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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복잡한 표정이 그녀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엄지와 중지로 딱, 소리를 나게 튕겼다. 한 번의 부딪힘으로 종이 한 장이, 다시 한번 부딪힘으로 펜 하나가 테이블 위에 생겨났다.
“지, 지금 이게…….”
놀란 보영이 대장을 바라보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마법 같았다. 그녀의 반응에도 대장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저승사자는 인간 세계 물건을 못 만지거든. 만지려면 인간화해야 하는데, 인간화는 체력적으로 힘이 많이 필요해서. 그냥 저승사자가 쓸 수 있는 펜과 종이를 만드는 편이 빠르고 힘도 덜 드니까.”
“내가 더위를 먹었나.”
“믿기 힘들겠지만 이제 좀 받아들이는 게 나을 텐데.”
대장은 펜을 손에 쥐고는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하였다. 가장 위에는 ‘저승 본부’라고 적혀 있었다. 그 옆에는 ‘본부장’이라는 단어가 적혔다.
“우선 인간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뭐, 대충 저승이 뭔지는 알 테니까. 저승은 크게 저승 본부라는 게 있고 거기의 총 관리자가 바로 저승 본부장이라는 저승사자. 가장 높은 사람이고 모든 인간의 죽음을 책임지고 관리하지. 이 본부장님이 인간 개개인의 매년 생일을 기점으로 1년 안에 죽게 되는지, 살게 되는지를 저승 명부를 통해 확인하는 거야.”
대장은 그 아래 선을 긋고는 ‘매니저’라는 단어를 적었다.
“그 아래는 매니저라고, 저승사자들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 사람들은 영혼을 회수하는 일은 하지 않고, 관리를 하는 거야. 그룹별로 저승사자들이 나뉘거든. 그 아래는 바로 나와 같은 직급의 ‘대장’이라 불리는 저승사자가 있어. 나 같은 경우도 영혼을 회수하는 게 아니라 저승사자 후보생들을 일대일로 교육시키는 일을 하는 거지. 쟤가 교육시키고 있는 내 담당 저승사자 후보생, 772번이야.”
대장이 손가락으로 772번을 가리켰다. 보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772번으로 향했다. 어떤 표정도 짓지 않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보영은 다시 대장이 적고 있는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우리 밑 계급이 바로 저승사자들이지. 저승사자들은 흔히 말하는 영혼을 회수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가장 마지막이 저승사자 후보생들이야. 말 그대로 후보생이라서 저승사자가 회수하지 않는 영혼들을 회수하지.”
“후보생인데 영혼을 회수할 수 있어요?”
“좋게 말하면 영혼을 회수하는 거고, 사실은 저승사자들이 귀찮아하는 영혼을 회수하는 걸 담당하고 있어. 인간들은 죽음을 어떻게 분류하는지 모르겠지만 저승에서는 수많은 인간의 죽음을 크게 4가지로 분리해. 때가 되면 죽는 운명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 누군가로부터 죽음을 당하는 살해, 그리고 정말 갑작스럽게 죽는 돌연사.”
대장은 종이에 운명사, 자살, 살해, 돌연사라는 듣기만 해도 섬뜩한 단어들을 적었다. 보영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하지만 대장의 눈에는 보영의 표정 변화가 들어오지 않았다.
“운명사랑 자살, 살해는 본부장이 인간 개개인의 생일을 기점으로 1년 동안의 운명을 판단할 때 해당 인간이 어떤 죽음을 언제 맞이하는지 알게 되거든. 그럼 이걸 담당 매니저한테 보내고, 매니저는 이걸 저승사자들에게 알려 주지. 그럼 저승사자들은 저승에서 있다가 정해진 날짜, 시간에 죽음을 맞이한 인간의 영혼을 회수하면 돼. 그래서 저승사자들은 딱히 불편한 일은 없어. 정해진 시간에 영혼을 회수하면 되는 거니까.”
대장의 펜은 살해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 가지 죽음 중에서도 살해 같은 경우는 억울한 죽음이지. 그렇기 때문에 살해당한 인간들한테 우리 같은 대장이 찾아가는 거야. 억울하게 죽었으니 기회를 주는 거지. 그 기회는 저승사자로 태어나는 것이고.”
“네?”
“인간 세계에서는 누군가를 살해했을 때, 가해자에게 어떤 심판이 내려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승에서는 살해당한 영혼이 가장 불쌍하고 안타까운 영혼이니까. 어쨌건 살해를 당하게 될 명부는 우리 대장들한테 전해져. 그럼 우리들은 그 영혼에게 찾아가 묻지. 저승사자가 될래, 아님 인간으로 다시 환생할래. 선택을 해서 저승사자가 되겠다는 답을 받으면 그날로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지우고 저승사자 후보생이 되는 거야. 쟤가 그런 케이스지.”
대장이 볼펜 끝으로 772번을 가리키자 보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772번은 그저 테이블에 앉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럼 저승사자 후보생은 바로 돌연사하는 영혼을 회수하는 거겠네요?”
보영이 대장이 적은 단어 중 하나 남은 돌연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대장은 만족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보영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대로 보영의 머리를 통과하였다.
“아, 미안. 깜빡했네, 내가 널 만질 수 있다고 착각했어.”
“아, 네.”
“어쨌건 제법 똑똑한데? 네 말대로 저승사자 후보생이 바로 이 돌연사에 해당하는 인간의 영혼을 회수하는 거야. 말 그대로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르지만 본부에서 해당 인간이 1년 안에 돌연사를 하게 된다는 운명을 접수하게 되면, 그날로 저승사자 후보생을 해당 인간에게 붙이는 거야. 저승사자 후보생은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인간을 길게는 1년, 짧게는 하루까지 쫓아다니는 거고. 그러다가 인간이 돌연사를 하게 된 즉시 영혼을 회수해서 저승으로 복귀해야 해. 그러고 나면 저승사자 후보생은 저승사자로 승급할 수 있어. 이게 말은 쉬워 보이는데, 생각보다 힘들어. 언제 담당 인간이 죽을지 모르니까 한시라도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되거든.”
“꼭 영혼을 바로 회수해야만 해요?”
“안 그럼 악귀한테 뺏겨.”
“악귀요?”
보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장은 보영을 바라보며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안 좋은 일들은 대부분 악귀가 장난을 치는 거야. 악귀의 수가 늘어나면 점점 더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 돌연사도 악귀의 영향으로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야. 악귀는 호시탐탐 돌연사를 하게 될 인간을 노리거든. 악귀가 돌연사한 영혼을 가져가면 그 영혼은 자연스럽게 악귀로 바뀌어. 악귀는 그렇게 자신들의 힘을 키워 가. 우린 그걸 막으려는 거야.”
“그럼 제가 돌연사할 운명이라는 게 오늘…… 제 생일을 기점으로 1년 동안의 기록을 저승 본부에서 확인한 결과를 통해서 나왔다는 거예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던 대장이 멈칫했다. 보영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은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매년 죽음에 관한 운명이 점쳐지고, 본부에선 그걸 확인하고 우리를 파견한 거니까.”
“그럼 저는 곧 죽는다는 거네요. 언제인지도 모르고.”
“그렇지.”
“근데 왜 저 사람, 아니 저 저승사자 후보생이란 분은 인간화가 된 거예요? 그쪽은 왜 나한테 보이는 거예요? 설마 돌연사할 운명의 인간은 저승사자가 보이는 거예요?”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질문에 대장은 미간을 좁혔다.
“하나씩 물어, 하나씩.”
대장의 말에도 보영은 진정이 안 되는 눈치였다. 상황을 파악하던 772번이 조용히 입을 뗐다.
“네가 죽을 뻔했잖아. 그래서 인간화를 한 거였어, 구해 주려고.”
“네?”
“뭐?”
예상치 못한 772번의 말에 보영도, 대장도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영의 머릿속에 아까 있었던 사고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야, 너 뭐라고? 쟤가 죽을 뻔해서 구해 주려고 인간화를 했다고?”
“…….”
“와, 이 또라이를 봤나. 야! 너 얘 그냥 내버려 뒀으면 그대로 영혼 회수할 수 있었잖아! 근데 뭘 해? 얘를 구해? 구하기 위해 인간화를 해? 이런 미친놈을 봤나!”
대장은 꽤나 화가 난 얼굴로 772번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그를 말리기 위해 보영이 반사적으로 일어났지만 이미 인간화가 된 772번을 대장은 만질 수 없었다. 그거대로 화가 난 대장은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볼펜을 집어던졌다. 야속하게도 볼펜은 벽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저승사자 후보생이야. 쟤 영혼 회수 못 하면 네가 사라지는데, 뭐? 네가 할 일은 쟤가 죽었을 때 영혼을 회수하는 거지, 쟤 곁에 머물면서 구해 주는 게 아니라니까?”
“알아. 나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순간적으로 인간화가 되어 버렸다고.”
격분한 대장의 모습과는 달리 772번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그런 772번의 모습은 대장의 화를 더 돋우고 있었다.
“이제 어쩔 거야? 인간화는 본인만이 풀 수 있는데, 안 풀리는 걸 어떡할 거냐고!”
“나도 지금 방법을 찾고 있잖아. 저승에서 트레이닝 받을 때는 잘 됐는데, 왜 안 풀릴까? 대장이 나 트레이닝 잘못 가르친 거 아니야?”
“뭐, 이 또라이야?”
“저, 저기요. 잠깐만요, 잠깐만.”
격한 감정이 오가는 두 남자를 보영이 말렸다. 그들의 시선이 보영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 사정은 대충 알겠고요. 이제 내 얘기 좀 들어요. 둘이 싸우든,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패든 나랑은 이제 상관없어요.”
보영의 말에 대장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보영은 대장을 바라보다 772번을 가리켰다.
“원래대로라면 저쪽이 앞으로 최대 1년 동안 내 주변에서, 내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어야 하는 거라는 거죠? 저승사자 후보생의 모습으로.”
“그렇지.”
“그럼 저쪽이 인간화가 되었으니까 풀려서 저승사자 후보생이 될 때까지는 내 영혼 회수 못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상관없어. 인간화가 되더라도 영혼은 회수할 수 있거든.”
“네?”
담당 후보생이 구제불능이면 조금이라도 죽음을 늦추거나 운명을 바꿔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보영의 예상과는 다른 답변을 내놓는 대장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 대장과 772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럼 앞으로 어떡해야 하는 건데요?”
“어떡하긴. 예정대로 너는 1년 안에 돌연사로 죽는 거야.”
“아니, 죽는 건 그렇다 쳐도 저쪽이 날 쫓아다녀야 한다는 거예요? 인간화한 채로?”
“그래야지, 뭐 별수 있어? 그러다 너 당장이라도 죽게 됐을 때, 악귀한테 네 영혼 갖다 바칠 거야?”
보영은 갑작스럽게 두통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머그잔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대장과 772번은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꽤나 큰 머그잔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어느새 비워졌다. 그것만으로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건지 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띵동. 쾅쾅쾅쾅!
“언니! 보영 언니!”
“누나! 야, 누나 쓰러진 거 아니야?”
갑작스럽게 현관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울리는 벨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보영은 상황을 파악하고자 눈을 굴렸다.
그러고 보니 사고가 나기 전, 그녀는 진아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사고와 동시에 휴대폰을 떨어뜨리면서 이후로 연락이 끊겼으니 아마 진아와 성현이 놀라 그녀를 찾아왔으리라 생각했다.
“빠, 빨리! 올라가요!”
“뭐?”
보영은 발을 동동 굴리며 대장과 772번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는 대장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대로 대장의 몸을 통과하는 자신의 손에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넘어지려는 보영을 772번이 뒤에서 받쳐 주었다. 하지만 보영은 772번의 배려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