 일을 받아 버린 다른 사람은 시간이 촉박해질 게 자명하다. 이런 건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기간이 여유로우면 사람 손을 줄여서 인건비도 절약할 수 있을 것이고……. 순식간에 어깨가 무거워져서 성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옳거니 하며 그의 손을 잡아 버리고 싶다. 하지만 함께 일한다면 그의 얼굴을 자주 보게 될 텐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있어? 자문해 보았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괜히 흑심을 가지고 일하는 것 같지 않나. 뒤가 찝찝하다. 무엇보다 죄책감에 가슴이 콕콕 쑤셨다.
떡볶이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알싸한 맛이 목 안을 마구 긁어 대며 내려갈 뿐이었다. 결국 물로만 배를 채우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텁텁한 맛에 입술이 메말라 갔다.
베르나도는 정중히 앞 좌석 문을 열어 성후를 앉혔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도 어쩔 수 없이 두근거려 버렸다. 여태 이런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돈이 필요하다고 연락해 오는 놈이나, 클럽에서 놀고 있는 주제에 야근 중이라며 거짓말해 대는 놈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흔쾌히 돈을 내어 주고 속아 주었던 자신도 바보였던 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성후는 창밖을 보다가 무심코 물었다. 미처 입을 막을 틈도 없이 새어 나간 말이었다.
“저기, 베르나도는 애인 있어요?”
다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소용없었다. 성후는 안전띠를 꽉 쥔 채 옆 좌석을 힐끔거렸지만 베르나도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핸들을 쥔 채 언제나 그랬듯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운전하는 모습마저 근사하기 그지없었다. 요동쳐 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듯 가슴께를 꾸욱 눌렀다.
“없습니다. 성후는?”
“저도 없어요.”
없다는 말에 안도하는 가슴이 하나. 그리고 사랑하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가슴이 또 하나.
성후의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토록 다정한 인간은 언제나 뒤가 구렸다. 앞에서만 상냥하거나, 혹은 그 상냥함이 그저 호의였던 경우다. 베르나도는 어느 쪽일까. 저런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인간관계 역시 넓을지도 모른다. 연애도 많이 해 봤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원나잇을 주로 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성후와는 맞지 않는다.
그때 차가 멈춰 섰다. 포장마차 앞이었다.
“음, 집이 어느 쪽입니까?”
“여기서 내려 주면 돼요. 아, 그리고 이거…….”
성후는 품을 뒤적여 붕어빵 봉투를 꺼냈다. 안에는 아직 따끈따끈한 붕어빵이 한 개 들어 있었다.
“오늘분 붕어빵이에요. 그럼 전 가 볼게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들어가요. 인테리어, 꼭 생각해 봐요.”
문을 닫자마자 차는 금방 출발해 버렸다. 멀어져 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다가 곧 횡단보도를 건넜다. 심란해서였을까. 성후는 조금 전의 베르나도의 한국어가 제법 자연스러웠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
“위험해, 위험해.”
베르나도는 제 입술을 손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하마터면 능숙한 한국어가 튀어나올 뻔하였다. 그의 앞에서는 어눌한 한국어를 쓰겠다고 결심한 지 며칠이 채 흐르지도 않았거늘. 한번 계획한 걸 흩트려 버리다니. 베르나도를 잘 아는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기함할 만한 장면이었다.
그는 서울 도심에 위치한 어느 빌딩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댔다. 신호가 꺼지자마자 차 곁으로 누군가가 재빨리 다가왔다. 비서는 문을 열어 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문에 대고 키만 맡기시면 되는데…….”
“난 내 물건에 누가 손대는 거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점은 사모님을 닮으셨네요.”
베르나도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간부 전용 엘리베이터는 단번에 7층까지 올라갔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이며 그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에 성후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붕어빵이라는 음식에 흥미가 조금 생겨서 접근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유약하고 어려 보이는 외견에, 성격도 소심해 보였다. 그래서 얼마든지 파고들 틈이 있을 줄 알았거늘.
‘여기서 내려 주면 돼요’.
……뜻밖에 철벽이 심하다. 마음을 열어 줄 것 같으면서도 끝내는 열지 않았다. ‘네가 넘어올 수 있는 선은 딱 여기까지야’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쉽게 거리를 좁히지 못하여 초조해하는 건 오직 베르나도뿐이었다.
베르나도는 제 뒤에 서 있는 비서를 바라보더니 무심히 물었다.
“그건 뭡니까?”
“이사님께서 사 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근방에 있는 붕어빵 전부 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관심은커녕 먹어 보지도 않는다.
베르나도는 종이봉투 안에 들어 있는 붕어빵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더니 고개를 팩 돌렸다.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먹어 볼 가치도 없습니다.”
“네?”
“반죽 상태도, 열 조절도, 겉면의 윤기도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아니……. 다 평범한 붕어빵인데…….”
“다릅니다.”
적어도 그건 달랐다. 성후의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건 전혀 다른 맛이었다. 분명 상태도 저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거늘. 아니, 오히려 더 심했다. 초보자가 만들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할 셈인지 반죽도 퍼석퍼석했고, 겉면 일부분은 타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걸 파는 건가 싶어 확인할 심산이었는데……. 웃기게도 붕어빵을 팔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를 내뱉고 만 게 아닌가.
백 개라니. 한 개를 줘도 다 못 먹을 판인데.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베르나도는 성후가 쥐여 준 붕어빵을 베어 물며 복도에 발을 내디뎠다. 역시 반죽도 구운 정도도 다 엉망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손과 입을 멈출 수가 없다.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적이면서 혀를 마비시킬 것 같은 단맛이 느껴졌다.
비서는 그의 등 뒤를 다급히 따라왔다. 다리가 긴 탓에 빠른 걸음으로 쫓아도 힘들었다.
“콤페(Compe, 현상 설계)는 언제 열까요? 지금이 슬슬 적기라고 생각합니다만.”
“필요 없습니다.”
“네에?!”
예상외의 말에 비서는 또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르나도는 이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콤페는 열지 않아도 됩니다.”
“그, 그건 또 어찌하여…….”
우연히 보았던 성후의 드로잉북을 떠올렸다. 세밀한 곳까지 빠짐없이 스케치 되어 있었던 도안에서는 그의 성격이 보였다. 심지어 감각마저 나무랄 데 없이 세련되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뜻하지도 못하던 것을 찾게 되다니. 한국에선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횡재? 심봤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베르나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입가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웃었다.
“적임자를 찾았거든요.”
그러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꼬셔 볼 심산이다.
***
“미쳤냐! 진짜, 미쳤냐! 박성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머리를 박았다. 머리를 베개 위에 쿵쿵 내려찍으며 성후는 발버둥을 쳤다. 여차하면 침대를 뚫고 들어가려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발에 채는 이불을 뻥 걷어차기까지 했다.
‘저기, 베르나도는 애인 있어요?’
왜 물어봤어! 그건 대체 왜 물은 거야! 분명 사심 있다고 생각할 게 뻔해! 내일부터 어색해할지도 모른다고!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천장을 향해 베개를 던졌다. 베개는 그대로 수직 낙하하여 성후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콧망울이 눌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윽!”
베개에 눌린 숨이 뜨겁게 퍼졌다. 슬그머니 베개 자락을 턱 아래로 내려 보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낯뜨겁고 창피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연애가 궁해도 그렇지. 아무리 욕구 불만에 시달려도 그렇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걸 물어보다니. 그것도 사심 백 퍼센트로 물어보다니.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마음속에 움튼 작은 싹을 암만 도려내고 뽑아 봐도 소용없었다. 이건 생각보다 더 질긴 잡초다. 다시 한번 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또 자라고 날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연애에 목을 매려 하는 자기 자신이 안쓰러우면서도 진저리가 났다.
“문자 보내서 오늘 한 말은 잊어 달라고 할까……?”
아냐. 그건 더 이상해.
베개를 품에 끌어안고 옆으로 누웠다. 웃기게도 벽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벽지의 종류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직업은 못 속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자연히 베르나도가 제안한 일이 떠올라 또다시 한숨이 푹 내려앉았다. 좋은 기회인 데다 걷어차도 될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아는데. 다 아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문제다.
같이 일하다가, 또 반해서, 무심코 고백하면 어떡하냔 말이다. 그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성후는 상대방의 일하는 모습에 약했다. 직장에 어울리는 차림새를 한 채 모니터를 확인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좋아했다. 베르나도와 함께 일하게 될 경우 반하지 말라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른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알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후는 곧 이 선택엔 앞도 뒤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결국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도 그럴 게.
“아……. 안 돼애애.”
며칠 후, 통장 잔고가 10만 원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백수인 것을.
2
“좋은 생각 했습니다, 성후.”
“아. 잘 생각했다는 거죠?”
베르나도가 그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화색을 띠고 있는 그와는 달리 성후는 더는 무슨 말을 할 기력도 없었다. 패배감이 몸을 물씬 적셨다. 절대 그의 손을 잡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설마 이런 이유로 그에게 연락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 과거와 같은 일들을 되풀이하기 싫어서 밀려 들어오는 물을 피해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물은 성후의 발치에 닿을 정도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이대로 이 흐름에 몸을 맡기면, 발목을 넘어 목까지 잠겨 버리는 게 아닐까. 이 흐름에, 이 물에, 베르나도라는 인간에게 삼켜져 버리는 게 아닐까. 또다시 과오를 반복해 버리는 게 아닐까…….
사랑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성후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또다시 흐름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 베르나도에게 만나자고 한 건 계약 때문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혹여나 앞으로 실수하지 않도록 선을 긋기 위해서다.
카페 테이블 위에 놓인 밀크티에 시선을 주었다. 연한 갈색빛 밀크티에선 꽃향기가 났다. 단 걸 좋아하는 성후의 주문대로 시럽과 우유가 많이 들어갔는지 향기가 제법 달콤했다. 하지만 그 위에 비친 성후의 표정은 흐리기 짝이 없었다. 거무죽죽한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괜히 꼴사나워서 스푼을 쥐어 홍차를 저어 버렸다.
“비서, 부르겠다. 입니다. 계약은 그가 오면…….”
“아니요.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상체를 일으켜 성후의 뺨에 손을 뻗어 왔다. 자연스럽게, 상냥하게……. 머뭇거림조차 없이 접촉하려 했다. 지금까지의 베르나도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성후에게는 이제 이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손끝이 입술에 닿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손목을 잡아챘다.
손을 붙잡힌 베르나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후도 자신의 행동에 놀랐지만, 그렇다고 더는 그에게 스킨십을 허락할 생각도 없었다. 이렇게 매번 그에게 휘둘리고 휩쓸리다 보면 언제 가라앉게 될지 알 수 없다. 나중에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밑바닥까지 가라앉게 되겠지. 그리고 다시 숨을 쉬려 하면, 그땐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물 위로 올라오지도 못할 것이며 수면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첫사랑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몸을 적신 가랑비일 뿐이었다면 그 후의 모든 사랑은 거대한 해일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성후는 그의 손목을 조심스레 놓아 주며 말했다.
“오늘 말씀드릴 건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에 관한 겁니다.”
“앞으로라 하면…….”
베르나도는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그의 눈은 얼핏 긴장한 듯 보였다. 무엇을 향한 긴장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시선에 감도는 초조함을 성후는 읽어 냈다.
“이미 선급 받아 버렸으니 붕어빵은 계속 드릴 겁니다. 하지만 그건 비서나 다른 분을 시켜 주시면 감사하겠고, 작업은 자유롭게 하고 싶으니 만나는 건 미팅 때만으로 제한하고 싶고, 또…….”
“자, 잠깐만! 잠깐만요!”
“네?”
“그 말은 즉, 저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까?”
어라. 방금 한국어가 꽤 자연스럽…….
“어째서입니까?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입니까?”
“아, 그게…….”
그의 한국어가 능숙해졌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눈앞의 베르나도의 기세가 흉흉하게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안 와도 된다는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도 직업이 있는 사람이고 바쁠 것이다. 매번 만나러 찾아올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흔쾌히 승낙할 거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성후는 얼떨떨해진 마음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눈앞에 있는 그의 모습을 담았다. 어째 평소와 분위기도 좀 다른 것 같다.
“우선, 베르나도도 바쁠 테니까.”
“안 바쁩니다.”
“그, 그럼……. 전 혼자 작업하는 게 좋기도 하고.”
“작업은 방해하지 않습니다. 원하면 서재든 작업실이든 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성후는 버릇처럼 양쪽 무릎을 꽉 쥐었다. 왜 저렇게까지 자신을 곁에 두려고 하는 걸까. 그가 바라던 대로 같이 일하기로 했잖아. 계약하기로 했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이 이상 자신에게서 얻어 낼 게 있던가. 붕어빵?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2. 떡볶이 (2)
놀란 가슴을 미처 추스르지도 못했다. 그 상태에서 준비되지 못한 마음만이 요란하게 뛰었다. 이것이 두려움인지 설렘인지도 알 수 없었다. 성후는 다급히 등 뒤로 손을 감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베르나도에게서 등을 돌려 심호흡을 했다.
“성후,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그 한마디 내뱉는 것마저 고역이었다. 꼴사나웠다. 이제는 그를 볼 때마다 이럴지도 모른다는 게 더 한심했다. 혼자서 의식하고 혼자서 기대하고 또 혼자서 실망할 생각인가. 질리지도 않나. 자신을 향해 비난을 퍼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래서야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나. 이번에는 절대 이 마음을 사랑이라 착각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고백하지 않을 거다.
나랑 연애는 안 맞는 거라고!
성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섰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보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베르나도는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 듯 잠시 눈가를 찌푸렸지만 곧 다시 웃었다. 그는 어눌한 발음으로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었다. 발음이 제법 어려운 탓인 듯했다.
“떡. 뽀. 끼. 먹습니다.”
“떡볶이? 이 근처에 맛있는 분식집이 어디 있더라.”
그냥 떡볶이보단 즉석떡볶이가 더 낫겠지? 셰프인 만큼 단순히 먹거리 관광을 위해 한국에 온 것은 아닐 테다. 성후는 문득 신문에서 읽었던 글을 떠올렸다. 명동에서 개점 예정이라고 했던가. 한국에 온 이유는 우선 무엇인지 알겠다. 어쩌면 이것저것 음식을 먹어 보려는 것도 그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시 좀 더 경험 될 만한 게 좋을 거다.
성후는 포장마차 문을 닫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베르나도의 시선이 일순 가방…… 아니, 가방에 욱여넣은 드로잉북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무엇이 그리도 신경 쓰이는지 제법 진중한 눈빛이었다.
심지어 턱을 손가락으로 짚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까지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성후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자신과 별 상관없는 일일 거라 생각한 이유도 있지만 마음을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성후는 예상이 빗나갔다는 걸 빨리도 깨달아야 했다. 가게에서 떡볶이와 튀김 등을 주문하자마자 베르나도가 돌연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카나리아……. 아니, 성후. 디자인합니다?”
아마, 할 줄 아느냐고 묻는 것일 테다.
성후는 베르나도를 따라서 자신의 가방에 시선을 한 번 주었다가 말했다.
“아, 네. 뭐어. 직업이 인테리어 디자이너거든요.”
그 말에 그는 대번 눈을 빛냈다. 마치 눈앞에서 황금알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나 상냥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 주던 것과는 달리 조금은 짙으면서도 차가웠다. 영락없는 경영가처럼 보였다. 찾았다. 꼭 그리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성후는 베르나도의 눈매가 저리도 날카로워진 것을 처음 보았다. 낯설진 않았다. 오히려 이 표정이 진짜 베르나도에 가까운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일합니까?”
성후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굳이 감출 일도 아니기에 사실대로 말했다.
“아니요. 지금은 붕어빵 장사만 하고 있는데……. 왜요?”
그에 베르나도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È destino.(운명이군요.) 우리, 같이 일합시다.”
그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음식이 눈앞에 차려지고 익어 가는 와중에도 수저를 들 수 없었다. 베르나도의 시선은 성후의 대답을 바라듯 고정되어 있었다. 차마 저 시선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항상 부드러운 눈빛만 받아 왔기 때문일까. 숨 막힐 듯 옭아매는 눈빛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베르나도 알베르티라는 인간의 일부분을 훔쳐본 것만 같았다.
떨리는 숨을 남몰래 들이마셨다. 차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자신감 결여 때문인지, 낯가림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 탓인지. 성후는 뚫어지라 쳐다보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귓가가 화끈거려서 죽을 맛이었다. 특히나 의식하고 있는 상대가 저리 쳐다보고 있으니 더 부끄러웠다. 안절부절못하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이, 일한다니, 뭘…….”
“인테리어. 카나리아에게 맡기고 싶다, 예요.”
그 순간 신문에서 봤던 글이 다시 한번 머리를 스쳤다. 명동에서 개점한다더니. 아직 건물은 다 완성되지 못한 모양이다. 구미가 당겼다. 백수 생활 중에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오케이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고작 이름과 직업뿐인데 자신의 밑천을 다 보일 순 없었다. 자고로 모든 일엔 밀고 당기기가 중요한 법. 덥석덥석 물어 버리는 쉬운 인간으론 보이기 싫었다.
성후는 괜히 으음,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시간을 끌었다.
그동안 베르나도는 능숙하게 성후와 자신의 접시에 떡볶이를 퍼 담았다. 어묵과 떡, 양상추를 골고루 담고 매콤달콤한 빨간 국물을 위에 끼얹었다. 뿌연 수증기가 접시 위에서 흩어졌다. 고춧가루와 고추장의 매콤한 향기가 식욕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대답 천천히 된다, 입니다. 기다릴 수 있어요.”
“하지만, 개점 예정 날짜가 이미 잡혀 있는 게…….”
포크로 떡을 푹 찍으며 베르나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년 봄입니다.”
시간 촉박하잖아.
성후는 헛숨을 삼켰다. 기다리긴 뭘 기다린단 말인가. 현장 답사는 물론이며 디자인 도안을 구상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각 업체에 연락도 넣어야 한다.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면 봄 따위는 금방 코앞까지 다가올 것이다. 심지어 식당 인테리어는 경험이 부족하기에 개인적으로 알아볼 것도 많이 필요했다.
성후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이, 이번 주 내로 답 드리겠습니다.”
“Oh. 성후, 친절하군요.”
“……모두를 위해서죠.”
대답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가게 주인인 베르나도가 타격을 받는다. 그뿐이랴. 만약 자신이 거절하면? 뒤늦게 일을 받아 버린 다른 사람은 시간이 촉박해질 게 자명하다. 이런 건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기간이 여유로우면 사람 손을 줄여서 인건비도 절약할 수 있을 것이고……. 순식간에 어깨가 무거워져서 성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옳거니 하며 그의 손을 잡아 버리고 싶다. 하지만 함께 일한다면 그의 얼굴을 자주 보게 될 텐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있어? 자문해 보았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괜히 흑심을 가지고 일하는 것 같지 않나. 뒤가 찝찝하다. 무엇보다 죄책감에 가슴이 콕콕 쑤셨다.
떡볶이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알싸한 맛이 목 안을 마구 긁어 대며 내려갈 뿐이었다. 결국 물로만 배를 채우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텁텁한 맛에 입술이 메말라 갔다.
베르나도는 정중히 앞 좌석 문을 열어 성후를 앉혔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도 어쩔 수 없이 두근거려 버렸다. 여태 이런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돈이 필요하다고 연락해 오는 놈이나, 클럽에서 놀고 있는 주제에 야근 중이라며 거짓말해 대는 놈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흔쾌히 돈을 내어 주고 속아 주었던 자신도 바보였던 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성후는 창밖을 보다가 무심코 물었다. 미처 입을 막을 틈도 없이 새어 나간 말이었다.
“저기, 베르나도는 애인 있어요?”
다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소용없었다. 성후는 안전띠를 꽉 쥔 채 옆 좌석을 힐끔거렸지만 베르나도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핸들을 쥔 채 언제나 그랬듯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운전하는 모습마저 근사하기 그지없었다. 요동쳐 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듯 가슴께를 꾸욱 눌렀다.
“없습니다. 성후는?”
“저도 없어요.”
없다는 말에 안도하는 가슴이 하나. 그리고 사랑하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가슴이 또 하나.
성후의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토록 다정한 인간은 언제나 뒤가 구렸다. 앞에서만 상냥하거나, 혹은 그 상냥함이 그저 호의였던 경우다. 베르나도는 어느 쪽일까. 저런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인간관계 역시 넓을지도 모른다. 연애도 많이 해 봤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원나잇을 주로 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성후와는 맞지 않는다.
그때 차가 멈춰 섰다. 포장마차 앞이었다.
“음, 집이 어느 쪽입니까?”
“여기서 내려 주면 돼요. 아, 그리고 이거…….”
성후는 품을 뒤적여 붕어빵 봉투를 꺼냈다. 안에는 아직 따끈따끈한 붕어빵이 한 개 들어 있었다.
“오늘분 붕어빵이에요. 그럼 전 가 볼게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들어가요. 인테리어, 꼭 생각해 봐요.”
문을 닫자마자 차는 금방 출발해 버렸다. 멀어져 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다가 곧 횡단보도를 건넜다. 심란해서였을까. 성후는 조금 전의 베르나도의 한국어가 제법 자연스러웠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
“위험해, 위험해.”
베르나도는 제 입술을 손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하마터면 능숙한 한국어가 튀어나올 뻔하였다. 그의 앞에서는 어눌한 한국어를 쓰겠다고 결심한 지 며칠이 채 흐르지도 않았거늘. 한번 계획한 걸 흩트려 버리다니. 베르나도를 잘 아는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기함할 만한 장면이었다.
그는 서울 도심에 위치한 어느 빌딩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댔다. 신호가 꺼지자마자 차 곁으로 누군가가 재빨리 다가왔다. 비서는 문을 열어 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문에 대고 키만 맡기시면 되는데…….”
“난 내 물건에 누가 손대는 거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점은 사모님을 닮으셨네요.”
베르나도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간부 전용 엘리베이터는 단번에 7층까지 올라갔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이며 그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에 성후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붕어빵이라는 음식에 흥미가 조금 생겨서 접근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유약하고 어려 보이는 외견에, 성격도 소심해 보였다. 그래서 얼마든지 파고들 틈이 있을 줄 알았거늘.
‘여기서 내려 주면 돼요’.
……뜻밖에 철벽이 심하다. 마음을 열어 줄 것 같으면서도 끝내는 열지 않았다. ‘네가 넘어올 수 있는 선은 딱 여기까지야’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쉽게 거리를 좁히지 못하여 초조해하는 건 오직 베르나도뿐이었다.
베르나도는 제 뒤에 서 있는 비서를 바라보더니 무심히 물었다.
“그건 뭡니까?”
“이사님께서 사 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근방에 있는 붕어빵 전부 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관심은커녕 먹어 보지도 않는다.
베르나도는 종이봉투 안에 들어 있는 붕어빵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더니 고개를 팩 돌렸다.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먹어 볼 가치도 없습니다.”
“네?”
“반죽 상태도, 열 조절도, 겉면의 윤기도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아니……. 다 평범한 붕어빵인데…….”
“다릅니다.”
적어도 그건 달랐다. 성후의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건 전혀 다른 맛이었다. 분명 상태도 저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거늘. 아니, 오히려 더 심했다. 초보자가 만들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할 셈인지 반죽도 퍼석퍼석했고, 겉면 일부분은 타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걸 파는 건가 싶어 확인할 심산이었는데……. 웃기게도 붕어빵을 팔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를 내뱉고 만 게 아닌가.
백 개라니. 한 개를 줘도 다 못 먹을 판인데.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베르나도는 성후가 쥐여 준 붕어빵을 베어 물며 복도에 발을 내디뎠다. 역시 반죽도 구운 정도도 다 엉망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손과 입을 멈출 수가 없다.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적이면서 혀를 마비시킬 것 같은 단맛이 느껴졌다.
비서는 그의 등 뒤를 다급히 따라왔다. 다리가 긴 탓에 빠른 걸음으로 쫓아도 힘들었다.
“콤페(Compe, 현상 설계)는 언제 열까요? 지금이 슬슬 적기라고 생각합니다만.”
“필요 없습니다.”
“네에?!”
예상외의 말에 비서는 또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르나도는 이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콤페는 열지 않아도 됩니다.”
“그, 그건 또 어찌하여…….”
우연히 보았던 성후의 드로잉북을 떠올렸다. 세밀한 곳까지 빠짐없이 스케치 되어 있었던 도안에서는 그의 성격이 보였다. 심지어 감각마저 나무랄 데 없이 세련되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뜻하지도 못하던 것을 찾게 되다니. 한국에선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횡재? 심봤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베르나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입가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웃었다.
“적임자를 찾았거든요.”
그러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꼬셔 볼 심산이다.
***
“미쳤냐! 진짜, 미쳤냐! 박성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머리를 박았다. 머리를 베개 위에 쿵쿵 내려찍으며 성후는 발버둥을 쳤다. 여차하면 침대를 뚫고 들어가려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발에 채는 이불을 뻥 걷어차기까지 했다.
‘저기, 베르나도는 애인 있어요?’
왜 물어봤어! 그건 대체 왜 물은 거야! 분명 사심 있다고 생각할 게 뻔해! 내일부터 어색해할지도 모른다고!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천장을 향해 베개를 던졌다. 베개는 그대로 수직 낙하하여 성후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콧망울이 눌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윽!”
베개에 눌린 숨이 뜨겁게 퍼졌다. 슬그머니 베개 자락을 턱 아래로 내려 보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낯뜨겁고 창피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연애가 궁해도 그렇지. 아무리 욕구 불만에 시달려도 그렇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걸 물어보다니. 그것도 사심 백 퍼센트로 물어보다니.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마음속에 움튼 작은 싹을 암만 도려내고 뽑아 봐도 소용없었다. 이건 생각보다 더 질긴 잡초다. 다시 한번 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또 자라고 날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연애에 목을 매려 하는 자기 자신이 안쓰러우면서도 진저리가 났다.
“문자 보내서 오늘 한 말은 잊어 달라고 할까……?”
아냐. 그건 더 이상해.
베개를 품에 끌어안고 옆으로 누웠다. 웃기게도 벽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벽지의 종류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직업은 못 속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자연히 베르나도가 제안한 일이 떠올라 또다시 한숨이 푹 내려앉았다. 좋은 기회인 데다 걷어차도 될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아는데. 다 아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문제다.
같이 일하다가, 또 반해서, 무심코 고백하면 어떡하냔 말이다. 그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성후는 상대방의 일하는 모습에 약했다. 직장에 어울리는 차림새를 한 채 모니터를 확인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좋아했다. 베르나도와 함께 일하게 될 경우 반하지 말라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른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알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후는 곧 이 선택엔 앞도 뒤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결국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도 그럴 게.
“아……. 안 돼애애.”
며칠 후, 통장 잔고가 10만 원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백수인 것을.
2
“좋은 생각 했습니다, 성후.”
“아. 잘 생각했다는 거죠?”
베르나도가 그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화색을 띠고 있는 그와는 달리 성후는 더는 무슨 말을 할 기력도 없었다. 패배감이 몸을 물씬 적셨다. 절대 그의 손을 잡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설마 이런 이유로 그에게 연락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 과거와 같은 일들을 되풀이하기 싫어서 밀려 들어오는 물을 피해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물은 성후의 발치에 닿을 정도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이대로 이 흐름에 몸을 맡기면, 발목을 넘어 목까지 잠겨 버리는 게 아닐까. 이 흐름에, 이 물에, 베르나도라는 인간에게 삼켜져 버리는 게 아닐까. 또다시 과오를 반복해 버리는 게 아닐까…….
사랑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성후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또다시 흐름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 베르나도에게 만나자고 한 건 계약 때문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혹여나 앞으로 실수하지 않도록 선을 긋기 위해서다.
카페 테이블 위에 놓인 밀크티에 시선을 주었다. 연한 갈색빛 밀크티에선 꽃향기가 났다. 단 걸 좋아하는 성후의 주문대로 시럽과 우유가 많이 들어갔는지 향기가 제법 달콤했다. 하지만 그 위에 비친 성후의 표정은 흐리기 짝이 없었다. 거무죽죽한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괜히 꼴사나워서 스푼을 쥐어 홍차를 저어 버렸다.
“비서, 부르겠다. 입니다. 계약은 그가 오면…….”
“아니요.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상체를 일으켜 성후의 뺨에 손을 뻗어 왔다. 자연스럽게, 상냥하게……. 머뭇거림조차 없이 접촉하려 했다. 지금까지의 베르나도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성후에게는 이제 이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손끝이 입술에 닿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손목을 잡아챘다.
손을 붙잡힌 베르나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후도 자신의 행동에 놀랐지만, 그렇다고 더는 그에게 스킨십을 허락할 생각도 없었다. 이렇게 매번 그에게 휘둘리고 휩쓸리다 보면 언제 가라앉게 될지 알 수 없다. 나중에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밑바닥까지 가라앉게 되겠지. 그리고 다시 숨을 쉬려 하면, 그땐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물 위로 올라오지도 못할 것이며 수면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첫사랑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몸을 적신 가랑비일 뿐이었다면 그 후의 모든 사랑은 거대한 해일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성후는 그의 손목을 조심스레 놓아 주며 말했다.
“오늘 말씀드릴 건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에 관한 겁니다.”
“앞으로라 하면…….”
베르나도는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그의 눈은 얼핏 긴장한 듯 보였다. 무엇을 향한 긴장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시선에 감도는 초조함을 성후는 읽어 냈다.
“이미 선급 받아 버렸으니 붕어빵은 계속 드릴 겁니다. 하지만 그건 비서나 다른 분을 시켜 주시면 감사하겠고, 작업은 자유롭게 하고 싶으니 만나는 건 미팅 때만으로 제한하고 싶고, 또…….”
“자, 잠깐만! 잠깐만요!”
“네?”
“그 말은 즉, 저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까?”
어라. 방금 한국어가 꽤 자연스럽…….
“어째서입니까?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입니까?”
“아, 그게…….”
그의 한국어가 능숙해졌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눈앞의 베르나도의 기세가 흉흉하게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안 와도 된다는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도 직업이 있는 사람이고 바쁠 것이다. 매번 만나러 찾아올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흔쾌히 승낙할 거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성후는 얼떨떨해진 마음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눈앞에 있는 그의 모습을 담았다. 어째 평소와 분위기도 좀 다른 것 같다.
“우선, 베르나도도 바쁠 테니까.”
“안 바쁩니다.”
“그, 그럼……. 전 혼자 작업하는 게 좋기도 하고.”
“작업은 방해하지 않습니다. 원하면 서재든 작업실이든 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성후는 버릇처럼 양쪽 무릎을 꽉 쥐었다. 왜 저렇게까지 자신을 곁에 두려고 하는 걸까. 그가 바라던 대로 같이 일하기로 했잖아. 계약하기로 했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이 이상 자신에게서 얻어 낼 게 있던가. 붕어빵?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