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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맛있는 냄새가 나요.”
“찌개 식기 전에 어서 먹어.”
모녀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활짝 열어 놓은 슬라이딩 도어 너머로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의 소리가 가득한 그림 같은 정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집을 리모델링할 적에 주방과 은우의 놀이터인 다락방, 그리고 옥상에 특히 신경을 썼다. 혜원은 하루를 마치고 엄마와 밥을 먹으며 정원을 바라볼 때마다 이 집을 산 게 얼마나 잘한 선택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곤 했다.
직장인 강북에서 용인까지 출퇴근하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이 한적한 주택가를 보자마자 마음을 빼앗겨 버렸으니 후회는 없었다. 외곽에 자리 잡은 동네는 조용한 데다 뒤에 있는 산 덕분에 공기마저 깨끗해서 아이들이 뛰어놀기에도 제격인 곳이었다. 특히나 어린아이들이 있는 젊은 부부들이 많아 은우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어 좋았다.
순두부찌개와 함께 맛있게 밥을 먹는 딸을 보는 숙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혜원아.”
고개를 드는 딸에게 그녀가 말했다.
“다음 달 토요일, 은우 생일에 여기서 파티를 열까? 애 엄마들도 같이 초대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조촐하게 가든파티를 열까요? 정원에서 바비큐도 하고 애들이 좋아하는 엄마 표 쿠키도 여러 가지 굽고요. 와인과 맥주는 있죠?”
“충분해. 케이크는 구울까? 살까?”
“케이크와 토스트는 제가 준비할게요. 그리고 애들은 옥상이나 다락방, 지하 게임 룸에서 애니메이션을 보여 주면 좋아할 거예요.”
“하긴 애들은 자기들끼리도 잘 노니까.”
저녁을 다 먹은 혜원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숙영은 커피를 내렸다. 무리 지어 심어 놓은 소죽의 사그락거리는 소리에 은은한 커피 향이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정원을 보며 미소 짓는 그녀의 눈가에 자잘한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있는 딸에게로 향하자 금세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딸이 없었다면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이혼을 하고 홀로 그 집을 나오면서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던가.
당시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녀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수시로 정신과를 드나들어야 했고 집 밖을 나가는 게 두려웠다. 그녀의 일상은 이혼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혜원이 왔다. 앙상하게 마른 딸을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에게로 오기 위해 딸이 보냈을 힘든 시간이 짐작 갔기 때문이었다. 물고 빤다는 표현 그대로 혜원을 애지중지하던 시어머니와 남편에게서 그녀는 딸을 데려올 힘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을 중학교 2학년의 어린 딸이 스스로 해냈다.
찾아와 품에 안긴 딸을 한참 동안 다독였다. 말없이 앉아 있는 혜원에게 그녀는 밥을 지어 먹이고 쿠키를 구워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밤새 울었었다.
“엄마.”
혜원의 목소리에 숙영은 활짝 웃으며 커피가 가득 담긴 머그잔을 내밀었다. 둘은 달빛 아래서 더 아름답게 빛나는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 * *
“저 아이와 여자라고?”
“네, 본부장님.”
박 비서의 말에 태혁은 창문을 조금 더 내려 백화점에서 나와 공원으로 향하는 여자와 아이를 지켜봤다.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깔깔거리며 웃었다.
박 비서의 말이 이어졌다.
“토요일엔 그 동네의 몇몇 엄마들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클레이 아트 수업에 참가한답니다.”
박 비서는 그가 건넨 자료와 여자를 번갈아 보고 있는 태혁에게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정혜원 씨는 젊은 나이에 팀장 자리에 오를 만큼 업계에서 인정받는 가든 디자이너입니다. 특히 국내외의 주요 정원 박람회와 가드닝 월드컵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은우 도련님은 많이 사랑받으며 자란 것 같습니다. 정혜원 씨와 그 어머니에게서요.”
“그렇군요.”
태혁의 눈에도 아이는 행복해 보였다. 까르르 웃는 아이를 바라보는 여자에게서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둘 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아이의 물건이 잔뜩 들어 있을 것 같은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다른 손으로 커피까지 든 여자의 모습이 너무 여유로워 보여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차 안에서 그들을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함께 온 친구들과 공원을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가 여자에게 달려갔다. 해맑게 웃는 아이를 안아서 빙빙 돌리던 그녀가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입에 넣어 주더니 오물거리며 먹는 작은 입을 티슈로 닦아 주는 게 보였다.
“둘 다 행복해 보이네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태혁은 여자가 커피를 마시면서 같이 온 엄마들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그 자리를 떠났다.
본가로 가는 대신 회사로 차를 돌리게 했다. 주말이라 회사는 한산했다. 집무실로 올라간 태혁은 서랍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의 형인 주혁에 관한 보고서였다.
주혁은 한 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그래도 핏줄인지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어떻게든 큰아들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려는 부모님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도박, 술, 여자.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 조심해야 할 대상들. 그럼에도 주혁은 이 문제들로 끊임없이 사고를 치다가 결국 미국의 리햅(Rehab,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 치료 및 다른 질병의 재활 치료까지 하는 곳) 시설에 들어가 재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런 형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됐다. 형도 모르는 아이가 다른 사람의 손에서 자라고 있다니.
태혁은 서랍에서 다른 서류를 꺼내 낯선 여자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강원랜드의 카지노에서 근무했다는 여자는 순하고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죽었답니다. 도련님이 한 살 때 사고로 그만…….”
박 비서의 말이 귓가에 울리자 태혁은 초췌한 모습을 한 형의 사진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분노가 가득한 말이 그의 입술을 뚫고 나왔다.
“형님! 도대체 언제 정신을 차릴 겁니까?”
* * *
카페의 창가에 앉은 태혁은 시선을 거리로 돌렸다. 혜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박 비서를 통해 혜원에게 이미 상황을 설명한 상태였고 직접 몇 번의 통화도 한 후였다.
그의 시야에 단정한 블라우스 차림의 늘씬한 여자가 걸어오는 모습이 잡혔다. 잠시 망설이듯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살짝 손을 든 그를 향해 또박또박 걸어와 조용히 맞은편에 앉았다. 여자의 얼굴 위로 햇살이 일렁였다. 그 햇살 때문인지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슬퍼 보였다. 그게 제 탓인 것만 같아 태혁은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을 소개했다.
“한태혁입니다.”
“정혜원입니다.”
혜원은 인사를 나누고도 여전히 경계심을 품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둘의 어색한 시간은 태혁이 주문한 차를 가져오는 동안 잠시 누그러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잠시 말없이 차를 마시던 태혁이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확인해 보십시오. 저희 쪽에서 먼저 검사를 의뢰했었습니다. 그 점은 사과드립니다.”
“저도 저번에 보내 주신 형님분의 칫솔로 검사를 신청했습니다.”
둘은 조용히 서류를 교환했다. 한주혁과 은우의 친자 검사 결과에 대한 내용을 끝까지 읽은 혜원의 눈에서 그만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이미 결과를 알고 나왔는데도 은우의 얼굴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녀의 마음 상태를 보여 주듯이 목소리에 감정이 섞여 나왔다.
“……데려가겠다는 건가요, 우리 은우를?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도 지금까지 잘 살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태혁은 입술을 깨물며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혜원의 모습에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은우가 편안하게 저희 가족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면서 기다리는 게 우선이라고 봅니다.”
“…….”
“저도, 부모님도 같은 생각입니다. 은우가 그곳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 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 혜원의 눈에 의심이 어렸다.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며칠 뒤에 어머니와 함께 은우를 보러 가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혜원이 그제야 안도한 얼굴로 식어 버린 찻잔을 집어 들자 태혁은 양해를 구하고 뜨거운 차를 다시 주문했다.
은우 아빠도 이런 남자면 좋을 텐데.
자상한 모습의 태혁에게 저절로 시선이 간 혜원은 자연스레 소진과 재회했던 때로 생각이 흘러갔다. 중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였던 김소진, 그런 친구가 낳은 아들. 불행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고 몸부림치던 소진의 말이 떠올랐다.
“부잣집에 입양된 여덟 살 때부터 늘 불안했었어. 그러다가 네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 결국 파양을 당했지. 악착같이 살아야 했어. 그런데 내 아이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다니.”
혜원은 양손으로 만삭의 배를 감싸며 쓸쓸하게 웃던 소진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태어난 은우는 혜원의 가족이 됐다.
행복하기만 했던 시간이 흘러 은우가 막 11개월을 지났을 때였다. 사고를 당해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소진이 아이를 부탁해 왔고 숙영은 망설이지 않고 소진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그때서야 혜원은 정식으로 은우의 이모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은우에게 이제 가족이 더 생겼다.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
친부가 나타났으니 혜원과 숙영이 은우를 키우겠다고 더 이상 고집할 수도 없었다.
“혜원 씨, 따뜻할 때 마셔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끌리듯 혜원의 시선이 태혁에게 향했다. 그러다 목소리만큼이나 눈빛이 참 좋다고 느낀 제 생각에 놀라 얼른 찻잔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신 후에야 다시 차분해진 혜원은 태혁과 은우에 대한 얘기를 더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태혁의 가족이 은우를 만나러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낯설음에 울음을 터트리던 은우가 차츰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러온 친구들에게 삼촌과 할머니를 소개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외할머니와 이모 외에도 자랑할 가족들이 늘어나 신이 났을 것이다.
태혁의 어머니인 최 여사는 어느새 숙영과도 친해져서 수시로 집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존재조차 몰랐던 첫 손자라 더 마음이 쓰여 저절로 발길이 향했나 보다.
하지만 회사 일로 바쁜 태혁은 자주 들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은우는 그런 태혁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랐다. 아빠들과 노는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는지 태혁이 오면 집 앞에서 자전거를 타거니 목말을 태워 달라고 떼를 쓰기에 이르렀다. 그런 두 사람을 볼 때마다 숙영은 핏줄이란 게 참으로 무섭다는 말을 했다.
토요일이었다. 주방의 긴 원목 테이블에 앉아 숙영과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밖을 내다보던 최 여사가 말했다.
“여긴 참 좋아요. 평화롭고 고즈넉하고. 게다가 오픈 주방으로 되어 있으니까 꼭 카페에 앉아 있는 느낌이에요.”
“우리 애가 고생을 많이 했죠. 직업이 직업인지라 이 집을 리모델링할 때 설계에도 참여했으니까요.”
“이 편백나무 테이블은 앉아 있기만 해도 좋은 향기가 올라와서 마음이 편안해져요.”
“편백나무 중에서도 히노끼라고 일본에서 수입해 온 거라더군요. 우리 딸애가 주방과 정원을 연결시키려고 특히나 신경을 많이 썼지요. 도마부터 시작해서 주방 용품 대부분에 편백나무를 사용했고 찬장은 물푸레나무와 자작나무로 했어요.”
“역시! 그래서 숲에 온 느낌이었네요. 그런데 은우 이모는 오늘도 늦나요?”
“요즘 맡은 프로젝트를 빨리 끝내야 하는 상황이라 정신이 없대요. 얼마 지나면 좀 괜찮을 거라더군요.”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하늘에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아쉬운 얼굴로 일어선 최 여사는 장미꽃이 만발한 화단 옆에 서서 은우를 안아다 담장 밖을 구경시켜 주고 있는 태혁을 불렀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가라는 숙영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고 하니 어쩔 수 없네요. 다음에는 꼭 저희 집으로 은우와 함께 놀러 오세요.”
최 여사와 태혁을 배웅하고 들어온 숙영은 갑자기 집 안이 썰렁하게 느껴지자 은우를 안으며 물었다.
“은우야, 삼촌이 좋아?”
“응, 목말도 태워 주고 자전거도 밀어 줬어.”
“좋은 삼촌이구나.”
“응.”
밤이 훌쩍 깊어졌음에도 딸이 오지 않자 숙영의 이마에 그늘이 졌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주말에는 잘 나가지 않던 딸이 요즘 부쩍 집을 비웠다. 일부러 밖을 배회하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는 결국 은우를 데려갈 테니 그쪽 가족들과 마주치기 싫은 걸까.
기운이 없어 보이는 딸의 모습이 떠오르자 걱정 가득한 숙영의 시선이 어두운 밖으로 향했다.
숙영의 걱정대로 혜원은 친구를 만나 맥주를 몇 잔 마신 상태였다. 대리운전을 부른 친구의 차를 타고 집 근처에서 내린 그녀는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 마신 후 집으로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은우의 친가 사람들이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지 거의 한 달. 그 시간 속에서 편안해지지 못한 사람은 그녀뿐인 것 같았다. 게다가 은우 아빠인 주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나니 마음은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기만 했다.
제 아이처럼 키웠다. 이모가 아닌 엄마의 마음으로 품에서 떼어 놓지 않던 아이를 그런 아빠에게 보내야 할까.
답답한 마음에 눈길을 준 밤하늘에는 달빛과 별빛이 어우러져 수를 놓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별이 이 산기슭의 한적한 곳에서는 거짓말처럼 무리를 지어 반짝였다.
“혜원 씨.”
혜원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택가에 주차된 차에서 내린 태혁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가로등 불빛 속에서 그의 모습이 점점 커졌다.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혜원은 그가 바로 앞까지 왔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은우를 보고 오는 길이에요?”
“네, 지금쯤 잠들었을 겁니다.”
혜원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태혁은 그녀의 걸음에 보조를 맞춰 걸었다. 어깨가 처진 채 걷는 혜원에게서 약한 술 냄새가 났다. 혜원이 왜 술을 마셨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 버린 그와 그의 가족들 때문이란 걸. 무엇보다 은우를 데려갈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맛있는 냄새가 나요.”
“찌개 식기 전에 어서 먹어.”
모녀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활짝 열어 놓은 슬라이딩 도어 너머로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의 소리가 가득한 그림 같은 정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집을 리모델링할 적에 주방과 은우의 놀이터인 다락방, 그리고 옥상에 특히 신경을 썼다. 혜원은 하루를 마치고 엄마와 밥을 먹으며 정원을 바라볼 때마다 이 집을 산 게 얼마나 잘한 선택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곤 했다.
직장인 강북에서 용인까지 출퇴근하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이 한적한 주택가를 보자마자 마음을 빼앗겨 버렸으니 후회는 없었다. 외곽에 자리 잡은 동네는 조용한 데다 뒤에 있는 산 덕분에 공기마저 깨끗해서 아이들이 뛰어놀기에도 제격인 곳이었다. 특히나 어린아이들이 있는 젊은 부부들이 많아 은우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어 좋았다.
순두부찌개와 함께 맛있게 밥을 먹는 딸을 보는 숙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혜원아.”
고개를 드는 딸에게 그녀가 말했다.
“다음 달 토요일, 은우 생일에 여기서 파티를 열까? 애 엄마들도 같이 초대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조촐하게 가든파티를 열까요? 정원에서 바비큐도 하고 애들이 좋아하는 엄마 표 쿠키도 여러 가지 굽고요. 와인과 맥주는 있죠?”
“충분해. 케이크는 구울까? 살까?”
“케이크와 토스트는 제가 준비할게요. 그리고 애들은 옥상이나 다락방, 지하 게임 룸에서 애니메이션을 보여 주면 좋아할 거예요.”
“하긴 애들은 자기들끼리도 잘 노니까.”
저녁을 다 먹은 혜원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숙영은 커피를 내렸다. 무리 지어 심어 놓은 소죽의 사그락거리는 소리에 은은한 커피 향이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정원을 보며 미소 짓는 그녀의 눈가에 자잘한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있는 딸에게로 향하자 금세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딸이 없었다면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이혼을 하고 홀로 그 집을 나오면서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던가.
당시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녀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수시로 정신과를 드나들어야 했고 집 밖을 나가는 게 두려웠다. 그녀의 일상은 이혼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혜원이 왔다. 앙상하게 마른 딸을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에게로 오기 위해 딸이 보냈을 힘든 시간이 짐작 갔기 때문이었다. 물고 빤다는 표현 그대로 혜원을 애지중지하던 시어머니와 남편에게서 그녀는 딸을 데려올 힘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을 중학교 2학년의 어린 딸이 스스로 해냈다.
찾아와 품에 안긴 딸을 한참 동안 다독였다. 말없이 앉아 있는 혜원에게 그녀는 밥을 지어 먹이고 쿠키를 구워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밤새 울었었다.
“엄마.”
혜원의 목소리에 숙영은 활짝 웃으며 커피가 가득 담긴 머그잔을 내밀었다. 둘은 달빛 아래서 더 아름답게 빛나는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 * *
“저 아이와 여자라고?”
“네, 본부장님.”
박 비서의 말에 태혁은 창문을 조금 더 내려 백화점에서 나와 공원으로 향하는 여자와 아이를 지켜봤다.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깔깔거리며 웃었다.
박 비서의 말이 이어졌다.
“토요일엔 그 동네의 몇몇 엄마들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클레이 아트 수업에 참가한답니다.”
박 비서는 그가 건넨 자료와 여자를 번갈아 보고 있는 태혁에게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정혜원 씨는 젊은 나이에 팀장 자리에 오를 만큼 업계에서 인정받는 가든 디자이너입니다. 특히 국내외의 주요 정원 박람회와 가드닝 월드컵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은우 도련님은 많이 사랑받으며 자란 것 같습니다. 정혜원 씨와 그 어머니에게서요.”
“그렇군요.”
태혁의 눈에도 아이는 행복해 보였다. 까르르 웃는 아이를 바라보는 여자에게서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둘 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아이의 물건이 잔뜩 들어 있을 것 같은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다른 손으로 커피까지 든 여자의 모습이 너무 여유로워 보여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차 안에서 그들을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함께 온 친구들과 공원을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가 여자에게 달려갔다. 해맑게 웃는 아이를 안아서 빙빙 돌리던 그녀가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입에 넣어 주더니 오물거리며 먹는 작은 입을 티슈로 닦아 주는 게 보였다.
“둘 다 행복해 보이네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태혁은 여자가 커피를 마시면서 같이 온 엄마들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그 자리를 떠났다.
본가로 가는 대신 회사로 차를 돌리게 했다. 주말이라 회사는 한산했다. 집무실로 올라간 태혁은 서랍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의 형인 주혁에 관한 보고서였다.
주혁은 한 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그래도 핏줄인지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어떻게든 큰아들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려는 부모님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도박, 술, 여자.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 조심해야 할 대상들. 그럼에도 주혁은 이 문제들로 끊임없이 사고를 치다가 결국 미국의 리햅(Rehab,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 치료 및 다른 질병의 재활 치료까지 하는 곳) 시설에 들어가 재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런 형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됐다. 형도 모르는 아이가 다른 사람의 손에서 자라고 있다니.
태혁은 서랍에서 다른 서류를 꺼내 낯선 여자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강원랜드의 카지노에서 근무했다는 여자는 순하고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죽었답니다. 도련님이 한 살 때 사고로 그만…….”
박 비서의 말이 귓가에 울리자 태혁은 초췌한 모습을 한 형의 사진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분노가 가득한 말이 그의 입술을 뚫고 나왔다.
“형님! 도대체 언제 정신을 차릴 겁니까?”
* * *
카페의 창가에 앉은 태혁은 시선을 거리로 돌렸다. 혜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박 비서를 통해 혜원에게 이미 상황을 설명한 상태였고 직접 몇 번의 통화도 한 후였다.
그의 시야에 단정한 블라우스 차림의 늘씬한 여자가 걸어오는 모습이 잡혔다. 잠시 망설이듯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살짝 손을 든 그를 향해 또박또박 걸어와 조용히 맞은편에 앉았다. 여자의 얼굴 위로 햇살이 일렁였다. 그 햇살 때문인지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슬퍼 보였다. 그게 제 탓인 것만 같아 태혁은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을 소개했다.
“한태혁입니다.”
“정혜원입니다.”
혜원은 인사를 나누고도 여전히 경계심을 품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둘의 어색한 시간은 태혁이 주문한 차를 가져오는 동안 잠시 누그러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잠시 말없이 차를 마시던 태혁이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확인해 보십시오. 저희 쪽에서 먼저 검사를 의뢰했었습니다. 그 점은 사과드립니다.”
“저도 저번에 보내 주신 형님분의 칫솔로 검사를 신청했습니다.”
둘은 조용히 서류를 교환했다. 한주혁과 은우의 친자 검사 결과에 대한 내용을 끝까지 읽은 혜원의 눈에서 그만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이미 결과를 알고 나왔는데도 은우의 얼굴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녀의 마음 상태를 보여 주듯이 목소리에 감정이 섞여 나왔다.
“……데려가겠다는 건가요, 우리 은우를?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도 지금까지 잘 살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태혁은 입술을 깨물며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혜원의 모습에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은우가 편안하게 저희 가족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면서 기다리는 게 우선이라고 봅니다.”
“…….”
“저도, 부모님도 같은 생각입니다. 은우가 그곳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 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 혜원의 눈에 의심이 어렸다.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며칠 뒤에 어머니와 함께 은우를 보러 가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혜원이 그제야 안도한 얼굴로 식어 버린 찻잔을 집어 들자 태혁은 양해를 구하고 뜨거운 차를 다시 주문했다.
은우 아빠도 이런 남자면 좋을 텐데.
자상한 모습의 태혁에게 저절로 시선이 간 혜원은 자연스레 소진과 재회했던 때로 생각이 흘러갔다. 중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였던 김소진, 그런 친구가 낳은 아들. 불행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고 몸부림치던 소진의 말이 떠올랐다.
“부잣집에 입양된 여덟 살 때부터 늘 불안했었어. 그러다가 네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 결국 파양을 당했지. 악착같이 살아야 했어. 그런데 내 아이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다니.”
혜원은 양손으로 만삭의 배를 감싸며 쓸쓸하게 웃던 소진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태어난 은우는 혜원의 가족이 됐다.
행복하기만 했던 시간이 흘러 은우가 막 11개월을 지났을 때였다. 사고를 당해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소진이 아이를 부탁해 왔고 숙영은 망설이지 않고 소진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그때서야 혜원은 정식으로 은우의 이모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은우에게 이제 가족이 더 생겼다.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
친부가 나타났으니 혜원과 숙영이 은우를 키우겠다고 더 이상 고집할 수도 없었다.
“혜원 씨, 따뜻할 때 마셔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끌리듯 혜원의 시선이 태혁에게 향했다. 그러다 목소리만큼이나 눈빛이 참 좋다고 느낀 제 생각에 놀라 얼른 찻잔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신 후에야 다시 차분해진 혜원은 태혁과 은우에 대한 얘기를 더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태혁의 가족이 은우를 만나러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낯설음에 울음을 터트리던 은우가 차츰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러온 친구들에게 삼촌과 할머니를 소개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외할머니와 이모 외에도 자랑할 가족들이 늘어나 신이 났을 것이다.
태혁의 어머니인 최 여사는 어느새 숙영과도 친해져서 수시로 집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존재조차 몰랐던 첫 손자라 더 마음이 쓰여 저절로 발길이 향했나 보다.
하지만 회사 일로 바쁜 태혁은 자주 들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은우는 그런 태혁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랐다. 아빠들과 노는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는지 태혁이 오면 집 앞에서 자전거를 타거니 목말을 태워 달라고 떼를 쓰기에 이르렀다. 그런 두 사람을 볼 때마다 숙영은 핏줄이란 게 참으로 무섭다는 말을 했다.
토요일이었다. 주방의 긴 원목 테이블에 앉아 숙영과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밖을 내다보던 최 여사가 말했다.
“여긴 참 좋아요. 평화롭고 고즈넉하고. 게다가 오픈 주방으로 되어 있으니까 꼭 카페에 앉아 있는 느낌이에요.”
“우리 애가 고생을 많이 했죠. 직업이 직업인지라 이 집을 리모델링할 때 설계에도 참여했으니까요.”
“이 편백나무 테이블은 앉아 있기만 해도 좋은 향기가 올라와서 마음이 편안해져요.”
“편백나무 중에서도 히노끼라고 일본에서 수입해 온 거라더군요. 우리 딸애가 주방과 정원을 연결시키려고 특히나 신경을 많이 썼지요. 도마부터 시작해서 주방 용품 대부분에 편백나무를 사용했고 찬장은 물푸레나무와 자작나무로 했어요.”
“역시! 그래서 숲에 온 느낌이었네요. 그런데 은우 이모는 오늘도 늦나요?”
“요즘 맡은 프로젝트를 빨리 끝내야 하는 상황이라 정신이 없대요. 얼마 지나면 좀 괜찮을 거라더군요.”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하늘에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아쉬운 얼굴로 일어선 최 여사는 장미꽃이 만발한 화단 옆에 서서 은우를 안아다 담장 밖을 구경시켜 주고 있는 태혁을 불렀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가라는 숙영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고 하니 어쩔 수 없네요. 다음에는 꼭 저희 집으로 은우와 함께 놀러 오세요.”
최 여사와 태혁을 배웅하고 들어온 숙영은 갑자기 집 안이 썰렁하게 느껴지자 은우를 안으며 물었다.
“은우야, 삼촌이 좋아?”
“응, 목말도 태워 주고 자전거도 밀어 줬어.”
“좋은 삼촌이구나.”
“응.”
밤이 훌쩍 깊어졌음에도 딸이 오지 않자 숙영의 이마에 그늘이 졌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주말에는 잘 나가지 않던 딸이 요즘 부쩍 집을 비웠다. 일부러 밖을 배회하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는 결국 은우를 데려갈 테니 그쪽 가족들과 마주치기 싫은 걸까.
기운이 없어 보이는 딸의 모습이 떠오르자 걱정 가득한 숙영의 시선이 어두운 밖으로 향했다.
숙영의 걱정대로 혜원은 친구를 만나 맥주를 몇 잔 마신 상태였다. 대리운전을 부른 친구의 차를 타고 집 근처에서 내린 그녀는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 마신 후 집으로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은우의 친가 사람들이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지 거의 한 달. 그 시간 속에서 편안해지지 못한 사람은 그녀뿐인 것 같았다. 게다가 은우 아빠인 주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나니 마음은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기만 했다.
제 아이처럼 키웠다. 이모가 아닌 엄마의 마음으로 품에서 떼어 놓지 않던 아이를 그런 아빠에게 보내야 할까.
답답한 마음에 눈길을 준 밤하늘에는 달빛과 별빛이 어우러져 수를 놓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별이 이 산기슭의 한적한 곳에서는 거짓말처럼 무리를 지어 반짝였다.
“혜원 씨.”
혜원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택가에 주차된 차에서 내린 태혁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가로등 불빛 속에서 그의 모습이 점점 커졌다.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혜원은 그가 바로 앞까지 왔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은우를 보고 오는 길이에요?”
“네, 지금쯤 잠들었을 겁니다.”
혜원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태혁은 그녀의 걸음에 보조를 맞춰 걸었다. 어깨가 처진 채 걷는 혜원에게서 약한 술 냄새가 났다. 혜원이 왜 술을 마셨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 버린 그와 그의 가족들 때문이란 걸. 무엇보다 은우를 데려갈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