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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
사내 연애, 어느 첩보 작전보다 긴밀한 그것을 요즘 내가 하고 있다.
회사 반경 300m안에서는 스킨십 금지. 최대한 일상처럼, 최대한 무던하게. 이것이 장 대리와 나의 사내 연애였다. 일하다가 정말 보고 싶을 때면,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혹은 비상계단을 걸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짧은 입맞춤. 그 감질 나는 순간들을 매듭 삼아 회사에서의 8시간을 보내고 퇴근길에 접어들고서야 우리의 연애는 수면 아래 비밀스러운 곳에서 떠올라 보통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제대로 비밀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착각이었다.
“대리님, 차라리 빨리 커밍아웃 하세요.”
어느 날 뜬금없이 정민 씨가 속삭였다. 그녀가 말하는 커밍아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싫어. 절대 공개 안 할 거야.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척해. 알겠지?”
사실 처음부터 비밀에 부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공개할까 싶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은 뻔했다. 장 대리와 내가 사내 커플임을 공식화하는 순간부터 하이에나 같은 최 팀장을 비롯한 회사의 모든 레이더가 우리의 행보를 쫓을 것이다. 어쩌다 커피를 같이 마셔도, 회의 중 잠깐 농담 몇 마디를 나눠도, 심지어 같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만 하더라도 ‘일은 안 하고 연애질한다’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결국 인사 고과는 바닥을 칠 테고, 어쩌면 우리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에게 날카로워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닌 다른 이유로 인해.
“그럼 제가 사내 연애 선배로서 조언 하나 드릴까요? 비밀 연애를 하려면 제대로 하세요. 두 분처럼 그렇게 티 내다가는 금방 들켜요! 두 분, 엘리베이터에서 키스했죠?”
“그, 그걸 어떻게…….”
정민 씨의 귓속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완전히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탕비실에서 몰래 손도 잡았죠?”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불과 한 시간 전, 아무도 없는 복사실에서 장 대리와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누가 갑자기 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장 대리는 한손으로 복사기를, 나는 한손으로 정수기를 만지작거렸다. 완벽한 연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그 순간 떠올랐다. 회사에는 언제나 CCTV가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혹시라도 CCTV를 제가 봤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마시구요.”
“그럼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알 수 있어? 자기, 나 미행하니?”
“제가 대리님을 왜 미행해요. 내 남자 쫓아다니기도 바쁜데! 손바닥 내려다보듯 뻔히 알 수 있는 이유는 다 제가 한 번씩 해 봤던 일이기 때문이에요.”
“아, 다행이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보며 정민 씨는 옆에서 쿡쿡 웃어 댔다. 젠장, 후배 앞에서 이런 어수룩한 모습이나 보이다니.
“그러니까 대리님, 괜히 망신당하지 마시고 차라리 빨리 공개하세요. 공개하고 바로 결혼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대리님도 결혼 적령기고.”
나는 됐다며 손을 저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너무 긴장했다 풀어져서 그런지 머리가 아파 오려 했다. 커피 한 잔이 필요했다. 아니, 장 대리와의 커피 한 잔이 필요하다.
메신저에서 장 대리를 찾으려는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내 마음이 그를 원하기도 전에 장 대리는 이미 내게 와 주었다.
하지만 괜히 국쌍희가 국민 쌍년이 아니듯 하필이면 이 순간, 그녀 역시 나를 향해 걸어왔다.
“얘들아, 다들 일하느라 힘들 텐데 다 같이 회의실에서 커피 한잔하지 않으련? 물론 커피는 내가 쏠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뒤이어 내 눈도 의심했다. 그녀는 독버섯이라도 따 먹은 것처럼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표정이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달라진 말투와 표정과 행동.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응집된 국쌍희의 어색한 태도. 새 팀장이 온다는 말에 급기야 미쳐 버린 걸까? 아니면 갑자기 반성이라도 한 걸까? 둘 중 무엇이든 간에 무서웠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된다던데, 차라리 지랄을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당혹스러움에 아무도 반응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더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바로 국쌍희가 내 팔짱을 낀 것이다.
“뭐야, 김 대리. 어울리지 않게 웬 내숭? 가자, 내가 커피 살게! 평소에 너희들끼리는 커피 자주 마시러 가잖아. 사실 난 너희랑 소울이 통하는 사이가 되고 싶었거든. 차라리 잘된 것 같아. 이제 편안하게 소울을 나눌 수 있겠어. 친한 언니, 동생처럼 말이야. 알지? 소울 메이트.”
소울 메이트라니. 언제 적 유행했던 것인지 기억조차 안 나는 그 단어보다 더 고역스러운 것은 있지도 않은 친밀감을 연출하고자 지은 그녀의 억지스러운 미소였다. 여전히 내가 부동자세로 상황 판단에 애를 쓰고 있자 급기야 국쌍희는 검지로 내 옆구리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애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불쾌함이 척추를 타고 온몸을 흔들었다.
“네! 가요, 갑니다. 모두 다 같이 갑니다.”
그놈의 소울. 두 번 통했다가는 사람 여럿 골로 보낼 듯하다. 더 버텼다가는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우리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로 걸어가는 동안 장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첫 번째 눈빛에는 의아함, 두 번째 눈빛에는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국쌍희의 카드를 받아 커피를 사러 간 윤아가 돌아오기 전까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마침내 그녀가 커피 네 잔을 들고 돌아왔지만 어색함이 가실 리 만무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이 있듯, 커피도 같이 마셔 본 사람끼리 마셔야 하는 것이다. 단 한 번도 같이 허심탄회하게 커피 한잔하면서 브레이크 타임을 가져 본 적 없는 국쌍희와 우리 사이에 어색함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했다.
<위급하면 바로 SOS치고. 달려갈게.>
장 대리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고 엉덩이를 살짝 들어 보니 투명한 회의실의 유리벽 너머 장 대리가 아직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별일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자리에 가서 일해.>
장 대리는 그제야 자리로 향했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어색함. 국쌍희는 그 어색함을 떨쳐나고자 어울리지도 않게 광대처럼 시답지 않은 농담을 건넸다.
새로운 팀장도 오고 하니, 회유책이라도 쓰려는 건가? 아니면 정말 깊은 반성이라도 한 건가? 어쨌거나 마흔이 넘은 그녀가 눈가 주름을 한껏 지어 가며 억지웃음을 만드는 모습이 불쌍하기도 했다.
그래. 그동안의 지랄은 지랄이고, 어쨌거나 본인도 상심이 클 텐데 같은 팀원으로 잘 대해 줘야지.
라는 생각을 한 그 순간, 갑자기 국쌍희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얘들아, 이제 우리는 소울 메이트니까 솔직한 내 마음을 이야기할게. 사실 그동안 내가 너희를 뒷바라지하느라 안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나는 소울이 통하는 팀장이고 싶었던 것뿐인데.”
정민 씨가 재빨리 휴지를 그녀에게 건넸고, 윤아는 아무 말 못 하고 그저 석고대죄하고 있을 뿐이었다.
“밑에 있는 애들은 몰라. 팀장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너희는 모른다고.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니? 나는 그저 열심히 팀의 기강을 잡은 것뿐인데!”
크레셴도처럼 점점 커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혹시라도 회의실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주의를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밖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희가 나쁜 년들이야, 너희가! 너희가 제대로 일을 했으면, 너희가 제대로 나를 따라 줬으면 내가 팀장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 같아? 새 팀장이 누가 오는지는 상관없어! 나, 김은희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승진해서 그 자리 다시 찾을 거야!”
국쌍희는 악을 질러 가며 그 자리에서 목 놓아 울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탓이라고? 소울 메이트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성에 의해 강력하게 봉인되어 있던 분노의 감성이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참을 만큼 참았다. 견딜 만큼 견뎠다. 반성의 기미라고는 1도 없는 그녀를 두고 동정했던 조금 전의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차장님, 작작 좀 하시죠!”
나는 일부러 그녀를 ‘팀장’이 아닌 ‘차장’으로 불렀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내 팀장이 아니니까.
“뭐야? 김 대리.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차장? 작작? 너 지금 미쳤니?”
안 그래도 찢어진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노려보는 국쌍희였지만 지금 나는 이성의 김주아가 아니라 분노의 김주아다.
“네, 차장님. 정말 지금 이 상황이 저희가 일을 못 해서 벌어졌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만약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본부장님이 현명하신 거네요. 판단 능력이 이토록 없는 사람을 계속 팀장으로 두면 안 되죠. 적어도 팀장이라면 위기에 대한 원인 파악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차장님은 그조차도 없는 거니까요.”
“뭐야? 김주아, 너 말 다했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건데?”
“치사하게 하나씩 다 짚어 드려야겠어요? 굴림체라는 이유로 급한 결재를 반려시킨 일, 점심 메뉴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사람 타박했던 일, 툭하면 신 대리님한테 임신하지 말라는 소리를 했던 일, 개인의 프라이버시 따위는 존중하지 않고 필요 없는 일을 억지로 만들어 야근과 철야로 사람 들들 볶았던 일,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업무 성과와는 상관없이 퇴직자 명단에 제 이름을 올렸던 일!”
“진짜예요?”
“정말로 김 대리님 이름이 퇴직자 명단에 올라가 있었어요?”
윤아와 정민 씨는 놀란 눈으로 나와 국쌍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더 얘기해 드려요? 말하기도 유치한 그간의 모든 일들을?”
“그게 뭐 어쨌다고? 팀장으로서 할 수 있는 선에서 행동한 거야. 너도 팀장 달아 봐.”
“네, 저도 팀장 달게요! 그때까지 이 회사에 부디 남아 계시길 바랄게요. 헤드 헌터들 사이에서 능력과 상관없이 조건만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 같은 하는 사람으로 소문나서 어차피 딱히 갈 곳도 없어 보이긴 하지만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들부들 떨던 국쌍희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휴지 갑 하나를 집어서 내게 던졌다. 피할 새도 없이 내 머리를 맞고 휴지 갑이 떨어지는 동시에 울려 퍼지는 곰의 부르짖음 같은 포효.
“지금 회사에서 뭐하는 겁니까?”
문 열린 회의실 입구에 잔뜩 화가 난 본부장이 서 있었다. 그 뒤로는 호기심의 시선과 뒤엉킨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두 사람 다 내 방으로 따라오세요.”
회의실 문이 부셔질 듯 거칠게 닫혔고, 곡을 하듯 울어 대는 국쌍희의 울음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매웠다.
본부장 방에 들어간 우리는 일장 연설을 들어야만 했다. 그 긴 시간동안 국쌍희는 내내 울었고, 나는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회사원 취급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도 별다른 징계 없이 본부장의 연설이 끝났다. 무려 2시간 동안이었다.
본부장 방에서 나와 너털너털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가 콕 찔렀다.
“가자. 한숨 돌리러.”
장 대리의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들려 있었다. 꽤 오래전에 사서 기다렸는지, 얼음이 다 녹아 있었다. 설마 내가 혼나는 동안 계속 기다린 건가? 옥상으로 통하는 비상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장 대리가 말없이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간 억지로 버텨 왔던 두 다리에 힘이 와락 풀렸다. 나도 모르게 계단에 주저앉을 뻔한 것을 장 대리가 허리에 팔을 감고 안아 들었다. 들고 있던 커피는 바닥으로 쏟아졌고, 내 눈물도 동시에 쏟아졌다. 장 대리는 말없이 나를 안고 등을 다독였다.
“이제 진정이 좀 돼?”
한참을 울었다. 그래서인지 너무 더웠다. 비상구 문을 열고 옥상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느껴지는 찬 공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자 장 대리는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쳤다.
“결국 한 건 했네. 그래도 오래 버텼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너는 그동안 너무 가만히 있었어.”
장 대리는 옥상 한편 콘크리트 턱에 나를 앉혔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건넸다.
“발은 안 아파?”
그러고 보니 발이 아프다. 하이힐을 신은 채 서서 장장 2시간의 연설을 들었으니, 당연히 아플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인터넷으로 산 거라 살짝 작은 감도 있는 데다 엊그제 사무실로 배송 온 터라 아직 길도 안 들인 상태였다. 분노에 휩싸여 잊고 있었던 통증이 이제야 욱신거리며 발 전체를 감쌌다.
“그러니까 사무실에서는 편한 슬리퍼를 신어야지, 왜 구두를 신고 그러냐?”
나는 일부러 발을 안쪽으로 숨겼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괜히 장 대리를 향해 눈을 흘겼다. 사실 장 대리와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출근과 동시에 삼선 슬리퍼로 갈아 신었고, 퇴근 전까지 벗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제든 마주칠 때마다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정민 씨가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하이힐도 샀다. 내 노력을 이런 둔탱이가 알 턱이 없겠지.
2.
사내 연애, 어느 첩보 작전보다 긴밀한 그것을 요즘 내가 하고 있다.
회사 반경 300m안에서는 스킨십 금지. 최대한 일상처럼, 최대한 무던하게. 이것이 장 대리와 나의 사내 연애였다. 일하다가 정말 보고 싶을 때면,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혹은 비상계단을 걸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짧은 입맞춤. 그 감질 나는 순간들을 매듭 삼아 회사에서의 8시간을 보내고 퇴근길에 접어들고서야 우리의 연애는 수면 아래 비밀스러운 곳에서 떠올라 보통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제대로 비밀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착각이었다.
“대리님, 차라리 빨리 커밍아웃 하세요.”
어느 날 뜬금없이 정민 씨가 속삭였다. 그녀가 말하는 커밍아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싫어. 절대 공개 안 할 거야.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척해. 알겠지?”
사실 처음부터 비밀에 부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공개할까 싶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은 뻔했다. 장 대리와 내가 사내 커플임을 공식화하는 순간부터 하이에나 같은 최 팀장을 비롯한 회사의 모든 레이더가 우리의 행보를 쫓을 것이다. 어쩌다 커피를 같이 마셔도, 회의 중 잠깐 농담 몇 마디를 나눠도, 심지어 같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만 하더라도 ‘일은 안 하고 연애질한다’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결국 인사 고과는 바닥을 칠 테고, 어쩌면 우리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에게 날카로워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닌 다른 이유로 인해.
“그럼 제가 사내 연애 선배로서 조언 하나 드릴까요? 비밀 연애를 하려면 제대로 하세요. 두 분처럼 그렇게 티 내다가는 금방 들켜요! 두 분, 엘리베이터에서 키스했죠?”
“그, 그걸 어떻게…….”
정민 씨의 귓속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완전히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탕비실에서 몰래 손도 잡았죠?”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불과 한 시간 전, 아무도 없는 복사실에서 장 대리와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누가 갑자기 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장 대리는 한손으로 복사기를, 나는 한손으로 정수기를 만지작거렸다. 완벽한 연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그 순간 떠올랐다. 회사에는 언제나 CCTV가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혹시라도 CCTV를 제가 봤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마시구요.”
“그럼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알 수 있어? 자기, 나 미행하니?”
“제가 대리님을 왜 미행해요. 내 남자 쫓아다니기도 바쁜데! 손바닥 내려다보듯 뻔히 알 수 있는 이유는 다 제가 한 번씩 해 봤던 일이기 때문이에요.”
“아, 다행이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보며 정민 씨는 옆에서 쿡쿡 웃어 댔다. 젠장, 후배 앞에서 이런 어수룩한 모습이나 보이다니.
“그러니까 대리님, 괜히 망신당하지 마시고 차라리 빨리 공개하세요. 공개하고 바로 결혼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대리님도 결혼 적령기고.”
나는 됐다며 손을 저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너무 긴장했다 풀어져서 그런지 머리가 아파 오려 했다. 커피 한 잔이 필요했다. 아니, 장 대리와의 커피 한 잔이 필요하다.
메신저에서 장 대리를 찾으려는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내 마음이 그를 원하기도 전에 장 대리는 이미 내게 와 주었다.
하지만 괜히 국쌍희가 국민 쌍년이 아니듯 하필이면 이 순간, 그녀 역시 나를 향해 걸어왔다.
“얘들아, 다들 일하느라 힘들 텐데 다 같이 회의실에서 커피 한잔하지 않으련? 물론 커피는 내가 쏠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뒤이어 내 눈도 의심했다. 그녀는 독버섯이라도 따 먹은 것처럼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표정이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달라진 말투와 표정과 행동.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응집된 국쌍희의 어색한 태도. 새 팀장이 온다는 말에 급기야 미쳐 버린 걸까? 아니면 갑자기 반성이라도 한 걸까? 둘 중 무엇이든 간에 무서웠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된다던데, 차라리 지랄을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당혹스러움에 아무도 반응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더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바로 국쌍희가 내 팔짱을 낀 것이다.
“뭐야, 김 대리. 어울리지 않게 웬 내숭? 가자, 내가 커피 살게! 평소에 너희들끼리는 커피 자주 마시러 가잖아. 사실 난 너희랑 소울이 통하는 사이가 되고 싶었거든. 차라리 잘된 것 같아. 이제 편안하게 소울을 나눌 수 있겠어. 친한 언니, 동생처럼 말이야. 알지? 소울 메이트.”
소울 메이트라니. 언제 적 유행했던 것인지 기억조차 안 나는 그 단어보다 더 고역스러운 것은 있지도 않은 친밀감을 연출하고자 지은 그녀의 억지스러운 미소였다. 여전히 내가 부동자세로 상황 판단에 애를 쓰고 있자 급기야 국쌍희는 검지로 내 옆구리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애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불쾌함이 척추를 타고 온몸을 흔들었다.
“네! 가요, 갑니다. 모두 다 같이 갑니다.”
그놈의 소울. 두 번 통했다가는 사람 여럿 골로 보낼 듯하다. 더 버텼다가는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우리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로 걸어가는 동안 장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첫 번째 눈빛에는 의아함, 두 번째 눈빛에는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국쌍희의 카드를 받아 커피를 사러 간 윤아가 돌아오기 전까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마침내 그녀가 커피 네 잔을 들고 돌아왔지만 어색함이 가실 리 만무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이 있듯, 커피도 같이 마셔 본 사람끼리 마셔야 하는 것이다. 단 한 번도 같이 허심탄회하게 커피 한잔하면서 브레이크 타임을 가져 본 적 없는 국쌍희와 우리 사이에 어색함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했다.
<위급하면 바로 SOS치고. 달려갈게.>
장 대리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고 엉덩이를 살짝 들어 보니 투명한 회의실의 유리벽 너머 장 대리가 아직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별일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자리에 가서 일해.>
장 대리는 그제야 자리로 향했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어색함. 국쌍희는 그 어색함을 떨쳐나고자 어울리지도 않게 광대처럼 시답지 않은 농담을 건넸다.
새로운 팀장도 오고 하니, 회유책이라도 쓰려는 건가? 아니면 정말 깊은 반성이라도 한 건가? 어쨌거나 마흔이 넘은 그녀가 눈가 주름을 한껏 지어 가며 억지웃음을 만드는 모습이 불쌍하기도 했다.
그래. 그동안의 지랄은 지랄이고, 어쨌거나 본인도 상심이 클 텐데 같은 팀원으로 잘 대해 줘야지.
라는 생각을 한 그 순간, 갑자기 국쌍희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얘들아, 이제 우리는 소울 메이트니까 솔직한 내 마음을 이야기할게. 사실 그동안 내가 너희를 뒷바라지하느라 안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나는 소울이 통하는 팀장이고 싶었던 것뿐인데.”
정민 씨가 재빨리 휴지를 그녀에게 건넸고, 윤아는 아무 말 못 하고 그저 석고대죄하고 있을 뿐이었다.
“밑에 있는 애들은 몰라. 팀장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너희는 모른다고.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니? 나는 그저 열심히 팀의 기강을 잡은 것뿐인데!”
크레셴도처럼 점점 커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혹시라도 회의실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주의를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밖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희가 나쁜 년들이야, 너희가! 너희가 제대로 일을 했으면, 너희가 제대로 나를 따라 줬으면 내가 팀장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 같아? 새 팀장이 누가 오는지는 상관없어! 나, 김은희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승진해서 그 자리 다시 찾을 거야!”
국쌍희는 악을 질러 가며 그 자리에서 목 놓아 울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탓이라고? 소울 메이트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성에 의해 강력하게 봉인되어 있던 분노의 감성이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참을 만큼 참았다. 견딜 만큼 견뎠다. 반성의 기미라고는 1도 없는 그녀를 두고 동정했던 조금 전의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차장님, 작작 좀 하시죠!”
나는 일부러 그녀를 ‘팀장’이 아닌 ‘차장’으로 불렀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내 팀장이 아니니까.
“뭐야? 김 대리.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차장? 작작? 너 지금 미쳤니?”
안 그래도 찢어진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노려보는 국쌍희였지만 지금 나는 이성의 김주아가 아니라 분노의 김주아다.
“네, 차장님. 정말 지금 이 상황이 저희가 일을 못 해서 벌어졌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만약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본부장님이 현명하신 거네요. 판단 능력이 이토록 없는 사람을 계속 팀장으로 두면 안 되죠. 적어도 팀장이라면 위기에 대한 원인 파악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차장님은 그조차도 없는 거니까요.”
“뭐야? 김주아, 너 말 다했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건데?”
“치사하게 하나씩 다 짚어 드려야겠어요? 굴림체라는 이유로 급한 결재를 반려시킨 일, 점심 메뉴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사람 타박했던 일, 툭하면 신 대리님한테 임신하지 말라는 소리를 했던 일, 개인의 프라이버시 따위는 존중하지 않고 필요 없는 일을 억지로 만들어 야근과 철야로 사람 들들 볶았던 일,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업무 성과와는 상관없이 퇴직자 명단에 제 이름을 올렸던 일!”
“진짜예요?”
“정말로 김 대리님 이름이 퇴직자 명단에 올라가 있었어요?”
윤아와 정민 씨는 놀란 눈으로 나와 국쌍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더 얘기해 드려요? 말하기도 유치한 그간의 모든 일들을?”
“그게 뭐 어쨌다고? 팀장으로서 할 수 있는 선에서 행동한 거야. 너도 팀장 달아 봐.”
“네, 저도 팀장 달게요! 그때까지 이 회사에 부디 남아 계시길 바랄게요. 헤드 헌터들 사이에서 능력과 상관없이 조건만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 같은 하는 사람으로 소문나서 어차피 딱히 갈 곳도 없어 보이긴 하지만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들부들 떨던 국쌍희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휴지 갑 하나를 집어서 내게 던졌다. 피할 새도 없이 내 머리를 맞고 휴지 갑이 떨어지는 동시에 울려 퍼지는 곰의 부르짖음 같은 포효.
“지금 회사에서 뭐하는 겁니까?”
문 열린 회의실 입구에 잔뜩 화가 난 본부장이 서 있었다. 그 뒤로는 호기심의 시선과 뒤엉킨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두 사람 다 내 방으로 따라오세요.”
회의실 문이 부셔질 듯 거칠게 닫혔고, 곡을 하듯 울어 대는 국쌍희의 울음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매웠다.
본부장 방에 들어간 우리는 일장 연설을 들어야만 했다. 그 긴 시간동안 국쌍희는 내내 울었고, 나는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회사원 취급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도 별다른 징계 없이 본부장의 연설이 끝났다. 무려 2시간 동안이었다.
본부장 방에서 나와 너털너털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가 콕 찔렀다.
“가자. 한숨 돌리러.”
장 대리의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들려 있었다. 꽤 오래전에 사서 기다렸는지, 얼음이 다 녹아 있었다. 설마 내가 혼나는 동안 계속 기다린 건가? 옥상으로 통하는 비상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장 대리가 말없이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간 억지로 버텨 왔던 두 다리에 힘이 와락 풀렸다. 나도 모르게 계단에 주저앉을 뻔한 것을 장 대리가 허리에 팔을 감고 안아 들었다. 들고 있던 커피는 바닥으로 쏟아졌고, 내 눈물도 동시에 쏟아졌다. 장 대리는 말없이 나를 안고 등을 다독였다.
“이제 진정이 좀 돼?”
한참을 울었다. 그래서인지 너무 더웠다. 비상구 문을 열고 옥상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느껴지는 찬 공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자 장 대리는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쳤다.
“결국 한 건 했네. 그래도 오래 버텼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너는 그동안 너무 가만히 있었어.”
장 대리는 옥상 한편 콘크리트 턱에 나를 앉혔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건넸다.
“발은 안 아파?”
그러고 보니 발이 아프다. 하이힐을 신은 채 서서 장장 2시간의 연설을 들었으니, 당연히 아플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인터넷으로 산 거라 살짝 작은 감도 있는 데다 엊그제 사무실로 배송 온 터라 아직 길도 안 들인 상태였다. 분노에 휩싸여 잊고 있었던 통증이 이제야 욱신거리며 발 전체를 감쌌다.
“그러니까 사무실에서는 편한 슬리퍼를 신어야지, 왜 구두를 신고 그러냐?”
나는 일부러 발을 안쪽으로 숨겼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괜히 장 대리를 향해 눈을 흘겼다. 사실 장 대리와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출근과 동시에 삼선 슬리퍼로 갈아 신었고, 퇴근 전까지 벗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제든 마주칠 때마다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정민 씨가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하이힐도 샀다. 내 노력을 이런 둔탱이가 알 턱이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