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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서(序)
― 오악검중(五岳劍中) 화산선검원(華山仙劍元)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오악(五岳)이란 다섯 개의 산.
즉 중원 명소로 자리한 대표적인 명산(名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동쪽의 동악(東岳)인 태산(泰山).
서쪽의 서악(西岳)인 화산(華山).
남쪽의 남악(南岳)인 형산(衡山).
북쪽의 북악(北岳)인 항산(恒山).
중부의 중악(中岳)인 숭산(嵩山)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오악일 뿐.
강호(江湖)에서 오악이라 하면 중원 무림에 터를 잡은 검파인 오악검파(五岳劍派)를 일컫는 말이었다. 또한 오악검중(五岳劍中)이라 하면 오악에 각기 자리 잡은 태산파(泰山派) 화산파 형산파 항산파 숭산파의 검을 말함이요 화산선검원(華山仙劍元)이란 뒷말은 다섯 문파 중 화산파에 살고 있는 신선(神仙)의 검이 가장 으뜸이란 뜻으로서 은연중 화산파가 오악검파의 최고봉에 서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처음 오악검파란 말이 생기게 된 것은 40년 전 대문파의 집합체인 구파일방의 압박이 극심할 때였다. 당시 중소 방파였던 오악검파는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서로 연합해야만 했고 그중 화산파만이 유일하게 당시 구파 중 하나였던 해남검파(海南劍派)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만큼 화산파의 검이 오악검파 중 가장 강하며 또한 그 검으로 나날이 번창해 현재는 구파일방의 하나로서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세를 넓힌 상태였다.
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구파일방이란 거대한 무림 세력이 행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슷한 위치에 있던 네 문파와 연합해야만 했던 화산파(華山派).
그런 화산파가 오늘날 독자적인 힘으로 구파일방에 속할 수 있게 된 건 오로지 한 사내 때문이었다.
― 선검학사(仙劍學士) 유원영.
화산선검원이란 말 가운데 선검의 주인공인 유원영은 본시 낙방 문사 출신으로 늦은 나이에 무(武)에 뜻을 두고 화산파에 입문했다. 입문 후에도 화산파의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책과 검을 벗 삼아 살아가던 그였기에 눈여겨보던 이도 없었다.
그런 그가 처음 자신의 검을 펼쳤을 때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요 그와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들 역시 놀라움을 표해야만 했다.
선검(仙劍).
인간이 펼칠 수 없는 검의 경지를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유원영이 펼쳐 낸 것이다. 당시 적지 않은 나이를 가진 유원영이었고 그가 늦은 나이에 무공에 입문한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보여 준 검의 경지는 결코 이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이들의 상식을 깨고 한계를 벗어난 검을 구사했던 유원영으로 인해 중소 방파에 불과했던 화산파란 이름을 구파에 입성시키는 최상의 결과를 낳았다.
그의 이름이 드높아지면 질수록 유원영이란 존재를 길러 낸 화산파의 무공을 배우고자 수많은 이들이 화산으로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로써 지난날과는 달리 강대한 힘을 축적할 수 있었던 화산파는 중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해남도의 해남검파를 구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꿰찰 역량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는 오악검파 속의 화산이라기보다 구파일방 중 하나인 화산으로서 세인들의 뇌리에 각인된 화산파. 그러나 욱일승천(旭日昇天) 떠오르는 별이 된 사문(師門)과는 달리 오늘날의 화산을 만들어 준 당사자인 선검학사 유원영의 모습은 화산파 내에서도 신비로이 사라진 채 점차 세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져만 갔다.
一章. 과거(科擧)라는 것?
녹음(綠陰)이 진 숲을 지나 벼랑 위로 올라선 여인의 발아래론 한적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밭 전(田) 자로 길게 그려진 논두렁 위론 때마침 점심시간에 맞춰 참을 들고 나온 아낙네와 이내 그 아낙네의 바구니를 받아 주는 남편의 사랑스런 미소가 벼랑 위에 선 여인의 마음마저 절로 흐뭇하게 만들었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그림 속 풍경마냥 논밭을 지나 그 뒤로 가옥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은 정겨움 속에 평온함이 담겨 있어 그 풍경을 바라보고 선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머니, 어머니, 저곳인가요?”
“어머니, 어머니, 저곳인가요?”
“…….”
그리움과 이제 곧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푼 여인의 시선이 마을을 향하는 사이, 여인의 두 손을 각기 하나씩 잡은 어린 남아와 여아는 자신들이 쌍둥이라는 것을 보여 주듯 똑같은 억양으로 물었다.
잔뜩 호기심이 깃든 아이들의 질문에 여인은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자상한 말을 흘려보냈다.
“그래 그렇단다. 바로 저곳이란다.”
“……!”
“……!”
온화한 눈길과 함께 전해진 어미의 대답에 순간 두 아이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그려졌다.
* * *
사내 나이 서른이 넘으면 이미 장가를 가도 대여섯 번은 갔어야 할 나이였다. 그러나 혼례는커녕 미래를 약조한 정인은 고사하고 연애다운 연애 한 번 한 적 없는 아들의 한심한 모습에 용 부인은 머리를 감싸 쥐어야만 했다.
“네게는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 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끼니 걱정 않고 살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어머니…….”
언제나 처음은 좋게 시작한다. 그러나 이어질 말이 결코 좋은 뜻일 리 없음을 잘 알고 있던 유원영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질 어미의 말을 막고자 했다.
하나 이미 주름살 가득한 용 부인의 입은 열려 그의 부름이 소용없음을 예고했다.
“우리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해 보거라. 그때는 딸린 식구가 좀 많았더냐? 네 동생만 해도 다섯. 거기에 너와 이 어미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님까지 총 여덟 식구가 좁은 방 안에 뭉쳐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아버지 일을 돕지 않고 꿋꿋이 글공부에 매진해 과거를 본답시고 집을 나갔지. 그때 이 어미는 속이 아주 꽉 막혔었단다. 네 아비는 소작농 집안에서 녹봉(祿俸)을 받는 관리 하나 난다고 없는 살림에 굶어 가며 책까지 사 주고 좋아했지만 이 어미는 아니었단 말이다. 저놈이 생각이 있는 놈인지 장남이란 놈이 동생들 돌볼 생각도 않고 그저 제 꿈 하나 이루겠단 어리석은 생각만 하는 욕심쟁이라 여겼지. 그 후 네가 낙방해 집에 돌아올 생각은 않고 무슨 엉뚱한 화산파인지 무시긴지 들어간다고 했을 때는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때의 심적 고통이란……. 후우 어찌 그것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때의 고통도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드는구나. 비록 네가 성공해서 돌아와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우리 집안의 대를 이을 장남인 네가 혼례는 고사하고 여자를 만나 볼 생각조차 없다니……. 대체 난 죽어서 네 아비의 얼굴을 어찌 본단 말이더냐? 흐흑 이 못난 것아!”
“어머니 어찌 제가 혼례를 올리지 않는다고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긴단 말씀이십니까? 이미 아우들이 장가와 시집을 가 조카들까지 보았습니다. 비록 제가 장가를 가지 않는다 해도 대가 끊길 염려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뭬야!”
이놈의 자식 놈은 장남이란 위치를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인가? 어찌 장남이 낳은 손자와 차남이 낳은 손자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장손이란 말이 그냥 생긴 게 아닌 것임을 정녕 이놈은 알지 못한단 말인가?
얼토당토않은 유원영의 논리에 마음을 돌리기 위해 거짓 눈물마저 훔쳐 내던 용 부인이 자신도 모르게 본성을 드러내며 표독스런 눈으로 자식 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미 어려서부터 수없이 대적했던 어미의 날카로운 시선을 태연히 받아 낸 유원영은 침착한 얼굴로 자신이 할 말만을 또박또박 내뱉었다.
“어머니, 소자는 정말이지 아직 혼례를 올릴 생각이 없습니다.”
“이, 이 이 고집불통 놈이! 당장 나가아아아!”
덜컹!
거칠게 닫히는 방문을 뒤로한 채 방 밖으로 나와 보니 마루 위론 아직 봄볕을 기다리는 찬바람이 전신을 휘감았다. 따듯한 화로(火爐)가 구비되어 있던 방 안의 온도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쌀쌀한 기온 탓에 벗어 두었던 신발을 신고 마당 중앙으로 걸어 나온 유원영의 입에선 긴 한숨과 더불어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후우! 고집불통이라…….”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한 번 정한 것은 벼락이 떨어진다 해도 바꾸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장 부자 댁 아들놈이 던진 글자도 모르는 무지렁이란 비웃음에 발끈해 집안 살림의 어려움을 뻔히 알면서도 글을 배우리라 마음먹고 그 결심을 단 한 번도 꺾지 않았다.
또 장 부자 댁 아들놈이 모난 글재주로 과거를 볼 것이라 했을 때도, 그에게 지지 않기 위해 자신 역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란 놀림 속에서도 과거를 보리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부친께선 언제나 웃으며 응원해 주었다. 그러나 모친만큼은 험악한 눈초리로 당장 가당치도 않은 짓거리를 때려치우라 꾸짖었다. 모친의 꾸지람은 지금 와 생각하면 정말 옳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과거(科擧)라는 것?
그건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과거를 보기 위해선 우선 삼 년에 한 번씩 지방에서 치러지는 향시를 먼저 통과해야 하는데 그 향시를 보기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해선 과시(科試)를 치러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설사 과시를 거쳐 향시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또다시 도(都)에서 행해지는 회시(會試)의 자격시험인 거인복시(擧人覆試)를 치러야만 한다. 거인복시를 통과하여 회시에 합격하면 다시 자격시험인 회시복시(會試覆試)를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황제가 직접 행하는 전시에 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험난한 과정을 유원영은 단 한 번의 낙방도 없이 통과했다. 최연소 회시복시 통과자란 동기들의 부러움을 안고 고향 땅을 떠나 전시(殿試)를 보기 위해 황궁이 있는 북경(北京)을 향할 때만 해도 그에겐 하늘이 내려준 천재 또는 기재란 단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이들이 단지 보이는 결과와 자신의 나이만을 놓고 붙인 별칭일 뿐이었다.
그들은 모른다. 하나의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는지.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단지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치장할 뿐이었다.
‘그때는 좋았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북경에 도착해 과거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좋았다. 고집스레 노력에 노력을 기울여 얻은 결과에 만족해하며 이제야말로 정말 과거에 붙어 자신을 믿어 준 아비의 마음에 보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전에 없는 흥분마저 맛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결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결국 어머님의 말씀이 옳았다.’
가당치도 않은 짓.
배움의 길보다는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하루 한 끼 식사부터 걱정해야 된다는 모친의 꾸지람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모친의 말대로 유원영 자신은 그동안 가당치도 않은 꿈을 이루기 위해 오직 외길만을 걸어왔던 것이다.
단 하나의 길만을…….
* * *
성 벽면에 붙은 이번 전시의 합격자를 보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기쁨과 절망 속에서 하나둘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두가 떠난 자리엔 오직 한 사내만이 남아 아직도 눈앞의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방서(榜書)를 들고 나왔던 관리를 노려보았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제가 낙방(落榜)이란 말씀이십니까?”
세 가닥 쥐 수염을 기른 중년의 관리는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았을 남루한 의복의 유생이 겁 없이 자신을 째려보자 기가 막혔던지 헛웃음에 이어 호된 호통을 내질렀다.
“어허, 이놈이 미쳤나? 어째서라니? 그야 당연히 네놈이 과제로 낸 답이 모자라 떨어진 것이 아니냐?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진 않고 감히 생떼를 쓰려 하다니? 이놈! 경을 치기 전에 당장 꺼지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젊은 유생은 그의 위엄 어린 협박에도 불구하고 도통 물러날 기세 없이 오히려 한 발짝 더 다가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관리를 직시하며 힘이 깃든 말을 내뱉었다.
“부족하다 하셨습니까? 소생이 여기기엔 제 답안은 이번 과제인 위 촉 오 세 나라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에 대한 제 해석과 새로운 방안 그리고 건문제(建文帝)께서 행하신 제왕억제정책(帝王抑制政策)에 반하여 현 황제 폐하께서 정난(靖難)의 사(師)를 일으키셔야만 했던 정당성과 한 번의 내전으로 고통에 지친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새로이 실시해야 될 정책에 대한 의견을 답안지에 충분히 기재한 걸로 아옵니다.”
“뭐, 뭐라?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대체 네놈의 이름이 무어냐?”
관리는 기막힘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호통에도 불구하고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반항적인 젊은 유생의 말에 화가 난 관리가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물었다.
유생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유. 원. 영이라 합니다.”
“……?”
유원영이란 세 글자를 들은 관리의 눈동자가 급격한 흔들림을 보였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유원영은 기이함을 느끼고는 넌지시 말을 걸어 보았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흐흠. 아 아닐세. 허허 자네가 멀 원(遠) 자에 헤엄칠 영(泳) 멀리 헤엄치는 그 유원영이란 말이지? 잠깐 나 좀 보세나.”
“…….”
남의 이름을 갖고 이건 또 무슨 말장난인가?
멀리 헤엄치는 유원영이라니?
문관쯤 되는 이가 ‘먼 거리를 나아간다’. 즉 세상을 넓게 보고 드넓은 사람이 되라는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 그대로를 풀어 늘어놓는 관리의 말에 발끈한 유원영이 그에게 무어라 한마디를 내뱉으려 했다.
하나 어느새 유원영의 팔을 잡아끈 관리는 성벽을 지키는 군졸들의 귀를 피해 성문 옆으로 이동했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왜 저를…….”
“쉬, 쉿! 제발 진정 좀 하게나. 내 자네의 학문이 너무나 안타까워 이리 이야기해 주려는 것이니.”
“……?”
도체 무슨 소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고 듣는 이들의 눈과 귀가 무서워 이리 조심스런 언행을 유도하는 관리의 행동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던 유원영이 그를 빤히 쳐다 보았다.
관리는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유원영의 귀에 대고 뭔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갔을까?
귓속말로 전해지는 관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유원영이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초리는 지금 그의 마음속에 깃든 분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능히 짐작케 해 주었다.
그를 생각해 이야길 전해 주던 관리 역시 유원영의 변화를 눈치채고는 당황해하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물러나는 관리의 멱살을 한순간 움켜쥔 유원영의 입에선 이내 거센 말이 터져 나왔다.
“뭡니까? 그러니까 겨우 그것 때문이었단 말입니까? 제가 이번 과거에서 떨어진 이유가 고작 그런 것 때문이란 말입니까?”
“커컥! 이, 이놈이! 기껏 생각해 이유를 말해 줬더니 날 죽이려 드는구나! 이놈아, 네놈은 이미 떨어진 이번 과거에 다시 붙을 수 있는 방법마저 알려준 은인인 나를 죽일 셈이냐?”
“대체 뭐가 은인이란 말인가? 결국 당신도 날 떨어뜨린 더러운 놈들과 똑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
“이, 이, 미친놈이! 뭘 가만히 보고 서 있는 게야! 어서 이 미친놈을 저 멀리 쫓아 버리지 않고!”
갑작스런 멱살잡이에 놀라 한달음에 달려온 군졸들은 곧 고급 관리직에 있었던 사내의 명에 황급히 유원영을 잡아끌었다.
일생 서책에만 파묻혀 살았던 유원영은 억센 군졸들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그저 마을 개천(開川) 쪽으로 끌고 가는 군졸들 사이에서 그저 소리쳐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억울함이 담긴 그의 고성은 공허한 하늘 위를 맴돌 뿐 이미 유원영이란 존재로부터 얻을 게 없다 판단한 관리의 입에선 험한 욕설만이 터져 나왔다.
“재수가 없으려니, 카악! 퉤! 이놈들아, 그 녀석이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아주 혼쭐을 내주어라! 만약 혼이 나고도 또다시 와 소란을 피운다면 소란죄로 아예 평생 옥에서 썩게끔 만들어라!”
“예, 대인!”
한차례 창피를 당한 관리의 명에 유원영을 끌고 가는 수하들의 뒤를 따르려던 군관이 허리 숙여 답을 전한다. 그 답과 함께 군관 역시 저 멀리 사라지니 관리는 망가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 헛기침과 더불어 황궁 안으로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 * *
과거란 무엇일까?
투두둑!
지붕 처마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벌컥벌컥 독한 화주를 들이키는 유원영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깊은 밤. 굵은 비를 피해 모두가 건물 안으로 사라진 시각.
주루에 가 술을 마실 돈마저 없었던 유원영은 마지막 남은 동전으로 반병짜리 화주를 산 채 이리 길거리에 나와 술을 마시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과거란……. 돈인가? 결국 높은 관리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은자를 얻기 위한 방도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돈이다.
돈이었다.
자신이 과거에서 떨어진 이유는 결코 제출한 답안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늘 낮 그 관리가 말했듯 자신의 답안은 모두가 놀랄 만큼 훌륭한 명답이었다.
그러나 과제에 대한 답을 적기 위한 학식만으론 부족하다. 과거에 붙기 위해선 과거를 보기 전에 행해졌던 예비 소집에서 한 관리가 지나가는 말로 던졌던, 바로 어르신들의 노고를 덜어 드리기 위한 선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과거를 담당하는 어르신들의 노고를 덜어 드리기 위한 선물.
그 선물을 유원영 자신은 훌륭한 답안이라 생각했다.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갈 젊은 유생들의 훌륭한 답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들이 원하는 선물은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유생들의 학식이 아닌 말 그대로 물질적인 선물을 원했던 것이다. 또한 그 선물을 준비 못한 자신은 답안과는 상관없이 매몰차게 쫓겨나야만 했다.
오늘 낮.
그 관리가 뒷구멍으로 관직에 앉혀 준다며 요구했던 돈을 줄 수 없었기에 이리 쫓겨 나와 빗속에서 술을 마셔야만 했던 것이다.
‘후훗! 내게 돈이 있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군졸들의 손에 잡혀 후미진 곳으로 끌려간 후 복날 개 패듯 처맞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리 한쪽 눈에 멍이 들고 입술은 터진 채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 덕분에 삭신이 쑤시는 고통마저 크게 느껴지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그 고통과 울분을 마지막 남은 동전으로 산 화주로 달래는 일 또한 없었으리라.
‘아니, 그전에…….’
과거에 떡하니 붙어 궁에서 내준 말을 타고 그 말 등에 비단을 실은 채 자신을 믿고 빚까지 내 가며 이번 과거를 볼 여비를 마련해 준 아비가 기다리고 있을 고향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 했으리라.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이었다. 모든 게……. 후훗! 어머니 말씀대로 먹고살 일을 먼저 걱정했어야 했거늘. 이놈의 고집이 결국 내 인생을 망치는구나.’
처음 학문에 발을 디디고 오직 그 길만을 고집해왔던 자신이 이리도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글 읽는 것을 빼고는 달리 할 줄 아는 재주가 아무것도 없었던 유원영으로선 단 한 가지 재주마저 재물 앞에 쓰레기처럼 버려져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나도 원통하고 스스로가 한심해 소리쳐 울어 보았다.
한껏.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토해 내기 위해 한껏 소리치는 유원영의 두 눈에선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서(序)
― 오악검중(五岳劍中) 화산선검원(華山仙劍元)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오악(五岳)이란 다섯 개의 산.
즉 중원 명소로 자리한 대표적인 명산(名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동쪽의 동악(東岳)인 태산(泰山).
서쪽의 서악(西岳)인 화산(華山).
남쪽의 남악(南岳)인 형산(衡山).
북쪽의 북악(北岳)인 항산(恒山).
중부의 중악(中岳)인 숭산(嵩山)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오악일 뿐.
강호(江湖)에서 오악이라 하면 중원 무림에 터를 잡은 검파인 오악검파(五岳劍派)를 일컫는 말이었다. 또한 오악검중(五岳劍中)이라 하면 오악에 각기 자리 잡은 태산파(泰山派) 화산파 형산파 항산파 숭산파의 검을 말함이요 화산선검원(華山仙劍元)이란 뒷말은 다섯 문파 중 화산파에 살고 있는 신선(神仙)의 검이 가장 으뜸이란 뜻으로서 은연중 화산파가 오악검파의 최고봉에 서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처음 오악검파란 말이 생기게 된 것은 40년 전 대문파의 집합체인 구파일방의 압박이 극심할 때였다. 당시 중소 방파였던 오악검파는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서로 연합해야만 했고 그중 화산파만이 유일하게 당시 구파 중 하나였던 해남검파(海南劍派)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만큼 화산파의 검이 오악검파 중 가장 강하며 또한 그 검으로 나날이 번창해 현재는 구파일방의 하나로서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세를 넓힌 상태였다.
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구파일방이란 거대한 무림 세력이 행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슷한 위치에 있던 네 문파와 연합해야만 했던 화산파(華山派).
그런 화산파가 오늘날 독자적인 힘으로 구파일방에 속할 수 있게 된 건 오로지 한 사내 때문이었다.
― 선검학사(仙劍學士) 유원영.
화산선검원이란 말 가운데 선검의 주인공인 유원영은 본시 낙방 문사 출신으로 늦은 나이에 무(武)에 뜻을 두고 화산파에 입문했다. 입문 후에도 화산파의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책과 검을 벗 삼아 살아가던 그였기에 눈여겨보던 이도 없었다.
그런 그가 처음 자신의 검을 펼쳤을 때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요 그와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들 역시 놀라움을 표해야만 했다.
선검(仙劍).
인간이 펼칠 수 없는 검의 경지를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유원영이 펼쳐 낸 것이다. 당시 적지 않은 나이를 가진 유원영이었고 그가 늦은 나이에 무공에 입문한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보여 준 검의 경지는 결코 이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이들의 상식을 깨고 한계를 벗어난 검을 구사했던 유원영으로 인해 중소 방파에 불과했던 화산파란 이름을 구파에 입성시키는 최상의 결과를 낳았다.
그의 이름이 드높아지면 질수록 유원영이란 존재를 길러 낸 화산파의 무공을 배우고자 수많은 이들이 화산으로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로써 지난날과는 달리 강대한 힘을 축적할 수 있었던 화산파는 중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해남도의 해남검파를 구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꿰찰 역량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는 오악검파 속의 화산이라기보다 구파일방 중 하나인 화산으로서 세인들의 뇌리에 각인된 화산파. 그러나 욱일승천(旭日昇天) 떠오르는 별이 된 사문(師門)과는 달리 오늘날의 화산을 만들어 준 당사자인 선검학사 유원영의 모습은 화산파 내에서도 신비로이 사라진 채 점차 세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져만 갔다.
一章. 과거(科擧)라는 것?
녹음(綠陰)이 진 숲을 지나 벼랑 위로 올라선 여인의 발아래론 한적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밭 전(田) 자로 길게 그려진 논두렁 위론 때마침 점심시간에 맞춰 참을 들고 나온 아낙네와 이내 그 아낙네의 바구니를 받아 주는 남편의 사랑스런 미소가 벼랑 위에 선 여인의 마음마저 절로 흐뭇하게 만들었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그림 속 풍경마냥 논밭을 지나 그 뒤로 가옥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은 정겨움 속에 평온함이 담겨 있어 그 풍경을 바라보고 선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머니, 어머니, 저곳인가요?”
“어머니, 어머니, 저곳인가요?”
“…….”
그리움과 이제 곧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푼 여인의 시선이 마을을 향하는 사이, 여인의 두 손을 각기 하나씩 잡은 어린 남아와 여아는 자신들이 쌍둥이라는 것을 보여 주듯 똑같은 억양으로 물었다.
잔뜩 호기심이 깃든 아이들의 질문에 여인은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자상한 말을 흘려보냈다.
“그래 그렇단다. 바로 저곳이란다.”
“……!”
“……!”
온화한 눈길과 함께 전해진 어미의 대답에 순간 두 아이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그려졌다.
* * *
사내 나이 서른이 넘으면 이미 장가를 가도 대여섯 번은 갔어야 할 나이였다. 그러나 혼례는커녕 미래를 약조한 정인은 고사하고 연애다운 연애 한 번 한 적 없는 아들의 한심한 모습에 용 부인은 머리를 감싸 쥐어야만 했다.
“네게는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 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끼니 걱정 않고 살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어머니…….”
언제나 처음은 좋게 시작한다. 그러나 이어질 말이 결코 좋은 뜻일 리 없음을 잘 알고 있던 유원영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질 어미의 말을 막고자 했다.
하나 이미 주름살 가득한 용 부인의 입은 열려 그의 부름이 소용없음을 예고했다.
“우리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해 보거라. 그때는 딸린 식구가 좀 많았더냐? 네 동생만 해도 다섯. 거기에 너와 이 어미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님까지 총 여덟 식구가 좁은 방 안에 뭉쳐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아버지 일을 돕지 않고 꿋꿋이 글공부에 매진해 과거를 본답시고 집을 나갔지. 그때 이 어미는 속이 아주 꽉 막혔었단다. 네 아비는 소작농 집안에서 녹봉(祿俸)을 받는 관리 하나 난다고 없는 살림에 굶어 가며 책까지 사 주고 좋아했지만 이 어미는 아니었단 말이다. 저놈이 생각이 있는 놈인지 장남이란 놈이 동생들 돌볼 생각도 않고 그저 제 꿈 하나 이루겠단 어리석은 생각만 하는 욕심쟁이라 여겼지. 그 후 네가 낙방해 집에 돌아올 생각은 않고 무슨 엉뚱한 화산파인지 무시긴지 들어간다고 했을 때는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때의 심적 고통이란……. 후우 어찌 그것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때의 고통도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드는구나. 비록 네가 성공해서 돌아와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우리 집안의 대를 이을 장남인 네가 혼례는 고사하고 여자를 만나 볼 생각조차 없다니……. 대체 난 죽어서 네 아비의 얼굴을 어찌 본단 말이더냐? 흐흑 이 못난 것아!”
“어머니 어찌 제가 혼례를 올리지 않는다고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긴단 말씀이십니까? 이미 아우들이 장가와 시집을 가 조카들까지 보았습니다. 비록 제가 장가를 가지 않는다 해도 대가 끊길 염려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뭬야!”
이놈의 자식 놈은 장남이란 위치를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인가? 어찌 장남이 낳은 손자와 차남이 낳은 손자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장손이란 말이 그냥 생긴 게 아닌 것임을 정녕 이놈은 알지 못한단 말인가?
얼토당토않은 유원영의 논리에 마음을 돌리기 위해 거짓 눈물마저 훔쳐 내던 용 부인이 자신도 모르게 본성을 드러내며 표독스런 눈으로 자식 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미 어려서부터 수없이 대적했던 어미의 날카로운 시선을 태연히 받아 낸 유원영은 침착한 얼굴로 자신이 할 말만을 또박또박 내뱉었다.
“어머니, 소자는 정말이지 아직 혼례를 올릴 생각이 없습니다.”
“이, 이 이 고집불통 놈이! 당장 나가아아아!”
덜컹!
거칠게 닫히는 방문을 뒤로한 채 방 밖으로 나와 보니 마루 위론 아직 봄볕을 기다리는 찬바람이 전신을 휘감았다. 따듯한 화로(火爐)가 구비되어 있던 방 안의 온도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쌀쌀한 기온 탓에 벗어 두었던 신발을 신고 마당 중앙으로 걸어 나온 유원영의 입에선 긴 한숨과 더불어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후우! 고집불통이라…….”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한 번 정한 것은 벼락이 떨어진다 해도 바꾸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장 부자 댁 아들놈이 던진 글자도 모르는 무지렁이란 비웃음에 발끈해 집안 살림의 어려움을 뻔히 알면서도 글을 배우리라 마음먹고 그 결심을 단 한 번도 꺾지 않았다.
또 장 부자 댁 아들놈이 모난 글재주로 과거를 볼 것이라 했을 때도, 그에게 지지 않기 위해 자신 역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란 놀림 속에서도 과거를 보리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부친께선 언제나 웃으며 응원해 주었다. 그러나 모친만큼은 험악한 눈초리로 당장 가당치도 않은 짓거리를 때려치우라 꾸짖었다. 모친의 꾸지람은 지금 와 생각하면 정말 옳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과거(科擧)라는 것?
그건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과거를 보기 위해선 우선 삼 년에 한 번씩 지방에서 치러지는 향시를 먼저 통과해야 하는데 그 향시를 보기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해선 과시(科試)를 치러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설사 과시를 거쳐 향시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또다시 도(都)에서 행해지는 회시(會試)의 자격시험인 거인복시(擧人覆試)를 치러야만 한다. 거인복시를 통과하여 회시에 합격하면 다시 자격시험인 회시복시(會試覆試)를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황제가 직접 행하는 전시에 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험난한 과정을 유원영은 단 한 번의 낙방도 없이 통과했다. 최연소 회시복시 통과자란 동기들의 부러움을 안고 고향 땅을 떠나 전시(殿試)를 보기 위해 황궁이 있는 북경(北京)을 향할 때만 해도 그에겐 하늘이 내려준 천재 또는 기재란 단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이들이 단지 보이는 결과와 자신의 나이만을 놓고 붙인 별칭일 뿐이었다.
그들은 모른다. 하나의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는지.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단지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치장할 뿐이었다.
‘그때는 좋았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북경에 도착해 과거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좋았다. 고집스레 노력에 노력을 기울여 얻은 결과에 만족해하며 이제야말로 정말 과거에 붙어 자신을 믿어 준 아비의 마음에 보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전에 없는 흥분마저 맛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결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결국 어머님의 말씀이 옳았다.’
가당치도 않은 짓.
배움의 길보다는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하루 한 끼 식사부터 걱정해야 된다는 모친의 꾸지람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모친의 말대로 유원영 자신은 그동안 가당치도 않은 꿈을 이루기 위해 오직 외길만을 걸어왔던 것이다.
단 하나의 길만을…….
* * *
성 벽면에 붙은 이번 전시의 합격자를 보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기쁨과 절망 속에서 하나둘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두가 떠난 자리엔 오직 한 사내만이 남아 아직도 눈앞의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방서(榜書)를 들고 나왔던 관리를 노려보았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제가 낙방(落榜)이란 말씀이십니까?”
세 가닥 쥐 수염을 기른 중년의 관리는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았을 남루한 의복의 유생이 겁 없이 자신을 째려보자 기가 막혔던지 헛웃음에 이어 호된 호통을 내질렀다.
“어허, 이놈이 미쳤나? 어째서라니? 그야 당연히 네놈이 과제로 낸 답이 모자라 떨어진 것이 아니냐?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진 않고 감히 생떼를 쓰려 하다니? 이놈! 경을 치기 전에 당장 꺼지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젊은 유생은 그의 위엄 어린 협박에도 불구하고 도통 물러날 기세 없이 오히려 한 발짝 더 다가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관리를 직시하며 힘이 깃든 말을 내뱉었다.
“부족하다 하셨습니까? 소생이 여기기엔 제 답안은 이번 과제인 위 촉 오 세 나라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에 대한 제 해석과 새로운 방안 그리고 건문제(建文帝)께서 행하신 제왕억제정책(帝王抑制政策)에 반하여 현 황제 폐하께서 정난(靖難)의 사(師)를 일으키셔야만 했던 정당성과 한 번의 내전으로 고통에 지친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새로이 실시해야 될 정책에 대한 의견을 답안지에 충분히 기재한 걸로 아옵니다.”
“뭐, 뭐라?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대체 네놈의 이름이 무어냐?”
관리는 기막힘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호통에도 불구하고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반항적인 젊은 유생의 말에 화가 난 관리가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물었다.
유생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유. 원. 영이라 합니다.”
“……?”
유원영이란 세 글자를 들은 관리의 눈동자가 급격한 흔들림을 보였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유원영은 기이함을 느끼고는 넌지시 말을 걸어 보았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흐흠. 아 아닐세. 허허 자네가 멀 원(遠) 자에 헤엄칠 영(泳) 멀리 헤엄치는 그 유원영이란 말이지? 잠깐 나 좀 보세나.”
“…….”
남의 이름을 갖고 이건 또 무슨 말장난인가?
멀리 헤엄치는 유원영이라니?
문관쯤 되는 이가 ‘먼 거리를 나아간다’. 즉 세상을 넓게 보고 드넓은 사람이 되라는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 그대로를 풀어 늘어놓는 관리의 말에 발끈한 유원영이 그에게 무어라 한마디를 내뱉으려 했다.
하나 어느새 유원영의 팔을 잡아끈 관리는 성벽을 지키는 군졸들의 귀를 피해 성문 옆으로 이동했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왜 저를…….”
“쉬, 쉿! 제발 진정 좀 하게나. 내 자네의 학문이 너무나 안타까워 이리 이야기해 주려는 것이니.”
“……?”
도체 무슨 소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고 듣는 이들의 눈과 귀가 무서워 이리 조심스런 언행을 유도하는 관리의 행동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던 유원영이 그를 빤히 쳐다 보았다.
관리는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유원영의 귀에 대고 뭔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갔을까?
귓속말로 전해지는 관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유원영이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초리는 지금 그의 마음속에 깃든 분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능히 짐작케 해 주었다.
그를 생각해 이야길 전해 주던 관리 역시 유원영의 변화를 눈치채고는 당황해하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물러나는 관리의 멱살을 한순간 움켜쥔 유원영의 입에선 이내 거센 말이 터져 나왔다.
“뭡니까? 그러니까 겨우 그것 때문이었단 말입니까? 제가 이번 과거에서 떨어진 이유가 고작 그런 것 때문이란 말입니까?”
“커컥! 이, 이놈이! 기껏 생각해 이유를 말해 줬더니 날 죽이려 드는구나! 이놈아, 네놈은 이미 떨어진 이번 과거에 다시 붙을 수 있는 방법마저 알려준 은인인 나를 죽일 셈이냐?”
“대체 뭐가 은인이란 말인가? 결국 당신도 날 떨어뜨린 더러운 놈들과 똑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
“이, 이, 미친놈이! 뭘 가만히 보고 서 있는 게야! 어서 이 미친놈을 저 멀리 쫓아 버리지 않고!”
갑작스런 멱살잡이에 놀라 한달음에 달려온 군졸들은 곧 고급 관리직에 있었던 사내의 명에 황급히 유원영을 잡아끌었다.
일생 서책에만 파묻혀 살았던 유원영은 억센 군졸들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그저 마을 개천(開川) 쪽으로 끌고 가는 군졸들 사이에서 그저 소리쳐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억울함이 담긴 그의 고성은 공허한 하늘 위를 맴돌 뿐 이미 유원영이란 존재로부터 얻을 게 없다 판단한 관리의 입에선 험한 욕설만이 터져 나왔다.
“재수가 없으려니, 카악! 퉤! 이놈들아, 그 녀석이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아주 혼쭐을 내주어라! 만약 혼이 나고도 또다시 와 소란을 피운다면 소란죄로 아예 평생 옥에서 썩게끔 만들어라!”
“예, 대인!”
한차례 창피를 당한 관리의 명에 유원영을 끌고 가는 수하들의 뒤를 따르려던 군관이 허리 숙여 답을 전한다. 그 답과 함께 군관 역시 저 멀리 사라지니 관리는 망가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 헛기침과 더불어 황궁 안으로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 * *
과거란 무엇일까?
투두둑!
지붕 처마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벌컥벌컥 독한 화주를 들이키는 유원영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깊은 밤. 굵은 비를 피해 모두가 건물 안으로 사라진 시각.
주루에 가 술을 마실 돈마저 없었던 유원영은 마지막 남은 동전으로 반병짜리 화주를 산 채 이리 길거리에 나와 술을 마시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과거란……. 돈인가? 결국 높은 관리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은자를 얻기 위한 방도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돈이다.
돈이었다.
자신이 과거에서 떨어진 이유는 결코 제출한 답안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늘 낮 그 관리가 말했듯 자신의 답안은 모두가 놀랄 만큼 훌륭한 명답이었다.
그러나 과제에 대한 답을 적기 위한 학식만으론 부족하다. 과거에 붙기 위해선 과거를 보기 전에 행해졌던 예비 소집에서 한 관리가 지나가는 말로 던졌던, 바로 어르신들의 노고를 덜어 드리기 위한 선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과거를 담당하는 어르신들의 노고를 덜어 드리기 위한 선물.
그 선물을 유원영 자신은 훌륭한 답안이라 생각했다.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갈 젊은 유생들의 훌륭한 답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들이 원하는 선물은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유생들의 학식이 아닌 말 그대로 물질적인 선물을 원했던 것이다. 또한 그 선물을 준비 못한 자신은 답안과는 상관없이 매몰차게 쫓겨나야만 했다.
오늘 낮.
그 관리가 뒷구멍으로 관직에 앉혀 준다며 요구했던 돈을 줄 수 없었기에 이리 쫓겨 나와 빗속에서 술을 마셔야만 했던 것이다.
‘후훗! 내게 돈이 있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군졸들의 손에 잡혀 후미진 곳으로 끌려간 후 복날 개 패듯 처맞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리 한쪽 눈에 멍이 들고 입술은 터진 채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 덕분에 삭신이 쑤시는 고통마저 크게 느껴지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그 고통과 울분을 마지막 남은 동전으로 산 화주로 달래는 일 또한 없었으리라.
‘아니, 그전에…….’
과거에 떡하니 붙어 궁에서 내준 말을 타고 그 말 등에 비단을 실은 채 자신을 믿고 빚까지 내 가며 이번 과거를 볼 여비를 마련해 준 아비가 기다리고 있을 고향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 했으리라.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이었다. 모든 게……. 후훗! 어머니 말씀대로 먹고살 일을 먼저 걱정했어야 했거늘. 이놈의 고집이 결국 내 인생을 망치는구나.’
처음 학문에 발을 디디고 오직 그 길만을 고집해왔던 자신이 이리도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글 읽는 것을 빼고는 달리 할 줄 아는 재주가 아무것도 없었던 유원영으로선 단 한 가지 재주마저 재물 앞에 쓰레기처럼 버려져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나도 원통하고 스스로가 한심해 소리쳐 울어 보았다.
한껏.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토해 내기 위해 한껏 소리치는 유원영의 두 눈에선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