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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二章. 거인(巨人)과 노인(老人)
녹색 찻잔 속에 담긴 맑은 물과 같이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수도 북경을 벗어나는 두 남녀의 행색은 초라했다. 창천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러 왔던 백의 서생은 축 처진 어깨 위로 몇 안 되는 옷가지를 담은 보따리를 비스듬히 멘 채 꿈을 접고 수도를 떠나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시무룩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런 검을 차고 있었다.
젊은 서생 옆으론 허름한 홍의를 차려입은 긴 머리의 소녀가 작은 보따리를 가슴에 품은 채 따라갔다.
그렇게 두 남녀가 말없이 나아가기를 얼마.
유원영이 여름의 열기를 잠시나마 식혀 주는 한 줄기 바람의 도움을 받아 주저하던 말을 꺼내 든다.
“미안하구나. 여비가 넉넉지 않아 마차를 빌려 타지 못하고 이리 걸어가야 하니…….”
“두 다리는 마차에서 편히 쉬라고 있는 게 아니라 걷기 위해 있는 것이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 제게 두 번 다시 미안하다 말하지 말아요. 미안한 건 오히려…… 나니까요.”
“…….”
뒷말은 너무 작아 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행여 그 말을 사내가 들었을까 두려운 소녀는 조막만 한 발에 힘을 주어 도망치듯 빠르게 나아갔다.
그것이 수줍음을 감추려는 소녀의 행위인지도 모른 채 뒤처진 유원영은 그저 씩씩한 주지약의 모습이 보기 좋아 미소를 그렸다.
한껏 힘을 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주지약을 보면서 입가의 미소와 함께 처졌던 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 자신 역시 잃었던 기운을 되찾으며 힘찬 발걸음으로 소녀를 뒤쫓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걷고 걷고 또 걸었을 뿐이다.
중천에 자리했던 해가 어느덧 서산 너머로 걸리는 것으로 보아 대략 두세 시진은 지난 듯했다. 긴 시간 걸어온 거리만큼이나 주변 환경도 변해 끝없이 이어지던 관도 위로 군데군데 이름 모를 산과 숲이 나타나 두 남녀를 지켜보았다.
소녀는 여전히 곧은 시선으로 앞을 직시하며 지친 기색 없이 발걸음을 놀린다. 그러나 그녀보다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던 젊은 청년의 이마엔 여름날 쏟아지는 열기에 의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그가 지금 얼마나 지쳐 있는가를 알게 해 주었다.
“힘들지 않느냐?”
체면이 있어 힘들다 직접 표하진 못하고 넌지시 돌려 묻는다.
기이하게도 전혀 지친 기색 없는 소녀에 대한 궁금함이 함축된 유원영의 질문에 나아가던 걸음을 멈춘 주지약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힘들어요. 배도 고프고. 아저씨, 우리 밥 먹어요.”
“……!”
약간의 여유 뒤에 흘러나온 대답이 전혀 힘들어 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다 표한 것은 바로 자신을 쉬게 해 주기 위함임을 깨달은 유원영이 쓴 미소와 더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꾸나. 넌 저기 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어라. 내가 숲에 가 우선 마실 물을 찾아올 테니.”
“…….”
유원영이 보따리에 매달려 있던 호리병을 꺼냈다. 그 속의 물은 다 마셔 빈 통인 상태였다.
주지약은 별반 거부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숲 입구에 선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았다.
그녀를 지나쳐 숲 안으로 들어서려던 유원영은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나 걸음을 멈추며 막 나무에 기대 눈을 감으려던 주지약을 불러 보았다.
“지약아.”
“왜요?”
“있잖니……. 그 아저씨란 소리는 좀 그렇지 않니?”
“…….”
빤히 쳐다만 보고 있다.
아직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아저씨란 호칭이 알게 모르게 마음에 걸렸던 유원영의 호소를 듣고도 주지약은 그저 별다른 반응 없이 그를 빤히 올려다볼 뿐이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부담감을 느낀 유원영이 눈길을 피하며 이왕 꺼낸 호칭에 대한 부분을 좀 더 확고히 하고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나이가 올해 열여덟. 그리고 네 나이가 올해 아홉 살이다. 십 년 터울도 되지 않는 나이 차에 아저씨란 호칭보다는 오라버니라 부르는 것이 너도 편하고, 나도 듣기 좋은…….”
“아저씨가 편해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칼로 무 자르듯 딱 잘라 답한다.
“……!”
잠시 말문이 막혔던 유원영은 이내 무안해진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자 헛웃음과 더불어 서둘러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하하! 그, 그렇지? 아무래도 오라버니보다 아저씨란 호칭이 더 정감 있고 편하지. 그래, 네 편한대로 부르려무나.”
“…….”
애써 웃으며 숲 속으로 사라지는 유원영의 그림자가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다.
시무룩해진 그의 뒷모습을 보는 주지약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그려졌다.
사내와 함께한 후 처음으로 그려진 소녀의 싱그러운 미소였으나 유원영은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없었다.
주지약은 그에게 자신의 미소를 보여줄 생각은 없었던지 금세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가부좌를 틈과 동시에 무릎 위로 놓은 양손바닥은 하늘을 향하게 한 후 두 눈을 감았다.
“…….”
깊은 정적 속에 눈을 감은 소녀는 곧 규칙적인 숨쉬기를 시작하며 긴 명상(冥想) 속으로 잠겨 들었다.
* * *
바스락 바스락 소리와 더불어 숲 속을 헤매는 사내의 눈은 흡사 먹이를 찾는 범과 같이 날카롭고 매서운 빛을 띠고 있었다. 하나의 일에 몰두하는 집중력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자부할 수 있었던 유원영이었기에 그는 지금 자신의 장기를 물 찾는 일에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가 서산으로 걸린 탓에 햇빛조차 약하게 비쳐 드는 숲 속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게 자란 고목(古木)들의 그늘과 어울려 흡사 안개 깔린 새벽녘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그 어둑어둑한 수풀 속을 두 눈 가득 힘을 주어 나아가기를 얼마.
유원영의 눈 안으로 한 줄기 빛이 떠오른다.
반 시진은 족히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일이 의외로 쉽게 풀려 숲에 들어온 지 이각여 만에 숲 안 동물들의 생명줄인 샘을 발견한 것이다.
땅속에서 물이 솟아나와 형성된 지상천(地上泉)을 발견한 유원영은 자신도 모르게 기뻐 웃으며 한달음에 달려가 손에 쥔 호리병 안에 물을 담아 내려 했다. 그러나 달려가려던 유원영은 뜻하지 않은 소리에 황급히 걸음을 멈추고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겨야만 했다.
쿵…… 쿵…… 쿵!
숲의 고요가 한순간 깨지며 흘러든 기음(奇音)은 무겁고도 커, 마치 숲 안 어딘가에서 떡방아를 찧는 듯했다. 그러나 떡방아 소리라 하기에는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 컸다.
게다가 소리가 점차 커지며 거리를 좁혀 오니 유원영은 다가오는 정체 모를 소리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을 먼저 머금었다. 슬며시 수풀 틈으로 소리가 들려온 샘의 반대편을 본 유원영은 궁금증을 자아냈던 주인공인 거대한 그림자를 얼마 지나지 않아 볼 수 있었다.
‘허! 저것이 진정 사람인가, 아님 요괴(妖怪)인가?’
반대편 수림을 뚫고 샘 앞에 이른 거대한 그림자는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컸다. 그렇다고 요괴라 하기엔 집채만 한 몸집을 빼고는 특별히 유원영 자신과 다른 곳을 찾기 힘들었다.
팔 두 개, 다리 두 개의 보통 사람이다.
그러나 그 크기는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니 유원영의 머릿속으론 자연 두 글자가 떠올랐다.
‘거인(巨人)이로구나, 거인이야.’
글자 그대로 큰 사람을 뜻하는 거인은 얼핏 보기에도 칠 척은 쉬이 넘어 보였다. 유원영 자신이 오 척 반의 결코 작지 않은 키였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거인과 나란히 선다면 겨우 그의 허리 부근에 머리가 닿을 것 같았다.
머리카락 하나 자라지 않은 대머리의 거인의 일신엔 겨우 중요한 부위만을 가린 천 쪼가리만을 두르고 있어 훔쳐보는 유원영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여름의 열기를 보기 좋게 날려 버린 시원한 옷차림의 거인은 샘 앞에 이르자 큰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쪼그리고 앉아 샘물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어 대기 시작했다.
“히히! 드디어 오늘이로구나. 드디어 오늘이야. 후웁!”
두툼한 입술 가득 미소를 그리던 거인이 불현듯 큰 숨을 들이키더니 이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샘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머리만 넣은 것이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거인이 비좁은 샘물 안으로 몸 전체를 집어넣어 사라진 것이다.
숨죽여 지켜보던 유원영은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소리치며 황급히 샘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행여나 거인이 물속에 빠져 죽을까 염려된 유원영의 부름은 공허하게 숲 안 공터 위를 맴돌았다.
황급히 좀 전의 거인처럼 쪼그려 앉아 샘물 안을 바라본 유원영은 자신의 볼을 꼬집어 봐야 했다.
‘이거,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얕을 것이라 생각했던 샘물 안은 의외로 깊어 그 끝을 알 길이 없고, 방금 전 물 안으로 사라졌던 거인 역시 맑은 물빛에도 불구하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좀 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꿈인 것처럼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샘물 안을 들여다보던 유원영은 모든 것이 거짓처럼 느껴지는 눈앞의 상황 속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꿈일 리가 없다. 내가 분명 내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분명 조금 전에 거인이 물속으로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물에 빠진 거인을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그러나 거인을 구한다 해도 어떻게 구할 것인가란 새로운 문제에서 유원영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
그 곤란도 잠시.
고민 끝에 미처 생각지 못한 맹점을 떠올린 유원영은 지금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런 갑작스런 사태에 내 너무 성급한 행동을 하였구나. 그가 어찌 이 물속에 빠져 죽을 것이란 점만 떠올렸단 말인가? 그가 자살할 이유가 없건만. 게다가 그는 물속에 빠지기 전에 웃고 있지 않았던가? 필시 이 물속에 무언가 목적이 있어 들어간 게 틀림없거늘……. 괜한 일이 생기기 전에 얼른 다시 몸을 숨겨야겠구나.’
성급한 행동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했던가?
유원영이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고요하던 수면 위로 한차례 물보라가 일며 거대한 육신이 샘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하하하! 잘 자랐어, 아주 잘 자랐어! 천 일(千日) 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크하하하하!”
거인의 불쑥 치켜 올린 오른손 안으로는 손가락 마디 하나보다도 작은 오색 빛이 영롱한 꽃잎이 쥐여져 있었다.
거인은 놀라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보라를 뒤집어쓴 유원영의 존재는 의식치 못한 채 환희에 찬 대소부터 터뜨렸다.
고막을 아프게 하는 그의 쩌렁쩌렁한 대소에 유원영이 자신도 모르게 괴로움에 찬 신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흘러드는 모기 소리에 거인이 웃음을 멈추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네놈은 누군데 감히 쥐새끼처럼 숨어 이 어르신을 훔쳐보는 것이냐?”
“저, 전 유원영이란 사람으로 길을 지나다 물을 뜨기 위해 우연히 이곳에 왔을 뿐입니다.”
유원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막을 아프게 하던 대소에 이어 터져 나온 거인의 우렁찬 질문에 반사적으로 답을 전하며 그의 부리부리한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인은 유원영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듯 무시한 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그를 한차례 훑어보았다.
“……?”
으드득!
유원영의 허리춤에 맨 검에서 시선이 멈춘 거인의 두 눈 속에 푸른 살광(殺光)이 돌며 이가 갈렸다. 솟구쳐 오르는 진한 분노를 참지 못하겠는 듯 거인의 입에선 거친 말들이 터져 나왔다.
“헛소리! 이제 보니 이 천일화(千日花)를 노리고 날 죽이려는 도적놈이로구나!”
“아닙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소생이 도적이라뇨? 전 당신이 누군지도 또 천일화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닥쳐라! 허리에 보란 듯이 검까지 차고 거짓을 고할 테냐? 오늘 이 어르신이 네놈 도적놈을 잡아 남의 것을 탐하면 어찌 되는지 가르쳐 주겠다!”
“그, 그런…….”
거인은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또 그 오해가 거침없는 분노로 바뀌어 목숨을 위협해 왔다.
어느새 거의 물 밖으로 몸을 빼낸 거인을 본 유원영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수풀 속을 향해 뛰었다.
말로서 통할 상대가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오해 역시 풀리지 않는다.
오해가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멍청하게 주저앉아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이 쥐새끼가 감히 어딜 도망가려는 것이냐? 당장 개 서지 못하겠느냐?”
유원영이 냅다 뛰기 시작하니 거인은 불같이 성을 내며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뒤따라오는 거인의 발걸음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려온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보다도 쥐새끼란 표현에 화가 치민 유원영이 급작스레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난 잘못한 게 없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당신은 어찌 날 죽이겠다 쫓아오며 날 쥐새끼라 욕…….”
유원영은 미처 할 말을 끝맺지 못한다.
너무나 갑자기 멈춘 유원영의 움직임을 따라 급히 멈추느라 거인의 발이 엉켜 버리는 바람에 유원영을 지나쳐 나무에 쿵 소리와 함께 처박힌 것이다.
숲을 울리는 진동음과 함께 이 진귀한 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나뭇가지 위의 새들이 놀라 날아오른다.
아픈 머리를 감싸 쥔 채 수풀 속에서 고개를 든 거인은 황당한 사태에 일순 굳어 버린 유원영을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놈! 절대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네놈의 육신을 머리부터 아작아작 씹어 먹어 주겠다!”
꿀꺽!
마른침이 타들어가는 목구멍 속으로 삼켜진다.
억울함을 호소하려다 오히려 거인의 화만 돋운 격이 된 유원영은 마른침을 삼킨 채 지금과 같은 사태를 해결할 옛 성현의 말씀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리려 애써도 지금과 같은 사태를 대면한 적이 없었던 옛 성현의 말씀이 떠오를 리 없었다.
‘그래, 공자님께서도 지금 나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분명 이리 하시라 말씀하셨을 것이다.’
뛴다.
몸을 돌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조건 눈앞 수풀 속을 향해 뛴다. 숨이 턱에 차올라 목숨이 다할지라도 일단 뛰기로 정한 유원영의 선택이었다.
거인은 그저 미친 듯 성내며 그 뒤를 쫓았다.
쫓고 쫓기는 거침없는 질주를 시작한 두 사내.
그들의 무한질주(無限疾走)를 숲은 그저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 * *
찌르르……. 찌르르…….
녹색(綠色) 웃옷 입고 노래 부르는 풀벌레 소리가 밤이 시작됨을 알려 준다.
초록 빛깔 나뭇잎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마저 물러감에 몰려든 밤의 정적 속으론 일엽편주(一葉片舟) 외로이 뜬 달빛만이 어둠에 잠긴 숲 안을 희미하게 비쳐 줬다.
그 빛을 벗 삼아 절벽 앞 큼지막한 바위 뒤로 몸을 숨긴 유원영의 얼굴엔 초조함이 묻어났다.
“…….”
‘도대체 포기를 모르는구나.’
거인의 손길을 피해 숲 안을 이리저리 옮겨 다닌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몸집이 큰 탓에 움직임이 둔한 거인에 비해 재빨리 주변 사물을 이용해 몸을 숨길 수 있었던 유원영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자신을 찾아 주변을 서성이는 거인의 끈기에 난색을 표했다.
‘이것 참……. 지약이가 기다리다 못해 날 찾아 이 숲 안으로 들어섰을지도 모르건만…….’
걱정이 초조함으로 바뀐 지 오래다.
행여나 어린 주지약이 자신을 대신해 거인과 맞닥뜨릴까 염려된 유원영은 더 이상 이곳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판단 하에 슬며시 절벽 앞 바위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
어둠이 내려 깔린 절벽 앞 수풀 속에서는 아직도 거대한 그림자가 우뚝 서 주변 수풀을 헤집으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다.
척 보기에도 성이 단단히 났음을 알 수 있는 거인의 난폭한 행동에 유원영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후 천천히 바위 뒤에서 몸을 빼냈다.
한 발짝, 한 발짝…….
거인과는 반대편 수풀 속으로 살금살금 도망치려는 유원영의 움직임은 도둑고양이처럼 극히 낮고도 은밀했다.
그러나 허리에 찬 검은 주인의 행동과는 반대로 솟아난 돌부리에 부딪쳐 덜커덕 소란스런 소리를 냈다.
흥분해 날뛰던 거인이었지만 큰 귀만큼이나 밝은 청각으로 그 소리를 포착해 냈다.
“쥐새끼이이!”
“……!”
쿵! 쿵!
유원영을 발견한 거인의 입에선 흉포한 고성이 터져 나오며 큼지막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든다.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거인의 모습이 마치 성난 황소와도 같아 유원영은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무작정 눈앞 수풀 속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번만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 다짐한 거인이 뒤따랐다.
요리조리 방향을 바꿔도 점차 간격이 좁혀지는 상황에 유원영의 이마 위론 식은땀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까닥 잘못해 거인의 손에 비명횡사(非命橫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마저 떠올렸다. 그러던 유원영의 눈으로 한 줄기 경악의 빛이 인 것은 순간이었다.
팟!
“헉?”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른다.
어둠 속을 내달리던 그의 발을 땅속 누군가가 덥석 잡았다.
심장이 터져 나갈 만큼 놀란 유원영은 그저 헛바람을 들이킬 뿐이다.
놀란 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땅속에서 불쑥 손을 내뻗어 유원영의 다리를 움켜쥔 이는 이내 지체 없이 그의 육신을 끌어당겼다.
파직!
“……?”
없다.
잠시 잔 나뭇가지가 시야를 가린다 싶은 순간, 그 나뭇가지를 단숨에 부러뜨리고 앞을 본 거인이었으나 이미 사내의 육신은 허깨비마냥 사라져 그저 숲의 정적만이 그를 반겼다. 거인은 또다시 유원영을 놓쳤다는 생각에 화가 나 진한 분노를 토해 내려 했다.
“음?”
그러나 그의 시끄러운 고성을 듣기 싫었던지 숲의 정적 속으로 한 줄기 소음이 흘러든다.
바스락!
수풀 속을 헤치는 작은 소리는 의외로 가까웠다.
거인은 히죽 웃으며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소리가 들려온 나무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쿵!
“쥐새끼! 네깟 놈이 도망쳐 봐야…….”
“…….”
득의에 찬 말을 토해 내던 거인의 입이 불현듯 멈춘다. 멈춘 입을 대신해 움직이던 두 눈 속으로 유원영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비쳐 들었다.
자신의 발치.
무릎에도 올라오지 않는 작은 키의 소녀가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갑작스런 사태에도 그저 이채로운 빛을 두 눈에 담아 자신을 바라보고 선 소녀의 시선에 거인 역시 우두커니 서서 멀뚱하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넌 누구냐?”
“주지약이요. 아저씨는요?”
“나? 난 백무극이라 한다. 근데 넌 내가 무섭지 않니?”
이상했다.
보통 자신을 처음 본 사람들은 입을 열기도 전에 무서워 도망치거나 얼어붙은 채 그저 살려 달란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러나 눈앞의 소녀는 도망치지도, 그렇다고 살려 달라 말하지도 않은 채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름마저 물어 온다.
그 점이 이상해 백무극이 기이한 시선으로 그녀를 직시하며 물었다.
유원영을 찾아 숲으로 들어왔던 주지약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곧 답을 전해 주었다.
“무섭지만……. 엄마가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하셨어요. 아저씬 무서운 사람인가요?”
“……!”
겉모습만이 아니다.
지금 눈앞의 아이는 자신의 내면이 어떤지를 물어 오고 있다.
주지약의 질문에 백무극은 성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다! 난 무섭지 않아! 난 절대 무서운 사람이 아니다!”
“…….”
어린 소녀에게 무섭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백무극이 거세게 고개를 흔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주지약이 입을 열어 그의 초조한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그래요……. 그럼, 저도 아저씨가 무섭지 않아요.”
“……!”
방긋 웃어 보인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드는 달빛을 받아 더욱 환하게 그려진 소녀의 미소에 백무극은 기분이 좋아져 덩달아 웃어 보였다.
二章. 거인(巨人)과 노인(老人)
녹색 찻잔 속에 담긴 맑은 물과 같이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수도 북경을 벗어나는 두 남녀의 행색은 초라했다. 창천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러 왔던 백의 서생은 축 처진 어깨 위로 몇 안 되는 옷가지를 담은 보따리를 비스듬히 멘 채 꿈을 접고 수도를 떠나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시무룩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런 검을 차고 있었다.
젊은 서생 옆으론 허름한 홍의를 차려입은 긴 머리의 소녀가 작은 보따리를 가슴에 품은 채 따라갔다.
그렇게 두 남녀가 말없이 나아가기를 얼마.
유원영이 여름의 열기를 잠시나마 식혀 주는 한 줄기 바람의 도움을 받아 주저하던 말을 꺼내 든다.
“미안하구나. 여비가 넉넉지 않아 마차를 빌려 타지 못하고 이리 걸어가야 하니…….”
“두 다리는 마차에서 편히 쉬라고 있는 게 아니라 걷기 위해 있는 것이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 제게 두 번 다시 미안하다 말하지 말아요. 미안한 건 오히려…… 나니까요.”
“…….”
뒷말은 너무 작아 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행여 그 말을 사내가 들었을까 두려운 소녀는 조막만 한 발에 힘을 주어 도망치듯 빠르게 나아갔다.
그것이 수줍음을 감추려는 소녀의 행위인지도 모른 채 뒤처진 유원영은 그저 씩씩한 주지약의 모습이 보기 좋아 미소를 그렸다.
한껏 힘을 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주지약을 보면서 입가의 미소와 함께 처졌던 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 자신 역시 잃었던 기운을 되찾으며 힘찬 발걸음으로 소녀를 뒤쫓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걷고 걷고 또 걸었을 뿐이다.
중천에 자리했던 해가 어느덧 서산 너머로 걸리는 것으로 보아 대략 두세 시진은 지난 듯했다. 긴 시간 걸어온 거리만큼이나 주변 환경도 변해 끝없이 이어지던 관도 위로 군데군데 이름 모를 산과 숲이 나타나 두 남녀를 지켜보았다.
소녀는 여전히 곧은 시선으로 앞을 직시하며 지친 기색 없이 발걸음을 놀린다. 그러나 그녀보다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던 젊은 청년의 이마엔 여름날 쏟아지는 열기에 의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그가 지금 얼마나 지쳐 있는가를 알게 해 주었다.
“힘들지 않느냐?”
체면이 있어 힘들다 직접 표하진 못하고 넌지시 돌려 묻는다.
기이하게도 전혀 지친 기색 없는 소녀에 대한 궁금함이 함축된 유원영의 질문에 나아가던 걸음을 멈춘 주지약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힘들어요. 배도 고프고. 아저씨, 우리 밥 먹어요.”
“……!”
약간의 여유 뒤에 흘러나온 대답이 전혀 힘들어 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다 표한 것은 바로 자신을 쉬게 해 주기 위함임을 깨달은 유원영이 쓴 미소와 더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꾸나. 넌 저기 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어라. 내가 숲에 가 우선 마실 물을 찾아올 테니.”
“…….”
유원영이 보따리에 매달려 있던 호리병을 꺼냈다. 그 속의 물은 다 마셔 빈 통인 상태였다.
주지약은 별반 거부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숲 입구에 선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았다.
그녀를 지나쳐 숲 안으로 들어서려던 유원영은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나 걸음을 멈추며 막 나무에 기대 눈을 감으려던 주지약을 불러 보았다.
“지약아.”
“왜요?”
“있잖니……. 그 아저씨란 소리는 좀 그렇지 않니?”
“…….”
빤히 쳐다만 보고 있다.
아직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아저씨란 호칭이 알게 모르게 마음에 걸렸던 유원영의 호소를 듣고도 주지약은 그저 별다른 반응 없이 그를 빤히 올려다볼 뿐이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부담감을 느낀 유원영이 눈길을 피하며 이왕 꺼낸 호칭에 대한 부분을 좀 더 확고히 하고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나이가 올해 열여덟. 그리고 네 나이가 올해 아홉 살이다. 십 년 터울도 되지 않는 나이 차에 아저씨란 호칭보다는 오라버니라 부르는 것이 너도 편하고, 나도 듣기 좋은…….”
“아저씨가 편해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칼로 무 자르듯 딱 잘라 답한다.
“……!”
잠시 말문이 막혔던 유원영은 이내 무안해진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자 헛웃음과 더불어 서둘러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하하! 그, 그렇지? 아무래도 오라버니보다 아저씨란 호칭이 더 정감 있고 편하지. 그래, 네 편한대로 부르려무나.”
“…….”
애써 웃으며 숲 속으로 사라지는 유원영의 그림자가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다.
시무룩해진 그의 뒷모습을 보는 주지약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그려졌다.
사내와 함께한 후 처음으로 그려진 소녀의 싱그러운 미소였으나 유원영은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없었다.
주지약은 그에게 자신의 미소를 보여줄 생각은 없었던지 금세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가부좌를 틈과 동시에 무릎 위로 놓은 양손바닥은 하늘을 향하게 한 후 두 눈을 감았다.
“…….”
깊은 정적 속에 눈을 감은 소녀는 곧 규칙적인 숨쉬기를 시작하며 긴 명상(冥想) 속으로 잠겨 들었다.
* * *
바스락 바스락 소리와 더불어 숲 속을 헤매는 사내의 눈은 흡사 먹이를 찾는 범과 같이 날카롭고 매서운 빛을 띠고 있었다. 하나의 일에 몰두하는 집중력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자부할 수 있었던 유원영이었기에 그는 지금 자신의 장기를 물 찾는 일에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가 서산으로 걸린 탓에 햇빛조차 약하게 비쳐 드는 숲 속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게 자란 고목(古木)들의 그늘과 어울려 흡사 안개 깔린 새벽녘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그 어둑어둑한 수풀 속을 두 눈 가득 힘을 주어 나아가기를 얼마.
유원영의 눈 안으로 한 줄기 빛이 떠오른다.
반 시진은 족히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일이 의외로 쉽게 풀려 숲에 들어온 지 이각여 만에 숲 안 동물들의 생명줄인 샘을 발견한 것이다.
땅속에서 물이 솟아나와 형성된 지상천(地上泉)을 발견한 유원영은 자신도 모르게 기뻐 웃으며 한달음에 달려가 손에 쥔 호리병 안에 물을 담아 내려 했다. 그러나 달려가려던 유원영은 뜻하지 않은 소리에 황급히 걸음을 멈추고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겨야만 했다.
쿵…… 쿵…… 쿵!
숲의 고요가 한순간 깨지며 흘러든 기음(奇音)은 무겁고도 커, 마치 숲 안 어딘가에서 떡방아를 찧는 듯했다. 그러나 떡방아 소리라 하기에는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 컸다.
게다가 소리가 점차 커지며 거리를 좁혀 오니 유원영은 다가오는 정체 모를 소리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을 먼저 머금었다. 슬며시 수풀 틈으로 소리가 들려온 샘의 반대편을 본 유원영은 궁금증을 자아냈던 주인공인 거대한 그림자를 얼마 지나지 않아 볼 수 있었다.
‘허! 저것이 진정 사람인가, 아님 요괴(妖怪)인가?’
반대편 수림을 뚫고 샘 앞에 이른 거대한 그림자는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컸다. 그렇다고 요괴라 하기엔 집채만 한 몸집을 빼고는 특별히 유원영 자신과 다른 곳을 찾기 힘들었다.
팔 두 개, 다리 두 개의 보통 사람이다.
그러나 그 크기는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니 유원영의 머릿속으론 자연 두 글자가 떠올랐다.
‘거인(巨人)이로구나, 거인이야.’
글자 그대로 큰 사람을 뜻하는 거인은 얼핏 보기에도 칠 척은 쉬이 넘어 보였다. 유원영 자신이 오 척 반의 결코 작지 않은 키였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거인과 나란히 선다면 겨우 그의 허리 부근에 머리가 닿을 것 같았다.
머리카락 하나 자라지 않은 대머리의 거인의 일신엔 겨우 중요한 부위만을 가린 천 쪼가리만을 두르고 있어 훔쳐보는 유원영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여름의 열기를 보기 좋게 날려 버린 시원한 옷차림의 거인은 샘 앞에 이르자 큰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쪼그리고 앉아 샘물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어 대기 시작했다.
“히히! 드디어 오늘이로구나. 드디어 오늘이야. 후웁!”
두툼한 입술 가득 미소를 그리던 거인이 불현듯 큰 숨을 들이키더니 이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샘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머리만 넣은 것이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거인이 비좁은 샘물 안으로 몸 전체를 집어넣어 사라진 것이다.
숨죽여 지켜보던 유원영은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소리치며 황급히 샘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행여나 거인이 물속에 빠져 죽을까 염려된 유원영의 부름은 공허하게 숲 안 공터 위를 맴돌았다.
황급히 좀 전의 거인처럼 쪼그려 앉아 샘물 안을 바라본 유원영은 자신의 볼을 꼬집어 봐야 했다.
‘이거,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얕을 것이라 생각했던 샘물 안은 의외로 깊어 그 끝을 알 길이 없고, 방금 전 물 안으로 사라졌던 거인 역시 맑은 물빛에도 불구하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좀 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꿈인 것처럼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샘물 안을 들여다보던 유원영은 모든 것이 거짓처럼 느껴지는 눈앞의 상황 속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꿈일 리가 없다. 내가 분명 내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분명 조금 전에 거인이 물속으로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물에 빠진 거인을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그러나 거인을 구한다 해도 어떻게 구할 것인가란 새로운 문제에서 유원영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
그 곤란도 잠시.
고민 끝에 미처 생각지 못한 맹점을 떠올린 유원영은 지금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런 갑작스런 사태에 내 너무 성급한 행동을 하였구나. 그가 어찌 이 물속에 빠져 죽을 것이란 점만 떠올렸단 말인가? 그가 자살할 이유가 없건만. 게다가 그는 물속에 빠지기 전에 웃고 있지 않았던가? 필시 이 물속에 무언가 목적이 있어 들어간 게 틀림없거늘……. 괜한 일이 생기기 전에 얼른 다시 몸을 숨겨야겠구나.’
성급한 행동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했던가?
유원영이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고요하던 수면 위로 한차례 물보라가 일며 거대한 육신이 샘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하하하! 잘 자랐어, 아주 잘 자랐어! 천 일(千日) 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크하하하하!”
거인의 불쑥 치켜 올린 오른손 안으로는 손가락 마디 하나보다도 작은 오색 빛이 영롱한 꽃잎이 쥐여져 있었다.
거인은 놀라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보라를 뒤집어쓴 유원영의 존재는 의식치 못한 채 환희에 찬 대소부터 터뜨렸다.
고막을 아프게 하는 그의 쩌렁쩌렁한 대소에 유원영이 자신도 모르게 괴로움에 찬 신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흘러드는 모기 소리에 거인이 웃음을 멈추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네놈은 누군데 감히 쥐새끼처럼 숨어 이 어르신을 훔쳐보는 것이냐?”
“저, 전 유원영이란 사람으로 길을 지나다 물을 뜨기 위해 우연히 이곳에 왔을 뿐입니다.”
유원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막을 아프게 하던 대소에 이어 터져 나온 거인의 우렁찬 질문에 반사적으로 답을 전하며 그의 부리부리한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인은 유원영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듯 무시한 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그를 한차례 훑어보았다.
“……?”
으드득!
유원영의 허리춤에 맨 검에서 시선이 멈춘 거인의 두 눈 속에 푸른 살광(殺光)이 돌며 이가 갈렸다. 솟구쳐 오르는 진한 분노를 참지 못하겠는 듯 거인의 입에선 거친 말들이 터져 나왔다.
“헛소리! 이제 보니 이 천일화(千日花)를 노리고 날 죽이려는 도적놈이로구나!”
“아닙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소생이 도적이라뇨? 전 당신이 누군지도 또 천일화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닥쳐라! 허리에 보란 듯이 검까지 차고 거짓을 고할 테냐? 오늘 이 어르신이 네놈 도적놈을 잡아 남의 것을 탐하면 어찌 되는지 가르쳐 주겠다!”
“그, 그런…….”
거인은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또 그 오해가 거침없는 분노로 바뀌어 목숨을 위협해 왔다.
어느새 거의 물 밖으로 몸을 빼낸 거인을 본 유원영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수풀 속을 향해 뛰었다.
말로서 통할 상대가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오해 역시 풀리지 않는다.
오해가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멍청하게 주저앉아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이 쥐새끼가 감히 어딜 도망가려는 것이냐? 당장 개 서지 못하겠느냐?”
유원영이 냅다 뛰기 시작하니 거인은 불같이 성을 내며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뒤따라오는 거인의 발걸음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려온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보다도 쥐새끼란 표현에 화가 치민 유원영이 급작스레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난 잘못한 게 없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당신은 어찌 날 죽이겠다 쫓아오며 날 쥐새끼라 욕…….”
유원영은 미처 할 말을 끝맺지 못한다.
너무나 갑자기 멈춘 유원영의 움직임을 따라 급히 멈추느라 거인의 발이 엉켜 버리는 바람에 유원영을 지나쳐 나무에 쿵 소리와 함께 처박힌 것이다.
숲을 울리는 진동음과 함께 이 진귀한 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나뭇가지 위의 새들이 놀라 날아오른다.
아픈 머리를 감싸 쥔 채 수풀 속에서 고개를 든 거인은 황당한 사태에 일순 굳어 버린 유원영을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놈! 절대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네놈의 육신을 머리부터 아작아작 씹어 먹어 주겠다!”
꿀꺽!
마른침이 타들어가는 목구멍 속으로 삼켜진다.
억울함을 호소하려다 오히려 거인의 화만 돋운 격이 된 유원영은 마른침을 삼킨 채 지금과 같은 사태를 해결할 옛 성현의 말씀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리려 애써도 지금과 같은 사태를 대면한 적이 없었던 옛 성현의 말씀이 떠오를 리 없었다.
‘그래, 공자님께서도 지금 나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분명 이리 하시라 말씀하셨을 것이다.’
뛴다.
몸을 돌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조건 눈앞 수풀 속을 향해 뛴다. 숨이 턱에 차올라 목숨이 다할지라도 일단 뛰기로 정한 유원영의 선택이었다.
거인은 그저 미친 듯 성내며 그 뒤를 쫓았다.
쫓고 쫓기는 거침없는 질주를 시작한 두 사내.
그들의 무한질주(無限疾走)를 숲은 그저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 * *
찌르르……. 찌르르…….
녹색(綠色) 웃옷 입고 노래 부르는 풀벌레 소리가 밤이 시작됨을 알려 준다.
초록 빛깔 나뭇잎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마저 물러감에 몰려든 밤의 정적 속으론 일엽편주(一葉片舟) 외로이 뜬 달빛만이 어둠에 잠긴 숲 안을 희미하게 비쳐 줬다.
그 빛을 벗 삼아 절벽 앞 큼지막한 바위 뒤로 몸을 숨긴 유원영의 얼굴엔 초조함이 묻어났다.
“…….”
‘도대체 포기를 모르는구나.’
거인의 손길을 피해 숲 안을 이리저리 옮겨 다닌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몸집이 큰 탓에 움직임이 둔한 거인에 비해 재빨리 주변 사물을 이용해 몸을 숨길 수 있었던 유원영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자신을 찾아 주변을 서성이는 거인의 끈기에 난색을 표했다.
‘이것 참……. 지약이가 기다리다 못해 날 찾아 이 숲 안으로 들어섰을지도 모르건만…….’
걱정이 초조함으로 바뀐 지 오래다.
행여나 어린 주지약이 자신을 대신해 거인과 맞닥뜨릴까 염려된 유원영은 더 이상 이곳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판단 하에 슬며시 절벽 앞 바위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
어둠이 내려 깔린 절벽 앞 수풀 속에서는 아직도 거대한 그림자가 우뚝 서 주변 수풀을 헤집으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다.
척 보기에도 성이 단단히 났음을 알 수 있는 거인의 난폭한 행동에 유원영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후 천천히 바위 뒤에서 몸을 빼냈다.
한 발짝, 한 발짝…….
거인과는 반대편 수풀 속으로 살금살금 도망치려는 유원영의 움직임은 도둑고양이처럼 극히 낮고도 은밀했다.
그러나 허리에 찬 검은 주인의 행동과는 반대로 솟아난 돌부리에 부딪쳐 덜커덕 소란스런 소리를 냈다.
흥분해 날뛰던 거인이었지만 큰 귀만큼이나 밝은 청각으로 그 소리를 포착해 냈다.
“쥐새끼이이!”
“……!”
쿵! 쿵!
유원영을 발견한 거인의 입에선 흉포한 고성이 터져 나오며 큼지막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든다.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거인의 모습이 마치 성난 황소와도 같아 유원영은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무작정 눈앞 수풀 속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번만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 다짐한 거인이 뒤따랐다.
요리조리 방향을 바꿔도 점차 간격이 좁혀지는 상황에 유원영의 이마 위론 식은땀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까닥 잘못해 거인의 손에 비명횡사(非命橫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마저 떠올렸다. 그러던 유원영의 눈으로 한 줄기 경악의 빛이 인 것은 순간이었다.
팟!
“헉?”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른다.
어둠 속을 내달리던 그의 발을 땅속 누군가가 덥석 잡았다.
심장이 터져 나갈 만큼 놀란 유원영은 그저 헛바람을 들이킬 뿐이다.
놀란 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땅속에서 불쑥 손을 내뻗어 유원영의 다리를 움켜쥔 이는 이내 지체 없이 그의 육신을 끌어당겼다.
파직!
“……?”
없다.
잠시 잔 나뭇가지가 시야를 가린다 싶은 순간, 그 나뭇가지를 단숨에 부러뜨리고 앞을 본 거인이었으나 이미 사내의 육신은 허깨비마냥 사라져 그저 숲의 정적만이 그를 반겼다. 거인은 또다시 유원영을 놓쳤다는 생각에 화가 나 진한 분노를 토해 내려 했다.
“음?”
그러나 그의 시끄러운 고성을 듣기 싫었던지 숲의 정적 속으로 한 줄기 소음이 흘러든다.
바스락!
수풀 속을 헤치는 작은 소리는 의외로 가까웠다.
거인은 히죽 웃으며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소리가 들려온 나무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쿵!
“쥐새끼! 네깟 놈이 도망쳐 봐야…….”
“…….”
득의에 찬 말을 토해 내던 거인의 입이 불현듯 멈춘다. 멈춘 입을 대신해 움직이던 두 눈 속으로 유원영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비쳐 들었다.
자신의 발치.
무릎에도 올라오지 않는 작은 키의 소녀가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갑작스런 사태에도 그저 이채로운 빛을 두 눈에 담아 자신을 바라보고 선 소녀의 시선에 거인 역시 우두커니 서서 멀뚱하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넌 누구냐?”
“주지약이요. 아저씨는요?”
“나? 난 백무극이라 한다. 근데 넌 내가 무섭지 않니?”
이상했다.
보통 자신을 처음 본 사람들은 입을 열기도 전에 무서워 도망치거나 얼어붙은 채 그저 살려 달란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러나 눈앞의 소녀는 도망치지도, 그렇다고 살려 달라 말하지도 않은 채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름마저 물어 온다.
그 점이 이상해 백무극이 기이한 시선으로 그녀를 직시하며 물었다.
유원영을 찾아 숲으로 들어왔던 주지약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곧 답을 전해 주었다.
“무섭지만……. 엄마가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하셨어요. 아저씬 무서운 사람인가요?”
“……!”
겉모습만이 아니다.
지금 눈앞의 아이는 자신의 내면이 어떤지를 물어 오고 있다.
주지약의 질문에 백무극은 성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다! 난 무섭지 않아! 난 절대 무서운 사람이 아니다!”
“…….”
어린 소녀에게 무섭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백무극이 거세게 고개를 흔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주지약이 입을 열어 그의 초조한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그래요……. 그럼, 저도 아저씨가 무섭지 않아요.”
“……!”
방긋 웃어 보인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드는 달빛을 받아 더욱 환하게 그려진 소녀의 미소에 백무극은 기분이 좋아져 덩달아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