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리페어 1권
1화
새로운 시작
프롤로그(1)


체드 K. 레밍턴은 평민 출신 기사다.
희미하니 기억조자 잘 나지 않던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로가디스 후작령에 속한 레잔 영지에 정착해서 살면서 체드는 구김살 없이 씩씩하게 잘 성장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머리도 영리하고 힘도 셌던 체드는 성장하면서 레잔 영지의 영주인 키로프 남작의 눈에 띠었다.
키로프 남작은 똘똘하고 튼튼한 체드를 그의 아들이자 영지 후계자인 오마르의 시동으로 삼았다.
그때 체드는 귀족의 기본적인 예의범절과 기초 학문, 검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귀족이 아닌 체드는 깊이 있게 학문을 채득할 수 없었고, 검술 역시 만족스러울 만큼 배울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세월이 흘러 그가 모시던 영주 아들 오마르가 수도의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오마르의 전속 시동이었던 체드 역시 그런 오마르를 따라 아카데미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체드는 기사 아카데미의 교장이자 티모스 제국의 소드 마스터인 로이터 드 말론 백작과 기이한 인연을 맺게 되고, 그에게서 소드마나 운용법과 검술을 배운다.
오마르가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날, 엉뚱하게 체드의 검에 푸르스름한 오러가 맺혔다.
기사 아카데미는 오마르가 다녔는데, 정작 소드 익스퍼트가 된 것은 그 시동인 체드였던 것이다.
레잔 영지로 돌아간 체드는 키로프 남작의 기사가 되었고, 레밍턴이란 성을 부여받았다.
이후 체드는 키로프 남작의 지원을 받으며 레잔 영지의 기사로 일하게 된다. 그러던 중 대영주인 로가디스 후작의 부름을 받게 된 체드는 운 좋게 로가디스 후작가의 가전 소드마나 운용법과 검술을 전수받는다.
최상급 소드마나 운용법과 최고의 검술, 게다가 로가디스 후작가의 쟁쟁한 기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체드의 실력을 급상승했다.
그리고 체드의 나이 30살에 그는 드디어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체드의 검에 선명하게 빛나는 푸른 오러 블레이드를 보고 로가디스 후작을 비롯해서 모두들 진심으로 체드를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푹!
퍼뜩!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남자는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 남자의 입에서는 어떤 비명성도 일체의 움직임도 없었다.
체드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전면을 쳐보았다. 그의 가슴에는 한 자루 숏 소드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 숏 소드를 쥐고 있는 자가 놀랍게 그가 주군으로 모시고 있던 레잔 영지의 영주인 키로프 남작이었던 것이다.
키로프 남작의 실력으로는 소드 마스터인 체드의 가슴에 숏 소드를 박아 넣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체드의 두 팔에는 마나 동결 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 아이템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은 마비 독에 중독되어 서서히 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지금 체내 마나를 운용하는 것은 물론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키로프 남작이 건네는 두 개의 팔찌를 체드는 일말의 의심 없이 스스로 두 팔에 찼다. 그것이 마법 아이템이란 것도 모르고 말이다.
그리고 웃으며 키로프 남작이 건네는 몸을 마비시키는 독약이 들어 있는 와인도 넙죽 받아 마셨다.
믿음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푹!
뒤이어 또 한 자루의 숏 소드가 체드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몸은 뻣뻣하게 마비되었지만 옆구리를 통해 전해지는 통렬한 통증은 고스란히 체드의 뇌리로 전달되었다.
고통에 체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체드가 힘겹게 옆으로 눈동자를 돌리자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 그 옆에 있었다.
“흐흐흐흐.”
그자의 비웃음 소리와 함께 숨결이 체드의 귀가에 그대로 전해졌다.
그는 바로 키로프 남작의 후계자이자 체드가 기사가 되기 전까지 시동 체드가 모셨던 영주 아들 오마르였다.
울컥!
체드가 한 움큼의 선혈을 토했다.
그때 오마르의 목소리가 체드의 귀가로 들려왔다.
“천한 새끼. 지금까지 네놈의 그 잘난 척하는 꼴을 보느라 얼마나 역겨웠는지 모른다.”
오마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체드를 대놓고 비웃고 있었다.
‘대체 왜?’
체드는 묻고 싶었다. 그러나 마비 독은 그의 몸에 이어 그의 입과 혀까지 굳게 만들었다. 겨우 눈만 굴리던 체드의 눈에 점점 절망이 어렸다.
그때였다. 로가디스 후작이 마법사와 호위 기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벌써 손을 쓴 건가?”
로가디스 후작이 체드의 가슴과 옆구리에 박혀 있는 숏 소드를 보고 말했다.
키로프 남작과 오마르는 급히 머리를 숙여 대영주인 로가디스 후작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우환거리는 빨리 정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평민 기사가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져 좋을 게 없으니 말입니다.”
키로프 남작의 말에 로가디스 후작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안 그래도 요즘은 평민들이 너무 설쳐 대서 골치가 다 아파. 이것들이 이제 먹고 살만하니 귀족들을 너무 우습게 여긴단 말이야. 어험! 그런데 그것은 어디 있나?”
로가디스 후작이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았다.
그러자 키로프 남작이 오마르를 보고 눈짓을 보냈다. 오마르는 즉시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로가디스 후작에게 건넸다.
“녀석이 매일 기록한 검술 수련 기록입니다.”
‘저것 때문이었나?’
키로프 남작과 오마르가 숏 소드를 뽑지 않아 체드는 출혈로 인한 쇼크로 당장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잔인하게도 그들은 체드가 이런 광경을 보고 들으라고 일부러 숏 소드를 뽑지 않았던 것이다.
로가디스 후작이 원한 것은 평민 출신의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소드 마스터인 체드가 로가디스 후작가의 가전 소드마나 운용법과 검술을 배우면서 매일같이 꼼꼼히 그 수련 과정과 신체 변화를 기재한 기록이었다.
그 기록만 있다면 체드 같은 소드 마스터를 얼마든지 키워 낼 수 있었다.
‘아!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로가디스 후작이 정식으로 알려 달라 요구했다면 체드는 얼마든지 자신이 어떻게 소드 마스터가 되었는지 알려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가디스 후작은 체드가 평민이란 이유 때문에 그런 간단한 부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동안 아무도 익히지 못한 페리어드 펜싱을 정말로 익히다니 괴물 같은 녀석이야. 하지만 네 덕분에 우리 가문에 또 하나의 완벽한 검술이 생기게 되었다.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한다.”
로가디스 후작이 비릿하게 웃으며 체드를 향해 말하고, 오마르가 건넨 일일 수련 기록을 받았다.
그는 안의 내용은 보지도 않고 그대로 옆에 있던 그의 전속 마법사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키로프 남작에게 말했다.
“수고했네. 약속대로 우리 가문의 안전한 소드마나 운용법과 검술을 그대 아들인 오마르에게 전수하도록 하지.”
로가디스 후작의 말에 키로프 남작이 기뻐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후작님.”
“고맙긴. 저런 훌륭한 실험 재료를 구해 주었으니 고마운 건 오히려 나지. 하하하하!”
‘실험 재료?’
로가디스 후작의 그 말이 키로프 남작과 오마르가 찌른 숏 소드보다 더 체드의 가슴을 후벼 팠다.

잠시 후 키로프 남작과 무슨 말을 더 주고받던 로가디스 후작이 마법사와 기사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오마르. 저 녀석은 네가 잘 처리하고 와라.”
키로프 남작이 턱짓으로 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이미 시체나 마찬가지인 녀석입니다.”
“그래도 모르니 조심하고.”
키로프 남작은 오마르에게 단단히 당부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흐흐흐.”
키로프 남작을 입구까지 배웅하고 난 후, 오마르가 잔인하게 미소 지으며 체드에게 다시 다가갔다.
그리고 체드의 옆구리에 박아 두었던 자신의 숏 소드를 거침없이 뽑았다.
파팟!
체드의 옆구리에서 피가 튀어 오마르의 얼굴에 묻었다. 오마르는 얼굴에 오물이라도 묻은 듯 불쾌해하며 먼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이 새끼가…….”
화가 난 오마르는 체드의 몸에서 갓 빠져나온 숏 소드로 다시 체드를 찌르려다가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체드의 피를 보고 멈췄다.
그리고 숏 소드를 내렸다. 오마르는 다시 체드 옆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에 대고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체드에게 말했다.
“흐흐흐. 천천히 피 흘리며 죽어라. 몸에서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기분도 꽤 짜릿할 거다.”
체드는 오마르에게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굳어 버린 입과 혀로는 신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어리석은 새끼. 이놈 데리고 가서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려.”
오마르가 뒤쪽에 서 있던 두 기사에게 명령했다.
평소 평민 주제에 자신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질투하던 레잔 영지 출신 체드의 동료 기사 렉터와 루이스가 마비 약에 석상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서 있던 체드의 양팔을 그들의 양 어깨로 부축했다. 그리고 체드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우릴 원망치 마라.”
“우린 시킨 대로 할 뿐이다.”
렉터와 루이스가 뭐라 더 말을 했지만 출혈로 인한 쇼크로 체드는 얼마 못 가서 정신 줄을 놓았다.

화르르르!
체드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이미 주위가 온통 불바다였다. 뜨거운 열기가 체드의 마비된 몸에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죽는구나.’
이제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
체드의 모친은 1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녀는 비록 평민 출신으로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체드에게는 그 어떤 현자보다 현명하신 분이셨다. 그녀는 항상 체드에게 바보같이 살라고 말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행동하고, 우직하게 살아야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단다.”

그런 그녀의 지혜는 체드에게 겸손과 성실이야말로 가장 큰 지혜라는 교훈을 남겼다.
그렇게 소중한 어머니를 체드는 검술을 수련한다는 핑계로, 소드 마스터가 되겠다는 욕심에 마지막 임종조차 지켜 드리지 못했다.
체드는 바보로 살았으되, 욕심 많은 바보로 살아왔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대로 사람은 누구도 탐욕과 이기심, 거짓됨, 어리석음을 피할 수 없는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였다.
체드 역시 다를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과 함께 체드는 그의 지난 30년 삶을 돌아보았다.
그가 살아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럴듯한 추억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나면 모든 시간을 검술 수련으로 보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체드는 그 흔한 연애는 고사하고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친구조차 사귀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희생하며 그토록 원했던 소드 마스터가 되었건만 이토록 허무하게 죽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리고 미안하다, 체드.’
이렇게 죽음으로 해서 아들이 훌륭하게 성장해서 세상에 빛이 되어 주길 바라셨던 어머니의 뜻도 지켜 드리지 못하게 되었고, 자신이 품어 왔던 꿈도 실현시키지 못하게 된 점을 체드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와 자신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이제 죽어 하늘나라로 가면 돌아가신 어머니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곧 다가 올 죽음이 그리 두렵지 않았다.
‘내가 원하던 삶은 살아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는 것은 정말 너무도 억울하구나.’
소드 마스터가 되었을 때, 체드는 이제 자신이 원하던 바를 비로소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런데 소드 마스터가 되자마자 이렇게 죽게 되었으니, 그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