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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깊은 밤은 소리 없이 흘러 어느새 새벽이 찾아든다.
아직은 완연한 어둠을 벗어 내지 못한 채 푸르스름한 빛이 찾아든 관제묘 앞은 다가오는 가을을 알려 주듯 제법 찬 공기가 감돌았다. 푸른 물을 연상시키는 새벽녘의 색과 어울린 서늘한 기온은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체감 온도보다도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 물빛 세상 풍경 속으로 들어선 유원영은 으스스 떨리는 몸을 한차례 기지개로 풀어 준 후, 어젯밤 공갈이란 사내가 말한 대로 초원을 향한 걸음을 내딛었다.
“…….”
어린 주지약은 이른 새벽잠을 이겨 내지 못한 채 곤한 단꿈에 빠져 있다.
그리고 동악사는 어젯밤 소피를 보러 간다고 나간 후 하루가 지난 지금 이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아무런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의형에 대한 걱정이 유원영의 마음속에서 일 법도 하건만, 지금 초원을 향해 나아가는 사내의 마음속엔 그저 작은 궁금증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동악사였기에. 신변에 위험이 닥쳤을 거란 걱정보다는 괴팍한 그의 마음을 잡아끈 무언가가 있어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이란 어렵지 않은 추측을 한 것이다.
유원영은 마음속에 자리 잡은 호기심을 잠시 접어둔 채 초원 위에서 몸을 멈췄다.
“스읍! 하아…….”
먼저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켜고 내쉼으로써 몸과 마음을 안정시킨다.
정지된 수면과 같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유원영은 곧 신고 있던 신을 벗어 놓고는 연한 풀잎 위로 주저앉았다.
“…….”
아직은 빛이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어스름한 어둠에 휩싸인 초원은 본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품 안으로 주저앉은 유원영을 말없이 반겼다.
― 땅 위의 나를 보기 위해선 먼저 눈을 뜨고, 나를 보려 하지 말고 세상을 먼저 보아야 한다네. 그렇지, 기왕이면 내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드넓은 초원 위에서 세상을 보는 게 좋을 것이네. 그럼 눈앞에 펼쳐진 세상 속에서 이제껏 자네가 보지 못한 또 다른 내가 보일 테니…….
“…….”
‘또 다른 나를 보기 위해선 먼저 나를 보려 하지 말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
공갈이란 사내가 전해 준 말이 유원영의 머릿속에서 정리된 채 그의 두 눈을 자극한다. 그러나 아무리 힘주어 바라보아도 세상은 수줍은 처녀의 속살마냥 엷은 어둠에 감춰져 아직 제 빛깔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상관없겠지.’
비록 해가 뜨기 전이나 그리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미리 도도통천의 자세를 취한다 해도 별반 상관이 없을 것이라 여긴 유원영은 양 발바닥을 붙인 상태로 곧 허리를 바짝 낮춘 후 고개를 치켜들었다.
익숙했다.
처음엔 일각도 버티기 힘들었던 어려운 동작을 너무도 익숙하게 취해 보인 유원영은 마음속으로 가만히 도도통천의 구결을 외워 본다.
― 지상기목(地上己目) 심중지기(心中知己)면 언무천자기인(言無天自己認)
‘땅 위의 나를 보고, 내 마음속의 나를 알면, 말이 없어도 하늘이 스스로 나를 알아줄 것이다.’
알 듯하면서도 풀지 못한 숙제였다.
그 숙제를 풀고자 같은 말을 되뇌며 동악사가 알려 준 호흡법을 시작한다. 세 번 짧게, 그리고 한 번 길게 내뱉은 유원영은 어둠을 물리고 찾아올 일출을 기다렸다.
“…….”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뭉클뭉클 붉은 빛이 지평선 위로 넘실대며 초원 위로 드리워진 어둠을 서서히 걷어 낸다.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뚜렷해지는 빛의 향현(響絃) 속에 어둠이 사라지니, 초원은 본래의 색을 되찾아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내를 맞이했다.
“……!”
장관이었다.
붉은 빛과 어우러진 지평선은 그동안 수없이 보아 왔던 초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생소한 풍경으로 변해 사내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들한들 흔들리는 풀잎들은 아침 햇살 속에 싱그러운 빛을 발하며 살아 숨 쉰다.
바짝 허리를 낮춘 덕에 향긋한 숨결을 내뱉는 대지의 생명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사내의 눈에는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초원 속에서 그토록 보고자 했던 또 하나의 자신이 보였다.
‘이거였던가? 결국 이거였던가?’
광활하다.
살아 숨 쉬는 대지는 크고 넓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지 위로 경배하듯 엎드린 사내의 마음속엔 알지 못할 감흥이 일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라는 존재가 이리도 작고 이리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던가?’
작았다.
드넓은 대지의 위용에 비한다면 그 자신은 너무도 작고 초라한 존재일 뿐이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리 땅 위에 엎드려 아침 일출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광활한 대지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너무도 작고 초라한 또 하나의 자신이 보인다.
한없이 작은.
긴긴 세월 살아온 대지에 비한다면 한없이 작고 한없이 나약한 자신이었다.
유원영은 그 작은 자신을 통해 도도통천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참된 의미를 깨달으며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랬던가?”
빙그레 미소 그린다.
미소그린 채 웃으며 말한다.
한없이 작은 자신의 존재를 통해 마음속의 나라는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유원영은 불어오는 바람만큼이나 즐거움에 찬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그런 의미였던가? 대지 위의 나를 보라는 말은 곧 넓은 대지에 비해 너무도 작고 초라한 내 자신을 보라는 말이 분명하다. 또한 내 마음속의 나를 알라는 말은 단순한 비유법에 지나지 않았던 게야. 마음이란 곧 한계가 없음이니 이는 끝없이 펼쳐진 넓은 대지를 나타냄이요, 그 속의 나를 알라는 말은 끝없는 마음과 같은 넓은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내 존재의 의미를 알라는 말! 하하, 간단하지 않은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는 단지 방랑자(放浪者)라는 간단한 답이 아닌가? 언제나 말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긴 세월 살아온 대지란 품을 빌려 그 속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인간이란 이름의 작은 방랑자. 그것이 곧 나이며 그것이 곧 내가 찾던 답이 아닌가? 하하, 하하하!”
뭐가 그리 즐거운지 모르겠다. 그냥 즐거우니 웃을 뿐이다.
사내의 대소에 언제나 그러했듯 대지는 긴 침묵을 지키며 그를 바라본다. 밀려든 태양 빛을 전해 받은 따스한 대지의 시선에 지난 스무날 동안 유원영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던 땅의 기운이 들고 일어난 것은 순간이었다.
쾅!
“……?”
아찔했다.
갑작스레 몸 안 곳곳에서 들고일어난 작은 기운이 하나되어 사내의 내부에서 엄청난 속도로 솟구쳐 오르며 그대로 정수리에 위치한 백회혈을 강타한 것이다.
그 기운이 어찌나 강하고 맹렬했던지 유원영은 순간 벼락을 맞은 듯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며 그대로 대지 위로 안겨들 듯 쓰러졌다.
쿵!
“…….”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보일 뿐이다.
녹색 대지도, 붉은 태양도, 푸른 하늘조차도 새하얗게 변해 쓰러진 사내의 의식을 빼앗는다.
감당 못할 충격에 의식을 잃은 유원영과는 상관없이 그의 정수리 부근에 자라난 뿔과 같은 형상의 작은 혹을 뚫고 빠져나온 대지의 기운이, 이내 드높은 창공 위로 수직선을 그리며 사라졌다.
七章. 이별(離別)
“꼬마 여우야, 꼬마 여우야. 내 동생은 어딜 갔느냐?”
발로 툭툭 쳐 가며 잠든 소녀를 깨운다.
힘이 빠진 그의 발길질과 작은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뜬 주지약은 졸린 눈을 비벼 가며 하룻밤 외박한 동악사를 바라보았다.
“으음……. 왜요? 여기 안 계신가요?”
“없으니 묻는 게 아니냐, 이것아!”
“……?”
없다.
동악사의 말대로 빛이 찾아든 관제묘 안에는 있어야 할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혼자가 되어 있었던 주지약은 답을 알지 못하기에 동악사와 마찬가지로 의아한 눈이 되어 한 사내가 사라진 관제묘 안을 바라보았다.
* * *
퐁…….
한 방울.
퐁…….
두 방울.
퐁…….
세 방울째에 눈을 뜬다.
점점 가까워지는 물방울 소리에 눈을 떠 바라보니 여전히 초원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녹색 대지 위로는 뿌연 안개가 깔려 사내의 시야를 흐릿하게 변화시키니 유원영은 의아한 생각에 시력을 집중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 ……?
없다.
아무것도…….
저 멀리 있어야 할 바위도, 그 바위 옆으로 자라 있어야 할 나무도, 모든 게 사라진 텅 빈 공간 속 초원 위론 그저 녹색의 풀잎과 희미한 안개만이 존재할 뿐이다.
퐁!
― ……?
알지 못할 기이함에 호기심이 일어난 유원영의 귀로 다시금 물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듯 너무도 선명한 물방울 소리에 유원영이 뒤를 돌아보니 그의 눈으론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비쳐 들었다.
황폐해진 대지(大地).
유원영의 뒤로는 녹색 풀잎조차 사라진 원형의 대지가 쓸쓸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황량한 사막과도 같은 벌거벗은 대지 위로는 그의 귀를 자극했던 하나의 존재가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 ……!
저것을 뭐라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 작다. 겨우 무릎까지 오는 작은 체구에 얼굴 생김 또한 인간이라 하기보다는 쥐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쥐의 얼굴에 사람처럼 긴 백미(白眉)와 백염(白髥)이 자라난 괴상한 존재는 땅바닥 위로 질질 끌리는 황색 옷의 넓은 소매 속에서 사람과 같은 모양의 손을 드러냈다.
그 손에는 신비로운 빛이 감도는 옥병(玉甁)이 들려 있었고, 곧 황폐한 대지를 향해 한 방울의 물이 떨어졌다.
퐁!
옥병에서 떨어져 내린 물방울이 황폐해진 대지를 변화시킨다.
물방울이 떨어진 땅을 중심으로 녹색 웃옷을 걸치듯 순식간에 자라난 풀잎들이 황량하던 대지 위로 생명을 부여한 것이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신기한 광경에 유원영의 눈이 자연스럽게 커지며 괴상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 존재 역시 긴 백미 속에서 맑은 눈빛을 드러내며 유원영을 바라보았다.
― 허허, 넌 내가 누군지 아느냐?
― ……?
마주친 시선 속에서 괴이한 존재가 웃으며 묻는다.
뜻하지 않은 그의 질문에 유원영은 잠시 당황했으나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어 그 역시 웃으며 답을 전했다.
― 압니다. 지금 제 몸속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같은 존재가 아니십니까?
― …….
같다.
선유진경을 통해 얻은 땅의 기운이 이전과는 달리 몸 안에서 살아 숨 쉼을 느낀다. 또한 그 느낌과 지금 대지 위에 선 괴상한 존재로부터 뻗어 나오는 기운이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듯 똑같은 기운이 느껴져 유원영은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전했다.
그 답에 괴상한 존재는 만족스런 눈빛을 발하며 지그시 유원영을 응시했다.
― 되었다. 이제 그만 데려가도 되느니라.
― ……?
무슨 뜻일까?
자신이 아닌 다른 그 누군가를 향해 말한다.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던져진 그의 말에 유원영이 의문을 표하려는 순간, 안개 속에서 뻗어 나온 한 아이의 손이 움직이려던 유원영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 ……?
갑작스런 아이의 등장에 놀란 유원영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열 살가량의 소년이 서서 짓궂은 웃음을 흘려보낸다.
― 오늘은 네가 술래야! 후훗! 날 잡으면 내가 네 부하가 될 게. 하지만 날 잡지 못하면 원영이 네가 내 부하가 되어야 해. 알았지?
― ……!
그날과 똑같다.
그날과 똑같은 미소를 그린 채 소년이 말한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술래가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마음속 고통으로 남은 소년의 미소에 유원영은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여 그를 불러 보았다.
― 위아?
장위.
소년의 이름이었다.
장위는 훌쩍 커 버린 친구의 부름에 그저 웃으며 몸을 돌린다.
― 알지? 백을 세야 돼. 백을 센 다음에 날 찾는 거야!
― 자, 잠깐! 잠깐 기다려! 기다려, 위아!
달려간다.
아무리 외쳐 불러도 장위는 몸을 돌린 채 안개 속을 향해 즐거움에 찬 뜀박질을 시작한다.
너무도 갑작스런 장위의 행동에 유원영은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 뒤를 쫓았다. 백을 세라는 소년의 말은 잊어버린 채 안개 너머로 사라지려는 소년을 쫓는 유원영의 뒤로는 괴상한 존재만이 남아 기이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 어찌 생각하느냐?
― 그러는 지신(地神)께선 어찌 생각하시나요?
지신이라 불린 괴상한 존재의 옆으론 언제부턴가 한 여인이 존재해 그와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바라본다.
깃털 옷을 걸친 차가운 눈빛을 한 여인의 반문에 지신은 웃으며 답을 해 주었다.
― 잡겠지. 착한 아이이니 친구를 구하기 위해 검(劍)을 잡을 것이다. 비록 그 검이 친구를 죽인 살검(殺劍)이라 할지라도…….
― ……. 잡는다 해도 너무 늦어져선 안 돼요. 검을 잡는 게 늦어진다면 그들이 저 아이를 선택한 이유조차 무의미해져 버릴 테니…….
― …….
차가운 눈망울 속으로 한 줄기 걱정이 인다.
여인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신 역시 알지만 여인과는 달리 웃음을 띤 채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사내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 * *
“혹시 수련을 하러 가신 건 아닐까요?”
“그렇지! 그럴 수도…….”
한 사내가 사라진 관제묘 안.
잠결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던진 소녀의 말에 동악사가 옳거니 동조하며 손뼉을 친다. 그녀의 말대로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을 하던 유원영의 그간 행적을 본다면 능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판단한 것이다.
한편 주지약은 대충 머리를 손질한 후 몸을 일으켜 말없이 관제묘 밖을 향했다.
“응? 어딜 가느냐?”
“어디긴요. 아저씨 찾으러 가죠.”
“수련하러 갔다면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작은 걱정이 담긴 소녀의 말이다.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주지약의 말에 동악사는 짓궂은 눈빛을 발하며 음충스런 웃음을 흘려보냈다.
“흐흐, 요 맹랑한 것을 보았나. 외박한 난 궁금해하지도 않고 잠깐 사라진 아우에 대해선 이리 걱정을 해 주다니? 아아, 아우가 부럽구나. 어린 꼬마 계집도 계집이라고 이리 한 사내를 마음에 담아 신경 써 주니……. 정말이지 아우가 부럽구나∼.”
“……!”
한순간 얼굴이 빨개진다.
잘 익은 홍시마냥 붉어진 얼굴만큼이나 달아오른 마음을 감추기 위해 소녀의 입에선 찬바람이 일 정도로 차가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암, 암. 아무렴 아니시겠지. 흐흐…….”
“이씨!”
팽하니 몸을 돌려 동악사를 노려본다.
그러나 커다란 눈망울 가득 힘을 주어 노려보는 소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악사의 입가엔 음흉한 미소만이 떠오르니 결국 주지약이 먼저 몸을 돌려 관제묘 밖으로 빠져나가야만 했다.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관제묘 안을 빠져나가는 소녀의 모습에 홀로 남아 그녀를 지켜보던 동악사의 눈으로 회심의 빛이 떠올랐다.
‘흐으, 이겼다.’
* * *
달려간다.
소리쳐 부르며 달려가나 아이의 걸음을 쫓진 못한다.
분명 훌쩍 자라 버린 사내의 보폭이 더 크건만 어째서인지 아이를 쫓을 수 없다. 그 사실이 유원영으로 하여금 더욱 필사적으로 장위를 쫓게 만든다. 그러나 아무리 힘주어 달려도 여전히 장위와의 거리는 일정하게 유지된 채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 기다려! 기다……?
문득 지칠 줄 모르고 달려가던 사내의 걸음이 멈춘다.
소년과의 줄어들지 않는 거리에 목청껏 그를 외쳐 부르던 유원영은 불현듯 변화된 세상에 놀라 나아가던 걸음을 멈춘 것이다.
‘이곳은?’
바뀌어 있다.
어느새 주변을 감싸던 안개는 사라진 채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풍경이 사내 앞으로 드러난다. 한가로이 펼쳐진 들녘과 군데군데 자라난 고목(古木) 옆으론 옹기종기 모인 가옥이 자리한 채 사내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평화로운 마을과 마주한 유원영의 마음속으론 한 줄기 정겨움이 일었다.
고향(故鄕)에 온 것이다.
유원영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고향 땅을 밟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놀랍기보다 반가움이 먼저였던 사내의 입가로 절로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마을 입구에 선 소년이 바라보며 그 역시 싱긋 웃어 보인다.
― 위아?
고향이란 반가운 존재에 잠시 잊고 있었던 소년이다.
그 소년이 마치 자신을 기억해 달라 시위라도 하듯 마을 입구에 서서 바라보니 반사적으로 유원영의 입에선 친구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그의 부름에 장위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또다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마을 중심을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자신의 집을 향해 힘껏 뜀박질을 시작한 장위의 모습에 유원영의 눈으론 한 줄기 불안감이 깃들었다.
― ……!
그의 불안감을 증명하려는 듯 어스름한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한 마을 위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른다.
소년이 향하는 곳.
장위의 집이 위치한 마을 뒤편 넓은 장원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곧 유원영에게 악몽의 시작을 예고했다.
― 안 돼……. 가면 안 돼!
반복되고 있다.
그날의 악몽이 반복되며 장위를 끌어당긴다.
유원영은 또다시 시작된 악몽 속으로 달려가는 장위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쳐 그를 부르며 힘껏 그 뒤를 쫓았다.
― …….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린다.
어딜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달리고 또 달릴 뿐이다.
소년의 걸음을 멈춰 세우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 나가던 유원영의 눈에 거대한 화염에 휩싸인 장원이 비쳐 들었다.
― ……!
멈춰 있다.
장위도 유원영도 멈춘 채 불길에 휩싸인 장원을 바라본다. 장원 안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들으며, 한 줌 재가 되어 흩어지는 장원을 바라보고 선 유원영의 눈동자는 급격한 흔들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 그만둬……. 그만……. 그만두란 말이다아아!
흔들리는 눈동자 속으론 어느새 뿌연 물기가 차오른다.
흐릿해지는 시선 속에서 한 사내만을 노려보는 유원영의 입에선 분노와 고통, 슬픔이 뒤범벅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장위를 지나 화염 속 철갑(鐵甲)을 걸친 군관(軍官)을 향한 그의 비명에 수많은 사람들을 베어 나가던 한 자루 검이 그 움직임을 멈춘다. 묽은 피가 배어 붉게 변한 검신을 멈춘 채 불길 속에서 몸을 돌린 군관은 장원 앞에 선 소년과 사내를 바라보았다.
― ……?
자신이 아니다.
검은 연기에 가려진 얼굴 속에서 차디찬 한광(寒光)을 발하고 있는 군관은 자신이 아닌 장위를 노려보고 있다.
철컥!
장위를 노려보며 다가든다.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철컥 소리를 내며 타인의 피로 붉게 변한 검을 든 채 장위를 향해 군관이 다가든다.
‘막아야 돼. 막아야…….’
생각뿐이다.
광기에 젖은 군관의 행동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 안 가득 힘이 들어갔건만 지면에 못 박힌 듯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그저 덜덜 떨리는 이빨 사이로 같은 말만이 무의미하게 되풀이될 뿐이었다.
― 그만……. 그만둬……. 그만…….
― …….
웃고 있다.
어느새 장위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세운 군관이 허공 높이 검을 치켜들며 한 줄기 비소(非笑)를 그린다.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두려움에 온몸을 떨고 있는 유원영을 향한 비웃음과 더불어 그의 손에 들린 검(劍)은 너무도 간단히 앞에 선 소년을 베었다.
촤아아아!
― ……!
피가 튄다.
왼쪽 어깨부터 긴 사선을 그리며 지나간 한 자루 검에 의해 허공 위로 피가 튄다. 붉은 피와 함께 등 돌린 소년의 몸이 힘없이 대지 위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소년의 몸과 함께 유원영의 볼 위로 주르륵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난?’
막지 못했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소년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막기는커녕 두려움에 몸을 떨며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난…….’
나약했다.
너무도 나약하고 너무도 한심한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던 유원영이 피가 베어 나오도록 입술을 꽉 깨문 채 비통한 눈이 되어 친구를 죽인 군관을 노려보았다.
― ……?
연기가 걷히고 있다.
유원영의 시선에 군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연기가 걷히며 그 속에서 굳은 얼굴을 한 백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구름 위 한 그루 고목 아래에서 검을 든 채 춤을 추었던 백발 노신선은 무서운 유원영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입을 열어 보였다.
― 사람을 죽이는 살검(殺劍). 그것이 나의 검이다. 또한 앞으로 나를 통해 전해질 너의 검이기도 하다……. 검을 잡거라!
― ……?
검을 잡으라 말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검을, 눈앞에서 친구를 죽인 살검을 잡으라 말하고 있다.
― 내 검에 죽은 네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검을 잡거라. 친구를 죽인 살검을 두려워 말고 스스로 그 살검을 잡거라! 그 검을 통해 넌 네 친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살검은 더 이상 살검이 아닌 활검(活劍)이 될 것이다!
깊은 밤은 소리 없이 흘러 어느새 새벽이 찾아든다.
아직은 완연한 어둠을 벗어 내지 못한 채 푸르스름한 빛이 찾아든 관제묘 앞은 다가오는 가을을 알려 주듯 제법 찬 공기가 감돌았다. 푸른 물을 연상시키는 새벽녘의 색과 어울린 서늘한 기온은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체감 온도보다도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 물빛 세상 풍경 속으로 들어선 유원영은 으스스 떨리는 몸을 한차례 기지개로 풀어 준 후, 어젯밤 공갈이란 사내가 말한 대로 초원을 향한 걸음을 내딛었다.
“…….”
어린 주지약은 이른 새벽잠을 이겨 내지 못한 채 곤한 단꿈에 빠져 있다.
그리고 동악사는 어젯밤 소피를 보러 간다고 나간 후 하루가 지난 지금 이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아무런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의형에 대한 걱정이 유원영의 마음속에서 일 법도 하건만, 지금 초원을 향해 나아가는 사내의 마음속엔 그저 작은 궁금증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동악사였기에. 신변에 위험이 닥쳤을 거란 걱정보다는 괴팍한 그의 마음을 잡아끈 무언가가 있어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이란 어렵지 않은 추측을 한 것이다.
유원영은 마음속에 자리 잡은 호기심을 잠시 접어둔 채 초원 위에서 몸을 멈췄다.
“스읍! 하아…….”
먼저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켜고 내쉼으로써 몸과 마음을 안정시킨다.
정지된 수면과 같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유원영은 곧 신고 있던 신을 벗어 놓고는 연한 풀잎 위로 주저앉았다.
“…….”
아직은 빛이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어스름한 어둠에 휩싸인 초원은 본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품 안으로 주저앉은 유원영을 말없이 반겼다.
― 땅 위의 나를 보기 위해선 먼저 눈을 뜨고, 나를 보려 하지 말고 세상을 먼저 보아야 한다네. 그렇지, 기왕이면 내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드넓은 초원 위에서 세상을 보는 게 좋을 것이네. 그럼 눈앞에 펼쳐진 세상 속에서 이제껏 자네가 보지 못한 또 다른 내가 보일 테니…….
“…….”
‘또 다른 나를 보기 위해선 먼저 나를 보려 하지 말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
공갈이란 사내가 전해 준 말이 유원영의 머릿속에서 정리된 채 그의 두 눈을 자극한다. 그러나 아무리 힘주어 바라보아도 세상은 수줍은 처녀의 속살마냥 엷은 어둠에 감춰져 아직 제 빛깔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상관없겠지.’
비록 해가 뜨기 전이나 그리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미리 도도통천의 자세를 취한다 해도 별반 상관이 없을 것이라 여긴 유원영은 양 발바닥을 붙인 상태로 곧 허리를 바짝 낮춘 후 고개를 치켜들었다.
익숙했다.
처음엔 일각도 버티기 힘들었던 어려운 동작을 너무도 익숙하게 취해 보인 유원영은 마음속으로 가만히 도도통천의 구결을 외워 본다.
― 지상기목(地上己目) 심중지기(心中知己)면 언무천자기인(言無天自己認)
‘땅 위의 나를 보고, 내 마음속의 나를 알면, 말이 없어도 하늘이 스스로 나를 알아줄 것이다.’
알 듯하면서도 풀지 못한 숙제였다.
그 숙제를 풀고자 같은 말을 되뇌며 동악사가 알려 준 호흡법을 시작한다. 세 번 짧게, 그리고 한 번 길게 내뱉은 유원영은 어둠을 물리고 찾아올 일출을 기다렸다.
“…….”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뭉클뭉클 붉은 빛이 지평선 위로 넘실대며 초원 위로 드리워진 어둠을 서서히 걷어 낸다.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뚜렷해지는 빛의 향현(響絃) 속에 어둠이 사라지니, 초원은 본래의 색을 되찾아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내를 맞이했다.
“……!”
장관이었다.
붉은 빛과 어우러진 지평선은 그동안 수없이 보아 왔던 초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생소한 풍경으로 변해 사내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들한들 흔들리는 풀잎들은 아침 햇살 속에 싱그러운 빛을 발하며 살아 숨 쉰다.
바짝 허리를 낮춘 덕에 향긋한 숨결을 내뱉는 대지의 생명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사내의 눈에는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초원 속에서 그토록 보고자 했던 또 하나의 자신이 보였다.
‘이거였던가? 결국 이거였던가?’
광활하다.
살아 숨 쉬는 대지는 크고 넓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지 위로 경배하듯 엎드린 사내의 마음속엔 알지 못할 감흥이 일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라는 존재가 이리도 작고 이리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던가?’
작았다.
드넓은 대지의 위용에 비한다면 그 자신은 너무도 작고 초라한 존재일 뿐이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리 땅 위에 엎드려 아침 일출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광활한 대지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너무도 작고 초라한 또 하나의 자신이 보인다.
한없이 작은.
긴긴 세월 살아온 대지에 비한다면 한없이 작고 한없이 나약한 자신이었다.
유원영은 그 작은 자신을 통해 도도통천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참된 의미를 깨달으며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랬던가?”
빙그레 미소 그린다.
미소그린 채 웃으며 말한다.
한없이 작은 자신의 존재를 통해 마음속의 나라는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유원영은 불어오는 바람만큼이나 즐거움에 찬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그런 의미였던가? 대지 위의 나를 보라는 말은 곧 넓은 대지에 비해 너무도 작고 초라한 내 자신을 보라는 말이 분명하다. 또한 내 마음속의 나를 알라는 말은 단순한 비유법에 지나지 않았던 게야. 마음이란 곧 한계가 없음이니 이는 끝없이 펼쳐진 넓은 대지를 나타냄이요, 그 속의 나를 알라는 말은 끝없는 마음과 같은 넓은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내 존재의 의미를 알라는 말! 하하, 간단하지 않은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는 단지 방랑자(放浪者)라는 간단한 답이 아닌가? 언제나 말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긴 세월 살아온 대지란 품을 빌려 그 속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인간이란 이름의 작은 방랑자. 그것이 곧 나이며 그것이 곧 내가 찾던 답이 아닌가? 하하, 하하하!”
뭐가 그리 즐거운지 모르겠다. 그냥 즐거우니 웃을 뿐이다.
사내의 대소에 언제나 그러했듯 대지는 긴 침묵을 지키며 그를 바라본다. 밀려든 태양 빛을 전해 받은 따스한 대지의 시선에 지난 스무날 동안 유원영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던 땅의 기운이 들고 일어난 것은 순간이었다.
쾅!
“……?”
아찔했다.
갑작스레 몸 안 곳곳에서 들고일어난 작은 기운이 하나되어 사내의 내부에서 엄청난 속도로 솟구쳐 오르며 그대로 정수리에 위치한 백회혈을 강타한 것이다.
그 기운이 어찌나 강하고 맹렬했던지 유원영은 순간 벼락을 맞은 듯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며 그대로 대지 위로 안겨들 듯 쓰러졌다.
쿵!
“…….”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보일 뿐이다.
녹색 대지도, 붉은 태양도, 푸른 하늘조차도 새하얗게 변해 쓰러진 사내의 의식을 빼앗는다.
감당 못할 충격에 의식을 잃은 유원영과는 상관없이 그의 정수리 부근에 자라난 뿔과 같은 형상의 작은 혹을 뚫고 빠져나온 대지의 기운이, 이내 드높은 창공 위로 수직선을 그리며 사라졌다.
七章. 이별(離別)
“꼬마 여우야, 꼬마 여우야. 내 동생은 어딜 갔느냐?”
발로 툭툭 쳐 가며 잠든 소녀를 깨운다.
힘이 빠진 그의 발길질과 작은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뜬 주지약은 졸린 눈을 비벼 가며 하룻밤 외박한 동악사를 바라보았다.
“으음……. 왜요? 여기 안 계신가요?”
“없으니 묻는 게 아니냐, 이것아!”
“……?”
없다.
동악사의 말대로 빛이 찾아든 관제묘 안에는 있어야 할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혼자가 되어 있었던 주지약은 답을 알지 못하기에 동악사와 마찬가지로 의아한 눈이 되어 한 사내가 사라진 관제묘 안을 바라보았다.
* * *
퐁…….
한 방울.
퐁…….
두 방울.
퐁…….
세 방울째에 눈을 뜬다.
점점 가까워지는 물방울 소리에 눈을 떠 바라보니 여전히 초원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녹색 대지 위로는 뿌연 안개가 깔려 사내의 시야를 흐릿하게 변화시키니 유원영은 의아한 생각에 시력을 집중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 ……?
없다.
아무것도…….
저 멀리 있어야 할 바위도, 그 바위 옆으로 자라 있어야 할 나무도, 모든 게 사라진 텅 빈 공간 속 초원 위론 그저 녹색의 풀잎과 희미한 안개만이 존재할 뿐이다.
퐁!
― ……?
알지 못할 기이함에 호기심이 일어난 유원영의 귀로 다시금 물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듯 너무도 선명한 물방울 소리에 유원영이 뒤를 돌아보니 그의 눈으론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비쳐 들었다.
황폐해진 대지(大地).
유원영의 뒤로는 녹색 풀잎조차 사라진 원형의 대지가 쓸쓸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황량한 사막과도 같은 벌거벗은 대지 위로는 그의 귀를 자극했던 하나의 존재가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 ……!
저것을 뭐라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 작다. 겨우 무릎까지 오는 작은 체구에 얼굴 생김 또한 인간이라 하기보다는 쥐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쥐의 얼굴에 사람처럼 긴 백미(白眉)와 백염(白髥)이 자라난 괴상한 존재는 땅바닥 위로 질질 끌리는 황색 옷의 넓은 소매 속에서 사람과 같은 모양의 손을 드러냈다.
그 손에는 신비로운 빛이 감도는 옥병(玉甁)이 들려 있었고, 곧 황폐한 대지를 향해 한 방울의 물이 떨어졌다.
퐁!
옥병에서 떨어져 내린 물방울이 황폐해진 대지를 변화시킨다.
물방울이 떨어진 땅을 중심으로 녹색 웃옷을 걸치듯 순식간에 자라난 풀잎들이 황량하던 대지 위로 생명을 부여한 것이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신기한 광경에 유원영의 눈이 자연스럽게 커지며 괴상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 존재 역시 긴 백미 속에서 맑은 눈빛을 드러내며 유원영을 바라보았다.
― 허허, 넌 내가 누군지 아느냐?
― ……?
마주친 시선 속에서 괴이한 존재가 웃으며 묻는다.
뜻하지 않은 그의 질문에 유원영은 잠시 당황했으나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어 그 역시 웃으며 답을 전했다.
― 압니다. 지금 제 몸속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같은 존재가 아니십니까?
― …….
같다.
선유진경을 통해 얻은 땅의 기운이 이전과는 달리 몸 안에서 살아 숨 쉼을 느낀다. 또한 그 느낌과 지금 대지 위에 선 괴상한 존재로부터 뻗어 나오는 기운이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듯 똑같은 기운이 느껴져 유원영은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전했다.
그 답에 괴상한 존재는 만족스런 눈빛을 발하며 지그시 유원영을 응시했다.
― 되었다. 이제 그만 데려가도 되느니라.
― ……?
무슨 뜻일까?
자신이 아닌 다른 그 누군가를 향해 말한다.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던져진 그의 말에 유원영이 의문을 표하려는 순간, 안개 속에서 뻗어 나온 한 아이의 손이 움직이려던 유원영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 ……?
갑작스런 아이의 등장에 놀란 유원영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열 살가량의 소년이 서서 짓궂은 웃음을 흘려보낸다.
― 오늘은 네가 술래야! 후훗! 날 잡으면 내가 네 부하가 될 게. 하지만 날 잡지 못하면 원영이 네가 내 부하가 되어야 해. 알았지?
― ……!
그날과 똑같다.
그날과 똑같은 미소를 그린 채 소년이 말한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술래가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마음속 고통으로 남은 소년의 미소에 유원영은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여 그를 불러 보았다.
― 위아?
장위.
소년의 이름이었다.
장위는 훌쩍 커 버린 친구의 부름에 그저 웃으며 몸을 돌린다.
― 알지? 백을 세야 돼. 백을 센 다음에 날 찾는 거야!
― 자, 잠깐! 잠깐 기다려! 기다려, 위아!
달려간다.
아무리 외쳐 불러도 장위는 몸을 돌린 채 안개 속을 향해 즐거움에 찬 뜀박질을 시작한다.
너무도 갑작스런 장위의 행동에 유원영은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 뒤를 쫓았다. 백을 세라는 소년의 말은 잊어버린 채 안개 너머로 사라지려는 소년을 쫓는 유원영의 뒤로는 괴상한 존재만이 남아 기이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 어찌 생각하느냐?
― 그러는 지신(地神)께선 어찌 생각하시나요?
지신이라 불린 괴상한 존재의 옆으론 언제부턴가 한 여인이 존재해 그와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바라본다.
깃털 옷을 걸친 차가운 눈빛을 한 여인의 반문에 지신은 웃으며 답을 해 주었다.
― 잡겠지. 착한 아이이니 친구를 구하기 위해 검(劍)을 잡을 것이다. 비록 그 검이 친구를 죽인 살검(殺劍)이라 할지라도…….
― ……. 잡는다 해도 너무 늦어져선 안 돼요. 검을 잡는 게 늦어진다면 그들이 저 아이를 선택한 이유조차 무의미해져 버릴 테니…….
― …….
차가운 눈망울 속으로 한 줄기 걱정이 인다.
여인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신 역시 알지만 여인과는 달리 웃음을 띤 채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사내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 * *
“혹시 수련을 하러 가신 건 아닐까요?”
“그렇지! 그럴 수도…….”
한 사내가 사라진 관제묘 안.
잠결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던진 소녀의 말에 동악사가 옳거니 동조하며 손뼉을 친다. 그녀의 말대로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을 하던 유원영의 그간 행적을 본다면 능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판단한 것이다.
한편 주지약은 대충 머리를 손질한 후 몸을 일으켜 말없이 관제묘 밖을 향했다.
“응? 어딜 가느냐?”
“어디긴요. 아저씨 찾으러 가죠.”
“수련하러 갔다면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작은 걱정이 담긴 소녀의 말이다.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주지약의 말에 동악사는 짓궂은 눈빛을 발하며 음충스런 웃음을 흘려보냈다.
“흐흐, 요 맹랑한 것을 보았나. 외박한 난 궁금해하지도 않고 잠깐 사라진 아우에 대해선 이리 걱정을 해 주다니? 아아, 아우가 부럽구나. 어린 꼬마 계집도 계집이라고 이리 한 사내를 마음에 담아 신경 써 주니……. 정말이지 아우가 부럽구나∼.”
“……!”
한순간 얼굴이 빨개진다.
잘 익은 홍시마냥 붉어진 얼굴만큼이나 달아오른 마음을 감추기 위해 소녀의 입에선 찬바람이 일 정도로 차가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암, 암. 아무렴 아니시겠지. 흐흐…….”
“이씨!”
팽하니 몸을 돌려 동악사를 노려본다.
그러나 커다란 눈망울 가득 힘을 주어 노려보는 소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악사의 입가엔 음흉한 미소만이 떠오르니 결국 주지약이 먼저 몸을 돌려 관제묘 밖으로 빠져나가야만 했다.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관제묘 안을 빠져나가는 소녀의 모습에 홀로 남아 그녀를 지켜보던 동악사의 눈으로 회심의 빛이 떠올랐다.
‘흐으, 이겼다.’
* * *
달려간다.
소리쳐 부르며 달려가나 아이의 걸음을 쫓진 못한다.
분명 훌쩍 자라 버린 사내의 보폭이 더 크건만 어째서인지 아이를 쫓을 수 없다. 그 사실이 유원영으로 하여금 더욱 필사적으로 장위를 쫓게 만든다. 그러나 아무리 힘주어 달려도 여전히 장위와의 거리는 일정하게 유지된 채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 기다려! 기다……?
문득 지칠 줄 모르고 달려가던 사내의 걸음이 멈춘다.
소년과의 줄어들지 않는 거리에 목청껏 그를 외쳐 부르던 유원영은 불현듯 변화된 세상에 놀라 나아가던 걸음을 멈춘 것이다.
‘이곳은?’
바뀌어 있다.
어느새 주변을 감싸던 안개는 사라진 채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풍경이 사내 앞으로 드러난다. 한가로이 펼쳐진 들녘과 군데군데 자라난 고목(古木) 옆으론 옹기종기 모인 가옥이 자리한 채 사내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평화로운 마을과 마주한 유원영의 마음속으론 한 줄기 정겨움이 일었다.
고향(故鄕)에 온 것이다.
유원영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고향 땅을 밟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놀랍기보다 반가움이 먼저였던 사내의 입가로 절로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마을 입구에 선 소년이 바라보며 그 역시 싱긋 웃어 보인다.
― 위아?
고향이란 반가운 존재에 잠시 잊고 있었던 소년이다.
그 소년이 마치 자신을 기억해 달라 시위라도 하듯 마을 입구에 서서 바라보니 반사적으로 유원영의 입에선 친구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그의 부름에 장위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또다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마을 중심을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자신의 집을 향해 힘껏 뜀박질을 시작한 장위의 모습에 유원영의 눈으론 한 줄기 불안감이 깃들었다.
― ……!
그의 불안감을 증명하려는 듯 어스름한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한 마을 위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른다.
소년이 향하는 곳.
장위의 집이 위치한 마을 뒤편 넓은 장원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곧 유원영에게 악몽의 시작을 예고했다.
― 안 돼……. 가면 안 돼!
반복되고 있다.
그날의 악몽이 반복되며 장위를 끌어당긴다.
유원영은 또다시 시작된 악몽 속으로 달려가는 장위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쳐 그를 부르며 힘껏 그 뒤를 쫓았다.
― …….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린다.
어딜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달리고 또 달릴 뿐이다.
소년의 걸음을 멈춰 세우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 나가던 유원영의 눈에 거대한 화염에 휩싸인 장원이 비쳐 들었다.
― ……!
멈춰 있다.
장위도 유원영도 멈춘 채 불길에 휩싸인 장원을 바라본다. 장원 안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들으며, 한 줌 재가 되어 흩어지는 장원을 바라보고 선 유원영의 눈동자는 급격한 흔들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 그만둬……. 그만……. 그만두란 말이다아아!
흔들리는 눈동자 속으론 어느새 뿌연 물기가 차오른다.
흐릿해지는 시선 속에서 한 사내만을 노려보는 유원영의 입에선 분노와 고통, 슬픔이 뒤범벅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장위를 지나 화염 속 철갑(鐵甲)을 걸친 군관(軍官)을 향한 그의 비명에 수많은 사람들을 베어 나가던 한 자루 검이 그 움직임을 멈춘다. 묽은 피가 배어 붉게 변한 검신을 멈춘 채 불길 속에서 몸을 돌린 군관은 장원 앞에 선 소년과 사내를 바라보았다.
― ……?
자신이 아니다.
검은 연기에 가려진 얼굴 속에서 차디찬 한광(寒光)을 발하고 있는 군관은 자신이 아닌 장위를 노려보고 있다.
철컥!
장위를 노려보며 다가든다.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철컥 소리를 내며 타인의 피로 붉게 변한 검을 든 채 장위를 향해 군관이 다가든다.
‘막아야 돼. 막아야…….’
생각뿐이다.
광기에 젖은 군관의 행동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 안 가득 힘이 들어갔건만 지면에 못 박힌 듯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그저 덜덜 떨리는 이빨 사이로 같은 말만이 무의미하게 되풀이될 뿐이었다.
― 그만……. 그만둬……. 그만…….
― …….
웃고 있다.
어느새 장위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세운 군관이 허공 높이 검을 치켜들며 한 줄기 비소(非笑)를 그린다.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두려움에 온몸을 떨고 있는 유원영을 향한 비웃음과 더불어 그의 손에 들린 검(劍)은 너무도 간단히 앞에 선 소년을 베었다.
촤아아아!
― ……!
피가 튄다.
왼쪽 어깨부터 긴 사선을 그리며 지나간 한 자루 검에 의해 허공 위로 피가 튄다. 붉은 피와 함께 등 돌린 소년의 몸이 힘없이 대지 위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소년의 몸과 함께 유원영의 볼 위로 주르륵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난?’
막지 못했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소년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막기는커녕 두려움에 몸을 떨며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난…….’
나약했다.
너무도 나약하고 너무도 한심한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던 유원영이 피가 베어 나오도록 입술을 꽉 깨문 채 비통한 눈이 되어 친구를 죽인 군관을 노려보았다.
― ……?
연기가 걷히고 있다.
유원영의 시선에 군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연기가 걷히며 그 속에서 굳은 얼굴을 한 백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구름 위 한 그루 고목 아래에서 검을 든 채 춤을 추었던 백발 노신선은 무서운 유원영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입을 열어 보였다.
― 사람을 죽이는 살검(殺劍). 그것이 나의 검이다. 또한 앞으로 나를 통해 전해질 너의 검이기도 하다……. 검을 잡거라!
― ……?
검을 잡으라 말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검을, 눈앞에서 친구를 죽인 살검을 잡으라 말하고 있다.
― 내 검에 죽은 네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검을 잡거라. 친구를 죽인 살검을 두려워 말고 스스로 그 살검을 잡거라! 그 검을 통해 넌 네 친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살검은 더 이상 살검이 아닌 활검(活劍)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