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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우르릉 쾅!
천둥소리와 더불어 한순간 어둠이 물러나며 세상이 빛을 찾았다.
그러나 그 빛은 너무도 짧아 순식간에 사라지며 어둠이 다시금 몰려들었고, 온몸을 적셔 주는 거친 빗줄기가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빗속을 철퍽철퍽 울리며 비틀거리며 위태롭게 걷던 유원영은 실성한 사람처럼 헤죽헤죽 웃으며 끊임없이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그러나 이미 술은 동이 난 지 오래요, 본시 술이 약해 취기가 거나하게 올라 있던 유원영은 술병이 비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병 속에 담긴 빗물을 술이라 착각해 마셔 댈 뿐이었다.
입가에는 스스로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을 향한 것인지 모를 비웃음을 가득 담은 채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기분 좋게 취한 취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모든 게 희미해 보이는 어두운 세상 속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콧노래를 듣고 한 소녀가 다가왔다. 어린 소녀는 인적 없는 대로변에 오랫동안 서 있었는지 안색이 창백하고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추위에 떨고 있는 몸을 이끌어 사내 앞을 가로막은 소녀는 어리둥절해하는 유원영을 동그란 눈망울 가득 강한 빛을 담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절 사 주세요.”
“뭐?”
“절 사 달라고요! 아저씨 돈 있잖아요. 술 마실 돈이 있으니 절 살 돈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 절 사 달란 말이에요!”
“허…….”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자신을 사라 윽박지르는 어린 소녀의 당돌한 행동에 올라 있던 취기마저 사라진 유원영이 당황해 물었다.
“요 꼬맹이가 못하는 말이 없구나. 넌 지금 네가 하는 말의 뜻을 알고나 하는 것이냐?”
“저 꼬맹이 아니에요. 이래 보여도 열 살, 아니 열두 살은 된단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하는 말은 당연히 제가 알아요. 화루의 언니들이 몸을 팔아 돈을 받는 걸 알고 하는 말이니 걱정 말고 절 사 주기나 하세요.”
“허허…….”
소녀는 갸름한 얼굴형에 보름달처럼 밝고 큰 눈망울을 가진 게 장차 대단한 미녀 소리를 듣겠으나 지금은 열 살은 고사하고 이제 겨우 일고여덟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맹랑해도 너무 어이없을 정도인 소녀의 말에 유원영은 짐짓 굳은 얼굴로 호통을 내질렀다.
“떽! 어린 것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집이 어디냐? 네 부모는 지금 네가 이리 나와 터무니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걸 알고나 있는 것이냐?”
“왜 터무니없나요? 제가 돈을 거저 달라 했나요? 아니잖아요. 제 몸을 팔겠다고 말했잖아요!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몸을 팔 테니 돈을 달라는데 그게 왜 터무니없나요?”
“허, 이런 맹랑한 꼬마를 보았나. 대체 너같이 어린아이가 몸까지 팔아 돈을 벌 이유가 있단 말이냐? 그 돈을 받아 대체 어디다 쓰겠다고 이리 황당한 짓을 한단 말이냐?”
“아프단 말이에요……. 엄마가 많이 아파요! 엄마가 아픈데 의원은 돈이 없다고 진맥조차 해 주지 않는다구요! 돈이 있어야만…… 돈이 있어야만 엄마를 의원한테 보일 수 있다구요! 돈이 있어야 엄마를 살릴 수 있단 말이에요!”
쿵!
가슴을 울리는 소리가 유원영의 귓전을 맴도는 듯했다.
흥분된 언쟁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비친 소녀의 눈물 가득한 모습이 마치 유원영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아이도 돈 때문인가? 돈이 없기에 제 모친조차 살릴 수 없단 말인가? 아니다. 어찌 세상이 돈만 가지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돈이 없다 해도 사람 사는 곳엔 인정이라는 것이 있거늘…….’
“안내해라.”
“네?”
“네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안내하란 말이다.”
“…….”
똑똑한 아이다.
자신의 말뜻을 금세 깨달은 소녀의 얼굴엔 화색이 돌며 황급히 몸을 돌려 빗속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유원영의 눈은 마음속에 깃든 한 가지 결심을 보여 주듯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세상이 돈으로만 해결되는 곳이라면 돈 없는 내가 두 번 다시 과거를 보는 일은 없으리라.’

* * *

허름한 곳이었다.
수도 북경의 번화함 속에 숨겨진 이면을 보여 주듯 형성된 촌락은 빈민촌(貧民村)이란 이름 그대로 골목 가득 더럽고 허름한 천막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 한곳에 자신을 주지약(朱指約)이라 밝힌 소녀의 집이 존재했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간 집 안은 바깥의 더러움과는 전혀 달랐다. 나무판자를 엮어 만든 바닥 위로 깔끔한 모양새의 탁자와 옷장, 부엌살림들이 보였고, 주인의 청결한 성정을 보여 주듯 먼지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어서요.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이리 오셔서 저희 어머니를 의원께 데려가 주세요.”
“…….”
간절함이 깃든 주지약의 손에 이끌린 유원영은 곧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낡은 침상 위에 누운 한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후우! 후…….”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잠이 든 듯 두 눈을 감은 채 불규칙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여인을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소녀 곁으로 다가간 유원영이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얼굴이 마치 기름불이라도 붙은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굵은 땀방울이 연신 흘러내렸으며, 온몸을 쉴 새 없이 떠는 모양새가 금방 숨이 넘어가도 이상할 게 없으리만치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런! 이래선 도저히 안 되겠구나.”
유원영은 빗속에 여인을 업고 의원을 찾아가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심코 흘러나온 그의 말을 오해한 주지약은 성난 눈으로 유원영을 노려보았다.
“안 된다니, 이제 와서 안 된다는 말이 어디 있어요?”
“그런 것이 아니다. 네 어머니의 상태를 보아하니 이대로 의원께 데려갔다간 더 큰일을 치를 듯싶어 그런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나를 의원께 안내하도록 해라.”
“…….”
자신이 오해했음을 안 주지약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재빠른 몸놀림으로 천막을 빠져나갔다. 빗속으로 뛰어든 소녀의 뒤를 유원영 역시 쫓았다.
휑한 기운만이 감돌게 된 침상 위로는 여인만이 남아 그 누구도 듣지 않을 말을 흘려보냈다.
“약아……. 지약아……. 궁(宮)…마령(魔令)을…….”
혼미한 정신만큼이나 혼란스런 여인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너무 작은 소리라 겨우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가 조용히 어둠에 묻혀 사라졌다.

* * *

탕탕탕!
“이보시오, 이보시오, 문 좀 열어 주시오! 급한 환자가 있으니 어서 나와 문을 열란 말이오!”
“의원님, 의원님! 돈 줄 분을 데려왔어요. 돈 줄 분을 데려왔으니 어서 나와서 문을 열어 주세요, 의원님!”
늦은 밤.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빗속을 뚫고 대문을 두드리는 청년과 소녀의 말속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 간절함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지 장 의원이 하인이 받쳐 주는 대나무 우산을 쓴 채 나와 대문을 열었다.
끼이익!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육중한 대문이 열리며 장 의원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단잠을 깨운 이들을 짜증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한밤중에 이리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응? 넌 저녁때 왔던 그 아이가 아니냐? 오호라, 이제 보니 네가 네 모친의 약값을 치러 줄 사람을 데려왔나 보구나.”
“맞아요! 여기 이분이 약값을 주실 거예요. 그러니 의원님, 어서 저희 어머니께 가셔서 진맥부터 해 주세요.”
“흐음…….”
장 의원이 주지약의 손짓에 슬쩍 유원영을 훑어보지만 영 못 미더웠다.
비 오는 날에 돌아다닌 덕에 쭈글쭈글해진 의복과 정돈되지 못한 채 삐죽빼죽 흘러내린 머리칼, 얻어맞아 부어터진 얼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믿음을 주지 못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나이까지 어려서 많이 쳐준다 해도 기껏 열여덟에서 열아홉 사이로 볼 수밖에 없었다. 장 의원은 의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째려보았다.
“이보게, 젊은 양반. 이 아이의 말대로 자네 정말 돈이 있긴 한 겐가?”
지금 장 의원의 질문은 그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는 담담히 답을 줄 수 있었다.
“없습니다. 제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돈은 화주 반병을 사는 데 써서 지금은 고향에 돌아갈 여비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허, 허허! 허허허허!”
“……!”
너무도 뻔뻔하게 흘러나온 그의 말에 장 의원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주지약마저 놀라 유원영을 쳐다보았다.
“돈이 없다니요? 있다고 했잖아요! 돈이 있다고 했잖아요! 정말 돈 없어요? 정말 돈 없냐구요!”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니…….
철석같이 그를 믿고 장 의원을 찾아왔던 주지약의 표정이 일순 멍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익!”
믿음이 한순간 배신으로 바뀌자 주지약이 울분을 참지 못한 채 밤송이 같은 주먹과 조막만 한 발을 이용해 유원영의 다리를 마구 때려 대기 시작했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나쁜 놈! 우리 엄마한테 데려다 달라고 했잖아? 의원께 데려가기 위해 엄마한테 데려다 달라 분명히 말했잖아! 왜 데려다 달라 했어? 돈도 없으면서 대체 왜에에!”
“…….”
울며불며 쉼 없이 소리치는 작은 소녀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유원영은 애처로운 소녀의 몸짓에도 불구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장 의원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매정하다면 매정하다 할 수 있는 그의 반응에 주지약은 이제 소리칠 힘도 때릴 힘도 없는지 유원영의 다리에 매달린 채 흐느꼈다.
“제발 아니라고 해 줘요. 제발…….”
“미안하구나.”
“……?”
유원영이 처음으로 한마디 사과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입에서 흘러나온 사과와는 상관없이 유원영은 주지약이 아닌 여전히 자신을 비웃고 선 장 의원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차가운 돌바닥 위로 무릎 꿇은 사내의 눈빛이 사뭇 비장해 그 시선을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주지약의 눈동자 속으로 작은 반짝임이 일었다.
“아저……?”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발 이 아이의 모친을 살려 주십시오.”
“허허…….”
“지금의 제 부탁이 염치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소생이 알기로 의원의 길이란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 들었습니다. 지금 이 아이의 모친은 온몸에서 고열이 끓고 얼굴은 불덩이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의술을 모르는 소생이 보기에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가 바로 앞에 있거늘 돈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찌 위급한 환자를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의원의 길이 아닌 상인의 길인 줄 압니다.”
“의원님, 저도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제발 우리 엄마를 살려 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지 할 테니 제발 살려 주세요!”
“…….”
맑은 사내의 음성에 이어 주지약마저 차가운 돌바닥 위로 무릎을 꿇으며 애절한 말을 던졌다.
장 의원은 그동안 닫혀 있던 입을 힘겹게 떼었다.
“쯧쯧! 이보게 젊은이. 자네 방금 의원의 길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 했는가? 그럼 내 한번 물어봄세. 사람을 살리는 의원의 길에 들기 위해선 과연 얼마의 돈이 든다 생각하는가?”
“……?”
“자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큰돈이 든다네. 그 비싼 의학 서적들을 사들이기 위한 돈과 또 의술을 배우기 위해 내 스승에게 들인 비싼 수업료. 거기다 지금의 의방을 차리기 위해 구입한 약재 값하며, 이곳에서 일을 하는 일꾼들의 품삯에 이르기까지. 자네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돈이 든단 말일세. 그 많은 돈들을 난 뭐 하늘에서 뚝 떨어져 지급한 줄 아는가? 빚까지 내 가면서 평생을 공부하고 지금의 의방을 차렸단 말일세. 그런 나를 지금 자네가 의원의 길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 빗대어 내 잘못을 꾸짖으려 한다니……. 턱도 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게!”
유원영 같은 자를 그동안 많이 상대해 본 장 의원이었기에 먼저 그의 이해를 구한 뒤 마지막에 가선 매몰찬 축객령으로 말을 끝맺은 것이다.
그의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유원영은 오히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장 의원을 직시한 채 힘이 깃든 음성을 발했다.
“어찌 세상 모든 일이 돈에 얽매여 계산대로 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의원님께서 오늘날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는지 소생은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나 그 돈보다 중한 것이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인정(人情)이라 여기기에 소생은 지금 그 인정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르신 부디 이 아이를, 제 모친을 생각하는 이 아이를 봐서라도 한 번만 !”
“인정이라 했는가? 껄껄! 좋네! 자네 말대로 이 아이를 불쌍히 여겨 이 아이의 모친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셈 치세. 과연 그 뒷감당을 자네는 책임질 수 있는가? 이 아이의 모친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는 소문이 돈다면 필시 온갖 것들이 내 의방으로 몰려들 걸세. 몸이 아픔에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이가 어찌 이 아이 모친 하나뿐이겠는가? 아마 이곳 북경에만 못해도 수백은 될 걸세. 그들이 모두 내 의방을 찾아 지금의 자네처럼 인정에 호소하며 치료해 달라 울부짖는다면 난 어쩌란 말인가? 합당한 대가를 내고 치료받던 환자들마저 자신들을 억울히 여기며 공짜로 치료해 달라 할 것이 뻔하거늘. 만약 그리된다면 내 의방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이런 내 처지를 알면서도 자네는 과연 내게 공짜로 이 아이의 모친을 치료해 달라 뻔뻔스레 부탁할 수 있단 말인가?”
“…….”
할 수 없었다.
지금 장 의원의 말은 틀린 곳이 없어 유원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맞는 말이다. 분명 맞는 말이나 잘못되었다. 잘못되었으나 그것을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이 너무도 비통하고도 화가 나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았다.
‘결국 돈이 없으면 죽음을 앞에 두고도 진맥조차 받을 수 없는 세상이란 말인가? 결국…….’
유원영은 분함을 참지 못한 채 피가 베어 나오도록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체념한 표정이던 주지약이 불현듯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작은 체구를 일으킴과 동시에 주지약은 아직도 장 의원 앞에 무릎 꿇은 유원영의 어깨를 힘껏 잡아당겼다.
“뭐해요? 안 된다잖아요! 안 된다는데 왜 아직도 이 작자 앞에서 무릎 꿇고 있어요! 가요! 가잔 말이에요! 아저씬 자존심도 없어요? 자존심도 없는 바보냐구요? 왜 아무 상관없는 저 때문에 이런 자 앞에서 무릎 꿇고 난리예요! 그 잘난 인정 때문이라면 필요 없어요! 난 필요 없으니 빨리 일어나란 말이에요!”
“…….”
화를 내고 있다. 지금 자신의 마음처럼 의원의 말에 이 어린 소녀 역시 화가 나 이리 자신을 잡아끌며 소리친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결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의원을 향한 것임을 알고 있던 유원영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혹 잘못된 마음을 심어 줄까 두려워 주먹 한가득 들어차 있던 힘을 풀며 주지약을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아직은 아니다.”
“……!”
웃는 사내의 얼굴이 소녀의 두 눈 가득 파고든다.
쏟아지는 빗물의 차가움마저 잊게 해 줄 만큼 따듯하고도 부드러운 사내의 미소에 잠시 말을 잊은 주지약이었다.
침묵한 그녀를 뒤로 한 채, 유원영은 다시금 장 의원을 바라보았다.

“돈이 없어 치료할 수 없다 하셨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그 돈을 드리겠습니다.”
“설마 나중에 갚겠단 소리라면 필요 없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아이의 모친을 치료하는 데 들어가는 약값과 진료비를 제 몸으로 대신 갚겠다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돈이 얼마가 되었든 갑절로 계산해 이곳에서 일을 하겠습니다. 일 년이든 이 년이든, 아니 설사 십 년이 된다 해도 이곳에서 일을 해 갚겠습니다. 그리한다면 이 아이의 모친을 공짜로 치료해 주었단 소문도 돌지 않을 것이고 의원님 역시 갑절로 일하는 일꾼을 얻으니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 아저씨?”
그저 웃고만 있었다.
유원영은 지금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 알고 있음에도 그저 웃으며 장 의원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자네, 지금 그 말 진심인가?”
“…….”
말없이 그려진 사내의 미소가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진실된 그의 미소에 장 의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한차례 고개를 흔들었다.
“별 미친놈 다 보겠군……. 뭣들 하는 게야! 어서 내 진료통을 챙겨 오지 않고!”
작은 욕설로써 유원영을 판단하던 장 의원은 말 없는 그를 대신해 내쏘아진 서늘한 주지약의 시선에 황급히 고개 돌려 애꿎은 하인에게 호통쳤다.
그의 호통 소리에 대문을 열어 주었던 하인이 서둘러 안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마음의 짐을 덜은 유원영은 조금은 가벼운 심정이 되어 주지약을 향해 밝게 웃어 주었다.
“되었다. 이제 네 모친은 살 수 있게 되었다. 기쁘지 않느냐?”
“…….”
어째 뚱한 표정의 주지약이다.
예쁘장한 얼굴 가득 보기 흉하게 인상을 쓴 소녀의 모습에 유원영이 의아해 물었다.
주지약은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사내의 질문에 겨우 뚱하던 표정을 풀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바보…….”
“그래, 네 말대로 정말 난 바보란다.”
여전히 미소 띤 사내의 어깨를 작은 손을 이용해 감싸 쥐었다.
차가워진 그의 몸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 주려는 듯 양손을 이용해 유원영의 어깨를 감싸 쥔 주지약이 그곳에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흘러내린 머리칼과 함께 동그란 이마를 사내의 어깨에 갖다 댄 채, 주지약은 편안히 두 눈을 감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바보지만……. 고마워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