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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1화. 그 여자, 홍인영의 하루(1)



“제발, 제발……! 다시, 내게 돌아와 주오.”
무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 나무꾼의 모습이 암흑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모두가 숨소리마저 죽이게 만든 침묵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슬픈 음악이 흐르면서 마침내,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가 천장을 가로질러 한곳에 머물렀다.
선녀의 모습을 한 인영이 무릎을 꿇고 앉아 간절하게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는 나무꾼을 바라보았다.
“나도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나무꾼을 그리워하는 슬픔이 어린 선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관객석에선 울컥하고 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훌쩍이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계와 속계의 공존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 그대, 부디 나를 잊어요.”
선녀가 쓰라린 가슴을 끌어안으며 외면하자 관객들의 안타까운 탄식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걸음을 옮기던 인영은 밑에서 마지막 설움을 토해 내듯 울부짖는 나무꾼의 모습에 결국 몇 발자국 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아……아.”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끌림을 끝까지 거부하지 못하는 뜻이 담긴 노래를 애절하게 부르며 몸을 공중으로 띠웠다. 등에 감추어져 있던 날개가 활짝 피어올랐다.
명실상부 ‘홍인영’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티켓 오픈 첫날부터 20분 만에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 거기에 최고의 뮤지컬 배우라는 수식어조차도 부족한 그녀가 폭발적인 연기력으로 관중들의 가슴에 감동을 물결치게 하고 있었다.
인영이 막바지로 치솟으며 마지막 동작을 하기 위해 한 손을 길게 뻗으며 나무꾼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던 그때였다.
두둑.
“!!”
불길한 소리와 함께 몸을 지탱시키고 있던 와이어 하나가 끊어지면서 몸이 한쪽으로 기울여졌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은 인영은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고개를 움직여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아찔함에 두 눈을 찔끔 감아 버렸다.
떨어진다면 못해도 전치 6주가 나올 법한 높이였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인영은 자신이 보고 있는 모든 광경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꾼 역할을 한 배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싹수없게 혼자 도망치기 시작했고 스태프들 또한 우왕좌왕할 뿐 누구하나 선뜻 나서서 수습을 하지 않고 있었다.
‘뭘 보고만 있어? 당장 나를 구해 줘!’라는 말이 어찌 된 일인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입안에서만 머물렀다.
옴마야.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생사가 오가는 끔찍함이 인영의 온몸을 두려움으로 장악시켰다.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남자랑 한 번도 못 자 봤는데!
아, 이게 아니지. 그게 지금 이 순간에 할 생각이야?
아무튼 이렇게 죽을 순 없다고! 이 멍청한 신! 날 데리고 가기만 해 봐, 데리고 온 거 후회하게 하늘에서 매일 징징댈 줄 알아!
처절하고 방정맞게 몸부림쳤지만 누구 하나 관심조차 가져 주지 않았다.
급기야 무슨 이유 때문인지, 관객들마저도 자리에서 일어나 혼비백산하며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공연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내 무대! 내 관객! 내 작품! 아니, 다 필요 없고 나 좀 누가 살려 줘!
“꺄악!”
그때였다.
관중석 끄트머리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비명 소리와 함께 그나마 인영의 몸에 달려 있던 와이어가 마저 끊어져 버렸다.
엄, 엄마! 눈앞이 아득해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몸이 심하게 휘면서 등에 달려 있던 선녀의 날개 깃털들이 뽑혀 눈처럼 유영했다. 가벼워진 몸과 함께 심장이 바이킹을 타고 있을 때처럼 간지러웠다.
점점 가까워져 가는 바닥에 몸이 떨어지면 느끼게 될 아픔의 고통이 두려웠던 인영이 두 눈을 찔끔 감았다.
그리고…….
쿵! 하고 떨어졌다.
온몸에 몰려드는 아픔에 찍소리도 못하고 진득하게 달라붙은 눈을 떴다.
인영은 정신 나간 여자처럼 자신의 몸을 마구 더듬어 보았다.
상처 하나 없는 멀쩡했다.
설마 벌써 죽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싶을 때 눈에 들어오는 누리끼리한 천장이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사로운 햇살이 사정없이 비집고 들어온 이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그것도 침대 밑.
그제야 마른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꿈이구나.”
천장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꿈속에서처럼 뮤지컬 배우가 아니라 여전히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라는 현실이 못내 아쉬웠다.
뮤지컬 배우가 될 수만 있다면 그깟 팔다리 한두 개쯤 부러지더라도 상관없었다. 현실이 팍팍해 얄팍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한순간에 우스워졌다.
인영은 입술 끝을 이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찌뿌드드한 몸을 쭉 폈다.
어둠을 깔아 놓은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열자, 뜨뜻미지근하게 부는 바람에 스며든 나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게 스쳐 지나간다.
아직 바람만으로는 완전한 가을이 찾아왔다고 확신하기 이른 날씨였지만 확실한 건, 아침부터 기분이 거지같다고 투덜거리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맑은 날씨였다.
인영이 뮤지컬 배우가 되어 있는 자신의 꿈을 꾼 건 한두 번이 아니지만 항상 찝찝하게 끝을 맺곤 했다.
어떤 날에는 무대 위에서 물이 쏟아졌는데 입고 있던 옷이 다 녹아 버리는 바람에 발가벗은 몸으로 숨을 쥐구멍을 찾아 다녔다.
다른 날에는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좀비들이 등장했다.
그뿐인가. 모기를 죽이고 잠든 어떤 날의 꿈은 모기 역할을 맡아 대형 파리채에 맞아 기절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거미줄 타고 내려오던 거미를 죽였다.
현실 속에서 존재하길 바라는 갈망이 은연중에 꿈이라는 공상에서조차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꾼 지도 벌써 6년 이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연습하고 없는 돈으로 뮤지컬 보러 다녔다.
어떤 배역이든 가리지 않고 오디션도 보고 다녔지만 매번 떨어지는 바람에 친구인 혜주를 제외한 주위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 다른 길로 가 보는 거 어때?’라는 소리를 듣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정말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걸까?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뇌하던 인영의 귓가로 꼬르륵하는 원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파…….”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에 모든 잡념들이 누군가가 박박 힘을 주고 지운 것처럼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배고픔을 목전에서 두고 간절하게 바라는 단 한 가지는 공복의 허기짐을 채우는 것이었다.
“그래, 밥이나 먹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어제 끓여서 먹다 남은 된장찌개에 두부 썰어서 넣어 먹어야지! 밥 먹고 다시 생각해 보자!”
들뜬 마음을 한가득 담고 방에서 나왔다.
인희는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 인희가 집에 있다는 것은 회사를 그만뒀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인영과 인희는 한날한시에 같이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다. 늘 함께하시는 부모님조차도 헷갈려 손목에 채워 놓은 팔찌가 없는 날엔 구별하는데 하루 종일 애를 먹어야 할 정도로 서로 닮아 있었다.
이목구비, 체격, 말투까지 인영과 인희는 겉으로 보이는 것 중에 뭐 하나 다른 게 없었다.
유년기에는 같은 유치원을 함께 다녔고 비슷한 성적으로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문제는 소년기(少年期)에 당도했을 때 모든 상황이 극변하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때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방과 후에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전부였던 인영과 독서 동아리와 스터디 그룹에 들어 매일 공부하고 학교 상위권에 진입한 인희가 갈수 있는 인생의 길이 완벽하게 달라진 것이다.
고3. 6년 동안 노력의 결실 끝에 인희는 자신의 성적에 비해서 훨씬 낮은 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4년 내내 장학금을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인영은 날고 기는 학생들에게 치여 원서를 넣은 예술 대학마다 떨어지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도 부족해서 성적 미달로 지방에 있는 전문 대학, 그것도 전혀 관심도 없는 과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년 정도는 억지로 학교를 다녔지만 결국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관심에도 없는 과에 가서 돈지랄 할 바에는 과감하게 학력과 연공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생각에 노력으로 뮤지컬의 한 획을 그어 자신의 진가를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지만 보다시피…….
“악, 두부가 없네!”
인영은 그냥 5년 째, 백수에 불과했다.

* * *

공병 줍기, 주말 호텔 연회장 홀 서빙, 방청객, 탈 쓰고 인형극 등. 오디션이 언제 잡힐지 몰라 단기간으로 틈틈이 하고 있는 알바 중에서 가장 시급이 센 알바는 바로 베스트 프렌드인 혜주가 운영하고 있는 카페의 알바였다.
인영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혜주는 부담 없이 그녀의 스케줄을 배려해 주었다.
“왔어?”
“좋은 점심!”
혜주의 달가운 인사에 대답하고서는 서둘러 일할 준비를 했다. 입고 있던 사복을 벗고 혜주가 마련해 준 검은 미니 블랙 원피스를 입고 헐레벌떡 뛰어 오느라 흐트러졌던 길고 노란 머리도 단정하게 빗었다.
인영은 바쁠 때면 직접 바 테이블 너머로 들어가서 바리스타들을 도와 커피를 뽑기도 하지만, 주로 하는 일은 ‘라이브 카페’의 이름에 맞게 직접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물론 그 ‘라이브 카페’라는 팻말이 붙여진 이유가 인영의 꿈을 위해 돕기 위한 혜주의 고의적인 노력의 결과였지만.
“친구, 오늘도 잘 부탁하네!”
혜주의 열띤 응원 속에 인영은 카페 중앙에 위치한 작은 무대 위로 올라갔다. 아무리 작은 무대라도 자신을 바라보는 관중이 있다는 것이 마냥 설레고 행복하기만 한 인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