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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겉의 중후한 인상과 입가에 띤 훈훈한 미소와 달리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채 자신을 이용하고 실패했을 시엔 아무 거리낌 없이 죽이겠다 말하는 백가량의 마음이 무서운 것이다. 아무리 아들을 위한다지만 아무 거리낌 없이 다른 이의 생명을 이용하려는 백가량의 모습에서 새삼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느끼는 유원영이었다. 정녕 아들을 위했다면 백무극 앞에서 자신이 완성된 신단을 먹어 믿음을 얻었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백가량은 믿음을 얻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하기보다 제 삼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자신과 아들의 생명만큼이나 다른 이의 생명 역시 귀함을 알지 못한 채…….
그 점이 분하고 화가 났던 유원영이 백가량을 노려보나 백가량은 그저 웃으며 몸을 돌린다. 몸을 돌린 채 벼랑 아래를 내려다본 백가량의 귀로 뜻하지 않게 오두막에서 새어 나온 한 소녀의 외침이 흘러들었다.
“난 가겠어요!”
굵직한 고목을 베어 만든 오두막을 외마디 외침과 함께 뛰쳐나온 소녀는 하얀 볼을 붉게 상기시키며 몹시도 화가 나 있었다.
소녀의 뒤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거인 백무극이 서서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초조가 깃든 그의 손짓과는 상관없이 이미 화가 날대로 난 소녀 주지약은 성큼성큼 벼랑 앞 수림을 향해 걸어갔다.
쿵쿵!
“안 돼! 못 가! 절대 갈 수 없어!”
“……?”
두 번의 발짓으로 어렵지 않게 주지약의 앞을 막아선 백무극이 양팔을 벌리며 소리친다.
고개를 흔들며 절대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그의 말과 행동에 두 눈 가득 힘을 준 주지약이 그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비켜요!”
“못 비켜!”
“정말 안 비킬 건가요?”
“그래, 죽어도 못 비켜! 이대로 가면 넌 다시는 날 보러 오지 않을 거잖아!”
어딘지 모르게 필사적이다.
소녀가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백무극은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주지약이 결국 스스로 방향을 틀어 옆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 앞을 또다시 백무극이 막아섰다.
“왜 자꾸 가려 하지?”
“그건 나보다 백 오빠가 더 잘 알잖아요?”
호칭이 바뀌어 있다.
어제와는 달리 주지약의 입에선 자연스레 오빠란 호칭이 흘러나오고 백무극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흔든다.
“아니, 난 모르겠어! 난 네가 어째서 그자를 비호하고 오히려 널 보호해 주려는 나에게 화를 내는지 난 정말 모르겠어!”
“날 속였잖아요!”
“뭐?”
“처음에 나한테 뭐라 했나요? 내가 아저씨를 찾고 있다니까, 오빠는 아저씨를 안다고 그랬잖아요! 이 숲에서 아저씨를 만나 하룻밤 오두막에서 재워 주기로 약조했다면서요? 그리고 날 찾으러 간 아저씨와 길이 엇갈렸을 테니 오빠 집에서 기다리면 아저씨가 찾아올 거라면서요? 제게 분명히 그리 말해 놓고선 하루가 지나도록 아저씨는 오지 않았잖아요!”
“…….”
반박할 수가 없다.
흥분이 고조된 소나기 같은 주지약의 말은 한 점 틀린 곳이 없어 백무극은 일시지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젯밤 유원영의 생김생김을 설명하는 주지약의 말을 통해 그녀가 찾고 있는 이가 바로 자신의 천일화를 훔치려던 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백무극은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보다는 거짓을 꾸며 그녀를 자신의 거처인 오두막으로 유인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따라 오두막으로 들어선 주지약은 둘만의 대화 속에 점차 밤이 깊어짐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지 않자 불안감이 일어 다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 그녀를 억지로 막아선 백무극은 오두막에 산재된 약초 중 수면향(睡眠香)을 이용해 잠재웠다.
그러나 깨어난 뒤로는 자신이 차려 준 아침상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유원영부터 찾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난 백무극은 그가 바로 자신의 천일화를 훔치려던 도적임을 밝혀 이곳을 떠나려는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주지약이 이리 화나게 만들 줄은 알지 못했다.
“난 도저히 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왜 그깟 도적놈 곁에 가겠다는 거야? 그놈은 필시 널 이용하려고 네 곁에 있을 뿐이야! 언젠가 내게 상처를 입혔던 놈들처럼 그놈 역시 널 상처 입히고 해하려 할 게 틀림없다고!”
우두둑!
백무극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중원을 여행하며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이 되살아난 백무극이 진심으로 화가 나 대지를 내려쳤다.
쾅!
소리와 더불어 움푹 파여 들어간 땅의 모습이 두려움을 안겨 줄만 하건만 주지약의 두 눈 속엔 두려움보다는 안쓰러운 빛이 일었다.
“불쌍하군요……. 어찌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다고만 보나요? 오빠를 상처 입힌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 전부가 아님을 왜 알지 못하나요?”
알고 있다.
백무극의 아픔이 무언지 주지약 또한 알고 있다. 그 아픔을 알기에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모두 적으로 대하려고만 하는 백무극의 모습에 안타까움이 인다.
“아니, 똑같아! 오직 너뿐이야! 똑같지 않은 것은 너 하나뿐이라고! 너 하나만이 날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너 하나만이 날 보고도 도망치지 않았어! 오직 너 하나만이 날 보고도 욕하지 않고 날 보고도 죽이려 들지 않았단 말이야! 너 하나만이……. 그렇기에 난 널 보낼 수 없어! 넌 나와 이곳에서 평생 같이 살아야 한다고!”
“…….”
떼쓰는 아이와도 같았다. 한 번 손에 쥔 사탕을 빼앗기지 않으려 울며 떼쓰는 아이와도 같은 행동 속에서 주지약은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언지를 짐작해 본다.
아마도 그것은 친구이리라.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
그러나 그 바람을 주지약은 들어줄 수 없었다. 그의 바람대로 이곳에서 백무극과 평생을 함께하기엔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난…….”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의 뜻을 거절치 말라 말하고 있다.
처음으로 겉이 아닌 속을 먼저 보고 다가와 준 그녀만은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곁을 떠나지 말라 말한다.
간절함이 깃든 그의 애절한 눈빛에 주지약은 차마 마지막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잠시 여운을 가졌다. 그러나 그 여운이 길면 길수록 오히려 더 그를 상처 입힐 것이란 생각에 주지약은 다시금 닫혔던 말문을 열었다.
“난…….”
우르릉!
한순간이었다.
주지약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그녀의 머리 위에서 천둥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맑은 하늘 위로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에 놀란 주지약이 황급히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흉포한 빛을 발하고 있는 푸른 뇌전의 기운이 비쳐 들었다.
“어린 것이 감히 내 아들을 상처 입히려 하다니 죽여 버리겠다!”
“……!”
진노한 사내의 외마디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푸른빛이 시야를 가린다.
아들을 상처 입히려는 주지약을 일 장에 쳐 죽이고자 벼랑에서 떨어져 내린 백가량의 장세에 주지약은 그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장력이 닿은 것도 아니건만 거대한 암경에 육신이 짓눌려 피하려는 움직임조차 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백무극은 양강(陽剛)의 성질을 띤 뇌전장(雷電掌)으로부터 주지약을 보호코자 뛰어드나 그 움직임은 일 장 높이의 허공에서 내쏘아진 장력에 비해 뒤질 수밖에 없었다.
“안 돼에에!”
“……!”
결국 한발 늦은 백무극의 입에선 비명만이 터져 나온다.
그 비명소리에 주지약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했다.
동그란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안타까움에 울부짖는 백무극이 보였고, 곧 그의 등을 발판 삼아 차올라 순식간에 자신의 머리 위 푸른빛 무리 속으로 뛰어든 붉은 그림자가 비쳐 들었다.
쾅!
모든 것이 찰나지간에 펼쳐진 일이다.
겨우 촌각의 시간을 이용해 섬전처럼 수림을 가로질러 백무극의 등을 밟고 날아오른 붉은 그림자는 주지약과 장세 사이로 뛰어든다 싶은 순간 몸을 반 회전시키며 그대로 우각(右脚)을 내질러 덮쳐드는 장력을 걷어차 올렸다.
한 줄기 폭음과 함께 섬풍퇴(閃風腿)를 펼쳐 뇌전장을 막아 낸 적포 여인은 순간 숨을 한 번 들이켜 떨어지던 속도를 줄임과 동시에 양손을 내뻗어 주지약의 두 어깨를 부여잡았다.
팟!
적포 여인의 몸과 주지약의 몸이 정확히 수직선을 그린다.
주지약은 기이하게도 어깨에 조금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자 두 눈 가득 이채를 머금으며 자신을 구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
얼굴이 없다.
아니, 분명 얼굴이 있으나 붉은 가면에 가려져 있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 긴 머리칼 사이로 기괴한 가면을 드러낸 여인은 주지약과 시선이 마주치자 유일하게 뚫린 눈구멍 사이로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저…….”
장난스런 여인의 눈짓에 주지약이 무언가 말을 전하려 했다.
하나 적포 여인은 두 팔을 구부린다 싶은 순간 잡았던 어깨를 가볍게 튕기듯 놓으며 다시금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조급한 성정을 보여 주듯 주지약을 무시한 채 그대로 허공으로 솟아오른 여인은 이내 공중에서 신형을 한 번 뒤집어 몸을 바로 하며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장과 각의 충돌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땅 위로 내려선 백가량의 모습이 보였다.
예상치 못한 방해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백가량은 두 눈 가득 살기를 담은 채 노려보고 있었다. 중후한 인상과 다른 섬뜩한 시선에 적포 여인은 가면 속으로 한 줄기 냉소를 머금었다.
“흥!”
짤막한 코웃음과 더불어 여인의 육신이 급속한 회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두 손은 뒷짐을 진 채 회오리가 몰아치듯 쉼 없이 돌기 시작한 여인의 육신이 그대로 백가량을 노리고 발부터 떨어져 내렸다.
돌아가는 육신과 더불어 쉼 없이 변화하는 그녀의 각법(脚法)에 백가량의 두 눈에 놀람의 빛이 일었다.
“선풍마룡각(旋風魔龍脚)? 네년이 어찌 그분의……!”
미처 말이 끝나기 전에 백가량은 우측 옆구리에서 인 한 줄기 암경을 감지했다.
여인에게 온통 신경이 가 있던 백가량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주저 없이 우장(右掌)을 내질러 덮쳐드는 암경을 막았다.
쾅!
또다시 터져 나온 폭음과 동시에 적포 여인과 마찬가지로 흑색 가면을 쓴 흑포 사내가 백가량의 눈 속으로 비쳐 든다.
돌보다도 단단한 굳은살이 박인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모습을 드러낸 흑포 사내는 백가량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자 성이 난 듯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연달아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풍룡권(風龍拳)! 도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네놈들이 어찌 그분의 무공을? 설마?”
윙윙!
귓전을 울리는 바람 소리와 더불어 폭풍처럼 몰아치는 흑포 사내의 권공(拳攻)을 우장을 이용해 막아 내며 뒤이어 덮쳐든 여인의 각공(脚攻)을 좌장을 이용해 정신없이 막아내야 했던 백가량의 입에선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지금 그를 공격하고 있는 두 남녀의 무공이 누구의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백가량으로선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백가량이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자 하늘과 대지에서 정신없이 몰아치던 두 남녀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공격을 멈추며 뒤로 물러섰다.
탁!
“…….”
“…….”
짧은 소성과 함께 흑포 사내의 옆으로 내려선 여인이 당황하고 있는 백가량을 지그시 노려본다.
아무 말없이 꽂혀 드는 그들의 시선에 무언가를 느낀 백가량은 황급히 시선을 돌려 그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
그렇게 정신없이 누군가를 찾아 고개를 돌리던 백가량의 움직임이 문득 멈추며 그대로 몸이 굳어 들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자신이 서 있던 곳, 오두막 앞의 공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벼랑 위로 시선을 고정시켰을 때, 유원영 옆에 도도히 선 채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오만한 미소를 그린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三章. 동악사(童嶽士)


그 언젠가 무림에 이런 화두가 떠오른 적이 있다.
남신(南神)과 북천(北天), 서악(西惡)과 동검(東劍)이 싸운다면 과연 누가 가장 강할 것인가를 두고 시작된 이야기는 전 무림을 떠돌았으나 그것에 대한 마땅한 답을 내놓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남신인 하남 소림사(少林寺)의 신승(神僧) 정각과 북천인 산서 천약궁(天略宮)의 천마(天魔) 서진. 그리고 서악인 서장 사천곡(死天谷)의 악선(惡善) 동악사와 동검인 산동 제갈세가(諸葛世家)의 검제(劍帝) 제갈창웅은 세외와 중원 무림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단 한 번도 대결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이야기 속에 엉뚱하게도 새로운 화두가 떠오르니 그것은 과연 누구의 성정이 무공만큼이나 가장 괴팍하냐는 것이었다.
우습게도 그 결론은 너무나도 쉽게 내려졌다. 사천곡의 곡주인 악선 동악사가 바로 누구나가 인정하는 괴인이었던 것이다.
본시 사천곡은 중원 무림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마두들이 목숨을 보존코자 먼 청해를 지나 서장 운해(雲海)로 입주하면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긴긴 세월 사파(邪派)는 물론이요 정파(正派)에서조차 죄를 지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사천곡은 비록 다양한 문파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는 하나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죽음으로조차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악인(惡人)이란 점이었다. 그 하나의 공통점이 자신들을 죽이러 찾아올지 모르는 이들로부터 목숨을 지키고자 결속케 만들었다. 또한 흐르는 세월 속에 다양한 무공들이 하나로 뭉쳐져 오늘날에 와서는 사천곡이야말로 서장(西藏)의 주인인 포달랍궁(布達拉宮)조차 위협하는 세외무림(世外武林)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라 있었다.
그곳의 열 번째 곡주직을 계승한 악선 동악사는 별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善)과 악(惡)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 때는 그 어떤 마두(魔頭)들보다 잔혹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성인군자(聖人君子)처럼 정의롭고 자비로운 인물이 바로 동악사였던 것이다. 기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의 종잡을 수 없는 성정에 사천곡의 악귀들은 물론이요 그의 제자들조차 두려워하며 스승인 동악사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그것은 본시 사천곡 출신이었던 백가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소신 백가량이 곡주(谷主)님을 뵈옵니다!”
벼랑 위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싶은 순간, 백가량이 털썩 무릎을 꿇는다.
지금의 심정을 대변하듯 덜덜 떨리는 두 팔을 이용해 힘겹게 대지를 짚은 백가량이 중죄인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저 심판관의 처벌만을 기다리고 있는 죄인이 된 백가량의 모습에선 조금 전의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처량하게만 보이는 그의 모습에 적과 흑의 괴인이 소리 죽여 웃음을 흘렸고, 백무극은 아비의 처지는 생각지도 않은 채 그저 주지약의 안위를 살필 뿐이다.
주지약의 눈길은 백가량을 고개 숙이게 만든 사내를 향했다.
제일 먼저 긴 흑발을 머리 위에서 틀어 묶은 푸른 색 영웅건이 눈에 띈다. 단 한 올의 머리칼도 흘러내리지 않은 중년 사내의 반듯한 이마 아래론 엷은 눈썹과 함께 잔주름이 인 두 눈이 서늘한 한광(寒光)을 발했다.
그를 관찰하던 주지약은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금세 호기심이 되살아나 다시금 사내를 살펴보았다.
코 아래부터 자라난 검은 수염이 턱 밑까지 가지런히 정돈돼 있어 맑은 빛을 띤 비단 청포와 더불어 사내의 전체적 인상을 깔끔하게 만들었다. 한기가 밴 안광을 뺀다면 청수한 인상과 함께 손에 쥔 흑선(黑扇)에 이르기까지 그저 세상 구경을 위해 유람 나온 중년의 한량처럼 보인다.
그러나 백가량이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으니 중년 사내가 결코 평범한 존재가 아님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
문득 호기심에 중년 사내를 살피던 주지약의 시선이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그 옆에 선 또 다른 사내에게로 이동했다. 꿔다 놓은 보리 자루마냥 멀뚱히 선 채 쓴웃음이 가득 담긴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선 사내와 시선이 마주친 주지약의 눈 속으론 한 줄기 기광이 일었다.
“아저씨? 아저씨!”
진작 주지약을 발견한 유원영과 달리 지금에서야 그를 알아본 주지약이 반가움에 찬 환한 미소를 그리며 소리쳤다. 비록 떨어진 시간은 하루에 불과했으나 시간에 비해 반가움이 더 컸다.
주지약이 참지 못하고 소리치며 그가 선 벼랑 아래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린 백무극 역시 유원영을 발견하고는 장내가 떠나가라 커다란 소리를 내질렀다.
“도적놈!”

“…….”
하나는 반가움에 달려오고 하나는 죽일 듯 노려보며 벼랑 위를 향해 달려온다. 크고 작은 정반대의 체구도 우스꽝스럽건만 그 행동도 정반대였다.
삼 년 전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사천곡을 떠났던 백가량을 찾아온 동악사는 처음으로 옆에 선 유원영에게 눈길을 주었다.
“네놈은 대체 어느 쪽이냐? 널 찾는 저 간 큰 꼬마 계집의 반가운 사람이더냐, 아니면 널 죽이려는 저 우둔한 놈의 말대로 도적이더냐?”
“…….”
아혈이 점해진 유원영이 답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중년 사내는 백가량이 벼랑 아래로 뛰어내린 지 얼마 안 돼 자신의 옆으로 자연스레 다가와 있었다.
유원영은 말로 대답할 수 없자 그저 눈알을 좌우로 흔들어 도적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외칠 뿐이다.
그러나 그의 속사정을 알 리 없었던 동악사는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눈알만 굴리는 유원영의 모습에 화가 나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 보게나!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내 말을 무시해? 네놈은 정녕 내가 악선 동악사임을 알고도 내 말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이냐?”
“…….”
무시하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무시하는 게 아니라 답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날카로운 동악사의 시선에 억울함을 느껴 골백 번도 더 대답하고 싶었던 유원영이었으나 마음과는 달리 입은 열리지 않은 채 굳은 침묵을 지켰다.
단숨에 그를 쳐 죽일 듯 노려보던 동악사가 느닷없이 즐거움에 찬 대소를 터뜨렸다.
“껄껄! 좋아, 좋아! 젊은 친구가 기개가 있어! 내가 동악사임을 알고도 잘못했다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목숨을 걸고 여전히 내 말을 무시하다니! 만약 내 신분을 알고 자네가 머리를 조아렸다면 내 그 머리통을 단숨에 으깨려 했다네. 하나 자네는 내가 누군지를 알고도 이리 한결같으니 날 보자마자 머리를 땅에 박은 어떤 늙은이와는 너무 다른 아우의 배짱에 내 마음이 다 흡족해지는군.”
“…….”
‘내가 어째서 당신 아우란 말이오?’
놈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어느새 아우란 호칭으로 바뀌어 있다.
순식간에 마음대로 유원영을 아우로 칭한 동악사는 여전히 말이 없는 그와 어느새 벼랑 위로 다가와 선 채 고래고래 소리치는 백무극을 번갈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보게 아우. 내 자네의 배짱과 기개를 보고 나니 저기 저 우둔한 놈이 자네를 보며 자꾸 도적이라 소리치는 것이 귀에 거슬리는군. 어디 감히 좀스런 도적놈과 날 보고도 굴하지 않는 기개를 가진 내 아우를 비교한단 말인가? 눈이 있음에도 사람을 볼 줄 모르는 저 썩은 눈을 내 당장 뽑아 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수모를 당한 것은 내가 아니고 아우이니 아우가 직접 내려가 저놈의 눈을 그 검으로 베어 버리게.”
“……!”
탁!
일말의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