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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
좁은 천막 안에 들어선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어두운 분위기만큼이나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여인의 맥을 짚어 진찰하던 장 의원이 감았던 눈을 뜨며 앉은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떻습니까?”
장 의원을 향해 유원영이 물었다.
“네 모친은 언제부터 열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느냐?”
장 의원을 향해 유원영이 질문을 던졌다.
장 의원은 그의 질문을 무시한 채 초조하게 지켜보는 주지약을 바라보며 물었다.
굳은 그의 눈빛에서 불길함을 느낀 주지약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그가 원하는 답을 주었다.
“한 달 전부터였어요.”
“한 달? 설마 처음부터 이리 고열을 앓진 않았을 터. 열의 발병 주기가 있지 않았느냐? 이틀에 한 번, 혹은 사흘에 한 번씩 말이다.”
“맞아요! 의원님 말씀대로 열이 한 번 오르고 나면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은 괜찮아졌어요. 하지만 사흘째 다시 열이 오르고 또다시 이틀간은 열이 가라앉는 증상을 보이다 이번엔 어찌된 일인지 사흘이 지나도 열이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높아져만 갔어요.”
“음……. 혹 두통이 심하다 호소하지 않았느냐?”
“어제 저녁에 머리가 아프다 그러셨어요.”
“헛구역질도 하고?”
“네.”
“…….”
더 이상의 질문은 필요 없는 듯, 장 의원은 굳게 입을 다문 채 고개를 흔들었다.
명확한 확답을 주지 않은 채 침묵하는 장 의원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낀 유원영이 넌지시 말을 걸어 보았다.
“대체 무슨 병이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치료는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음……. 틀렸네.”
“……!”
“틀렸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긴 침묵 끝에 흘러나온 장 의원의 답에 누구보다도 놀란 주지약이 그의 다리에 매달리며 소리쳐 물었다.
저돌적인 주지약의 행동에 당황한 장 의원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자신이 진맥한 바를 늘어놓았다.
“지금 네 모친이 걸린 병은 학질(?疾)이다. 학질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삼일열(三日熱)이라 한다. 삼일열은 한 번 열이 발생하고 이틀을 잠복하다 다시 사흘째 열이 발생하는 증상을 보인다. 또 네 모친이 지독한 두통을 호소했다는 것은 몸속의 열이 대뇌에까지 침투했음이요, 헛구역질을 함은 열기를 견디지 못한 오장육부가 이미 팽창해 있어 설사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치유할 수 없음을 뜻한다. 만약 열이 발생한 초기였다면 탕제와 침을 써서 열을 내리고 치유해 볼 수 있겠으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엄마가……. 엄마가 괜찮다고 했어요. 단순한 고뿔일 뿐이라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저한텐 엄마밖에 없단 말이에요! 제발 우리 엄마를 살려 주세요, 의원님!”
“허허……. 네가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울며불며 매달려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유원영은 난색을 표하는 장 의원을 돕고자 주지약을 안아 달래려 하나 흥분된 소녀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오히려 더욱더 큰소리로 울며 매달리는 주지약의 행동에 두 사내 모두 당황해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여인의 음성이 소녀의 난동을 막았다.
“지약아……. 이리 오거라. 이리 와 이 엄마의 손을 잡아 다오.”
“엄마!”
깨어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여인이 두 눈을 떠 딸아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그렸다.
그녀의 미소에 눈물 흘리던 주지약이 환한 미소를 띠며 한달음에 달려가 모친이 내민 손을 꼭 움켜쥐었다.
“쯧쯧……. 잠깐 나가세나.”
“…….”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눈빛을 띤 여인의 모습이 결코 병이 호전된 것이 아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일어나는 회광반조(廻光返照)현상임을 안 장 의원은 멀뚱히 서 있던 유원영을 이끈 채 천막 밖으로 나섰다.

투두둑……. 쏴아아.
달빛마저 구름 속으로 숨은 세상에서는 여전히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빗물을 고스란히 맞고 선 유원영과 달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받쳐 준 대나무 우산 속으로 들어선 장 의원은 부쩍 말수가 적어진 유원영을 바라보며 작별을 고했다.
“길어야 한 시진일세. 내 보기에 그녀는 한 시진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 걸세. 더 이상 내가 이곳에 있는다 해도 할 일이 없으니 난 이만 가 보도록 하겠네.”
“……죄송한 말씀이나 그녀의 장을 치러 준 훗날부터 일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필요 없네. 내가 이곳에 와 한 일이라고는 단지 진맥을 하였을 뿐이네. 약재 한 번 침 한 번 놓지 않고 단순히 진맥 값을 받고자 자네에게 일을 시킨다면 영 꿈자리가 사나울 듯하니 자네가 내게 올 필요는 없네.”
“……감사드립니다.”
허리 숙여 인사를 전하나 그 말속에는 진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 힘이 빠진 유원영의 인사에 장 의원 역시 무언가를 느낀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자네 스스로를 탓하는 겐가? 하지만 내 보기에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그 아이를 위해 남이 할 수 없는 노력을 했으니 너무 자신을 탓하진 말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긴 자네가 살아온 인생을 내 알 길이 없으니 지금 자네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는 것 역시 당연하지.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게. 내가 자네보다 오래 산 인생 선배로서 충고하건데 자네처럼 산다면 결국 평생을 손해 보는 삶밖에는 살 수 없을 걸세.”
“충고 감사드립니다. 하나 전 결코 제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르신의 충고를 무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 삶의 방식대로 나아가며 결코 손해도 보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 길이 있었던가? 허허, 그런 길이 있다면 나 역시 한번 가고 싶군.”
“…….”
웃으며 몸을 돌린다.
몸을 돌린 채 하인의 안내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던 장 의원은 문뜩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며 아직 자신을 바라보고 선 유원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힘을 키우게. 남들은 돈 밑에 힘이 있다 하나 내 보기에 돈이야말로 힘 아래에 있네. 힘을 키운다면 돈 역시 자연스레 모일 것이며 힘과 부를 함께 가졌다면 자네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대로 살면서 또한 손해를 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걸세.”
“힘이라면 어떠한 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껄껄! 그야 나는 모르지. 조정에 출사해 권력을 갖든, 아니면 나처럼 의술을 배워 의원으로서의 힘을 갖든, 그거야 자네 선택하기 나름이 아닌가? 하나 지금 내가 말한 것들 모두 우습게도 돈이 먼저 필요하니 자네는 돈이 필요치 않은 순수한 자신의 노력과 땀으로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을 가게나. 물론 그런 길이 있다면 말일세.”
“…….”
장 의원의 충고는 어찌 들으면 조롱처럼 여겨졌다. 돈도 없으면서 인정에 이끌려 생판 처음 보는 이를 돕겠다고 나선 자신의 행동을 돌려 비웃는 듯한 장 의원의 충고였다.
하지만 유원영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진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새겨들으며 깊은 사색에 잠겨 들었다.
‘순수한 내 노력과 땀으로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

“아저씨.”
“……!”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장 의원이 떠난 뒤 홀로 남아 긴 사색에 잠겨 있던 유원영은 어느새 자신 곁으로 다가온 주지약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으냐?”
“응, 괜찮아요. 그보다도 엄마가 아저씨를 불러 달래요. 꼭 전할 말이 있다며…….”
“……알겠다.”
괜찮다는 대답 그대로 주지약은 더 이상 울지 않고 있었다.
안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한결 차분해진 신색의 주지약은 눈물 자국만이 남은 눈으로 유원영을 올려다보며 천막 안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에 수긍의 답을 전한 유원영은 천막 안으로 조심스레 몸을 들이밀었다.
이윽고 유원영이 안으로 사라지자 주지약은 방금 전 사내처럼 빗속에 서서 자신의 손에 들린 묵패(墨牌)를 바라보았다. 미처 유원영이 발견치 못한 묵패는 소녀의 손보다 반 뼘 정도 더 컸으며 묵패 중앙에 새겨진 섬뜩한 빛을 발하는 마귀(魔鬼)의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 * *

“……!”
천막 안으로 들어선 유원영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만다.
그를 놀라게 한 장본인인 여인은 어둠 속에 서서 옅은 미소와 함께 유원영을 손짓해 불렀다.
“이리로, 좀 더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작이다.
여인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기에 염치 불구하고 사내를 부르니 유원영은 걱정스런 빛을 두 눈에 담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간다.
“어찌 서 계십니까? 조금이라도 누워 쉬시는 편이…….”
“괜찮습니다. 그보다 지약이의 말대로 참으로 착하신 공자님이로군요.”
“그, 그런 당치 않습니다.”
병색이 완연한 와중에도 미소 띤 여인의 얼굴은 일순 활짝 핀 꽃과 같이 아름다워 아직 여자를 모르는 청년인 유원영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게 물들었다.
수줍은 처녀마냥 붉어진 그의 모습이 재밌는지 가볍게 웃어 보인 여인이 다시금 입을 열어 말한다.
“지약이로부터 들었습니다. 절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주셨는지. 그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그저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은혜라니요? 소생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소생께 미안해하지 마시고 어서 누워 몸을 편안히 하십시오.”
“아니요. 지금 이 시간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임을 저 역시 압니다. 그러니 공자께선 아무 말 마시고 우선 제 절부터 받아 주십시오.”
“……?”
죽음 앞에서도 담담한 여인의 태도에 한 번 놀라고 그 여인이 무릎마저 꿇으며 올린 대례에 또 한 번 놀라고 만다. 연상의 여인이 올린 절을 예(禮)는 둘째 치고 그녀의 몸이 걱정되서라도 받을 수 없었던 유원영은 황급히 여인 앞에 다가가 염치 불구하고 그녀의 마른 나뭇가지 같은 양팔을 부여잡아 일으켰다.
“이러지 마십시오. 소생은 부인의 절을 받을 만큼 큰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인께선 어서 일어나 침상에 몸을 누이십시오.”
“…….”
사내의 힘에 이끌려 자연스레 몸을 일으킨 여인은 진심을 담아 말하는 유원영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다지 잘나지도 그렇다고 모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평범한 용모 속에서 굳이 특별한 것을 찾자면 고집스레 닫힌 입매와 맑은 정기가 깃든 두 눈 가득 순박한 빛을 띠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내의 두 눈은 마치 고집 센 시골 아이를 보는 듯해서 웃음과 함께 호감을 전해 주었다.
‘싫지 않은 분이로구나. 마치 그분처럼…….’
유원영에게서 한 사내의 모습을 겹쳐 떠올린 여인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곡선을 그렸고, 시선은 여전히 그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따가울 정도로 한결같은 여인의 시선에 오히려 유원영이 당황해 황급히 잡았던 그녀의 팔을 놓으며 뒤로 반 발짝 물러서야만 했다.
“제가 절을 한 것은 염치 불구하고 공자님께 두 가지 청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청이라뇨?”
유원영이 물러나자 여인이 그동안 닫혀 있던 입을 열어 자신의 숨겨진 뜻을 전했다.
여인의 뜻하지 않은 말에 유원영의 두 눈에 궁금함이 묻어났다.
호기심 어린 아이의 눈을 한 채 던져진 질문에 여인은 간절함을 담아 답을 주었다.
“첫 번째 청은 제 딸아이인 지약이를 산서성(山西省) 천음산(天音山)으로 데려다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산서성 천음산이라뇨? 혹시 그곳에 지약이를 맡아 길러 줄 친척분이라도 계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곳에 데려만 주신다면 나머지는 지약이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
죽음을 눈앞에 둔 어미로선 당연한 부탁이었다.
자신이 죽고 나면 이 음습한 곳에 혼자 남게 될 딸아이에 대한 모친의 걱정을 유원영은 충분히 이해하나 그녀의 청을 쉬이 허락할 순 없었다. 이곳 북경에서 산서성까지는 족히 서너 달은 걸리는 먼 거리다. 게다가 자신의 집이 있는 강소(江蘇)와는 정반대의 길로, 만약 산서성으로 주지약을 데려다 준다면 자신은 집까지 먼 거리를 돌아가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하긴, 집에 간들 내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과 아우들을 대면할 수 있단 말인가?’
돌아갈 수 없었다.
이대로 과거에 낙방한 채 무슨 낯으로 식구들과 대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자신의 글공부를 돕기 위해 없는 살림 속에서도 허리띠를 바짝 조여 매야만 했고, 서책 하나 사고자 이틀 굶기를 반복해야만 했던 식구들이었다.
‘그래, 차라리 그 아이를 천음산에 데려다 주자. 어차피 혼자 두고 가기엔 마음에 걸렸으니 그 아이를 친척 집에 데려다 준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을 향하는 것이 나으리라. 집까진 길면 반년이란 시간이 걸리니 그때까지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지 정해 두자. 장 의원의 말씀대로 내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힘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서 결정하고 앞으로의 내 삶은 그것을 얻는 데 전력하자.’
하나의 결정을 내리니 무겁던 마음이 약간이나마 가벼워진다.
조금은 홀가분한 심정이 되어 유원영은 말없이 자신의 결정을 기다리고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부인의 부탁대로 그리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유원영의 답에 여인의 안색이 밝아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해하던 여인이 다시금 미소를 띠며 고마움을 전하자 기왕 이렇게 된 거 두 번째 청마저 수락할 마음이 선 유원영이 성급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 여인을 피곤하게 할 필요가 없다 여긴 것이다.
“두 번째 청은 무엇인지요? 제가 들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유원영이 쾌히 승낙하자 여인이 서둘러 몸을 돌린다. 행여나 그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운 듯 몸 돌린 여인은 이내 침상 옆 옷장 깊은 곳에 꽁꽁 숨겨 두었던 두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먼저 여인의 왼손에 들린 한 자루 검(劍)이 눈에 들어왔다.
삼 척 길이의 검이 흑색 검집에 싸여 있었다. 검병과 이어진 이음새 밑으로 새겨진 정교한 하얀 매화(梅花) 문양이 유원영의 시선을 끌었다. 병중의 여인이 들기엔 무거워 보이는 검이었으나 익숙한 손놀림으로 검을 잡은 여인은 그 검과 함께 두툼한 서책을 전해 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
유원영이 엉겁결에 받아 든 검은 무거웠고 받아 든 서책엔 제목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서책의 표지가 누렇게 변색된 것이 제법 오래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검과 함께 받아 든 무명고서(無名古書)를 바라보며 유원영이 의아해 묻자 여인은 진중한 얼굴로 답을 주었다.
“검은 제가 공자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보답입니다. 앞으로의 여정 중에 가벼운 시비 정도는 검을 허리에 차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은…….”
고서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 점차 아련한 빛을 띠기 시작한다. 그리움에서 원망으로, 원망에서 한 줄기 따스한 미소로 끝을 맺은 여인은 입가의 미소만큼이나 온화한 눈길로 유원영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옛날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옛날이야기라 하시면?”
“오래전 화산(華山)에 살았던 세 선인(仙人)의 이야기입니다. 화산에 살던 선인 셋이 우연히 한 자루 검을 두고 내기를 하였습니다. 검 하나를 놓고 자신들처럼 하나의 검을 셋으로 나누자는 내기였습니다. 단 검신을 부러뜨리지 않고 순수하게 검에서 검을 창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선인은 하나의 검을 두고 셋이 아닌 백 개 이상의 검으로 만들 수 있다 호언장담하며 검을 손에 든 채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춤을 추는 선인의 손짓을 쫓아 움직이던 검은 백 개가 넘는 환검(幻劍)을 만들어 냈으나 다른 두 선인은 검에서 검을 나눈 것이 아닌 단지 환영을 만들어 냈을 뿐이라 하여 그의 춤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두 번째 선인은 검을 든 채 한참을 고민하다 여인이 아기를 낳는 방법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검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니 그 검이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두 번째 선인은 꾀를 내어 검을 통해 자신의 수호룡(守護龍) 두 마리를 불러내어 그것을 검이 낳은 자식이라 우기며 지금 검 주위를 맴도는 두 마리 용도 검으로 인정해 달라 했습니다. 하나 그의 억지에 쓴 미소를 매단 세 번째 선인은 두 번째 선인으로부터 검을 빼앗아 그것을 대지에 꽂아 넣은 채 그저 지그시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의 시선에 한차례 요동친 검은 검신에서 자신과 똑같은 모양의 분신(分身) 두 개를 만들어 냈습니다. 세 번째 선인은 다른 두 선인을 비웃으며 분신들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올라 춤을 추었다 합니다.”
“…….”
어미가 어린 자식에게 들려주듯 자상한 어조로 이야기를 끝낸 여인은 아직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선 유원영의 시선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엄숙한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제가 비록 공자님께 검을 주었으나 그 검은 뽑기 위함이 아니요 단지 유약한 공자님을 보고 시비를 걸어올 무뢰배들을 위협하기 위한 장식용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 만약 공자님께서 진정으로 손에 든 검을 뽑아 그 길을 가고자 하신다면 제가 준 서책을 펼쳐 보십시오. 그 안에 살고 계시는 세 선인이 공자님께 검을 쓰는 법을 알려 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검에 뜻이 없으시다면 결코 제가 준 서책을 열어 보아서는 안 됩니다. 뜻이 없음에도 그 안을 들여다본다면 공자님께선 결국 자신이 원치 않는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길을 거부한다면 공자님껜 큰 화가 미치게 됨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
경고였다.
여인의 굳은 표정이 결코 지금의 경고가 허황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왠지 모르게 섬뜩한 여인의 말에 마른침을 한차례 삼킨 유원영 역시 굳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 모르겠습니다. 제게 검을 준 부인의 뜻은 아나 이 검과 책은 제가 아닌 지약이에게 주어야 옳은 줄 압니다. 부인의 유품이 될지도 모르는 것을 어찌 제가…….”
“아니요. 지약이는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지약이가 가야 할 길은 제 검과는 다른 길입니다. 그러니 공자님께서는 아무 말씀 마시고 그것들을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지약이를 천음산에 데려다 주신 후 그 서책을 펼쳐 보시든 보지 아니하시든 섬서성 화산파(華山派)에 살고 계시는 주 자, 원 자, 하 자를 쓰시는 분께 돌려주십시오. 그것이 제 두 번째 청입니다.”
“주원하란 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공자님께서 화산에 들기 전에 책을 펼치셨다면 앞으로 그분과는 깊은 연을 맺게 될 것입니다. 하나 펼치지 않으셨다면 그저 서책을 돌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깊은 연이라 하시면?”
“그것은 그분과 만나게 되면 공자님이 무슨 선택을 하였나에 따라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책을 돌려주시며 제 말도 전해 주십시오.”
“…….”
잠시 말이 끊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눈을 감은 채 정적 속에 침묵하던 여인이 혼란스런 마음을 정한 듯 감았던 눈을 떠 유원영을 바라보며 미소를 그렸다.
“그날의 아픔보다…… 그리움이 더 컸노라고.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당신이 내게 준 고통과 분노보다 당신이 내게 준 온정과 사랑이 더 컸노라고. 함께한 추억의 따스함만이 가슴에 남아 당신을 용서하노니, 당신 역시 자신의 과오를 용서하라 전해 주십시오.”
“부인…….”
여인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편안한 입가의 미소와는 달리 두 눈에 맺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 그녀를 바라보던 유원영은 자신도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애처로운 눈빛의 여인은 유원영의 생각과는 달리 눈물을 삼키며 그와의 이별을 고했다.
“지약이를 다시 불러 주십시오.”

사내가 나가고 한 소녀가 새로이 들어선 천막 안으론 무거운 공기만이 흐른다.
그러나 그 무거운 공기를 자애로운 눈빛으로 걷어 낸 여인이 딸 주지약을 가만히 품에 안아 보았다.
“슬퍼 말거라.”
“슬퍼하지 않아요. 엄마는 언제까지나 저와 함께 있게 될 테니까요.”
“그래, 지금 이 순간부터 난 네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넌 그분을 만나게 되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말거라. 이제부터 네 안에 살게 될 이 모친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그건……. 약속할 수 없어요.”
“지약아……. 그분이 날 버린 것이 아니다. 내가 그분을 버린 것이다.”
“…….”
답이 없다.
천음산에 살고 있을 한 사내에 대한 모친의 변호에 주지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금이라도 더 힘주어 모친을 껴안을 뿐이다.
모친의 체온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려는 어린 딸의 행동에 여인이 힘껏 안으며 웃어 보였다.

* * *

장 의원의 말과는 달리 여인은 한 시진 이상 자신의 생명을 지켜 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살고자 하는 여인의 강한 의지도 이미 드리워진 사신(死神)의 손길은 피해 낼 수 없었다. 결국 동이 트기 전에 여인은 명을 달리했다.
여인의 시신을 거둔 유원영은 주지약의 요구에 따라 북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안장시키기로 했다.
그녀의 관을 짤 돈이 없어 고민하던 유원영은 지난날의 자신이 살아온 생 모두라 할 수 있었던 객방에 놓아둔 비싼 서책들을 서점에 팔아 그 돈으로 여인의 관을 준비했다. 문관(文官)이란 꿈을 서책들 속에 담아 서점에 팔아버림으로써 애써 마음을 비우고자 노력했으나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의 옆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본 주지약이 무언가를 느낀 듯 말을 전하려 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마음속에 담아 두어야만 했다.
그렇게 한 청년과 한 소녀가 묵묵히 여인의 관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웃의 도움으로 판 묏자리에 그녀를 앉히고는 흙을 덮어 묘를 메워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매장을 끝낸 사람들이 하나둘 떠난 뒤, 유원영과 단 둘이 남게 된 주지약은 그곳에서 하루를 더 보냈다.
모친의 묘를 그저 바라만 보다 지쳐 잠이 들기를 몇 번.
단 한 번도 울지 않는 소녀의 행동에 걱정이 인 유원영이 결국 속에 있던 말들을 꺼내 들었다.
“울고 싶으면 소리내 울거라. 참으면 오히려 네게 해가 된단다.”
“아뇨. 울지 않아요. 비록 엄마의 육신은 죽어 이곳에 묻혔지만 엄마의 마음은 내 안에서 살아 저와 함께 하니까, 전 울지 않겠어요. 그것이 엄마와의 약속이기도 했고…….”
“지약아…….”
말속에 숨겨진 뜻을 유원영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에 한층 더 걱정이 인 그가 주지약을 위로하고자 했다.
하나 주지약은 죽음 앞에서도 담담했던 여인만큼이나 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유원영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가도록 해요.”
“괜찮겠느냐?”
“괜찮지 않으면 절 웃게 만들기라도 해 주실 건가요?”
“뭐?”
찌릿한 시선과 함께 톡 쏘아붙이는 주지약의 말에 유원영은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주지약은 의아해하는 그의 눈빛을 무시한 채 홀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보. 농담 정도는 알아들으라구요. 기껏 축 처진 아저씨 한 번 웃게 만들려 했던 내가 다 무안해지잖아요.”
“…….”
그랬던가?
이제 보니 그녀의 말대로 모친의 죽음 앞에서도 시종일관 담담한 모습을 보인 주지약과 달리 꿈을 접어야 했던 자신이 더 시무룩해졌음을 느낀다.
그런 자신을 위로해 주고자 던진 한마디 농 속에 소녀의 고마움이 담겨 있음을 안 유원영은 그제야 한 줄기 미소를 그릴 수 있었다.
‘저 아이가 나보다 강하구나. 나보다…….’
그녀에게 지고 싶지는 않다.
장 부자 댁 아들놈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호승심에 글공부를 시작했듯, 슬픔 앞에서도 태연한 어린 소녀의 마음에 지고 싶지 않았던 유원영은 마음속에 남겨 두었던 미련을 떨치며 그녀의 뒤를 따른다.
한편 뒤따라오는 사내의 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지약은 언제나 그렇듯 곧은 시선으로 앞만을 바라보며 모친의 묘로부터 멀어져 갔다.
‘조금만……. 지약이가 조금만 더 큰 후에, 힘이 생기면 다시 돌아올게요. 엄마 곁에 돌아와 엄마가 원하는 분이 계시는 곳으로 묘를 이장시켜 드릴게요. 그러니 지금은 좀 외롭고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고 계세요. 조금만…….’
모친이 누구 곁에 있고 싶은지 주지약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자신의 단전(丹田) 안에 머무른 모친의 마음에 약조하며 애써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 언덕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