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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프롤로그(2)


―더 살고 싶나?
그때 거센 불길을 뚫고 밝은 광채가 나타났다. 분명 그 광채가 말을 했다.
“누, 누구냐?”
체드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굳었던 입과 혀가 움직였다. 마비 독의 효능이 풀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두 손을 보니 차고 있던 마법 아이템도 사라지고 없었다.
마법 아이템은 꽤 고가의 물건이다. 아마 동료 기사 렉터와 루이스가 체드를 태우기 전에 마법 아이템을 따로 챙긴 모양이다.
‘빌어먹을…….’
체드는 두 팔에 찼던 마법 아이템과 마비 독을 생각하니 갑자기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소드 마스터였다. 팔에 찼던 마법 아이템은 무리하면 박살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비 독은 달랐다. 차라리 일반 극독이었다면 체드도 바로 눈치를 챘을 터였다.
마비 독은 체드도 눈치채지 못하는 가운데 천천히 체드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키로프 자작이 소드 마스터가 된 것을 거듭 축하한다며 건넨 와인을 의심 없이 마신 것이 실수였다.
오마르의 말대로 체드는 정말 어리석었다. 갖은 사념에 잠긴 체드의 귀로 다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말인가?
찬란하게 빛나던 광채가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키가 제법 큰 남자였다.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는 빛나는 흰 머리카락을 발목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주위로 하얀 서광이 뿜어져 나왔는데, 불길이 감히 그 주위에 범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드러난 그 남자의 얼굴은 살 떨리도록 아름다웠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아!”
죽음을 목전에 둔 체드의 입에서도 절로 찬탄이 터져 나왔다.
―나는 천사이며 동시에 악마인 루치펠이다.
“타락천사 루치펠!”
체드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교만하고 질투가 많아 천계에서 지상으로 내쫓긴 타락천사 루치펠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리고 체드의 어머니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중적인 존재인 루치펠의 독실한 신자였다.
―너의 어미 조안은 나의 신자, 나를 가장 잘 이해한 인간이었다. 그녀가 죽기 전 나에게 부탁했다. 너를 지켜 달라고 말이다. 살려 주마. 그리고 기회도 주겠다. 대신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무엇보다 살려 주겠다는 말에 생기를 잃어 가던 체드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해 줘야 할 일이 있다는 말에 체드는 곧 의심스런 눈빛으로 변했다.
죽음과 맞바꿀 정도라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 그것이 무엇입니까?”
체드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건 네가 너의 꿈을 쫓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저의 꿈이요?”
어린 시절 체드의 꿈은 귀족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평민 신분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모두 해 보고 싶었다. 학문과 검술을 제약 없이 마음껏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성장해서 어른이 된 체드는 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기사가 된 후에도 체드는 여전히 귀족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 수련만 하지 않았던가? 소드 마스터가 되면 당연히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어른이 된 후 체드는 커진 몸만큼이나 욕심도 많이 늘어 있었다.
‘내 꿈은 넓은 영지를 가진 영주가 되어 휘하에 충성스러운 기사들과 병사들을 두고, 아름다운 부인과 아이들, 그리고 나의 명성이 제국의 역사에 찬란히 남도록…….’
체드는 자신의 꿈을 생각하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때 루치펠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 휘감기며 체드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1. 새로운 이름(1)


침대 위에는 젊은 남자가 나체로 누워 있었다. 그런데 남자는 화상을 입은 듯 온몸이 붉게 부어 있었고 곳곳에 수포가 부풀어 있었다.
특히 얼굴 쪽의 화상이 심해 남자의 얼굴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주위로 마법사와 치료술사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침대에 누운 남자를 치료하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 쏟아붓고 있었다.
“크윽!”
남자가 엄청난 고통에 신음하며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더욱 큰 고통에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부르르 몸을 떨며 다시 누웠다.
“이봐, 진통제!”
고통이 계속 이어지다가 누가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점차 아픔이 사라졌다.
그때 남자의 귀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대신관께서는 아직이신가?”
“지금 막 도착하셨습니다. 바로 이쪽으로 올라오실 겁니다.”
“휴우, 다행이로군.”
그때 남자의 귀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윙윙거리다가 이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는 의식을 잃었다.
위이이이잉!
다시 귀가 울렸다. 남자는 그 잡음에 짜증이 나서 눈을 떴다. 그리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웅성웅성.
처음에는 희미한 빛만 보였고 앞으로 어른거리는 형상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이 점점 더 또렷한 형상들을 만들어 냈다. 흐릿하지만 세 사람의 얼굴이 남자의 눈에 보였다.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입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기적.”
“어서 빨리 백작님께 알리게.”
“예.”
“이걸 좀 마셔 보십시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남자에게 쓴 약을 먹였다. 약의 맛에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약이 목으로 넘어가면서 가슴이 뻥 뚫리며 청량한 기분이 들자 그는 본능적으로 그 약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런 후 그는 다시 누워 잠이 들었다. 한동안 그가 한 일은 그 쓴 약을 먹고 잠자는 일밖에 없었다.

거의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나자 그 남자는 그런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가 완연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자 한 위엄 있게 생긴 중년 귀족 남자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누워 있는 남자를 보고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느냐?”
누워 있던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중년 귀족을 쳐다보았다.
“다행이다, 살아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중년 귀족을 보고 남자는 묻고 싶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누군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남자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베르테르 드 크라이머. 티모스 제국 크라이머 백작 령의 영주이며, 제국군 제3군단의 군단장을 맡고 있단다.”
중년 귀족의 소개에 남자는 깜짝 놀라며 두 눈을 부릅떴다. 크라이머 백작가라면 티모스 제국의 기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크라이머 백작가는 제국 최강 기사단인 질풍 기사단이 소속 되어 있는 가문으로, 단일 가문으로 역대 가장 많은 소드 마스터를 배출해 낸 제국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이다.
그런 대단한 가문의 주인이자, 현 제국에서 손꼽히는 실력의 소드 마스터가 지금 남자의 눈앞에 있다.
“너의 이름을 말해 보겠느냐?”
크라이머 백작의 질문에 남자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체드입니다…….”
체드는 자신의 성인 레밍턴도 이름과 성 사이에 들어가는 기사의 호칭인 ‘K(Knight)’도 넣지 않고 오직 이름만 말했다.
자신을 죽이려 한 자에게서 받은 성과 기사의 호칭을 사용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이름은?”
“조안.”
“으음, 역시…….”
크라이머 백작의 눈에 촉촉하니 물기가 어렸다.
“너를 너무 늦게 찾은 것 같구나.”
크라이머 백작이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벌써 30년이나 된 건가?”
크라이머 백작이 기사 수련을 떠났을 때 알게 된 평민 여인이 있었다. 수련 도중 심하게 부상을 당했던 크라이머 백작은 그 평민 여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평민 여인이 바로 체드의 어머니인 조안이라는 것이다.
“기사 수련 중이었던 나는 상처가 낫자 가문으로 돌아가야 했다. 뒤에 그녀를 찾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없었다. 그렇게 30년이 지나 기적처럼 그녀의 흔적을 찾았다. 그런데 이미 그녀는 하늘나라로 떠나고 없더구나. 그녀에게 체드라는 아들이 하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크라이머 백작의 말을 듣고 체드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그럼 크라이머 백작이 내 아버지!’
잠시 후 하얀 신관복에 황금 띠를 허리에 두른 늙은 신관이 나타났다. 그러자 크라이머 백작이 직접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대신관님.”
“허허허. 상처가 많이 나았군요.”
대신관이 체드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이 다 대신관님 덕분입니다.”
“허허허,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다 신의 뜻이지요.”
크라이머 백작이 늙은 신관을 가리키며 체드에게 말했다.
“오딘 신전의 대신관이신 메리슨 님이시다. 너를 살리기 위해 먼 길을 와 주셨단다.”
체드가 예의를 갖추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메리슨 대신관이 말렸다.
“괜찮네. 인사라면 다 낫고 하게.”
“내가 대신관님을 모신 것은 확인할 것이 있어서다.”
체드는 그 확인할 것이라는 것이 뭔지 곧 짐작했다.
“손을 주겠나?”
메리슨 대신관이 체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체드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대신관에게 내밀었고 그 손을 대신관이 잡았다.
“백작님께서도.”
메리슨 대신관이 남은 한 손을 크라이머 백작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크라이머 백작이 메리슨 대신관의 손을 잡았다.
각각 체드와 크라이머 백작의 손을 맞잡은 메리슨 대신관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우우웅!
메리슨 대신관의 몸에서 서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뜬 메리슨 대신관이 말했다.
“이 젊은이는 틀림없는 크라이머 백작님의 핏줄입니다.”
“오오!”
“아아!”
크라이머 백작과 체드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 체드의 머릿속에 타천사 루치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 이것이었나?’
체드는 아버지 없던 평민 출신 사생아에서 무려 30년 만에 귀족인 그의 부친을 찾았다.

대신관이 돌아가고 다시 둘만 남게 되자 크라이머 백작이 체드의 가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통 사람은 심장이 가슴의 왼쪽에 있다. 그러나 우리 크라이머 백작가 사람들은 특이하게 심장이 오른쪽에 있지. 그것이 너를 살렸다. 나는 너를 치료하던 치료술사가 네 심장이 오른쪽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미 네가 내 아들이라 직감했다.”
부친 앞에서 소드 마스터나 되는 자신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한 것이 체드는 못내 부끄러웠다.
“제가 미흡해서 생긴 일입니다.”
체드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는 가슴과 옆구리에 검상을 입었고, 불에 타 죽어 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크라이머 백작이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빛내며 체드에게 물었다.
체드는 자신이 살아온 30년 인생을 크라이머 백작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때 크라이머 백작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감히!”
바우우웅!
“백작님, 안 됩니다!”
그때 젊은 치료술사가 기겁하며 외쳤다. 그러자 그 소리에 놀라 크라이머 백작이 급히 살기를 거뒀다.
“환자 앞에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보통 사람이 소드 마스터의 살기에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지 않으신 분이 말입니다.”
젊은 치료술사는 크라이머 백작 앞에서도 당당했다. 그런데 크라이머 백작의 반응이 더 놀라웠다.
“허허허, 미안하네. 내 너무 흥분해서 실수를 했네.”
귀족인 크라이머 백작이 사과를 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젊은 치료술사는 크라이머 백작에게 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환자는 두 군데 치명적인 검상과 심한 내상에 화상까지 입어 거의 죽다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그런 살기는 자칫 환자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크라이머 백작이 겸연쩍어 하며 말했다.
“그만하게, 로베르토. 내 조심하도록 하겠네.”
“환자는 이제 쉬어야 하니 그만 나가 주십시오.”
로베르토라 불린 젊은 치료술사의 일방적인 축객령에 크라이머 백작은 저녁때 다시 오겠다고 체드에게 말하고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