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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보통 사람이 누군가를 쳐다볼 때는 시선을 여러 군데 분산시키기 마련인데, 이 남자가 제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감은 넘치지만 오만하지 않고, 매력적인 자태는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눈빛 한 번에도 가슴이 쿵쾅거릴 만큼 남자다운 데다, 보통 잘생기기만 한 남자들에겐 없는 깊이가 있었다.
그래서 알고 싶어졌다.
이 남자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보통 여자들은 혼자 이런 곳에 잘 안 오는데, 어떻게 알고 왔지?”
“전부터 꼭 한번 와 보고 싶었어요. 자동차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걸요.”
“자동차 관련 일을 하나?”
“믿지 못하겠지만 저 현진자동차 본사 정비사예요.”
예상했던 대로 재원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쪽도 자동차 관련 일 하나 봐요?”
“벤틀리에 있었어. 익스테리어 디자이너로 5년간.”
“와우! 정말요? 벤틀리 본사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벤틀리에 한국 디자이너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며칠 전에 그만뒀지.”
“아니, 왜요? 왜 그 좋은 직장을…….”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수은은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5년이나 있었다면서 왜 그만둔 건데요? 혹시 더 좋은 회사로 옮기는 건가요?”
“현진으로.”
수은은 입을 벌린 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와, 같은 회사…….”
믿기지가 않았다. 이런 걸 인연이라 해야 하나?
“우리 보통 인연은 아닌가 봐요.”
수은은 맥주 한 잔을 마저 비우고 한 잔 더 주문했다.
“그런데 왜 현진이에요? 당신 정도면 미국이나 독일로 갈 수도 있지 않나요?”
“할아버지 때문에.”
“할아버지가 왜요?”
“결혼하라고 하셨지.”
“결혼을 꼭 한국에서 해야 하는 법은 없지 않아요?”
“신붓감을 여럿 골라 놓으셨다더군.”
제 일을 남의 말 하듯 심드렁한 재원을 보며 수은은 웃음을 터트렸다.
“신붓감이요? 정략결혼 당하는 건가요?”
“웃지 말지. 난 심각한데.”
“미안해요.”
웃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계속 웃음이 났다.
“진짜 안 웃을게요.”
수은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감자 칩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간신히 웃음이 멈췄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골라 놓은 신붓감 중 한 명을 골라 결혼하러 가는 거예요?”
“그럴 수는 없지.”
“혹시 재벌 집 아들?”
“아니.”
아니라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신붓감을 여럿 물색해 놓고, 영국에서 잘나가는 손자를 한국으로 다시 불러들일 정도라면 준재벌에 가까운 재력을 가졌음에 틀림없었다.
“결혼 안 할 생각이면 아예 안 들어가는 게 낫지 않나요?”
“그럴 순 없어. 서른이 넘으면 결혼한다고 약속을 했고, 난 올해 서른하나거든.”
“그럼 할아버지가 많이 기다려 주신 거네요.”
재원은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귀는 여자는 없어요? 결혼하고 싶은 사람?”
“없어.”
“그럼 어쩔 수 없이 해야겠네요.”
“그래서 가짜 약혼녀를 찾고 있어.”
“가짜 약혼녀요? 할아버지를 속이시겠다?”
수은의 눈이 재미있다는 듯 반짝거렸다.
“그렇게 잠시 늦추는 거지.”
“웬만하면 그냥 하지 그래요. 언젠가 결혼할 거고, 할아버지가 어련히 알아서 고르셨겠어요? 손자 잘되라고 하시는 일일 텐데.”
“당신 같으면 생전 처음 보는 남자랑 결혼할 수 있겠어?”
재원이 드라이하게 물었다.
“그건…… 그렇군요.”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않아 줬으면 해.”
“미안해요.”
“남자 친구 있나?”
수은은 그의 질문에 대한 의도를 몰라 눈만 깜박거렸다.
“아뇨. 그건 왜 묻죠?”
“가짜 약혼녀 해 볼 생각 없어?”
“예에?”
수은은 맥주가 목에 걸려 캑캑거렸다.
“그렇게 충격적인 제안인가?”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농담의 기색은 1%도 보이지 않았다.
수은은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재원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거였구나. 하루 종일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그녀의 주위를 서성거렸던 이유. 우연처럼 만나고 부딪히고,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이유.
“조금 충격적이긴 하네요.”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나랑 우리 집에 가서 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밥 몇 번 같이 먹으면 돼.”
그렇게 들으면 되게 간단한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그쪽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갈 공산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요?”
재원의 할아버지를 만나 보지 않았으니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저 잘생기고 똑똑한 손자가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가짜 약혼녀를 데려가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을 버는 거야. 손자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데 그 여자를 버리고 처음 보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라고 등을 떠밀 수는 없으실 테니.”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럼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인 척 연기를 해야 하는 건가요? 물론 그쪽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애인인 척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같이 자자는 것도 아니고.”
“글쎄요. 제가 거짓말을 잘 못해서.”
“알바비는 충분히 줄 수 있어. 일만 잘되면.”
“알바비요?”
딱히 돈이 궁하지는 않았다. 준재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매달 월급이 나왔고, 씀씀이가 헤프지도 않았다.
“저 백수 아니거든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거지, 돈이 없어 보여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기분 나빠 할 필요는 없어.”
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한국에 돌아가면 엄마의 반 강요에 의한 맞선을 보게 될 확률이 높았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서른이 넘기기 전에 결혼을 못 하면 노처녀로 늙어 죽게 된다며, 한국에 돌아오는 대로 선 봐서 결혼하라고 어제도 전화가 왔었다.
벌써 선 자리도 대여섯 명은 구해 놨다며.
만약 남자 친구가 있다고 말하면 엄마도 선보라는 얘기는 안 하시겠지?
생각에 잠긴 수은의 표정을 살피던 재원이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적극적인 설득에 나섰다.
“만약 내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적극 도와줄 수 있어. 약혼을 핑계로 스킨십을 요구하는 일도 없을 거야. 약혼 코스프레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할 거고. 우리 가족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일은 없도록 최대한 조심하지.”
“좋아요.”
수은의 화끈한 대답에 재원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확실한 성격, 마음에 들어.”
재원은 아주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계약 체결을 완성하는 의미에서.”
수은은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뜻밖이었다.
* * *
열두 시간의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니 숨 쉬는 공기마저 다른 듯 감회가 새로웠다.
“역시 한국. 아무리 멋진 곳엘 가도 결국 집에 오는 게 제일 좋더라고요.”
감격에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수은을 뒤로하고, 재원은 서둘러 출국장을 빠져나갔다.
수은은 걸음을 재촉해 그를 따라잡았다.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신재원, 도망가지 말 것!’이라고 쓰인 대문짝만한 피켓이 눈에 띄었다.
그걸 본 재원은 창피한 듯 고개를 숙였고, 수은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형!”
피켓을 든 남자가 재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대충 생김새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재원의 동생인 것 같았다.
“제발 그 피켓 좀 치워 줄래?”
재원이 동생의 옆을 쓱 지나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의 특별 오더라 어쩔 수 없었다고. 나라고 이런 걸 들고 싶었겠어?”
동생이 따라오며 말했다. 재원과 달리 굉장히 유쾌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수은이 인사를 건네자 동생이 그녀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현수은이라고 해요. 재원 씨 약혼녀예요.”
그의 반응이 궁금해 수은은 일부러 정체를 밝혔다.
재원이 걸음을 멈췄고, 동생은 피켓을 떨어뜨렸다.
“하하…… 농담도 참…….”
“농담 아니야.”
재원이 인정하자 동생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농담…… 아니라고?”
동생의 시선이 수은의 얼굴에서부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야, 뭔가 수상해. 일단 형이 좋아하는 타입이 아닌 것부터 사기 스멜이 풀풀 나.”
“형이 좋아하는 타입이 어떤 타입인데요?”
수은이 물었다.
“가슴 빵빵, 엉덩이 크고, 허리는 잘록한, 한마디로 글래머 스타일?”
그는 손으로 호리병을 그려 보였다.
“오, 글래머 스타일 좋아하셨어요? 언제는 나한테 몸매도 예쁘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었나 봐요.”
그는 이런 재미없는 놀이엔 흥미 없다는 듯 자리를 떴다.
“인사가 늦었네요. 저는 신재희라고 합니다.”
동생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수은은 그의 손을 잡았다.
재희 성격이 호탕하고 싹싹한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세 사람은 재희가 끌고 온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다 털어놔. 딱 보니까 각 나오는데, 어디서 할아버지한테 사기를 치려고 들어?”
재희가 앞에 달린 거울로 뒷자리에 앉은 수은을 보면서 말했다.
눈치 한 번 빠르네.
수은은 재원이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다.
“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니, 사기를 제대로 치려면 평소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를 데려오든가. 오해 말아요. 수은 씨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은 아니니까. 형은 글래머 좋아하지만 난 수은 씨 같은 타입 좋아하거든요. 우리 할아버지가 전근대적인 사람이라 굉장히 보수적이고 엄하시지만 눈썰미는 또 어찌나 탁월하신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 우리 할아버지한테는 안 통해요.”
“나도 고심해서 결정한 일이야. 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돼.”
“참 재미없기는. 저렇게 재미없는 사람을 뭘 믿고 약혼녀 행세를 해 주겠다고 한 거예요?”
재희의 물음에 수은은 짧게 웃었다.
“너 같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랑 사주가 맞는다는 이유로 결혼하겠냐?”
재원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여자들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한 사람은 형 아니었어? 죽도록 사랑하는 여자랑 결혼할 거 아니면 사주 맞는 여자랑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뭐.”
“네 일 아니라 이거지?”
집에 가까워질수록 두 형제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표정은 굳어졌다. 아무래도 할아버지를 속이는 일이 딱히 내키지 않는 듯했다. 두 사람의 긴장감이 수은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재원의 집은 한옥 저택이었다.
높다란 담으로 둘러싸인 집 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고즈넉했다.
잘 가꿔진 화분들이며 정돈된 잔디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집의 나뭇결이 사는 사람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 같았다.
니은 모양 형태의 기와집 뒤로 또 한 채의 별채가 있었고, 그사이에 초록이 상큼한 잔디가 깔려 있었다.
화제의 그 할아버지가 마루로 나와 섰다.
보통 사람이 누군가를 쳐다볼 때는 시선을 여러 군데 분산시키기 마련인데, 이 남자가 제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감은 넘치지만 오만하지 않고, 매력적인 자태는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눈빛 한 번에도 가슴이 쿵쾅거릴 만큼 남자다운 데다, 보통 잘생기기만 한 남자들에겐 없는 깊이가 있었다.
그래서 알고 싶어졌다.
이 남자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보통 여자들은 혼자 이런 곳에 잘 안 오는데, 어떻게 알고 왔지?”
“전부터 꼭 한번 와 보고 싶었어요. 자동차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걸요.”
“자동차 관련 일을 하나?”
“믿지 못하겠지만 저 현진자동차 본사 정비사예요.”
예상했던 대로 재원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쪽도 자동차 관련 일 하나 봐요?”
“벤틀리에 있었어. 익스테리어 디자이너로 5년간.”
“와우! 정말요? 벤틀리 본사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벤틀리에 한국 디자이너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며칠 전에 그만뒀지.”
“아니, 왜요? 왜 그 좋은 직장을…….”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수은은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5년이나 있었다면서 왜 그만둔 건데요? 혹시 더 좋은 회사로 옮기는 건가요?”
“현진으로.”
수은은 입을 벌린 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와, 같은 회사…….”
믿기지가 않았다. 이런 걸 인연이라 해야 하나?
“우리 보통 인연은 아닌가 봐요.”
수은은 맥주 한 잔을 마저 비우고 한 잔 더 주문했다.
“그런데 왜 현진이에요? 당신 정도면 미국이나 독일로 갈 수도 있지 않나요?”
“할아버지 때문에.”
“할아버지가 왜요?”
“결혼하라고 하셨지.”
“결혼을 꼭 한국에서 해야 하는 법은 없지 않아요?”
“신붓감을 여럿 골라 놓으셨다더군.”
제 일을 남의 말 하듯 심드렁한 재원을 보며 수은은 웃음을 터트렸다.
“신붓감이요? 정략결혼 당하는 건가요?”
“웃지 말지. 난 심각한데.”
“미안해요.”
웃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계속 웃음이 났다.
“진짜 안 웃을게요.”
수은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감자 칩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간신히 웃음이 멈췄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골라 놓은 신붓감 중 한 명을 골라 결혼하러 가는 거예요?”
“그럴 수는 없지.”
“혹시 재벌 집 아들?”
“아니.”
아니라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신붓감을 여럿 물색해 놓고, 영국에서 잘나가는 손자를 한국으로 다시 불러들일 정도라면 준재벌에 가까운 재력을 가졌음에 틀림없었다.
“결혼 안 할 생각이면 아예 안 들어가는 게 낫지 않나요?”
“그럴 순 없어. 서른이 넘으면 결혼한다고 약속을 했고, 난 올해 서른하나거든.”
“그럼 할아버지가 많이 기다려 주신 거네요.”
재원은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귀는 여자는 없어요? 결혼하고 싶은 사람?”
“없어.”
“그럼 어쩔 수 없이 해야겠네요.”
“그래서 가짜 약혼녀를 찾고 있어.”
“가짜 약혼녀요? 할아버지를 속이시겠다?”
수은의 눈이 재미있다는 듯 반짝거렸다.
“그렇게 잠시 늦추는 거지.”
“웬만하면 그냥 하지 그래요. 언젠가 결혼할 거고, 할아버지가 어련히 알아서 고르셨겠어요? 손자 잘되라고 하시는 일일 텐데.”
“당신 같으면 생전 처음 보는 남자랑 결혼할 수 있겠어?”
재원이 드라이하게 물었다.
“그건…… 그렇군요.”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않아 줬으면 해.”
“미안해요.”
“남자 친구 있나?”
수은은 그의 질문에 대한 의도를 몰라 눈만 깜박거렸다.
“아뇨. 그건 왜 묻죠?”
“가짜 약혼녀 해 볼 생각 없어?”
“예에?”
수은은 맥주가 목에 걸려 캑캑거렸다.
“그렇게 충격적인 제안인가?”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농담의 기색은 1%도 보이지 않았다.
수은은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재원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거였구나. 하루 종일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그녀의 주위를 서성거렸던 이유. 우연처럼 만나고 부딪히고,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이유.
“조금 충격적이긴 하네요.”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나랑 우리 집에 가서 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밥 몇 번 같이 먹으면 돼.”
그렇게 들으면 되게 간단한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그쪽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갈 공산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요?”
재원의 할아버지를 만나 보지 않았으니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저 잘생기고 똑똑한 손자가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가짜 약혼녀를 데려가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을 버는 거야. 손자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데 그 여자를 버리고 처음 보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라고 등을 떠밀 수는 없으실 테니.”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럼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인 척 연기를 해야 하는 건가요? 물론 그쪽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애인인 척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같이 자자는 것도 아니고.”
“글쎄요. 제가 거짓말을 잘 못해서.”
“알바비는 충분히 줄 수 있어. 일만 잘되면.”
“알바비요?”
딱히 돈이 궁하지는 않았다. 준재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매달 월급이 나왔고, 씀씀이가 헤프지도 않았다.
“저 백수 아니거든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거지, 돈이 없어 보여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기분 나빠 할 필요는 없어.”
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한국에 돌아가면 엄마의 반 강요에 의한 맞선을 보게 될 확률이 높았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서른이 넘기기 전에 결혼을 못 하면 노처녀로 늙어 죽게 된다며, 한국에 돌아오는 대로 선 봐서 결혼하라고 어제도 전화가 왔었다.
벌써 선 자리도 대여섯 명은 구해 놨다며.
만약 남자 친구가 있다고 말하면 엄마도 선보라는 얘기는 안 하시겠지?
생각에 잠긴 수은의 표정을 살피던 재원이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적극적인 설득에 나섰다.
“만약 내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적극 도와줄 수 있어. 약혼을 핑계로 스킨십을 요구하는 일도 없을 거야. 약혼 코스프레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할 거고. 우리 가족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일은 없도록 최대한 조심하지.”
“좋아요.”
수은의 화끈한 대답에 재원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확실한 성격, 마음에 들어.”
재원은 아주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계약 체결을 완성하는 의미에서.”
수은은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뜻밖이었다.
* * *
열두 시간의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니 숨 쉬는 공기마저 다른 듯 감회가 새로웠다.
“역시 한국. 아무리 멋진 곳엘 가도 결국 집에 오는 게 제일 좋더라고요.”
감격에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수은을 뒤로하고, 재원은 서둘러 출국장을 빠져나갔다.
수은은 걸음을 재촉해 그를 따라잡았다.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신재원, 도망가지 말 것!’이라고 쓰인 대문짝만한 피켓이 눈에 띄었다.
그걸 본 재원은 창피한 듯 고개를 숙였고, 수은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형!”
피켓을 든 남자가 재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대충 생김새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재원의 동생인 것 같았다.
“제발 그 피켓 좀 치워 줄래?”
재원이 동생의 옆을 쓱 지나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의 특별 오더라 어쩔 수 없었다고. 나라고 이런 걸 들고 싶었겠어?”
동생이 따라오며 말했다. 재원과 달리 굉장히 유쾌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수은이 인사를 건네자 동생이 그녀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현수은이라고 해요. 재원 씨 약혼녀예요.”
그의 반응이 궁금해 수은은 일부러 정체를 밝혔다.
재원이 걸음을 멈췄고, 동생은 피켓을 떨어뜨렸다.
“하하…… 농담도 참…….”
“농담 아니야.”
재원이 인정하자 동생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농담…… 아니라고?”
동생의 시선이 수은의 얼굴에서부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야, 뭔가 수상해. 일단 형이 좋아하는 타입이 아닌 것부터 사기 스멜이 풀풀 나.”
“형이 좋아하는 타입이 어떤 타입인데요?”
수은이 물었다.
“가슴 빵빵, 엉덩이 크고, 허리는 잘록한, 한마디로 글래머 스타일?”
그는 손으로 호리병을 그려 보였다.
“오, 글래머 스타일 좋아하셨어요? 언제는 나한테 몸매도 예쁘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었나 봐요.”
그는 이런 재미없는 놀이엔 흥미 없다는 듯 자리를 떴다.
“인사가 늦었네요. 저는 신재희라고 합니다.”
동생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수은은 그의 손을 잡았다.
재희 성격이 호탕하고 싹싹한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세 사람은 재희가 끌고 온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다 털어놔. 딱 보니까 각 나오는데, 어디서 할아버지한테 사기를 치려고 들어?”
재희가 앞에 달린 거울로 뒷자리에 앉은 수은을 보면서 말했다.
눈치 한 번 빠르네.
수은은 재원이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다.
“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니, 사기를 제대로 치려면 평소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를 데려오든가. 오해 말아요. 수은 씨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은 아니니까. 형은 글래머 좋아하지만 난 수은 씨 같은 타입 좋아하거든요. 우리 할아버지가 전근대적인 사람이라 굉장히 보수적이고 엄하시지만 눈썰미는 또 어찌나 탁월하신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 우리 할아버지한테는 안 통해요.”
“나도 고심해서 결정한 일이야. 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돼.”
“참 재미없기는. 저렇게 재미없는 사람을 뭘 믿고 약혼녀 행세를 해 주겠다고 한 거예요?”
재희의 물음에 수은은 짧게 웃었다.
“너 같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랑 사주가 맞는다는 이유로 결혼하겠냐?”
재원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여자들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한 사람은 형 아니었어? 죽도록 사랑하는 여자랑 결혼할 거 아니면 사주 맞는 여자랑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뭐.”
“네 일 아니라 이거지?”
집에 가까워질수록 두 형제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표정은 굳어졌다. 아무래도 할아버지를 속이는 일이 딱히 내키지 않는 듯했다. 두 사람의 긴장감이 수은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재원의 집은 한옥 저택이었다.
높다란 담으로 둘러싸인 집 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고즈넉했다.
잘 가꿔진 화분들이며 정돈된 잔디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집의 나뭇결이 사는 사람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 같았다.
니은 모양 형태의 기와집 뒤로 또 한 채의 별채가 있었고, 그사이에 초록이 상큼한 잔디가 깔려 있었다.
화제의 그 할아버지가 마루로 나와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