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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끔(Glimpse) 1화
1. 수능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독 추운 날이었다고 기억되는 날들이 있다. 내겐 입학식이 그랬고, 수능 날이 그랬다.
고사장이 먼 탓에 새벽부터 일어나야 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온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목욕재계하는 마음이었다. 아직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수시에 떨어질 걸 반쯤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능이 중요했다.
지난 3년, 아니 장장 12년의 교육 과정 동안 최종 목표로 삼아 달려온 레일이었다. 그 종착점에 다다른 것이다. 긴장이 되는 동시에 멍한 기분도 들었다. 꿈속 일인 것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욕실 안에서 넋 놓고 서 있느라 한참 시간을 빼앗겼다. 결국 드라이할 시간이 남지 않아 대충 물기만 제거한 후 뛰쳐나왔다. 들고 나온 보온 도시락 통이 팔목에 매달려 무겁게 덜렁거렸다.
“추워…….”
예년에 비하면 올해 수능 날은 무척 따뜻할 거란 예보를 보았는데, 실제론 전혀 아니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마자 덜 마른 머리에 한기가 훅 스쳤다. 목덜미가 시려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건형아!”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쨍쨍하게 울렸다.
“여기야! 날이 쌀쌀하니 빨리 타.”
운전석에 앉은 강수현네 엄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단지 입구에서 보기로 했는데 결국 여기까지 와 주신 모양이다.
후다닥 뛰어가 뒷좌석에 타고 문을 닫았다. 히터를 얼마나 세게 틀어 뒀는지 순식간에 땀이 비어져 나왔다.
“안녕하세요.”
꾸벅, 운전석을 향해 인사를 하자 아주머니는 액셀을 밟았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그래, 건형아. 오늘 컨디션 괜찮지? 그동안 열심히 한 거 모두 보답받는 날이니까 잘해 보자.”
“예. 아주머니도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은. 너희 엄마랑 안 지가 몇 년인데. 같은 동네 사는데 당연히 도와야지. 거기다 너랑 수현이랑 같은 고사장이잖니. 아침부터 버스 타고 가면 힘 빠진다, 얘. 편하게 가야지.”
“네…….”
몸은 편했지만 자리는 썩 편하지 않았다. 내가 들어왔는데도 인사도 하지 않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강수현 때문이었다.
“아들!”
아주머니는 조수석에 탄 강수현의 팔뚝을 쳤다. 두툼한 점퍼 위를 퍽 치는 소리가 무척 요란했다. 그게 좀 민망했는지 아주머니는 강수현의 잘생긴 얼굴과 꼭 닮은 고운 얼굴로 호호 웃었다.
“그치, 아들? 오늘따라 긴장이 많이 되나 봐?”
“……응.”
그제야 강수현이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짜증 섞인 몸짓이었다. 후면 거울을 통해 강수현이 나를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강수현은 그것조차 싫다는 듯 눈길을 금방 거두어 버렸다. 괜히 주눅이 들어 뒷좌석에 앉아 몸을 움츠렸다.
“그럼 잠시 쉬고 있으렴. 잠은 자면 안 된다? 지금 자면 고사장 들어가서 더 피곤할지도 몰라.”
아주머니가 너스레를 떨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 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 긴장 어린 침묵은 아주머니의 생각처럼 중요한 시험을 앞두었기 때문이라기보단, 우리가 실제로 어색한 사이였기 때문에 감도는 것이었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차 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조용해졌다.
우리 엄마와 강수현네 아주머니가 10년 째 친분을 유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친하지가 않았다. 눈, 코, 입이 달려 있고 손가락, 발가락 개수가 동일하다는 것 외에 강수현과 내가 가진 공통분모가 있다면…… 공부 정도일까?
우리 둘 다 이과였는데, 전교 등수는 늘 엎치락뒤치락 비슷한 언저리에서 놀았다. 보통은 반에서 1등, 가끔 삐끗하면 2등, 전교에서는 10등 안쪽. 1등은 아닌데 5등 안팎으로 왔다 갔다 하는 성적이다. 덕분에 비슷한 학군의 상위권 애들끼리 팀 짜서 하는 학원도 같이 다녔다.
학원도 같이 다닌 데다가, 성적도 비슷,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엄마들이 친하기까지 하니 좀 가까워질 수 있을 만도 했지만 우린 서로 너무 달랐다.
‘거기다 내가 붙임성 있는 성격도 아니니까…….’
심지어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고작 같은 반이라는 이유로는 강수현과 친해지기에 우린 너무 카테고리가 달랐다.
나는 좀 꽉 막히고 갑갑한 부류의 사람이다. 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많지도 않았다. 모두 나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특별히 반에서 겉도는 건 아니지만, 학급 내 주요한 사건에서는 반 발짝쯤 거리가 있는 녀석들 말이다.
내가 그저 말 없는 학급 구성원 중 하나인 것과는 반대로 강수현은…… 모든 일의 중심이 되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가만히만 있어도 주위가 북적거렸다. 태양 같았다. 모두가 강수현과 친해지고 싶어 주위를 빙빙 돌았다.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잘생기고, 운동도 잘했다. 성격도 좋아 누구에게나 친절한 데다 공부까지 잘했다. 리더십이 있어서 학급 회장도 도맡아 했다.
이렇게 하나부터 끝까지 공통분모가 없으니, 나와 강수현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사도 잘 안 하고, 눈도 잘 못 마주치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지금처럼 서로를 의식하며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게 이상한 거다.
아니, 사실은 나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불편해하는 것일 테지만.
강수현은 차창에 이마를 기댄 채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수현은 이미 수시 전형으로 합격한 상태라 최저 등급만 맞추면 되겠지만,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는 천하의 강수현도 긴장을 하긴 하나 보다.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분위기 있어 보였다. 여자애들이 녀석을 볼 때마다 슬쩍 뺨을 붉히는 이유를 좀 알 것 같았다. 심지어 남자애들도 ‘강수현 존나 잘생겼다’면서 슬쩍 인정할 정도니까.
보통 그런 얘길 들으면 뽐내는 티라도 낼 법하지만 강수현은 익숙한 듯 씩 웃으며 ‘형이 그렇게 멋있냐?’ 하고 어깰 툭 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게 또 자랑 같지도 않고 친근하게 보여서 인기가 많았다.
강수현은 상대가 누구건 간에 평등하게 대했다. 여자, 남자, 후배, 친구, 선배, 선생님 모두 구분 없이 친절하게 행동했다. 신기한 건 이렇게 친절하게 구는데도 부담스럽지 않고 굉장히 담백하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렇게 친절한 강수현은 내겐 좀 다르게 굴었다. 좀 더 쌀쌀맞게 구는 것 같기도 하고,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강수현의 서늘한 눈빛을 떠올리자 기가 죽었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만 한참 응시했다.
‘그래도 원래 이렇게까진 서먹하지 않았는데…….’
강수현은 차를 타고 가는 30분 동안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어색해.’
옛날에,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을 적을 생각해 보면 그땐 적어도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이였는데. 언제부터 강수현이 먼저 인사도, 말도 건네주지 않게 됐는지 모르겠다.
어쩔 줄 모르고 한참을 애매한 침묵 속을 헤맸다.

예비 소집일 날 한 번 가 본 덕에 고사장 주변이 눈에 익었다. 목을 길게 뻗어 운전석 너머를 바라보자 저 멀리 수능 시험장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고사장이 보였다. 아주머니가 차를 멈췄다.
“저 앞은 혼잡해서 차 못 대게 해 뒀으니까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는 게 좋겠다. 그게 훨씬 빨라 보여.”
이미 고사장 앞은 수험생들과 학부모, 수험생들을 응원하러 온 사람들, 재수 학원 알바 등으로 무척 혼잡했다. 지각할까 걱정이 되어서 입실 시간보다 훨씬 일찍 출발했는데,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강수현은 목도리를 둘러매고 아주머니와 인사를 했다.
“엄마, 나 갈게.”
“아들, 수능 잘 보고 와. 엄마가 시험 잘 보라고 교회 가서 기도하고 있을게.”
“엄마 평소엔 교회 가지도 않잖아.”
“이런 날은 가 줘야지.”
“괘씸죄로 더 벌 받을라. 그냥 집에서 편하게 쉬고 있어. 어제 잠 못 잤잖아. 눈이 빨갛다.”
수능 날 자기 수능 점수 대신 엄마의 수면 시간을 생각해 주는 녀석은 아마 전국에 강수현 딱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면서 마지막엔 운전 조심하라며 아주머니 가는 길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할 말을 다 끝낸 강수현은 먼저 갈게, 하고 벌컥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제대로 말할 타이밍을 못 잡고 버벅이다 뒤늦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태워다 주셔서 고, 고맙습니다.”
아주머니는 사람 좋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수현이 가니까 같이 가 봐. 쟤도 저러는 걸 보니 긴장하긴 했나 보다. 건형이 너도 시험 잘 보고.”
‘……강수현은 긴장한 게 아니라 절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나는 무어라 대답할지 모르겠어서 조금 어물거리다 그냥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차에서 내렸을 때 강수현은 이미 스무 걸음도 더 앞서 나가 있었다. 녀석과 같이 걷는 건 불편할 게 뻔했다. 강수현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았고, 나는 그런 강수현이 좀 무서웠으니까……. 나를 더 미워하게 되면 어떻게 해.
하지만 뒤에서 아주머니가 보고 있을 게 의식이 됐다.
‘따로 걸어가면 이상하게 볼지도 몰라.’
백팩을 고쳐 메고 후다닥 뛰어갔다. 의외로 강수현의 걸음이 썩 빠르지 않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헉, 헉, 허억. 가, 같이 가.”
겨우 그거 뛰었다고 숨이 찼다. ……이건 내 체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방이 무거운 탓이다.
호흡이 달려 숨을 헐떡이면서도 강수현을 따라 걸었다. 강수현은 축구도, 농구도 모두 잘했으니 이런 내가 한심해 보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자니 괜히 부끄러워 목 뒤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너 위에 파카만 입고 왔어?”
갑자기 날아온 질문이라, 처음엔 그게 나를 향한 건 줄도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줄만 알았다. 강수현이 날 바라보지도 않고 도로 건너편만 응시하며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어, 응?”
버벅거리자 녀석이 한숨을 쉬었다.
“위에 그거 파카 하나만 입고 왔냐고.”
대체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어서 멍청하게 답했다.
“어, 어. 속엔 교복 입고 파카 입었어.”
그사이 우리는 건널목 앞에 멈춰 섰다. 강수현은 벌건 신호등 불빛만 바라봤다. 유독 신호가 길게 느껴졌다.
한참을 있는데, 강수현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왠지 긴장이 돼서 멍 때리고 있던 터라 파란불이 된 줄 알고 하마터면 허둥지둥 길을 건널 뻔했다. 또 덜떨어져 보이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뭐 해, 박건형?”
“아니, 파란불로 바뀐 줄 알고…….”
“넌 수능도 잘 봐야 하는데 그렇게 주의 없이 굴면 어떻게 하냐. 수시 떨어졌잖아.”
“어…….”
목소리가 절로 작아졌다. 아픈 곳이 찔렸다. 용기 없이 놓쳐 버린 좋은 기회를 힐난하는 것 같아서 풀이 죽었다. 몇 달 전, 수시 원서를 쓸 때가 떠올랐다.

나와 강수현은 무엇 하나 닮은 점이 없었지만, 성적만큼은 굉장히 비슷했다. 전교 석차도 비슷했고, 잘하는 과목도 고만고만했다. 내가 과학 탐구에서 주력할 과목으로 물리를 선택했고, 강수현은 화학을 선택했다는 것만 다르다.
그러다 보니 수시 지원하는 학교도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내신이 조금 오락가락하긴 해도 모의고사 성적이 워낙 좋아서 낮춰 쓸 필요는 없었다. 정시 기회가 있으니 굳이 하향할 필요는 없는 성적이었다.
상위권 국립대 하나와 사립대 몇 개를 썼다. 담임 선생님께 전해 듣기로는 강수현도 그랬다고 했다.
나와 강수현은 과학 과목 선택이 달라서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원체 성적이 비슷한 덕분에 진학 상담 할 땐 같이 묶여서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애당초 엄마가 강수현네 엄마와 친해서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강수현 소식은 며칠마다 한 번씩 꼭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국립대는 워낙 커트라인이 높고, 내신 점수가 만점인 지원자가 넘쳐서 고작 전교 석차 5등 언저리에서 순위를 다투는 내가 붙을 거라곤 처음부터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사립대는…… 전기전자를 쓰기로 선생님과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선생님과 이야기를 마치는 마지막까지 내심 고민을 했다. 나는 어지간하면 정시보다는 수시로 붙고 싶었다.
수시 원서를 쓸 때쯤에는 나답지 않게 공부에 조금 질려 있었던 것 같다. 공부에 권태를 느꼈다. 몇 달 후면 다가올 수능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에 휩싸여 있기도 했다.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기계과로 지망을 바꾸어 원서를 넣었다. 사실 기계나 전기전자나 입결은 비슷했다. 공대는 전기, 화공, 기계가 보통 유명하고 취업도 잘되니까. 하지만 기계가 전기전자보다 경쟁률이 조금 낮아 보였고, 최근 몇 년간 입결 점수가 살짝 낮았다.
게다가 난 물리나 수학 같은 건 좋아하고 잘하기도 했으니까…… 기계과가 더 좋아 보였다. 부모님도 불안하다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쪽으로 지원하라며 허락해 주셨다.
최종 원서 지원 다음 날, 학원에서 강수현이 내게 말을 걸었다. 보통 인사도 잘 안 하고 무시하기 일쑤인데.
‘박건형, 너 기계과 썼다면서.’
‘어.’
‘전기전자 쓰기로 했다며. 근데 왜 바꿨어.’
‘그냥.’
‘그냥이 어딨어. 선생님이랑 상담까지 받아 두고서?’
강수현은 심기가 안 좋아 보였다. 평소 몇 마디 나눌 때보다 스무 배는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끼리 모여 떠들던 다른 애들이 놀라 우리를 보는 게 느껴졌다. 강수현은 평소에 친절하니까 이런 모습을 보는 게 당황스러웠나 보다. 다소 냉랭한 태도를 보이는 강수현에게 익숙했던 나조차도 당황스럽게 느껴졌으니까.
‘기계과 쓰긴 했는데, 너랑 별로 상관은 없잖아. 그, 저…… 내가 거기 안 쓰면 넌 좋은 거 아냐……?’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 슬쩍 눈치를 봤다. 기세가 무서웠다. 눈빛이 어찌나 사나운지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거야…….’
강수현은 발끈해서 말을 하려다 입술을 깨물었다. 잘생기고 훤칠한 이마가 찌푸려졌다.
‘……몰라. 너 알아서 하라고. 어제 기계 지원자 막판에 터졌어.’
무어라 입 안에서 말을 굴리던 강수현은 몸을 돌려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마침 쉬는 시간이 모두 끝나고 학원 수업이 시작될 타이밍이었다. 나와 강수현을 주시하던 애들은 금방 관심을 잃었다. 분주하게 교재를 꺼내 오늘 볼 퀴즈 범위를 확인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화를 내던 강수현과 기계과 경쟁률 이야기가 신경 쓰여서 주간 퀴즈에서 80점을 맞고 말았다.
긴장이 돼서 지원율은 안 보고 있었는데, 집에 오는 길에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강수현의 말대로 경쟁률이 예년의 두 배 넘게 뻥튀기되어 있었다.
다들 나처럼 애매하게 겁을 내다 기계과에 지원한 걸까. 대학 입시는 내신, 수능, 원서, 운, 이 네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내 원서 지원 점수와 운은 빵점일 게 분명했다.
결국 수시 합격의 꿈은 요원한 일이 됐다. 괜히 겁을 내다 중요한 기회를 놓쳐 버린 거다.
반대로 강수현은 전기전자과에 수시 합격 했다.

잠시 그때 일을 떠올리자 풀이 좀 죽었다. 그렇지 않아도 입시 상담 해 주셨던 선생님께 한 소리 듣긴 했다. 괜히 짜르르 긴장이 올라와 보도블록 틈새만 바라봤다. 애타게 신호가 바뀌길 마저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목 근처로 푹신한 게 감겼다.
“어?”
얼떨떨하게 콧등까지 둘둘 올라온 것을 만져 확인했다.
목도리였다. 따끈한 체온으로 데워져 두르는 것만으로도 훈기가 전해져 왔다.
‘이건 강수현이 두르고 온 건데.’
마침 건널목 불이 파란불로 변하고, 강수현은 성큼성큼 건널목을 건넜다. 그 뒤통수를 바라보며 따라 걸으니 강수현이 무어라 말을 툭 던졌다.
“얼굴이랑 머리 축축한 채로 파카만 입고 나오면 어떻게 하냐? 수능 날 아침에 감기 걸려서 재수하면 어쩌려고 그래?”
재수는 안 하고 싶은데……. 내 딴에 항변도 해 보았다.
“추위는 많이 안 타서…….”
“추위는 안 타도 감기는 걸리잖아.”
“괜찮은데, 정말 괜찮은데. 이거 너 해.”
집 밖에 처음 나올 때야 좀 추웠지, 이젠 잠기운도 모두 가셔서 하나도 안 추웠다. 원래 추위는 잘 안 타는 편이라 겨울 옷차림이 좀 얇을 뿐이다.
괜한 민망함에 눈을 굴렸다. 강수현이 앞서 걸어서 다행이다. 마주 보고 있기라도 했다면, 정말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티 났을 테니까.
“진짜, 괜찮아.”
재차 괜찮다고 말을 하며 목도리를 풀어 주려고 하니 강수현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난 대충 해도 2등급은 받아서 최저 맞출 수 있어. 너나 해.”
……그건 그랬다. 나도 컨디션이 안 좋아 봤자 2등급 막바지 아래로는 절대 안 떨어지니까 강수현도 그렇겠지. 아무튼 이렇게 말하는데 나로서는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물어물 알았어, 하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강수현은 재게 발을 놀렸다. 거기다 줄곧 앞만 보고 성큼성큼 걸어서 녀석을 따라 걸으려니 약간 숨이 찼다. 헉헉거리는 걸 티를 안 내려고 애쓰니까 더 힘들었다.
“목도린 너네 아줌마한테 전해 달라고 해.”
“어. 아, 알…았어. 고마, 고마워.”
아마 티 안 내기는 실패한 것 같지만. 대답이 뚝뚝 끊겼다.
“뭐 그렇게 숨이 차.”
강수현은 슬쩍 헐떡거리는 내 얼굴을 봤다. 힐끔, 시선에 감촉이 있었던가. 뺨을 스치는 눈길에 괜히 피부가 근질거렸다.
“……뭐.”
그러고서 강수현은 무어라 빠르게 중얼거리곤 고사장 교문을 향해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이쯤 되면 저 멀리 차를 대고 우리를 보고 있던 아주머니의 시야에서 벗어났을 테니 굳이 같이 걸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험…… 잘…….’
어쩐지 착각처럼 귓가로 시험 잘 보라는 말이 스쳐 간 것 같기도 하다.
“어어…….”
나는 무어라 인사도 못 건네고 뛰어가는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멀어지고 있는 강수현의 뒷목과 귓바퀴가 추위에 아린 듯 붉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고마워. 오늘 시험 잘 봐, 하고 말해 줄걸.’
그걸 보고 말을 꺼내지 못한 걸 아주 약간, 아주 조금 후회했다.


11월 OO일
수능 쳤다.
시험은 작년보다 어렵긴 했지만, 불수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체감상 9월 평가원보다 쉬웠다. 가채점해 보니 다 안정권이다. 마킹에서 틀리지 않았다면 최저는 충분히 통과하고도 남을 거다.
마킹도 안 틀렸겠지. 혹시나 해서 세 번이나 훑긴 했지만 3년 동안 모의고사 치면서 마킹 실수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으니까 걱정은 안 된다. 차라리 걱정이라면 멍청하게 수시에 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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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아무튼 오늘 날이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