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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하얀 구름 밭 두리뭉실 떠올라 무거운 발 받혀줌에, 행여나 천 길 낭떠러지 구름 아래 떨어질까 나아가는 걸음은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이곳이 어딘지, 무엇 때문에 이리 걷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구름 빛깔 옷 입은 백의 서생은 그저 걷고 또 걸으며 잃어버린 목적을 찾아 헤맬 뿐이다.
온통 하얀 구름뿐인 세상 속에서 길을 잃은 서생의 귀로 문득 한 줄기 금음(琴音)이 들려오니 목적을 찾은 서생의 눈으론 이채가 감돌며 그 육신이 금음을 좇아 움직였다.
딩…딩. 딩딩 딩……. 딩딩 딩…….
첫 음은 여운을, 두 번째 음은 빠르게 이어지나, 세 번째 음에선 다시 여운이 반복되는 금음에는 경쾌함 속에 느긋함이 감춰져 있어 듣는 유원영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
그 즐거움에 한껏 미소 지은 유원영의 걸음은 자연히 발 디딘 구름처럼 가벼워져 어느새 금음이 시작된 곳에 이르렀고, 이내 그의 눈에 세 명의 백발 노신선들이 비쳐 들었다.
“…….”
한 그루 고목 아래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는 신선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유원영의 걸음을 이끈 주인공인 금을 타던 신선은 두 눈을 감은 채 제 금음에 취해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다.
미소 띤 노신선의 옆에는 고목에 등을 기댄 또 한 명의 신선이 앉아 손에 든 백화주(百花酒)를 음미하며 연신 즐거움에 찬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신선은 경쾌한 금음과 즐거운 신선의 웃음소리에 맞춰 은빛 검광을 찬란하게 빛내며 두 눈을 황홀케 할 정도로 아름다운 검무(劍舞)를 추고 있었다.
‘어찌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검이란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상 무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한차례 내전이 일었던 중원 땅에서 태어난 유원영의 검에 대한 정의(定義)였다.
그러나 한낱 살상 무기에 지나지 않았던 검이 지금 유원영의 눈에 새롭게 비쳐 든다.
하늘하늘 흘러가는 물결처럼, 또는 너울대는 나비처럼 춤을 추는가 하면, 어떨 때는 웃고, 어떨 때는 운다.
어찌 죽은 검에서 눈물이 흐르고, 어찌 죽은 검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올 수 있겠냐만은, 지금 유원영이 느끼기에 눈앞의 검은 울기도 또 웃기도 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움직임 속에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담긴 검을 보면서 유원영은 같이 따라 웃기도, 같이 따라 울기도, 또 화마저 냈다.
팅!
“음?”
“…….”
“허허…….”
검에서 자신의 인생사를 주마등(走馬燈)처럼 떠올리면서 괴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유원영의 존재를 발견한 세 신선이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며 그를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에 당황한 유원영이 쭈뼛쭈뼛 선 채 어찌할 바를 모르다 냉큼 허리부터 조아렸다.
세 신선은 각기 표정이 달랐지만 그 입에선 한결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이놈아, 네겐 아직 이르니 썩 꺼져라!”
“……!”
유원영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긴 꿈에서 깨어났다.
난생처음 꿔 보는 희한한 꿈에 유원영은 잠시지간 멍하니 향내 가득한 동굴 안을 바라보았다.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좁은 동굴 안에는 이름 모를 온갖 약재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어 동굴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더불어 지독한 향내를 유원영에게 안겨 줬다.
말로는 표현치 못할 코를 에는 듯한 약재 냄새에 흐릿하던 정신을 차린 유원영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체 이곳은…….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알 수 없다.
분명 땅속에서 솟아난 웬 괴인의 손에 토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은 기억나나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신기한 꿈을 꾸고 눈을 떠 보니 생전 처음 보는 동굴 안이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동굴 안에서 다시금 멍한 눈빛이 되어 주변을 둘러보던 유원영의 귀로 금음이 흘러들었다.
딩……. 딩딩.
“……!”
꿈속에서 들은 것과 같은 맑고 경쾌한 금음에 두 눈 가득 이채를 띤 유원영이 곧 그 금음을 찾아 동굴 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자신이 누워 잠들었던 거적 옆으로 가지런히 놓인 검을 보고는 다시금 멈춰야만 했다.
‘훗! 아무래도 내가 부인이 들려준 세 신선 얘기와 이 금음 때문에 그런 요상한 꿈을 꾼 듯하구나.’
그저 웃고 만다.
꿈에서 보았던 엉뚱한 광경이 자신이 들은 이야기와 맞물려 생성된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웃고 마는 유원영이었다. 웃으며 검을 잡아 든 유원영은 새삼스런 눈으로 이제 자신의 것이나 아직 이름도 짓지 않은 검을 바라보았다.
어디 이름뿐이던가?
여인에게서 검을 받은 후 단 한 번도 뽑아 본 적이 없다. 지금껏 자신이 걸어온 길과는 정반대인 검을 뽑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던 유원영은 신기한 꿈을 꾼 탓인지 불현듯 검을 뽑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검병으로 다가들던 손이 멈추며 한차례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그 마음은 사라져야만 했다.
‘쓰지도 않을 검을 뽑으면 무엇하랴. 내 비록 앞으로 널 쓸 일은 없겠으나 기왕지사 내 것이 되었으니 이름이나 지어 주어야겠구나.’
잠시 고민하며 마땅한 이름을 떠올려 본다.
그러나 이렇다 할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니 유원영의 생각은 자연스레 자신이 꾼 꿈과 연결되었다.
‘그래. 구름 속의 신선이 검을 들고 춤을 추었으니 네 이름을 선운(仙雲)이라 지어야겠다. 어떠냐, 마음에 드느냐?’
답이 있을 리 없다.
선운검(仙雲劍)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검은 묵묵부답 주인의 시선에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유원영 역시 특별한 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웃으며 처음 여인이 검을 준 첫 번째 뜻대로 장식용으로 허리에 찬 채 동굴 밖을 향했다.
“…….”
동굴을 벗어난 유원영을 밝은 햇살이 먼저 반긴다.
어느새 어둠이 물러나고 찾아든 눈부신 햇살에 유원영의 눈살은 자연스레 찌푸려져 한 손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막았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을 아프게 하던 햇빛에 적응한 유원영은 곧 평소대로 돌아온 시력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
등을 돌린 채 바위 위에 앉은 청의 노인의 모습이 조금 전 꾸었던 꿈을 떠올리게 만든다. 꿈속에서 보았던 노신선처럼 길게 기른 백발이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노인이었다.
노인은 등 뒤에서 유원영의 기척이 들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무릎 위에 놓인 금(琴)을 탄주했다.
띵……. 딩…….
경쾌하게만 흐르던 음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느리게……. 조금씩 느려지는 음은 점차 우울한 기운 속에 진한 애통(哀痛)을 담고 있었다.
가슴 시리도록 슬픈 노인의 곡조에 유원영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저 귀로 흘러드는 음만을 감상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띵…….
느릿느릿 흐르던 금음이 멈춘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홀로 멈춘 거문고 소리를 대신해 동굴 앞 공터에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눈을 감은 채 그 정적을 즐기던 노인이 문득 무릎 위의 금을 풀밭에 내려놓고는 일어났다.
스윽!
몸을 일으킨 청의 노인은 이내 몸을 돌려 자신의 곡이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준 유원영을 돌아보았다.
“……?”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다.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띤 유원영이 뜻밖의 질문을 던져 돌아선 노인의 마음을 더욱더 깊은 당혹 속으로 끌어당긴다.
“어찌해 그리 슬퍼하십니까?”
“…….”
입가의 미소만큼이나 부드럽게 흘러나온 유원영의 질문에 청의 노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잠이 든 틈을 타 눈앞의 청년을 한차례 살펴봤을 때만 해도 허리에 찬 검과는 달리 무공도 익히지 않은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내였다. 산전수전 다 겪어온 이들의 노련한 눈썰미는커녕 오히려 순박한 시골 아이마냥 맑은 빛을 띤 사내가 바로 눈앞의 유원영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입에서 마치 자신의 마음속 아픔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해 오니 예상 밖의 질문에 당황한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실소를 흘려보낸다.
“후훗! 그리 보이는가?”
“아니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들렸을 뿐입니다.”
“허허, 들렸다라. 그랬던가?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내 음에 담겼던가……. 이보게 젊은이. 누구나 다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씩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네.”
“…….”
“그 슬픔을 들추어내는 것도. 들추어내지 않는 것도 모두가 다 스스로의 선택일세. 그러니 자네는 더 이상 내 슬픔을 알려고 들지 말게.”
“사과드립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주제 넘은 참견을 하고 말았습니다.”
차분한 노인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무례했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유원영이었다. 그렇기에 허리 숙여 사과의 뜻을 전하나 노인은 오히려 손사래를 치며 뜻밖의 말로 그를 당혹케 한다.
“아닐세. 사과해야 될 사람은 오히려 나일세. 한순간이지만 자네가 내게 보여 준 미소는 잠시나마 내 마음을 따듯하게 해 주었네. 그런 자네를 이용하기 위해 그 아이로부터 이리 구해 왔으니 사과는 자네가 아닌 내가 해야 하네.”
“무슨……?”
팟!
한순간이었다.
이 장여의 거리를 무릎조차 구부리지 않은 채 순식간에 좁혀 유원영 앞에 모습을 드러낸 노인이 주름진 손을 번개같이 흔들며 그의 마혈을 점한 것은. 마혈 뿐만이 아니다. 아혈마저 점해 소리조차 지를 수 없게 만든 노인이 석상(石像)처럼 굳어 든 유원영의 어깨 위로 무거운 손을 얹었다.
“미안하네, 정말……. 어제 내 모든 걸 지켜보았네. 천일화를 구하기 위해 샘에 들어갔던 그 아이를 자네가 구하려 한 것도. 그리고 그 아이에게 도적이라 오해받아 쫓기게 된 것도 내 모두 보았으나 난 자네를 도적으로서 그 아이에게 넘기려 하네. 그 방법만이 날 미워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릴 수 있을 터이니……. 다시 날 믿을 수 있도록.”
“…….”
정말로 미안해하는지 알 수 없다.
비록 어깨 위로 올려진 손은 무거운 마음을 대신하나 주름진 노안 속에는 한 가지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감에 푸른 희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서히 검은 눈동자 속으로 떠오른 푸른빛은 이내 노인의 두 눈을 새파랗게 물들자 난생처음 마혈이 짚여 당혹해하는 유원영의 육신이 허공으로 반자가량 떠올랐다.
두둥실 허공으로 떠오른 유원영은 믿지 못할 상황에 몸부림치고 싶었으나 마혈이 짚인 탓에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절정의 내가고수만이 펼칠 수 있는 경지인 허공섭물(虛空攝物)을 알 리 없었던 유원영으로선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었다.
우르릉……. 파바밧!
그러나 그의 허황된 생각에 동참할 뜻은 없었던지 청의 노인이 낮은 천둥음과 함께 공터 밖 수림 속을 향해 빛살처럼 빠르게 뛰어들었다.
“……!”
유원영은 정신이 없었다.
한순간 노인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싶은 찰나, 자신의 몸이 저절로 수림 속을 향한 것이다. 도저히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광을 접하는 순간, 지금 꿈을 꾸는 듯했다. 하나 시원스레 뺨 위로 스치는 바람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결코 꿈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허! 내가 정말 신선을 만난 것인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평범한 범인의 생활을 살아왔던 유원영으로선 노인의 존재를 신선으로 치부해 버려야만 지금 펼쳐지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들을 피해 갈 지 자로 빠르게 수림 속을 누비던 청의 노인은 일각이 채 되기도 전에 목적한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벼랑 위에서 신형을 정지시킨 노인은 연결된 진기에 끌려 자신의 뒤에 멈춰 선 유원영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벼랑 아래의 나무를 깎아 지어진 오두막을 내려다보았다.
“내 이름은 백가량일세. 이곳 중원과는 먼 변방 출신으로 그곳 사람들은 날 두고 선약사(仙藥師)라 부르기도 한다네. 후훗! 신단(神丹)을 제조해 그 신단으로 신선이 되길 꿈꾸는 날 두고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붙인 별칭일세. 그리고 지금 저 아래 오두막에 살고 있는 아이는 다름 아닌 바로 내 아들일세. 자네가 어제 만났던 거인이 바로 단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이지……. 자네는 무극이의 나이가 몇인지 아는가?”
“…….”
답이 있을 리 없다.
아혈마저 점해진 유원영으로선 그저 눈길조차 주지 않는 백가량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이다.
백가량 역시 그의 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잠시 멈추어졌던 독백을 이어 나갔다.
“이제 겨우 열다섯이라네. 하나 자네도 보았다시피 무극이 그 아이의 얼굴은 도저히 열다섯의 어린아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지. 얼굴뿐만 아니라 그 몸도 인간이라 하기엔 너무 크지……. 후훗! 아는가? 저 아이가 그리 변한 것이 모두가 나의 어긋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네는 모르겠지, 나의 잘못을……. 난 말일세 그 아이가 누구보다도 강하고 뛰어나길 바랐네. 그래서 난 평생에 걸쳐 연구하고 그 아이가 열 살 되던 해에 완성시켰다 믿었던 선환단(仙換丹)을 무극이에게 복용시켰다네. 평범한 인간의 육체를 선골(仙骨)로 바꿔 주는 신단. 그것이 바로 선환단일세. 아니, 그것이 바로 내 평생을 바쳐 완성시킨 선환단이라 믿고 있었지. 하나……. 아니었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무극이는 일 년이 채 되기도 전 뼈마디가 평범한 사람보다 몇 배나 자라고 몸의 털이란 털은 죄다 빠져 조각 같던 얼굴마저 그리 흉측하게 변해 버렸다네.”
“…….”
노인이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 쥔다.
얼굴을 감싸 쥔 채 잠시지간 말이 없던 백가량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려는 듯 무거운 한숨과 더불어 다시금 말을 이었다.
“후우! 그 일이 있은 후 모든 게 변했네. 평소 무극이를 예뻐하던 친지들조차 그 아이를 두려워하며 피하기 일쑤였고 덕택에 활발하던 무극이는 점점 더 소심해져 결국엔 스스로를 안으로 가두기 시작했네. 난 더 이상 내 욕심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 그래서 난 내가 만든 선환단과는 반대되는 성향의 새로운 신단을 제조하기로 결정했네. 본시 약재에는 반대되는 성질의 약재가 있기 마련. 그것은 선환단에 첨가된 약재들 역시 마찬가지였네. 그 약재들을 이용해 선환단과는 극을 이루는 신단을 만들어 난 무극이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릴 생각이었지. 다행히도 평생을 떠돌며 모아온 약재들 속에서 필요한 것들을 대부분 찾을 수 있었으나 단 한 가지만은 구할 수 없었네. 그것이 바로 천일화일세. 천일화는 보통의 꽃과 달리 음과 양의 영기(靈氣)가 모이는 음양화수(陰陽和水) 속에서 자라 천 일간 그 기운을 흡수해 천 일 만에 꽃을 피운다네. 오직 천일화만이 음양화수 속의 기운을 담아낼 수 있어. 그 꽃잎을 따먹는다면 천 일 동안 몸 안의 기운이 충만해져 먹지 않아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병할 수 있네. 난 그것을 얻기 위해 머나먼 이곳 중원까지 와야만 했네. 또 내 아들 무극이도 그 아이를 두려워하는 친지들 사이에 홀로 두고 올 수 없어 데려왔다네. 하나……. 그것이 잘못된 선택임을 난 이곳 중원에 와서야 깨달았지. 두려움이 극한에 달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야……. 어떤 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쳐 그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가 하면, 어떤 자들은 공포가 극에 달해 칼을 들고 그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로 상처 입히며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아프게 만들었지. 그렇게 중원을 떠돌기를 이 년여. 이곳에서 겨우 천일화를 찾아 가져온 약재들과 함께 얼마 전에야 신단을 완성할 수 있었으나, 그 아이는 더 이상 내가 만든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았네. 이미 인간에 대한 불신이 뿌리에 박힌 그 아이가 자신을 상처 입게 만든 원흉인 내 약을 먹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르네. 내가 만든 약을 먹어 더욱더 흉한 괴물이 되느니 그 아이는 천일화만 있으면 배를 곪지 않아도 되는 이곳에서 나가지 않고 평생을 홀로 살기로 정한 걸세. 난 그런 그 아이의 마음을 돌리고자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아이는 더 이상 날 믿어 주지 않았네. 그 누구보다도 나에 대한 불신이 가장 컸던 게야. 후훗! 이제 알겠는가, 내 슬픔이 무언지.”
“…….”
긴 이야기를 끝낸 백가량이 몸을 돌린다.
그가 유원영을 바라보니 흔들리는 눈빛으로 어찌해 이 이야기를 자신에게 해 주느냐 묻고 있다.
그 물음에 백가량은 품속에서 하나의 금갑을 꺼내 드는 것으로 답해 주었다.
“난 지금부터 무극이 그 아이에게 믿음을 얻기 위해 자네를 이용할 걸세. 안타까운 일이나 나와 말도 섞지 않고, 또 나를 보려고도 하지 않는 무극이한테 자네를 데려가 조금의 믿음을 얻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난 그 아이가 보는 앞에서 이 약을 자네한테 먹일 걸세.”
“……?”
달칵 소리와 함께 금갑이 열리자 이내 형용 못할 향기와 더불어 신비로운 오색 빛을 띤 단약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바로 백가량이 말한 선환단과 반대되는 성질의 신단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던 유원영은 어제 보았던 백무극의 모습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찌해 이것을 내게 먹이느냐 묻고 싶겠지? 후훗! 이상하게도 한 번 실패를 하고 나니 내 자신을 내 스스로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네. 이것이 정말 완성이 된 건지, 정말 이 걸로 내 아들을 고칠 수 있는지 말일세. 그래서 이것을 그 아이가 보는 앞에서 자네에게 먹이려 하네. 만약 내 예상이 맞는다면 보통 사람인 자네가 이 약을 먹은 후 아무런 변화도 없어야 하네. 변화가 없다면 이 약은 완성된 것이니 그 아이 역시 날 믿을 것이고, 나 역시 내 스스로 만든 신단을 믿고 그 아이에게 먹일 수 있을 것이네. 하나 만약 하나라도 잘못되어 자네 몸에 변화가 인다면……. 난 내 아들이 당한 고통을 자네 역시 겪길 원치 않으니 그땐 내가 자네의 목숨을 끊어 주겠네. 그것이 내가 자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일세. 또한 내 슬픔을 이야기해 준 이유이기도 하지.”
“……!”
이거였던가.
긴 이야기를 꺼내 든 이유가 이제 곧 죽게 될지도 모르는 자신을 생각해서였던가. 동굴 앞에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저승길 선물로서 들려준 것이던가?
‘무섭구나.’
무서웠다.
조금 있으면 다가올지 모를 죽음 때문이 아니다.
하얀 구름 밭 두리뭉실 떠올라 무거운 발 받혀줌에, 행여나 천 길 낭떠러지 구름 아래 떨어질까 나아가는 걸음은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이곳이 어딘지, 무엇 때문에 이리 걷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구름 빛깔 옷 입은 백의 서생은 그저 걷고 또 걸으며 잃어버린 목적을 찾아 헤맬 뿐이다.
온통 하얀 구름뿐인 세상 속에서 길을 잃은 서생의 귀로 문득 한 줄기 금음(琴音)이 들려오니 목적을 찾은 서생의 눈으론 이채가 감돌며 그 육신이 금음을 좇아 움직였다.
딩…딩. 딩딩 딩……. 딩딩 딩…….
첫 음은 여운을, 두 번째 음은 빠르게 이어지나, 세 번째 음에선 다시 여운이 반복되는 금음에는 경쾌함 속에 느긋함이 감춰져 있어 듣는 유원영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
그 즐거움에 한껏 미소 지은 유원영의 걸음은 자연히 발 디딘 구름처럼 가벼워져 어느새 금음이 시작된 곳에 이르렀고, 이내 그의 눈에 세 명의 백발 노신선들이 비쳐 들었다.
“…….”
한 그루 고목 아래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는 신선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유원영의 걸음을 이끈 주인공인 금을 타던 신선은 두 눈을 감은 채 제 금음에 취해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다.
미소 띤 노신선의 옆에는 고목에 등을 기댄 또 한 명의 신선이 앉아 손에 든 백화주(百花酒)를 음미하며 연신 즐거움에 찬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신선은 경쾌한 금음과 즐거운 신선의 웃음소리에 맞춰 은빛 검광을 찬란하게 빛내며 두 눈을 황홀케 할 정도로 아름다운 검무(劍舞)를 추고 있었다.
‘어찌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검이란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상 무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한차례 내전이 일었던 중원 땅에서 태어난 유원영의 검에 대한 정의(定義)였다.
그러나 한낱 살상 무기에 지나지 않았던 검이 지금 유원영의 눈에 새롭게 비쳐 든다.
하늘하늘 흘러가는 물결처럼, 또는 너울대는 나비처럼 춤을 추는가 하면, 어떨 때는 웃고, 어떨 때는 운다.
어찌 죽은 검에서 눈물이 흐르고, 어찌 죽은 검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올 수 있겠냐만은, 지금 유원영이 느끼기에 눈앞의 검은 울기도 또 웃기도 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움직임 속에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담긴 검을 보면서 유원영은 같이 따라 웃기도, 같이 따라 울기도, 또 화마저 냈다.
팅!
“음?”
“…….”
“허허…….”
검에서 자신의 인생사를 주마등(走馬燈)처럼 떠올리면서 괴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유원영의 존재를 발견한 세 신선이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며 그를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에 당황한 유원영이 쭈뼛쭈뼛 선 채 어찌할 바를 모르다 냉큼 허리부터 조아렸다.
세 신선은 각기 표정이 달랐지만 그 입에선 한결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이놈아, 네겐 아직 이르니 썩 꺼져라!”
“……!”
유원영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긴 꿈에서 깨어났다.
난생처음 꿔 보는 희한한 꿈에 유원영은 잠시지간 멍하니 향내 가득한 동굴 안을 바라보았다.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좁은 동굴 안에는 이름 모를 온갖 약재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어 동굴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더불어 지독한 향내를 유원영에게 안겨 줬다.
말로는 표현치 못할 코를 에는 듯한 약재 냄새에 흐릿하던 정신을 차린 유원영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체 이곳은…….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알 수 없다.
분명 땅속에서 솟아난 웬 괴인의 손에 토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은 기억나나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신기한 꿈을 꾸고 눈을 떠 보니 생전 처음 보는 동굴 안이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동굴 안에서 다시금 멍한 눈빛이 되어 주변을 둘러보던 유원영의 귀로 금음이 흘러들었다.
딩……. 딩딩.
“……!”
꿈속에서 들은 것과 같은 맑고 경쾌한 금음에 두 눈 가득 이채를 띤 유원영이 곧 그 금음을 찾아 동굴 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자신이 누워 잠들었던 거적 옆으로 가지런히 놓인 검을 보고는 다시금 멈춰야만 했다.
‘훗! 아무래도 내가 부인이 들려준 세 신선 얘기와 이 금음 때문에 그런 요상한 꿈을 꾼 듯하구나.’
그저 웃고 만다.
꿈에서 보았던 엉뚱한 광경이 자신이 들은 이야기와 맞물려 생성된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웃고 마는 유원영이었다. 웃으며 검을 잡아 든 유원영은 새삼스런 눈으로 이제 자신의 것이나 아직 이름도 짓지 않은 검을 바라보았다.
어디 이름뿐이던가?
여인에게서 검을 받은 후 단 한 번도 뽑아 본 적이 없다. 지금껏 자신이 걸어온 길과는 정반대인 검을 뽑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던 유원영은 신기한 꿈을 꾼 탓인지 불현듯 검을 뽑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검병으로 다가들던 손이 멈추며 한차례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그 마음은 사라져야만 했다.
‘쓰지도 않을 검을 뽑으면 무엇하랴. 내 비록 앞으로 널 쓸 일은 없겠으나 기왕지사 내 것이 되었으니 이름이나 지어 주어야겠구나.’
잠시 고민하며 마땅한 이름을 떠올려 본다.
그러나 이렇다 할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니 유원영의 생각은 자연스레 자신이 꾼 꿈과 연결되었다.
‘그래. 구름 속의 신선이 검을 들고 춤을 추었으니 네 이름을 선운(仙雲)이라 지어야겠다. 어떠냐, 마음에 드느냐?’
답이 있을 리 없다.
선운검(仙雲劍)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검은 묵묵부답 주인의 시선에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유원영 역시 특별한 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웃으며 처음 여인이 검을 준 첫 번째 뜻대로 장식용으로 허리에 찬 채 동굴 밖을 향했다.
“…….”
동굴을 벗어난 유원영을 밝은 햇살이 먼저 반긴다.
어느새 어둠이 물러나고 찾아든 눈부신 햇살에 유원영의 눈살은 자연스레 찌푸려져 한 손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막았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을 아프게 하던 햇빛에 적응한 유원영은 곧 평소대로 돌아온 시력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
등을 돌린 채 바위 위에 앉은 청의 노인의 모습이 조금 전 꾸었던 꿈을 떠올리게 만든다. 꿈속에서 보았던 노신선처럼 길게 기른 백발이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노인이었다.
노인은 등 뒤에서 유원영의 기척이 들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무릎 위에 놓인 금(琴)을 탄주했다.
띵……. 딩…….
경쾌하게만 흐르던 음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느리게……. 조금씩 느려지는 음은 점차 우울한 기운 속에 진한 애통(哀痛)을 담고 있었다.
가슴 시리도록 슬픈 노인의 곡조에 유원영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저 귀로 흘러드는 음만을 감상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띵…….
느릿느릿 흐르던 금음이 멈춘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홀로 멈춘 거문고 소리를 대신해 동굴 앞 공터에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눈을 감은 채 그 정적을 즐기던 노인이 문득 무릎 위의 금을 풀밭에 내려놓고는 일어났다.
스윽!
몸을 일으킨 청의 노인은 이내 몸을 돌려 자신의 곡이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준 유원영을 돌아보았다.
“……?”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다.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띤 유원영이 뜻밖의 질문을 던져 돌아선 노인의 마음을 더욱더 깊은 당혹 속으로 끌어당긴다.
“어찌해 그리 슬퍼하십니까?”
“…….”
입가의 미소만큼이나 부드럽게 흘러나온 유원영의 질문에 청의 노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잠이 든 틈을 타 눈앞의 청년을 한차례 살펴봤을 때만 해도 허리에 찬 검과는 달리 무공도 익히지 않은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내였다. 산전수전 다 겪어온 이들의 노련한 눈썰미는커녕 오히려 순박한 시골 아이마냥 맑은 빛을 띤 사내가 바로 눈앞의 유원영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입에서 마치 자신의 마음속 아픔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해 오니 예상 밖의 질문에 당황한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실소를 흘려보낸다.
“후훗! 그리 보이는가?”
“아니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들렸을 뿐입니다.”
“허허, 들렸다라. 그랬던가?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내 음에 담겼던가……. 이보게 젊은이. 누구나 다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씩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네.”
“…….”
“그 슬픔을 들추어내는 것도. 들추어내지 않는 것도 모두가 다 스스로의 선택일세. 그러니 자네는 더 이상 내 슬픔을 알려고 들지 말게.”
“사과드립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주제 넘은 참견을 하고 말았습니다.”
차분한 노인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무례했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유원영이었다. 그렇기에 허리 숙여 사과의 뜻을 전하나 노인은 오히려 손사래를 치며 뜻밖의 말로 그를 당혹케 한다.
“아닐세. 사과해야 될 사람은 오히려 나일세. 한순간이지만 자네가 내게 보여 준 미소는 잠시나마 내 마음을 따듯하게 해 주었네. 그런 자네를 이용하기 위해 그 아이로부터 이리 구해 왔으니 사과는 자네가 아닌 내가 해야 하네.”
“무슨……?”
팟!
한순간이었다.
이 장여의 거리를 무릎조차 구부리지 않은 채 순식간에 좁혀 유원영 앞에 모습을 드러낸 노인이 주름진 손을 번개같이 흔들며 그의 마혈을 점한 것은. 마혈 뿐만이 아니다. 아혈마저 점해 소리조차 지를 수 없게 만든 노인이 석상(石像)처럼 굳어 든 유원영의 어깨 위로 무거운 손을 얹었다.
“미안하네, 정말……. 어제 내 모든 걸 지켜보았네. 천일화를 구하기 위해 샘에 들어갔던 그 아이를 자네가 구하려 한 것도. 그리고 그 아이에게 도적이라 오해받아 쫓기게 된 것도 내 모두 보았으나 난 자네를 도적으로서 그 아이에게 넘기려 하네. 그 방법만이 날 미워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릴 수 있을 터이니……. 다시 날 믿을 수 있도록.”
“…….”
정말로 미안해하는지 알 수 없다.
비록 어깨 위로 올려진 손은 무거운 마음을 대신하나 주름진 노안 속에는 한 가지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감에 푸른 희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서히 검은 눈동자 속으로 떠오른 푸른빛은 이내 노인의 두 눈을 새파랗게 물들자 난생처음 마혈이 짚여 당혹해하는 유원영의 육신이 허공으로 반자가량 떠올랐다.
두둥실 허공으로 떠오른 유원영은 믿지 못할 상황에 몸부림치고 싶었으나 마혈이 짚인 탓에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절정의 내가고수만이 펼칠 수 있는 경지인 허공섭물(虛空攝物)을 알 리 없었던 유원영으로선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었다.
우르릉……. 파바밧!
그러나 그의 허황된 생각에 동참할 뜻은 없었던지 청의 노인이 낮은 천둥음과 함께 공터 밖 수림 속을 향해 빛살처럼 빠르게 뛰어들었다.
“……!”
유원영은 정신이 없었다.
한순간 노인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싶은 찰나, 자신의 몸이 저절로 수림 속을 향한 것이다. 도저히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광을 접하는 순간, 지금 꿈을 꾸는 듯했다. 하나 시원스레 뺨 위로 스치는 바람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결코 꿈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허! 내가 정말 신선을 만난 것인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평범한 범인의 생활을 살아왔던 유원영으로선 노인의 존재를 신선으로 치부해 버려야만 지금 펼쳐지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들을 피해 갈 지 자로 빠르게 수림 속을 누비던 청의 노인은 일각이 채 되기도 전에 목적한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벼랑 위에서 신형을 정지시킨 노인은 연결된 진기에 끌려 자신의 뒤에 멈춰 선 유원영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벼랑 아래의 나무를 깎아 지어진 오두막을 내려다보았다.
“내 이름은 백가량일세. 이곳 중원과는 먼 변방 출신으로 그곳 사람들은 날 두고 선약사(仙藥師)라 부르기도 한다네. 후훗! 신단(神丹)을 제조해 그 신단으로 신선이 되길 꿈꾸는 날 두고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붙인 별칭일세. 그리고 지금 저 아래 오두막에 살고 있는 아이는 다름 아닌 바로 내 아들일세. 자네가 어제 만났던 거인이 바로 단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이지……. 자네는 무극이의 나이가 몇인지 아는가?”
“…….”
답이 있을 리 없다.
아혈마저 점해진 유원영으로선 그저 눈길조차 주지 않는 백가량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이다.
백가량 역시 그의 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잠시 멈추어졌던 독백을 이어 나갔다.
“이제 겨우 열다섯이라네. 하나 자네도 보았다시피 무극이 그 아이의 얼굴은 도저히 열다섯의 어린아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지. 얼굴뿐만 아니라 그 몸도 인간이라 하기엔 너무 크지……. 후훗! 아는가? 저 아이가 그리 변한 것이 모두가 나의 어긋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네는 모르겠지, 나의 잘못을……. 난 말일세 그 아이가 누구보다도 강하고 뛰어나길 바랐네. 그래서 난 평생에 걸쳐 연구하고 그 아이가 열 살 되던 해에 완성시켰다 믿었던 선환단(仙換丹)을 무극이에게 복용시켰다네. 평범한 인간의 육체를 선골(仙骨)로 바꿔 주는 신단. 그것이 바로 선환단일세. 아니, 그것이 바로 내 평생을 바쳐 완성시킨 선환단이라 믿고 있었지. 하나……. 아니었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무극이는 일 년이 채 되기도 전 뼈마디가 평범한 사람보다 몇 배나 자라고 몸의 털이란 털은 죄다 빠져 조각 같던 얼굴마저 그리 흉측하게 변해 버렸다네.”
“…….”
노인이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 쥔다.
얼굴을 감싸 쥔 채 잠시지간 말이 없던 백가량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려는 듯 무거운 한숨과 더불어 다시금 말을 이었다.
“후우! 그 일이 있은 후 모든 게 변했네. 평소 무극이를 예뻐하던 친지들조차 그 아이를 두려워하며 피하기 일쑤였고 덕택에 활발하던 무극이는 점점 더 소심해져 결국엔 스스로를 안으로 가두기 시작했네. 난 더 이상 내 욕심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 그래서 난 내가 만든 선환단과는 반대되는 성향의 새로운 신단을 제조하기로 결정했네. 본시 약재에는 반대되는 성질의 약재가 있기 마련. 그것은 선환단에 첨가된 약재들 역시 마찬가지였네. 그 약재들을 이용해 선환단과는 극을 이루는 신단을 만들어 난 무극이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릴 생각이었지. 다행히도 평생을 떠돌며 모아온 약재들 속에서 필요한 것들을 대부분 찾을 수 있었으나 단 한 가지만은 구할 수 없었네. 그것이 바로 천일화일세. 천일화는 보통의 꽃과 달리 음과 양의 영기(靈氣)가 모이는 음양화수(陰陽和水) 속에서 자라 천 일간 그 기운을 흡수해 천 일 만에 꽃을 피운다네. 오직 천일화만이 음양화수 속의 기운을 담아낼 수 있어. 그 꽃잎을 따먹는다면 천 일 동안 몸 안의 기운이 충만해져 먹지 않아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병할 수 있네. 난 그것을 얻기 위해 머나먼 이곳 중원까지 와야만 했네. 또 내 아들 무극이도 그 아이를 두려워하는 친지들 사이에 홀로 두고 올 수 없어 데려왔다네. 하나……. 그것이 잘못된 선택임을 난 이곳 중원에 와서야 깨달았지. 두려움이 극한에 달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야……. 어떤 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쳐 그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가 하면, 어떤 자들은 공포가 극에 달해 칼을 들고 그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로 상처 입히며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아프게 만들었지. 그렇게 중원을 떠돌기를 이 년여. 이곳에서 겨우 천일화를 찾아 가져온 약재들과 함께 얼마 전에야 신단을 완성할 수 있었으나, 그 아이는 더 이상 내가 만든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았네. 이미 인간에 대한 불신이 뿌리에 박힌 그 아이가 자신을 상처 입게 만든 원흉인 내 약을 먹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르네. 내가 만든 약을 먹어 더욱더 흉한 괴물이 되느니 그 아이는 천일화만 있으면 배를 곪지 않아도 되는 이곳에서 나가지 않고 평생을 홀로 살기로 정한 걸세. 난 그런 그 아이의 마음을 돌리고자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아이는 더 이상 날 믿어 주지 않았네. 그 누구보다도 나에 대한 불신이 가장 컸던 게야. 후훗! 이제 알겠는가, 내 슬픔이 무언지.”
“…….”
긴 이야기를 끝낸 백가량이 몸을 돌린다.
그가 유원영을 바라보니 흔들리는 눈빛으로 어찌해 이 이야기를 자신에게 해 주느냐 묻고 있다.
그 물음에 백가량은 품속에서 하나의 금갑을 꺼내 드는 것으로 답해 주었다.
“난 지금부터 무극이 그 아이에게 믿음을 얻기 위해 자네를 이용할 걸세. 안타까운 일이나 나와 말도 섞지 않고, 또 나를 보려고도 하지 않는 무극이한테 자네를 데려가 조금의 믿음을 얻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난 그 아이가 보는 앞에서 이 약을 자네한테 먹일 걸세.”
“……?”
달칵 소리와 함께 금갑이 열리자 이내 형용 못할 향기와 더불어 신비로운 오색 빛을 띤 단약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바로 백가량이 말한 선환단과 반대되는 성질의 신단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던 유원영은 어제 보았던 백무극의 모습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찌해 이것을 내게 먹이느냐 묻고 싶겠지? 후훗! 이상하게도 한 번 실패를 하고 나니 내 자신을 내 스스로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네. 이것이 정말 완성이 된 건지, 정말 이 걸로 내 아들을 고칠 수 있는지 말일세. 그래서 이것을 그 아이가 보는 앞에서 자네에게 먹이려 하네. 만약 내 예상이 맞는다면 보통 사람인 자네가 이 약을 먹은 후 아무런 변화도 없어야 하네. 변화가 없다면 이 약은 완성된 것이니 그 아이 역시 날 믿을 것이고, 나 역시 내 스스로 만든 신단을 믿고 그 아이에게 먹일 수 있을 것이네. 하나 만약 하나라도 잘못되어 자네 몸에 변화가 인다면……. 난 내 아들이 당한 고통을 자네 역시 겪길 원치 않으니 그땐 내가 자네의 목숨을 끊어 주겠네. 그것이 내가 자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일세. 또한 내 슬픔을 이야기해 준 이유이기도 하지.”
“……!”
이거였던가.
긴 이야기를 꺼내 든 이유가 이제 곧 죽게 될지도 모르는 자신을 생각해서였던가. 동굴 앞에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저승길 선물로서 들려준 것이던가?
‘무섭구나.’
무서웠다.
조금 있으면 다가올지 모를 죽음 때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