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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달그락, 도하가 정적 속에서 커피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린은 아까부터 부담스러운 존재감을 뿜고 있는 맞은편의 남자를 보는 대신, 푸른색의 문양이 아로새겨진 컵 받침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자리에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린 씨…… 맞죠.”
“네.”
린은 제 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자리에서 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들어가자마자 회사와 집안을 전부 삼켜 버린 이복 오빠들이 린에게 준 선택지는 그 지옥 같은 집에서 견디며 살든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하든가, 둘 중 하나였으니까.
“듣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시네요.”
모든 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미 오빠들이 계산기를 두드리고 난 후에, 이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아, 네에…….”
린은 아까부터 투둑, 테이블을 두드리는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만 보고 있었다. 군데군데 굳은살이 보이는 손가락과 남자의 딱딱한 어투는 퍽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저는 이도하라고 합니다. 올해 서른넷이고, 작은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린이라고 합니다. 스물일곱이고…….”
상대방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린이 이다음에 할 말이 없다는 걸, 그저 정략결혼을 위한 집안의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아직 배움이 부족해서, 여러모로 배우는 중……입니다.”
책을 읽는 듯한 린의 목소리에 도하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자리의 어색함에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는 린이었다.
“배움이라면, 저도 만만찮게 부족하죠.”
“아…… 별말씀을요.”
이런 식으로 하면 차일 수도 있겠다. 린은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몰랐다.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 모르는 사람과의 결혼이라니.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점차 배워 나가려고 생각 중입니다. 아, 저는 작은 회사를 하나 경영하고 있는데…….”
했던 말을 또 반복하는 도하나,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린이나.
“……후.”
하지만 다음 순간 도하가 내쉰 한숨은 시나리오에 없던 것이다.
“못 해 먹겠네.”
린은 제 귀를 의심하며, 그제야 눈을 들어 도하를 봤다. 다소 거칠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그거로도 모자라 소매까지 걷어 올리는 남자는 여태 딱딱한 소리를 해 대던 남자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 미안합니다.”
피식, 웃는 도하의 얼굴이 정말로 낯설었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이런 종류의 사람은 린의 인생에 없었다.
“이런 건 도무지 내 성질에 안 맞아서.”
셔츠의 양쪽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도하가 급기야 단정했던 제 머리를 손으로 마구 헝클어트렸다.
“네……?”
그러고 나니, 도하의 본모습이 나왔다. 어딘가 조금 허술한 모습 너머로 확실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이목구비도, 뚫어져라 상대를 보는 강렬한 눈빛도.
“자, 이제 필요 없는 건 다 쳐 내 보죠. 우리는 이런 어색한 티타임을 세 번 정도 더 가진 후에 식사를 약 두어 번 하고, 다시 와인이 동반된 식사를 한 번, 또 교외 드라이브와 샴페인이 동반된 식사를 또 한 번 한 후에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으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지만, 너무 당혹스러운 일이다.
“혹시 이린 씨가 원하시면 그렇게 하겠지만…….”
“아, 아뇨.”
린의 대답에 도하는 넥타이를 한층 더 느슨하게 풀었다.
“그럼 그 과정들은 건너뛰고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난 원래 단도직입적인 사람이라.”
“아…… 네…….”
여태까지도, 린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도하는 정확히 알았다.
“난 세간에서 좋게 말하기론 자수성가. 당신처럼, 그들이 사는 세상에선 일개 졸부입니다. 물론 이것도 다 알고 여기에 나온 거겠죠.”
뭔가 심란하면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게 도하의 습관이었다. 특히나 눈앞에서, 아 이런 표현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말이지 사슴 같은 눈망울로 저를 보는 린을 두고 있자니 한층 더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회사를 더 키우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입학은 고사하고 편입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도하는 순간적으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 회의가 들었지만 이제 돌이킬 수는 없다.
“그래서 난 이린 씨가 필요합니다. 날 패스시켜 줄 입장권…… 정확히는, 트로피 와이프가 필요한 거죠.”
이 무례한 언사에도 린은 눈을 깜박였을 뿐,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이런 게 상류층 아가씨의 교육인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린 씨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난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합당한 대가를 치를 생각입니다.”
린은 그저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표정에 어떤 의사도 드러내지 않는 채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채로.
“어떻게……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제야, 린이 입을 뗐다.
“단순하죠. 당신이 원하는 걸 내가 줍니다.”
도하의 눈동자는 유난히 새카맣다.
그리고 씩, 웃는 입술은 의외로 매력적이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잖아요.”
“자유, 아닙니까.”
그 말이 더 매력적이었고.
“이 자리에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얼굴도 모르는, 당신들의 세상에선 업신여김당하는 졸부와의 결혼이 지금 생활보다 낫다는 것 정도는.”
정곡을 꿰뚫는 도하의 말에 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자유를 드리죠. 그리고 나중에, 나와 내 회사가 궤도에 오른다면 그땐 떠나도 좋고. 물론…… 이린 씨에겐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네……?”
“명색이 와이프인데 공식 석상에서 어깨에 팔을 두르는 정도는 허락해 주셔야 하는데.”
“그 정도는 괜찮지만…….”
이미 도하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린이 말끝을 흐리자 도하가 생전 처음 보는 웃음을 지었다.
“그럼, 되어 주는 겁니까.”
“……뭘요?”
“내 트로피 와이프.”
이 기분 나쁜 단어와는 달리, 린은 도하의 웃음이 너무 해사해서 또 할 말을 잃었다.
“왜…….”
“당신은 좋은 여자예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가르침을 받고, 좋은 여자로 자랐죠. 내 인생의 트로피로는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잘 모르겠다. 자유라는 단어와, 지금 눈앞에서 웃어 주는 남자의 눈동자, 둘 중 무엇에 더 끌렸던지는.
“그러니, 이린 씨.”
하지만 이건 어차피 결정이 된 자리였다.
“나와 결혼해 줘요.”
그 말을 조금 더 빨리 들었을 뿐이다.
“……네.”
그러니 린의 대답도 다르지 않았다.
“결혼해요, 우리.”
그렇게 이린은 이도하의 트로피 와이프가 되기로 했다.
01
바래다주겠다는 도하의 제안을 몇 번이나 거절한 린은 집으로 가는 대신 병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하늘 아래 유일하게 남은 린의 가족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저 왔어요.”
린은 병상의 머리맡에 앉아서 호흡기에 의지한 채 잠든 아버지를 내려 봤다.
“아빠 막내딸, 린이요.”
몇 달 전,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쓰러진 아버지는 더 이상 린의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집안은 린에게 살아 있는 지옥이었고, 매 순간이 경멸의 칼날을 걷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나요, 결혼하게 될 것 같아요.”
린은 집안의 막내였다. 그것도 장남과 띠동갑일 정도이니 말을 다 한 셈이다. 늦게 얻은 막내딸인 린을 아버지인 이현성 회장은 끔찍이 예뻐했지만, 그건 그의 뜻일 뿐이었다.
“죄송해요, 아빠 허락도 없이……. 나, 정말 나쁜 딸이죠.”
울지 말아야지, 항상 하는 다짐이 꼭 여기만 오면 흔들린다.
“근데, 나…… 더 이상 그 집에서 버틸 자신이 없어요. 아빠 없이 나 혼자는 안 돼요. 이제 다 큰 어른인데도, 엄마랑 아빠 없이 난 못 하겠어요. 미안해요…….”
린이 그 저택에 가게 된 건, 다섯 살 때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였다. 다섯 살의 린은 까맣게 몰랐다. 그저 조금 바쁜 아버지와, 천사 같은 어머니가 있는 평범한 가정인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아빠가 얼른 일어나서, 혼내 주세요.”
저택에는 린보다 훌쩍 자라 있는 배다른 형제들과 얼음장 같은 눈길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때부터 깨닫게 됐다. 자신은 존재 자체가 죄악이라는 것을. 그들의 경멸은 당연하다는 것도.
“꼭이에요.”
그런 린을 아버지는 보다 큰 사랑으로 감싸 주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이렇게 잠든 이후로 린은 지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그 지옥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배다른 형제들이 린에게 준 선택지라고는 이 길 하나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요.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
린은 오늘 처음 봤던 결혼 상대자를 떠올렸다. 무난했던 첫인상을 깨 버린 돌발 선언도, 피식 웃던 얼굴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뭣보다 린에게 자유를 준다고 한 사람이니 지금으로선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어쩌면…….”
주머니 속의 작은 물건을 움켜쥐던 린이 망설이다 병상 옆의 탁자에 그걸 올려놓았다. 손바닥 위에 달랑 올라갈 만큼 작은 플라스틱 덩어리는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고양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참. 강아지가 좋아요, 고양이가 좋아요?’
헤어지기 직전, 도하가 했던 질문이다. 그런 걸 린에게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고양이요.’
‘그럼 이거 가져요.’
툭, 린이 억지로 쥐게 된 장난감과 도하의 얼굴을 번갈아 보자, 도하는 특유의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굳이 따지자면, 선물입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받아 버린 선물이 지금 린의 눈앞에 있었다. 톡, 용기를 내서 머리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빨간 불이 들어오더니 찰칵찰칵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양이가 제자리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야옹, 야옹. 이따금 울음소리를 내는 것도 잊지 않으며 갖가지 동작을 선보이는 작은 고양이의 모습에 린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대체 얼마 만에 진짜로 웃어 본 건지, 가슴은 찡한데 입가엔 웃음의 흔적이 남아 버렸다.
“어쩌면,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린은 여린 목소리에 제 소망을 담아 보았다.
***
결혼은 놀랄 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첫 만남 이후로 3일이 됐을 때, 이미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린은 새삼 자신이 정말로 결혼을 하게 되나 보다고 생각했다.
“아가씨,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 집에서 린을 따스하게 대해 주는 사람은 이제 집안일을 도맡은 안양댁뿐이었다.
“고마워요, 여사님.”
그런 안양댁을 여사님이라 존칭해 주는 것도 린밖에 없었다. 이 차가운 집안에서 둘은 그들만의 유대 관계를 형성한 셈이었다.
“저, 아가씨.”
“네?”
안양댁은 늘 린이 안쓰러웠다. 이 큰 집에서 투정 한 번, 어리광 한 번 제대로 못 부리고 자란 린을 참 가엾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오늘은 큰 아가씨도 오셔서, 가족분들이 모두 식사에 참여하신답니다.”
“아…… 그래요.”
린은 애써 우울한 기색을 감추고 미소 지었다. 수년간 훈련받아 온, 그야말로 아가씨다운 우아한 미소였다.
“언질 고마워요, 여사님.”
나선으로 꼬인 층계를 내려가 다이닝 룸에 도착한 린은 속으로만 심호흡을 했다.
아버지가 계실 땐 종종 부엌에 딸린 작은 다이닝 룸에서 식사를 하곤 했었다. 그나마 평범한 가정의 모습을 느끼고 싶다는 아버지의 소회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린이 들어가야 하는 곳은 콜로세움같이 차갑고 넓은 곳이었다.
기다란 식탁과, 화려한 장식들이 더욱더 린을 움츠러들게 하는 곳.
“어머, 오늘의 주인공이 왔네.”
식전주로 화이트 와인을 들던 이 집안의 장녀, 영화가 린을 보고 웃었다.
“언니, 오셨어요.”
“내 집에 내가 온 거야 당연한 일이고, 네가 온 거지. 좀 늦었잖아, 우리 막내.”
붉은 립스틱을 바른 영화의 입술이 화사한 미소를 피웠다. 그 옆에는 늘 그렇듯, 영화와 꼭 닮은 이 집의 안주인이 꼭 같은 미소를 짓고 린을 보고 있었다.
“얘는, 막내야 늘 늦는 법이지. 태어나는 것부터 늦은 애니까. 어서 앉으렴. 우린 오르되브르는 건너뛸 예정인데, 넌?”
“아, 저도 그럴게요.”
어릴 적부터 린은 늘 상상했었다. 이 장면들에 더빙을 하면 참 좋겠다고. 그러면 얼마나 아름다운 가족이 될까. 우아하고 품위가 넘치는 어머니와 언니, 오빠. 막내인 린을 보고 웃어 주는 그 입매와 다정한 몸짓.
“그보다, 정말 이린이 결혼하는 거야?”
영화는 항상 성까지 붙여 남인 양 린을 불렀다. 그게 아니면 빈정대듯 막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렇게 됐어.”
나이프로 푸아그라를 가르며 답하는 건 이 집의 장남인 영준이었다.
“맞선 한 번 만에?”
모른 체 묻는 영화에게 악의가 있다는 걸 잘 아는 린은 묵묵히 제 몫의 식사를 가르고 잘라서 입에 집어넣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막내가 부끄럽게……. 본래 인연은 한 번에 알아본다잖니.”
어머니가 편을 드는 대상은 사실상 당신의 자식들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인연은 인연인가 봐. 오빠가 딱 맞는 상대를 골라 줬다면서. 참 훌륭해, 요즘 같은 시대에 자수성가라니.”
영화의 말끝에 모녀가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프롤로그
달그락, 도하가 정적 속에서 커피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린은 아까부터 부담스러운 존재감을 뿜고 있는 맞은편의 남자를 보는 대신, 푸른색의 문양이 아로새겨진 컵 받침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자리에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린 씨…… 맞죠.”
“네.”
린은 제 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자리에서 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들어가자마자 회사와 집안을 전부 삼켜 버린 이복 오빠들이 린에게 준 선택지는 그 지옥 같은 집에서 견디며 살든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하든가, 둘 중 하나였으니까.
“듣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시네요.”
모든 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미 오빠들이 계산기를 두드리고 난 후에, 이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아, 네에…….”
린은 아까부터 투둑, 테이블을 두드리는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만 보고 있었다. 군데군데 굳은살이 보이는 손가락과 남자의 딱딱한 어투는 퍽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저는 이도하라고 합니다. 올해 서른넷이고, 작은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린이라고 합니다. 스물일곱이고…….”
상대방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린이 이다음에 할 말이 없다는 걸, 그저 정략결혼을 위한 집안의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아직 배움이 부족해서, 여러모로 배우는 중……입니다.”
책을 읽는 듯한 린의 목소리에 도하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자리의 어색함에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는 린이었다.
“배움이라면, 저도 만만찮게 부족하죠.”
“아…… 별말씀을요.”
이런 식으로 하면 차일 수도 있겠다. 린은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몰랐다.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 모르는 사람과의 결혼이라니.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점차 배워 나가려고 생각 중입니다. 아, 저는 작은 회사를 하나 경영하고 있는데…….”
했던 말을 또 반복하는 도하나,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린이나.
“……후.”
하지만 다음 순간 도하가 내쉰 한숨은 시나리오에 없던 것이다.
“못 해 먹겠네.”
린은 제 귀를 의심하며, 그제야 눈을 들어 도하를 봤다. 다소 거칠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그거로도 모자라 소매까지 걷어 올리는 남자는 여태 딱딱한 소리를 해 대던 남자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 미안합니다.”
피식, 웃는 도하의 얼굴이 정말로 낯설었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이런 종류의 사람은 린의 인생에 없었다.
“이런 건 도무지 내 성질에 안 맞아서.”
셔츠의 양쪽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도하가 급기야 단정했던 제 머리를 손으로 마구 헝클어트렸다.
“네……?”
그러고 나니, 도하의 본모습이 나왔다. 어딘가 조금 허술한 모습 너머로 확실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이목구비도, 뚫어져라 상대를 보는 강렬한 눈빛도.
“자, 이제 필요 없는 건 다 쳐 내 보죠. 우리는 이런 어색한 티타임을 세 번 정도 더 가진 후에 식사를 약 두어 번 하고, 다시 와인이 동반된 식사를 한 번, 또 교외 드라이브와 샴페인이 동반된 식사를 또 한 번 한 후에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으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지만, 너무 당혹스러운 일이다.
“혹시 이린 씨가 원하시면 그렇게 하겠지만…….”
“아, 아뇨.”
린의 대답에 도하는 넥타이를 한층 더 느슨하게 풀었다.
“그럼 그 과정들은 건너뛰고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난 원래 단도직입적인 사람이라.”
“아…… 네…….”
여태까지도, 린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도하는 정확히 알았다.
“난 세간에서 좋게 말하기론 자수성가. 당신처럼, 그들이 사는 세상에선 일개 졸부입니다. 물론 이것도 다 알고 여기에 나온 거겠죠.”
뭔가 심란하면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게 도하의 습관이었다. 특히나 눈앞에서, 아 이런 표현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말이지 사슴 같은 눈망울로 저를 보는 린을 두고 있자니 한층 더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회사를 더 키우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입학은 고사하고 편입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도하는 순간적으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 회의가 들었지만 이제 돌이킬 수는 없다.
“그래서 난 이린 씨가 필요합니다. 날 패스시켜 줄 입장권…… 정확히는, 트로피 와이프가 필요한 거죠.”
이 무례한 언사에도 린은 눈을 깜박였을 뿐,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이런 게 상류층 아가씨의 교육인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린 씨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난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합당한 대가를 치를 생각입니다.”
린은 그저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표정에 어떤 의사도 드러내지 않는 채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채로.
“어떻게……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제야, 린이 입을 뗐다.
“단순하죠. 당신이 원하는 걸 내가 줍니다.”
도하의 눈동자는 유난히 새카맣다.
그리고 씩, 웃는 입술은 의외로 매력적이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잖아요.”
“자유, 아닙니까.”
그 말이 더 매력적이었고.
“이 자리에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얼굴도 모르는, 당신들의 세상에선 업신여김당하는 졸부와의 결혼이 지금 생활보다 낫다는 것 정도는.”
정곡을 꿰뚫는 도하의 말에 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자유를 드리죠. 그리고 나중에, 나와 내 회사가 궤도에 오른다면 그땐 떠나도 좋고. 물론…… 이린 씨에겐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네……?”
“명색이 와이프인데 공식 석상에서 어깨에 팔을 두르는 정도는 허락해 주셔야 하는데.”
“그 정도는 괜찮지만…….”
이미 도하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린이 말끝을 흐리자 도하가 생전 처음 보는 웃음을 지었다.
“그럼, 되어 주는 겁니까.”
“……뭘요?”
“내 트로피 와이프.”
이 기분 나쁜 단어와는 달리, 린은 도하의 웃음이 너무 해사해서 또 할 말을 잃었다.
“왜…….”
“당신은 좋은 여자예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가르침을 받고, 좋은 여자로 자랐죠. 내 인생의 트로피로는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잘 모르겠다. 자유라는 단어와, 지금 눈앞에서 웃어 주는 남자의 눈동자, 둘 중 무엇에 더 끌렸던지는.
“그러니, 이린 씨.”
하지만 이건 어차피 결정이 된 자리였다.
“나와 결혼해 줘요.”
그 말을 조금 더 빨리 들었을 뿐이다.
“……네.”
그러니 린의 대답도 다르지 않았다.
“결혼해요, 우리.”
그렇게 이린은 이도하의 트로피 와이프가 되기로 했다.
01
바래다주겠다는 도하의 제안을 몇 번이나 거절한 린은 집으로 가는 대신 병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하늘 아래 유일하게 남은 린의 가족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저 왔어요.”
린은 병상의 머리맡에 앉아서 호흡기에 의지한 채 잠든 아버지를 내려 봤다.
“아빠 막내딸, 린이요.”
몇 달 전,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쓰러진 아버지는 더 이상 린의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집안은 린에게 살아 있는 지옥이었고, 매 순간이 경멸의 칼날을 걷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나요, 결혼하게 될 것 같아요.”
린은 집안의 막내였다. 그것도 장남과 띠동갑일 정도이니 말을 다 한 셈이다. 늦게 얻은 막내딸인 린을 아버지인 이현성 회장은 끔찍이 예뻐했지만, 그건 그의 뜻일 뿐이었다.
“죄송해요, 아빠 허락도 없이……. 나, 정말 나쁜 딸이죠.”
울지 말아야지, 항상 하는 다짐이 꼭 여기만 오면 흔들린다.
“근데, 나…… 더 이상 그 집에서 버틸 자신이 없어요. 아빠 없이 나 혼자는 안 돼요. 이제 다 큰 어른인데도, 엄마랑 아빠 없이 난 못 하겠어요. 미안해요…….”
린이 그 저택에 가게 된 건, 다섯 살 때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였다. 다섯 살의 린은 까맣게 몰랐다. 그저 조금 바쁜 아버지와, 천사 같은 어머니가 있는 평범한 가정인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아빠가 얼른 일어나서, 혼내 주세요.”
저택에는 린보다 훌쩍 자라 있는 배다른 형제들과 얼음장 같은 눈길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때부터 깨닫게 됐다. 자신은 존재 자체가 죄악이라는 것을. 그들의 경멸은 당연하다는 것도.
“꼭이에요.”
그런 린을 아버지는 보다 큰 사랑으로 감싸 주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이렇게 잠든 이후로 린은 지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그 지옥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배다른 형제들이 린에게 준 선택지라고는 이 길 하나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요.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
린은 오늘 처음 봤던 결혼 상대자를 떠올렸다. 무난했던 첫인상을 깨 버린 돌발 선언도, 피식 웃던 얼굴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뭣보다 린에게 자유를 준다고 한 사람이니 지금으로선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어쩌면…….”
주머니 속의 작은 물건을 움켜쥐던 린이 망설이다 병상 옆의 탁자에 그걸 올려놓았다. 손바닥 위에 달랑 올라갈 만큼 작은 플라스틱 덩어리는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고양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참. 강아지가 좋아요, 고양이가 좋아요?’
헤어지기 직전, 도하가 했던 질문이다. 그런 걸 린에게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고양이요.’
‘그럼 이거 가져요.’
툭, 린이 억지로 쥐게 된 장난감과 도하의 얼굴을 번갈아 보자, 도하는 특유의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굳이 따지자면, 선물입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받아 버린 선물이 지금 린의 눈앞에 있었다. 톡, 용기를 내서 머리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빨간 불이 들어오더니 찰칵찰칵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양이가 제자리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야옹, 야옹. 이따금 울음소리를 내는 것도 잊지 않으며 갖가지 동작을 선보이는 작은 고양이의 모습에 린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대체 얼마 만에 진짜로 웃어 본 건지, 가슴은 찡한데 입가엔 웃음의 흔적이 남아 버렸다.
“어쩌면,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린은 여린 목소리에 제 소망을 담아 보았다.
***
결혼은 놀랄 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첫 만남 이후로 3일이 됐을 때, 이미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린은 새삼 자신이 정말로 결혼을 하게 되나 보다고 생각했다.
“아가씨,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 집에서 린을 따스하게 대해 주는 사람은 이제 집안일을 도맡은 안양댁뿐이었다.
“고마워요, 여사님.”
그런 안양댁을 여사님이라 존칭해 주는 것도 린밖에 없었다. 이 차가운 집안에서 둘은 그들만의 유대 관계를 형성한 셈이었다.
“저, 아가씨.”
“네?”
안양댁은 늘 린이 안쓰러웠다. 이 큰 집에서 투정 한 번, 어리광 한 번 제대로 못 부리고 자란 린을 참 가엾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오늘은 큰 아가씨도 오셔서, 가족분들이 모두 식사에 참여하신답니다.”
“아…… 그래요.”
린은 애써 우울한 기색을 감추고 미소 지었다. 수년간 훈련받아 온, 그야말로 아가씨다운 우아한 미소였다.
“언질 고마워요, 여사님.”
나선으로 꼬인 층계를 내려가 다이닝 룸에 도착한 린은 속으로만 심호흡을 했다.
아버지가 계실 땐 종종 부엌에 딸린 작은 다이닝 룸에서 식사를 하곤 했었다. 그나마 평범한 가정의 모습을 느끼고 싶다는 아버지의 소회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린이 들어가야 하는 곳은 콜로세움같이 차갑고 넓은 곳이었다.
기다란 식탁과, 화려한 장식들이 더욱더 린을 움츠러들게 하는 곳.
“어머, 오늘의 주인공이 왔네.”
식전주로 화이트 와인을 들던 이 집안의 장녀, 영화가 린을 보고 웃었다.
“언니, 오셨어요.”
“내 집에 내가 온 거야 당연한 일이고, 네가 온 거지. 좀 늦었잖아, 우리 막내.”
붉은 립스틱을 바른 영화의 입술이 화사한 미소를 피웠다. 그 옆에는 늘 그렇듯, 영화와 꼭 닮은 이 집의 안주인이 꼭 같은 미소를 짓고 린을 보고 있었다.
“얘는, 막내야 늘 늦는 법이지. 태어나는 것부터 늦은 애니까. 어서 앉으렴. 우린 오르되브르는 건너뛸 예정인데, 넌?”
“아, 저도 그럴게요.”
어릴 적부터 린은 늘 상상했었다. 이 장면들에 더빙을 하면 참 좋겠다고. 그러면 얼마나 아름다운 가족이 될까. 우아하고 품위가 넘치는 어머니와 언니, 오빠. 막내인 린을 보고 웃어 주는 그 입매와 다정한 몸짓.
“그보다, 정말 이린이 결혼하는 거야?”
영화는 항상 성까지 붙여 남인 양 린을 불렀다. 그게 아니면 빈정대듯 막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렇게 됐어.”
나이프로 푸아그라를 가르며 답하는 건 이 집의 장남인 영준이었다.
“맞선 한 번 만에?”
모른 체 묻는 영화에게 악의가 있다는 걸 잘 아는 린은 묵묵히 제 몫의 식사를 가르고 잘라서 입에 집어넣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막내가 부끄럽게……. 본래 인연은 한 번에 알아본다잖니.”
어머니가 편을 드는 대상은 사실상 당신의 자식들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인연은 인연인가 봐. 오빠가 딱 맞는 상대를 골라 줬다면서. 참 훌륭해, 요즘 같은 시대에 자수성가라니.”
영화의 말끝에 모녀가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