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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거나하게 취한 선배가 지수의 곁에 앉아 잔을 채워 주었다. 이미 한 잔을 깨끗이 비웠음에도 한 번은 정 없다며 더 마시라고 강요하는 모양새가 대책 없었다. 빨리 마시고 다른 데로 보내라는 동기들의 눈치에 지수는 눈을 질끈 감고 폭탄주를 연달아 원샷했다. 늦은 밤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평소 술자리에서 자주 볼 수 없는 선배들까지 성현의 송별회에 참석한 까닭에 K대 인근에서 가장 큰 호프집은 만석이었다. 주인공인 그의 곁은 교수님과 여자애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중, 단연 그가 제일 돋보였다.
지금까지 과 톱을 놓치지 않았던 성현은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외모 또한 매우 출중했다. 180cm는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철저한 자기 관리로 탄탄한 몸매까지 갖췄으니, 주변에 여자들이 넘쳐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가오는 여자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백을 받는 족족 냉정하게 거절하곤 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유학을 갈 예정이기 때문에 여자를 사귀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지수가 보기엔 달랐다. 애당초 이성에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지수는 동기가 채워 준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성현 선배 취하니까 귀엽지 않니?”
동기의 말에 상념을 떨친 지수의 시선이 건너편으로 향했다. 교수님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는 그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살짝 휘어진 입술과 접혀진 눈이 냉소적인 모습과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러게. 저렇게 웃을 줄도 아네?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해 봤는데 졸업과 동시에 유학이라니.”
“후회하는 여자들이 너뿐인 줄 아니? 아마 한 트럭은 넘을 거다.”
거나하게 취한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늘 자제력을 잃지 않고 적당히 마신 뒤 일찍 자리를 떴었는데. 흐트러진 채로 있는 성현의 모습은 마치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았다.
특히 반쯤 접힌 눈이…….
“귀엽네.”
뱉어 놓고 스스로 놀랐지만, 워낙 주변이 시끄러워 다행히 듣는 이는 없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수는 바람이나 쐴 겸, 호프집 밖으로 나왔다.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밤하늘에 그녀의 마른 숨이 길게 뿌려졌다. 아마도 자정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을까.
스산한 겨울바람이 그녀의 몸을 덮쳐 왔다. 양손으로 팔을 문지르던 지수가 미처 점퍼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틀었을 때였다. 막 호프집에서 나오던 성현과 마주쳤다.
“윤지수?”
그와 단둘이 있었던 적은 강의실에서 몇 번 마주쳤던 게 전부였다. 어색함에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한 걸음 지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점퍼도 안 입고 나온 거야?”
“아니, 그게…… 에취!”
얼버무리던 지수가 크게 재채기하자 그의 입술이 묘하게 휘었다. 술은 사람은 정말 이상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냉철하고 차가운 그가 예쁘게 웃는 걸 보면. 게다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지수의 어깨에 살포시 걸쳐 주기까지 했다. 때아닌 배려에 당황한 것도 잠시,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점퍼가 따뜻해 지수는 거절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언제 떠나세요?”
“돌아오는 주말.”
어색한 분위기에 괜한 말을 걸어 보았다.
주말이라. 생각보다 빨리 떠나네.
지수는 왠지 모를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선배는 어디서나 잘 할 거예요.”
늘 어디서나 당당하고 제 몫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니 유학 가서도 마찬가지리라 믿었다.
“한 번쯤 너랑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어.”
“…….”
“마지막이 되어서야 소원을 이루네.”
“선배.”
“궁금했거든. 윤지수, 네가.”
술기운 때문일까. 유독 말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저도 선배랑…….”
살짝 그려진 미소는 취한 것 같은데 똑바로 응시한 눈빛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느새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싶더니 그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지수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의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차가운 뺨을 감싸 쥐었다.
“선…….”
다급한 지수의 목소리는 그의 입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내가 취한 걸까, 그가 취한 걸까.
무의미한 사고 판단은 이미 정지된 후였다. 입안으로 넘어온 알싸한 알코올 향이 금세 전신으로 퍼졌다.
아찔한 첫 키스를 남긴 채.
1. 상사와 신입 사원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지수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접견실로 이동했다. 긴장감과 기대감이 섞인 얼굴로 담당자를 기다렸다.
2주 전, 지수는 한일 식품 마케팅 팀 면접을 보았다. 팀장의 부재로 인해 과장과 일대일로 진행된 면접은 실무 위주의 질문이 대부분이라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고 경쟁률도 상당했다. 때문에 애초에 기대를 내려놓고 있던 그녀는 유선으로 합격 통보를 받고 엄마와 환호성을 지를 만큼 기뻐했었다.
지수를 접견실로 안내한 직원이 나가며 난방을 켜긴 했지만, 아직 온기가 돌지 않은 내부는 꽤 서늘했다.
잠시 뒤 회의실 문이 열렸다.
“밖에 많이 춥죠? 몸 좀 녹여요.”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에게 여자가 방금 뽑아 온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사원증으로 지수의 시선이 향했다.
최지영 대리
단정하게 하나로 모아 묶은 머리와 은색 안경 때문인지 인상이 날카로워 보였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지수는 긴장을 떨치려 애썼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일찍 출근했네요. 버스가 많이 밀렸을 텐데.”
밖은 어제 내린 눈으로 인해 도로가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일찍 출발했더니 생각보다 많이 막히진 않더라고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따뜻해진 실내 온도에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지금쯤이면 팀장님께서 출근하셨겠네요. 일어나죠.”
고개를 내려 손목시계를 바라보던 최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수도 그녀를 따라나섰다.
대리석 바닥에 울리는 구둣발 소리가 지수의 가슴에 울려 퍼졌다.
아직 팀장에 대한 정보가 없어 마케팅 팀 사무실 안으로 이동하는 지수의 얼굴이 긴장으로 경직되었다. 이미 출근한 몇몇 직원이 알은체를 하며 인사를 걸어오자 살짝 떨리는 표정으로 가볍게 인사했다.
“자리에 계셨네요. 오늘부터 출근한 신입 사원과 들어가겠습니다.”
인터폰을 내려놓은 최 대리가 팀장실 문을 노크했다.
“신입 사원만 들여보내세요.”
팀장치고 젊은 남자의 목소리. 다시 한번 옷매무시를 점검한 지수는 투명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한창 서류 결재 중이었다.
“오늘부터 마케팅 팀에서 근무하게 된 윤지수…….”
그가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지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뒤늦게 명패로 시선을 내린 그녀의 표정에 감출 수 없는 당혹감이 서렸다.
“내가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깍지 낀 손을 턱 밑에 내려놓은 채 느른한 미소를 지은 이는 다름 아닌, 지수의 첫 키스를 가져갔던 이성현이었다. 그녀는 반쯤 허리를 굽힌 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앉아.”
먼저 정적을 깬 사람은 그였다. 여유 있는 손짓으로 소파를 가리키자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그녀가 자리를 옮겼다.
“한국엔 언제 돌아온 거예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지수가 말을 건넸다.
“6개월 쯤 됐나.”
“얼마 안 되셨네요. 동문회에 오셔서 얼굴이라도 보여 주시지. 선배 안부 궁금해하는 사람 많았는데.”
그간 취업 준비로 인해 그녀도 동문회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가 참석했다면 동기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성현에 대한 정보가 워낙 없어 여전히 외국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랬던 그가, 멋대로 첫 키스를 가져간 남자가 제 직장 상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느리게 찻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가자 촉촉하게 젖은 남자의 입술로 지수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너도 포함이야?”
“네?”
“너도 내가 궁금했냐고.”
찻잔이 내려앉는 작은 소리가 이 공간의 유일한 소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낮은 음성이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다. 예의상 묻는 것이라고이라고 생각한 지수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과에서 선배가 얼마나 유명 인사였는데요. 당연히 궁금했죠. 직장 상사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
“이 사실을 알면 다들 놀랄 거예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지수의 목소리가 다소 들떠 있었다. 긴장하거나 어색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이 사실을 그가 몰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팀장님.”
표정이 살짝 굳어져 보이는 건 그저 착각일까. 하지만 지수는 확실히 선을 긋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래전 일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었다.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도와줄게.”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쐐기를 박고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실에서 나오자 긴장이 채 풀리지 않은 지수의 시선에 뭔가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신 차릴 틈 없이 일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오후 업무 시간의 반이 지나간 사무실은 컴퓨터 키보드 소리와 전화 받는 소리로 분주했다.
드르륵, 탁. 많은 업무를 처리해 예민해진 건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중 성현의 신경을 제일 많이 건드리는 건 바로, 지수의 맑은 목소리였다.
“대리님, 복사한 서류는 여기 있습니다. 더 시키실 일은 없으세요?”
책 한 권쯤 되는 분량의 서류를 카테고리 별로 정리하는 솜씨는 어디서 많이 해 본 것처럼 야무졌다. 지수의 싹싹한 태도가 싫지 않은 듯 김 대리가 지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리 부하 직원이라도 그렇지, 엄연한 성희롱 아닌가. 어쩐지 김 대리의 행동이 마냥 곱게 보이지가 않아 미간이 좁아졌다.
한동안 그의 시선은 반쯤 열린 블라인드 밖으로 향해 있었다.
“시키실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싹싹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간 지수는 서류를 훑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나직이 중얼거렸다.
“머리 많이 길었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조금 긴 단발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명치께로 늘어진 긴 머리로 인해 한층 더 여성스러워 보였다.
앳된 모습을 완전히 벗은 그녀는 남자들이 한 번쯤 눈을 돌릴 법한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연락하지 못한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안 그래도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던 차였다. 충동 어린 행동이었으나 뒤늦게라도 설명이 필요하다 여겼었다.
하지만 한일 식품 팀장으로 부임한 이후 그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에 매달리느라 연락처를 알아볼 틈이 없었다.
또 오래전 일로 연락하자니 그녀가 당황할 거란 생각이 들어 섣불리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우려가 무색하게 그녀는 너무나 태연했다.
지수는 그때의 일을 깨끗하게 잊은 듯 보였다. 이런 고민을 했던 자신이 우스워 보일 정도로.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팀장님.”
키스까지 한 사이에 안면몰수라니. 그녀가 자신의 굳어진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둔해서 다행이었다.
프롤로그
거나하게 취한 선배가 지수의 곁에 앉아 잔을 채워 주었다. 이미 한 잔을 깨끗이 비웠음에도 한 번은 정 없다며 더 마시라고 강요하는 모양새가 대책 없었다. 빨리 마시고 다른 데로 보내라는 동기들의 눈치에 지수는 눈을 질끈 감고 폭탄주를 연달아 원샷했다. 늦은 밤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평소 술자리에서 자주 볼 수 없는 선배들까지 성현의 송별회에 참석한 까닭에 K대 인근에서 가장 큰 호프집은 만석이었다. 주인공인 그의 곁은 교수님과 여자애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중, 단연 그가 제일 돋보였다.
지금까지 과 톱을 놓치지 않았던 성현은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외모 또한 매우 출중했다. 180cm는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철저한 자기 관리로 탄탄한 몸매까지 갖췄으니, 주변에 여자들이 넘쳐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가오는 여자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백을 받는 족족 냉정하게 거절하곤 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유학을 갈 예정이기 때문에 여자를 사귀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지수가 보기엔 달랐다. 애당초 이성에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지수는 동기가 채워 준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성현 선배 취하니까 귀엽지 않니?”
동기의 말에 상념을 떨친 지수의 시선이 건너편으로 향했다. 교수님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는 그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살짝 휘어진 입술과 접혀진 눈이 냉소적인 모습과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러게. 저렇게 웃을 줄도 아네?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해 봤는데 졸업과 동시에 유학이라니.”
“후회하는 여자들이 너뿐인 줄 아니? 아마 한 트럭은 넘을 거다.”
거나하게 취한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늘 자제력을 잃지 않고 적당히 마신 뒤 일찍 자리를 떴었는데. 흐트러진 채로 있는 성현의 모습은 마치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았다.
특히 반쯤 접힌 눈이…….
“귀엽네.”
뱉어 놓고 스스로 놀랐지만, 워낙 주변이 시끄러워 다행히 듣는 이는 없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수는 바람이나 쐴 겸, 호프집 밖으로 나왔다.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밤하늘에 그녀의 마른 숨이 길게 뿌려졌다. 아마도 자정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을까.
스산한 겨울바람이 그녀의 몸을 덮쳐 왔다. 양손으로 팔을 문지르던 지수가 미처 점퍼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틀었을 때였다. 막 호프집에서 나오던 성현과 마주쳤다.
“윤지수?”
그와 단둘이 있었던 적은 강의실에서 몇 번 마주쳤던 게 전부였다. 어색함에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한 걸음 지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점퍼도 안 입고 나온 거야?”
“아니, 그게…… 에취!”
얼버무리던 지수가 크게 재채기하자 그의 입술이 묘하게 휘었다. 술은 사람은 정말 이상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냉철하고 차가운 그가 예쁘게 웃는 걸 보면. 게다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지수의 어깨에 살포시 걸쳐 주기까지 했다. 때아닌 배려에 당황한 것도 잠시,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점퍼가 따뜻해 지수는 거절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언제 떠나세요?”
“돌아오는 주말.”
어색한 분위기에 괜한 말을 걸어 보았다.
주말이라. 생각보다 빨리 떠나네.
지수는 왠지 모를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선배는 어디서나 잘 할 거예요.”
늘 어디서나 당당하고 제 몫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니 유학 가서도 마찬가지리라 믿었다.
“한 번쯤 너랑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어.”
“…….”
“마지막이 되어서야 소원을 이루네.”
“선배.”
“궁금했거든. 윤지수, 네가.”
술기운 때문일까. 유독 말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저도 선배랑…….”
살짝 그려진 미소는 취한 것 같은데 똑바로 응시한 눈빛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느새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싶더니 그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지수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의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차가운 뺨을 감싸 쥐었다.
“선…….”
다급한 지수의 목소리는 그의 입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내가 취한 걸까, 그가 취한 걸까.
무의미한 사고 판단은 이미 정지된 후였다. 입안으로 넘어온 알싸한 알코올 향이 금세 전신으로 퍼졌다.
아찔한 첫 키스를 남긴 채.
1. 상사와 신입 사원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지수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접견실로 이동했다. 긴장감과 기대감이 섞인 얼굴로 담당자를 기다렸다.
2주 전, 지수는 한일 식품 마케팅 팀 면접을 보았다. 팀장의 부재로 인해 과장과 일대일로 진행된 면접은 실무 위주의 질문이 대부분이라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고 경쟁률도 상당했다. 때문에 애초에 기대를 내려놓고 있던 그녀는 유선으로 합격 통보를 받고 엄마와 환호성을 지를 만큼 기뻐했었다.
지수를 접견실로 안내한 직원이 나가며 난방을 켜긴 했지만, 아직 온기가 돌지 않은 내부는 꽤 서늘했다.
잠시 뒤 회의실 문이 열렸다.
“밖에 많이 춥죠? 몸 좀 녹여요.”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에게 여자가 방금 뽑아 온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사원증으로 지수의 시선이 향했다.
최지영 대리
단정하게 하나로 모아 묶은 머리와 은색 안경 때문인지 인상이 날카로워 보였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지수는 긴장을 떨치려 애썼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일찍 출근했네요. 버스가 많이 밀렸을 텐데.”
밖은 어제 내린 눈으로 인해 도로가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일찍 출발했더니 생각보다 많이 막히진 않더라고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따뜻해진 실내 온도에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지금쯤이면 팀장님께서 출근하셨겠네요. 일어나죠.”
고개를 내려 손목시계를 바라보던 최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수도 그녀를 따라나섰다.
대리석 바닥에 울리는 구둣발 소리가 지수의 가슴에 울려 퍼졌다.
아직 팀장에 대한 정보가 없어 마케팅 팀 사무실 안으로 이동하는 지수의 얼굴이 긴장으로 경직되었다. 이미 출근한 몇몇 직원이 알은체를 하며 인사를 걸어오자 살짝 떨리는 표정으로 가볍게 인사했다.
“자리에 계셨네요. 오늘부터 출근한 신입 사원과 들어가겠습니다.”
인터폰을 내려놓은 최 대리가 팀장실 문을 노크했다.
“신입 사원만 들여보내세요.”
팀장치고 젊은 남자의 목소리. 다시 한번 옷매무시를 점검한 지수는 투명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한창 서류 결재 중이었다.
“오늘부터 마케팅 팀에서 근무하게 된 윤지수…….”
그가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지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뒤늦게 명패로 시선을 내린 그녀의 표정에 감출 수 없는 당혹감이 서렸다.
“내가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깍지 낀 손을 턱 밑에 내려놓은 채 느른한 미소를 지은 이는 다름 아닌, 지수의 첫 키스를 가져갔던 이성현이었다. 그녀는 반쯤 허리를 굽힌 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앉아.”
먼저 정적을 깬 사람은 그였다. 여유 있는 손짓으로 소파를 가리키자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그녀가 자리를 옮겼다.
“한국엔 언제 돌아온 거예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지수가 말을 건넸다.
“6개월 쯤 됐나.”
“얼마 안 되셨네요. 동문회에 오셔서 얼굴이라도 보여 주시지. 선배 안부 궁금해하는 사람 많았는데.”
그간 취업 준비로 인해 그녀도 동문회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가 참석했다면 동기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성현에 대한 정보가 워낙 없어 여전히 외국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랬던 그가, 멋대로 첫 키스를 가져간 남자가 제 직장 상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느리게 찻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가자 촉촉하게 젖은 남자의 입술로 지수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너도 포함이야?”
“네?”
“너도 내가 궁금했냐고.”
찻잔이 내려앉는 작은 소리가 이 공간의 유일한 소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낮은 음성이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다. 예의상 묻는 것이라고이라고 생각한 지수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과에서 선배가 얼마나 유명 인사였는데요. 당연히 궁금했죠. 직장 상사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
“이 사실을 알면 다들 놀랄 거예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지수의 목소리가 다소 들떠 있었다. 긴장하거나 어색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이 사실을 그가 몰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팀장님.”
표정이 살짝 굳어져 보이는 건 그저 착각일까. 하지만 지수는 확실히 선을 긋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래전 일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었다.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도와줄게.”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쐐기를 박고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실에서 나오자 긴장이 채 풀리지 않은 지수의 시선에 뭔가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신 차릴 틈 없이 일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오후 업무 시간의 반이 지나간 사무실은 컴퓨터 키보드 소리와 전화 받는 소리로 분주했다.
드르륵, 탁. 많은 업무를 처리해 예민해진 건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중 성현의 신경을 제일 많이 건드리는 건 바로, 지수의 맑은 목소리였다.
“대리님, 복사한 서류는 여기 있습니다. 더 시키실 일은 없으세요?”
책 한 권쯤 되는 분량의 서류를 카테고리 별로 정리하는 솜씨는 어디서 많이 해 본 것처럼 야무졌다. 지수의 싹싹한 태도가 싫지 않은 듯 김 대리가 지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리 부하 직원이라도 그렇지, 엄연한 성희롱 아닌가. 어쩐지 김 대리의 행동이 마냥 곱게 보이지가 않아 미간이 좁아졌다.
한동안 그의 시선은 반쯤 열린 블라인드 밖으로 향해 있었다.
“시키실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싹싹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간 지수는 서류를 훑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나직이 중얼거렸다.
“머리 많이 길었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조금 긴 단발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명치께로 늘어진 긴 머리로 인해 한층 더 여성스러워 보였다.
앳된 모습을 완전히 벗은 그녀는 남자들이 한 번쯤 눈을 돌릴 법한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연락하지 못한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안 그래도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던 차였다. 충동 어린 행동이었으나 뒤늦게라도 설명이 필요하다 여겼었다.
하지만 한일 식품 팀장으로 부임한 이후 그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에 매달리느라 연락처를 알아볼 틈이 없었다.
또 오래전 일로 연락하자니 그녀가 당황할 거란 생각이 들어 섣불리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우려가 무색하게 그녀는 너무나 태연했다.
지수는 그때의 일을 깨끗하게 잊은 듯 보였다. 이런 고민을 했던 자신이 우스워 보일 정도로.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팀장님.”
키스까지 한 사이에 안면몰수라니. 그녀가 자신의 굳어진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둔해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