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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그들을 제압할 힘이 있으면서 어째서 그들을 속여 재물을 빼앗은 것일까요?”
작은 발을 놀려 사내들의 뒤를 따르던 주지약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에 대해 입을 열어 묻는다.
그녀의 질문에 유원영은 답을 하지 못하나 동악사는 너무도 쉽게 입을 열어 답을 해 주었다.
“그건 그놈의 취미다.”
“취미요?”
“그래 남을 속여 먹는 것이 그놈의 취미지. 크크…….”
“형님께선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물론 알지. 내 비록 그놈을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지.”
“그가 대체 누군가요?”
주지약과 유원영의 연속된 질문에 짜증이 일 법도 하건만 동악사의 입가엔 그저 즐거운 미소뿐이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겨운지 동악사는 좀처럼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두 남녀가 원하는 답을 해 주었다.
“누구긴 누구냐? 사기꾼이지.”
“네?”
“…….”
놀리고 있다. 지금 동악사는 자신이 가진 무기를 최대한 이용해 그동안 알게 모르게 자신을 휘둘렀던 주지약을 맘껏 놀려 준다.
그의 소심한 복수에 유원영은 쓴 미소를, 그리고 한껏 호기심이 달아올랐던 주지약은 쀼루퉁한 눈빛이 되어 볼을 부풀렸다.
“그걸 지금 누가 몰라서 묻나요? 그러니까 그 사기꾼이 누구인지를 묻고 있는 거잖아요.”
“흐으, 알고 싶으냐? 알고 싶구나. 그지? 알고 싶어 죽겠지?”
“아뇨! 알고 싶지 않아요!”
새침한 표정이 되어 흥하니 동악사를 지나친다.
음충스런 미소와 더불어 흘러나온 연속된 그의 질문에서 지금 자신이 놀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
단단히 뿔이 난 주지약이 성큼성큼 앞을 향해 나아가니 그 뒤를 동악사가 눈치 없이 따르며 계속해서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자극한다.
“에이, 알고 싶으면서. 자자 그러지 말고 내게 큰절 한 번 올리면 내 속 시원히 가르쳐 주마. 큰 절을 올리며 ‘내게는 성인군자이신 동 대협님, 자비로운 마음으로 부디 소녀의 궁금증을 풀어 주세요.’라고 한 번만 말하면 된다.”
“싫어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니 절도 하지 않을래요.”
어느새 자존심 대결로 변해 가고 있다.
그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동악사는 좋은 말로 주지약을 구슬리고자 입을 열었다.
“꼬마 여우야, 그리 속마음을 숨기면 나중에 올곧은 어른으로 자랄 수 없다.”
“그럼 악선께서는 어려서부터 속마음을 많이 숨기셨나 보죠?”
“엥? 갑자기 그건 또 뭔 소리냐?”
“무슨 소리긴요. 이리 어린아이나 놀리는 삐뚤어진 어른으로 자라신 것을 보니 악선께서도 어려서부터 속마음을 많이 숨겼다는 소리죠.”
“뭐야? 내 어디가 어때서? 흥! 난 그래도 너처럼 속에 능구렁이 한 마리를 키우진 않았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무슨 뜻은 무슨 뜻! 너처럼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애늙은이로 자라진 않았단 소리지!”
“이이!”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초원 위를 나아가는 두 남녀의 모습에 홀로 남겨진 유원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들과 함께 여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세 남녀는 제법 친해질 수 있었다. 함께한 시간만큼이나 서로 간의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유원영은 지금과 같은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단 하나의 표정. 단 둘이 여행할 때는 단 하나의 표정만을 유지하던 주지약이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지금과 같이 동악사의 말에 발끈해 화를 내기도 새침해지기도 하며 또 어떨 때는 토라지기도 한다.
점차 다양해지는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감정 역시 풍부해지니 그것을 바라보는 유원영의 마음은 절로 흐뭇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벼랑 끝에 선 것만 같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진 강함 역시 벼랑 끝에 선 위험 속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강함이라는 것을 느꼈기에 유원영으로선 더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악사를 만나고 그를 통해 스스로 잠겨 진 마음의 빗장을 푸니 소녀 본연의 모습이 조금씩 빛을 발한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던 유원영이 흐뭇함을 담은 채 주지약을, 그리고 빛을 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동악사를 향해선 고마움을 담은 채 두 남녀를 지켜본다. 정자에서 나누었던 자신과의 대화 이후 그녀가 조금씩 변해 갔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
‘하긴 변한 것은 저 아이뿐만이 아니지. 형님을 만나고 나 역시 변했으니.’
변했다.
단 그것은 마음의 변화가 아니다. 마음보다는 육신의 변화라 해야 옳을 것이다.
동악사가 가르쳐 준 기 수련법이 자신의 육신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유원영은 알 수 있었다. 스무날 전에 동악사에게서 배운 괴이한 동작은 유원영에게 잠시 잊고 있던 승부욕과 고집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민망한 동작을 취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며 유원영은 동악사가 가르쳐 준 말의 참뜻을 깨닫는 일에 승부욕이 발동한 것이다.
알 듯하면서도 깨우치지 못하던 말의 참뜻을 깨닫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자는 승부욕이 발동한 유원영은 시간이 날 때면 스스로 괴이한 동작을 취하는 고집을 부렸다.
그 고집이 시도 때도 없이 유원영을 바닥 위로 납작 엎드리게 하니 어느새 익숙해진 호흡법은 그가 걸음을 옮길 때에도 무의식중에 행하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또한 허리가 쑤셔 일각도 버티기 힘들었던 동작과 숨이 막혀 오던 호흡법이 점차 익숙해짐에 따라 유원영은 몸 안의 기운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이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몸을 가볍게 하니, 가벼워진 몸과 더불어 유원영은 지난날과는 달리 먼 거리를 걸어도 그리 쉽게 피곤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몸의 변화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던 유원영은 처음 동악사가 한 말이 그리 틀리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
‘무병장수라……. 정말 효과가 있다면 내 부모님들께도 가르쳐 드려야겠구나.’
점점 늙어 가는 부모님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약해지는 체력만큼이나 잔병치레도 잦아지는 부모님들의 얼굴을 떠올린 유원영은 동악사가 가르쳐 준 선유진경의 끝을 보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 끝을 보아야만 무병장수의 비결을 알아내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도 가르쳐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사내가 하나의 결심을 굳히는 사이, 그 사내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는 여전히 두 남녀가 싫지 않은 말다툼을 벌이며 초원 위를 나아갔다.
* * *
부엉― 부엉―
숲 안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가 밤이 깊어졌음을 알려 준다.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며 떠오른 보름달 아래, 낡은 관제묘(關帝廟) 계단 위로 한 소녀가 앉아 백의 서생을 바라보았다. 명모(明眸)란 표현 그대로 둥근 눈망울 가득 맑고 아름다운 빛을 간직한 소녀의 시선 속에 채 약관도 되지 못한 젊은 서생 하나가 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양 발바닥을 붙인 채, 허리를 숙였고, 그 발끝을 향해 머리를 쭉 내민 사내는 두 눈을 감아 사색이란 이름의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도도통천의 자세를 취한 채 풀지 못한 숙제를 풀기 위해 사념 속으로 잠겨든 것이다.
“…….”
유원영을 바라보는 소녀 주지약의 시선이 어째 뚱하다. 턱을 괸 채 앉아 골이 난 속마음을 보여 주듯 양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소녀의 뒤로는 역시 심통스런 표정의 동악사가 서서 못마땅한 눈으로 쪼그려 앉은 주지약을 노려보았다.
끝끝내 사기꾼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주지약이다.
그리고 끝끝내 소녀로부터 절을 받아 내지 못한 동악사였다.
서로가 지기 싫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불만만이 남은 두 남녀는 그렇게 불편한 표정 속에 홀로 태연자약하게 수련에 집중하고 있는 유원영을 응시했다.
“…….”
“…….”
침묵만이 오간다.
그 침묵 속에서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동악사가 문득 입을 열어 주지약을 향해 지나가듯 툭하니 한마디 던진다.
“흥! 절 한 번이면 알려 준대도.”
“안 알려 주셔도 돼요. 어차피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걸요.”
“그래, 관둬라 관둬! 뭔 계집년의 고집이 쇠심줄보다도 더 질긴지, 에잉!”
파앗!
더 이상 놀리기도 지쳤는지 신경질적인 말과 함께 동악사의 신형이 허공 위로 날아오른다. 어둠을 틈타 관제묘 앞 수림 속으로 사라지려는 그의 모습에 주지약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쳐 그를 불렀다.
“어딜 가시는 거예요?”
“어디긴 어디냐. 오줌 누러 가지! 오줌 누러 가는 것도 네년에게 보고해야 하느냐? 그도 아니면 꼬마 여우 너도 나와 함께 오줌이나 누러 갈 테냐? 크크.”
“……!”
순간 하얀 살결을 간직한 소녀의 볼 위로 붉은 홍조가 피어오른다.
아직 어린 주지약이었으나 천박스런 동악사의 놀림에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결국 수치심을 이겨 내지 못한 주지약이 얼굴을 상기시킨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자 동악사는 이내 짓궂은 웃음만을 남긴 채 장내에서 모습을 감췄다.
‘하필이면…….’
사라진 동악사에 대한 원망보다도 한 사내 앞에서 오간 수치스런 대화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크다. 그 부끄러움이 슬며시 사내를 바라보게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전히 유원영은 처음의 자세를 유지한 채 긴 침묵만을 지킨다. 그 침묵이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어색했던 주지약은 이내 조용히 몸을 일으켜 동악사와는 정반대 방향인 관제묘 뒤편에 난 숲을 향해 작은 발을 놀렸다.
동악사의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아랫배에서 온 신호를 이기지 못한 채 최대한 유원영이 눈치챌 수 없도록 조심스런 발걸음을 놀린 주지약은 가능한한 멀어지고자 관제묘 뒤로 난 숲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찌르르…….
숲 안을 울리는 풀벌레 소리만이 사라진 두 남녀를 대신한다.
풀잎 위에 앉아 외로이 울어 대는 풀벌레 소리와 더불어 홀로 남겨진 유원영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지켰다. 두 남녀가 자신을 홀로 버려둔 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라진 것과는 상관없이 유원영의 뇌리 속엔 오직 동악사가 알려 준 도도통천의 첫 구결만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땅 위의 나를 본다. 땅 위의 나를…….’
마음속으로 끝없이 되뇌어 보나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동경(銅鏡)에 자신을 비추지 않는 한 어찌 또 하나의 자신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유원영은 뒤의 구결과 연결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속의 나를 알면’이란 말과 연결지어 땅 위의 나를 본다는 표현은 곧 내 안의 또 다른 내 자신을 본다 라고 해석한 것이다. 내 안의 나를 보고 그 속에 감추어진 진정한 내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도도통천에서 이르는 숨은 뜻이리라.
그러나…….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면에 감추어진 자신을 보고자 지난 며칠간 이리 두 눈을 감고 스스로에 대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으나 동악사가 말했던 그 어떠한 변화도 일지 않는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기에 답답함을 느낀 유원영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우……. 대체 땅 위의 나를 어찌 본단 말인가?”
“후우……. 그리 눈을 감고 있는데, 어찌 땅 위의 내가 보이겠는가?”
“……?”
뭘까?
생각지도 못한 답이 들려온다.
낯선 사내의 답에 깜짝 놀란 유원영이 자신도 모르게 번쩍 눈을 떠 바라보니 언제부턴가 그의 앞에는 푸른 도포를 갖춰 입은 젊은 도사가 앉아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른한 시선 속에 반짝이는 혜지(慧智)를 숨긴 이십 대 중반의 도사는 준미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눈이 마주친 유원영을 향해 찡긋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
당황스러웠다.
동악사도 주지약도 아닌 난생처음 보는 사내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 눈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랄 일이건만 눈앞의 사내는 그런 유원영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엉뚱한 행동으로 그를 당황케 한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향해 추파를 던지듯 은근한 미소와 더불어 한쪽 눈을 감았다 뜬 사내는 손가락을 들어 졸음 섞인 자신의 눈을 툭툭 쳐 가며 당황에 물든 유원영을 더욱더 깊은 늪 속으로 끌어당겼다.
“눈을 뜨게나. 눈을 뜨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네.”
“……!”
눈을 뜨라 말하고 있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선 눈을 떠야만 한다는 사내의 말이 옳다는 것을 어찌 유원영이라고 모르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보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뿐이기에 눈을 뜬다 해도 볼 수 없다는 것을 눈앞의 사내는 모르고 있다. 모르기에 이리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런 유원영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 입가의 미소만큼이나 느릿느릿 앉은 몸을 일으킨 사내가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어 말한다.
“땅 위의 나를 보기 위해선 먼저 눈을 뜨고, 나를 보려 하지 말고 세상을 먼저 보아야 한다네. 그렇지, 기왕이면 내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드넓은 초원 위에서 세상을 보는 게 좋을 것이네. 그럼 눈앞에 펼쳐진 세상 속에서 이제껏 자네가 보지 못한 또 다른 내가 보일 테니……. 무량수불.”
“……!”
무언가 알 듯하면서도 확실히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짧은 도호와 함께 던져진 사내의 조언은 그의 눈빛만큼이나 몽환적이라 유원영은 그 속에 감추어진 참뜻을 알고자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정체 모를 사내와 눈높이를 맞춘 유원영은 그가 던진 말의 참뜻을 알고자 질문을 던지려 하나 그의 입이 열리는 속도보다도 사내의 손이 한 발짝 더 빨리 움직였다.
“아차차, 내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
무언가가 생각난 듯 ‘탁!’ 자신의 이마를 쳐 보인다.
허리에 찬 볼품없는 목검이 한차례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자신의 이마를 친 사내는 유원영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지금까지와는 달리 급박한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이보게 혹시 웬 여인이 이곳에 와 공갈이라는 사람을 찾거든, 저기 저쪽으로 갔다고 말 좀 해 주게나.”
“예?”
동악사가 간 곳도 주지약이 간 곳도 아니다.
오른쪽 숲을 가리키며 던져진 급박한 사내의 부탁에 유원영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갈이라는 사람이라뇨? 소생은 그런 사람을 알지도 못합니다만.”
“모르긴 왜 모르나. 답답하기는……. 쯧쯧! 지금 자네 눈앞에 있는 내가 바로 공갈(恐喝)일세. 그러니 한 여인이 찾아와 내가 어디 갔냐 묻거든, 자네는 그저 저쪽으로 갔단 말만 하면 되네. 설마하니, 공짜로 내 가르침을 얻으려 한 것은 아니겠지? 자네가 염치 있는 사람임을 알고 내 특별히 가르침을 내렸으니 자네는 그저 수업료를 낸다 생각하고 내 말대로 해 주게나. 그럼 내 자네만 믿겠네.”
“저기, 저…….”
빨랐다.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도 빨랐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끄러지듯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사내의 행동은 더욱 빨랐다.
갑작스런 만남이 순식간에 이별이 되면서 사라지는 사내의 기행(奇行)이었다.
의문만이 남은 유원영은 그를 잡고자 급히 불러 세우려다 말고 황당한 표정이 되어야만 했다.
‘어째서?’
그 자신이 가리켰던 곳이다.
어이없게도 사내는 그 자신이 가리켰던 오른편 숲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아가더니 이내 숲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부탁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던 공갈이란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내의 황당한 행동에 유원영은 의아한 눈이 되어 그가 사라진 곳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바라만 보기를 얼마.
“……?”
불현듯 이질감이 느껴진다.
갑작스레 찾아든 이질감에 유원영이 옆을 돌아보니 언제부턴가 한 여인이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
‘허, 대체 이 무슨 조홧속이란 말인가?’
한 점 바람 소리조차 일지 않았다. 마치 허깨비마냥 불쑥 솟아난 이십 대 중반의 홍의 여인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태연히 서서 차가운 눈으로 유원영을 노려볼 뿐이다. 범접하기 힘든 기품이 느껴지는 여인의 따가운 시선에 유원영은 자신도 모르게 양 볼이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달빛 아래 선 홍의 여인은 유원영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한 가지 흠이라면 찢어진 눈매가 여인의 전체적 인상을 날카롭게 해 준다는 것뿐. 그것을 뺀다면 인구가 밀집되어 있던 수도 북경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미녀임이 분명했다.
한편 홍의 여인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낯선 사내의 얼굴을 직시한 채 위협하듯 수중의 장검(長劍)을 매만졌다.
“그분은 어디로 가셨나요?”
“네?”
“그분이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압니다. 공자께선 제게 그분이 어디로 가셨는지 사실대로 말을 해 주시면 됩니다.”
“…….”
날카로운 눈매만큼이나 차가운 여인의 음성이다.
그 음성에 오히려 잠시 두근대던 마음이 가라앉은 유원영은 본래의 안색을 되찾으며 차분한 답을 주었다.
“공갈이라는 분을 찾고 계신 것이라면 저쪽으로 가셨습니다.”
“…….”
사라진 곳을 가리키며 진실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 답을 들은 여인은 잠시 생각하다 차가운 냉소를 흘려보냈다.
“흥! 또 누굴 속이려고.”
“……?”
냉소와 더불어 몸을 돌린 여인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신형을 날려 관제묘 앞 공터를 떠난다.
그러나 여인이 향한 곳은 유원영이 가리킨 오른쪽 숲이 아닌 정반대 방향인 왼쪽으로 난 초원이었다.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한순간 신형을 날려 초원 위로 펼쳐진 어둠 속을 향해 빠르게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에 유원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었구나. 처음부터 그분은 저 여인이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어. 그렇기에 내게 자신이 간 곳을 알려 주라 한 게야. 허허…….’
그저 감탄이 인다. 여인의 심리를 정확히 짚어 내 그녀를 속인 사내가 가진 지혜에 대한 감탄과 더불어 유원영은 그가 자신에게 해 준 말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그 깨달음이 사내에 대한 믿음으로, 믿음이 확신이 되어 유원영의 가슴속에 자리한다.
비록 젊은 도사의 정체를 알 길은 없었으나 그가 전해 준 말에 대한 믿음만은 가슴에 남아 공터 위로 홀로 선 유원영은 그가 남겨준 말만을 되새겼다.
“그들을 제압할 힘이 있으면서 어째서 그들을 속여 재물을 빼앗은 것일까요?”
작은 발을 놀려 사내들의 뒤를 따르던 주지약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에 대해 입을 열어 묻는다.
그녀의 질문에 유원영은 답을 하지 못하나 동악사는 너무도 쉽게 입을 열어 답을 해 주었다.
“그건 그놈의 취미다.”
“취미요?”
“그래 남을 속여 먹는 것이 그놈의 취미지. 크크…….”
“형님께선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물론 알지. 내 비록 그놈을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지.”
“그가 대체 누군가요?”
주지약과 유원영의 연속된 질문에 짜증이 일 법도 하건만 동악사의 입가엔 그저 즐거운 미소뿐이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겨운지 동악사는 좀처럼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두 남녀가 원하는 답을 해 주었다.
“누구긴 누구냐? 사기꾼이지.”
“네?”
“…….”
놀리고 있다. 지금 동악사는 자신이 가진 무기를 최대한 이용해 그동안 알게 모르게 자신을 휘둘렀던 주지약을 맘껏 놀려 준다.
그의 소심한 복수에 유원영은 쓴 미소를, 그리고 한껏 호기심이 달아올랐던 주지약은 쀼루퉁한 눈빛이 되어 볼을 부풀렸다.
“그걸 지금 누가 몰라서 묻나요? 그러니까 그 사기꾼이 누구인지를 묻고 있는 거잖아요.”
“흐으, 알고 싶으냐? 알고 싶구나. 그지? 알고 싶어 죽겠지?”
“아뇨! 알고 싶지 않아요!”
새침한 표정이 되어 흥하니 동악사를 지나친다.
음충스런 미소와 더불어 흘러나온 연속된 그의 질문에서 지금 자신이 놀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
단단히 뿔이 난 주지약이 성큼성큼 앞을 향해 나아가니 그 뒤를 동악사가 눈치 없이 따르며 계속해서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자극한다.
“에이, 알고 싶으면서. 자자 그러지 말고 내게 큰절 한 번 올리면 내 속 시원히 가르쳐 주마. 큰 절을 올리며 ‘내게는 성인군자이신 동 대협님, 자비로운 마음으로 부디 소녀의 궁금증을 풀어 주세요.’라고 한 번만 말하면 된다.”
“싫어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니 절도 하지 않을래요.”
어느새 자존심 대결로 변해 가고 있다.
그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동악사는 좋은 말로 주지약을 구슬리고자 입을 열었다.
“꼬마 여우야, 그리 속마음을 숨기면 나중에 올곧은 어른으로 자랄 수 없다.”
“그럼 악선께서는 어려서부터 속마음을 많이 숨기셨나 보죠?”
“엥? 갑자기 그건 또 뭔 소리냐?”
“무슨 소리긴요. 이리 어린아이나 놀리는 삐뚤어진 어른으로 자라신 것을 보니 악선께서도 어려서부터 속마음을 많이 숨겼다는 소리죠.”
“뭐야? 내 어디가 어때서? 흥! 난 그래도 너처럼 속에 능구렁이 한 마리를 키우진 않았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무슨 뜻은 무슨 뜻! 너처럼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애늙은이로 자라진 않았단 소리지!”
“이이!”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초원 위를 나아가는 두 남녀의 모습에 홀로 남겨진 유원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들과 함께 여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세 남녀는 제법 친해질 수 있었다. 함께한 시간만큼이나 서로 간의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유원영은 지금과 같은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단 하나의 표정. 단 둘이 여행할 때는 단 하나의 표정만을 유지하던 주지약이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지금과 같이 동악사의 말에 발끈해 화를 내기도 새침해지기도 하며 또 어떨 때는 토라지기도 한다.
점차 다양해지는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감정 역시 풍부해지니 그것을 바라보는 유원영의 마음은 절로 흐뭇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벼랑 끝에 선 것만 같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진 강함 역시 벼랑 끝에 선 위험 속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강함이라는 것을 느꼈기에 유원영으로선 더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악사를 만나고 그를 통해 스스로 잠겨 진 마음의 빗장을 푸니 소녀 본연의 모습이 조금씩 빛을 발한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던 유원영이 흐뭇함을 담은 채 주지약을, 그리고 빛을 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동악사를 향해선 고마움을 담은 채 두 남녀를 지켜본다. 정자에서 나누었던 자신과의 대화 이후 그녀가 조금씩 변해 갔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
‘하긴 변한 것은 저 아이뿐만이 아니지. 형님을 만나고 나 역시 변했으니.’
변했다.
단 그것은 마음의 변화가 아니다. 마음보다는 육신의 변화라 해야 옳을 것이다.
동악사가 가르쳐 준 기 수련법이 자신의 육신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유원영은 알 수 있었다. 스무날 전에 동악사에게서 배운 괴이한 동작은 유원영에게 잠시 잊고 있던 승부욕과 고집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민망한 동작을 취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며 유원영은 동악사가 가르쳐 준 말의 참뜻을 깨닫는 일에 승부욕이 발동한 것이다.
알 듯하면서도 깨우치지 못하던 말의 참뜻을 깨닫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자는 승부욕이 발동한 유원영은 시간이 날 때면 스스로 괴이한 동작을 취하는 고집을 부렸다.
그 고집이 시도 때도 없이 유원영을 바닥 위로 납작 엎드리게 하니 어느새 익숙해진 호흡법은 그가 걸음을 옮길 때에도 무의식중에 행하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또한 허리가 쑤셔 일각도 버티기 힘들었던 동작과 숨이 막혀 오던 호흡법이 점차 익숙해짐에 따라 유원영은 몸 안의 기운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이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몸을 가볍게 하니, 가벼워진 몸과 더불어 유원영은 지난날과는 달리 먼 거리를 걸어도 그리 쉽게 피곤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몸의 변화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던 유원영은 처음 동악사가 한 말이 그리 틀리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
‘무병장수라……. 정말 효과가 있다면 내 부모님들께도 가르쳐 드려야겠구나.’
점점 늙어 가는 부모님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약해지는 체력만큼이나 잔병치레도 잦아지는 부모님들의 얼굴을 떠올린 유원영은 동악사가 가르쳐 준 선유진경의 끝을 보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 끝을 보아야만 무병장수의 비결을 알아내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도 가르쳐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사내가 하나의 결심을 굳히는 사이, 그 사내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는 여전히 두 남녀가 싫지 않은 말다툼을 벌이며 초원 위를 나아갔다.
* * *
부엉― 부엉―
숲 안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가 밤이 깊어졌음을 알려 준다.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며 떠오른 보름달 아래, 낡은 관제묘(關帝廟) 계단 위로 한 소녀가 앉아 백의 서생을 바라보았다. 명모(明眸)란 표현 그대로 둥근 눈망울 가득 맑고 아름다운 빛을 간직한 소녀의 시선 속에 채 약관도 되지 못한 젊은 서생 하나가 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양 발바닥을 붙인 채, 허리를 숙였고, 그 발끝을 향해 머리를 쭉 내민 사내는 두 눈을 감아 사색이란 이름의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도도통천의 자세를 취한 채 풀지 못한 숙제를 풀기 위해 사념 속으로 잠겨든 것이다.
“…….”
유원영을 바라보는 소녀 주지약의 시선이 어째 뚱하다. 턱을 괸 채 앉아 골이 난 속마음을 보여 주듯 양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소녀의 뒤로는 역시 심통스런 표정의 동악사가 서서 못마땅한 눈으로 쪼그려 앉은 주지약을 노려보았다.
끝끝내 사기꾼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주지약이다.
그리고 끝끝내 소녀로부터 절을 받아 내지 못한 동악사였다.
서로가 지기 싫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불만만이 남은 두 남녀는 그렇게 불편한 표정 속에 홀로 태연자약하게 수련에 집중하고 있는 유원영을 응시했다.
“…….”
“…….”
침묵만이 오간다.
그 침묵 속에서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동악사가 문득 입을 열어 주지약을 향해 지나가듯 툭하니 한마디 던진다.
“흥! 절 한 번이면 알려 준대도.”
“안 알려 주셔도 돼요. 어차피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걸요.”
“그래, 관둬라 관둬! 뭔 계집년의 고집이 쇠심줄보다도 더 질긴지, 에잉!”
파앗!
더 이상 놀리기도 지쳤는지 신경질적인 말과 함께 동악사의 신형이 허공 위로 날아오른다. 어둠을 틈타 관제묘 앞 수림 속으로 사라지려는 그의 모습에 주지약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쳐 그를 불렀다.
“어딜 가시는 거예요?”
“어디긴 어디냐. 오줌 누러 가지! 오줌 누러 가는 것도 네년에게 보고해야 하느냐? 그도 아니면 꼬마 여우 너도 나와 함께 오줌이나 누러 갈 테냐? 크크.”
“……!”
순간 하얀 살결을 간직한 소녀의 볼 위로 붉은 홍조가 피어오른다.
아직 어린 주지약이었으나 천박스런 동악사의 놀림에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결국 수치심을 이겨 내지 못한 주지약이 얼굴을 상기시킨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자 동악사는 이내 짓궂은 웃음만을 남긴 채 장내에서 모습을 감췄다.
‘하필이면…….’
사라진 동악사에 대한 원망보다도 한 사내 앞에서 오간 수치스런 대화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크다. 그 부끄러움이 슬며시 사내를 바라보게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전히 유원영은 처음의 자세를 유지한 채 긴 침묵만을 지킨다. 그 침묵이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어색했던 주지약은 이내 조용히 몸을 일으켜 동악사와는 정반대 방향인 관제묘 뒤편에 난 숲을 향해 작은 발을 놀렸다.
동악사의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아랫배에서 온 신호를 이기지 못한 채 최대한 유원영이 눈치챌 수 없도록 조심스런 발걸음을 놀린 주지약은 가능한한 멀어지고자 관제묘 뒤로 난 숲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찌르르…….
숲 안을 울리는 풀벌레 소리만이 사라진 두 남녀를 대신한다.
풀잎 위에 앉아 외로이 울어 대는 풀벌레 소리와 더불어 홀로 남겨진 유원영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지켰다. 두 남녀가 자신을 홀로 버려둔 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라진 것과는 상관없이 유원영의 뇌리 속엔 오직 동악사가 알려 준 도도통천의 첫 구결만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땅 위의 나를 본다. 땅 위의 나를…….’
마음속으로 끝없이 되뇌어 보나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동경(銅鏡)에 자신을 비추지 않는 한 어찌 또 하나의 자신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유원영은 뒤의 구결과 연결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속의 나를 알면’이란 말과 연결지어 땅 위의 나를 본다는 표현은 곧 내 안의 또 다른 내 자신을 본다 라고 해석한 것이다. 내 안의 나를 보고 그 속에 감추어진 진정한 내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도도통천에서 이르는 숨은 뜻이리라.
그러나…….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면에 감추어진 자신을 보고자 지난 며칠간 이리 두 눈을 감고 스스로에 대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으나 동악사가 말했던 그 어떠한 변화도 일지 않는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기에 답답함을 느낀 유원영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우……. 대체 땅 위의 나를 어찌 본단 말인가?”
“후우……. 그리 눈을 감고 있는데, 어찌 땅 위의 내가 보이겠는가?”
“……?”
뭘까?
생각지도 못한 답이 들려온다.
낯선 사내의 답에 깜짝 놀란 유원영이 자신도 모르게 번쩍 눈을 떠 바라보니 언제부턴가 그의 앞에는 푸른 도포를 갖춰 입은 젊은 도사가 앉아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른한 시선 속에 반짝이는 혜지(慧智)를 숨긴 이십 대 중반의 도사는 준미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눈이 마주친 유원영을 향해 찡긋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
당황스러웠다.
동악사도 주지약도 아닌 난생처음 보는 사내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 눈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랄 일이건만 눈앞의 사내는 그런 유원영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엉뚱한 행동으로 그를 당황케 한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향해 추파를 던지듯 은근한 미소와 더불어 한쪽 눈을 감았다 뜬 사내는 손가락을 들어 졸음 섞인 자신의 눈을 툭툭 쳐 가며 당황에 물든 유원영을 더욱더 깊은 늪 속으로 끌어당겼다.
“눈을 뜨게나. 눈을 뜨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네.”
“……!”
눈을 뜨라 말하고 있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선 눈을 떠야만 한다는 사내의 말이 옳다는 것을 어찌 유원영이라고 모르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보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뿐이기에 눈을 뜬다 해도 볼 수 없다는 것을 눈앞의 사내는 모르고 있다. 모르기에 이리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런 유원영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 입가의 미소만큼이나 느릿느릿 앉은 몸을 일으킨 사내가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어 말한다.
“땅 위의 나를 보기 위해선 먼저 눈을 뜨고, 나를 보려 하지 말고 세상을 먼저 보아야 한다네. 그렇지, 기왕이면 내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드넓은 초원 위에서 세상을 보는 게 좋을 것이네. 그럼 눈앞에 펼쳐진 세상 속에서 이제껏 자네가 보지 못한 또 다른 내가 보일 테니……. 무량수불.”
“……!”
무언가 알 듯하면서도 확실히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짧은 도호와 함께 던져진 사내의 조언은 그의 눈빛만큼이나 몽환적이라 유원영은 그 속에 감추어진 참뜻을 알고자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정체 모를 사내와 눈높이를 맞춘 유원영은 그가 던진 말의 참뜻을 알고자 질문을 던지려 하나 그의 입이 열리는 속도보다도 사내의 손이 한 발짝 더 빨리 움직였다.
“아차차, 내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
무언가가 생각난 듯 ‘탁!’ 자신의 이마를 쳐 보인다.
허리에 찬 볼품없는 목검이 한차례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자신의 이마를 친 사내는 유원영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지금까지와는 달리 급박한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이보게 혹시 웬 여인이 이곳에 와 공갈이라는 사람을 찾거든, 저기 저쪽으로 갔다고 말 좀 해 주게나.”
“예?”
동악사가 간 곳도 주지약이 간 곳도 아니다.
오른쪽 숲을 가리키며 던져진 급박한 사내의 부탁에 유원영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갈이라는 사람이라뇨? 소생은 그런 사람을 알지도 못합니다만.”
“모르긴 왜 모르나. 답답하기는……. 쯧쯧! 지금 자네 눈앞에 있는 내가 바로 공갈(恐喝)일세. 그러니 한 여인이 찾아와 내가 어디 갔냐 묻거든, 자네는 그저 저쪽으로 갔단 말만 하면 되네. 설마하니, 공짜로 내 가르침을 얻으려 한 것은 아니겠지? 자네가 염치 있는 사람임을 알고 내 특별히 가르침을 내렸으니 자네는 그저 수업료를 낸다 생각하고 내 말대로 해 주게나. 그럼 내 자네만 믿겠네.”
“저기, 저…….”
빨랐다.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도 빨랐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끄러지듯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사내의 행동은 더욱 빨랐다.
갑작스런 만남이 순식간에 이별이 되면서 사라지는 사내의 기행(奇行)이었다.
의문만이 남은 유원영은 그를 잡고자 급히 불러 세우려다 말고 황당한 표정이 되어야만 했다.
‘어째서?’
그 자신이 가리켰던 곳이다.
어이없게도 사내는 그 자신이 가리켰던 오른편 숲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아가더니 이내 숲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부탁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던 공갈이란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내의 황당한 행동에 유원영은 의아한 눈이 되어 그가 사라진 곳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바라만 보기를 얼마.
“……?”
불현듯 이질감이 느껴진다.
갑작스레 찾아든 이질감에 유원영이 옆을 돌아보니 언제부턴가 한 여인이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
‘허, 대체 이 무슨 조홧속이란 말인가?’
한 점 바람 소리조차 일지 않았다. 마치 허깨비마냥 불쑥 솟아난 이십 대 중반의 홍의 여인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태연히 서서 차가운 눈으로 유원영을 노려볼 뿐이다. 범접하기 힘든 기품이 느껴지는 여인의 따가운 시선에 유원영은 자신도 모르게 양 볼이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달빛 아래 선 홍의 여인은 유원영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한 가지 흠이라면 찢어진 눈매가 여인의 전체적 인상을 날카롭게 해 준다는 것뿐. 그것을 뺀다면 인구가 밀집되어 있던 수도 북경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미녀임이 분명했다.
한편 홍의 여인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낯선 사내의 얼굴을 직시한 채 위협하듯 수중의 장검(長劍)을 매만졌다.
“그분은 어디로 가셨나요?”
“네?”
“그분이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압니다. 공자께선 제게 그분이 어디로 가셨는지 사실대로 말을 해 주시면 됩니다.”
“…….”
날카로운 눈매만큼이나 차가운 여인의 음성이다.
그 음성에 오히려 잠시 두근대던 마음이 가라앉은 유원영은 본래의 안색을 되찾으며 차분한 답을 주었다.
“공갈이라는 분을 찾고 계신 것이라면 저쪽으로 가셨습니다.”
“…….”
사라진 곳을 가리키며 진실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 답을 들은 여인은 잠시 생각하다 차가운 냉소를 흘려보냈다.
“흥! 또 누굴 속이려고.”
“……?”
냉소와 더불어 몸을 돌린 여인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신형을 날려 관제묘 앞 공터를 떠난다.
그러나 여인이 향한 곳은 유원영이 가리킨 오른쪽 숲이 아닌 정반대 방향인 왼쪽으로 난 초원이었다.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한순간 신형을 날려 초원 위로 펼쳐진 어둠 속을 향해 빠르게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에 유원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었구나. 처음부터 그분은 저 여인이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어. 그렇기에 내게 자신이 간 곳을 알려 주라 한 게야. 허허…….’
그저 감탄이 인다. 여인의 심리를 정확히 짚어 내 그녀를 속인 사내가 가진 지혜에 대한 감탄과 더불어 유원영은 그가 자신에게 해 준 말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그 깨달음이 사내에 대한 믿음으로, 믿음이 확신이 되어 유원영의 가슴속에 자리한다.
비록 젊은 도사의 정체를 알 길은 없었으나 그가 전해 준 말에 대한 믿음만은 가슴에 남아 공터 위로 홀로 선 유원영은 그가 남겨준 말만을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