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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같은 시각, 린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하얀 코트가 어울려요.”
“좀 과하지 않을까요?”
“전혀! 일단 아가씨 얼굴엔 퍼(fur) 장식이 어울리니까, 이게 딱인걸요.”
안양댁과 한참의 고심 끝에, 린은 간신히 하얀 퍼가 달린 코트를 입었다.
“예뻐요.”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도는 린을 안양댁이 따스한 눈초리로 보았다.
“결혼해서, 꼭 행복해지세요.”
“네…….”
안양댁도 이 결혼의 본질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는데, 린에게는 다정한 위로를 건네주기만 했다.
“아가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꼭 행복해질 수 있을 거예요. 이 집을 벗어나면, 자유롭게 사세요.”
“고마워요, 여사님.”
마치, 주문을 걸어 주는 듯한 안양댁의 말에 린은 미소 지었다. 행복까지는 알 수 없어도, 자유로워질 수는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도하가 고심 끝에, 그리고 석 영감의 조언을 동반해 고른 식사 자리는 한정식집이었다. 한옥 마을에 자리한 조용하고 작은 기와집이지만, 음식 맛이 썩 좋다는 석 영감의 평가가 크게 한몫을 했다.
“어…… 그러니까.”
어색한 정적을 애써 끊으려는 도하의 말조차 어색하기만 했다. 이게 아닌데, 주춤하는 사이 나란히 마주 앉은 상에는 벌써 속속들이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난 그게 대문인 줄 알았는데…….”
아까 린의 집에 데리러 갔을 때의 일이다. 아주 조용한 주택가, 어마어마한 담장들 앞에서 차를 대고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그 대문을 통과해 차로 이동을 해야만 진짜 현관문이 있더란다. 하, 뭐 그런 걸 드라마에서만 봤으니 어떻게 알았겠나.
“아뇨, 괜찮아요.”
시행착오를 거쳐 린과 함께 식사 장소로 오는 길은 멀었다. 도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도하는 편의점 라면에도 행복한 인생이라 이런 진수성찬이 설레었지만, 린은 또 모를 일이었다. 정갈한 젓가락질로 이따금 작은 입을 벌려 음식을 넣고 오물오물 씹을 뿐, 버릴 동작이 하나도 없는 린을 보자니 조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 맛있어요.”
게다가 이 분위기도 걱정이었다. 만난 지 30분째,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청포묵이 재료의 특성을 잘 살려서 좋은 식감을 주네요.”
아, 이건 무슨 요리 프로 심사위원인가. 얌전한 얼굴로 차분히 읊는 린의 말을 듣고 있자니 도하는 더더욱 좀이 쑤셨다.
“어제, 전화로 한 말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야겠죠.”
“네.”
오물오물, 청포묵을 씹어 넘긴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이도하 씨도 원하시는 일이라니, 이제 기탄없이 말씀드릴게요.”
조심스러운 줄만 알았던 린이, 의외로 강하게 나왔다.
“저는 이 결혼이 빨랐으면 좋겠어요. 가능하면 하루라도요.”
마지막 단어에 힘주어 말하는 린은 도하가 처음 보는 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린 씨 이야기를 먼저 들어 볼까요.”
도하가 옆에 놓인 팔걸이에 오른팔을 얹으며 느긋하게 린을 바라봤다. 내심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던 린은 덕분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며칠 동안 이 결혼과 제 처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나니 이도하 씨에게도 제가 아는 걸 전부 알려 드리고 선택할 기회를 드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됐고요. 저는 모든 걸 솔직하게 말씀드릴 테니, 이도하 씨도 가능한 한 솔직한 답을 주셨으면 해요.”
조용조용 가녀린 목소리였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제 의사를 전달하는 린은 도하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사람 같았다. 그저 마음에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나 끄덕일 줄 아는 인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럴 겁니다. 난 원래 솔직한 걸 좋아하니까.”
“그럼…… 저도 정말 거리낌 없이 말씀드릴게요.”
후, 짧은 숨을 내쉰 린이 도하를 똑바로 바라봤다. 도하는 문득, 이 여자의 얼굴을 이렇게 똑바로 바라보는 게 처음이라는 걸 떠올렸다. 도하가 여태 받았던 청초한 인상은 그대로였지만, 커다란 눈동자와 오똑한 콧날에선 유약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제 존재는 집안의 오명이에요. 처치조차 곤란한 짐 덩어리죠. 이도하 씨는 제 태생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전부 다,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린 씨의 표현에 동의하지는 않고요.”
“호적엔 올라 있지만, 전 회장님의 혼외자예요. 그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고요. 아버지의 의식이 없으신 지금, 저는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요. 이도하 씨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없을 테죠.”
린은 자신의 치부를 담담히 말하고 있었지만 내심 긴장한 채로 도하의 반응을 살폈다. 도하는 린의 예상과는 달리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결혼 상대한테 금전적 도움을 바랄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이 혼담은 당신의 오빠인 이 전무님과 진행했어요. 필요한 건 이미 모두 다 알고 수락했단 뜻입니다. 당신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이 거래가…….”
도하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린을 똑바로 주시했다.
“첫날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죠. 내가 당신이 원하는 걸 줍니다. 그리고 그건 내게 손해가 아니에요. 말했듯이, 난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까 손해 보는 거래는 안 해요. 당신은 내 부인이란 자리에 앉아 주기만 하면 돼요. 내가 당신이 사는 세상에 편입할 수 있도록, 그 자리만 지켜 주면 그것만으로도 내겐 큰 힘이 될 겁니다.”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는지, 린이 또 작은 숨을 내쉬었다.
“네, 그러니까…… 그때 이도하 씨가 말씀하셨던 트로피 와이프, 말인가요.”
“그렇죠.”
“하지만 전 금발이 아니고, 이도하 씨도 중년이 아닌걸요.”
린이 농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본래 트로피 와이프의 의미는 상당한 자산가인 중년 남성이 외모만을 보고 갈아 치워 대는 젊은 아내를 일컫는 말이다. 마치 골프 트로피처럼, 그의 인생에 장식품이자 자랑거리가 되어 줄 부인.
“그래서 참 다행이죠?”
씩 웃는 도하의 웃음은 언제나 시원했다.
“그 외에 제게 바라는 건 더 없으시고요.”
“네, 이미 말했듯이.”
“제 도움이 필요 없어지면 떠나도 되고요.”
“뭐, 이린 씨가 원한다면요.”
그 웃음처럼 시원시원한 답변은 너무 많은 생각으로 복잡한 린에게 가벼운 환기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또…… 결혼이긴 하지만, 거래이니까, 저한테는…….”
“네?”
“그러니까 명목상 결혼이지 실제로 결혼 생활을 하는 건 아니니까…… 어깨에 팔을 올리는 정도는 괜찮지만…….”
어쩐지 눈길을 피하며 말을 빙빙 돌리더라니, 그거였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한, 당신 몸에 그런 의미로 손가락 하나도 댈 생각 없습니다. 그건 확실하게 약속드리죠.”
“네, 고마워요.”
여자에게 이런 일로 고맙다는 말을 듣자 어쩐지 심란해지는 도하였지만, 이 결혼의 본질이 계약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이도하 씨도 혹시 다른 연애 상대가 있다면 만나셔도 괜찮아요.”
“……네?”
하지만 이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명목상인 결혼이잖아요. 이도하 씨가 따로 좋아하는 여성분이 있다면 만나셔도 된다고요.”
“나더러 바람을 피우라는 겁니까?”
“진짜 결혼이 아니니까 꼭 바람이라고 할 건 없겠죠.”
사실 이 말은 린에게서 처음 들은 게 아니었다. 이 혼담을 주선했던 린의 이복 오빠인 영준도 같은 말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너무나 당연한 어투로.
“저기요, 이린 씨.”
괜히 답답함과 울화가 치미는 건 왜일까. 도하는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당신과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하지만 나중에라도.”
“나중에고 지금이고 없다니까!”
버럭,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도하의 말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이 남자는 왜 화를 내는 걸까. 아버지도 오빠도, 린이 아는 주위의 모든 남자들은 그렇게 살기에 당연한 거라 여겼는데.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서.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말아 줘요. 당신한텐 어떤지 몰라도 나한텐 아주 비상식적인 일로 들리거든요.”
“네.”
“그리고…….”
하, 길게 한숨을 내쉰 도하가 제 머리를 다시 헝클다 린을 봤다.
“내가 먼저 정략결혼을 제안한 이상한 놈이긴 해도, 와이프를 두고 바람이나 피울 막돼먹은 놈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되고 싶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남자도 있었나. 린은 조금 혼란스러운 마음에 도하를 바라봤다. 그 새카만 눈동자에 거짓이나 가식은 없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그가 이런 걸로 린을 속일 이유도 없었지만.
“고……마워요.”
린의 작은 입술이 들릴락 말락, 진심을 전했다.
“저도 이도하 씨에게 최대한 자랑스러운 트로피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예쁘고, 어딘지 쓸쓸한 말이었지만 도하는 벌써 이 여자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이 낯선 여자가 조금 가엾고,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리 없을 테니.
도하는 조금 신기한 사람 같았다. 적어도 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잠시 말없이 허공을 보는가 싶으면 금세 엄청난 말을 쏟아 내고, 습관인지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리다가 툭, 대담한 소리를 던진다.
린이 받았던 몸가짐에 대한 교육과는 아주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시원스러운 웃음이 도하와 잘 어울렸다.
“혼수품은 정말로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머물 손님방은 이미 단장을 끝냈고. 아, 걱정하지 마요. 내 센스로 한 게 아니라 우리 여직원들이 업무 시간의 90%를 당당하게 땡땡이치면서 투표까지 해서 고른 거니까.”
“벌써요?”
“뭐가 벌써입니까. 3일이나 지났는데, 당연하죠.”
어쩌면 성질이 조금 급한 남자인 것 같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추진력이 있달까.
“혹시 마음에 안 들면 바꿔도 돼요. 결혼식은 이린 씨 댁에서 가능한 한 작은 규모로 하고 싶다고 하시던데, 이린 씨도 같은 생각?”
“네.”
“음…… 제주도에 내 친구 놈이 하는 작은 호텔이 있는데, 거기라면 결혼식을 더 빨리 당길 수 있을 겁니다. 나머지 사항은 오늘 밤에 전무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죠.”
벌써 영준과의 약속도 잡아 놨나 보다. 확실히, 추진력은 빠른 걸로.
“이린 씨는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원하는 거라든지.”
“네, 없는데요.”
얼굴이 예뻐서기도 하지만, 이런 때 책을 읽듯이 나오는 담담한 태도가 린을 더 인형같이 보이게 했다. 도하가 만났던 영준을 떠올렸을 때, 린이 그 저택에서 어떻게 살았을지 반추하게 되는 모습이었다.
“짜고 치는 결혼이지만, 그래도 미래의 남편한테 바라는 점이라든가.”
“아직은 없어요.”
“난 생겼는데, 하나 들어줄 겁니까.”
또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훅 치고 들어온다. 린이 살짝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도하가 씩, 웃는다.
“결혼하면 말을 놨으면 하는데.”
“아, 저는…… 이대로도 편해서.”
“그럼 이린 씨는 놓고 싶을 때 놔요. 난 결혼하면 놓는 걸로. 어때요?”
그러고 보니 여태 슬쩍슬쩍 반말을 섞어 오던 도하였다. 뭐, 그것도 린에겐 나쁘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도하의 차는 린의 집 대문을 넘어서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다시, 헤어질 시간이다.
“아, 이게 진짜 대문이라니. 참 나.”
“좀…… 넓죠.”
“좀은 아니고, 지나치게.”
린도 동감했다. 잠시 원예에 취미를 붙인 아버지가 정원을 증축하면서 그야말로 저택이 되어 버린 집은 린에게도 너무 크게 느껴졌다.
“내 집은 훨씬 좁으니까 마음의 준비 해 둬요.”
“네.”
씩, 다시 도하가 웃었다. 그의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린이 한결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도하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아, 예비 남편한테 바라는 점은 얘랑 생각해 보면 되겠다.”
차의 글러브 박스에서 뭔가를 꺼낸 도하가 린의 가방 위에 작은 상자를 올렸다. 린은 솟아오르는 기대감으로 상자를 봤다. 이 남자는 뭐지, 산타도 아니고 왜 매번 이런 걸 주는 걸까.
“물론 언제든 전화해도 돼요.”
또 한 번, 도하가 웃었다. 이번에는 희미하게나마 린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린은 곧바로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코트도 벗기 전에 책상 앞으로 다가가 도하가 준 상자를 꺼내 들었다.
“화분?”
플라스틱 화분엔 흙이 담겨 있는 대신 마찬가지로 플라스틱으로 된 꽃이 심어져 있었다. 몇 번, 길을 지나다 본 적이 있는 종류의 장난감이다. 아마 이렇게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손끝으로 톡 치면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 같다.
“넌 무슨 꽃이니.”
톡, 린의 손끝에서 고개를 흔들기 시작한 분홍색 꽃엔 귀여운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눈은 나른하게 감고 있는데 뺨에 그려진 홍조가 꽤 쑥스러워 보이는.
“자, 이제 둘이 외롭지 않겠다.”
린은 저번에 받았던 고양이 장난감을 찰칵 눌러서 화분 옆에 놓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서로 반가워서 빙글빙글 갸웃갸웃 움직이는 것 같아 어린애도 아닌데 괜히 미소가 피어 오른다.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야 해.”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확실한 것 하나는 지금 린의 입가에 핀 미소에 설렘이 조금 묻어난다는 것이었다.
같은 시각, 린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하얀 코트가 어울려요.”
“좀 과하지 않을까요?”
“전혀! 일단 아가씨 얼굴엔 퍼(fur) 장식이 어울리니까, 이게 딱인걸요.”
안양댁과 한참의 고심 끝에, 린은 간신히 하얀 퍼가 달린 코트를 입었다.
“예뻐요.”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도는 린을 안양댁이 따스한 눈초리로 보았다.
“결혼해서, 꼭 행복해지세요.”
“네…….”
안양댁도 이 결혼의 본질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는데, 린에게는 다정한 위로를 건네주기만 했다.
“아가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꼭 행복해질 수 있을 거예요. 이 집을 벗어나면, 자유롭게 사세요.”
“고마워요, 여사님.”
마치, 주문을 걸어 주는 듯한 안양댁의 말에 린은 미소 지었다. 행복까지는 알 수 없어도, 자유로워질 수는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도하가 고심 끝에, 그리고 석 영감의 조언을 동반해 고른 식사 자리는 한정식집이었다. 한옥 마을에 자리한 조용하고 작은 기와집이지만, 음식 맛이 썩 좋다는 석 영감의 평가가 크게 한몫을 했다.
“어…… 그러니까.”
어색한 정적을 애써 끊으려는 도하의 말조차 어색하기만 했다. 이게 아닌데, 주춤하는 사이 나란히 마주 앉은 상에는 벌써 속속들이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난 그게 대문인 줄 알았는데…….”
아까 린의 집에 데리러 갔을 때의 일이다. 아주 조용한 주택가, 어마어마한 담장들 앞에서 차를 대고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그 대문을 통과해 차로 이동을 해야만 진짜 현관문이 있더란다. 하, 뭐 그런 걸 드라마에서만 봤으니 어떻게 알았겠나.
“아뇨, 괜찮아요.”
시행착오를 거쳐 린과 함께 식사 장소로 오는 길은 멀었다. 도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도하는 편의점 라면에도 행복한 인생이라 이런 진수성찬이 설레었지만, 린은 또 모를 일이었다. 정갈한 젓가락질로 이따금 작은 입을 벌려 음식을 넣고 오물오물 씹을 뿐, 버릴 동작이 하나도 없는 린을 보자니 조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 맛있어요.”
게다가 이 분위기도 걱정이었다. 만난 지 30분째,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청포묵이 재료의 특성을 잘 살려서 좋은 식감을 주네요.”
아, 이건 무슨 요리 프로 심사위원인가. 얌전한 얼굴로 차분히 읊는 린의 말을 듣고 있자니 도하는 더더욱 좀이 쑤셨다.
“어제, 전화로 한 말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야겠죠.”
“네.”
오물오물, 청포묵을 씹어 넘긴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이도하 씨도 원하시는 일이라니, 이제 기탄없이 말씀드릴게요.”
조심스러운 줄만 알았던 린이, 의외로 강하게 나왔다.
“저는 이 결혼이 빨랐으면 좋겠어요. 가능하면 하루라도요.”
마지막 단어에 힘주어 말하는 린은 도하가 처음 보는 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린 씨 이야기를 먼저 들어 볼까요.”
도하가 옆에 놓인 팔걸이에 오른팔을 얹으며 느긋하게 린을 바라봤다. 내심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던 린은 덕분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며칠 동안 이 결혼과 제 처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나니 이도하 씨에게도 제가 아는 걸 전부 알려 드리고 선택할 기회를 드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됐고요. 저는 모든 걸 솔직하게 말씀드릴 테니, 이도하 씨도 가능한 한 솔직한 답을 주셨으면 해요.”
조용조용 가녀린 목소리였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제 의사를 전달하는 린은 도하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사람 같았다. 그저 마음에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나 끄덕일 줄 아는 인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럴 겁니다. 난 원래 솔직한 걸 좋아하니까.”
“그럼…… 저도 정말 거리낌 없이 말씀드릴게요.”
후, 짧은 숨을 내쉰 린이 도하를 똑바로 바라봤다. 도하는 문득, 이 여자의 얼굴을 이렇게 똑바로 바라보는 게 처음이라는 걸 떠올렸다. 도하가 여태 받았던 청초한 인상은 그대로였지만, 커다란 눈동자와 오똑한 콧날에선 유약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제 존재는 집안의 오명이에요. 처치조차 곤란한 짐 덩어리죠. 이도하 씨는 제 태생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전부 다,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린 씨의 표현에 동의하지는 않고요.”
“호적엔 올라 있지만, 전 회장님의 혼외자예요. 그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고요. 아버지의 의식이 없으신 지금, 저는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요. 이도하 씨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없을 테죠.”
린은 자신의 치부를 담담히 말하고 있었지만 내심 긴장한 채로 도하의 반응을 살폈다. 도하는 린의 예상과는 달리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결혼 상대한테 금전적 도움을 바랄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이 혼담은 당신의 오빠인 이 전무님과 진행했어요. 필요한 건 이미 모두 다 알고 수락했단 뜻입니다. 당신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이 거래가…….”
도하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린을 똑바로 주시했다.
“첫날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죠. 내가 당신이 원하는 걸 줍니다. 그리고 그건 내게 손해가 아니에요. 말했듯이, 난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까 손해 보는 거래는 안 해요. 당신은 내 부인이란 자리에 앉아 주기만 하면 돼요. 내가 당신이 사는 세상에 편입할 수 있도록, 그 자리만 지켜 주면 그것만으로도 내겐 큰 힘이 될 겁니다.”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는지, 린이 또 작은 숨을 내쉬었다.
“네, 그러니까…… 그때 이도하 씨가 말씀하셨던 트로피 와이프, 말인가요.”
“그렇죠.”
“하지만 전 금발이 아니고, 이도하 씨도 중년이 아닌걸요.”
린이 농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본래 트로피 와이프의 의미는 상당한 자산가인 중년 남성이 외모만을 보고 갈아 치워 대는 젊은 아내를 일컫는 말이다. 마치 골프 트로피처럼, 그의 인생에 장식품이자 자랑거리가 되어 줄 부인.
“그래서 참 다행이죠?”
씩 웃는 도하의 웃음은 언제나 시원했다.
“그 외에 제게 바라는 건 더 없으시고요.”
“네, 이미 말했듯이.”
“제 도움이 필요 없어지면 떠나도 되고요.”
“뭐, 이린 씨가 원한다면요.”
그 웃음처럼 시원시원한 답변은 너무 많은 생각으로 복잡한 린에게 가벼운 환기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또…… 결혼이긴 하지만, 거래이니까, 저한테는…….”
“네?”
“그러니까 명목상 결혼이지 실제로 결혼 생활을 하는 건 아니니까…… 어깨에 팔을 올리는 정도는 괜찮지만…….”
어쩐지 눈길을 피하며 말을 빙빙 돌리더라니, 그거였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한, 당신 몸에 그런 의미로 손가락 하나도 댈 생각 없습니다. 그건 확실하게 약속드리죠.”
“네, 고마워요.”
여자에게 이런 일로 고맙다는 말을 듣자 어쩐지 심란해지는 도하였지만, 이 결혼의 본질이 계약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이도하 씨도 혹시 다른 연애 상대가 있다면 만나셔도 괜찮아요.”
“……네?”
하지만 이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명목상인 결혼이잖아요. 이도하 씨가 따로 좋아하는 여성분이 있다면 만나셔도 된다고요.”
“나더러 바람을 피우라는 겁니까?”
“진짜 결혼이 아니니까 꼭 바람이라고 할 건 없겠죠.”
사실 이 말은 린에게서 처음 들은 게 아니었다. 이 혼담을 주선했던 린의 이복 오빠인 영준도 같은 말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너무나 당연한 어투로.
“저기요, 이린 씨.”
괜히 답답함과 울화가 치미는 건 왜일까. 도하는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당신과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하지만 나중에라도.”
“나중에고 지금이고 없다니까!”
버럭,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도하의 말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이 남자는 왜 화를 내는 걸까. 아버지도 오빠도, 린이 아는 주위의 모든 남자들은 그렇게 살기에 당연한 거라 여겼는데.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서.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말아 줘요. 당신한텐 어떤지 몰라도 나한텐 아주 비상식적인 일로 들리거든요.”
“네.”
“그리고…….”
하, 길게 한숨을 내쉰 도하가 제 머리를 다시 헝클다 린을 봤다.
“내가 먼저 정략결혼을 제안한 이상한 놈이긴 해도, 와이프를 두고 바람이나 피울 막돼먹은 놈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되고 싶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남자도 있었나. 린은 조금 혼란스러운 마음에 도하를 바라봤다. 그 새카만 눈동자에 거짓이나 가식은 없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그가 이런 걸로 린을 속일 이유도 없었지만.
“고……마워요.”
린의 작은 입술이 들릴락 말락, 진심을 전했다.
“저도 이도하 씨에게 최대한 자랑스러운 트로피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예쁘고, 어딘지 쓸쓸한 말이었지만 도하는 벌써 이 여자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이 낯선 여자가 조금 가엾고,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리 없을 테니.
도하는 조금 신기한 사람 같았다. 적어도 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잠시 말없이 허공을 보는가 싶으면 금세 엄청난 말을 쏟아 내고, 습관인지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리다가 툭, 대담한 소리를 던진다.
린이 받았던 몸가짐에 대한 교육과는 아주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시원스러운 웃음이 도하와 잘 어울렸다.
“혼수품은 정말로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머물 손님방은 이미 단장을 끝냈고. 아, 걱정하지 마요. 내 센스로 한 게 아니라 우리 여직원들이 업무 시간의 90%를 당당하게 땡땡이치면서 투표까지 해서 고른 거니까.”
“벌써요?”
“뭐가 벌써입니까. 3일이나 지났는데, 당연하죠.”
어쩌면 성질이 조금 급한 남자인 것 같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추진력이 있달까.
“혹시 마음에 안 들면 바꿔도 돼요. 결혼식은 이린 씨 댁에서 가능한 한 작은 규모로 하고 싶다고 하시던데, 이린 씨도 같은 생각?”
“네.”
“음…… 제주도에 내 친구 놈이 하는 작은 호텔이 있는데, 거기라면 결혼식을 더 빨리 당길 수 있을 겁니다. 나머지 사항은 오늘 밤에 전무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죠.”
벌써 영준과의 약속도 잡아 놨나 보다. 확실히, 추진력은 빠른 걸로.
“이린 씨는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원하는 거라든지.”
“네, 없는데요.”
얼굴이 예뻐서기도 하지만, 이런 때 책을 읽듯이 나오는 담담한 태도가 린을 더 인형같이 보이게 했다. 도하가 만났던 영준을 떠올렸을 때, 린이 그 저택에서 어떻게 살았을지 반추하게 되는 모습이었다.
“짜고 치는 결혼이지만, 그래도 미래의 남편한테 바라는 점이라든가.”
“아직은 없어요.”
“난 생겼는데, 하나 들어줄 겁니까.”
또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훅 치고 들어온다. 린이 살짝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도하가 씩, 웃는다.
“결혼하면 말을 놨으면 하는데.”
“아, 저는…… 이대로도 편해서.”
“그럼 이린 씨는 놓고 싶을 때 놔요. 난 결혼하면 놓는 걸로. 어때요?”
그러고 보니 여태 슬쩍슬쩍 반말을 섞어 오던 도하였다. 뭐, 그것도 린에겐 나쁘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도하의 차는 린의 집 대문을 넘어서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다시, 헤어질 시간이다.
“아, 이게 진짜 대문이라니. 참 나.”
“좀…… 넓죠.”
“좀은 아니고, 지나치게.”
린도 동감했다. 잠시 원예에 취미를 붙인 아버지가 정원을 증축하면서 그야말로 저택이 되어 버린 집은 린에게도 너무 크게 느껴졌다.
“내 집은 훨씬 좁으니까 마음의 준비 해 둬요.”
“네.”
씩, 다시 도하가 웃었다. 그의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린이 한결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도하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아, 예비 남편한테 바라는 점은 얘랑 생각해 보면 되겠다.”
차의 글러브 박스에서 뭔가를 꺼낸 도하가 린의 가방 위에 작은 상자를 올렸다. 린은 솟아오르는 기대감으로 상자를 봤다. 이 남자는 뭐지, 산타도 아니고 왜 매번 이런 걸 주는 걸까.
“물론 언제든 전화해도 돼요.”
또 한 번, 도하가 웃었다. 이번에는 희미하게나마 린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린은 곧바로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코트도 벗기 전에 책상 앞으로 다가가 도하가 준 상자를 꺼내 들었다.
“화분?”
플라스틱 화분엔 흙이 담겨 있는 대신 마찬가지로 플라스틱으로 된 꽃이 심어져 있었다. 몇 번, 길을 지나다 본 적이 있는 종류의 장난감이다. 아마 이렇게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손끝으로 톡 치면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 같다.
“넌 무슨 꽃이니.”
톡, 린의 손끝에서 고개를 흔들기 시작한 분홍색 꽃엔 귀여운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눈은 나른하게 감고 있는데 뺨에 그려진 홍조가 꽤 쑥스러워 보이는.
“자, 이제 둘이 외롭지 않겠다.”
린은 저번에 받았던 고양이 장난감을 찰칵 눌러서 화분 옆에 놓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서로 반가워서 빙글빙글 갸웃갸웃 움직이는 것 같아 어린애도 아닌데 괜히 미소가 피어 오른다.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야 해.”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확실한 것 하나는 지금 린의 입가에 핀 미소에 설렘이 조금 묻어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