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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를 견디는 법
1화
프롤로그



“괜찮겠어?”
대답을 바란 건 아니지만, 역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전화 오는 거 꼭 받아. 안 받으면 당장 달려올 거니까.”
협박이었지만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혼자 있기에는 딱 괜찮아. 조용하고. 또 목조 주택이라 건강에도 좋을 거 같고. 가재도구도 그냥 있다니까 우선은 좀 둘러보자고.”
차창 밖으로 하늘이 사람 눈을 홀릴 만큼 새파랗게 떠 있었다. 그러나 선글라스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은 그 어디도 보고 있지 않았다. 운전 중인 남자는 힐끗 그를 돌아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혼자 있는 건 무리야. 너무 갑작스러워. 준비라도 하고 다시 오든지. 오늘은 그냥 구경만 하고 준비 좀 해서 주말이나…….”
“아니…….”
한참을 혼자 떠들던 운전자의 귀에 낮은 소리가 들렸다.
“뭐?”
무슨 뜻인지 알고 있지만, 그는 일부러 잘못 들었다는 듯 큰 소리로 되물었다.
“혼자 있어도 돼.”
“널 어떻게 믿어? 약도 제때 먹어야 한다고.”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닌 거 같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정할 문제가 아닌 거 같아. 좀 더 생각해 보고 사람을 구한 다음에나…….”
“그냥 가.”
운전대라도 돌릴 거라 생각했는지 옆에서 또다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널 어떻게 믿어. 거기 가서 혼자 방구석에서 말라 죽으면 어쩌려고!”
운전대를 잡은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옆에서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여기서 죽든지.”
“…….”
목소리가 너무 명료해서…… 운전대를 틀 수 없었다.

“음…… 그렇게 됐어. 너 전에도 나보고 오라고 했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갑자기 내려오면 어쩌려고……. 나도 준비를 해야지!>
전화기 저편에선 저번에 한 이야기가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음을 완곡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게 바보 같은 짓이었을까.
“여기 정리 다 했어. 나 내일부터 바로 출근해도 돼.”
<야! 이게 무슨…… 신발 갈아 신듯 하는 일도 아니고!>
“가서 청소해 줄게. 하여튼 이따 저녁에 보자.”
혜진이 무리하게 끼어드느라 옆에서 요란하게 클랙슨 소리와 함께 욕지거리까지 들렸지만 늘 그렇듯 무시를 하고 비상등 두어 번 깜빡거리는 것으로 제 기분을 표시하고는 액셀을 밟았다. 웅웅거리면서 금방이라도 차는 터질 듯한 굉음을 냈지만 제 생각만큼 속도는 오르지 않았다.
<경훈 씨랑 일 있는 거지?>
제 속을 푹 찔러 대는 은진은 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옷 보따리와 짐이 잔뜩 차서 백미러로 뒤가 보이지 않는 혜진은 연신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서 대답했다.
“일은 무슨…… 원장이랑 대판 싸웠어. 그래서 더 이상 일 못 해. 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짐 싸서 내려가는 중이야. 하여튼 가서 이야기할게. 길 더럽게 막힌다. 이따 이야기하자.”
<야! 유혜진!>
전화기 저편에서 빽 소리를 질렀지만 혜진은 전화기를 꺼 버리곤 옆에 속을 벌린 채 있는 커다란 가방에 던져 넣어 버렸다. 하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은진에게 말한 것처럼 대판 싸운 건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그랬다면 더 괜찮았을까? 통화 때문에 낮춰 놨던 볼륨을 다시 높였다. 찢어질 듯한 록 음악이 낡은 차 안을 울렸다.
경영학부를 졸업하긴 했지만, 인서울 한 거 빼고는 그다지 메리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변변한 곳 원서도 한 번 못 내 보고 남들이 다 하듯 노량진에서 이 년 동안 부질없는 공무원 공부를 하다가 끝내 보습학원의 강사로 나서고 말았다. 변변한 직장 대신 수요가 충분한 일자리는 그런 것들뿐이었다.
남들이 다 겪는 그런 수순이었다. 그리고 공부하다 만난 괜찮아 보이는 남자가, 괜찮게 공부를 하다 번듯한 대기업에 취직을 하더니, 그때까지 학원 다니며 번 월급으로 데이트 비용도 대고 용돈도 찔러 주던 절 하찮고 우습게 보다가 결국 사달이 나 버린 터였다.
웃기지도 않지…….
그동안 제가 가지고 있던 괜한 자괴심에 더 화가 났다. 겨우 대기업이라지만 신입사원 2개월 차 주제에, 꼬박꼬박 월급 잘 받아서 먹고 싶은 거 먹여 줘 면접 본다고 옷 사 줘, 백 일 날 커플링도 다 제가 번 돈으로 했건만.
‘넌, 맨날 그렇게 살래? 정말 남한테 말하기도 창피하다.’
알고 있었다. 남한테 말할 생각도 없었다는 거.
경훈의 취직을 제 일처럼 기뻐했던 게 바보였다. 혜진은 골골거리면서 굉음을 내뿜는 제 차의 액셀러레이터를 사정없이 밟았다. 그래 봤자 시속 백 킬로도 겨우 나온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차가 있다는 게 어딘가.
실은 제 차도 아니었다. 한 달 전에 돌아가신 아빠의 차니까. 아빠의 차를 이렇게 꿀꺽하고, 이제 아빠가 마지막으로 남긴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래도 집이 있으니까, 아빠의 손길이 그 어느 구석 하나 안 미친 곳이 없는 아빠의 분신 같은 집.

“에게…… 집이 이렇게 작아?”
“그래도 이 층이잖아. 이 층엔 네 방도 있어.”
“그래?”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갖는 ‘우리 집’이었다. 다만 삼각형의 조그만 대지에 마치 무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나 나오는 것처럼 요상한 모양의 이층집이라니.
아빠는 공사장에 다니는 목수였다. 더러는 고급 아파트 같은 곳도 다녔지만 대부분 목조 주택 같은 공사장에 다녔다. 그래서 한 달에 서너 번 집에 들어올까 말까 한……. 늘 거친 손을 가지고 있었고, 집에서 쉬는 날이면 쉴 새 없이 뚝딱거리다가 책상이니 책장이니 혹은 나무 밥상 같은 것을 금방 만들어 내곤 했었다.
어느 날은 강원도 어디, 또 어느 날은 전라도 어디에서 전화를 해서는 잘 있냐고 물었었다. 솜씨가 좋았던 모양이라 벌이도 좋았던 거 같은데 집에는 늘 돈이 없었다.
한 달의 20일 이상은 얼굴을 보이지 않는 아빠를 대신해 엄마는 막 초등학교를 들어간 저를 두고는 정말 다양한 직업을 가졌었다. 야쿠르트 아줌마, 화장품 외판원, 함바집 이모, 식당 아줌마, 마트 캐셔……. 그러나 늘 제가 돈이 필요할 때면 엄마와 아빠는 큰 소리를 냈었다. 그 절정은 아마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였을 것이다.
혜진은 오히려 대학을 멀리 가서 집에 오지 않아 더 좋았다. 방학 때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부분 집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었다. 와 봤자 돈 타령만 하는 엄마와 그 엄마의 잔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혼자 무언가를 만드는 데 열중하는 아빠 사이에 끼어들기 싫어서.
그리고 막 대학교를 졸업하고 막막해져 있을 때 아빠가 말했다.
“우리 집이다.”
늘 전셋집을 전전하던 가족이었다. 가끔 월세일 때도 있었던 거 같은데 혜진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오랫동안 살았던 작은 읍내의 끄트머리에 있는 논만 잔뜩 있는 한적한 동네에 낡은 차를 끌고 간 아빠가 잔뜩 센 하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었다.
“우리 집이야.”
건평은…… 겨우 십여 평이 될까 말까 했다. 물론 개인 주택이니 아파트보다야 넓었지만.
하얀색 칠을 한 목조 주택이었다. 지붕은 새빨갛고 작은 마당도 있었다. 물론 세모난 모양이라 우스꽝스러웠지만, 마치 무슨 영화 속에 나오듯 빨간색의 우체통도 있었다.
하얀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돌을 박은 길이 있고 그 옆에 금방 심은 잔디가 있었다. 그리고 아빠 솜씨가 분명한 지붕이 있는 나무 그네도 있었다. 한참 유행하던 벤치 모양의 나무 그네…….
그리고 커다란 창을 지닌 집의 옆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무 냄새가 물씬 나고 벽의 두 면이 창인 네모난 거실이 있었다. 거실에는 나무로 된 뼈대 위에 담요 비슷한 걸 올려놓은 소파 대용의 긴 의자가 있었다.
그 옆에는 벽난로도 한구석에 있었고 뒤로는 역시 나무로 만들어진 기역 자 모양의 좁은 부엌이었다. 그 옆의 작은 문은 침대와 붙박이장이 있는 안방이었고, 뒤쪽으로 그 좁은 공간에 욕조까지 있는 욕실이 있었다. 그리고 욕실 옆으로 빙 둘러진 계단을 오르면 작은 방이 하나 나왔고, 그 방 앞으로는 한 평쯤 되는 작은 베란다도 있었다.
“여기서 고기 구워 먹으면 맛있겠지?”
그러려고 가운데 화덕을 넣을 수 있는 테이블까지 있는 집이었다. 물론 그 테이블에서 다 같이 고기 한 번 구워 먹어 본 적이 없었지만.
“누가 이딴 코딱지만 한 집이 갖고 싶대? 이거 하느라 돈 얼마나 든 거야? 이러느라 내가 그렇게 돈 없다는데 숨겨 놓고 안 준 거야? 어쩐지!”
좀 작긴 했지만, 누가 봐도 예쁘고 정감이 간다고 할 만큼 정성이 가득한 집이었다. 모양도 예쁘고 무엇보다 전부 나무로 만들어진 집은 마치 작은 카페같이 예뻤다. 다만 좀 어설픈 감이 있었지만.
늘 팍팍한 반지하나, 기숙사 같은 곳에만 있었고, 또 그전에도 늘 네모반듯하고 벽이 얇아 아랫집 윗집 속살거림까지 다 들리는 그런 곳에서만 살던 혜진에게는 나지막한 지붕이 드리워진 다락방 같은 제 방에 타인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게 신기하고 기뻤다.
그러나 계단 아래에서는 더욱더 늘어난 엄마의 날 선 목소리만 들려왔기에, 혜진은 또다시 짐을 싸서 노량진으로 가야만 했다.
제가 결국 고시를 포기하고 아는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돈을 벌기 위해 보습학원의 강사로 들어가 월급을 타게 되자 그녀의 엄마는 심심찮게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악담을 퍼부어 댔다.
<저 나이 먹도록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저것도 집이라고……. 내가 진짜 기가 막혀서!>
아빠가 뭘 잘못했는지는 여전히 뾰족하게 생각나지 않았다. 엄마를 혼자 뒀다는 거? 그러나 엄마는 오히려 아빠가 와 있으면 복창이 터지니 숨이 막히니 잔소리를 하다가 나가 버리곤 했었다. 오히려 혼자 있으면 곱게 화장을 하고 일을 하러 갔고, 아는 형님들과 봄이면 꽃구경, 가을이면 단풍구경을 다녔고 문화회관의 노래 교실에 나갔었다. 그런데 왜, 뭐가 문제인가.
<너 돈 좀 모아 놓은 거 있니?>
딸랑 6개월 일을 해서 겨우 월급이 10만 원쯤 올랐을 때부터 전화 내용이 달라졌다. 혜진은 룸메이트의 지저분한 습관도 싫었고, 지저분한 남자관계에도 질린 터라 얼른 나가 버릴 생각으로 돈을 모으고 있었다. 물론 짬짬이 ‘애인’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내가 돈이 어딨어!”
<그만큼 컸으면 부모한테 은혜를 갚아야지!>
엄밀히 말해 부모가 아니라 그냥 모 아니었던가?
그러다 일은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다. 자세히 말해 보라 하면 어떤 순서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엄마가 이혼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갑자기 충남 어디서 아빠가 공사장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리고 취직에 성공한 경훈이 저를 피하기 시작했다.
장례식장에 와 사위 노릇을 해 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적어도…… 한 번쯤은 올 수 있었던 거 아닐까? 딱 그때 신입사원 연수하고 날짜가 맞아떨어진 것에 대해서 탓할 생각은 없었지만 혜진은 내심 서운함이 컸었다. 그걸 몇 번 말로 했던 게 오히려 그와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든 것이라 생각되기도 했다.
그리고 곧 보습학원의 시험 철이 닥쳤고, 이래저래 자리를 채우지 못해 난처해진 혜진은 구석에 몰리게 되었고, 원장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된 건 경훈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남한테 말하기도 창피하다.”

그런 쓰레기 같은 집 따위 필요 없다고 소리치던 엄마의 말과는 달리, 혜진은 집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거. 그리고 그곳이 남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곳이라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다른 사람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한참이나 빈 채로 있었던 거 같았다. 아마 손을 봐야 할 것이 많을 터였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는 데 돈을 내야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게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건 혜진의 착각이었다.



1. 몇 겹으로 접혀 낡은 소파에 누웠다(1)

가을볕이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고요’였다. 저쪽으로 누르스름한 논이 있었고, 인가가 딱 끝나 농로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끄트머리에 있었다. 그 집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허, 진짜 작긴 작네.”
옆에서 한탄인지 혹은 실망인지 모를 말이 터져 나왔다.
“이거 완전 사기 수준인데.”
따가운 가을볕이 한 점밖에 드러내지 않은 뺨에 내려앉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당혹스럽게도. 그럴수록 그는 몸을 움츠렸다. 따뜻한 온기가 스며든 가을볕 같은 건…… 제게 가당치도 않으니까.
“들어가 보기나 하자.”
라고 지석이 말했지만, 그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일어난 소동 때문에.

“뭐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
“말했잖아. 엄마가 이 집 팔았다고.”
“네에?”
당장 씻고 싶었다. 어제 과음을 했고, 룸메이트인 영숙과 크게 한바탕한 뒤로 화장실에 들어가지도 못했었다. 오죽하면 휴게소에서도 화장실만 종종거리고 갔다 왔을 뿐이었다. 그 흔한 우동 한 그릇 먹을 수도 없었다. 몰골이 형편없어서…….
그런데 문제는 허술한, 그러니까 장식용이나 다름없는 마당의 울타리에 칭칭 쇠사슬이 감겨 있고 ‘매매’라고 어설프게 쓴 글씨와 함께 익숙한 부동산 이름과 번호가 적혀 있는 푯말이 떡 하니 걸려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밑의 번호를 보고 당장 전화를 했고 쫓아 나온 익숙한 얼굴을 보고 혜진은 저도 모르게 제가 가장 경멸했던 엄마처럼 악다구니를 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무슨 권리가 있어서…….”
“몰라. 하여튼 팔았어. 새 주인이 오기로 했다니까.”
왼쪽 뺨에 커다란 사마귀가 있는 반 대머리의 이 씨 아저씨는 지금 대명 부동산이란 간판을 건, 전에는 대명 복덕방의 주인이었다. 귀찮다는 듯 대답한 이 씨 아저씨가 제 어깨 너머를 보는 것을 보고 혜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저기 혹시…….”
“이 집 주인인데…… 부동산 직원이십니까?”
한눈에 봐도 딱 이마에 서울에서 온 대단히 샤프한, 연봉은 일 억이 넘고 외제차쯤은 끌고 다니고, 이런 시골에는 투기 목적이나 혹은 별장 삼아 헐값으로―물론 이 동네 사람으로 봐서는 대단한 시세지만― 사 놓은 집이 전국 방방곡곡의 요지에 있을 것 같은 세련된 모습의 젊은 남자가 부드러운 억양의 서울말로 물었다.
“아, 그럼 전에 통화하신 한 사장님?”
“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무슨 일이 있거든요!”
혜진은 제 차, 아니 아빠의 옛 구형 아반떼에 잔뜩 실린 제 짐을 보고서 다시 저도 모르게 엄마와 같이 빽 소리를 질러야 했다.

우아하고 단정하게 생긴 남자는 혜진이 무슨 말을 하든 들어 줄 기세였다. 다만 판단은 전혀 그녀의 의도대로 하지 않을 거란 게 분명해 보였다.
“이 집은 저희 아버지 소유거든요.”
말해 놓고도 혜진은 이 게임에 승산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이 집이 아빠의 것이기나 한 걸까? 아빠가 지어 온 여러 가지 집들 중에 하나인데 집이 수백 채 있는 맘 좋은 사장이 잠깐 네가 살아라, 하고 말해 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등기부 등본이니 혹은 집문서니 따위는 본 적이 없으니까.
다만 누군가 나가라고 와서 악다구니 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지극히 경험적인 사실 하나만으로 이게 아빠의 소유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저희는 이 집의 소유권자인 박경숙 씨한테 정당한 대가…… 아니 솔직히 말해서 공시지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이 집을 매입했습니다. 저야 대리인을 통해서 매수했으므로, 직접적인 것은 모르지만, 취득세, 등록세, 지방 공채까지 다 매입하고 소유권 이전과 등기부 등본까지 다 확보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그쪽의 주장은 절대 법적으로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반듯한 콧날과 짙은 쌍꺼풀이 있는 곱상한 남자는 당장 멱살을 잡히더라도 이 이상 목소리 톤이 높아질 일 없을 것같이 차분했다. 그리고 남자가 내미는 서류는 잘은 모르지만 남자의 말과 같아 보였다.
이 집이 아빠 집이긴 했나 보다 싶었다. 그러니 뻔뻔한 엄마 이름이 저기 있는 거지. 그러나 혜진은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저기 있는 저 하얀 자전거는 제 거거든요. 그리고 창 안에 있는 저 빨간 땡땡이 무늬 커튼도 제가 단 거예요. 아빠가 돌아가신 건 저번 달이지만, 전 이 집의 유일한 상속자고 제게 단 한 마디 통고도 없었다고요! 이건 무슨 착오가 분명해요!”
라고 외쳤지만, 혜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