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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아저씨!”
귓전을 울리는 주지약의 외침과 더불어 번쩍 두 눈이 떠진다.
뇌리에 깊이 박혀든 백발 노신선의 마지막 말과 어울린 소녀의 외침에 두 눈을 뜬 유원영은 조막만 한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주지약을 볼 수 있었다.
한편 초원 위로 누운 유원영을 보고 달려왔던 주지약은 걱정과는 달리 금세 눈을 뜨자 안도감에 웃으며 다정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찌된 거예요? 대체 왜 이곳에 누워 계신 건가요?”
“난…….”
“아저씨?”
뭔가 이상했다.
가는 떨림을 가진 시선이 평소 그의 눈에서 볼 수 있었던 차분함과는 다른 이질적 느낌을 안겨 준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인 사내의 시선에 주지약이 걱정스레 그를 불러 보나 유원영은 이내 옅은 미소로 그녀의 마음을 거부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얼굴에서 일순 죽은 장위의 얼굴을 떠올렸다고는.
말을 할 수 없기에 흐릿한 미소로 본마음을 숨기며 몸을 일으킨다.
누워 있던 몸을 풀밭 위로 앉힌 유원영은 여전히 근심 어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지약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 단지 꿈을 꿨을 뿐이니……. 그보다 형님께선?”
“오셨어요. 지금쯤 관제묘 안에서 웃고 계실걸요.”
“……?”
새치름하게 변하는 소녀의 표정이 곧 동악사와의 사이에서 무언가가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자세한 속사정까지 알 수 없었던 유원영은 모르는 척하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 그러하니 가서 형님께 내 대신 아침 좀 부탁한다 전해 주겠느냐?”
“……그럴게요.”
그 어떠한 것도 묻지 않는다.
석연치 않은 유원영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주지약은 웃으며 몸을 일으킨다. 그가 최대한 편히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려는 소녀의 배려에 유원영은 고마움을 담아 바라보았다.
* * *
“흐흐, 흐흐흐흐…….”
즐거움에 찬 괴상한 사내의 웃음이 관제묘 안을 떠돈다.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토록 이기고자 했으나 이겨 보지 못했던 소녀를 결국 오늘 이긴 것이다. 그 염원을 오늘이라는 특별한 날에 이뤄 기쁨이 배가 된 사내의 괴소가 좀처럼 멈출 줄 모른다.
‘흐흐, 꼬마 여우야, 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나에겐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크크…….’
“크하하하하!”
머릿속 생각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주지약이 보여 주었던 마지막 표정을 떠올리며 대소를 터뜨린다.
제 흥에 겨워 대소를 터뜨리며 관제묘 앞 공터를 분주히 오가는 사내의 손에는 마을에서 사 온 갖가지 음식이 풀밭 위로 펼쳐졌다. 노릇노릇 윤기가 흐르는 닭부터 시작해서 삶은 만두에 이르기까지. 마지막으로 향기롭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죽엽청(竹葉靑)까지 내려놓은 동악사는 어느덧 웃음을 멈춘 채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 앞에서 음울한 기색을 드러냈다.
“마지막인가…….”
“뭐가요?”
공터 안으로 막 들어서던 소녀가 사내의 혼잣말을 듣고는 질문을 던진다.
처음부터 주지약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동악사는 별반 놀란 기색 없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동생은 어찌 같이 오지 않았느냐?”
“…….”
또다.
유원영과 마찬가지로 눈앞의 동악사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 대답을 회피한다.
주지약의 옅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내 굳어 들었던 안색을 풀며 투명한 눈으로 가만히 동악사를 응시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으시대요.”
“흐음……. 생각이 너무 많은 것도 안 좋은데. 쯧! 이것아 배고프면 먼저 먹어라. 난 동생이 오면 먹을 테니.”
“아뇨. 아저씨가 오실 때까지 기다릴래요. 오늘만은 다 같이 먹고 싶으니…….”
배는 고프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화려하게 차려진 조반(朝飯) 앞에서 그 배고픔은 더욱 심해진다.
그러나 눈앞에 차려진 음식의 의미를 무의식중에 깨닫고 있었던 주지약은 굶주린 식욕보다는 모두가 함께 할 식사를 기다렸다. 그 선택에 따라 자연 음식으로부터 등을 돌린 소녀가 풀밭 위로 작은 체구를 앉혔다.
동악사 역시 그녀 옆으로 다가가 무거운 신형을 내려앉힌다. 앉은 채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주지약을 바라본 동악사는 재밌는 친구 같은 존재였던 그녀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어렵게 살 필요 없다.”
“……?”
“웃고 싶으면 웃어라. 그리고 울고 싶으면 울고, 배가 고프면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먹어라. 아직 넌 네 욕구에 충실하며 살아도 될 나이이니 말이다.”
“…….”
평소 때와는 다른 진지한 조언이었다.
함께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그의 진심 어린 조언에 주지약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누구 덕분에 충분히 그러고 있어요.”
“그래? 스읍! 그 누가 누굴까나……. 아차차, 내 정신 좀 보게나.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걸 잊을 뻔했군.”
“……?”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음충스런 미소와 함께 두 손을 비비며 앉은 몸을 일으킨다. 일어났다 싶은 순간 자리를 옮겨 주지약 앞으로 다시금 쪼그려 앉은 동악사는 이내 입가의 미소만큼이나 음험한 눈빛을 발했다.
“흐으, 내 동생과 단 둘이 있으니 좋더냐?”
* * *
“…….”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그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넓은 초원 위에서 혼자가 되어 앉은 유원영의 손에는 그동안 단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었던 낡은 고서가 들려 그의 두 눈을 현혹한다.
여인이 전해 주었던 빛바랜 낡은 서책을 꺼내 든 유원영은 제목조차 적혀 있지 않은 겉표지를 고뇌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 사람을 죽이는 살검(殺劍). 그것이 나의 검이다. 또한 앞으로 나를 통해 전해질 너의 검이기도 하다……. 검을 잡거라!
꿈속에서 보았던 노인의 말이 머릿속에 남아 유원영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지금 와 생각하니 단순히 꿈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선명하고 또한 너무도 괴이했다.
그 괴이한 꿈의 시작이 바로 여인에게 전해 받은 서책으로부터임을 알고 있었던 유원영은 손에 쥔 서책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첫 번째 꿈. 그 꿈에서 난 세 명의 신선을 보았다. 또한 그 꿈을 난 단순히 부인께서 내게 해 준 말 때문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단순한 꿈이 아님을.
처음 꾸었던 꿈속에 등장한 세 명의 신선 중 검을 든 채 검무(劍舞)를 추었던 노신선이 오늘 또다시 자신의 꿈속에 등장해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어째서…….’
모른다.
어째서 그들이 자꾸 자신의 꿈속에서 연관지어지는지.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오늘 꿈속에 등장한 노신선이 말한 나의 검이 바로 지금 손에 들린 책자 안에 있다는 것뿐.
사람을 죽이는 살검(殺劍).
그것이 자신의 검이라 말했다.
또한 그 검이 바로 이 책을 통해 유원영 자신에게 전해질 검이리라…….
‘어찌해야 하는가?’
고민이 어린다.
그러나 그 고민은 아직도 생생한 장위의 죽음으로 인해 결단났다.
‘난…….’
나약했다.
꿈속에서의 자신은 너무도 나약해 검 앞에서 두려움에 떨 뿐이었다.
만약 그때 자신에게 힘이 있었다면……. 그리고 친구를 죽인 검을 두려워 않는 마음이 있었다면, 장위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내 검에 죽은 네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검을 잡거라. 친구를 죽인 살검을 두려워 말고, 스스로 그 살검을 잡거라! 그 검을 통해 넌 네 친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살검은 더 이상 살검이 아닌 활검(活劍)이 될 것이다!
‘위아를 구하기 위해선…….’
검을 잡아야 한다.
검으로부터 장위를 구하기 위해선 유원영 그만의 검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검이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제나 그날의 죽음을 되풀이하고 있는 친구를, 그리고 그날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유원영 자신의 마음을 구할 것이다.
‘그분이 내게 하고자 했던 말은 결국 검을 통해 나를 구하라는 것인가? 내 마음을,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죽음을 되풀이하는 위아를 구하라는 것인가? 난…….’
떨리고 있다.
왼손에 들린 책장을 잡아가는 오른손의 떨림이 좀처럼 멈춰지질 않는다.
그러나 그 떨림은 검이란 두려움을 이기고자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한 사내의 고집스런 눈빛과 맞물려 멈춰야만 했다.
‘구할 것이다. 위아를 그리고…… 내 자신을.’
넘긴다.
손에 쥔 책장을 떨림이 멈춘 또 다른 손을 이용해 넘긴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유원영의 두 눈엔 한 줄기 신광(神光)이 떠올랐다.
* * *
“늦는구나.”
“늦네요…….”
“너무 늦어.”
“…….”
꾸르륵 울어 대는 주린 배를 부여잡은 두 남녀의 표정이 애처롭기만 하다.
유원영을 기다린 지 어느덧 반 시진.
이제는 뱃가죽이 등에 가 붙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던 두 남녀는 풀밭 위에 누워 홀쭉해진 배를 만지며 의미 없는 대화만을 주고받았다.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했건만……. 그놈의 생각 좀 그만하고 밥부터 먹으면 얼마나 좋을꼬…….”
“정히 못 참겠으면 먼저 드세요.”
“못 참다니? 허허, 네가 날 잘 모르나 본데, 인내(忍耐)하면 나. 나하면 인내이니라. 내 좌우명이 괜히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겠느냐? 그러는 너야말로 정히 참지 못하겠으면 먼저 먹어라.”
“…….”
없던 좌우명까지 만들어 넌지시 먼저 먹으라 권한다.
그 말이 단순히 자신을 생각해서만이 아님을 느낀 주지약 역시 오기가 일어 동악사의 말을 거절했다.
“아니요. 전 괜찮으니 악선께서 먼저 드세요.”
“허허, 얘가 정말……. 난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지 말고 어서 먹으래도.”
“싫다니까요.”
“어허, 먹으라니까?”
“싫어요.”
“아니, 이게 정말! 먹으라면 네 고맙습니다 하고 넙죽 받아먹을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아!”
“악선께서야말로 싫다는데 왜 자꾸 먹으라 그러세요?”
처음엔 상대방에 대한 걱정이 일어 서로가 먼저 먹으라 권했다. 그러나 오가는 대화 속에 싹트는 싸움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려는 듯 어느새 의도가 변질된 대화는 말다툼이 되었다.
먼저 동악사가 언성을 높이며 벌떡 몸을 일으킨다. 풀밭 위에 앉은 동악사가 주지약을 노려보니 그 차가운 시선에 소녀 역시 지지 않기 위해 몸을 일으켜 마주했다.
“…….”
“…….”
찌릿 째려보는 시선이 제법 매섭다.
그 시선에 지지 않기 위해 동악사 역시 두 눈 가득 힘을 주었으나 주지약 역시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
어느덧 팽팽한 눈싸움이 되어 버린 두 남녀의 험악한 대치 속으로 한 사내가 끼어든 것은 불운(不運)이었다.
“저어……. 왜들 그러십니까?”
“……!”
“……!”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공터로 들어선 유원영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순간 열이 확 오른 동악사와 주지약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성난 외침을 토해 냈다.
“왜긴 왜야? 너 때문이지!”
“아저씨 때문에 그러잖아요!”
“…….”
나 때문이다.
그들의 성난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러나 굶주린 늑대 같던 모습을 보여 줬던 두 남녀는 포만감에 젖은 배를 두들기며 언제 화냈냐는 듯 느긋한 미소만을 짓고 있다.
그 모습을 미안함과 정을 담아 바라보던 유원영은 죽엽청을 이용해 입가심을 하던 동악사를 바라보았다.
“어제는 어찌 된 것입니까?”
“응? 어제라니? 아차차, 그렇지! 내 먹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걸 자네에게 준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군.”
“……?”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동악사가 급히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으며 품속에서 황색 빛이 감도는 서책을 꺼내 든다.
표지에 적힌 선유진경이란 네 글자가 선명히 보이도록 책을 들어 유원영에게 건네준 동악사는 의아해하는 그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어젯밤 이것을 적기 위해 마을을 찾았다네. 내 기억이 완벽하다 할 순 없으나 아마도 틀린 곳은 없을 것이네.”
“어찌하여 이것을 제게…….”
“그야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진 동생과 함께하기에 내가 직접 가르침을 내릴 수 있었으나 오늘부턴 더 이상 동생과 함께 할 수 없어 가르침을 내릴 수 없으니 자네 스스로 이 책을 통해 배우도록 하게.”
“형님…….”
이별을 통보하고 있었다.
지금 동악사의 말은 곧 유원영 자신과의 이별을 뜻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도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에 유원영이 복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니 동악사는 웃으며 말한다.
“사실 이번에 중원 땅을 밟게 된 것도 죽기 전 장백산(長白山)의 선경(仙境)을 보기 위함이었으나 생각지도 못한 볼일이 생겨 길을 돌아 이곳 하북으로 온 것이었네. 그러던 중에 내 자네를 만나 아우의 연을 맺고 그간 동행했으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내가 만나 볼 사람이 있어 더 이상 동생과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네. 쯧쯧! 그렇다고 그리 서운한 표정 지을 필요 없네.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니고 볼일만 잘 끝난다면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테니 말일세.”
“…….”
“이곳에서 가깝다면 저희도 같이 가면 되지 않나요?”
동악사와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유원영만이 아니었다.
주지약 역시 그와의 이별이 아쉬웠기에 좀 더 함께하고자 입을 열었다.
그녀의 요청에 동악사는 곤란한 눈빛을 드러냈다.
“꼬마 여우야,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그리는 어려울 것 같구나. 내 개인적인 문제라…….”
“…….”
자세한 속사정까진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말하길 꺼려 하는 동악사의 모습이 곤란한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를 웃으며 보내 주기 위해 유원영이 주지약을 대신해 입을 연다.
“알겠습니다. 지약이와 더불어 형님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하핫! 암 그래야지. 이왕 기다릴 거면 선운산(鮮雲山) 선녀폭(仙女瀑)이라는 곳에서 날 기다리게나. 이곳에서 열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니 내 볼일이 끝나는 대로 그곳으로 달려가겠네. 한 이틀 정도 기다려 보고 내가 오지 않는다면 내 볼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거니 먼저 가도록 하게. 알겠는가?”
“형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웃으며 서로를 보내 준다.
비록 만나기로 약조를 하였으나 그 약속이 지켜질 수 있다 확정할 수 없기에 그저 웃으며 서로를 보내 줄 뿐이다.
어쩌면 긴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두 사내의 미소 속에서 주지약 역시 미소 지은 채 동악사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 * *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다.
그 헤어짐 속에서 다가올 만남을 기다리며 초원 위에 선 세 남녀가 서로를 바라본다.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떠나려는 동악사를 바라보던 유원영이 그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자 입을 열었다.
“검을 잡기로 하였습니다.”
“……?”
“아저씨?”
의형인 동악사가 원했던 일이다. 그러나 당시 그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던 유원영이었다.
오늘이 되어서야 의형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었던 유원영이 그와의 이별 선물을 대신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결심을 꺼내 든다.
그 결심에 동악사는 진심으로 기뻐 황급히 의제의 양손을 부여잡았다.
“정말인가? 정말 검을 잡기로 했단 말인가? 하핫! 암 그래야지! 나 동악사의 의제가 검도 몰라서야 쓰나? 잘 생각했네, 잘 생각했어! 아니, 근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런 결정을 내렸나?”
“그것이…….”
“아니, 됐네, 됐어. 그깟 사정이야 들으면 어떻고, 또 안 들으면 어떤가? 자네가 무공을 배우겠다 결심한 것이 중요한 게지. 내 이럴 게 아니라 이번에 돌아오는 길에 자네가 익힐 만한 무공들을 좀 훔쳐 와야겠네. 내가 알고 있는 건 자네가 배우기 영 찝찝해서……. 내 정파(正派) 놈들의 고리타분한 무공 중 쓸 만한 것을 훔쳐다……. 아아악! 무슨 짓이냐! 꼬마 여우야!”
“무슨 짓은요? 악선께서야말로 무슨 짓을 하시려는 거예요? 설마 아저씨를 도둑으로 만들어 무림공적이 되어 죽게 하실 셈인가요?”
힘껏 최대한 힘껏 허벅지를 꼬집는 소녀의 매서운 손길에 동악사가 비명을 토하며 그녀를 노려본다.
그러나 빽하니 소리치는 주지약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리 틀린 곳이 없어 동악사는 헛기침을 토해야만 했다.
“흐흠! 누가 꼭 훔친다 했느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거참 융통성 없기는…….”
“괜찮습니다. 전 형님께서 주신 이것이면 됩니다.”
“자네……. 알았는가?”
“…….”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어제였다면 몰라도 오늘 아침 얻은 깨달음을 통해 아직 자신의 몸속에서 숨 쉬고 있는 땅의 기운에 대해 알게 되면서 동악사가 전해 준 서책이 단지 무병장수하기 위한 기 수련법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그것을 알기에 유원영이 웃으며 선유진경을 꺼내 말하니 동악사는 괜스레 죄지은 사람마냥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내 자네를 특별히 속이려 한 것이 아니니 그 점만 알아주게나.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자네에게 주었으나 그것이 딱히 무공이라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네. 그 안에 적힌 천사신공 외에도 무공 비슷한 잡기(雜技) 몇 개가 있기는 하나, 그게 영 말도 안 되는 소리라…….”
“괜찮습니다. 무공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습니까? 제게는 형님께서 주신 것 외에도 따로 익혀야 할 것이 있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따로 익혀야 할 거라니?”
“어머니께서 주신 그것 말인가요?”
유원영의 말을 이해 못한 동악사의 의아한 눈길과 달리 주지약은 은연중 기쁨을 드러내며 유원영을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에 유원영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나 그 입에선 이해 못할 말이 새어 나와 주지약을 혼란케 했다.
“맞다. 네 어머니께서 주신 무공을 배우고자 결심을 굳혔으나 지금 당장 그것을 익힐 순 없을 듯하구나.”
“……?”
무슨 뜻일까?
검을 익히기로 마음먹었으나 정작 그 검을 익힐 수 없다니?
사내의 이해 못할 말에 주지약이 빤히 그를 올려다 보니 유원영은 그녀의 시선 속에서 오늘 아침 보았던 네 글자를 떠올렸다.
화산지검(華山之劍).
화산의 검이다.
책 표지를 넘김과 동시에 드러난 네 글자는 바로 유원영이 손에 쥔 책자 안에 기록된 무공이 화산의 검임을 뜻하고 있다. 또한 그 의미는 여인이 책을 건네주던 당시 해 준 당부와 더불어 경고의 의미로써 유원영의 가슴속에 자리했다.
― 공자님께서 진정으로 손에 든 검을 뽑아 그 길을 가고자 하신다면 제가 준 서책을 펼쳐 보십시오. 그 안에 살고 계시는 세 선인이 공자님께 검을 쓰는 법을 알려 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검에 뜻이 없으시다면 결코 제가 준 서책을 열어 보아서는 안 됩니다. 뜻이 없음에도 그 안을 들여다본다면 공자님께선 결국 자신이 원치 않는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길을 거부한다면 공자님껜 큰 화가 미치게 됨 역시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저씨!”
귓전을 울리는 주지약의 외침과 더불어 번쩍 두 눈이 떠진다.
뇌리에 깊이 박혀든 백발 노신선의 마지막 말과 어울린 소녀의 외침에 두 눈을 뜬 유원영은 조막만 한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주지약을 볼 수 있었다.
한편 초원 위로 누운 유원영을 보고 달려왔던 주지약은 걱정과는 달리 금세 눈을 뜨자 안도감에 웃으며 다정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찌된 거예요? 대체 왜 이곳에 누워 계신 건가요?”
“난…….”
“아저씨?”
뭔가 이상했다.
가는 떨림을 가진 시선이 평소 그의 눈에서 볼 수 있었던 차분함과는 다른 이질적 느낌을 안겨 준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인 사내의 시선에 주지약이 걱정스레 그를 불러 보나 유원영은 이내 옅은 미소로 그녀의 마음을 거부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얼굴에서 일순 죽은 장위의 얼굴을 떠올렸다고는.
말을 할 수 없기에 흐릿한 미소로 본마음을 숨기며 몸을 일으킨다.
누워 있던 몸을 풀밭 위로 앉힌 유원영은 여전히 근심 어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지약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 단지 꿈을 꿨을 뿐이니……. 그보다 형님께선?”
“오셨어요. 지금쯤 관제묘 안에서 웃고 계실걸요.”
“……?”
새치름하게 변하는 소녀의 표정이 곧 동악사와의 사이에서 무언가가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자세한 속사정까지 알 수 없었던 유원영은 모르는 척하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 그러하니 가서 형님께 내 대신 아침 좀 부탁한다 전해 주겠느냐?”
“……그럴게요.”
그 어떠한 것도 묻지 않는다.
석연치 않은 유원영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주지약은 웃으며 몸을 일으킨다. 그가 최대한 편히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려는 소녀의 배려에 유원영은 고마움을 담아 바라보았다.
* * *
“흐흐, 흐흐흐흐…….”
즐거움에 찬 괴상한 사내의 웃음이 관제묘 안을 떠돈다.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토록 이기고자 했으나 이겨 보지 못했던 소녀를 결국 오늘 이긴 것이다. 그 염원을 오늘이라는 특별한 날에 이뤄 기쁨이 배가 된 사내의 괴소가 좀처럼 멈출 줄 모른다.
‘흐흐, 꼬마 여우야, 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나에겐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크크…….’
“크하하하하!”
머릿속 생각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주지약이 보여 주었던 마지막 표정을 떠올리며 대소를 터뜨린다.
제 흥에 겨워 대소를 터뜨리며 관제묘 앞 공터를 분주히 오가는 사내의 손에는 마을에서 사 온 갖가지 음식이 풀밭 위로 펼쳐졌다. 노릇노릇 윤기가 흐르는 닭부터 시작해서 삶은 만두에 이르기까지. 마지막으로 향기롭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죽엽청(竹葉靑)까지 내려놓은 동악사는 어느덧 웃음을 멈춘 채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 앞에서 음울한 기색을 드러냈다.
“마지막인가…….”
“뭐가요?”
공터 안으로 막 들어서던 소녀가 사내의 혼잣말을 듣고는 질문을 던진다.
처음부터 주지약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동악사는 별반 놀란 기색 없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동생은 어찌 같이 오지 않았느냐?”
“…….”
또다.
유원영과 마찬가지로 눈앞의 동악사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 대답을 회피한다.
주지약의 옅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내 굳어 들었던 안색을 풀며 투명한 눈으로 가만히 동악사를 응시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으시대요.”
“흐음……. 생각이 너무 많은 것도 안 좋은데. 쯧! 이것아 배고프면 먼저 먹어라. 난 동생이 오면 먹을 테니.”
“아뇨. 아저씨가 오실 때까지 기다릴래요. 오늘만은 다 같이 먹고 싶으니…….”
배는 고프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화려하게 차려진 조반(朝飯) 앞에서 그 배고픔은 더욱 심해진다.
그러나 눈앞에 차려진 음식의 의미를 무의식중에 깨닫고 있었던 주지약은 굶주린 식욕보다는 모두가 함께 할 식사를 기다렸다. 그 선택에 따라 자연 음식으로부터 등을 돌린 소녀가 풀밭 위로 작은 체구를 앉혔다.
동악사 역시 그녀 옆으로 다가가 무거운 신형을 내려앉힌다. 앉은 채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주지약을 바라본 동악사는 재밌는 친구 같은 존재였던 그녀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어렵게 살 필요 없다.”
“……?”
“웃고 싶으면 웃어라. 그리고 울고 싶으면 울고, 배가 고프면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먹어라. 아직 넌 네 욕구에 충실하며 살아도 될 나이이니 말이다.”
“…….”
평소 때와는 다른 진지한 조언이었다.
함께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그의 진심 어린 조언에 주지약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누구 덕분에 충분히 그러고 있어요.”
“그래? 스읍! 그 누가 누굴까나……. 아차차, 내 정신 좀 보게나.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걸 잊을 뻔했군.”
“……?”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음충스런 미소와 함께 두 손을 비비며 앉은 몸을 일으킨다. 일어났다 싶은 순간 자리를 옮겨 주지약 앞으로 다시금 쪼그려 앉은 동악사는 이내 입가의 미소만큼이나 음험한 눈빛을 발했다.
“흐으, 내 동생과 단 둘이 있으니 좋더냐?”
* * *
“…….”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그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넓은 초원 위에서 혼자가 되어 앉은 유원영의 손에는 그동안 단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었던 낡은 고서가 들려 그의 두 눈을 현혹한다.
여인이 전해 주었던 빛바랜 낡은 서책을 꺼내 든 유원영은 제목조차 적혀 있지 않은 겉표지를 고뇌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 사람을 죽이는 살검(殺劍). 그것이 나의 검이다. 또한 앞으로 나를 통해 전해질 너의 검이기도 하다……. 검을 잡거라!
꿈속에서 보았던 노인의 말이 머릿속에 남아 유원영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지금 와 생각하니 단순히 꿈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선명하고 또한 너무도 괴이했다.
그 괴이한 꿈의 시작이 바로 여인에게 전해 받은 서책으로부터임을 알고 있었던 유원영은 손에 쥔 서책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첫 번째 꿈. 그 꿈에서 난 세 명의 신선을 보았다. 또한 그 꿈을 난 단순히 부인께서 내게 해 준 말 때문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단순한 꿈이 아님을.
처음 꾸었던 꿈속에 등장한 세 명의 신선 중 검을 든 채 검무(劍舞)를 추었던 노신선이 오늘 또다시 자신의 꿈속에 등장해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어째서…….’
모른다.
어째서 그들이 자꾸 자신의 꿈속에서 연관지어지는지.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오늘 꿈속에 등장한 노신선이 말한 나의 검이 바로 지금 손에 들린 책자 안에 있다는 것뿐.
사람을 죽이는 살검(殺劍).
그것이 자신의 검이라 말했다.
또한 그 검이 바로 이 책을 통해 유원영 자신에게 전해질 검이리라…….
‘어찌해야 하는가?’
고민이 어린다.
그러나 그 고민은 아직도 생생한 장위의 죽음으로 인해 결단났다.
‘난…….’
나약했다.
꿈속에서의 자신은 너무도 나약해 검 앞에서 두려움에 떨 뿐이었다.
만약 그때 자신에게 힘이 있었다면……. 그리고 친구를 죽인 검을 두려워 않는 마음이 있었다면, 장위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내 검에 죽은 네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검을 잡거라. 친구를 죽인 살검을 두려워 말고, 스스로 그 살검을 잡거라! 그 검을 통해 넌 네 친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살검은 더 이상 살검이 아닌 활검(活劍)이 될 것이다!
‘위아를 구하기 위해선…….’
검을 잡아야 한다.
검으로부터 장위를 구하기 위해선 유원영 그만의 검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검이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제나 그날의 죽음을 되풀이하고 있는 친구를, 그리고 그날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유원영 자신의 마음을 구할 것이다.
‘그분이 내게 하고자 했던 말은 결국 검을 통해 나를 구하라는 것인가? 내 마음을,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죽음을 되풀이하는 위아를 구하라는 것인가? 난…….’
떨리고 있다.
왼손에 들린 책장을 잡아가는 오른손의 떨림이 좀처럼 멈춰지질 않는다.
그러나 그 떨림은 검이란 두려움을 이기고자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한 사내의 고집스런 눈빛과 맞물려 멈춰야만 했다.
‘구할 것이다. 위아를 그리고…… 내 자신을.’
넘긴다.
손에 쥔 책장을 떨림이 멈춘 또 다른 손을 이용해 넘긴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유원영의 두 눈엔 한 줄기 신광(神光)이 떠올랐다.
* * *
“늦는구나.”
“늦네요…….”
“너무 늦어.”
“…….”
꾸르륵 울어 대는 주린 배를 부여잡은 두 남녀의 표정이 애처롭기만 하다.
유원영을 기다린 지 어느덧 반 시진.
이제는 뱃가죽이 등에 가 붙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던 두 남녀는 풀밭 위에 누워 홀쭉해진 배를 만지며 의미 없는 대화만을 주고받았다.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했건만……. 그놈의 생각 좀 그만하고 밥부터 먹으면 얼마나 좋을꼬…….”
“정히 못 참겠으면 먼저 드세요.”
“못 참다니? 허허, 네가 날 잘 모르나 본데, 인내(忍耐)하면 나. 나하면 인내이니라. 내 좌우명이 괜히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겠느냐? 그러는 너야말로 정히 참지 못하겠으면 먼저 먹어라.”
“…….”
없던 좌우명까지 만들어 넌지시 먼저 먹으라 권한다.
그 말이 단순히 자신을 생각해서만이 아님을 느낀 주지약 역시 오기가 일어 동악사의 말을 거절했다.
“아니요. 전 괜찮으니 악선께서 먼저 드세요.”
“허허, 얘가 정말……. 난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지 말고 어서 먹으래도.”
“싫다니까요.”
“어허, 먹으라니까?”
“싫어요.”
“아니, 이게 정말! 먹으라면 네 고맙습니다 하고 넙죽 받아먹을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아!”
“악선께서야말로 싫다는데 왜 자꾸 먹으라 그러세요?”
처음엔 상대방에 대한 걱정이 일어 서로가 먼저 먹으라 권했다. 그러나 오가는 대화 속에 싹트는 싸움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려는 듯 어느새 의도가 변질된 대화는 말다툼이 되었다.
먼저 동악사가 언성을 높이며 벌떡 몸을 일으킨다. 풀밭 위에 앉은 동악사가 주지약을 노려보니 그 차가운 시선에 소녀 역시 지지 않기 위해 몸을 일으켜 마주했다.
“…….”
“…….”
찌릿 째려보는 시선이 제법 매섭다.
그 시선에 지지 않기 위해 동악사 역시 두 눈 가득 힘을 주었으나 주지약 역시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
어느덧 팽팽한 눈싸움이 되어 버린 두 남녀의 험악한 대치 속으로 한 사내가 끼어든 것은 불운(不運)이었다.
“저어……. 왜들 그러십니까?”
“……!”
“……!”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공터로 들어선 유원영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순간 열이 확 오른 동악사와 주지약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성난 외침을 토해 냈다.
“왜긴 왜야? 너 때문이지!”
“아저씨 때문에 그러잖아요!”
“…….”
나 때문이다.
그들의 성난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러나 굶주린 늑대 같던 모습을 보여 줬던 두 남녀는 포만감에 젖은 배를 두들기며 언제 화냈냐는 듯 느긋한 미소만을 짓고 있다.
그 모습을 미안함과 정을 담아 바라보던 유원영은 죽엽청을 이용해 입가심을 하던 동악사를 바라보았다.
“어제는 어찌 된 것입니까?”
“응? 어제라니? 아차차, 그렇지! 내 먹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걸 자네에게 준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군.”
“……?”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동악사가 급히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으며 품속에서 황색 빛이 감도는 서책을 꺼내 든다.
표지에 적힌 선유진경이란 네 글자가 선명히 보이도록 책을 들어 유원영에게 건네준 동악사는 의아해하는 그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어젯밤 이것을 적기 위해 마을을 찾았다네. 내 기억이 완벽하다 할 순 없으나 아마도 틀린 곳은 없을 것이네.”
“어찌하여 이것을 제게…….”
“그야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진 동생과 함께하기에 내가 직접 가르침을 내릴 수 있었으나 오늘부턴 더 이상 동생과 함께 할 수 없어 가르침을 내릴 수 없으니 자네 스스로 이 책을 통해 배우도록 하게.”
“형님…….”
이별을 통보하고 있었다.
지금 동악사의 말은 곧 유원영 자신과의 이별을 뜻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도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에 유원영이 복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니 동악사는 웃으며 말한다.
“사실 이번에 중원 땅을 밟게 된 것도 죽기 전 장백산(長白山)의 선경(仙境)을 보기 위함이었으나 생각지도 못한 볼일이 생겨 길을 돌아 이곳 하북으로 온 것이었네. 그러던 중에 내 자네를 만나 아우의 연을 맺고 그간 동행했으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내가 만나 볼 사람이 있어 더 이상 동생과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네. 쯧쯧! 그렇다고 그리 서운한 표정 지을 필요 없네.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니고 볼일만 잘 끝난다면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테니 말일세.”
“…….”
“이곳에서 가깝다면 저희도 같이 가면 되지 않나요?”
동악사와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유원영만이 아니었다.
주지약 역시 그와의 이별이 아쉬웠기에 좀 더 함께하고자 입을 열었다.
그녀의 요청에 동악사는 곤란한 눈빛을 드러냈다.
“꼬마 여우야,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그리는 어려울 것 같구나. 내 개인적인 문제라…….”
“…….”
자세한 속사정까진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말하길 꺼려 하는 동악사의 모습이 곤란한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를 웃으며 보내 주기 위해 유원영이 주지약을 대신해 입을 연다.
“알겠습니다. 지약이와 더불어 형님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하핫! 암 그래야지. 이왕 기다릴 거면 선운산(鮮雲山) 선녀폭(仙女瀑)이라는 곳에서 날 기다리게나. 이곳에서 열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니 내 볼일이 끝나는 대로 그곳으로 달려가겠네. 한 이틀 정도 기다려 보고 내가 오지 않는다면 내 볼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거니 먼저 가도록 하게. 알겠는가?”
“형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웃으며 서로를 보내 준다.
비록 만나기로 약조를 하였으나 그 약속이 지켜질 수 있다 확정할 수 없기에 그저 웃으며 서로를 보내 줄 뿐이다.
어쩌면 긴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두 사내의 미소 속에서 주지약 역시 미소 지은 채 동악사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 * *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다.
그 헤어짐 속에서 다가올 만남을 기다리며 초원 위에 선 세 남녀가 서로를 바라본다.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떠나려는 동악사를 바라보던 유원영이 그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자 입을 열었다.
“검을 잡기로 하였습니다.”
“……?”
“아저씨?”
의형인 동악사가 원했던 일이다. 그러나 당시 그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던 유원영이었다.
오늘이 되어서야 의형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었던 유원영이 그와의 이별 선물을 대신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결심을 꺼내 든다.
그 결심에 동악사는 진심으로 기뻐 황급히 의제의 양손을 부여잡았다.
“정말인가? 정말 검을 잡기로 했단 말인가? 하핫! 암 그래야지! 나 동악사의 의제가 검도 몰라서야 쓰나? 잘 생각했네, 잘 생각했어! 아니, 근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런 결정을 내렸나?”
“그것이…….”
“아니, 됐네, 됐어. 그깟 사정이야 들으면 어떻고, 또 안 들으면 어떤가? 자네가 무공을 배우겠다 결심한 것이 중요한 게지. 내 이럴 게 아니라 이번에 돌아오는 길에 자네가 익힐 만한 무공들을 좀 훔쳐 와야겠네. 내가 알고 있는 건 자네가 배우기 영 찝찝해서……. 내 정파(正派) 놈들의 고리타분한 무공 중 쓸 만한 것을 훔쳐다……. 아아악! 무슨 짓이냐! 꼬마 여우야!”
“무슨 짓은요? 악선께서야말로 무슨 짓을 하시려는 거예요? 설마 아저씨를 도둑으로 만들어 무림공적이 되어 죽게 하실 셈인가요?”
힘껏 최대한 힘껏 허벅지를 꼬집는 소녀의 매서운 손길에 동악사가 비명을 토하며 그녀를 노려본다.
그러나 빽하니 소리치는 주지약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리 틀린 곳이 없어 동악사는 헛기침을 토해야만 했다.
“흐흠! 누가 꼭 훔친다 했느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거참 융통성 없기는…….”
“괜찮습니다. 전 형님께서 주신 이것이면 됩니다.”
“자네……. 알았는가?”
“…….”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어제였다면 몰라도 오늘 아침 얻은 깨달음을 통해 아직 자신의 몸속에서 숨 쉬고 있는 땅의 기운에 대해 알게 되면서 동악사가 전해 준 서책이 단지 무병장수하기 위한 기 수련법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그것을 알기에 유원영이 웃으며 선유진경을 꺼내 말하니 동악사는 괜스레 죄지은 사람마냥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내 자네를 특별히 속이려 한 것이 아니니 그 점만 알아주게나.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자네에게 주었으나 그것이 딱히 무공이라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네. 그 안에 적힌 천사신공 외에도 무공 비슷한 잡기(雜技) 몇 개가 있기는 하나, 그게 영 말도 안 되는 소리라…….”
“괜찮습니다. 무공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습니까? 제게는 형님께서 주신 것 외에도 따로 익혀야 할 것이 있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따로 익혀야 할 거라니?”
“어머니께서 주신 그것 말인가요?”
유원영의 말을 이해 못한 동악사의 의아한 눈길과 달리 주지약은 은연중 기쁨을 드러내며 유원영을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에 유원영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나 그 입에선 이해 못할 말이 새어 나와 주지약을 혼란케 했다.
“맞다. 네 어머니께서 주신 무공을 배우고자 결심을 굳혔으나 지금 당장 그것을 익힐 순 없을 듯하구나.”
“……?”
무슨 뜻일까?
검을 익히기로 마음먹었으나 정작 그 검을 익힐 수 없다니?
사내의 이해 못할 말에 주지약이 빤히 그를 올려다 보니 유원영은 그녀의 시선 속에서 오늘 아침 보았던 네 글자를 떠올렸다.
화산지검(華山之劍).
화산의 검이다.
책 표지를 넘김과 동시에 드러난 네 글자는 바로 유원영이 손에 쥔 책자 안에 기록된 무공이 화산의 검임을 뜻하고 있다. 또한 그 의미는 여인이 책을 건네주던 당시 해 준 당부와 더불어 경고의 의미로써 유원영의 가슴속에 자리했다.
― 공자님께서 진정으로 손에 든 검을 뽑아 그 길을 가고자 하신다면 제가 준 서책을 펼쳐 보십시오. 그 안에 살고 계시는 세 선인이 공자님께 검을 쓰는 법을 알려 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검에 뜻이 없으시다면 결코 제가 준 서책을 열어 보아서는 안 됩니다. 뜻이 없음에도 그 안을 들여다본다면 공자님께선 결국 자신이 원치 않는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길을 거부한다면 공자님껜 큰 화가 미치게 됨 역시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