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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아마도 등에 와 닿은 따사로운 봄볕 때문이었을 거다. 그녀의 마음이 약해진 것은.
지지직, 지지직. 혜원은 착잡한 얼굴로 진동 모드의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전화를 받지 않자 메시지 알림이 연속으로 떴다. 그녀는 결국 몇 시간 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있던 옥상 정원 스케치를 내려놓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가씨, 병원으로 빨리 와 주십시오.>

아가씨라.
아가씨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15년이 흘렀다. 중학교 2학년의 봄부터 지금까지.
가야 할까?
혜원은 미열이 있는 듯한 이마를 손으로 만졌다. 그녀가 할머니의 소식을 들은 것은 5일 전이었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김 집사가 그녀 앞에 나타났었다. 위독한 할머니가 그녀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가지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돌아섰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미련이, 그리움이 남아 있었나 보다.
여전히 그녀의 가슴속엔 원망과 분노가 엉켜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할머니를 만나게 되면 그 감정을 넘어서 온 가족이 행복하게 살았던 시간들을 그리워하게 될까 봐 두려워졌다.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에 열렬히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자 혜원의 입에서 미처 잡지 못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한숨과 함께 꾹꾹 눌러 담았던 그날의 기억이 날카로운 칼끝이 되어 머릿속을 파고들자 혜원은 손바닥의 상처를 무의식적으로 쓰다듬었다. 이제는 손금처럼 보이는 기다란 상처. 아끼던 도자기 인형을 깨뜨려 날카로운 조각을 쥐었던 그때. 갈라진 여린 살과 그곳에서 뚝뚝 떨어지던 붉은 피.

“독한 것, 어린것이 어찌 이리 독할까.”

말과는 달리 안쓰러움이 가득했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마치 어제의 일이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고통스러워하던 아버지의 얼굴도.
그녀의 행복한 일상이 무너져 내린 건, 15년 전 소진을 만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온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봄과 여름으로 뒤섞인 바람이 살랑거리며 뺨을 스쳐 지나가던 그날, 혜원은 엄마가 만들어 준 고소한 쿠키를 오독오독 깨물어 먹으면서 햇살 가득한 정원으로 들어섰다.
초록의 여러 그라스(Grass)들과 야생화 화단을 지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장미꽃들 사이를 걸으며 꽃 이름을 중얼거렸다.

“메이드마리온, 레이디오브샬롯, 윌리엄모리스, 피스, 그리고 덩굴장미.”

혜원은 이 정원을 몹시 좋아했다. 엄마의 손길이 닿은 넓은 정원의 한쪽 귀퉁이는 이웃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철마다 아름다움을 뽐냈다. 흐드러지게 핀 수많은 야생화와 꽃들이 바람 따라 춤추고 있는 모습을 취한 듯이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남은 쿠키를 입에 집어넣었다.
고소한 쿠키만큼이나 절로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여러 꽃향기들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한 무리의 말리꽃 화분들을 훑으며 지나가던 그녀는 바람 속을 가득 채운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싱그럽게 웃었다.
아, 기분 좋다.
그녀는 한참 동안 정원을 거닐다가 어깨에 메고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내려놓고 의자에 누워 파란 하늘에 점점이 떠 있는 구름을 감상했다. 잠시 기분 좋은 사색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고요를 깨뜨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거기 고집쟁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옆 저택의 2층 발코니를 바라봤다. 헐렁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혜원은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한 그에게 얼굴을 찡그리며 되받아쳤다.

“어이, 거기 바람둥이!”
“정혜원, 너 정말 이럴 거야? 오빠라고 부르라 했지?”
“흥, 오빠 좋아하네.”
“어휴, 저게 정말. 말도 무지 안 듣는다니까. 무서운 중2병을 앓는 중인 거 아니까 성격 좋은 내가 참는다.”

혜원은 고3인 재현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나이 차가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 온 옆집 오빠였다. 엄마들 또한 자매처럼 가깝게 지내는 터라 안 볼 수 없는 사이기도 했다.

“정혜원, 바구니 내려보낸다. 거기에 쿠키 좀 담아 올려 보내라.”
“기브 앤 테이크도 몰라?”
“알았어. 나중에 맛있는 거 사 줄게.”
“언제 뉴욕으로 가는데?”
“다음 주에 가지. 며칠밖에 못 쉬어.”

혜원은 줄에 매달려 내려온 바구니에 엄마가 만들어 준 쿠키를 몇 개 집어넣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재현이 말했다.

“더 넣어. 친구랑 같이 먹을 거야.”
“친구?”
“학교 친구야.”

혜원이 쿠키를 몇 개 더 넣자 재현이 바구니를 끌어 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에 발코니로 걸어 나오는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우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감탄사를 재빨리 입안에 가둔 그녀에게 재현이 말했다.

“혜원아, 잘 먹을게. 그리고 이 오빠가 없는 동안에 예쁘게 잘 크고 있어라. 다른 놈에게 눈 돌리지 말고.”
“웃기는 소리 그만하고 그 얼굴 좀 안 보이게 해 주라.”

재현을 향해 주먹을 들이대던 혜원은 그의 친구와 눈이 딱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재현이 그 남자에게 말했다.

“태혁아. 저 애 말이야, 성격이 보통이 아니니까 가능한 안 마주치는 게 좋을 거야.”

재현에게 눈을 흘기던 혜원은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때였다. 끼이익, 하고 갑자기 열리는 대문 소리에 그녀의 관심이 그곳으로 쏠렸다.
오랫동안 아빠의 개인 비서로 일하고 있는 김 비서가 돌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평소와 다르게 김 비서가 고개를 돌렸다.
아파서 오래 쉰다고 하더니. 그런데 저 애는 누구지?
김 비서의 손을 잡은 네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기분이 좋은지 까르르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아이라 고개를 갸웃하던 혜원의 눈길이 김 비서의 불룩한 배에 가 닿았다. 이런 걸 예감이라고 하는 걸까. 따스한 봄볕에도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엄마!”

본능적으로 엄마를 불렀다.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녀에게 김 집사가 다가왔다.

“아가씨, 사장님께서 잠시만 이곳에 계시라고 하십니다.”
“무슨 일인데요? 네?”
“저는 잘 모릅니다.”

홀로 정원에 남겨진 혜원은 불안한 시선으로 저택을 바라봤다. 얼마 전부터 엄마와 아빠의 심상치 않던 분위기가 떠올라 불안감이 더 커졌다.

“남자아이, 남자아이. 할머니가 원하던 남자아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혜원은 햇살 가득한 정원을 바라봤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예전 생각에서 벗어난 혜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환한 얼굴의 은혜가 회의실을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미팅이라고 전했다. 혜원은 이미 준비해 놓은 자료를 들고 다른 직원들과 회의실로 들어갔다.
각자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가 끝나자 총괄실장인 준성이 스크린에 일정표를 띄우며 차분히 말했다.
“각 팀이 지금 맡고 있는 프로젝트로 바쁘다는 건 알지만 올해 가든 페스티벌에 참여할 팀을 결정해야 합니다. 사실 올해 초에 계획을 잡았어야 했는데 팀마다 맡고 있는 일이 워낙 많아서 참가 여부를 놓고 위에서도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정이 늦어졌고요.”
“실장님, 이번엔 어디에 참가합니까?”
은혜의 말에 준성은 자료를 나눠 주며 얘기를 이어 나갔다.
“일단 올해는 작년에 참여했던 햄튼코트 궁전 플라워 쇼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준성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직원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든든한 사람들이었다.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가든 디자이너들을 빠르게 포섭한 것은 회사 성장에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회사에서 보내는 기대에 힘입어 국내외의 많은 가든 페스티벌, 정원 박람회, 플라워 쇼 등에서 화려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그럼 올해는 몇 군데에 참여합니까?”
다른 직원의 질문에 준성이 대답했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싱가포르 가든 페스티벌과 일본 세계 가드닝 월드컵에만 참여하고, 국내에서는 서울 정원 박람회만 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실 싱가포르 가든 페스티벌은 포기할 예정이었으나 다행히도 대회 날짜가 10월로 늦춰지는 바람에 참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얘기를 마친 준성은 혜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 팀장님.”
“네, 실장님.”
“이번에 맡은 프로젝트가 언제쯤 끝나죠?”
“서두르면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정 팀장님이 팀을 꾸려 싱가포르 가든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게 어떻습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느 부문이 좋겠습니까?”
준성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혜원이 입을 열었다.
“자연식 농원(Landscape Garden)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준성은 팀을 마저 나눠 일을 분배했다.
회의가 끝난 후, 혜원은 다시 하던 일에 몰두했다. 책상 위에는 이미 열 장이 넘는 스케치들이 펼쳐져 있었다. 며칠에 걸쳐서 직접 컬러링 작업까지 마친 옥상 정원 스케치들이었다. 그것들을 잠시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그녀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H.L(Horizontal Line, 관찰자 높이의 눈높이 선) 그리기를 시작으로 라인 드로잉으로 공간 구성하기, 그리드(Grid) 그려 넣기, 구성 요소들의 높이 값을 측정한 후에 펜으로 입체감을 살리는 작업이 그녀의 손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컬러링 작업까지 마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린 혜원은 스케치한 것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드디어 찾아냈다. 그제야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빛과 바람의 방향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 게 문제였다. 다음 주에 다시 현장을 보러 가야 할 것 같았다.
자연환경을 고려해 식재를 해야 옥상 정원은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가 된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넣을 그라스의 종류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녀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거렸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그라스들이 많았다. 특히 그녀가 좋아하는 브라치트리차새풀은 그라스인데도 꽃이 깃털처럼 풍성하게 피어난다.
무리 지어 핀 그라스들 사이를 걸으면 마치 뭉실뭉실한 구름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부드럽고 운치 있다. 그래서 외국의 정원에서 많이 사랑받는 것이리라.
하지만 다른 그라스들이 연달아 떠오르자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버들마편초가 흐리기 효과(Blur Effect)로 사용하기 좋지 않을까? 가늘고 긴 꽃대 위에 피는 보라색 꽃만큼 식물 군락을 나누기에 그만한 게 없기도 하고. 하지만 자유로운 분위기로는 버지니아 냉초가 좋지. 가을에 냉초 풀잎에 단풍이 들면 그야말로 환상인데.
지금까지 그녀가 구상하고 시공한 정원만 해도 수십 개가 넘었다. 그중에는 아파트의 커뮤니티 야외 정원, 빌딩 옥상 정원, 식물원의 열대 정원, 그리고 전원 주택지의 정원 전체를 도맡아 한 적도 있었다.
꽃과 식물을 사랑하는 엄마에게 영향을 받아 그녀 또한 어렸을 때부터 이 분야에 흥미가 있었다. 때문에 대학에서 원예학과 조경학을 전공했고 재학 당시 참가한 정원 박람회를 후원해 준 이 회사에 운 좋게 입사했다.
머릿속에 입사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체력적으로 힘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공들여 완성한 정원을 거닐 때의 행복감에 비하면 그런 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혜원은 계속 떠오르는 생각을 떨쳐 내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는지 주위가 부산스러워지자 그녀도 하던 일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그러나 일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다른 생각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밖으로 나온 혜원은 바람이 가득한 거리에 서서 김 집사의 메시지를 들여다보며 갈등했다.
어떻게 찾아냈을까. 미국에 있는 줄 알고 있었을 텐데. 아버지도 아실까.
아버지란 단어와 함께 행복했던 시간들과 고통스러운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혜원은 연거푸 고개를 가로저었다.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엄마가 만들어 놓았을 따듯한 저녁밥 생각에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게다가 방실방실 웃고 있을 은우의 모습이 그려져 그녀의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갔다.





1장. 만남 그리고 은우 삼촌





혜원은 대문 밖에서 잠시 집을 바라봤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담 너머로 보이는 배롱나무와 홍단풍나무가 정겹다. 이 집을 구매해 리모델링을 하고 아담한 정원을 만들며 엄마와 행복해하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주말에는 배롱나무에 양초 병을 달아 은은한 봄밤의 정취를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퍼지는 오픈 주방을 지나 거실로 들어가며 두리번거렸다.
“엄마.”
“혜원이니? 안방에 있다.”
안방에서 나직하게 들리는 자장가 소리에 그녀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은우 재우려고요?”
“저녁 내내 친구들과 뛰어놀더니 피곤한가 봐.”
은우는 자면서도 하품을 했다. 통통한 뺨, 살짝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작은 입술. 아직은 아기 냄새가 나는 은우의 옆에 앉은 혜원은 자그마한 손을 잡았다.
“잘 자네, 우리 은우.”
은우의 이마에 살포시 뽀뽀하는 딸을 바라보던 숙영이 일어서며 말했다.
“배고플 텐데, 밥부터 먹어야지.”
“씻고 내려올게요.”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혜원이 주방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