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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를 견디는 법
2화
1. 몇 겹으로 접혀 낡은 소파에 누웠다(2)
정말 엄마는 이혼을 했을까? 제게는 이혼했다고 말만 했었다. 저는 등본을 떼 본 적도 없었고, 그걸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빠에게 놀라 전화를 하긴 했지만, 그냥 허허 웃는 소리에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끊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만날 헤어지네 어쩌네 이혼을 하네 어쩌네 하는 것이 일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이혼을 했다면 아빠가 저를 붙잡고 이야기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이게 사실일까?
이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유감스럽게 됐지만, 저희는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습니다. 소송을 하시려거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희도 법적으로 대응할 테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류를 내밀면서 남자가 하는 말에, 혜진은 저도 모르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전 여기 말곤 갈 데가 없다고요!”
차 안에는 나른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얀색의 면장갑을 낀 손 위로도 따가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어쩌면 갑갑해질 수 있겠다 싶을 만큼 햇살은 따가웠다. 그러나 그는 잠자코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외딴 집은 그 어느 누구라 해도 한 번쯤 힐끗 돌아볼 만했다. 하얀 벽체와 짙은 자주색의 지붕, 정말 사람이 사는 집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좁은 목조 주택, 세모난 모양인지 네모난 모양인지 규정할 수 없는 묘하고 좁은 집은 커다란 창을 가지고 있었다.
마당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꽤 됐는지 잡초와 잔디의 비율이 반반이었다. 다만 나무로 만든 새빨간 우체통과 짙은 고동색 칠이 된 나무 그네가 있어서 사람의 눈길을 끌 뿐이었다. 아무렴, 그 어떤 집인들 어떠랴.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돌렸다. 선글라스와 모자, 그리고 두툼한, 깃을 세운 코트는 햇살이 쏟아지는 차 안의 더운 공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걸 느끼지 못했다.
이물스러운 하얀 장갑이 제 눈에 띄자 그는 고개를 돌려 제 시선을 끌 곳을 찾아야 했다. 저쪽에 하얀색의 낡은 승용차 앞에 있는 어떤 여자에게 시선을 돌린 것은, 그 여자가 빽빽거리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두꺼운 차창으로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마,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차는 문짝이 두꺼웠고, 돈을 많이 들여 방음을 하려 한 티가 역력했다. 그래서 시동도 꺼져 고요함 속에 있는 그는 밖에서 들리는 소란이 먼 세상의 일인 양 나른하게 들렸다.
검은색 선팅 밖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주장하는 젊은 여자는 뭔가 불만이 많아 보였다. 사는 데 불만이 있다는 건 그만큼 사는 데 애정이 있는 탓이리라. 그는 어느새 흥미를 잃고 다시 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석이 말했듯, 혼자 ‘살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한들 어떠랴. 그는 나른한 약 기운을 느끼면서 슬몃 눈을 감았다.
사정을 해야 했다.
“저 서울에 있는 집도 다 정리하고 여기서 지내려고 내려온 거라고요. 보세요, 저기 짐들. 집을 팔았다는 걸 알았다면 제가 이렇게 짐을 싸서 왔겠어요?”
이 세련된 남자가 제시한 공적인 서류에 하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혜진은 당혹스러웠다. 이십여 년…… 순탄치 않은 삶을 살면서 당혹스럽고 황당한 경우를 당한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그 정점이라 할 수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것이란 말인가.
“박경숙 씨가 집이 비었다고, 그 안의 집기까지 포함해서 다 매매를 했습니다. 잔금까지 다 지불했으니 그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억지 아닙니까?”
따지고 있었지만 목소리 톤은 여전히 비싼 보험을 가입하거나 뒤에 있는 저 으리으리한 외제차를 판다 해도 넘어가야 할 것같이 호감 있고 조리 있었다. 감히 뭐라 반박을 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반박을 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제 어쩐다…… 사정하는 수밖에.
“전 갈 데도 없다고요!”
제가 생각해도 억지였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정말 갈 데가 없으니까. 서늘하게 익어 버린 가을바람이 아까까지만 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열을 뿜던 제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선뜩한 서늘함마저 저를 비웃는 느낌이었다. 빌어먹을……. 제 자신이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거. 이를 어째.”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복덕방 이 씨 아저씨가 한마디 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기, 아가씨는 직업이 뭡니까?”
보습학원 임시 선생요……라고 말하기엔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뭐라 말한단 말인가.
“지금은…… 없어요. 친구한테 가서 구해 봐야 해요. 전 정말 쉬러 온 거라고요. 아빠 집에서.”
불쌍하게 보이려고 한 말이었지만, 뱉고 나니 정말 제 스스로가 불쌍해졌다. 이 무슨, 참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당장 엄마라는 사람한테 전화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집이 헐값이라 해도 쥐어 본 적 없는 목돈이었을 테니까. 아마 그 돈을 쥐고 혼자서 환호성을 질렀을 터였다.
“그럼, 제가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네?”
“실은 전 일이 있어 올라갈 거고. 이 집에 묵을 사람은 저기 차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좀 몸이 불편합니다. 조만간 간호하는 사람을 구해 볼 생각이었는데 급하게 오느라 그냥 왔고, 전 바로 올라가 봐야 합니다. 저 사람의 끼니도 해결해야 하고 특히 시간 맞춰서 약을 먹여야 하는데, 그쪽에서 숙소를 구하고 제가 간호할 사람을 구할 때까지만 그 일을 대신하시면서 집에 머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집 내부 구조를 보니 일이 층이 구분된 거 같으니까. 이 층에서 사셨습니까?”
“네…….”
얼떨떨한 혜진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눈앞에 보이는 삐죽이 솟은 이 층의 다락방이 그녀의 방이었다. 집은 대지가 무척이나 좁은 탓에 일 층에는 욕실과 부엌, 거실 그리고 침실이 다였고 이 층도 좁은 계단으로 올라가면 작은 다락방이 하나 있는 구조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잠깐만요. 여기 머물 사람이란 게…… 남자 아닌가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외간 남자랑 한집에 살라고요?”
찬밥 더운밥 가릴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혜진의 항의에 잘생긴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슬몃 미소까지 지으면서 대답했다.
“절대, 무슨 일은 없을 겁니다. 환자거든요.”
“아니 환자라고 해도…….”
“좋습니다. 제가 제 이름을 걸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하지만 그것도 못 믿으시겠다면 제안을 하죠. 폭행이든, 혹은 여자분이 생각하시는 성적인 위해 같은 것이 있을 경우 집의 소유권을 혜진 씨께 넘기겠다고 말입니다.”
“아…….”
그렇게밖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이 있나? 아니면…….
“저, 혹시 환자라는데, 막 전신을 하나도 못 움직이는 뭐…… 그런 중증 환자예요?”
그것도 골 아픈 일이었다. 한 번도 그런 사람들을 대해 본 적이 없으니까.
“아니요. 전혀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본인이 의지가 희미할 뿐이라서요. 그냥 제때 끼니를 먹는가 약을 먹는가 정도를 봐 달라는 것뿐입니다. 그 외에는 오히려 눈에 띄는 걸 거슬려 할 정도니까요. 같은 곳에 있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체크만 해 달라는 거죠.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면 몇 날 며칠이고 잠만 자거나 일어나지도 않으려 할지 모르니까요. 그뿐입니다.”
이상한 제의였다. 그러나 뭐라 마다할 수가 없었다. 아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장 오늘 잘 곳이 문제였으니까.
“뭐, 어쩔 수 없죠.”
“일어나.”
성가신 녀석. 아직도 얻어먹을 게 있어서 저러고 있나. 그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아니 뜰 기운도 없었다. 다만 열려진 문으로 들어서는 서늘한 공기와 신선한 바람 때문에 정신이 드는 듯했다.
“나와. 자려거든 들어가서 자자.”
이 무슨 모순된 말인가. 나가면 잠이 깰 것이 분명한데……. 힘겹게 눈을 뜬 그는 당황스러운 눈앞의 광경에 잠시 머뭇거리고 말았다. 아까 보이던, 싸움이라도 할 듯 소리를 지르던 여자가 차 앞에 서 있었다.
“인사해. 이쪽은 유혜진 씨.”
지석의 말에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열린 문으로 서늘한 가을의 오후가 스적스적 새어 들었다. 낯설었다. 어디론가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차 문이라도 닫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움쩍거리기조차 하지 않았다.
“이 친구가…… 좀 몸이 안 좋습니다. 카…… 진우. 이 친구 이름은 이진우 입니다. 진우야, 이쪽 유혜진 씨가 당분간 널 돌봐 주기로 했어.”
그는 피식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귀찮았다. 그래서 있는 힘을 짜내 한마디 해야 했다.
“필요 없어.”
그러나 한지석은 그럴 맘이 없었는지 말했다.
“들어가자.”
한 달 동안 문 한 번 연 적이 없는 게 분명하다는 걸 문 안의 공기가 말해 주고 있었다. 무언가 썩어 문드러진 것은 아니었지만, 집 안은 퀴퀴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건, 텅 빈 한쪽 벽이었다.
분명히 아빠는 저 벽에다 제법 큰 벽걸이 텔레비전을 걸어 놨었다. 드라마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엄마 때문에. 물론 LED니 하는 최신형은 아니고 이제는 단종돼 버린 PDP를 어디서 싸게 구했던 거 같았다.
하지만 볼록한 브라운관이 아닌 벽걸이 텔레비전은 그리 큰 사이즈는 아니었지만 집을 새집처럼 보이게 하는 구실을 톡톡히 했었다. 그런데 벽은 텅 비어 있었다.
“뭐야 이거…….”
제 입에서 더한 욕설이 튀어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한 겹 먼지가 쌓인, 밀폐된 공간에 스며드는 가을 공기는 낯설었다. 이미 등기부 등본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일까. 혜진은 그 낯선 기분에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그걸 채 느끼기도 전에 누군가 제 어깨를 휙 스치고 가더니 겨우 카펫 하나의 넓이만큼 될까 말까 한 좁은 거실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아빠가 직접 만든 게 분명해 보이는 나무 프레임 위에 그 흔한 쿠션도 없이 털이 긴 담요를 펴 놓은 소파 위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러고는 마치 제자리라는 듯 거기 눕더니 눈을 감았다. 모자도, 두꺼운 코트도 심지어 선글라스도 낀 채로.
“이봐요!”
혜진이 소리쳤지만, 그 사람은―게다가 키가 커서 그 딱딱해 보이는 나무 소파 위로 몸을 쭉 펴 눕힐 수도 없어 잔뜩 구부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눕더니 미동이 없었다.
“저 친구가 좀 피곤한가 보네요.”
분명히 먼지투성이일 것이었다. 엄마란 사람이 청소 따위를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저도 솔직히 이런 집은 대체 어떻게 청소를 해야 할지 난감해서 제대로 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방비로 쓱쓱 쓸고 걸레로 훔치는 게 다였던 비닐 장판이 깔린 단칸방이나 두 칸짜리 방에만 살아왔던 삶의 부작용이었다. 이 먼지를 어찌하긴 해야 하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뭘?
채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한 사장이라고 불리던―복덕방 주인이야 무조건 고객에게 사장님, 사모님을 붙이니까― 남자는 고급스러운 캐리어 하나와 노끈으로 묶은 책 한 보따리를 집 안에 옮기고는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적막이 찾아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머릿속에 폭죽이라도 터뜨린 듯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벽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정신없는 도심에 살던 그녀였다. 대학을 다닐 때부터 한시도 차들의 경적 소리나 사람들의 기척이 없는 곳에서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노량진 고시원의 얇은 벽을 통해 들리는 옆방의 기척이나, 아래층의 피아노 학원에서 울리는, 나중에는 머릿속이 땡땡거리는 듯한 피아노 소리와 초등학교 아이들의 요란한 소음 속에서 살아왔었다. 게다가 출퇴근 시간이나 어디를 갈 때도 늘 이어폰이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읍내의, 그것도 지나가는 사람도 드문 논바닥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목조 주택으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진공으로 된 곳에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음소거가 된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거나 혹은 비현실적인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당혹스러운 느낌이었다.
가을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정남향의 커다란 창만 두 개나 있는 거실에는 아까보다는 덜하지만 미세한 먼지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그것들이 고여 있는 공기 속을 헤치고 다니는 소리가 사각사각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따뜻하고 고요한 햇살이 가득 차 있는 낡은 소파에 남자는 커다란 사지를 몇 겹으로 접고 누워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2. 며칠 현관문이 ‘외출 중’을 붙잡고 서 있는 동안
나는 세상에서 방전되었다(1)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이 먼지 구덩이 속을 털기라도 해야 했고 그것도 아니라면 차에 실어 놓은 터무니없이 하찮은 제 몇 년간의 타향살이의 증거물들이라도 들여놔야 했다.
그런데…… 묘한 나무 냄새와 먼지 냄새가 가득한 고요한 적막이 저를 나른하게 덮고 있었다.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해 끼그덕 소리를 내는, 이제는 고쳐 줄 사람도 없는 좁은 나무 계단을 올라가자, 겨우 싱글 매트리스 하나와 앉은뱅이 탁자 하나를 들여놓은 제 공간이 보였다. 새집이라고 아빠가 새로 사다 줬던 시골 장날 티가 물씬 나는 핑크색 꽃무늬가 가득한 이불도 보였다.
그리고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나무창이 보였다. 그 무뚝뚝하고 분위기라고는 한 조각도 없는 아빠의 로맨틱함을 엿본 거 같이 당혹스러웠던, 그린 게이블스의 앤의 다락방 창문처럼 위로 올려 열고 중간에 굄대를 고정시켜야 하는 나무창이 눈에 들어오자 혜진은 저도 모르게 침대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수히 많은 먼지들이 또다시 발악을 하면서 공기 중에 퍼져 가을 햇살을 어지럽혔지만 혜진은 화장터에서 다 말라 버렸다고 생각했던 눈물 덕분에 그것들을 보지 못했다.
가을 해는 짧았다. 잠시 넋을 놓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너무 낯선 적막에 정신이 공황 상태였는지도.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 로맨틱한 창으로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배 속의 허기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적막이었다. 나무 집의 끼그덕거리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이 적막을 참을 수 없었던 혜진은 일부러 쿵쿵 발소리를 내며 나무 계단을 내려섰다.
그러나 이 낯선 적막 속의 타인은 그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아니면 무시하려는 참이었는지 여전히 두꺼운 코트가 구겨지는 것도 모른 채 먼지투성이일 게 뻔한 나무 소파의 담요 위에서 꼼짝도 없이 누워 있었다.
사지육신은 멀쩡하다고 했지.
혜진은 어스름이 더 내려앉기 전에 문을 나서야 했다. 은진을 만나야 하니까. 적어도 제 통장 잔고가 얼마나 저를 견디게 할지 의심스러울 만큼 빈약했으니 오너가 될지도 모르는 친구를 만나는 게 그녀에겐 가장 급한 일이었다. 이 ‘환자’ 따위보다. 혜진은 급하게 문을 나섰다.
“그래서 결국 헤어진 거야?”
“글쎄.”
은진이 그녀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정말 인간성하고는. 너 경훈 씨 때문에 일 시작한 거 아니었어? 공부 그만두고?”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둘 다 밥 한 끼 사 먹을 수 없는 데이트는 비참했으니까.
“내가 그 바닥에서 아직까지 공부를 했다 한들 시험에 붙었겠니?”
밑바닥이 타들어 가는 고기를 뒤집으면서 말간 액체를 넘겼다. 찬 기운이 가신 액체는 뒤끝이 썼다. 재빨리 야채절이를 집어넣어야 했다.
“뭐 그 시험이 실력으로 되는 거니? 다 운이지.”
“…….”
운이 나빴을 뿐이야. 혜진은 차마 뒷말을 붙이진 못했다.
“일하는 선생님이 나간다고는 했는데, 내가 말해 볼게. 너 면허 있지?”
“응. 있어.”
“운행도 해야 해. 가끔 나 대신.”
“시켜만 주면 다 할게.”
혜진은 다시 빈 잔을 채웠다.
“그래도 집은 있어 다행이다. 그지? 니네 집 좁아서 그렇지 예쁘잖아. 쭉 비어 있었겠다. 그지?”
홀라당 팔렸어, 라고 말을 해야 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은진과 자존심 세울 사이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 니네 집에 가서 살까? 나 그런 집에서 사는 거 소원이었는데. 거기 다락방 엄청 예쁘잖아.”
술이 올라 새빨개진 얼굴을 한 은진이 웃으면서 말했다. 혼자 학원을 하느라 고생이 심했는지 지워져 가는 화장 밑으로 시커먼 기미가 보였다. 혜진은 한참 망설여야 했다. 어차피 알게 될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