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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트래펄가 광장의 5월은 눈이 부셨다.
금가루처럼 반짝이는 햇살을 입힌 분수대의 물방울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봄 햇살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광장 여기저기에서 해바라기처럼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재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동생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아직 런던이지?
“응. 여기서 내일 밤 비행기로 들어갈 거야.”
─알았어. 내가 마중 나갈게. 엄마랑 할아버지도 형이 빨리 오길 엄청 기다리고 계셔.
“지금이라도 안 간다고 하면 안 되겠지?”
─큰일 날 소리. 형 때문에 엄마랑 나는 길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다고.
“할아버지가 설마 정말로 쫓아내시기야 할까?”
물론 재원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같은 말씀 번복하는 법은 세상이 두 조각나도 없다는 것을. 한 번 하겠다고 한 일을 무르는 법이 없다는 것도.
21세기에, 최첨단 과학으로 번성하는 이 시대에 사주가 맞는다는 이유로 결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 결혼을 당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니. 수천 번 다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그는 자동차 회사, 벤틀리에 몸담고 있었다.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만두는 이유를 차마 할아버지가 정해 준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어, 할아버지 건강이 안 좋다는 말로 둘러댔다.
─형이 결혼할 여자들 어제 줄줄이 불려 왔어.
말도 안 돼.
─형 좋다고 예전에 따라 다니던 진경이도 왔더라.
재희의 얘기를 듣고 보니 사태가 정말 심각해 보였다.
─암튼 총 네 명의 후보가 왔는데, 그중 누구랑 결혼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여. 다들 얼굴도 반반하고 집안도 빵빵하고, 학력도 좋고. 할아버지 참 재주도 좋으셔. 어디서 그런 후보들을 물색해 놓으신 건지.
제 일 아니라고 재희는 마냥 즐겁다. 옆에 있었으면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게.
─와서 마음에 드는 여자로 한 명 고르기만 하면 돼.
“내가 왜 얼굴도 모르는 여자랑 결혼을 해?”
재원이 신경질을 내자 재희가 대꾸했다.
─그럼 얼굴 아는 진경이랑 하든지.
“신재희!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난 앞으로 최소 5년 동안은 그 누구하고도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이게 사람 말의 요점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리는데, 재원의 시야에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한국 여자였다.
키는 170 정도, 호리호리한 몸매에 청바지와 눈부시게 흰 티셔츠만 입고도 멋스러웠다.
얼굴까지 자세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전체적인 인상만을 놓고 보자면 재원이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부담스러운 엄청난 미모는 아니지만 개성이 있어 오래 놓고 봐도 질리지 않을.
물론 몸매는…… 확실히 그의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먹고 있던 빵조각을 뜯어 바닥에 던지자 비둘기 떼가 푸드덕 날아와 내려앉았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재원이 있는 쪽을 보고 서자 어디선가 그녀를 본 기억이 났다.
어제 그 레스토랑에서였나? 아니면 미술관?
바람결에 날린 머리가 귀찮은지 여자는 손목에 끼고 있던 머리끈으로 머리를 대충 묶었다.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고, 몸의 선이 시원시원했다.
─형,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왜 대답이 없어?
“어, 뭐라고 했지?”
─그럼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어. 형이 여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오지 않는 한 그 네 명 중에 한 여자와의 결혼은 피할 수 없다고.
결혼할 여자라.
가짜 약혼녀라도 만들어서 데리고 가? 내일이면 떠나는데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가짜 약혼녀를 어디서 찾지?
그런 생각 끝에 재원의 시선은 거대한 사자 상 앞으로 다가가는 그 여자에게 향했다.
몇몇 관광객들이 사자 상이 엎드려 있는 탑 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자도 그곳에 올라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탑은 어른 남자의 키를 훌쩍 넘을 만큼 높고 미끄러웠다.
재원은 일어나서 천천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일단 끊어. 가 볼 데가 있어.”
사자 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뒤에 가 섰다.
“올라가고 싶은가 봅니다.”
일단 시험 삼아 한국어로 말했다.
여자가 단박에 뒤를 돌아본다.
이제껏 여자한테 말을 걸어 퇴짜를 맞아본 적이 없는 그였다. 여자들은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 했다.
가까이서 보니 피부가 깨끗하고 눈매가 시원스러웠다.
“올려 주시게요?”
다른 여자들과 반응이 달랐다.
보통 그가 말을 걸면 여자들은 더 잘 보이고 싶어서 예쁜 척하며 관심을 끌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장난스럽게 묻는 눈가에 웃음이 떠올라 재원이 오히려 당황을 했다.
“원한다면.”
의도했던 것보다 더 딱딱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올려 주세요, 그럼.”
여자는 팔을 쭉 뻗어 난간을 잡고 올라갈 채비를 했다.
재원은 그녀의 두 다리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런데 여자가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는 통에 떨어지지 않게 붙잡다가 실수로 그녀의 물컹한 가슴을 쥐고 말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두 손에 꽉 차게 들어오는 가슴의 탄력 있는 느낌에 재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치겠군. 잘못하면 성추행하려고 일부러 접근한 파렴치한이 되게 생겼다.
여자도 당황했는지 자기 가슴에 얹힌 재원의 손을 내려다본다.
“그만 놓는 게 어때요?”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여자가 말했다. 재원은 얼른 손을 놓았다.
“절대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알아요.”
여자의 시원스런 대답에 재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한 번에 올라가는데 성공을 했다.
여자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햇살에 하얀 이가 반짝였다.
“사진?”
그가 묻자 여자는 카메라를 화면에 띄운 핸드폰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사진을 찍어 주면서 재원은 궁리를 했다.
처음 보는 여자한테 가짜 약혼녀를 해 달라고 하면 아마 뺨 맞고 거절당할 확률 100%일 텐데…….
여자는 재원이 찍어 준 사진을 보더니 마음에 들어 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자연스러운 표정, 날씬한 몸매, 몸에서 풍기는 긍정적 에너지,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고마워요. 올라올래요?”
재원은 여자의 손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난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실수로 가슴을 움켜잡았으니, 가짜 약혼녀 얘기를 꺼냈다간 뺨 맞고 신고당하기 십상이겠다 싶어, 재원은 일단 햇볕을 즐기기로 했다.





1. 가짜 약혼녀





남자는 잘생겼다.
솔직히 많은 잘생긴 남자들을 봐 왔고, 외모가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 또한 변함없었지만, 보고 있으면 가슴이 설렐 만큼 남자는 멋있었다.
남자는 키도 컸다. 182-3cm는 되어 보였다. 그녀 또한 작은 키는 아니었는데도 마주 서면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키만 큰 게 아니라 몸도 좋아 보였다.
흰 티셔츠 안에 언뜻언뜻 비치는 가슴의 근육이 되게 섹시했다. 너른 어깨와 탄탄한 가슴팍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허리선은 날렵했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리듬감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은 에너지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여자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윙크를 보내거나 손을 흔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길을 물어보는 척 다가와 시간 있냐고 은근슬쩍 데이트를 신청하는 여자를 보며 수은은 그녀들의 대담함이 부러웠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남자의 행선지와 수은의 행선지는 같았다. 박물관에서도, 유람선에서도 그 남자를 마주쳤다.
남자는 할 얘기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쉽게 꺼낼 얘기는 아닌 듯 보기만 해도 설레게 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저렇게 멋진 남자가 생전 처음 보는 그녀에게 할 얘기가 있을 리 만무했는데도, 그런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 갔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 그리고 마지막 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수은이 향한 곳은 ‘모터 앤 모터’ 술집이었다. 자동차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들렀다 가는 곳이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온갖 자동차 모형들이 즐비하고, 레이싱 카 사진들이 사방 벽을 차지하고 있는 그 술집엔 주로 남자들이 많았다. 더러 남자 친구와 같이 온 여자들도 있었지만,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바이커들이 힐끔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빈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아갔다.
수은은 칵테일을 좋아했지만, 왠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흑맥주를 시켰다.
맥주를 반쯤 비웠을 때,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니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You look a little bit lonely.” (외로워 보이는군.)
“Don’t worry about me. I'm fine.” (걱정 마세요. 괜찮으니까.)
“Where are you from?” (어디서 왔지?)
“I'm from South Korea.” (한국에서 왔어요.)
그냥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서 왔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수은은 꼭 앞에 South를 붙였다.
“Interesting.” (흥미롭군.)
“…….”
“How about joining us? We wanna hear about your story.” (우리랑 같이 어울리는 게 어때?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특별히 나쁜 사람들 같진 않았지만, 남자들만 우글우글한 곳에 끼고 싶진 않아 수은은 고개를 저었다.
“No, thank you. I'm expecting a friend.” (사양할게요. 기다리는 친구가 있어서.)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돌아갈 것 같지 않아 둘러댔다.
“I know you’re lying.” (거짓말인 거 다 알아.)
그녀가 거짓말을 잘 못하는 스타일이긴 했다.
전화라도 해서 불러낼 친구도 없지만 그들과 합석하기도 싫었다.
이대로 그냥 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그 남자가 나타났다.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오는 순간 술집 전체가 환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를 아는 척했다.
“여기예요!”
그래 놓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날 모른 척하면 어떡하지? 그럼 개망신인데…… 이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고.
그는 수은과 앞에 앉은 남자를 쓱 한 번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Sorry. I'm late.” (늦어서 미안.)
다행히 같이 어울리자던 수염 기른 남자는 재원을 쓱 쳐다보더니 조용히 물러났다.
“고마워요. 모른 척하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했거든요.”
수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마우면 술 한 잔 사든가.”
남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수은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수은은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혹시 하루 종일 저 따라다녔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이 술집도 저 따라온 거예요?”
“여긴 원래 자주 들르던 곳이야.”
“이름이 뭐죠?”
“신재원. 그쪽은?”
“현수은. 어쨌든 이것도 인연인데, 반가워요.”
재원은 종업원이 가져다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도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