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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끔(Glimpse) 2화
2. 졸업식


졸업식은 좀 어색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지난 3년간 거의 매일같이 다니던 학교인데도 검은 가운에 학사모를 어색하게 둘러쓴 학생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대학에 붙고 요란하게 머리스타일을 바꾼다거나, 마음껏 멋을 낸 녀석들이 많았다. 다들 처음 보는 얼굴 같았다. 앳된 얼굴 위에 얹힌 성인 흉내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우리 반에서 제일 삭았다고 하는 녀석조차 초보 어른 티가 역력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 될 학교 강당에 줄지어 서서 졸업식 순서를 기다렸다.
나는 앞줄에 섰다. 무슨 상을 받는다고 했다. 상 이름이 뭐였더라……. 학부모 회장 상? 아무튼 성적순으로 받는 상이다.
강수현은 옆 반이었는데, 줄 맨 앞에 서 있었다. 학급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받는 상도 많았다. 나같이 성적 우수상 비슷한 것도 받았고, 학내 모범상도 받았다. 2학년 때 전교 부회장으로도 선출되어 활동했다고 표창장도 받았다.
그래서 무슨 무슨 상을 호명할 때마다 강수현의 이름은 꼭 끼어 있었다. 졸업식 진행을 도우면서 단상을 여러 번 오르내리느라 신경 써서 다듬은 게 티 나는 머리카락이 조금씩 흐트러지는 게 보였다.
그래도 뒤에선 여자애들이 멋있다고 속닥거리고 있을 게 뻔했다. 건강해 보이는 흰 이마 위로 가닥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내가 봐도 좀 멋있었다. 원래 의도했던 스타일링의 반대 방향으로 뻗쳐올랐을 머리마저 강수현이 하니 자연스럽게 연출된 머리 같았다.
나는 누구누구 외 몇 인 중에 ‘몇 인’과 ‘이하 내용은 동일합니다.’에 속하는 사람으로 단상에 잠깐 서 있다가 내려왔다. 단상에 오르긴 하지만 대표로 상을 받기에는 등수가 약간 애매했다.
성적이 비슷한 탓에 내 바로 곁에 선 강수현도 그랬다. 하지만 상을 전해 받은 후, 상장을 수여해 주신 학부모 회장님과 깍듯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굉장히 익숙해 보여서 분위기만큼은 전교 1등 같기도 했다.
강수현의 가족도, 친한 친구도 아닌데 사진을 찍어 대는 사람들이 이해가 갔다. 엄마가 저 멀리서 커다랗고 비싼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는 게 보였다. 내 독사진도 있을 테고, 강수현의 사진도, 그리고 우리 둘이 같이 서 있는 사진도 있겠지.
강수현 옆자리에 서 있는 내가 너무 못생겨 보일 것 같아서 좀 걱정이 됐다. 평소 내가 잘생겼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못생겼다고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괜히 의식이 됐다.
‘나도 좀 신경 써서 올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굳이 강수현에게서 멀리 떨어지진 않았다.

뭐 그리 상 줄 게 많은지.
상장 수여식은 한참 이어졌다. 졸업식인데도 애들은 집중력을 잃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상 받는 나도 지겨운데, 아닌 사람들은 더 지루하게 느껴지겠지.
물론 수여식이 끝났다고 지겨운 식순이 마무리되는 건 아니었다. 무슨 축사도 있었고, 지역구 의원도 찾아와서 미래의 유권자들을 향해 축하 연설을 했다.
마지막 축사 순서는 교장 선생님이었다. 평소 하는 훈화 말씀과 어찌나 똑같은지 너무 자주 들어 그대로 뒷내용을 읊을 수 있을 만큼 지루하고 뻔한 얘기만 했다.
빨리 졸업식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을 호락호락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교장 선생님은 자기의 모든 훈화 레퍼토리를 졸업식에서 총망라하여 보여 주셨다. 앞으로 너희들 앞에 펼쳐질 미래는 무엇 하나 쉽지 않을 거다, 하고 사회의 쓴맛을 미리 경험시켜 주려는 걸까 생각까지 들 정도다. ‘마지막으로’란 말을 수십 번은 들은 것 같다.
축하해 주러 온 학부모들까지 따분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나도 지루함을 애써 참으며 다른 생각을 했다.
‘나도 머리 할걸.’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강수현의 머리끝을 보면서 그런 생각도 잠깐 했다. 한쪽으로 뻗쳐올랐어도 꽤 괜찮아 보였다.
우리 학교는 두발 규제가 없었지만 나는 3년 내내 적당히 짧은 머리 스타일을 유지해 왔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신경 쓰이는 게 싫었다. 거기다 외모를 꾸미는 덴 별로 관심도,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수능이 끝나고 합격 통보를 받고, 긴 방학을 보내고, 졸업식에 이르기까지, 염색이나 펌 따위는 할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그럴싸하게 다듬은 강수현의 머리를 보니 나도 해 볼 걸 그랬나, 잠깐 후회가 들었다. 눈썰미는 없어서 정확히 어디가 바뀌었는지는 다 집어내진 못하지만 머리색이 좀 밝아지고 평소보다 약간 곱슬기가 돌았다. 아마 염색과 파마를 한 거겠지.
……잠깐 저런 머리를 한 내 모습을 상상해 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안 어울려.’
저건 강수현같이 훤칠하게 생긴 사람이 해야 어울릴 것 같았다. 나는 좀…….
평소에 옷도 티 몇 장에 바지나 걸치고 다니는데 저런 머리를 감당할 자신도, 머리에 어울리게 잘 입고 다닐 자신도 없었다. 괜히 연예인 따라하다 망신당하는 일반인 꼴은 되지 말자, 하고 자위했다.
한참 그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시선이라도 느꼈는지 강수현이 뒤를 돌아봤다.
‘어, 눈 마주쳤다.’
시원하게 뻗은 모양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나도 모르게 멀뚱히 바라보자 강수현은 눈썹을 까딱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썹 색도 좀 연해진 것 같은데. 눈썹도 염색하는 걸까?’
나는 강수현이 눈썹을 염색했을지 궁금해하며 교장 선생님의 마지막 훈화를 견뎠다. 대신 더 이상 강수현 뒤통수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의식적으로 발끝을 보려 노력했다. 썩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 자길 뻔히 바라보는 건 기분 나쁠 테니까.



졸업식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 앨범과 졸업장을 받았다. 선생님께선 내게 졸업장을 건네며 대학 가서는 많은 사람과 사귀고 많은 경험을 해서 지금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판에 박힌 듯 뻔한 말이었지만 조금 찔렸다.
비슷한 학군에서 자라 공감대가 많았던 반 친구들과도 어색하게 지냈는데, 대학 가서는 잘할 수 있을까. 선생님의 말씀이 왠지 너는 밖에 나가서 사람 좀 사귀고 사교성을 키우란 질책 같아서 지레 움찔했다.
마지막 종례 말씀은 흔한 이야기로 끝났다. 각자 자기 앞에 놓인 길을 씩씩하게 나아가라는 격려였다. 드디어 끝났다는 해방감 반, 새로운 곳에 가서 또다시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감 반 섞인 심정으로 박수를 쳤다. 싱숭생숭했다. 정말 졸업이었다.
엄마와 아빠의 권유로 담임 선생님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선생님은 기념사진을 찍자는 요청에 응하느라 인기 만발이었기 때문에 한참 기다려야 했다.
사실 반에서 1등 정도 하니까 여러모로 선생님과 교류할 기회가 많긴 했다. 하지만…… 익숙할 뿐이지 친한 편은 아니었다. 조금 덜 어색한 어른 정도.
졸업하고 다시 찾아뵐 것 같지도 않고, 선생님도 나를 그리워할 것 같지 않은데 굳이 사진을 찍어야 하나 생각도 들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남들이 다 찍는데 안 찍는다고 고집부리는 것도 이상했다.
미적거리며 사진 찍을 순서를 기다렸다. 그동안 같이 어울린 반 친구 몇 명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모두 요란한 성격은 아니라서 꽃다발과 졸업장을 들고 뻣뻣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나중에 보자, 하고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교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복도가 제법 한산해진 후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 오래 기다린 탓이다. 우리 가족이 제일 마지막이었다.
‘대체 사진이 뭐라고…….’
지쳐서 빨리 점심이나 먹으러 가고 싶었다. 이 근처는 죄다 붐빌 게 틀림없으니 외식 말고 그냥 집 밥.
“건형이 엄마!”
서둘러 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가 손을 흔들었다. 익숙한 하이 소프라노, 발랄한 목소리다. 강수현네 엄마였다.
강수현도 이제야 집에 가려던 참이었나 보다. 오늘 상을 여러 개 받아서 그런지 짐이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뻗친 머리는…… 물이라도 묻혀 가라앉혔는지 다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뻗친 것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는데.
엄마는 친한 강수현네 엄마를 본 게 반가운지 무척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아직 안 갔어?”
“친구들이랑 사진 찍어 주고, 담임 선생님이랑 얘기 좀 했어.”
“우리도 순서 기다리다가 이제 가네.”
동네에서도 자주 보는데 그렇게 반갑나? 두 엄마는 기다리는 아빠들과 아들들이 무안하도록 오래도록 잡담을 나누었다. 도무지 얘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슬쩍 등을 찌르자 엄마가 정신을 차리곤 강수현네 아저씨와 강수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구, 내 정신 좀 봐라. 인사도 안 했네. 안녕하세요, 건형이 엄맙니다. 수현이는 오늘도 잘생겼네. 신수가 훤해, 아주. 잘생긴 아들 둬서 좋겠어.”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칭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강수현은 교과서에 나오는 예시만큼이나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잘생긴 애가 싹싹하게 굴기까지 하니 좋은지 엄마는 흐뭇하게 웃었다.
“응, 수현이는 애가 참 어른스럽고 든든하네. 건형이 아빠, 여기 수현이네야. 알지? 나랑 같이 수영 다니고, 그 예전에…… 언제더라. 건형이 1학년 때 학부모회도 같이 했던.”
어색한 웃음을 짓고 병풍처럼 서 있던 두 아저씨가 그제야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어른들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손톱 거스러미만 뜯었다. 그러다 슬쩍 강수현을 훔쳐보는데, 강수현 또한 머쓱한지 머리카락을 계속 만지고 있었다. 아까 뻗쳐오른 곳을 만지작거린다. 그래서 그런가, 그쪽 머리가 좀 납작했다.
그걸 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기 눌렸는데.”
작게 입 안에서만 말한 건데 강수현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휙 돌렸다.
“뭐?”
“아, 아냐.”
“뭐가 눌렸어?”
불쑥 가까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
복도에서 꽤 오래 서 있었나 보다. 강수현에게서 차가운 바람 냄새가 났다. 들이닥친 얼굴과 체취가 부담스러워서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어, 아니. 아냐. 저, 그. 오늘 목도리 했네. 머리랑 잘 어울린다.”
얼굴에 내 입김이 훅 쐬어졌나 보다. 강수현은 내가 입을 열자 자기도 놀랐는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입 냄새가 났나?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구취가 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그것도 우스울 것 같아서 참았다. 정말 냄새 났으면 어쩌지. 친한 사이가 아니라 그런지 굉장히 부끄러웠다.
강수현은 목도리를 빡빡하게 여몄다. 맵시 있지만 헐렁하게 둘러매고 있던 민무늬 목도리로 순식간에 얼굴 반절을 가렸다. 그러고 나서야 대답했다.
“어.”
목도리 사이로 발음이 뭉개져 나왔다. 강수현이 너무 진저리 치는 게 좀 민망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저 얘기했다.
“그, 수능 날 고마웠어.”
“별로.”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거지. 원래도 대화를 잘 이어 가는 건 소질이 없는데 이런 건 너무 난이도가 높았다. 강수현의 목도리 끄트머리만 쳐다보면서 고민했다. 그러자 강수현이 한숨을 쉬었다. 한심해 보였나 보다.
아, 쪽팔려.
“……아무튼 대학 붙은 거 축하한다. 정시 잘 쳐서 다행이다.”
“어어. 고, 고마워.”
원래도 재치 있는 대꾸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강수현과 함께 있으면 고맙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 같다.
어물어물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와중, 강수현네 엄마가 쾌활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래, 건형아. 너도 B대 됐다면서? 축하한다. 원체 잘하니까 정시로도 걱정 없이 갔네. 우리 수현이도 B대 붙은 거 알지? 같은 공과대니까 자주 보겠네. 둘이 더 친하게 지내. 대학 가서 같은 동네 사람 만나기 어렵잖아. 같이 등하교 하면 좋겠다, 얘.”
“엄마!”
강수현이 그만하라며 아주머니에게 속닥거렸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아랑곳 않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왜? 같은 공대 아니야?”
“과가 다르잖아. 나는 전기전자고, 박건형은 기계.”
“내가 너 입시 전략 같이 짰거든? 그 정도는 알아. 그래도 같은 단과대잖아.”
“아, 씨. 다 합치면 몇백 명인데, 무슨.”
신경질 부리는 강수현이 신기했다. 아무리 의젓하게 구는 강수현이라 해도 엄마 앞에서는 애 같아지기도 하는구나. 아주머니는 깔깔 웃었다.
“뭐 그런 걸 따지니. 더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는 뜻이지. 아무튼 건형아, 우리 수현이 잘 좀 부탁한다?”
“네, 네에.”
친해질 일이 있더라도 그 반대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강수현을 챙길 게 뭐가 있겠는가. 알아서 뭐든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고, 친구도 잘 사귀는데.
“건형이도 그 신입생 합숙 모임 같은 거 가니? 이름이 뭐더라? 신입생 배움터?”
“새내기 배움터 말씀하시는 거면 아마 갈 것 같아요.”
사실 가기 싫었다. 하지만 인터넷 같은 델 찾아보니 미리 주최하는 모임 같은 건 안 가도 학교에서 하는 새터는 꼭 가야 학교생활이 편하다고 했다. 미리 동기들도 사귀고 선배들에게 눈도장을 찍어 둬야 모르는 걸 물어볼 사람들이 생기니까.
“우리 수현이도 갈 것 같으니까 거기서 동향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 봐.”
“엄마, 과가 다르다니까.”
강수현이 아주머니에게 속닥거렸지만, 아주머니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강수현이 좀 더 나이 들고 유들유들해지면 저런 느낌이 되려나?
“아이고, 모자가 참 사이가 좋네. 그래, 건형아. 너도 이제 학교 들어가면 모르는 사람들만 만나고 다닐 텐데 그중에 한 명이라도 아는 얼굴 있으면 얼마나 좋으니. 가끔 밥이라도 같이 먹고 그래.”
엄마도 옆에서 맞장구를 치고, 우리 아빠도, 강수현네 아저씨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다들 대학 졸업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건 20년 전 일일 텐데 모두 마치 엊그제 졸업한 것처럼 아는 척을 했다. 강수현은 부모님들의 참견에 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척 공감이 갔다.
사람이 조금씩 오가던 복도가 썰렁해질 즈음에야 엄마가 사진을 찍자고 했다.
“맞다. 사진도 찍어야지. 둘이 같이 서 볼래? 사람도 없으니까 복도 배경으로 찍자.”
말이 좋아 제안이지, 품에 꽃을 안겨 주고 나와 강수현을 함께 세워 놓고선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강요 아닌가.
엄마가 카메라를 들고 손을 흔들었다. 아빠의 취미 생활을 위해 구매했지만 이젠 엄마가 더 자주 쓰는 비싼 DSLR이다. 육중한 카메라를 꺼내 들자 강수현네 부모님께서도 좋아하셨다. 휴대폰으로만 사진을 찍었는데, 화질 좋은 카메라로 찍어서 좋다고 했다.
“안 그래도 수현이 단상에 올랐을 때 여러 장 찍었어요. 인물이 되니까 멀리서 막 찍는데도 그냥 화보였어, 아주. 나중에 보내 줄게.”
엄마가 으쓱하며 말했다.
아까 나 찍을 땐 맘에 안 든다고 여러 장 연사로 찍었다고 했는데…….
“자자, 아들들. 둘이 좀 가까이 서 봐.”
사진사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엄마가 손을 까딱까딱했다. 너무 안 친해 보인다고 가까이 좀 서라고 성화다.
‘강수현이랑은 원래 어색한 사이인 걸 어떻게 해.’
1년간 친하게 지냈던 같은 반 애들이랑도 적당히 모여 어색하게 웃음 짓는 게 다였다. 근데 강수현이랑 친한 척이라니. 나는 아닌 걸 그럴싸하게 흉내 내는 재주는 없었다.
“야, 붙어.”
강수현이 한 발짝 내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툭, 팔뚝이 부딪혔다. 하마터면 놀라서 피할 뻔했는데, 다행히도 티는 안 났다. 옆에 선 강수현이 작게 속닥거렸다.
“가까이 안 오니까 아줌마가 계속 서서 기다리시잖아. 빨리.”
어느새 얼굴을 반쯤 가리던 목도리를 원래대로 단정하게 내려 묶은 뒤였다. 강수현은 샛노란 프리지아를 흰 안개꽃으로 감싼 꽃다발을 안고 있었는데, 잘 어울렸다.
‘잘생긴 사람은 꽃을 들어도 잘 어울리나 봐.’
학교 앞에서 2만 원에 팔던 꽃다발이다. 그런데 강수현이 드니까 잡지에 나오는 30만 원짜리 꽃다발 같기도 했다.
잠시 넋 놓고 있었나 보다. 강수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왜?”
“그, 잘 어울려서.”
다소 당황한 탓에 앞뒤 맥락 없이 잘라 대답해 버렸다. 강수현은 결국 고개를 휙 돌렸다. 어떻게 하지, 뜬금없는 헛소리처럼 들렸을 거다. 낯부끄러워 후회가 됐다.
엄마가 저기 멀리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럼 찍는다? 건형아, 넌 좀 웃어라. 수현이도 스마일 하고. 아유, 아들들이 훤칠해서 찍을 맛이 나네.”
뻘쭘하게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카메라에서 찰칵이는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2월 OO일
졸업식 했다. 이게 뭐가 어렵다고 몇 번이나 예행연습을 시켰는지 모르겠다. 상 받는 방법이나, 인사하는 것까지 수상자들만 따로 불러서 가르쳐 줬으니까. 어디로 나갈지까지 하나하나 다 지시해 줬다. 그냥 앞에서 누가 손짓만 하면 될 걸.
아무튼 이것저것 상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부상이 죄다 쓸모없는 거다. 제일 쓸 만한 게 문화상품권이다. 괜히 짐만 많아졌다.
아. 그리고 동창회장이 됐다.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동창회장은 뽑고 가자고 말씀하셨는데, 1학기 회장이나 2학기 회장 둘 중 하나가 하라고 강요하셨다. 그러다 얼떨결에 내가 하게 됐다. 반 친구들 중에서 대하기 불편한 애들은 없으니까 동창회장이 된 건 썩 상관은 없었는데 부모님이 지켜보고 계셔서 민망했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학교를 떠나려니 아쉽다.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이제 예전처럼 매일 만나지 못하는 거니까.
대학 가서 사귀는 친구는 중·고등학교 때 사귀는 친구들이랑 느낌이 다르다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걔네도 다 나 같은 애들일 텐데 뭐가 달라지려나.
새내기 배움터 공지도 떴는데 갈 생각을 하니 좀 설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수시에 붙은 사람들끼린 미리 정모도 한다는데 아직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다. 굳이 미리 나가서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나? 그냥 고등학교 친구들이나 학원 애들이랑 많이 만나 두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사람은 나중에 공식 학교 행사 가서 사귀면 되겠지.
그러고 보니 새터는 공과대 모두 같은 곳으로 간다는데, 박건형도 같이 가겠지 싶다. 그런 건 별로 안 좋아하는 눈친데 간다고 해서 의외였다. 걔 성격에 뻘쭘해할 텐데.
학교에서 B대 공대를 간 사람은 나와 박건형뿐이다. 그리고 보건대랑 간호대, 천문에 한 명씩 더 있다. 진학률 보면 전체 인원으론 B대에 꽤 많이 가긴 했는데 이과는 올해 B대 입결 컷이 이상하게 높아져서 많이 못 갔다.
그래도 박건형은 수능 타입이라 제법 넉넉하게 정시 컷 안에 들었다고 했다. 국립 A대는 1차는 통과했지만 2차에서 떨어졌댄다.
어차피 나나 걔나 A대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좀 애매한 점수라서 B대는 갈 수 있지만, 확실히 A대 상위 컷을 원한다면 재수를 해야 해서. 뭐, 제일 낮은 과에 지원하면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공대에 가고 싶었으니까.
아마 박건형은 나보다 더 그럴 거다. 물리나 기계 같은 건 엄청 좋아하니까. 예전에 과탐 학원 같은 반일 땐 물리 선행 할 때만 엄청 재밌어하는 얼굴을 했다.
……아무튼 다행이다. 수시 떨어지고 나서 엄마가 집에서 맨날 박건형네 엄마와 통화하면서 위로해 주는 게 귀에 거슬렸다. 이젠 그런 얘긴 안 들어도 되잖아.
아무튼 부모님이 계속 같은 학교니까 친하게 지내라며 엮는 게 민망하다.
그거랑 이건 별로 상관없는데.
어른들은 우리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며,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같은 공과대에 갔다는 것만으로도 절친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군다. 가끔 그런 게 안 될 때도 있는데.
이상하게 박건형은 가까이 지내기 껄끄럽다. 짜증 나.


2월 OO일
박건형네 아주머니가 찍은 사진을 받았다. 엄마가 핸드폰으로 보내 줬다.
엄만 왜 사진 찍을 때 머리 눌린 거 말을 안 한 거야?
졸업식 단상 위에서 머리가 흐트러진 모습도 찍혀 있었다. 고화질로 보니 몇 배는 더 민망했다. 거기다 우리 가족사진이랑, 박건형이랑 찍은 사진은 그거랑 반대로 아예 머리가 눌려 있다. 뻗친 부분을 눌렀는데 너무 눌렀나 보다.
제대로 찍힌 게 하나도 없네.
짜증 난다. 신경질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