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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러게나 말이다.”
영준이 식탁 맞은편에서 그녀를 뚫어져라 보았다.
“난 이번에 우리 막내를 다시 봤지 뭐냐.”
이다음에 쏟아질 말들을 알기에, 린은 눈이라도 질끈 감고 싶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렇게 남자 혼을 쏙 빼놓는 재주가 있을 줄은…… 하긴, 그게 유전이라는 거겠지.”
“어머, 오빠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우리 막내가 오해해서 상처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그래.”
“언니, 저는 괜찮…….”
“아니야, 혹시나 첩질 하면서 자식까지 싸지른 모친의 피를 받았다고 하면 나라도 화가 날 거야. 너는 다르잖아. 우리 집에서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는데 그렇게 말하면 모욕이지.”
나이프를 쥔 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결코 드러나게 떨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배우고 자랐다. 이렇게 좋은 집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 이런 때 우아하게 미소 짓는 법 정도는 질리게 익혔다.
“아, 내가 실언을 했네.”
영준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다시 린을 보았다. 그녀는 인형 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혼수도 지참금도 필요 없이, 당장 시집을 오기만 하면 된다는 상대측의 말을 듣자니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와서 말이지.”
린은 자조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하긴, 태어난 것부터가 그들 입장에선 잘못이었겠지만.
“이왕 그렇게 된 거, 결혼식은 석 달 후로 잡았다. 이린, 네 생각은?”
“전…… 괜찮아요.”
“그렇겠지.”
그 말에 조소가 섞인 건, 못 들은 셈 치면 된다. 그들끼리 웃으며 하는 말들도, 비난 섞인 눈초리도, 전부…… 석 달 후면 끝이 날 것이다.
“그럼, 우리 이린이…… 이제 곧 출가외인이구나?”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싱긋, 웃음 짓는 어머니가 무서웠다.
“이따 식사 마치고 차는 엄마 방에서 같이할까? 시집가기 전이니까, 모녀간에 할 말도 많잖니.”
이미 준비는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자마자 어머니란 사람이 보낸 변호사와 질긴 면담 끝에 아버지가 그녀의 앞으로 많은 주식과 부동산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포기하라는 권유 아닌 강요를 받았다.
“그래 줄 거지, 이린아?”
“……네, 어머니.”
린의 그 말에 식탁 곳곳에서 피식, 하는 웃음이 들렸지만 그것도 곧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참을 만했다.
그날 밤, 린은 결국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서류에 지장을 찍었다. 지켜 줄 아버지가 없으면 자신은 기껏 상속해 준 재산을 지킬 힘조차 없었다.
“저, 어머니…….”
지장을 찍자마자 돌아서는 여자를 향해 린이 망설이다 말하자, 사뭇 냉정한 눈초리가 돌아왔다.
“남들 안 볼 땐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깐?”
“죄송해요. 저…….”
“뭐니, 답답하게.”
“시집가고 나서도, 아버지 병실에 문안 가도 될까요.”
떨리는 린의 심경이 무색하게,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네 남편이 도리만 잘하면, 뭐 상관없어.”
참, 잊을 뻔했다. 자신은 팔려 가는 것임을. 이 집안에선 필요 없는 물건이니 저쪽에서 괜찮은 가격을 제시할 때 팔아 치우는 것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쓰러진 뒤 영준이 무리하게 확장시킨 사업 때문에 현금이 필요했고, 그 현금은 린을 트로피 와이프로 데려갈 도하가 지불하게 될 터였다.
“물론, 그것도 네 아버지가 의식이 없을 때뿐이지만. 내 말 알아들었니?”
“네…….”
아마 린의 결혼식 전까진, 가족끼리 가지는 화목한 식사 자리는 더 이상 없을 것이었다. 그 사실이 린을 버티게 해 주었다.
야옹, 야옹, 야오옹.
침실로 돌아온 린이 톡, 하고 버튼을 누르자 또 고양이 장난감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을 그리며 돌고,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서 돌아보고, 또 앞발을 들어 보인다.
‘선물입니다.’
도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걸 손에 쥐여 줄 때, 좋은 향기가 났던 것도 같다. 아…… 그리고 잊고 있었던 사실 한 가지.
‘얘랑 놀다가 생각나면, 언제든 전화해도 돼요.’
그날 입었던 코트 주머니엔 도하의 명함이 있었다.
***
늦은 밤, 셔터를 내린 창고 안에서 두 남자가 분주히 움직였다.
“아, 그래서 내가 강아지가 좋으냐 고양이가 좋으냐 물어봤는데 고양이가 좋다더라고.”
도하가 멍키 스패너로 무언가를 조이는 사이, 노인 쪽은 불꽃이 튀는 용접 중이었다.
“……뭐라고?”
겨우 마스크를 벗은 석 영감이 돌아보자, 도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고양이가 좋대!”
“너 좋단 소리는 안 하던?”
“아, 아직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
끼익, 스패너가 헛돌며 쇳소리가 났다. 더 돌아갈 데도 없는 애꿎은 나사가 도하의 손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야, 이놈의 자식아. 여자가 만난 지 3일이 넘어도 너 좋단 소리를 안 하면 그건…….”
“이 여자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니까!”
“하긴, 네놈이 작정하고 사 오는 여잔데.”
석 영감은 진즉에 반대했던 혼사니만큼 고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놈이 뭐가 부족해서 여자를 사 와, 그런 잔소리를 퍼부었건만 기어코 도하는 맞선을 진행했다.
“사 오는 게 아니라, 협상이래도.”
“그거나 그거나. 거, 팔려 오는 여자나 팔아 치우는 집구석이나 퍽도 제대로 됐겠다.”
퉤, 드럼통 너머로 침을 뱉는 석 영감을 보던 도하가 피식 웃었다.
“그럼, 제대로 된 여자가 나 같은 거랑 결혼해 주려고?”
“하긴, 그도 그렇다만.”
마뜩잖은 얼굴을 하던 석 영감이 슬쩍 도하의 눈치를 살폈다.
“예쁘냐?”
“아,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그래서 예쁘냐?”
“……어. 예쁘던데.”
그답지 않게 눈을 피하는 도하를 보며 석 영감이 들고 있던 토치를 내던졌다.
“짜식, 결국 예뻐서구만.”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아냐, 이건 사업이라고!”
“사업인데, 예쁘잖아.”
“어, 그건 그렇지만…….”
“근데 헤어지고 나서 연락 한 통도 안 온다며. 결혼식도 그쪽 집안에서 통보한 거고?”
“어…….”
또다시, 더 조여지지도 않을 나사가 고통을 받는다.
“그럼 조건도 좋고, 예쁜 여자가 너한테 별로 관심이 없나 보네.”
“그게 아니라, 무슨 사정이…….”
“명함도 줬다며.”
“줬는데…… 못 봤나 봐. 역시 우리 역작이 너무 임팩트가 강했나?”
“아이고, 염병.”
급기야 용접 도구를 내던진 석 영감이 도하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결혼식 날을 받았는데, 여자한테 연락이 없다고?”
“아니…….”
“아닌 게 아니라 없잖아. 있어?”
“없는데…….”
“이 미친놈아 그러게 왜 여자한테 그런 장난감을 줘, 꽃을 줘야지!”
“그럼 그걸 진즉 말해 주든가!”
도하의 일갈 이후로 창고 안이 고요해졌다.
“……그러게. 내가 미안하다.”
“미안하면 다야?”
하지만 도하의 마음은 이미 복잡해진 후였다.
“……그럼 관심이 아예 없는 거라고?”
“연락이 안 온다며.”
“아니, 사정이…….”
도하가 말끝을 흐린다. 역시 셀프 방어는 무리가 있나 보다.
“그럼 정말 관심 없는 거야? 그게 말이 돼? 결혼은 하면서 관심은 없다는 게?”
“내가 봤을 땐 그냥 그 결혼 자체가 말이 안 돼.”
“아…… 그렇지.”
짐짓 납득한 도하가 슬프게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꽃을 줬어야 했나.
“그래도 혹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벨소리가 울렸다.
“이거, 영감 거야?”
“아닌데.”
“그럼, 내 거야?”
“내 알 바야?”
석 영감의 대답보다 도하가 휴대폰을 향해 튀어 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네, 이도하입니다!”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받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정적은 어쩐지 그 여자와 닮아서 가슴이 설레었다.
― 여보세요…… 저, 그쪽이랑 결혼하기로 한…… 이린인데요.
“네, 이린 씨.”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님 꽃을 줬어야 했는지, 다음 달에 잡힌 결혼식 날이 마음에 드는지?
― 저…… 부탁이 있어서요.
도하의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린이 말을 이었다.
“네, 뭐든지.”
― 저…… 이런 말씀이 외람된 건 알지만…….
혹시 파혼을 하려나. 아, 그건 곤란한데. 이 계약 결혼에 이린보다 더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도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 혹시…….
게다가, 정말 혹시라고 말한다.
“잠시만요.”
― 네?
“혹시 파혼하실 거면 제가 심호흡할 시간을 좀 주실래요?”
― 아, 그건 아니에요. 말씀드렸듯이 전 이도하 씨랑 결혼할 생각이거든요.
여린 목소리였지만, 또박또박 제 의사를 전달하는 린 덕분에 도하는 간신히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파혼만 아니면 뭐든 괜찮으니 편히 말해 봐요.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예비 남편의 의무니까.”
수화기 너머로 린의 망설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만났을 때도 매사에 조심스러운 언행을 가진 린이었다. 상류층 여자는 다 이런 걸까? 도하로서는 처음으로 접촉해 보는 ‘그들이 사는 세상’에 사는 여자였다.
― 괜찮으시다면…….
말 한마디조차 이렇게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린이 도하는 어쩐지 싫지 않았다.
― 우리 결혼을 더 빨리할 수 없을까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린의 말에 도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린은 도하의 당혹감을 읽었는지, 빠르게 덧붙였다.
― 아뇨. 그냥 제 바람일 뿐이고,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 그냥 작은 실례로 잊어 주세요.
“뭘 잊으란 겁니까?”
― 그러니까…… 방금 제 무례한 요청은 못 들은 걸로 치시고 그냥 작은 실수로 잊어 주셨으면 해요.
도하가 심술맞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예의 바른 대화는 애초에 도하의 성미에 잘 맞질 않았다.
“싫은데요.”
― ……네?
“싫다고요. 왜 뻔히 들은 말을 못 들은 걸로 쳐야 됩니까, 내가.”
린은 할 말을 찾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맞선 자리 때도 느꼈지만, 다소 형식에서 벗어나더라도 논리적으로 옳은 말을 건네면 린은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결혼을 서두르는 건 내가 더 원하는 일이거든요.”
부러 다정하게 굴려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비즈니스가 얽힌 이 결혼이 빨리 성사되면 될수록 도하에게 이득인 것도 사실이니까. 절대로 저 조심스러운 여자의 부담을 덜어 주려 한 말은 아니란 뜻이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 점심은 어때요.”
― 뭐……가요?
“우리의 보다 빠른 결혼을 위한 미팅? 뭐, 가벼운 회의 정도로 생각하자고요.”
창고를 나서려던 석 영감이 하필 그 타이밍에 도하를 지나치며, 혀를 끌끌 차고 고개를 저었다. 저런 소리나 해 대니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 게야. 그런 말이 표정에 고스란히 보여서 도하는 괜한 오기가 치밀었다.
“난, 이린 씨와 결혼하게 돼서 정말로 기쁩니다. 이건 진심이에요.”
석 영감 들으라고 말한 것도 없지 않았는데, 정작 말문은 린이 막혔나 보다.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가 어떻게 한시라도 빨리 결혼할 수 있을지. ……내일 점심, 괜찮죠?”
― 네? ……네, 좋아요.
린은 데리러 가겠다는 도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린의 말투를 닮아 정갈한 메시지 속 주소와 시간을 보면서 도하는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예쁜 여자한테 드디어 전화가 와서 넋 빠졌냐?”
“아니.”
석 영감의 딴지에도 도하는 평소처럼 발끈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도 넋이 나간 듯 허공을 보는 멍한 표정이 우스웠다.
“그럼 왜 비 오는 날 누렁이 같은 표정하고 자빠졌는데.”
“아, 그냥…… 나도 정말 결혼을 하나 보다 싶어서.”
쯧쯔, 석 영감이 혀를 차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고도 한참 동안 밤하늘을 보는 도하의 눈빛은 수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자신이 평생 이해하지 못하는 게 결혼이었고, 그다음이 정략적으로 하는 결혼이었는데, 하필 주인공이 또 자신이 됐으니.
“뭐…….”
딱 한 번만 만나 보려고 했다. 서로의 요구가 부합했으니 비즈니스의 하나로 검토했을 뿐이었다.
“좋은 여자일지도.”
만약, 그 자리에 린이 아닌 다른 여자가 나왔어도 이 거래가 성사됐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분명한 건 따로 있었다. 그와 그녀가 결혼을 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내일 점심에 만나기로 했다는 것.
“영감님, 꽃은 뭘 사야 되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도하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며 질문을 던졌다.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내일 점심까지 시간이 빠듯할 수도 있겠다.
***
도하는 고민 끝에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석 영감의 조언대로 가장 평범한 차를 고르느라 벌써 30분이나 허비한 터다.
“이 정도면 되겠지……?”
삐빅, 전조등이 들어오는 차는 이 차고에서 유일하게 하얀색이며, 뚜껑에 장난감 태엽 모양의 장식품이 없고, 그 뚜껑이 열리는 일도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세단이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영준이 식탁 맞은편에서 그녀를 뚫어져라 보았다.
“난 이번에 우리 막내를 다시 봤지 뭐냐.”
이다음에 쏟아질 말들을 알기에, 린은 눈이라도 질끈 감고 싶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렇게 남자 혼을 쏙 빼놓는 재주가 있을 줄은…… 하긴, 그게 유전이라는 거겠지.”
“어머, 오빠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우리 막내가 오해해서 상처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그래.”
“언니, 저는 괜찮…….”
“아니야, 혹시나 첩질 하면서 자식까지 싸지른 모친의 피를 받았다고 하면 나라도 화가 날 거야. 너는 다르잖아. 우리 집에서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는데 그렇게 말하면 모욕이지.”
나이프를 쥔 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결코 드러나게 떨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배우고 자랐다. 이렇게 좋은 집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 이런 때 우아하게 미소 짓는 법 정도는 질리게 익혔다.
“아, 내가 실언을 했네.”
영준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다시 린을 보았다. 그녀는 인형 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혼수도 지참금도 필요 없이, 당장 시집을 오기만 하면 된다는 상대측의 말을 듣자니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와서 말이지.”
린은 자조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하긴, 태어난 것부터가 그들 입장에선 잘못이었겠지만.
“이왕 그렇게 된 거, 결혼식은 석 달 후로 잡았다. 이린, 네 생각은?”
“전…… 괜찮아요.”
“그렇겠지.”
그 말에 조소가 섞인 건, 못 들은 셈 치면 된다. 그들끼리 웃으며 하는 말들도, 비난 섞인 눈초리도, 전부…… 석 달 후면 끝이 날 것이다.
“그럼, 우리 이린이…… 이제 곧 출가외인이구나?”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싱긋, 웃음 짓는 어머니가 무서웠다.
“이따 식사 마치고 차는 엄마 방에서 같이할까? 시집가기 전이니까, 모녀간에 할 말도 많잖니.”
이미 준비는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자마자 어머니란 사람이 보낸 변호사와 질긴 면담 끝에 아버지가 그녀의 앞으로 많은 주식과 부동산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포기하라는 권유 아닌 강요를 받았다.
“그래 줄 거지, 이린아?”
“……네, 어머니.”
린의 그 말에 식탁 곳곳에서 피식, 하는 웃음이 들렸지만 그것도 곧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참을 만했다.
그날 밤, 린은 결국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서류에 지장을 찍었다. 지켜 줄 아버지가 없으면 자신은 기껏 상속해 준 재산을 지킬 힘조차 없었다.
“저, 어머니…….”
지장을 찍자마자 돌아서는 여자를 향해 린이 망설이다 말하자, 사뭇 냉정한 눈초리가 돌아왔다.
“남들 안 볼 땐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깐?”
“죄송해요. 저…….”
“뭐니, 답답하게.”
“시집가고 나서도, 아버지 병실에 문안 가도 될까요.”
떨리는 린의 심경이 무색하게,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네 남편이 도리만 잘하면, 뭐 상관없어.”
참, 잊을 뻔했다. 자신은 팔려 가는 것임을. 이 집안에선 필요 없는 물건이니 저쪽에서 괜찮은 가격을 제시할 때 팔아 치우는 것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쓰러진 뒤 영준이 무리하게 확장시킨 사업 때문에 현금이 필요했고, 그 현금은 린을 트로피 와이프로 데려갈 도하가 지불하게 될 터였다.
“물론, 그것도 네 아버지가 의식이 없을 때뿐이지만. 내 말 알아들었니?”
“네…….”
아마 린의 결혼식 전까진, 가족끼리 가지는 화목한 식사 자리는 더 이상 없을 것이었다. 그 사실이 린을 버티게 해 주었다.
야옹, 야옹, 야오옹.
침실로 돌아온 린이 톡, 하고 버튼을 누르자 또 고양이 장난감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을 그리며 돌고,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서 돌아보고, 또 앞발을 들어 보인다.
‘선물입니다.’
도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걸 손에 쥐여 줄 때, 좋은 향기가 났던 것도 같다. 아…… 그리고 잊고 있었던 사실 한 가지.
‘얘랑 놀다가 생각나면, 언제든 전화해도 돼요.’
그날 입었던 코트 주머니엔 도하의 명함이 있었다.
***
늦은 밤, 셔터를 내린 창고 안에서 두 남자가 분주히 움직였다.
“아, 그래서 내가 강아지가 좋으냐 고양이가 좋으냐 물어봤는데 고양이가 좋다더라고.”
도하가 멍키 스패너로 무언가를 조이는 사이, 노인 쪽은 불꽃이 튀는 용접 중이었다.
“……뭐라고?”
겨우 마스크를 벗은 석 영감이 돌아보자, 도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고양이가 좋대!”
“너 좋단 소리는 안 하던?”
“아, 아직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
끼익, 스패너가 헛돌며 쇳소리가 났다. 더 돌아갈 데도 없는 애꿎은 나사가 도하의 손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야, 이놈의 자식아. 여자가 만난 지 3일이 넘어도 너 좋단 소리를 안 하면 그건…….”
“이 여자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니까!”
“하긴, 네놈이 작정하고 사 오는 여잔데.”
석 영감은 진즉에 반대했던 혼사니만큼 고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놈이 뭐가 부족해서 여자를 사 와, 그런 잔소리를 퍼부었건만 기어코 도하는 맞선을 진행했다.
“사 오는 게 아니라, 협상이래도.”
“그거나 그거나. 거, 팔려 오는 여자나 팔아 치우는 집구석이나 퍽도 제대로 됐겠다.”
퉤, 드럼통 너머로 침을 뱉는 석 영감을 보던 도하가 피식 웃었다.
“그럼, 제대로 된 여자가 나 같은 거랑 결혼해 주려고?”
“하긴, 그도 그렇다만.”
마뜩잖은 얼굴을 하던 석 영감이 슬쩍 도하의 눈치를 살폈다.
“예쁘냐?”
“아,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그래서 예쁘냐?”
“……어. 예쁘던데.”
그답지 않게 눈을 피하는 도하를 보며 석 영감이 들고 있던 토치를 내던졌다.
“짜식, 결국 예뻐서구만.”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아냐, 이건 사업이라고!”
“사업인데, 예쁘잖아.”
“어, 그건 그렇지만…….”
“근데 헤어지고 나서 연락 한 통도 안 온다며. 결혼식도 그쪽 집안에서 통보한 거고?”
“어…….”
또다시, 더 조여지지도 않을 나사가 고통을 받는다.
“그럼 조건도 좋고, 예쁜 여자가 너한테 별로 관심이 없나 보네.”
“그게 아니라, 무슨 사정이…….”
“명함도 줬다며.”
“줬는데…… 못 봤나 봐. 역시 우리 역작이 너무 임팩트가 강했나?”
“아이고, 염병.”
급기야 용접 도구를 내던진 석 영감이 도하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결혼식 날을 받았는데, 여자한테 연락이 없다고?”
“아니…….”
“아닌 게 아니라 없잖아. 있어?”
“없는데…….”
“이 미친놈아 그러게 왜 여자한테 그런 장난감을 줘, 꽃을 줘야지!”
“그럼 그걸 진즉 말해 주든가!”
도하의 일갈 이후로 창고 안이 고요해졌다.
“……그러게. 내가 미안하다.”
“미안하면 다야?”
하지만 도하의 마음은 이미 복잡해진 후였다.
“……그럼 관심이 아예 없는 거라고?”
“연락이 안 온다며.”
“아니, 사정이…….”
도하가 말끝을 흐린다. 역시 셀프 방어는 무리가 있나 보다.
“그럼 정말 관심 없는 거야? 그게 말이 돼? 결혼은 하면서 관심은 없다는 게?”
“내가 봤을 땐 그냥 그 결혼 자체가 말이 안 돼.”
“아…… 그렇지.”
짐짓 납득한 도하가 슬프게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꽃을 줬어야 했나.
“그래도 혹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벨소리가 울렸다.
“이거, 영감 거야?”
“아닌데.”
“그럼, 내 거야?”
“내 알 바야?”
석 영감의 대답보다 도하가 휴대폰을 향해 튀어 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네, 이도하입니다!”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받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정적은 어쩐지 그 여자와 닮아서 가슴이 설레었다.
― 여보세요…… 저, 그쪽이랑 결혼하기로 한…… 이린인데요.
“네, 이린 씨.”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님 꽃을 줬어야 했는지, 다음 달에 잡힌 결혼식 날이 마음에 드는지?
― 저…… 부탁이 있어서요.
도하의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린이 말을 이었다.
“네, 뭐든지.”
― 저…… 이런 말씀이 외람된 건 알지만…….
혹시 파혼을 하려나. 아, 그건 곤란한데. 이 계약 결혼에 이린보다 더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도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 혹시…….
게다가, 정말 혹시라고 말한다.
“잠시만요.”
― 네?
“혹시 파혼하실 거면 제가 심호흡할 시간을 좀 주실래요?”
― 아, 그건 아니에요. 말씀드렸듯이 전 이도하 씨랑 결혼할 생각이거든요.
여린 목소리였지만, 또박또박 제 의사를 전달하는 린 덕분에 도하는 간신히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파혼만 아니면 뭐든 괜찮으니 편히 말해 봐요.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예비 남편의 의무니까.”
수화기 너머로 린의 망설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만났을 때도 매사에 조심스러운 언행을 가진 린이었다. 상류층 여자는 다 이런 걸까? 도하로서는 처음으로 접촉해 보는 ‘그들이 사는 세상’에 사는 여자였다.
― 괜찮으시다면…….
말 한마디조차 이렇게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린이 도하는 어쩐지 싫지 않았다.
― 우리 결혼을 더 빨리할 수 없을까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린의 말에 도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린은 도하의 당혹감을 읽었는지, 빠르게 덧붙였다.
― 아뇨. 그냥 제 바람일 뿐이고,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 그냥 작은 실례로 잊어 주세요.
“뭘 잊으란 겁니까?”
― 그러니까…… 방금 제 무례한 요청은 못 들은 걸로 치시고 그냥 작은 실수로 잊어 주셨으면 해요.
도하가 심술맞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예의 바른 대화는 애초에 도하의 성미에 잘 맞질 않았다.
“싫은데요.”
― ……네?
“싫다고요. 왜 뻔히 들은 말을 못 들은 걸로 쳐야 됩니까, 내가.”
린은 할 말을 찾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맞선 자리 때도 느꼈지만, 다소 형식에서 벗어나더라도 논리적으로 옳은 말을 건네면 린은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결혼을 서두르는 건 내가 더 원하는 일이거든요.”
부러 다정하게 굴려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비즈니스가 얽힌 이 결혼이 빨리 성사되면 될수록 도하에게 이득인 것도 사실이니까. 절대로 저 조심스러운 여자의 부담을 덜어 주려 한 말은 아니란 뜻이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 점심은 어때요.”
― 뭐……가요?
“우리의 보다 빠른 결혼을 위한 미팅? 뭐, 가벼운 회의 정도로 생각하자고요.”
창고를 나서려던 석 영감이 하필 그 타이밍에 도하를 지나치며, 혀를 끌끌 차고 고개를 저었다. 저런 소리나 해 대니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 게야. 그런 말이 표정에 고스란히 보여서 도하는 괜한 오기가 치밀었다.
“난, 이린 씨와 결혼하게 돼서 정말로 기쁩니다. 이건 진심이에요.”
석 영감 들으라고 말한 것도 없지 않았는데, 정작 말문은 린이 막혔나 보다.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가 어떻게 한시라도 빨리 결혼할 수 있을지. ……내일 점심, 괜찮죠?”
― 네? ……네, 좋아요.
린은 데리러 가겠다는 도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린의 말투를 닮아 정갈한 메시지 속 주소와 시간을 보면서 도하는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예쁜 여자한테 드디어 전화가 와서 넋 빠졌냐?”
“아니.”
석 영감의 딴지에도 도하는 평소처럼 발끈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도 넋이 나간 듯 허공을 보는 멍한 표정이 우스웠다.
“그럼 왜 비 오는 날 누렁이 같은 표정하고 자빠졌는데.”
“아, 그냥…… 나도 정말 결혼을 하나 보다 싶어서.”
쯧쯔, 석 영감이 혀를 차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고도 한참 동안 밤하늘을 보는 도하의 눈빛은 수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자신이 평생 이해하지 못하는 게 결혼이었고, 그다음이 정략적으로 하는 결혼이었는데, 하필 주인공이 또 자신이 됐으니.
“뭐…….”
딱 한 번만 만나 보려고 했다. 서로의 요구가 부합했으니 비즈니스의 하나로 검토했을 뿐이었다.
“좋은 여자일지도.”
만약, 그 자리에 린이 아닌 다른 여자가 나왔어도 이 거래가 성사됐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분명한 건 따로 있었다. 그와 그녀가 결혼을 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내일 점심에 만나기로 했다는 것.
“영감님, 꽃은 뭘 사야 되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도하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며 질문을 던졌다.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내일 점심까지 시간이 빠듯할 수도 있겠다.
***
도하는 고민 끝에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석 영감의 조언대로 가장 평범한 차를 고르느라 벌써 30분이나 허비한 터다.
“이 정도면 되겠지……?”
삐빅, 전조등이 들어오는 차는 이 차고에서 유일하게 하얀색이며, 뚜껑에 장난감 태엽 모양의 장식품이 없고, 그 뚜껑이 열리는 일도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세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