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인영은 작은 마이크를 손에 꼭 쥐었다. 오늘 선택한 노래는 유명한 뮤지컬 ‘캣츠’에 나온 Memory였다.
“Midnight, not a sound from the pavement has the moon lost her memory? She is smiling alone…….”
잔잔하고 슬픈 노래 소리가 카페에 살포시 스며들자 수다를 떨던 커플, 책에 코를 박고 공부를 하거나 통화를 하던 이들의 시선이 천천히 인영에게로 향했다.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 잎들이 봄날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오늘도 수고했어!”
인영이 그 뒤로도 몇 곡을 더 하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혜주가 격하게 박수를 치며 일당을 건넸다.
“고마워.”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데 왜 심사위원들은 너 같은 보석을 알아보지 못할까? 속상해 죽겠어.”
여태 혜주가 봐 왔던 인영은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한 친구였다. 매일 노래 연습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디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거기에 노래를 부르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궂은일도 불평 없이 하는 친구였다.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는 친구에게 광명이 쏟아 질 좋은 기회가 찾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에 혜주마저 허무함이 몰려왔다.
“너 오늘 약속 없지? 저녁이나 같이 먹자.”
노래를 하며 기력을 다 쏟아 붓는 바람에 인영의 입장에서야 꽤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아쉽게도 친구를 외면해야 할 상황이었다.
“아니야. 나 지금 뭐 먹으면 안 돼.”
“왜?”
“나 대회 나가거든.”
“대회?”
“응. 요 앞 마트 앞에 닭발집 하나 개업했는데, 거기서 매운 닭발 빨리 먹기 대회가 열린대. 놀라지 말고 들어! 1등 상품이 무려 50만원 무료 회원 쿠폰이야!”
인영이 하늘에 대고 활활 타오르는 의지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뼈까지 다 씹어 먹어 줄 테다!”
“50만원이면, 닭발을 얼마나 먹을 수 있는 거야?”
“앞으로 술안주는 걱정 없는 거지.”
“그래. 꼭 1등해라. 파이팅.”
“응. 1등 해서 꼭 같이 먹자!”
혜주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대회에 1등을 해서 먼저 인희와 먹을 생각이었다. 거기까지 상상하니 인영의 입가에는 저절로 흐뭇함이 퍼졌다.

젠장 맞을!
매워도 너무 매웠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적당한 선을 지키고 매워야지, 이건 뭐 애초부터 쿠폰 안 주고 홍보만 하겠다는 치졸한 계략인 것이 분명하다! 겨우 닭발 두 개에 우유 세 통과 요구르트 일곱 개로 배를 채운 인영은 매운 것을 먹어 쓰라리고, 쿠폰을 받지 못해 아리는 속을 부여잡고 대극장으로 향했다.
가방 안에서 혜주에게 받은 일당 7만원을 꺼내 뮤지컬 티켓을 구매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간 극장에선 극찬의 박수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나왔다.
“저도 꼭 배우님 같은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요!”
공연이 끝난 후 뮤지컬 배우의 팬 사인회도 잊지 않고 달려가 사인을 받았다.
비록 주머니는 텅텅 비었지만 가슴 가득 꿈과 희망을 채운 인영은 뿌듯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인영은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황폐한 놀이터를 찾아 노래 연습을 했다. 10시가 조금 넘자 당장 안 꺼지면 경찰에 신고해 버리겠다는 주민의 항의에 아쉬움을 남긴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집으로 향하다가 갈증과 더위를 참지 못하고 동네 슈퍼에 들렸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방금, 네 동생 올라가던데.”
카운터에 앉아 있던 슈퍼 주인 아줌마는 맥주를 사는 인영에게 자신 앞에 있던 아몬드 몇 개를 인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슈퍼 아줌마는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만 달랑하고 지나가는 인희와는 달리 서글서글하고 대화도 잘 통하는 인영을 더 예뻐하는 편이었다.
“아, 인희요? 오늘 늦게 왔네.”
“갸는 원래 그렇게 만날 늦더만. 그건 그렇고. 너는 오디션은 합격했냐?”
“아, 아직이요.”
머쓱하게 웃으며 맥주 캔을 따서 시원하게 몇 모금 들이켰다.
“캬아!”
“너도 얼른 취업해야 하는디……. 나이가 솔찬히 먹었잖냐. 그라지 말고 선이나 한 번 봐 볼텨?”
“선이요? 잘생겼어요?”
“그러엄! 잘생겼다마다여! 능력 좋지, 그 집 시어머니도 성격이 참 좋아. 날 한 번 잡아 봐?”
“하하. 생각해 주시는 건 너무 감사드려요. 그런데 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요. 핑계가 아니라 연애할 시간이 없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영이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그려. 집에 조심히 들어가고. 오디션 합격하면 내한테도 꼭 알려 줘라잉.”
“네에!”
안타까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슈퍼 아줌마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꽤 늦은 시간이라 동네가 메마른 침묵에 잠들어 있었다. 간혹 가다 들렸던 귀뚜라미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여름이 지나가고 있긴 있는 모양이다.
다시는 올 수 없고, 다시는 잡을 수도 없는 스물일곱의 반이 허무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인영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한껏 웃어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꿈에 점점 가까워지는 거지!”
그렇게 역방향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더 편해지는 것 같았다. 인영이 손에 들고 있는 차가운 맥주를 쭉 들이키며 흥에 겨워 콧노래를 불렀다.
“어라!”
그러다가 전봇대 밑에서 빈병이 담겨져 있는 검은색 봉지를 발견하곤 심봤다고 외치며 달려갔다. 상당한 양의 빈병들을 끙끙거리며 들고 온 인영은 샤워를 끝내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인희를 발견했다.
“인희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한 인희가 슬쩍 시선을 내려 인영이 들고 있는 봉지를 응시했다. 얼른 뒤로 숨겨 보았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인영이 가만히 봉지를 내려놓았다.
“아, 이거? 오다가 있기에 주웠어. 안 주우려고 했는데, 그래도 눈에 보이는데 어쩔 수 없잖아. 돈도 꽤 나올 것 같고…….”
인희는 겸연쩍게 변명을 늘어놓는 인영에게 별말 하지 않고 돌아서 방으로 들어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인영이 빈병을 최대한 신발장 구석에 넣고 허둥지둥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스킨로션을 바르고 있는 인희의 모습에서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나 있지. 내일 오디션 봐.”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인희는 그저 눈을 감고 뺨을 톡톡 때렸다.
“합격할 수 있게 기도 좀 해 줘.”
인영의 부탁에 인희의 고운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심기를 건드렸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날카롭게 치켜뜬 인희는 그녀를 노려보며 결코 좋지 않은 말들을 쏘아 붙였다.
“내가 기도한다고 될 일이야? 네 실력이 합격할 만한 실력이어야지.”
“이번엔 느낌이 좋아.”
“넌 늘 느낌은 좋았어.”
틀리지 않은 인희의 말에 인영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인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수분 크림을 찍어서 뺨에 바르며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잘 봐. 꼭 뮤지컬 배우가 돼서 월세도 좀 보태고 생활비도 좀 내.”
“으응!”
인영은 ‘잘 봐’, ‘뮤지컬 배우가 돼서’ 라는 말에 단순하게 또 기분 좋아져서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쉬어.”
인영은 방문을 닫아 주고 그대로 부엌으로 향해 대접에 물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가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 앞에 내려놓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에 절실하게 기도했다.
“제발, 오디션 합격하게 해 주세요! 이번 만큼은 제발 소녀의 가슴에 스크래치를 내지 마시옵소서!”
조용한 밤이 아침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제2화. 그 남자, 강정석의 하루(1)




불변의 일정.
새벽 6시에 일어나 인적이 드문 근처 공원으로 나가 가볍게 운동을 하고 돌아와 샤워를 끝내면 문 앞에 도착한 영문 신문을 가져와 읽고 주방으로 향한다. 마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꽁꽁 숨겨 놓은 것처럼, 찻장 맨 위에 놓여 있는 요리책을 꺼내 들어 접어놓은 다음 페이지의 요리를 심각한 표정으로 꼼꼼히 읽어 본 후 냉장고 문을 열어 재료들을 꺼낸다.
정성스럽게 씻고 썰고 거칠게 솟아오르는 불길도 마다하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요리를 만들었다.
오늘은 리코타 치즈로 소를 채운 라비올리 오븐 파스타라는 음식을 할 차례였다.
그러니까 아침 7시부터 어머니인 차 여사가 난생 처음 보는 여자의 사진을 들고 집으로 불쑥 찾아들어 불변을 박살 내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할아버지 대학 동창의 손녀딸인데, 한의사래. 그렇게 참하고 야무질 수가 없다고 할아버지께서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셔. 다음 주 토요일. 2시 로얄호텔 레스토랑으로 예약해 놨어. 늦어서 사람 기다리게 하지 말고 시간 맞춰서 나가도록 해 줘.”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들이밀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가는 엄마를 정석은 성가신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말에 시간을 빼앗긴다는 분개와 자신이 정해 놓은 법칙을 깼다는 불쾌함에 여전히 얼굴이 구겨져 있는 정석을 보며 차 여사가 어울리지도 않게 눈치를 살폈다.
“얼굴 좀 펴. 아들. 엄마는 뭐 오고 싶어서 왔을 것 같아? 할아버지가 지치지도 않고 밤낮으로 닦달하시잖아. 가문의 씨를 끊으려는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오늘 아침에도 나랑 눈 마주치자마자 잔소리하려고 입 벌리려고 하시기에 후다닥 도망쳐 나온 거야. 아들이 보기에 네 엄마 인생 좀 많이 딱하지 않니?”
또 시작이다. 마치 세상의 모든 불운과 한파가 자신을 덮쳐 버렸다는 식의 억울함을 토해 내는 것. 정석은 그런 차 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싫으면 이번에도 대충 얼굴만 비춰. 어차피 그날 자선 파티 있어서 할아버지가 은근히 신경 안 쓰실 수도 있어. 나머지는 엄마가 어떻게든 해결해 볼게.”
매번 어떻게든 해결해 본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항상 이렇게 말도 없이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와 여자의 사진을 들이밀며 징징거린 게 벌써 3년 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