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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1. 새로운 이름(2)


“자, 마시십시오.”
젊은 치료술사 로베르토가 체드에게 쓴 약을 권했다.
“이 약을 먹으면 또 자게 되는 겁니까?”
체드가 약을 먹기 전 로베르토에게 물었다. 그러자 로베르토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비록 운 좋게 심장을 비껴 갔지만 다른 장기에 내상을 입은 상태였고, 화상으로 인해 피부와 신경계에 손실이 컸습니다. 사실 저의 소견으로 살아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 스스로가 살아나신 겁니다. 비록 대신관께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셨지만 당신이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그 끈질긴 생명력과 치유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현상이지요. 혹시 소드 마스터입니까?”
“…….”
체드는 대답 대신 쓴 약을 들이켰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믿지 않겠다.’
체드는 뼈아픈 배신 이후 자신의 능력을 숨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자신을 구해 준 치료술사로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약을 먹고 나자 곧 잠이 쏟아졌다.
체드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로베르토의 눈길을 피해 눈을 감았다.

체드가 눈을 떴을 때 주위가 어두웠다. 그리고 약속대로 저녁이 되자 크라이머 백작이 나타났다. 그는 흥분한 채 체드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하하하. 너의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제국 귀족원 명부에 너의 이름을 올렸다. 이제 너는 평민 체드가 아니라 브란트 드 크라이머, 크라이머 백작 자제다.”
놀랍게 체드는 하루아침에 귀족이 되었다.
물론 작위 없는 귀족의 자제로 크라이머 백작이 살아 있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인정되는 귀족 지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평민과는 하늘과 땅 차이었다.
“브란트!”
체드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조용히 입속으로 되뇌었다. 체드는 현재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째 계속 잠만 잤다. 그래서 현재 자신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그는 몰랐다.
“거울을 좀 보고 싶습니다.”
체드의 말에 크라이머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크라이머 백작을 감시하고 있던 로베르토 역시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화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심한 겁니까?”
“그, 그게…….”
크라이머 백작이 대답하기를 주저하자 로베르토가 나섰다.
“화상은 이제 다 가라앉았습니다. 이제 화상 부위에 새살을 돋게 하는 치료를 할 것입니다. 아주 고통스러운 치료인데 참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로베르토의 말에 체드가 바로 대답했다.
“인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로베르토가 기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크라이머 백작이 체드를 보고 자상하게 말했다.
“너의 치료는 본가에 가서 계속할 생각이다.”
“그럼 이곳은?”
“여기는 아직 로가디스 후작령이다. 왜, 이 아비가 너의 복수를 해 주길 바라느냐?”
크라이머 백작의 눈이 살짝 빛났다.
말은 고마웠지만 체드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 나이가 올해 30살입니다. 저의 복수는 당연히 제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가디스 후작은 티모스 제국을 구성하고 있는 10명의 대영주 중 한 명이다.
제아무리 대단한 크라이머 백작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상대할 수 있는 가문이 아니었다.
수련만 했다고 하지만 그 정도 제국 정세는 체드도 알았다. 지금은 복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해라. 그럼 내일 수도로 떠날 것이다.”
크라이머 백작이 나가고 로베르토가 체드에게 다시 약을 권했다. 체드는 그 약을 받아 들면서 로베르토에게 물었다.
“저에 대해 얼마나 아버님께 말씀 드렸습니까?”
체드의 물음에 로베르토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왜 제가 브란트 님이 소드 마스터인 것을 밝힐까 봐 그러십니까?”
“…….”
체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로베르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 체드를 직시하며 로베르토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체드에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치료술사는 환자와의 비밀은 꼭 지키니까. 하지만 언제고 스스로 밝히십시오.”
로베르토가 비밀을 지켜 주겠다는 말에 체드는 감사의 뜻을 담은 눈빛을 로베르토에게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약을 마셨다.
‘로베르토도 조금 전 나를 브란트라고 불렀다. 그래, 이제 평민 기사 체드는 죽었다. 나는 크라이머 백작의 아들 브란트다. 지금 자고 일어나면 나는 철저히 브란트로 살 것이다. 이제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어떤 약속에도 메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내 꿈을 이룰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복수도 해야겠지.’
체드가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사이 잠이 쏟아졌다.

다음 날 브란트는 수도로 옮겨졌다. 크라이머 백작가에 도착한 브란트는 그날부터 고통스런 치료에 들어갔다.
그 치료라는 것은 단순했다. 불에 타서 죽은 살과 신경을 도려내고 그 위에 값비싼 마법 포션을 들이부어 새살을 돋게 만드는 것이다.
부글부글!
뼈가 드러난 상처에서 하얀 거품과 함께 새살이 생겼다.
브란트는 이빨이 상할 것을 염려해서 입에 재갈을 물고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악!”
이 치료는 한마디로 끔찍한 고문과 같았다.
브란트는 하루에 두 차례 이렇게 괴성을 지르다가 고통에 겨워 기절하기를 매일같이 반복했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훌쩍 흘렀다. 몸의 화상이 모두 치유되고 마지막으로 얼굴의 화상 치료마저 끝이 났다.
“이제 얼굴의 붕대를 풀도록 하겠습니다.”
로베르토가 브란트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그러자 예전 평민 기사 체드와는 사뭇 다른 외모의 젊은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체드는 얼굴선이 굵고 남성스러웠다. 그런데 바뀐 모습의 브란트는 갸름한 턱 선에 여성스러운 면이 느껴졌다. 기사의 얼굴치고는 너무 약해 보였다. 그러나 숱이 많은 금발머리는 예전과 같았다.
로베르토가 보여 주는 거울 속의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얼굴을 보며 브란트는 아주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말씀하신대로 누구에게나 호감이 가는 얼굴입니다. 어떻게 만족스러우십니까?”
브란트는 얼굴을 치료하기 전 특별히 로베르토에게 부탁을 했다. 예전 자신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얼굴로 고쳐 달라고 말이다.
“너무 잘생기지도 너무 강해 보이지도 않군요. 서글서글해 보이는 눈매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브란트가 만족해하자 로베르토가 말했다.
“자, 그럼 이제 가족 분들을 만나러 가시지요.”
로베르토의 말을 듣고 브란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족들이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금 브란트에게 가족이라고는 크라이머 백작뿐이었다. 그런데 로베르토는 가족들이라고 했다.
브란트가 계속 의아한 눈으로 로베르토를 쳐다보자, 로베르토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브란트에게 물었다.
“설마 크라이머 백작께서 혼자일 거라고 생각하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지난 30년의 세월을 브란트는 잊고 있었다. 그동안 크라이머 백작이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긴 30년이 아닌가?’
“가족이 몇 명입니까?”
브란트의 물음에 로베르토가 바로 대답했다.
“모두 50명입니다.”
“네?”
“설마 크라이머 백작께서 수련 기사 생활 중에 만난 여인이 브란트 님 어머니 혼자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 그럼?”
“네, 맞습니다. 크라이머 백작께서는 귀족이신 두 분의 부인과 평민 출신 여섯 분의 부인을 두고 계십니다. 그 사이에 태어난 자제가 10명이고 영애가 7명입니다. 그리고 그분들 중 결혼하셔서 가족이 된 배우자들과 낳은 후예들이 모두 25명입니다.”
브란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로베르토가 그것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놀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크라이머 백작의 자리는 장자 우선이거나 출신 따윈 따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오로지 그 지닌 바 능력만으로 뽑습니다. 그러니 브란트 님께서도 충분히 백작이 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제가 보기에 가장 유력한 분이실 것 같군요.”
브란트는 그런 크라미어 백작가의 내부 사정까지 조목조목 다 알고 있는 로베르토의 정체가 더 궁금했다. 그러나 로베르토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가족 분들을 만나러 가실까요?”
로베르토가 성큼 먼저 앞장을 섰다. 브란트는 갑자기 생긴 50명의 가족들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난 한 달간 브란트는 치료를 받느라 거처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상 브란트는 처음 크라이머 백작가를 보게 되었다.
브란트도 비록 당시에 시동이었지만 수도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오마르를 따라 여러 귀족가를 방문했다.
크라이머 백작가는 그때 보았던 여러 귀족가와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단지 기사들이 수련하는 야외 수련장과 수영장, 또 승마장이 저택 부지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사들이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과연 제국 최강의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는 가문다운 모습이었다.
“크라이머 백작가를 처음 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활기찬 곳이로군요.”
“네. 활기차다 못해 과격한 곳이지요.”
로베르토는 그 말을 남기고 앞장서 브란트를 안내했다.
“이곳이 백작님께서 각종 정무와 손님들을 접견하는 곳입니다. 백작님의 집무실과 접객실, 그리고 연회도 이곳에서 주로 열립니다.”

로베르토는 브란트를 백작가에서 가장 큰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가족과 만나기로 한 넓은 홀 안으로 안내했다.
홀 안에는 먼저 와 있던 백작가의 가족들이 두 패로 나뉘어서 각각 양쪽으로 모여 있었다.
왼쪽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오른쪽에는 화려한 드레스의 두 귀부인과 그 주위로 역시 잘 차려입은 세 명의 젊은 남자와 여자가 서 있었다.
브란트를 보고 왼쪽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조용한데 비해 오른쪽의 반응은 꽤 신랄했다.
“또 어디서 저런 자를…….”
“이게 어디 하루 이틀 된 일인가요. 저는 이미 포기했어요.”
두 귀족 부인이 브란트를 보고 짜증 섞인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귀족 부인 주위에 서 있던 젊은 남자들이 브란트를 흘겨보며 한마디씩 했다.
“저자가 한 달 전에 아버님께서 데려왔다는 그자인 모양이군.”
“귀족 출신이 아니라고 했지?”
“쳇, 또 평민인가?”
그러자 혼자 있던 젊은 여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고작 저자 때문에 왕궁 무도회 초대에도 가지 못하다니. 정말 짜증나요.”
그런 젊은 여자를 보고 로베르토가 한마디했다.
“아가씨, 잊으셨습니까? 크라이머 백작가에서는 가족 회의가 가장 우선이란 것을 말입니다.”
로베르토의 말에 젊은 여자를 비롯해서 두 귀족 부인들도 입을 다물었다.
“이제 다 온 것 같은데 그만 아버님을 부르는 게 어떤가, 로베르토 총관.”
‘총관?’
브란트가 놀랍다는 눈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로베르토를 쳐다보았다.
총관이란 귀족가의 가주의 부재시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끄는 중요한 자리다. 브란트의 예상대로 로베르토는 단순히 치료술사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집무실에 계시는 백작님께 알렸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오시고 계실 겁니다.”
로베르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라이머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브란트를 데리고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 가족들 가운데로 가서 말했다.
“하하하. 이렇게 또 가족들이 다 모였군. 오늘 가족 회의를 소집한 것은 여기 나의 아들 브란트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브란트는 올해 30살이고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아 가정을 이루지는 못했다. 지방 영지의 기사 출신이니 제 밥값은 할 것으로 본다.”
크라이머 백작이 브란트가 기사 출신이라는 말을 하자 홀 안의 남자들이 일제히 브란트의 몸부터 자세히 살폈다.
“브란트, 가족들에게 인사를 해라.”
“브란트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브란트는 양쪽으로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그 반응이 시큰둥했다.
“자, 그럼 가족들을 소개해 주지.”
그러든 말든 크라이머 백작은 두 귀족 부인과 그 자녀들부터 브란트에게 소개했다.
평민 부인들에 비해 크라이머 백작이 크라이머 백작가의 주인이 되고 나서 결혼을 한 두 귀족 부인은 결혼한 지 20년이 되지 않아 그 자녀들의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