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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매화 문양이 선명히 새겨진 검을 흑선으로 가리키며 미소 지은 동악사는 처음부터 유원영의 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듯 가볍게 그의 등을 쳤다.
순간 등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벼랑 끝 허공으로 붕 떠오른 유원영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처한 유원영의 눈 속으로 자신을 사지(死地)로 내몬 동악사에 대한 원망이 일었다.
‘당신은 날 아우라 칭하더니 어찌 날 사지로 내몰 수 있단 말이오?’
소리치고 싶었다. 벼랑 위에 선 동악사를 향해 한껏 소리쳐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싶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았던 유원영으로선 지금의 분한 마음을 모두 입 밖으로 토해내 동악사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나 그 마음과는 달리 입은 굳게 다물어진 채 열릴 줄을 몰랐다.
“…….”
자물쇠가 채워진 입을 대신해 두 눈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떠진 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유원영의 시선 속으로 놀란 토끼눈이 된 주지약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게 된 유원영은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내 결국 이리 가고 마는구나. 네 모친과의 약조조차 지키지 못한 채 이리 가는 날 용서해 다오.’
불쌍한 아이다.
그러나 모친을 잃은 처지를 불쌍하다 생각지 않고 언제나 당당한 모습만을 보여 준 기특한 아이였다. 또 또래의 아이들과 달리 성숙한 내면으로 실의에 빠졌던 자신에게 힘을 준 고마운 아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도움을 주었던 건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첫 만남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낙방의 아픔에 괴로워하던 자신의 마음을 알게 모르게 위로해 주었음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이 더욱더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문득 앞으로 혼자 천음산까지 가야 할 주지약에 대한 걱정이 일었다. 그러자 마음속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기에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친과 한 약속만이라도 지켜 주고 싶었던 유원영은 빠르게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 고개를 돌려 살 방법을 찾았다. 곧 그의 두 눈 속으로 자신의 죽음을 환영하듯 웃고 있는 백무극의 얼굴이 비쳐 들었다.
“……!”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자신이 만나본 백무극은 쉽게 흥분하는 다혈질이다. 게다가 그가 겪은 아픔이 무엇인지 백가량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유원영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열리지 않는 입술을 이용해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피식.
“……?”
명백한 비웃음이다.
유원영의 시선은 주지약 옆에서 웃고 있는 백무극과 정확히 맞춘 채 묘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예상대로 그의 비웃음에 백무극의 두 눈에선 새파란 한광이 터져 나왔다.
“개자식! 네가 감히 날 비웃어!”
파앗!
분노에 찬 외침과 동시에 유원영이 떨어지고 있는 낙하지점 위로 태산 같은 신형을 드러낸 백무극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자신의 예상대로 달려든 백무극의 거대한 육신을 바라보며 유원영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던 것이다. 과연 사람에게 상처 입은 백무극이 또 하나의 상처를 추가한 자신을 이대로 저 큰 손으로 쳐 죽일 것인지, 아니면 더 큰 고통 속에서 죽이고자 자신을 살릴 것인지 알 수 없는 위험한 도박에 목숨을 건 것이다.
유원영의 심중을 알 리 없었던 백무극은 하늘을 향해 양손을 들어 올려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유원영의 육신을 품에 안듯 감싸 쥐었다.
팟!
“컥!”
유원영은 가슴의 충격은 둘째 치고 고개가 꺾이며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유원영의 육신을 잡음과 동시에 한 번 놓쳤다가 반사적으로 팔을 구부려 그의 몸을 가슴으로 안으며 머리를 감싸 쥔 덕에 고개가 완전히 뒤로 꺾이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비록 백무극의 가슴으로 안겨 들어 목숨은 건졌다 하나 속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은 어쩔 수 없었던 듯 유원영의 입에선 고통에 찬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
주지약은 뜻하지 않은 백무극의 행동에 의해 유원영이 목숨을 건진 것이 기뻤다. 하지만 유원영의 악다문 입 사이로 새어 나온 신음성이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걱정이 물밀듯 밀려온 주지약은 백무극의 다리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괜찮아요? 백 오빠, 어서 아저씨를 내려 줘요. 어서요!”
주지약은 솜털 같은 두 주먹을 이용해 바위같이 단단한 백무극의 다리를 두들기며 간절히 외쳤다.
“이놈을 내려 달라고? 내 천일화를 훔치려던 도적놈을? 웃기지 마! 이놈은 내 천일화를 훔치려 했을 뿐만 아니라 날 비웃었다고! 이 나를 비웃었단 말이야! 내 이놈의 사지를 죄다 뽑아서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고 말겠어! 나 백무극을 비웃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단 말이다!”
우두둑!
“크윽!”
산 넘어 산이라 했던가?
주지약의 행동에 분노가 배가 된 백무극이 유원영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뼈마디가 부서져 나가는 기음과 더불어 간신히 구제한 목숨을 다시금 잃게 생긴 유원영의 입에선 고통에 찬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절규를 터뜨리고 싶으나 입이 열리지 않아 단지 신음만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 유원영의 모습에 주지약의 눈에 다급함이 일었고 눈가에는 눈물마저 맺혔다.
백무극은 그녀가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유원영에 대한 묘한 질투심만이 배가되었다.
“이놈이 그렇게 소중하단 말이지? 나보다도 더!”
“……!”
마음속 가득 차오르는 질시를 이기지 못한 백무극이 마침내 왼손을 움직여 움켜쥔 유원영의 한 팔을 뜯어내고자 한다.
그때 표표히 청의 자락을 휘날리며 떨어져 내린 동악사가 손에 쥔 섭선을 이용해 가벼이 백무극의 오른쪽 팔꿈치를 쳤다.
탁!
“크아아악!”
힘없이 유원영의 육신을 놓은 백무극이 오른팔을 움켜쥔 채 괴성을 내지르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한다.
쿵쿵!
“무극아아!”
대지를 울리며 물러나는 백무극의 비명성에 고개를 번쩍 치켜든 백가량이 안타까운 외침과 더불어 아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한편, 귀찮은 듯한 얼굴로 떨어져 내리는 유원영의 육신을 안아 풀밭 위에 세운 동악사는 질타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이보게 아우. 어찌해 자네는 신법을 펼치지 않았는가? 까딱하면 저 우둔한 놈의 손에 자네가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분명 자네 허리에 찬 검은 화산파(華山派)의 검이거늘, 어찌해 신법(身法)을 펼쳐 저놈의 손을 피하지 않고 어찌해 검을 빼 들어 저놈의 눈을 베지 않았던가? 자네 설마 오악검파라 칭하는 화산파에서 경신술(輕身術)은커녕 검술(劍術)조차 배우지 못한 겐가?”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는 화산파의 문도가 아니란 말예요! 이 검은 우리 엄마 건데 고마움의 표시로 전해 준 것뿐이라구요!”
“뭐라?”
강호에서 매화 문양이 새겨진 검은 곧 화산의 문도임을 뜻한다.
그렇기에 동악사는 유원영이 당연히 신법은 물론이요, 검술 역시 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그를 벼랑 아래로 밀었다. 하나 말을 할 수 없는 그를 대신해 유원영 곁으로 다가온 주지약의 외침을 듣고 있노라니 자신이 크나 큰 오해를 했음을 그제야 알았다.
“지금 이 꼬마 계집의 말이 정녕 사실인가? 무어라 말 좀 해 보게. 어찌 답이 없나? 허허, 언제까지고 그리 입만 다물고 있을 겐가? 자네 정말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겐가! 허허…….”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한결같은 기개를 가진 사내라지만 말이 필요할 때에도 굳게 입을 다문 채 답을 하지 않는다.
괜찮냐고 연신 물어오는 어린 계집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는 유원영의 기괴한 태도에 마침내 기분이 상한 동악사는 성을 내기 시작했다.
“자네 정말 이럴 겐가? 이 형이 이리 묻고 있음에도 그놈의 고집 때문에 그리 입을 다물고 답을 하지 않겠단 겐가?”
“곡주님, 그자는 답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라 답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인내심이 점차 한계에 다다르던 동악사의 귀로 억눌린 분노가 담긴 백가량의 말이 흘러들었다.
그 말에 동악사가 휙 고개를 돌려 백가량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진기(眞氣)에 의해 서서히 전신이 마비되고 있는 거인의 곁에 선 백가량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부연 설명을 했다.
“그자는 제게 아혈과 마혈이 짚여 몸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럼 지금 내 아우가 배짱 있는 척 날 속였다는 것이냐? 백가량! 바른대로 말해라! 대체 내 아우와는 무슨 사이인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말하란 말이다!”
“그…… 그것이.”
서릿발 같은 호통에 금세 주눅이 든 백가량은 아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동악사에 대한 분노도 잊은 채 모든 것을 고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까지 모든 것을 토한 백가량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규칙을 어기고 마음대로 곡을 빠져나온 것은 아들을 생각하는 부정이라 호소하며 은근슬쩍 동악사의 동정을 받길 원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의 칠칠치 못한 부정따윈 관심도 없었던 동악사가 새파란 빛을 머금으며 죽일 듯이 유원영을 노려보았다.
“네 이놈! 감히 네놈이 나 악선을 속여 내 동생이 되려 해? 그러고도 네놈이 살아남길 원했단 말이냐?”
“대체 무슨 소리예요? 언제 아저씨가 당신을 속였단 말인가요? 아저씨는 단지 말을 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했을 뿐인데, 당신 마음대로 오해하고 아저씨를 동생 삼은 것이 아닌가요?”
억지다.
지금 동악사의 말은 분명한 억지이기에 주지약이 유원영을 대신해 그의 마음속 말을 토해 냈다.
“흥!”
막상 대꾸할 말이 없었던 동악사가 한차례 코웃음과 더불어 다시금 백가량을 바라보았다.
“백가량! 네 아들놈을 망친 그 신단인지 뭔지를 이놈에게 처넣으려 했다 했느냐? 좋다! 내 허락할 테니 지금 당장 이놈에게 그것을 먹이거라! 크크! 내 직접 보겠노라. 날 속인 놈이 어찌 변하는지를!”
“고…… 곡주님?”
“……!”
장내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말이다.
자신이 속았단 억지에 사로잡힌 동악사의 황당한 명에 고통스러워하던 백무극과 그런 아들을 살피던 백가량은 기뻐 환한 미소를 보였다. 백무극으로선 눈에 가시 같던 유원영이 아비의 약을 먹고 자신처럼 괴물로 변한단 생각에 웃음을 흘리고, 백가량은 새로 만든 약을 실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금갑을 꺼내 들었다.
한편 눈앞의 사태를 관망하며 즐기는 입장인 적흑의 두 괴인과 달리, 주지약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해 심통스런 눈빛의 동악사를 마주했다.
‘이자가 어머니께 들은 악선, 그자라면 단순한 말로는 그의 억지를 꺾을 수 없어!’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동악사로부터 유원영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른 주지약은 대뜸 입을 열어 말했다.
“실망했어요!”
“뭐라?”
이건 또 뭔 말인가?
도끼눈을 한 솜털만 한 꼬마 계집의 난데없는 말에 동악사가 주지약을 노려보았다. 가늘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 사이로 빛나는 차디찬 한광은 어린 주지약이 견디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동악사를 노려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생각해 두었던 말들을 내뱉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악선의 악(惡)은 악할 악자가 아닌 큰 산을 뜻하는 악(岳)이라 하셨어요. 큰 산만큼 선한 마음이 가득한 분이 바로 악선이며 성인군자(聖人君子)와도 같은 인품을 가지신 그분을 두고 중원 무인들이 질투해서 악할 악 자로 고친 거라구요!”
“악할 악이 아닌 큰 산 악이라……. 껄껄! 네 말이 옳구나! 암 옳고말고! 네 모친이 날 정말 제대로 보았어!”
“…….”
‘꼬마 계집이 수를 쓰는구나.’
멀리서 두 남녀를 지켜보고 있던 백가량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간다.
제대로 보았을 리가 만무하다.
눈에 똥칠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저 괴팍한 인물을 두고 성인군자라 칭송할 수 있단 말인가? 동악사의 심성 자체가 처음부터 뒤틀려 있음은 온 천하가 아는 일이었다.
백가량은 주지약이 뭔가를 노리고 동악사를 상대로 사기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동악사가 너무 기분 좋게 웃어 대니 자칫 토를 달았다가 개죽음당할 수 있기에 백가량으로선 그저 속으로 끙끙거릴 뿐이었다.
‘대체 저 계집이 뭔 수작을 부리려고……. 흥! 하긴 무슨 수작을 부리든 소용없겠지만. 여우 중의 여우인 동악사가 네년의 세 치 혀에 놀아날 정도로 단순한 바보라 생각했다면 그건 네년의 오판이다.’
누구보다 동악사를 잘 알고 있다 생각하던 백가량이다. 그렇기에 그는 꼬마 여우의 얕은꾀에 휘말려 아들의 일이 잘못될까 걱정되던 마음을 접으며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사태를 관망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동악사는 중원에 나와 처음 듣는 성인군자란 말에 기분 좋게 웃어 대다 문득 든 생각에 웃음을 멈추며 흐뭇한 눈길로 주지약을 바라보았다.
“꼬마야. 내가 바로 네 모친이 말한 성인군자인 악선 동악사이다. 네 모친의 말대로 중원의 버러지들이 날 못마땅하게 여겨 내 별호 앞 글자를 악할 악으로 바꾸어 놓았지. 헌데 넌 어찌 네 모친이 동경하던 성인군자인 날 만나고도 실망이란 표현을 썼느냐?”
“어머니께 듣기로 성인군자란 학식이 높아 지혜가 매우 뛰어남은 물론이요, 행실이 점잖고 어질며 덕이 있어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본받을 수 있는 분을 칭한다 들었어요. 하지만 동악사께선 스스로를 성인군자라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은 온통 거짓에 싸여 있으니 어찌 제가 실망하지 않을 수 있나요?”
“거짓이라니?”
“아저씨를 동생이라 불렀잖아요!”
“그……그야 물론 그랬지.”
“그럼 아저씨를 동생이라 칭하였으면서 어찌 형된 입장으로 동생에게 해가 될 지도 모를 약을 먹일 수 있단 말인가요? 이는 곧 자신이 내뱉은 동생이란 말을 스스로 인정치 않은 것이니 그것이 바로 거짓 아닌가요?”
“끙…….”
청산유수(靑山流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진 주지약의 야무진 질책에 동악사는 곤혹스런 표정 뒤로 한 줄기 흥미를 담아 눈앞의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인물이로구나 인물이야. 끄끄! 나 동악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도 놀라운 일이거늘 단지 세 치 혀만으로 날 궁지로 몰아넣다니. 후훗! 어린 것의 담력과 총기가 내 쓰레기 같은 제자 놈들보다 낫구나.’
즐기고 있다.
비록 얼굴 표정은 곤란해하나 그것은 단지 동악사의 연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겉모습과 달리 이미 나이가 오십 줄을 바라보고 있었던 동악사는 백가량이 짐작한 대로 처음부터 주지약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에 동조해 준 것은 과연 그녀가 어떤 말로 자신에게서 저 속 빈 강정 같은 놈을 구할지 궁금해서였다.
‘흥! 꼬마 계집이 날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드는군. 성인군자란 말로 날 구속하고 동생이라 칭한 저놈에게 해가 될 짓을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렷다. 하나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저놈을 이대로 살려 둬서 내 동생이라고 사방팔방 떠들게 만든다면 그거야말로 내 이름에 먹칠하는 꼴이니 그렇겐 못하지.’
자신이 누구이던가? 중원 무림은 물론이요 변방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인 악선이었다. 그런 자신의 의제가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이라면 천하가 비웃을 일이리라. 기분 내키는 대로 무공도 모르는 유원영을 동생 삼았던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던 동악사로선 지금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유원영을 죽이자니 내뱉은 말이 있어 차마 그러지는 못하던 찰나에 백가량의 말을 듣고는 그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본시 백가량은 중원에서 마의(魔醫)라 불리던 인물로, 살아 있는 육신을 이용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실험을 행하다 무림 공적으로까지 몰려 사천곡으로 숨어든 인물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침술에서는 천하이대의원(天下二大醫院)이라 칭해지는 의선(醫仙) 모용학과 괴의(怪醫) 소중동에겐 미치지 못하나, 약재를 이용한 신단 제조에 관해선 천하제일이라 칭해지던 그였기에 동악사는 그의 입곡을 흔쾌히 허락했다.
백가량의 재주를 이용해 자신은 물론이요 사천곡의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 입곡한 지 십 년이 지나 백가량이 가져온 신단은 동악사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단지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환골탈태(換骨奪胎)는 물론이요 백년공력(百年功力)을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장담과는 달리 신단을 복용한 일곱 제자 모두 팔다리가 뒤틀리는 병신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만 것이다.
이에 울분이 치민 동악사는 백가량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식솔 중 부모와 두 형제, 그리고 백가량이 사랑하던 아내와 두 아들을 그가 보는 앞에서 똑같이 팔과 다리를 비틀어 죽여 버렸다. 자신이 애써 키운 제자들을 잃은 슬픔을 백가량 역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는 그가 담당하던 선약당(仙藥堂)을 폐쇄한 후 두 번 다시는 그를 찾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백가량이 또다시 신단을 제조해 그것을 마지막 남은 아들에게 먹여 괴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으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 실패한 신단을 다시 만든 이유가 가족을 죽인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함임은 알고 있었으나 어차피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백가량의 신단을 이미 확인한 동악사로서는 신경 쓸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 일부러 백가량을 찾은 이유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굳이 찾고자 해서 찾은 것이 아니라 한 여인의 편지를 받고 중원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던 중에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저 돌팔이 놈을 만난 것부터가 재수 없는 일이었거늘, 괜히 저놈 일에 끼어들어 원치도 않는 동생을 만들게 됐구나. 후훗……. 하나 이대로 꼬마 계집의 꾀에 넘어가 저 비실비실한 놈을 동생으로 삼을 순 없지.’
슬쩍 유원영을 노려본다.
제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선 유원영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보던 동악사는 이내 그 시선을 주지약에게로 돌렸다.
“네 말은 틀렸다.”
“뭐가 틀렸다는 건가요?”
“후훗! 넌 이 악선 동악사가 의제를 해할 약을 먹이는 것이라 했지만 난 이번에 사귄 의제에게 축하 선물로 기연을 주기 위해 저기 저놈이 만든 신단을 먹이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백가량?”
“……!”
웃으며 돌아보는 눈초리가 사뭇 섬뜩하다.
냉랭한 눈빛에 담긴 속뜻을 모를 리 없는 백가량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화라니요? 당치도 않은 소리십니다. 복이 되면 복이 됐지 결코 화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암, 암. 자네의 재주야 내 이미 익히 알고 있고말고. 하하! 자네가 만드는 신단은 언제나 나에게 놀라운 결과를 보여 주었지. 이번에도 분명 내 의제에게 다시 오지 않을 기연(奇緣)을 안겨 나를 놀라게 하겠지? 안 그런가?”
“무, 물론입니다.”
‘이 여우 같은 놈이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흥! 하나 어디 두고 보라지. 이번에 만든 신단만큼은 내 아들을 평범한 모습으로 되돌리는 효능만이 있으니 결코 네놈이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백가량은 이번 만큼은 확신했다. 결코 지난날의 실패와는 달리 성공할 것이라고. 그 성공은 신단을 복용하고도 아무 변화가 없는 유원영의 육신으로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확고한 믿음과는 달리 마음 한구석의 불안만은 어쩔 수 없었던지 백가량은 떨리는 손길로 금갑을 꺼내 동악사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동악사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주지약이 채 무어라 하기도 전에 금갑에서 꺼내 든 한 알의 신단을 유원영의 입속에 쑤셔 박듯 들이밀었다.
“……!”
신단은 유원영의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싶은 순간 스르륵 녹아내리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목줄기를 타고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찌 해 볼 틈조차 없이 신단을 복용한 유원영은 아직도 입안에 감도는 쓴맛에 인상을 찡그린 채 두 눈을 감아야만 했다.
‘정말 내 몸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일까?’
백무극과 같은 거인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차마 자신의 몸에서 일게 될 변화를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리 두 눈을 꼭 감은 채 어쩔 수 없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 다가올 변화를 기다렸다. 하나 어찌된 일인지 시간이 지나도 아무 느낌이 일지 않았다.
‘어째서……. 설마 내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 몸이 변한 것일까? 허, 정말로 내 몸이 나도 모르게 변했다면 앞으로가 큰일이구나. 지약이를 천음산까지 데려다 주는 것도 문제지만 장차 집에 돌아갔을 때 변해 버린 내 모습을 식구들에겐 또 어찌 보여 줄 수 있단 말인가?’
매화 문양이 선명히 새겨진 검을 흑선으로 가리키며 미소 지은 동악사는 처음부터 유원영의 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듯 가볍게 그의 등을 쳤다.
순간 등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벼랑 끝 허공으로 붕 떠오른 유원영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처한 유원영의 눈 속으로 자신을 사지(死地)로 내몬 동악사에 대한 원망이 일었다.
‘당신은 날 아우라 칭하더니 어찌 날 사지로 내몰 수 있단 말이오?’
소리치고 싶었다. 벼랑 위에 선 동악사를 향해 한껏 소리쳐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싶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았던 유원영으로선 지금의 분한 마음을 모두 입 밖으로 토해내 동악사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나 그 마음과는 달리 입은 굳게 다물어진 채 열릴 줄을 몰랐다.
“…….”
자물쇠가 채워진 입을 대신해 두 눈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떠진 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유원영의 시선 속으로 놀란 토끼눈이 된 주지약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게 된 유원영은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내 결국 이리 가고 마는구나. 네 모친과의 약조조차 지키지 못한 채 이리 가는 날 용서해 다오.’
불쌍한 아이다.
그러나 모친을 잃은 처지를 불쌍하다 생각지 않고 언제나 당당한 모습만을 보여 준 기특한 아이였다. 또 또래의 아이들과 달리 성숙한 내면으로 실의에 빠졌던 자신에게 힘을 준 고마운 아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도움을 주었던 건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첫 만남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낙방의 아픔에 괴로워하던 자신의 마음을 알게 모르게 위로해 주었음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이 더욱더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문득 앞으로 혼자 천음산까지 가야 할 주지약에 대한 걱정이 일었다. 그러자 마음속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기에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친과 한 약속만이라도 지켜 주고 싶었던 유원영은 빠르게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 고개를 돌려 살 방법을 찾았다. 곧 그의 두 눈 속으로 자신의 죽음을 환영하듯 웃고 있는 백무극의 얼굴이 비쳐 들었다.
“……!”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자신이 만나본 백무극은 쉽게 흥분하는 다혈질이다. 게다가 그가 겪은 아픔이 무엇인지 백가량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유원영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열리지 않는 입술을 이용해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피식.
“……?”
명백한 비웃음이다.
유원영의 시선은 주지약 옆에서 웃고 있는 백무극과 정확히 맞춘 채 묘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예상대로 그의 비웃음에 백무극의 두 눈에선 새파란 한광이 터져 나왔다.
“개자식! 네가 감히 날 비웃어!”
파앗!
분노에 찬 외침과 동시에 유원영이 떨어지고 있는 낙하지점 위로 태산 같은 신형을 드러낸 백무극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자신의 예상대로 달려든 백무극의 거대한 육신을 바라보며 유원영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던 것이다. 과연 사람에게 상처 입은 백무극이 또 하나의 상처를 추가한 자신을 이대로 저 큰 손으로 쳐 죽일 것인지, 아니면 더 큰 고통 속에서 죽이고자 자신을 살릴 것인지 알 수 없는 위험한 도박에 목숨을 건 것이다.
유원영의 심중을 알 리 없었던 백무극은 하늘을 향해 양손을 들어 올려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유원영의 육신을 품에 안듯 감싸 쥐었다.
팟!
“컥!”
유원영은 가슴의 충격은 둘째 치고 고개가 꺾이며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유원영의 육신을 잡음과 동시에 한 번 놓쳤다가 반사적으로 팔을 구부려 그의 몸을 가슴으로 안으며 머리를 감싸 쥔 덕에 고개가 완전히 뒤로 꺾이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비록 백무극의 가슴으로 안겨 들어 목숨은 건졌다 하나 속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은 어쩔 수 없었던 듯 유원영의 입에선 고통에 찬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
주지약은 뜻하지 않은 백무극의 행동에 의해 유원영이 목숨을 건진 것이 기뻤다. 하지만 유원영의 악다문 입 사이로 새어 나온 신음성이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걱정이 물밀듯 밀려온 주지약은 백무극의 다리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괜찮아요? 백 오빠, 어서 아저씨를 내려 줘요. 어서요!”
주지약은 솜털 같은 두 주먹을 이용해 바위같이 단단한 백무극의 다리를 두들기며 간절히 외쳤다.
“이놈을 내려 달라고? 내 천일화를 훔치려던 도적놈을? 웃기지 마! 이놈은 내 천일화를 훔치려 했을 뿐만 아니라 날 비웃었다고! 이 나를 비웃었단 말이야! 내 이놈의 사지를 죄다 뽑아서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고 말겠어! 나 백무극을 비웃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단 말이다!”
우두둑!
“크윽!”
산 넘어 산이라 했던가?
주지약의 행동에 분노가 배가 된 백무극이 유원영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뼈마디가 부서져 나가는 기음과 더불어 간신히 구제한 목숨을 다시금 잃게 생긴 유원영의 입에선 고통에 찬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절규를 터뜨리고 싶으나 입이 열리지 않아 단지 신음만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 유원영의 모습에 주지약의 눈에 다급함이 일었고 눈가에는 눈물마저 맺혔다.
백무극은 그녀가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유원영에 대한 묘한 질투심만이 배가되었다.
“이놈이 그렇게 소중하단 말이지? 나보다도 더!”
“……!”
마음속 가득 차오르는 질시를 이기지 못한 백무극이 마침내 왼손을 움직여 움켜쥔 유원영의 한 팔을 뜯어내고자 한다.
그때 표표히 청의 자락을 휘날리며 떨어져 내린 동악사가 손에 쥔 섭선을 이용해 가벼이 백무극의 오른쪽 팔꿈치를 쳤다.
탁!
“크아아악!”
힘없이 유원영의 육신을 놓은 백무극이 오른팔을 움켜쥔 채 괴성을 내지르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한다.
쿵쿵!
“무극아아!”
대지를 울리며 물러나는 백무극의 비명성에 고개를 번쩍 치켜든 백가량이 안타까운 외침과 더불어 아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한편, 귀찮은 듯한 얼굴로 떨어져 내리는 유원영의 육신을 안아 풀밭 위에 세운 동악사는 질타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이보게 아우. 어찌해 자네는 신법을 펼치지 않았는가? 까딱하면 저 우둔한 놈의 손에 자네가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분명 자네 허리에 찬 검은 화산파(華山派)의 검이거늘, 어찌해 신법(身法)을 펼쳐 저놈의 손을 피하지 않고 어찌해 검을 빼 들어 저놈의 눈을 베지 않았던가? 자네 설마 오악검파라 칭하는 화산파에서 경신술(輕身術)은커녕 검술(劍術)조차 배우지 못한 겐가?”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는 화산파의 문도가 아니란 말예요! 이 검은 우리 엄마 건데 고마움의 표시로 전해 준 것뿐이라구요!”
“뭐라?”
강호에서 매화 문양이 새겨진 검은 곧 화산의 문도임을 뜻한다.
그렇기에 동악사는 유원영이 당연히 신법은 물론이요, 검술 역시 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그를 벼랑 아래로 밀었다. 하나 말을 할 수 없는 그를 대신해 유원영 곁으로 다가온 주지약의 외침을 듣고 있노라니 자신이 크나 큰 오해를 했음을 그제야 알았다.
“지금 이 꼬마 계집의 말이 정녕 사실인가? 무어라 말 좀 해 보게. 어찌 답이 없나? 허허, 언제까지고 그리 입만 다물고 있을 겐가? 자네 정말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겐가! 허허…….”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한결같은 기개를 가진 사내라지만 말이 필요할 때에도 굳게 입을 다문 채 답을 하지 않는다.
괜찮냐고 연신 물어오는 어린 계집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는 유원영의 기괴한 태도에 마침내 기분이 상한 동악사는 성을 내기 시작했다.
“자네 정말 이럴 겐가? 이 형이 이리 묻고 있음에도 그놈의 고집 때문에 그리 입을 다물고 답을 하지 않겠단 겐가?”
“곡주님, 그자는 답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라 답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인내심이 점차 한계에 다다르던 동악사의 귀로 억눌린 분노가 담긴 백가량의 말이 흘러들었다.
그 말에 동악사가 휙 고개를 돌려 백가량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진기(眞氣)에 의해 서서히 전신이 마비되고 있는 거인의 곁에 선 백가량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부연 설명을 했다.
“그자는 제게 아혈과 마혈이 짚여 몸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럼 지금 내 아우가 배짱 있는 척 날 속였다는 것이냐? 백가량! 바른대로 말해라! 대체 내 아우와는 무슨 사이인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말하란 말이다!”
“그…… 그것이.”
서릿발 같은 호통에 금세 주눅이 든 백가량은 아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동악사에 대한 분노도 잊은 채 모든 것을 고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까지 모든 것을 토한 백가량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규칙을 어기고 마음대로 곡을 빠져나온 것은 아들을 생각하는 부정이라 호소하며 은근슬쩍 동악사의 동정을 받길 원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의 칠칠치 못한 부정따윈 관심도 없었던 동악사가 새파란 빛을 머금으며 죽일 듯이 유원영을 노려보았다.
“네 이놈! 감히 네놈이 나 악선을 속여 내 동생이 되려 해? 그러고도 네놈이 살아남길 원했단 말이냐?”
“대체 무슨 소리예요? 언제 아저씨가 당신을 속였단 말인가요? 아저씨는 단지 말을 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했을 뿐인데, 당신 마음대로 오해하고 아저씨를 동생 삼은 것이 아닌가요?”
억지다.
지금 동악사의 말은 분명한 억지이기에 주지약이 유원영을 대신해 그의 마음속 말을 토해 냈다.
“흥!”
막상 대꾸할 말이 없었던 동악사가 한차례 코웃음과 더불어 다시금 백가량을 바라보았다.
“백가량! 네 아들놈을 망친 그 신단인지 뭔지를 이놈에게 처넣으려 했다 했느냐? 좋다! 내 허락할 테니 지금 당장 이놈에게 그것을 먹이거라! 크크! 내 직접 보겠노라. 날 속인 놈이 어찌 변하는지를!”
“고…… 곡주님?”
“……!”
장내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말이다.
자신이 속았단 억지에 사로잡힌 동악사의 황당한 명에 고통스러워하던 백무극과 그런 아들을 살피던 백가량은 기뻐 환한 미소를 보였다. 백무극으로선 눈에 가시 같던 유원영이 아비의 약을 먹고 자신처럼 괴물로 변한단 생각에 웃음을 흘리고, 백가량은 새로 만든 약을 실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금갑을 꺼내 들었다.
한편 눈앞의 사태를 관망하며 즐기는 입장인 적흑의 두 괴인과 달리, 주지약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해 심통스런 눈빛의 동악사를 마주했다.
‘이자가 어머니께 들은 악선, 그자라면 단순한 말로는 그의 억지를 꺾을 수 없어!’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동악사로부터 유원영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른 주지약은 대뜸 입을 열어 말했다.
“실망했어요!”
“뭐라?”
이건 또 뭔 말인가?
도끼눈을 한 솜털만 한 꼬마 계집의 난데없는 말에 동악사가 주지약을 노려보았다. 가늘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 사이로 빛나는 차디찬 한광은 어린 주지약이 견디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동악사를 노려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생각해 두었던 말들을 내뱉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악선의 악(惡)은 악할 악자가 아닌 큰 산을 뜻하는 악(岳)이라 하셨어요. 큰 산만큼 선한 마음이 가득한 분이 바로 악선이며 성인군자(聖人君子)와도 같은 인품을 가지신 그분을 두고 중원 무인들이 질투해서 악할 악 자로 고친 거라구요!”
“악할 악이 아닌 큰 산 악이라……. 껄껄! 네 말이 옳구나! 암 옳고말고! 네 모친이 날 정말 제대로 보았어!”
“…….”
‘꼬마 계집이 수를 쓰는구나.’
멀리서 두 남녀를 지켜보고 있던 백가량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간다.
제대로 보았을 리가 만무하다.
눈에 똥칠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저 괴팍한 인물을 두고 성인군자라 칭송할 수 있단 말인가? 동악사의 심성 자체가 처음부터 뒤틀려 있음은 온 천하가 아는 일이었다.
백가량은 주지약이 뭔가를 노리고 동악사를 상대로 사기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동악사가 너무 기분 좋게 웃어 대니 자칫 토를 달았다가 개죽음당할 수 있기에 백가량으로선 그저 속으로 끙끙거릴 뿐이었다.
‘대체 저 계집이 뭔 수작을 부리려고……. 흥! 하긴 무슨 수작을 부리든 소용없겠지만. 여우 중의 여우인 동악사가 네년의 세 치 혀에 놀아날 정도로 단순한 바보라 생각했다면 그건 네년의 오판이다.’
누구보다 동악사를 잘 알고 있다 생각하던 백가량이다. 그렇기에 그는 꼬마 여우의 얕은꾀에 휘말려 아들의 일이 잘못될까 걱정되던 마음을 접으며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사태를 관망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동악사는 중원에 나와 처음 듣는 성인군자란 말에 기분 좋게 웃어 대다 문득 든 생각에 웃음을 멈추며 흐뭇한 눈길로 주지약을 바라보았다.
“꼬마야. 내가 바로 네 모친이 말한 성인군자인 악선 동악사이다. 네 모친의 말대로 중원의 버러지들이 날 못마땅하게 여겨 내 별호 앞 글자를 악할 악으로 바꾸어 놓았지. 헌데 넌 어찌 네 모친이 동경하던 성인군자인 날 만나고도 실망이란 표현을 썼느냐?”
“어머니께 듣기로 성인군자란 학식이 높아 지혜가 매우 뛰어남은 물론이요, 행실이 점잖고 어질며 덕이 있어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본받을 수 있는 분을 칭한다 들었어요. 하지만 동악사께선 스스로를 성인군자라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은 온통 거짓에 싸여 있으니 어찌 제가 실망하지 않을 수 있나요?”
“거짓이라니?”
“아저씨를 동생이라 불렀잖아요!”
“그……그야 물론 그랬지.”
“그럼 아저씨를 동생이라 칭하였으면서 어찌 형된 입장으로 동생에게 해가 될 지도 모를 약을 먹일 수 있단 말인가요? 이는 곧 자신이 내뱉은 동생이란 말을 스스로 인정치 않은 것이니 그것이 바로 거짓 아닌가요?”
“끙…….”
청산유수(靑山流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진 주지약의 야무진 질책에 동악사는 곤혹스런 표정 뒤로 한 줄기 흥미를 담아 눈앞의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인물이로구나 인물이야. 끄끄! 나 동악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도 놀라운 일이거늘 단지 세 치 혀만으로 날 궁지로 몰아넣다니. 후훗! 어린 것의 담력과 총기가 내 쓰레기 같은 제자 놈들보다 낫구나.’
즐기고 있다.
비록 얼굴 표정은 곤란해하나 그것은 단지 동악사의 연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겉모습과 달리 이미 나이가 오십 줄을 바라보고 있었던 동악사는 백가량이 짐작한 대로 처음부터 주지약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에 동조해 준 것은 과연 그녀가 어떤 말로 자신에게서 저 속 빈 강정 같은 놈을 구할지 궁금해서였다.
‘흥! 꼬마 계집이 날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드는군. 성인군자란 말로 날 구속하고 동생이라 칭한 저놈에게 해가 될 짓을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렷다. 하나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저놈을 이대로 살려 둬서 내 동생이라고 사방팔방 떠들게 만든다면 그거야말로 내 이름에 먹칠하는 꼴이니 그렇겐 못하지.’
자신이 누구이던가? 중원 무림은 물론이요 변방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인 악선이었다. 그런 자신의 의제가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이라면 천하가 비웃을 일이리라. 기분 내키는 대로 무공도 모르는 유원영을 동생 삼았던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던 동악사로선 지금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유원영을 죽이자니 내뱉은 말이 있어 차마 그러지는 못하던 찰나에 백가량의 말을 듣고는 그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본시 백가량은 중원에서 마의(魔醫)라 불리던 인물로, 살아 있는 육신을 이용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실험을 행하다 무림 공적으로까지 몰려 사천곡으로 숨어든 인물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침술에서는 천하이대의원(天下二大醫院)이라 칭해지는 의선(醫仙) 모용학과 괴의(怪醫) 소중동에겐 미치지 못하나, 약재를 이용한 신단 제조에 관해선 천하제일이라 칭해지던 그였기에 동악사는 그의 입곡을 흔쾌히 허락했다.
백가량의 재주를 이용해 자신은 물론이요 사천곡의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 입곡한 지 십 년이 지나 백가량이 가져온 신단은 동악사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단지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환골탈태(換骨奪胎)는 물론이요 백년공력(百年功力)을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장담과는 달리 신단을 복용한 일곱 제자 모두 팔다리가 뒤틀리는 병신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만 것이다.
이에 울분이 치민 동악사는 백가량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식솔 중 부모와 두 형제, 그리고 백가량이 사랑하던 아내와 두 아들을 그가 보는 앞에서 똑같이 팔과 다리를 비틀어 죽여 버렸다. 자신이 애써 키운 제자들을 잃은 슬픔을 백가량 역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는 그가 담당하던 선약당(仙藥堂)을 폐쇄한 후 두 번 다시는 그를 찾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백가량이 또다시 신단을 제조해 그것을 마지막 남은 아들에게 먹여 괴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으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 실패한 신단을 다시 만든 이유가 가족을 죽인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함임은 알고 있었으나 어차피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백가량의 신단을 이미 확인한 동악사로서는 신경 쓸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 일부러 백가량을 찾은 이유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굳이 찾고자 해서 찾은 것이 아니라 한 여인의 편지를 받고 중원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던 중에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저 돌팔이 놈을 만난 것부터가 재수 없는 일이었거늘, 괜히 저놈 일에 끼어들어 원치도 않는 동생을 만들게 됐구나. 후훗……. 하나 이대로 꼬마 계집의 꾀에 넘어가 저 비실비실한 놈을 동생으로 삼을 순 없지.’
슬쩍 유원영을 노려본다.
제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선 유원영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보던 동악사는 이내 그 시선을 주지약에게로 돌렸다.
“네 말은 틀렸다.”
“뭐가 틀렸다는 건가요?”
“후훗! 넌 이 악선 동악사가 의제를 해할 약을 먹이는 것이라 했지만 난 이번에 사귄 의제에게 축하 선물로 기연을 주기 위해 저기 저놈이 만든 신단을 먹이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백가량?”
“……!”
웃으며 돌아보는 눈초리가 사뭇 섬뜩하다.
냉랭한 눈빛에 담긴 속뜻을 모를 리 없는 백가량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화라니요? 당치도 않은 소리십니다. 복이 되면 복이 됐지 결코 화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암, 암. 자네의 재주야 내 이미 익히 알고 있고말고. 하하! 자네가 만드는 신단은 언제나 나에게 놀라운 결과를 보여 주었지. 이번에도 분명 내 의제에게 다시 오지 않을 기연(奇緣)을 안겨 나를 놀라게 하겠지? 안 그런가?”
“무, 물론입니다.”
‘이 여우 같은 놈이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흥! 하나 어디 두고 보라지. 이번에 만든 신단만큼은 내 아들을 평범한 모습으로 되돌리는 효능만이 있으니 결코 네놈이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백가량은 이번 만큼은 확신했다. 결코 지난날의 실패와는 달리 성공할 것이라고. 그 성공은 신단을 복용하고도 아무 변화가 없는 유원영의 육신으로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확고한 믿음과는 달리 마음 한구석의 불안만은 어쩔 수 없었던지 백가량은 떨리는 손길로 금갑을 꺼내 동악사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동악사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주지약이 채 무어라 하기도 전에 금갑에서 꺼내 든 한 알의 신단을 유원영의 입속에 쑤셔 박듯 들이밀었다.
“……!”
신단은 유원영의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싶은 순간 스르륵 녹아내리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목줄기를 타고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찌 해 볼 틈조차 없이 신단을 복용한 유원영은 아직도 입안에 감도는 쓴맛에 인상을 찡그린 채 두 눈을 감아야만 했다.
‘정말 내 몸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일까?’
백무극과 같은 거인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차마 자신의 몸에서 일게 될 변화를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리 두 눈을 꼭 감은 채 어쩔 수 없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 다가올 변화를 기다렸다. 하나 어찌된 일인지 시간이 지나도 아무 느낌이 일지 않았다.
‘어째서……. 설마 내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 몸이 변한 것일까? 허, 정말로 내 몸이 나도 모르게 변했다면 앞으로가 큰일이구나. 지약이를 천음산까지 데려다 주는 것도 문제지만 장차 집에 돌아갔을 때 변해 버린 내 모습을 식구들에겐 또 어찌 보여 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