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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늘 같은 출근길 만원 버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고, 숨이 막히는 길.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로 인해 불쾌하지도, 짜증스럽지도 않다. 갑작스러운 급정거로 인해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린다 할지라도.
“괜찮아?”
출근길 인파로부터 나를 막아 주는 한 사람, 장 대리가 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버스에서 내리고 회사로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출근길 내내 잡고 있던 손을 잠시 놓았다. 저 앞에 보이는 유리문을 통과하면 우리는 애정 기류라고는 1g도 없는 동료처럼 행동해야 한다.
“할 수 있겠어?”
내가 묻자 장 대리는 그저 웃기만 한다.
“아니, 못할지도 몰라. 나는 김 대리가 너무 좋거든. 일하다가도 너를 안고 싶을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떻게 하지?”
괜히 더 오버를 하는 장 대리의 발 앞코를 신고 있던 구두로 가볍게 콕 찔렀다.
“두 분 오늘따라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어느새 우리 사이를 비집고 나타난 정민 씨가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란 내 표정을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씨익 웃으며 팔짱을 꼈다.
“왜 두 대리님이 같은 버스에서 내리셨을까? 사는 곳도 정반대이시면서.”
어젯밤 헤어진 장 대리가 오늘 새벽같이 보고 싶다며 집 앞에 찾아왔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 그건 말이지…….”
황급히 궁색한 변명을 찾아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왜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던 두 분의 얼굴이 하루 만에 활짝 폈을까? 사내 연애 3년 차인 제가 감히 추측컨대…….”
정민 씨가 괜히 뜸을 들였다.
“추측컨대, 뭐? 나 화장품 바꿨어!”
이런 때일수록 낯짝은 더 두꺼워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말해 놓고도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 말할까요? 아니면 국쌍희 있는 자리에서 말할까요?”
정민 씨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악한 것 같으니라고. 나는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
“두 대리님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할 기회를 드릴게요. 바로 저기, 커피 한 잔을 사시면서!”
정민 씨가 회사 1층 로비에 있는 카페를 가리키자 장 대리는 쿨 하게 손가락으로 오케이를 그리며 커피 세 잔을 사 왔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1일인 거예요?”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는 정민 씨다. 뭘 그렇게 디테일하게 묻나 싶었는데, 그 장단에 또 장 대리는 대꾸했다.
“아니, 2일이지. 우리 어제부터 사귀었거든.”
오늘따라 쿵짝이 너무도 잘 맞는 두 사람과 함께 사무실로 입성했다. 분명 어제와 달라진 것 없는 무채색 사무실. 하지만 오늘따라 생기가 도는 듯했다.
헤어지기 직전, 장 대리가 등 뒤로 살며시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손바닥에 작게 하트를 그려 주었다.
이런 사람이었나?
그러면서도 내심 싫지 않아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컴퓨터를 켜고 오늘의 할 일을 꾸역꾸역 시작하려는데, 멀리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사무실을 난도질이라도 할 기세로 울려 퍼지는 무식하게 큰 하이힐 소리.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국쌍희가 출근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마치 VIP 고객을 대하듯 자리에 일어서서 깍듯하게 인사했다. 사내 연애를 시작했다 한들, 국쌍희는 여전히 국쌍희다.
“팀장 회의 다녀와서 개발팀이랑 마케팅팀이랑 다 같이 미팅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회의실 좀 잡아 놔.”
이후로도 그녀는 신데렐라에게 집안일을 시키는 계모처럼 시시콜콜한 잡일들을 한가득 풀어놓았다. 이렇게 쓸모없는 일들을 위해 출근을 해야 한다니.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일만 하다가 집에 가도 월급을 주는 대표님이 불쌍하기도 했다.
“무능 팀장의 대명사야. 다른 팀들은 다 조직 개편 이후로 제대로 된 일 잡으려고 안간힘인데, 우리 팀만 이게 뭐예요?”
전달 사항을 듣고 자리에 앉아 정민 씨가 슬쩍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도 조금 있다가 회의하면 뭔가 건설적인 방향이 나오겠지.”
나는 마음에도 없는 국쌍희 두둔하기를 해 본다. 이런 건 원래 신 대리가 하던 멘트였는데.
그때 휴대폰이 가볍게 울렸다. 익숙한 번호가 액정 위에 표시됐다.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 이하진이었다. 휴대폰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여보세요.”
잠깐의 침묵 뒤로 시끄러운 주변 소음이 들렸다.
—받아 줘서 고마워요.
나의 잔인함에도 하진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생각해 봤거든요. 왜 우리가 헤어져야 했는지.
“미안해요.”
—많이 달랐나 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이랑 당신이 내 옆에서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방식이.
또다시 이어지는 침묵에 마음이 따끔거렸다. 눈물이 나오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눈앞이 먹먹해졌다.
—내 방식대로 사랑하면 당신이 행복할 줄 알았던 내가 어리석었어요. 대리님 덕분에 내 맘 같지 않은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았네요. 그동안 연애를 쉽게 생각했는데, 참 어려운 거였네요.
“미안해요. 내 탓이에요. 내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았어요.”
—맞아요. 대리님은 미안해해야 해요. 그런데 저는 지금도 대리님이 미안해하고 있을 모습에 가슴이 저리네요. 지켜 주고 싶었는데. 그 지긋지긋한 회사, 넌덜머리나는 또라이 같은 팀장으로부터 멋지게 탈출시켜 주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잘 지내요. 아프지 말고요. 너무 커피만 마시지 말고, 가끔은 사탕 하나 입에 물고 잊어요.
전화는 끊어졌지만 휴대폰에는 약간의 온기가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가까스로 힘을 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한구석에 주저앉아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나 같은 게 뭐라고. 한없이 자상했던 이하진, 그리고 그를 저버린 자신.
갑자기 손에 든 휴대폰이 울려 먹먹한 눈동자로 확인해 보니, 정민 씨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대리님, 완전 비상. 국쌍희 꼭지 돌았음. 빨리 와요.>
젠장. 드라마를 보면 아무리 회사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비상구에서 울 시간 정도는 있던데, 뭔 놈의 직장이 이렇게 얄짤없는지. 황급하게 눈물을 닦아 내고, 휴대폰 셀카로 화장이 번지지는 않았는지 재빨리 체크한 다음 부리나케 사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자리에 앉기 전, 가렵지도 않은 눈을 손으로 몇 번이고 긁어 댔다. 약간 남아 있는 충혈이 운 흔적이 아니라 눈을 비볐기 때문이라고 설득하고 싶은 마음에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국쌍희는 어디 가고?”
정민 씨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팀장 회의에서 무슨 발표가 있었나 봐요. 그걸 듣고 와서는 열 받았는지, 책상에 업무 수첩이랑 사원증 내던지고 나가 버렸어요.”
도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기에 국쌍희가 그 난리를 치고 사라진 것일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짐작 가는 건 없고?”
“모르겠어요. 그나저나 대리님, 울었어요? 엄청 울었나 보네? 왜요? 장 대리님이 그새 섭섭하게 했쬬요?”
정민 씨가 일부러 혀 짧은 소리를 냈다. 결막이 아플 정도로 비볐는데, 딱 걸려 버리다니.
“신경 쓰지 말고, 우리는 회의 준비나 해요.”
정민 씨의 말이 맞았다. 국쌍희의 심경 따위 헤아릴 여력은 없었다. 그녀가 던져 놓고 간 일들이 안 그래도 산더미니까.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본부장과 최 팀장, 그리고 HR 팀장이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 하고 파티션 너머로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고 있는데, 점점 그분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김 팀장은 자리를 비웠나?”
본부장이 묻자 잠깐 찾는 척을 하다 대답했다.
“아, 조금 전까지 자리에 계셨는데 잠깐 자리를 비우신 것 같습니다.”
“음…….”
평소와 같지 않게 본부장에게서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기획팀 전원, 잠깐 회의실로.”
무겁게 회의실로 걸어가는 본부장의 뒤를 따르는 최 팀장의 엉덩이가 오늘따라 간사했다. 요망스럽게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딱 아첨꾼의 뒤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사내 연애 첫날이라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줄 알았는데, 개인의 연애와는 상관없이 회사는 여전히 폭풍의 언덕이다.
회의실에 들어간 나와 정민 씨, 그리고 윤아는 본부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김 팀장은 안 들어오는 건가?”
“전화를 안 받으셔서 메시지를 남겨 두었습니다.”
“어쩌면 안 들어오는 게 나을 수도 있지.”
본부장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우리 셋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다.
“업무 효율성 제고를 위해 기획팀 내에 약간의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입니다.”
약간의 인사이동? 우리 셋은 모두 눈이 똥그래졌다.
“다음 주부로 새로운 팀장이 기획팀을 이끌 것입니다.”
“새로운 팀장님이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국쌍희가 발광을 하듯 사무실을 나갈 만했다. 새로운 팀장이라니! 그렇다면 국쌍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외부에서 스카웃 된 팀장님으로, 여자분이라서 아마 기획팀 팀원들이랑도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새 팀장에 대해 말하자면…….”
본부장은 새 팀장이라는 사람의 스펙에 대해 줄줄이 소시지처럼 나열하더니 이내 샛길로 빠져 업무 효율성이란 무엇이며, 회사 생활이란 무엇이며, 기획팀의 역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길고 긴 연설을 시작했다.
“그럼 김 팀장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연설의 끝 무렵,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정리 해고는 아니겠지? 아무리 그녀가 지랄 맞긴 했어도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갑작스러운 해고는 너무도 잔인하기에 부디 그것만큼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마조마했다.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직책만 팀장에서 팀원으로 바뀔 뿐, 직위는 차장입니다. 물론 오히려 김 팀장, 아니 김 차장 입장에서는 편해지겠지. 그동안 늘 지적 받았던 리더십 부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럼요. 사실 팀장이라는 자리에 리더십이 없는 사람이 앉게 되면 팀이, 회사 전체가 휘청거리게 된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결정은 회사 전체를 위해 가장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최 팀장이 옆에서 놓치지 않고 간사하게 혀를 놀렸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다들 수고하시게나. 팀장이 바뀐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괜히 업무에서 손 놓지 말고. 그럼 이만.”
우리는 멍하니 서로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혹스러우면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불안해야 할까? 같이 슬퍼해 주어야 하는 건가?
그 순간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누군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를 필두로 우리 세 사람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히죽이기 웃기 시작했다. 예의상 슬픈 표정은 지었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도량은 없었다.
드디어 해방이다. 지독했던 국쌍희 체제로부터의 해방. 다음 주에 당장 누가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더 이상 국쌍희는 팀장이 아니었다. 더 이상 그녀의 히스테릭에 놀아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축배라도 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장 대리를 엘리베이터 앞으로 불러냈다. 하지만 한달음에 달려온 장 대리의 표정이 심각했다. 뭐지? 무슨 일 있는 건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김 대리, 너도 그러냐?”
여전히 심각한 장 대리. 혹시 팀장한테 벌써 들킨 걸까?
“뭐가? 그것보다 아까 본부장님이 그러는데…….”
“아니, 본부장님 말고. 너도 그러냐고.”
“대체 뭐가?”
대뜸 장 대리가 내 손을 붙잡더니 본인의 가슴에 올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 나 왜 이렇게 오늘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히는지 모르겠다. 같은 사무실에 있는 걸 아는데도 왜 자꾸 네가 보고 싶은 거야. 지금 보고 있는데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너무도 진지한 표정과 말투에 피식 웃어 버렸다.
“웃지 마. 나 잠깐 안아 봐도 돼?”
“지금? 여기서?”
“어, 빨리. 벌써 7층이잖아. 7초밖에 안 남았어. 빨리.”
그러더니 그는 나를 와락 품에 안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곰 인형을 껴안듯 아주 꽈악.
“미쳤어. 누가 타면 어쩌려고!”
“이 시간엔 잘 안 타. 잠깐만 이러고 있자.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그때 땡, 하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문은 열렸지만 다행히 아무도 타지 않았다. 십년감수했다. 장 대리를 향해 눈을 흘기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 했지만 장 대리에게 팔목을 붙잡혔다.
“우리 키스하자.”
“뭐? 미쳤어, 진짜! 선 넘지 마. 여기 회사야.”
단호하게 대답하고 밖으로 나서려는데, 장 대리가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더니 바로 지하 6층 버튼을 눌렀다.
“알아. 그런데 나는 회사에서도 널 사랑해.”
장 대리는 그대로 내게 입을 맞추었다. 이 건물의 가장 밑까지 멈추지 않고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로를 치열하게 쫓았다. 누군가가 누른 버튼으로 인해 이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는 순간까지.
1.
늘 같은 출근길 만원 버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고, 숨이 막히는 길.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로 인해 불쾌하지도, 짜증스럽지도 않다. 갑작스러운 급정거로 인해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린다 할지라도.
“괜찮아?”
출근길 인파로부터 나를 막아 주는 한 사람, 장 대리가 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버스에서 내리고 회사로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출근길 내내 잡고 있던 손을 잠시 놓았다. 저 앞에 보이는 유리문을 통과하면 우리는 애정 기류라고는 1g도 없는 동료처럼 행동해야 한다.
“할 수 있겠어?”
내가 묻자 장 대리는 그저 웃기만 한다.
“아니, 못할지도 몰라. 나는 김 대리가 너무 좋거든. 일하다가도 너를 안고 싶을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떻게 하지?”
괜히 더 오버를 하는 장 대리의 발 앞코를 신고 있던 구두로 가볍게 콕 찔렀다.
“두 분 오늘따라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어느새 우리 사이를 비집고 나타난 정민 씨가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란 내 표정을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씨익 웃으며 팔짱을 꼈다.
“왜 두 대리님이 같은 버스에서 내리셨을까? 사는 곳도 정반대이시면서.”
어젯밤 헤어진 장 대리가 오늘 새벽같이 보고 싶다며 집 앞에 찾아왔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 그건 말이지…….”
황급히 궁색한 변명을 찾아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왜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던 두 분의 얼굴이 하루 만에 활짝 폈을까? 사내 연애 3년 차인 제가 감히 추측컨대…….”
정민 씨가 괜히 뜸을 들였다.
“추측컨대, 뭐? 나 화장품 바꿨어!”
이런 때일수록 낯짝은 더 두꺼워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말해 놓고도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 말할까요? 아니면 국쌍희 있는 자리에서 말할까요?”
정민 씨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악한 것 같으니라고. 나는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
“두 대리님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할 기회를 드릴게요. 바로 저기, 커피 한 잔을 사시면서!”
정민 씨가 회사 1층 로비에 있는 카페를 가리키자 장 대리는 쿨 하게 손가락으로 오케이를 그리며 커피 세 잔을 사 왔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1일인 거예요?”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는 정민 씨다. 뭘 그렇게 디테일하게 묻나 싶었는데, 그 장단에 또 장 대리는 대꾸했다.
“아니, 2일이지. 우리 어제부터 사귀었거든.”
오늘따라 쿵짝이 너무도 잘 맞는 두 사람과 함께 사무실로 입성했다. 분명 어제와 달라진 것 없는 무채색 사무실. 하지만 오늘따라 생기가 도는 듯했다.
헤어지기 직전, 장 대리가 등 뒤로 살며시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손바닥에 작게 하트를 그려 주었다.
이런 사람이었나?
그러면서도 내심 싫지 않아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컴퓨터를 켜고 오늘의 할 일을 꾸역꾸역 시작하려는데, 멀리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사무실을 난도질이라도 할 기세로 울려 퍼지는 무식하게 큰 하이힐 소리.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국쌍희가 출근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마치 VIP 고객을 대하듯 자리에 일어서서 깍듯하게 인사했다. 사내 연애를 시작했다 한들, 국쌍희는 여전히 국쌍희다.
“팀장 회의 다녀와서 개발팀이랑 마케팅팀이랑 다 같이 미팅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회의실 좀 잡아 놔.”
이후로도 그녀는 신데렐라에게 집안일을 시키는 계모처럼 시시콜콜한 잡일들을 한가득 풀어놓았다. 이렇게 쓸모없는 일들을 위해 출근을 해야 한다니.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일만 하다가 집에 가도 월급을 주는 대표님이 불쌍하기도 했다.
“무능 팀장의 대명사야. 다른 팀들은 다 조직 개편 이후로 제대로 된 일 잡으려고 안간힘인데, 우리 팀만 이게 뭐예요?”
전달 사항을 듣고 자리에 앉아 정민 씨가 슬쩍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도 조금 있다가 회의하면 뭔가 건설적인 방향이 나오겠지.”
나는 마음에도 없는 국쌍희 두둔하기를 해 본다. 이런 건 원래 신 대리가 하던 멘트였는데.
그때 휴대폰이 가볍게 울렸다. 익숙한 번호가 액정 위에 표시됐다.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 이하진이었다. 휴대폰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여보세요.”
잠깐의 침묵 뒤로 시끄러운 주변 소음이 들렸다.
—받아 줘서 고마워요.
나의 잔인함에도 하진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생각해 봤거든요. 왜 우리가 헤어져야 했는지.
“미안해요.”
—많이 달랐나 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이랑 당신이 내 옆에서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방식이.
또다시 이어지는 침묵에 마음이 따끔거렸다. 눈물이 나오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눈앞이 먹먹해졌다.
—내 방식대로 사랑하면 당신이 행복할 줄 알았던 내가 어리석었어요. 대리님 덕분에 내 맘 같지 않은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았네요. 그동안 연애를 쉽게 생각했는데, 참 어려운 거였네요.
“미안해요. 내 탓이에요. 내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았어요.”
—맞아요. 대리님은 미안해해야 해요. 그런데 저는 지금도 대리님이 미안해하고 있을 모습에 가슴이 저리네요. 지켜 주고 싶었는데. 그 지긋지긋한 회사, 넌덜머리나는 또라이 같은 팀장으로부터 멋지게 탈출시켜 주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잘 지내요. 아프지 말고요. 너무 커피만 마시지 말고, 가끔은 사탕 하나 입에 물고 잊어요.
전화는 끊어졌지만 휴대폰에는 약간의 온기가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가까스로 힘을 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한구석에 주저앉아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나 같은 게 뭐라고. 한없이 자상했던 이하진, 그리고 그를 저버린 자신.
갑자기 손에 든 휴대폰이 울려 먹먹한 눈동자로 확인해 보니, 정민 씨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대리님, 완전 비상. 국쌍희 꼭지 돌았음. 빨리 와요.>
젠장. 드라마를 보면 아무리 회사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비상구에서 울 시간 정도는 있던데, 뭔 놈의 직장이 이렇게 얄짤없는지. 황급하게 눈물을 닦아 내고, 휴대폰 셀카로 화장이 번지지는 않았는지 재빨리 체크한 다음 부리나케 사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자리에 앉기 전, 가렵지도 않은 눈을 손으로 몇 번이고 긁어 댔다. 약간 남아 있는 충혈이 운 흔적이 아니라 눈을 비볐기 때문이라고 설득하고 싶은 마음에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국쌍희는 어디 가고?”
정민 씨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팀장 회의에서 무슨 발표가 있었나 봐요. 그걸 듣고 와서는 열 받았는지, 책상에 업무 수첩이랑 사원증 내던지고 나가 버렸어요.”
도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기에 국쌍희가 그 난리를 치고 사라진 것일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짐작 가는 건 없고?”
“모르겠어요. 그나저나 대리님, 울었어요? 엄청 울었나 보네? 왜요? 장 대리님이 그새 섭섭하게 했쬬요?”
정민 씨가 일부러 혀 짧은 소리를 냈다. 결막이 아플 정도로 비볐는데, 딱 걸려 버리다니.
“신경 쓰지 말고, 우리는 회의 준비나 해요.”
정민 씨의 말이 맞았다. 국쌍희의 심경 따위 헤아릴 여력은 없었다. 그녀가 던져 놓고 간 일들이 안 그래도 산더미니까.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본부장과 최 팀장, 그리고 HR 팀장이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 하고 파티션 너머로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고 있는데, 점점 그분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김 팀장은 자리를 비웠나?”
본부장이 묻자 잠깐 찾는 척을 하다 대답했다.
“아, 조금 전까지 자리에 계셨는데 잠깐 자리를 비우신 것 같습니다.”
“음…….”
평소와 같지 않게 본부장에게서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기획팀 전원, 잠깐 회의실로.”
무겁게 회의실로 걸어가는 본부장의 뒤를 따르는 최 팀장의 엉덩이가 오늘따라 간사했다. 요망스럽게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딱 아첨꾼의 뒤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사내 연애 첫날이라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줄 알았는데, 개인의 연애와는 상관없이 회사는 여전히 폭풍의 언덕이다.
회의실에 들어간 나와 정민 씨, 그리고 윤아는 본부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김 팀장은 안 들어오는 건가?”
“전화를 안 받으셔서 메시지를 남겨 두었습니다.”
“어쩌면 안 들어오는 게 나을 수도 있지.”
본부장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우리 셋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다.
“업무 효율성 제고를 위해 기획팀 내에 약간의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입니다.”
약간의 인사이동? 우리 셋은 모두 눈이 똥그래졌다.
“다음 주부로 새로운 팀장이 기획팀을 이끌 것입니다.”
“새로운 팀장님이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국쌍희가 발광을 하듯 사무실을 나갈 만했다. 새로운 팀장이라니! 그렇다면 국쌍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외부에서 스카웃 된 팀장님으로, 여자분이라서 아마 기획팀 팀원들이랑도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새 팀장에 대해 말하자면…….”
본부장은 새 팀장이라는 사람의 스펙에 대해 줄줄이 소시지처럼 나열하더니 이내 샛길로 빠져 업무 효율성이란 무엇이며, 회사 생활이란 무엇이며, 기획팀의 역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길고 긴 연설을 시작했다.
“그럼 김 팀장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연설의 끝 무렵,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정리 해고는 아니겠지? 아무리 그녀가 지랄 맞긴 했어도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갑작스러운 해고는 너무도 잔인하기에 부디 그것만큼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마조마했다.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직책만 팀장에서 팀원으로 바뀔 뿐, 직위는 차장입니다. 물론 오히려 김 팀장, 아니 김 차장 입장에서는 편해지겠지. 그동안 늘 지적 받았던 리더십 부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럼요. 사실 팀장이라는 자리에 리더십이 없는 사람이 앉게 되면 팀이, 회사 전체가 휘청거리게 된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결정은 회사 전체를 위해 가장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최 팀장이 옆에서 놓치지 않고 간사하게 혀를 놀렸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다들 수고하시게나. 팀장이 바뀐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괜히 업무에서 손 놓지 말고. 그럼 이만.”
우리는 멍하니 서로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혹스러우면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불안해야 할까? 같이 슬퍼해 주어야 하는 건가?
그 순간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누군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를 필두로 우리 세 사람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히죽이기 웃기 시작했다. 예의상 슬픈 표정은 지었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도량은 없었다.
드디어 해방이다. 지독했던 국쌍희 체제로부터의 해방. 다음 주에 당장 누가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더 이상 국쌍희는 팀장이 아니었다. 더 이상 그녀의 히스테릭에 놀아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축배라도 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장 대리를 엘리베이터 앞으로 불러냈다. 하지만 한달음에 달려온 장 대리의 표정이 심각했다. 뭐지? 무슨 일 있는 건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김 대리, 너도 그러냐?”
여전히 심각한 장 대리. 혹시 팀장한테 벌써 들킨 걸까?
“뭐가? 그것보다 아까 본부장님이 그러는데…….”
“아니, 본부장님 말고. 너도 그러냐고.”
“대체 뭐가?”
대뜸 장 대리가 내 손을 붙잡더니 본인의 가슴에 올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 나 왜 이렇게 오늘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히는지 모르겠다. 같은 사무실에 있는 걸 아는데도 왜 자꾸 네가 보고 싶은 거야. 지금 보고 있는데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너무도 진지한 표정과 말투에 피식 웃어 버렸다.
“웃지 마. 나 잠깐 안아 봐도 돼?”
“지금? 여기서?”
“어, 빨리. 벌써 7층이잖아. 7초밖에 안 남았어. 빨리.”
그러더니 그는 나를 와락 품에 안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곰 인형을 껴안듯 아주 꽈악.
“미쳤어. 누가 타면 어쩌려고!”
“이 시간엔 잘 안 타. 잠깐만 이러고 있자.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그때 땡, 하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문은 열렸지만 다행히 아무도 타지 않았다. 십년감수했다. 장 대리를 향해 눈을 흘기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 했지만 장 대리에게 팔목을 붙잡혔다.
“우리 키스하자.”
“뭐? 미쳤어, 진짜! 선 넘지 마. 여기 회사야.”
단호하게 대답하고 밖으로 나서려는데, 장 대리가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더니 바로 지하 6층 버튼을 눌렀다.
“알아. 그런데 나는 회사에서도 널 사랑해.”
장 대리는 그대로 내게 입을 맞추었다. 이 건물의 가장 밑까지 멈추지 않고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로를 치열하게 쫓았다. 누군가가 누른 버튼으로 인해 이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는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