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8화



그저 걱정만이 인다.
그러나 그 걱정 속에서도 한 가지 기이한 점이 있다면 정말 자신의 몸이 변한 것인지, 또 변했다면 어찌 변했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었다. 어쩔 수 없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유원영이 슬며시 감았던 눈을 뜨니 제일 먼저 자신에게 신단을 먹인 동악사의 얼굴이 보였다.
“……!”
‘당신은 날 벼랑에서 민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내 몸까지 변하게 만들어 놓고는 뭐가 그리 좋아 웃는단 말이오?’
실쭉실쭉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모습이 그리 얄미워 보일 수가 없다.
생각 같아선 한마디 확 퍼붓고 싶은 유원영이었으나 어차피 열리지 않을 입이었기에 그저 자신의 분한 감정만을 두 눈에 담아 앞에 선 동악사를 노려보았다.
“……?”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동악사를 노려보고 나니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종류의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찡그린 미간 좌우로 파르르 떨리는 눈썹이 입가의 기괴한 미소와 어울려 지금 그가 격한 분노에 떨고 있음을 알게 해 준 것이다.
“백가량! 어찌 아무 변화가 없느냐?”
“……!”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일까?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변화가 일지 않는 유원영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화를 토한 동악사가 휙 하니 고개 돌려 백가량을 직시했다. 그러나 그의 차가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백가량은 그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환한 미소만을 그려 냈다.
“성공입니다!”
“성공?”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 신단은 제 아들놈을 보통 사람으로 되돌리는 효능뿐이니 평범한 사람이 복용한다면 자연 아무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요. 후하하! 보십시오! 제 말대로 지금 이자의 몸에는 아무 변화가 없으니 이번에야말로 성공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백가량이 노골적인 기쁨을 표했다. 어느새 동악사의 무서움도 잊은 채 앞일은 생각지 않고 기쁨을 표했다.
그런 백가량의 언행에 동악사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헛소리! 네놈의 엉터리 약이 성공할 리가 없다! 그것을 내 직접 증명하겠노라!”
“무……무슨 짓입니까?”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갑작스런 동악사의 행동에 백가량의 입에선 비명과도 같은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금갑 속에 든 하나 남은 신단마저 꺼낸 동악사가 말릴 사이도 없이 그것을 유원영의 입속에 쑤셔 넣은 것이다.
“흥! 한 알로 부족하다면…….”
“…….”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알로 안 된다면 두 알로 약의 효능을 배가시키려는 동악사의 심중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던 백가량은 일순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의 행동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오? 단 하나 남은 약이거늘. 내 아들을 원래대로 돌릴 마지막 하나 남은 약이거늘……. 어찌 당신이…….”
“닥쳐라! 만약 이번에도 변화가 없다면 네놈은 네 아들놈보다 네놈 목숨 걱정부터 해야 할 것이다!”
“……!”
서릿발 같은 동악사의 호통에 번쩍 정신이 드는 백가량이다. 지금 그의 말대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들 백무극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사라진 신단이야 설사 십 년이 걸린다 해도 다시 만들면 그뿐이다. 하나 저놈의 말대로 문제는 바로 내 목숨이다. 저놈이 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필시 그 책임을 내게 물으려 할 텐데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저놈 손에 신단을 제조할 수 있는 내가 죽는다면 무극이를 본모습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큰일이었다. 이대로 억울하게 동악사의 손에 죽고 싶지 않았던 백가량은 어느새 원망은 잊은 채 그와 같은 마음이 되어 유원영을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우두둑!
기도가 통했음인가?
금갑에 든 약 두 알을 삼킨 유원영의 내부에서 뼈마디가 부딪치는 기음이 인다.
그러나 그 기음은 너무도 짧아 순식간에 사라지며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의 유원영만이 자리해서 바라보는 백가량을 절망 속으로 이끌었다.
‘하긴, 하나를 먹든 둘을 먹든 약효가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라면 변화가 있을 리 없지.’
또 한 번 증명된 약의 효능에 기뻐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복잡한 심경이 된 백가량이 슬며시 동악사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 역시 유원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백가량을 노려보던 중이었기에 자연 둘의 시선은 허공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파직!
“네놈의 일에 얽혀 마음에도 없는 놈을 동생으로 삼은 것도 억울한 일이거늘 네놈의 그 엉터리 약으로 감히 나 동악사를 기만해?”
“…….”
‘억울한 것은 나이거늘 어찌 네놈이 억울하다 할 수 있단 말이냐? 내가 언제 내 일에 네놈더러 끼어 달라 부탁이라도 했더냐? 지놈 마음대로 끼어들어 지놈 마음대로 저놈을 동생으로 삼고는 그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구나. 더군다나 분명 내 약의 효능을 미리 설명했거늘 그것을 믿지 못하고 저놈에게 먹인 것도 네놈일진데 어찌 네놈은 그것을 기만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이냐?’
하고 싶은 말은 한가득이다. 그러나 두 눈 가득 살기가 감돌기 시작한 동악사의 시선에 백가량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한 채 그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앞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한 동악사의 전신에선 압도적인 기도가 뿜어져 나와 도망치는 백가량의 육신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진작 죽였어야 했거늘. 진작 네놈을 죽였더라면 오늘날의 일도 없었을 것이거늘. 지금이라도 네놈을 죽여 날 기만한 죄를 묻겠다.”
“크윽!”
느릿한 걸음만큼이나 여유롭게 흘러나온 동악사의 살기 어린 말에 백가량은 신법을 펼쳐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의 몸은 신법은 고사하고 더 이상 뒷걸음질도 치지 못한 채 대지 위로 못 박힌 듯 정지되어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만 했다.
암경(暗勁).
동악사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보이지 않는 기운이 일순 백가량의 육신을 포박한 것이다. 현격한 힘의 차이를 보여 주듯 백가량은 덮쳐든 암경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되었고, 그저 두려움과 분함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결국 이리 죽고 마는구나. 저놈 손에 죽은 내 식솔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저놈 손에 죽고 마는구나.’
참담함에 고개를 숙인 백가량의 눈 속으로 코앞으로 다가든 검은 그림자가 비쳐 든다. 그것이 동악사의 그림자임을 알 수 있었던 백가량은 이내 그의 좌수가 자신의 얼굴을 지나 머리 위로 들려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멈추십시오!”
“……?”
동악사의 손이 우뚝 멈추고 말았다.
순간 장내에 터져 나온 예상치 못한 사내의 외침에 장력을 이용해 백가량의 머리통을 으깨려 했던 동악사는 손길을 멈춘 채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네놈이 어찌?”
있었다. 마혈과 아혈이 짚여 몸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던 유원영이 굳었던 몸을 풀며 동악사를 바라보고 있다.
무공도 모르던 사내가 짚힌 혈을 푼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건만 마의 백가량조차 두려워하는 동악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곧 질책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동악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흥미 어린 눈빛이 되어 유원영을 마주했다.



四章. 의제(義弟), 의형(義兄)?


우르릉…….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맑고 고요한 세상 속으로 느닷없이 천둥소리가 들린다면?
그것도 밖이 아닌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 큰소리가 울려 퍼진다면 필시 깜짝 놀라 담력이 약한 자는 그대로 심장이 멈출 것이다.
유원영이 그랬다.
동악사가 억지로 들이민 두 번째 신단을 복용하는 순간 유원영은 자신의 머릿속으로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숨이 턱 막힘과 동시에 일순 귀가 멍해지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저 귓가로 모기의 날갯짓과도 같은 윙윙 소리만 맴도는 가운데 유원영은 외관적으론 아무 변화가 없는 자신의 모습에 불같이 화를 내며 무언가 소리치는 동악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도 점차 뿌옇게 변하는 흐릿한 시선 속에 사라지고 일순 깊은 어둠이 찾아든다.
화를 내던 동악사의 모습도,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던 주지약의 모습도 사라진 채 찾아든 어둠은 한없이 깊고도 아늑해 유원영은 하마터면 그 어둠 속에 자신을 안주시킬 뻔했다. 그러나 순간 어둠 속으로 한 줄기 섬광이 터져 나오며 그대로 유원영의 뇌리를 관통하면서 정지되었던 그의 사고를 일깨웠다.
빛.
한순간 어둠을 물리며 찾아든 빛에 의해 정신을 차린 유원영은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은 그였건만 어느새 세상은 변해 있었다. 녹빛 공터는 사라진 채 하얀 구름 위로 펼쳐진 망망대해와도 같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세상이 그를 반긴 것이다.
변한 것은 비단 세상뿐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 있는 인물 또한 변해 있었다.
어느새 동악사는 사라진 채 새의 깃털로 만든 기이한 옷차림을 한 여인이 서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곱지 않은 시선으로 한참을 두고 유원영을 노려보다 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곧 무언가를 물어 오기 시작했다.
― ……!?
그러나 여인의 음성은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 모기 소리에 의해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말을 하려고 해도 입이 열리지 않으니 결국 유원영은 난색의 뜻이 깃든 쓴 미소만을 입가에 매달아야 했다.
― ……!!
그 미소가 오해를 샀음인가?
자신의 질문에 답은 하지 않고 그저 웃고 마는 사내의 모습에 여인은 불같은 성정을 보여 주듯 화를 내며 걸치고 있는 의복의 깃털을 하나 뽑아 들었다. 그 깃털은 곧 유원영이 보는 앞에서 신기하게도 한 자루 검(劍)으로 변해 그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드나, 순간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또 하나의 검에 의해 여인은 자신의 뜻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 ……!
푸른 불꽃이 튄다.
검과 검이 맞닿으며 생긴 불꽃에 의해 뒤로 한 발짝 물러선 여인이 이내 자신의 검으로 두둥실 허공 위에 뜬 한 자루 검을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쳐 물었다. 그러자 검은 곧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나뉘더니 어느새 검이 아닌 백발의 세 명의 노인으로 변해 여인을 마주했다. 그들은 유원영을 보호하듯 두 남녀 사이에 선 채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동시에 허리를 숙여 여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이미 화가 날대로 난 여인이 그들의 인사를 무시한 채 계속해 화를 내며 검으로 뒤쪽의 유원영을 가리키자 이에 곤란한 표정이 된 세 노인 중 중앙의 노인이 나서서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의 말을 듣던 여인은 노인의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기이한 시선이 되어 유원영을 바라보았다.
― …….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샐쭉한 표정이 된 여인이 팩하니 고개를 돌린 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허공으로 떠오른 여인은 곧 일신에 걸친 깃털 옷을 가벼이 일렁인다 싶은 순간 한 마리 새가 되어 드높은 창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세 노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토해 내고는 그런 자신들의 모습이 웃겼던지 한참을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다. 서로를 마주한 세 노인이 하얀 구름 속 세상이 떠나가라 웃어 대나 그들의 등 뒤로 자리한 유원영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그저 눈앞에서 일어난 믿지 못할 광경에 호기심과 신기함을 담아낼 뿐이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꼈음인가. 문득 세 노인이 웃음을 멈추며 등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 ……!
순간 그들의 얼굴을 본 유원영의 두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떠올랐다. 고개 돌린 세 노인이 다름 아닌 얼마 전 꿈속에서 본 신선들임을 알아본 것이다.
한편 자신들을 보고 놀라는 유원영의 모습이 재밌는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린 세 신선 중 중앙의 노신선이 그에게 다가와 무어라 골려 대며 오른손을 추켜올렸다. 여인의 살결마냥 하얀 손을 들어 올린 노신선은 이내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손바닥을 이용해 가볍게 유원영의 머리를 밀어 쳤다.

탁!
“……!”
한차례 신형이 휘청이며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하고자 뒤로 반 발짝 물러서고 만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균형을 다잡아 허리를 곱게 편 유원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노신선의 손에 이마를 맞았다 싶은 순간 어느새 하얀 구름 속 세상은 사라지고 자신이 있던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대체 이 무슨 조화(造化)란 말인가? 내가 설마 그 이상한 약을 먹고 환각(幻覺)이라도 보았단 말인가?’
그리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세상이 이리 제 맘대로 바뀔 수 있단 말인가?
도통 알 수 없는 의혹에 맞은 머리를 만져 보던 유원영은 불현듯 느껴지는 이질감에 황급히 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멈춰야만 했다.
‘허! 이건 또 어찌 된 일인가?’
이제는 더 이상 놀라지도 않았다.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작은 뿔과 같은 형상의 혹은 분명 이전에 없던 거였다. 이젠 놀라기보단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몸이 움직여지고 있음을 이제야 눈치챘다.
분명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여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유원영은 기뻤다. 고개를 들어 장내를 돌아보니 어느새 모두의 관심은 자신이 아닌 두 사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진작 죽였어야 했거늘. 진작 네놈을 죽였더라면 오늘날의 일도 없었을 것이거늘. 지금이라도 네놈을 죽여 날 기만한 죄를 묻겠다.”
“……!”
두려움에 몸을 떠는 백가량을 눈앞에 둔 동악사의 말이 유원영의 귀에 들렸다.
유원영은 그의 말에서 전해지는 살기가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귀를 통해 내부로 확실히 전해졌다. 또 기이하게도 유원영은 지금 동악사의 마음속에 깃든 악의(惡意)를 너무나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들어 올리는 손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미리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던 유원영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멈추십시오!”
“……?”
“……!”
“네놈이 어찌?”
유원영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각기 다른 감정을 가진 시선 속에서 유독 기쁨의 빛을 띤 소녀가 황급히 다가와 자그마한 입을 열어 물었다.
“아저씨, 괜찮나요?”
“그래, 괜찮단다.”
함축적인 의미가 담긴 주지약의 물음에 유원영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에 기쁨과 걱정이 뒤섞인 그녀의 복잡한 마음이 편해졌다.
유원영은 이내 흥미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동악사를 마주했다.
“어찌 사람이 그리도 잔혹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뭐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처음 들어 보는 유원영의 음성은 동악사가 생각하기에도 낮고 부드러운 듣기 좋은 음색을 지녔다. 그러나 그 듣기 좋은 음색으로 밑도 끝도 없이 불시간에 자신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것이 영 못마땅했던 동악사가 눈살을 찌푸린 채 반문했다.
“내가 잔혹하다?”
“그럼 그것이 잔혹한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단순히 자신의 뜻과 어긋났다 하여 한 생명을 그리도 쉽게 죽이고자 마음먹고, 또 마음먹은 대로 너무도 쉽게 행하려는 당신의 행동이 잔혹한 것임을 어찌 본인이 모른단 말입니까?”
“허……. 당신? 잔혹? 네 이놈!”
우르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듯했다.
일순간 솟아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내질러진 동악사의 호통은 공터 안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 모두가 귀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어 지금 동악사의 호통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그 증거로 동악사의 호통 소리가 집중된 유원영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변해 불시지간 밀려오는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한 채 대지 위로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냈다.
“감히…… 감히 네놈 따위가 당신이라 칭할 수 있는 내가 아니거늘! 당신이라 칭한 것도 모자라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 꾸짖으려 들다니? 정녕 네놈이 죽고 싶단 말이냐?”
“……!”
싸아아…….
동악사 주위로 한 줄기 바람이 일며 대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은은한 진동을 간직한 채 흘러나온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유원영은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쥔 채 결국 무릎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크윽…….”
풀썩 주저앉은 유원영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녹빛 대지를 움켜쥐었다.
한 손은 가슴을, 다른 한 손은 땅에 파고들 정도로 거세게 움켜쥔 그의 악다문 입에선 무거운 신음성이 흘러나와 그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그런 그를 옆에서 누구보다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주지약은 안타까운 마음에 유원영을 도와주고 싶었으나 마음과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동악사의 독문음공(獨門音功)인 통천음(通天音)을 정면으로 맞진 않았지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충격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의 모친이 죽기 전에 전해 주었던 내공(內功)이 없었더라면 그녀 역시 유원영과 마찬가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것이다.
‘말려야 돼. 말려야 하는데…….’
주지약의 마음은 간절하나 말릴 수 없었다. 입조차 뗄 수 없었던 주지약은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고개 숙인 유원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
무엇을 보았음인가?
유원영을 바라보던 주지약의 맑은 눈망울 사이로 한 줄기 이채가 떠올랐다.
사내의 눈. 고개 숙인 채 자신의 혈흔(血痕)을 바라보고 있는 유원영의 눈 속에 담긴 강렬한 신광(神光)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오기(傲氣)였다.
이대로 물러설 수만은 없다는 오기.
자신이 가진 힘만을 믿고 그 힘을 토대로 또다시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너무도 쉽게 살생을 행하려는 동악사에게만은 이대로 고개 숙인 채 질 수 없다는 오기.
그 오기를 간직한 유원영은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 천천히 주저앉았던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
뭘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던 사내가 다시금 몸을 펴 일어나며 그 어느 때보다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또한 두 눈 속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담기지 않았다.
동악사의 얼굴은 자연스레 굳어 들 수밖에 없었다.
“정녕 네놈이 죽고 싶은 게로구나. 지금 당장이라도 네 잘못을 알고 무릎 꿇고 사과한다면 네놈의 그 섣부른 세 치 혀를 잘라 내는 것으로 너의 죄를 용서해 줄 수도 있다. 어떠냐? 내게 사과하겠느냐?”
“무엇을……. 대체 무엇을 사과하란 말씀이십니까? 소생은 당신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 아닙니까? 잘못도 하지 않았거늘 목숨이 아까워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할 수는 없습니다.”
“허, 네놈은 정녕 죽음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
유원영은 답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집스레 다문 입과 오기 어린 눈빛이 무언의 답을 안겨 주었다.
그 답에 모두가 유원영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동악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만족에 찬 눈이 되어 시원스런 대소를 터뜨렸다.
“후훗! 후하하하! 옳다, 옳아! 어찌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깟 죽음이 무서워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진정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보았구나. 암, 제대로 보았어!”
“……!”
하늘 높이 울려 퍼지는 동악사의 웃음이 유원영의 답답하던 가슴마저 시원하게 해 주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견딜 수 없는 괴로움에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었던 유원영이었으나 이렇게 동악사의 웃음을 듣고 있노라니 가슴 속 막혔던 기혈(氣穴)이 순간적으로 뻥 뚫리며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단순한 웃음 하나로 사람을 죽이기도, 또 살릴 수도 있는 동악사의 신기(神技)에 놀랐다. 한편으로 순간순간 극과 극을 달리는 동악사의 종잡을 수 없는 심경 변화에 좀처럼 적응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