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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팀장님이라.”
그녀의 입에서 그런 호칭을 듣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해 봤을까. 거리낌 없는 호칭이 기가 막힌 건 여전한데, 우습게도 싫지가 않았다.
불현듯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당황한 성현은 재빨리 블라인드를 전부 내렸다. 밖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선명했다. 내내 그리웠던 그 예쁜 목소리가.
“앞으로 잘 지내 보자고, 윤지수 씨.”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어떤 기대감이 묻어났다.
“다녀왔습니다.”
지수는 퇴근하자마자 자신을 반겨 주는 은숙에게 피곤한 얼굴로 인사했다.
“첫 출근은 어땠어? 회사 사람들은 어때? 면접 때 못 봤다던 팀장님은 봤고?”
방까지 졸졸 쫓아오며 질문 공세를 펼치는 은숙은 딸의 첫 출근이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코트를 벗어 옷장에 걸어 놓던 지수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놓칠 리 없는 은숙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왜? 꼬투리 잡아? 너 마음에 안 든대?”
“그런 거 아니야. 조금 피곤해서 그래. 지혁이는?”
“지혁이는 늦는대. 오늘 어땠는지 말 좀 해 봐.”
답답하다는 듯 급기야 언성까지 높아진 은숙에게 고개를 돌린 지수는 무척 피곤한 얼굴이었다. 집에 와서까지 그 남자를 떠올려야 하는 현실이 너무 싫었다.
“엄마, 나 저녁도 안 주고 계속 질문만 할 거야?”
“맞다, 내 정신 좀 봐. 저녁 차려 줄 테니까 옷 갈아입고 나와.”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질문이 이어질 게 뻔했지만, 일단 은숙에게 해방된 것만으로도 피곤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첫 출근이니까 일찍 퇴근하라는 대리님에게 억지로 등 떠밀려 정시에 퇴근했지만 지수의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아무 생각하지 말자. 선배도, 회사도.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그녀는 세상 편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지만 억울한 감정이 울컥 밀려와 다시 일어나 앉았다.
“이런 개 같은 상황이 어디 있냐고.”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는 그날의 기억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삭제한 것 같았다. 그럴 거면 설레는 말로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놓지나 말지.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친구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하필이면 왜 이성현이야.”
이건 꿈일 거야, 꿈. 내일 출근하면 모르는 사람이 팀장 자리에 있을 거야. 눈을 꼭 감으며 주문을 걸어 보지만 현실은 지독히도 냉혹했다.
“지수야, 밥 먹고 자야지. 도대체 팀장이 어떤 사람이길래 애가 첫 출근부터 녹초가 된 거야?”
지수는 내 첫 키스를 훔친 잘생긴 도둑놈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밤, 영원히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 * *
똑똑.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두던 성현이 잠시 멈칫했다.
“팀장님,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지수가 부르는 호칭이 어색해서 옷을 마저 걸어 두고 나서야 성현이 대답했다.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서류를 펼친 그의 눈길이 잠시 열린 문으로 향했지만 개의치 않고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이내 그윽한 커피 향이 난다 싶더니, 서류 더미를 피해 커피 잔이 책상 위에 놓여졌다.
“커피 드세요.”
오랜만에 받아 보는 모닝커피였다. 피곤한 아침을 깨는 고소한 향기에 성현의 경직된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뒤늦게 고개를 올린 그는 하루 만에 까칠해진 지수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 못 잤어?”
“네. 조금 설쳤습니다.”
얼굴을 매만지는 지수는 다소 민망한 표정이었다. 모른 척해 줄 걸 그랬나.
“긴장이라도 한 거야?”
“첫 출근이라 그랬나 봅니다.”
난처한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턱을 괸 성현의 입술이 허물어졌다. 이런 식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손을 뻗어 컵을 가져와 마른 입술을 적시자 느른한 기분이 찾아왔다.
“그리고?”
답지 않게 말꼬리를 잡는 성현에게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지수와 길게 대화할 날을 상상조차 못했던 그로서는 기분이 묘했다.
“잠을 설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잠을 설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왠지 뿌듯할 것 같았다.
“없습니다.”
“커피 마실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색하며 단칼에 거절하는 지수의 모습에 성현은 커피가 아닌 자신이 거부당한 듯한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이래 봬도 나 커피 제법 잘 타.”
지수가 대답하려는 사이 사무실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출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골적으로 아쉬운 표정을 짓는 그에게 지수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윤지수 씨.”
팀장실을 나가려던 지수가 몸을 틀었다.
“커피 잘 마실게요. 수고해요.”
그녀가 타 준 커피 한 잔으로 하루의 시작을 맞이하는 아침이었다.
알고 보니 이 남자, 완전 선수였다. 여자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데 일인자. 그가 손수 커피를 타 주겠다고 나설 줄 누가 알았을까. 놀라다 못해 질겁할 일이었다.
신입 사원 교육을 함께 받는 사람들과 구내식당에 내려가는 동안 지수는 아침의 일을 떠올리며 질색했다.
“받을 걸 그랬나.”
그가 손수 탄 커피를 받을 날이 또 올지는 미지수 아닌가. 뒤늦게 너무 매몰차게 거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받아요? 선물? 아님 고백?”
곁에서 궁금한 얼굴로 묻는 이세영에게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커피요.”
“누가 지수 씨 커피 사 준다고 했는데요?”
정확히는 커피를 ‘타 준’다고 했었지만 깜찍한 눈을 끔벅이는 세영에게 굳이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냥 뭐…….”
“누군데요, 누구?”
총총걸음으로 팔을 잡아당기며 묻는 그녀가 참 귀여웠다. 남자들이 껌벅 넘어갈 것 같은 애교와 순수함이 매력이었다. 그 역시 이런 귀염성 있는 여자가 취향일까? 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아는 선배가요. 식판 받아요.”
식판을 세영에게 넘기며 지수가 얼버무렸다.
“다이어트라도 하는 건가?”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자 지수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구내식당에서 그를 볼 수 없었다. 외근도 없었으니 밖에서 식사했을 리도 없고, 매일 이렇게 끼니를 거르는 걸까.
마침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최 대리를 비롯해 마케팅 팀 사람들이 보였지만 그 무리에 성현은 없었다.
“팀장님께서는 식사 안 하세요? 보이시질 않네요.”
“응. 원래 식사 잘 안 하셔. 특히 오늘처럼 오후에 회의가 있는 날엔 회의 준비로 더 정신없으시거든.”
아무리 바빠도 끼니까지 거르며 일할 건 뭔가. 지수의 표정을 읽은 최 대리가 지수의 등을 떠밀었다.
“괜찮아. 나도 처음엔 적응 안 됐는데, 팀장님도 별로 신경 안 쓰셔서 지금은 덤덤해졌어. 식사할 땐 또 먼저 나가자고 하시거든.”
불편한 표정을 지운 지수가 식판에 반찬을 골라 담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무실에 혼자 있을 그에게 마음이 쓰였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 위에 못 보던 게 하나 생겼다. 초코바를 바라보는 성현의 얼굴이 묘한 표정으로 변했다.
다른 사람이 이런 귀여운 짓을 했을 리는 없고, 짚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인터폰으로 손을 뻗는 그의 입술이 살짝 늘어났다.
“윤지수 씨, 방으로 들어와요.”
성현은 느긋한 얼굴로 그녀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경쾌한 구둣발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부르셨어요?”
깔끔한 정장 차림인 지수가 걸고 있는 사원증에 성현의 시선이 닿았다.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모아 묶은 모습이 평소보다 조금 앳돼 보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칠흑처럼 까만 눈동자에 생기가 서렸다.
“초코바는 왜 갖다 놓은 거야?”
잘 먹겠다는 말을 할까 하다 성현은 다른 말을 꺼내 놓았다.
“당 보충하시라고요.”
“내가 당이 부족해 보여?”
“끼니도 잘 안 챙겨 드시는데 당까지 떨어지실까 봐요.”
그를 정말 직장 상사로만 대하기로 작정했는지 하는 대답마다 사무적이었다. 아니, 사무적이다 못해 딱딱하다. 그것이 못마땅했다.
“너무 섣부른 걱정 같은데. 나 아직 젊어.”
이제 막 해가 바뀌어 성현은 서른이 되었다. 물론 대충 둘러댄 말이란 것쯤은 알았지만, 일관되게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그녀를 건드리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게 궁금해졌다.
“내가 끼니 잘 안 챙겨 먹는 건 어떻게 알았어?”
예리한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을 잘하던 지수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최 대리님이 그러시던데요.”
“쓸데없이 최 대리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저 담담한 표정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성현은 궁금했다.
“글쎄요.”
“그거야 물어보면 되겠지.”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던 지수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그가 턱을 괴었다.
“더 이상 할 말 없으시면,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난처한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지수의 의도가 눈에 훤히 보였다. 몸을 틀어 방을 나서려는 그녀를 성현이 불러 세웠다.
“오늘 시간 어때?”
“네?”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성현은 느긋한 얼굴을 한 채 강약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환영회를 할까 하는데, 시간 안 되면 다른 날로 잡고.”
“시, 시간 괜찮습니다.”
말까지 더듬는 지수는 꽤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 놀리는 악취미는 없지만 그녀는 예외였다.
“그래, 나가 봐.”
서류로 시선을 내린 성현이 멀어지는 구두 소리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무릎 위로 올라간 스커트로 향한 그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너무 짧잖아.”
“으음, 칵테일 완전 맛있다. 지수 씨도 마셔 봐.”
달콤한 칵테일 한 잔에 기분이 좋아진 최 대리가 지수에게 칵테일을 권했다.
보기만 해도 예쁜 붉은색의 칵테일이 담긴 잔을 들어 지수가 입술을 적셨다.
“와, 진짜 맛있다. 대리님이 추천하시는 걸로 주문하길 잘했어요.”
한 모금 맛본 지수가 홀짝거리더니 금방 반 이상을 비우곤 새우 카나페를 입으로 가져갔다.
“안주도 정말 맛있네요.”
“그렇지? 이거 다 마시고 다른 것도 마셔 보자.”
벌써 메뉴판을 펼치고 다음 술을 고르는 두 여자의 모습에 성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최 대리는 회사 내에서도 알아주는 술고래로 당할 자가 없었다. 이대로 그녀의 페이스에 맞췄다가는 지수가 술에 취해 업혀 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앗, 흘렸네.”
지수의 검은 스커트 위로 샐러드가 떨어졌다. 성현이 손수건을 건네기도 전에 김 대리가 먼저 냅킨을 뽑아 스커트를 닦아 주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리님, 제가 할게요.”
김 대리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스커트가 위로 말려 올라가 허벅지가 드러나자 민망해진 지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김 대리, 뭐하는 거야? 이거 엄연한 성희롱인 거 알아?”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한 최 대리의 나무람에 아차 싶은 얼굴로 김 대리가 지수의 허벅지에서 손을 뗐다.
“미, 미안. 지수 씨. 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그러니까 생각 좀 하고 살아. 어디 아가씨 허벅지를 함부로 만져?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어 봐!”
최 대리가 성현을 대신해 구박하고 나서는 통에 달리 할 말이 없어졌다.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리는 김 대리를 흘길 뿐이었다.
“팀장님이라.”
그녀의 입에서 그런 호칭을 듣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해 봤을까. 거리낌 없는 호칭이 기가 막힌 건 여전한데, 우습게도 싫지가 않았다.
불현듯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당황한 성현은 재빨리 블라인드를 전부 내렸다. 밖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선명했다. 내내 그리웠던 그 예쁜 목소리가.
“앞으로 잘 지내 보자고, 윤지수 씨.”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어떤 기대감이 묻어났다.
“다녀왔습니다.”
지수는 퇴근하자마자 자신을 반겨 주는 은숙에게 피곤한 얼굴로 인사했다.
“첫 출근은 어땠어? 회사 사람들은 어때? 면접 때 못 봤다던 팀장님은 봤고?”
방까지 졸졸 쫓아오며 질문 공세를 펼치는 은숙은 딸의 첫 출근이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코트를 벗어 옷장에 걸어 놓던 지수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놓칠 리 없는 은숙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왜? 꼬투리 잡아? 너 마음에 안 든대?”
“그런 거 아니야. 조금 피곤해서 그래. 지혁이는?”
“지혁이는 늦는대. 오늘 어땠는지 말 좀 해 봐.”
답답하다는 듯 급기야 언성까지 높아진 은숙에게 고개를 돌린 지수는 무척 피곤한 얼굴이었다. 집에 와서까지 그 남자를 떠올려야 하는 현실이 너무 싫었다.
“엄마, 나 저녁도 안 주고 계속 질문만 할 거야?”
“맞다, 내 정신 좀 봐. 저녁 차려 줄 테니까 옷 갈아입고 나와.”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질문이 이어질 게 뻔했지만, 일단 은숙에게 해방된 것만으로도 피곤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첫 출근이니까 일찍 퇴근하라는 대리님에게 억지로 등 떠밀려 정시에 퇴근했지만 지수의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아무 생각하지 말자. 선배도, 회사도.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그녀는 세상 편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지만 억울한 감정이 울컥 밀려와 다시 일어나 앉았다.
“이런 개 같은 상황이 어디 있냐고.”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는 그날의 기억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삭제한 것 같았다. 그럴 거면 설레는 말로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놓지나 말지.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친구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하필이면 왜 이성현이야.”
이건 꿈일 거야, 꿈. 내일 출근하면 모르는 사람이 팀장 자리에 있을 거야. 눈을 꼭 감으며 주문을 걸어 보지만 현실은 지독히도 냉혹했다.
“지수야, 밥 먹고 자야지. 도대체 팀장이 어떤 사람이길래 애가 첫 출근부터 녹초가 된 거야?”
지수는 내 첫 키스를 훔친 잘생긴 도둑놈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밤, 영원히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 * *
똑똑.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두던 성현이 잠시 멈칫했다.
“팀장님,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지수가 부르는 호칭이 어색해서 옷을 마저 걸어 두고 나서야 성현이 대답했다.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서류를 펼친 그의 눈길이 잠시 열린 문으로 향했지만 개의치 않고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이내 그윽한 커피 향이 난다 싶더니, 서류 더미를 피해 커피 잔이 책상 위에 놓여졌다.
“커피 드세요.”
오랜만에 받아 보는 모닝커피였다. 피곤한 아침을 깨는 고소한 향기에 성현의 경직된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뒤늦게 고개를 올린 그는 하루 만에 까칠해진 지수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 못 잤어?”
“네. 조금 설쳤습니다.”
얼굴을 매만지는 지수는 다소 민망한 표정이었다. 모른 척해 줄 걸 그랬나.
“긴장이라도 한 거야?”
“첫 출근이라 그랬나 봅니다.”
난처한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턱을 괸 성현의 입술이 허물어졌다. 이런 식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손을 뻗어 컵을 가져와 마른 입술을 적시자 느른한 기분이 찾아왔다.
“그리고?”
답지 않게 말꼬리를 잡는 성현에게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지수와 길게 대화할 날을 상상조차 못했던 그로서는 기분이 묘했다.
“잠을 설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잠을 설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왠지 뿌듯할 것 같았다.
“없습니다.”
“커피 마실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색하며 단칼에 거절하는 지수의 모습에 성현은 커피가 아닌 자신이 거부당한 듯한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이래 봬도 나 커피 제법 잘 타.”
지수가 대답하려는 사이 사무실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출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골적으로 아쉬운 표정을 짓는 그에게 지수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윤지수 씨.”
팀장실을 나가려던 지수가 몸을 틀었다.
“커피 잘 마실게요. 수고해요.”
그녀가 타 준 커피 한 잔으로 하루의 시작을 맞이하는 아침이었다.
알고 보니 이 남자, 완전 선수였다. 여자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데 일인자. 그가 손수 커피를 타 주겠다고 나설 줄 누가 알았을까. 놀라다 못해 질겁할 일이었다.
신입 사원 교육을 함께 받는 사람들과 구내식당에 내려가는 동안 지수는 아침의 일을 떠올리며 질색했다.
“받을 걸 그랬나.”
그가 손수 탄 커피를 받을 날이 또 올지는 미지수 아닌가. 뒤늦게 너무 매몰차게 거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받아요? 선물? 아님 고백?”
곁에서 궁금한 얼굴로 묻는 이세영에게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커피요.”
“누가 지수 씨 커피 사 준다고 했는데요?”
정확히는 커피를 ‘타 준’다고 했었지만 깜찍한 눈을 끔벅이는 세영에게 굳이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냥 뭐…….”
“누군데요, 누구?”
총총걸음으로 팔을 잡아당기며 묻는 그녀가 참 귀여웠다. 남자들이 껌벅 넘어갈 것 같은 애교와 순수함이 매력이었다. 그 역시 이런 귀염성 있는 여자가 취향일까? 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아는 선배가요. 식판 받아요.”
식판을 세영에게 넘기며 지수가 얼버무렸다.
“다이어트라도 하는 건가?”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자 지수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구내식당에서 그를 볼 수 없었다. 외근도 없었으니 밖에서 식사했을 리도 없고, 매일 이렇게 끼니를 거르는 걸까.
마침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최 대리를 비롯해 마케팅 팀 사람들이 보였지만 그 무리에 성현은 없었다.
“팀장님께서는 식사 안 하세요? 보이시질 않네요.”
“응. 원래 식사 잘 안 하셔. 특히 오늘처럼 오후에 회의가 있는 날엔 회의 준비로 더 정신없으시거든.”
아무리 바빠도 끼니까지 거르며 일할 건 뭔가. 지수의 표정을 읽은 최 대리가 지수의 등을 떠밀었다.
“괜찮아. 나도 처음엔 적응 안 됐는데, 팀장님도 별로 신경 안 쓰셔서 지금은 덤덤해졌어. 식사할 땐 또 먼저 나가자고 하시거든.”
불편한 표정을 지운 지수가 식판에 반찬을 골라 담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무실에 혼자 있을 그에게 마음이 쓰였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 위에 못 보던 게 하나 생겼다. 초코바를 바라보는 성현의 얼굴이 묘한 표정으로 변했다.
다른 사람이 이런 귀여운 짓을 했을 리는 없고, 짚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인터폰으로 손을 뻗는 그의 입술이 살짝 늘어났다.
“윤지수 씨, 방으로 들어와요.”
성현은 느긋한 얼굴로 그녀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경쾌한 구둣발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부르셨어요?”
깔끔한 정장 차림인 지수가 걸고 있는 사원증에 성현의 시선이 닿았다.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모아 묶은 모습이 평소보다 조금 앳돼 보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칠흑처럼 까만 눈동자에 생기가 서렸다.
“초코바는 왜 갖다 놓은 거야?”
잘 먹겠다는 말을 할까 하다 성현은 다른 말을 꺼내 놓았다.
“당 보충하시라고요.”
“내가 당이 부족해 보여?”
“끼니도 잘 안 챙겨 드시는데 당까지 떨어지실까 봐요.”
그를 정말 직장 상사로만 대하기로 작정했는지 하는 대답마다 사무적이었다. 아니, 사무적이다 못해 딱딱하다. 그것이 못마땅했다.
“너무 섣부른 걱정 같은데. 나 아직 젊어.”
이제 막 해가 바뀌어 성현은 서른이 되었다. 물론 대충 둘러댄 말이란 것쯤은 알았지만, 일관되게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그녀를 건드리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게 궁금해졌다.
“내가 끼니 잘 안 챙겨 먹는 건 어떻게 알았어?”
예리한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을 잘하던 지수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최 대리님이 그러시던데요.”
“쓸데없이 최 대리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저 담담한 표정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성현은 궁금했다.
“글쎄요.”
“그거야 물어보면 되겠지.”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던 지수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그가 턱을 괴었다.
“더 이상 할 말 없으시면,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난처한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지수의 의도가 눈에 훤히 보였다. 몸을 틀어 방을 나서려는 그녀를 성현이 불러 세웠다.
“오늘 시간 어때?”
“네?”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성현은 느긋한 얼굴을 한 채 강약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환영회를 할까 하는데, 시간 안 되면 다른 날로 잡고.”
“시, 시간 괜찮습니다.”
말까지 더듬는 지수는 꽤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 놀리는 악취미는 없지만 그녀는 예외였다.
“그래, 나가 봐.”
서류로 시선을 내린 성현이 멀어지는 구두 소리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무릎 위로 올라간 스커트로 향한 그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너무 짧잖아.”
“으음, 칵테일 완전 맛있다. 지수 씨도 마셔 봐.”
달콤한 칵테일 한 잔에 기분이 좋아진 최 대리가 지수에게 칵테일을 권했다.
보기만 해도 예쁜 붉은색의 칵테일이 담긴 잔을 들어 지수가 입술을 적셨다.
“와, 진짜 맛있다. 대리님이 추천하시는 걸로 주문하길 잘했어요.”
한 모금 맛본 지수가 홀짝거리더니 금방 반 이상을 비우곤 새우 카나페를 입으로 가져갔다.
“안주도 정말 맛있네요.”
“그렇지? 이거 다 마시고 다른 것도 마셔 보자.”
벌써 메뉴판을 펼치고 다음 술을 고르는 두 여자의 모습에 성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최 대리는 회사 내에서도 알아주는 술고래로 당할 자가 없었다. 이대로 그녀의 페이스에 맞췄다가는 지수가 술에 취해 업혀 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앗, 흘렸네.”
지수의 검은 스커트 위로 샐러드가 떨어졌다. 성현이 손수건을 건네기도 전에 김 대리가 먼저 냅킨을 뽑아 스커트를 닦아 주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리님, 제가 할게요.”
김 대리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스커트가 위로 말려 올라가 허벅지가 드러나자 민망해진 지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김 대리, 뭐하는 거야? 이거 엄연한 성희롱인 거 알아?”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한 최 대리의 나무람에 아차 싶은 얼굴로 김 대리가 지수의 허벅지에서 손을 뗐다.
“미, 미안. 지수 씨. 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그러니까 생각 좀 하고 살아. 어디 아가씨 허벅지를 함부로 만져?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어 봐!”
최 대리가 성현을 대신해 구박하고 나서는 통에 달리 할 말이 없어졌다.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리는 김 대리를 흘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