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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트 블뤼테 1화
프롤로그


이시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끙, 하고 낮게 신음했다. 아까부터 자신의 몸을 옥죄어 오다 못해 은밀한 곳까지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는 라네프의 육체에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질척질척하고 끈적거리는 점액이 그의 허벅지 안쪽을 적셨다.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그저 낮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시스는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적시던 촉수가 기이한 형태로 변하기 시작하자 다시금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몸 전체를 휘감고 있던 촉수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그의 손바닥만큼 작아졌다. 언뜻 보면 액체 같기도 하고 고체 같기도 한 라네프의 일부는 이내 꾸물거리며 다시금 다른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음?”
한참을 꿈틀거리던 일부는 어느새 작은 짐승으로 변해 있었다. 귀가 뾰족하게 쫑긋 서 있고 눈은 날카로우며 온몸에 털이 나 있었다. 귀 옆에 달린 뿔을 제외하면 인간계에 흔히 널리고 널린 고양이라는 짐승과 엇비슷했다.
물론 입을 다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턱 밑으로 튀어나온 날카로운 송곳니, 그리고 등 쪽에 달린 날개 등을 보면 고양이와는 거리가 멀지만.
짐승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이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짐승을 내려다보았다. 하찮은 마물이라기엔 라네프의 육신이다. 그렇다고 온전한 라네프라고 하기엔 저 짐승은 라네프에게서 느껴지는 고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 됐든 대하기 껄끄러운 생물체라고 생각하며 이시스는 애써 짐승의 눈빛을 외면했다. 온몸을 적시고 있던 끈적거리는 점액을 마법으로 깨끗이 없앤 후 옷을 주워 입은 그는 말없이 침대 위에 다시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었다.
고위 마족은 잠을 자지 않아도,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아도 딱히 문제 되지 않는다. 물론 먹이를 먹거나 잠을 자면 컨디션이 최상이긴 하겠지만, 시간 낭비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고위 마족들은 잠을 자지 않았다. 하지만 이시스는 달랐다.
그는 꼬박꼬박 잠을 자는 것에 집착했다. 지금도 잠을 자고 싶은데 라네프의 육신이 끈질기게 괴롭히며 방해하는 탓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어서 푹 잔 후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던 찰나, 몸을 묵직하게 누르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니 짐승이 자신의 배 위에 올라타 있었다. 짐승은 머리를 그의 배에 툭 얹고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그릉그릉 기분 좋다는 듯 목을 울려 댔다.
고작 자신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작은 짐승을 내쫓을 정도로 냉정하진 못했던 이시스는 다시금 귀찮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몸을 휙 돌렸다. 데굴, 하고 침대로 나뒹군 짐승은 두 눈을 깜빡이다가 하품을 쩍 하며 그의 등에 몸을 딱 붙이고 엎드렸다.
이젠 정말로 잠을 자야지. 꿈속에서만큼은 지긋지긋한 라네프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하려던 이시스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익숙하고 묵직한 기운에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주무시려고요?”
“…….”
어느새 그가 침대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이시스는 천천히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네프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시스의 감정 없는 눈동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띠었다.
“당신이 작고 약한 동물에 약하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래서 네 육신을 저 귀찮은 핏덩어리로 만들었던 거구나.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싶었으나, 이시스는 애써 참으며 속으로 그에게 욕설을 날렸다. 저 능글맞은 얼굴에 침을 뱉어 버린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표정 변화 없는 이시스의 모습에도 다 안다는 듯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시스는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이 소름 끼치고 두려워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의 손길을 피한다면, 그 순간부터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잘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라네프를 바라보던 이시스의 얼굴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놀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던 이시스는 다시금 얼굴을 굳혔다. 아니, 믿어서는 안 된다. 그가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를 일이다.
그런 이시스의 머릿속이 뻔히 보인다는 듯 그는 다시금 입꼬리를 올렸다. 머리를 쓸어내리던 손이 천천히 이시스의 입술로 움직였다. 이시스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꾹 누르는 그의 행동에 천천히 입을 벌렸다. 수없이 받아 온 교육의 성과였다.
라네프는 기특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이시스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로 다가오는 라네프의 입술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입술과 혀가 뒤엉키는 끔찍한 감각에 거부감이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몸을 깔아 누르고 있던 그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항상 벅차던 폭풍처럼 방 안을 꽉 채우고 있던 그의 기운 또한 눈 녹은 듯 깨끗이 사라졌다.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던 이시스는 다시금 벽 쪽으로 몸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이제, 정말 자야지.
그때, 라네프의 기운에 두려움을 느끼고 침대 밑으로 몸을 숨겼던 짐승이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킁킁 냄새를 맡으며 침대 위로 올라온 짐승은 다시금 이시스의 등에 몸을 딱 붙이고 몸을 둥글게 말며 눈을 감았다.



01화 - 그 꼴통 (1)


이시스는 인간이었다. 그는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사인은 낭떠러지 추락사였다.
별다른 굴곡 없는 인생이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공부하고 수도 도서관에서 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그저 흔하디흔한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고작 서른둘의 나이로 어이없이 죽어 버린 것 외에는 특별한 능력도 없고, 살면서 대단한 경험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평범하디평범한 그가 고위 마족으로 환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수백 번의 윤회를 거치고도 죄를 짓지 않아 깨끗했던 영혼 덕분에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 그가 마족을 선택한 것은 절반 이상이 변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이시스는 평범하게 살아가면서도 악마 혹은 마족이라는 종족과 그 세계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가 살던 세상에선 마족이란 존재는 흔히 악마라고도 불리며 인간의 생기를 빨아먹고 사는 악한 존재라고 알려져 있었다.
본능만이 존재하는 짐승과도 다를 바 없고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며 살려 둘 가치가 없는 괴물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족이란 존재가 사실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나라를 이루어 살았으며, 그 속에서도 계층이라는 게 존재했다. 마계의 세계관에 대해 알게 된 이시스는 그들이 그저 인간보다 능력이 더 뛰어나며 더 잔인하고 악독하다는 것을 제외하곤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한 번쯤 겪어 보고 싶었다. 결국 이시스는 마족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택했고, 운 좋게 마물이나 종(하급 마족)이 아닌 고위 마족으로 환생할 수 있었다.
전생의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깨끗한 영혼 때문에 이시스는 마족으로 태어난 뒤에도 마족의 특성과는 거리가 먼 돌연변이에 가까웠다.
그저 마력을 취하기 위해 먹이를 먹어 치우는 마족들과는 다르게 음식과 요리를 즐기고, 수면을 취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고위 마족답지 않게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잠을 잤다.
하찮은 마물과 종들을 기분 내키면 찢어 죽이는 동족들과는 사뭇 달랐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살생하지 않으며 그걸 즐기지도 않았고 오히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마족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돌연변이였던 이시스를 그의 부모는 눈엣가시, 내놓은 자식으로 여겼다. 흔히 인간들에게 존재하는 온정이나 연민, 애정 등의 감정이 결핍 수준인 마족들에겐 부모 자식 간의 유대감 따위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자식에게 애정을 쏟는 마족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 또한 자식이 성체가 되고 나면 대부분이 남이나 다름없었다.
이시스가 성체가 된 후 자신의 성을 갖고 독립한 지 딱 50년이 되었을 때였다. 모든 고위 마족은 마왕의 명령을 받으면 그것을 이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마계의 계층은 일단 마족들의 아버지인 마왕, 그리고 각 지역을 통치하는 마공, 고위 마족, 고위 마족들의 수하나 다름없는 중상급 마족, 그리고 마물보다는 높고 언어나 이성 등이 존재하지만 종이라 부르는 하급 마족, 마지막으로 마물 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공이 마왕 다음으로 지위가 높다고는 하나 수가 적으며 능력이 비슷한 고위 마족들과는 동등한 위치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마공이라는 자리 자체가 고위 마족 중에서 선별하여 앉히는 데다가, 우두머리를 제외하곤 비슷한 힘을 가진 자들끼리는 위아래를 나누지 않는 종족 특성상 마공과 고위 마족들은 같은 위치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었다.
마계를 의무적으로 통치해야 하는 마공과는 다르게 고위 마족들은 그저 특별한 일이 있거나 직접적인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이상 개입하거나 나서지 않았다.
이시스 또한 자신의 성에서 무료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인간과 계약을 맺거나 유희를 떠나는 것으로 지루함을 달래는 동족과는 달리 그는 그저 자신의 성에서 책을 읽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었다.
이시스의 나이는 350세로, 인간의 나이로 환산하면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마왕은 다짜고짜 이시스에게 왕자의 가정교사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그의 편안하고 안락했던 일상생활은 그야말로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10~20년 만에 알에서 태어나 100세가 넘으면 성체가 되는 마물이나 중상급 마족들과는 달리 고위 마족들은 알 속에서 100년간 성장한 후 태어난다. 그리고 다시 200년간 성장을 한 후 300세가 되면 완벽한 성체가 되는데, 처음 알에서 태어난 고위 마족은 그야말로 본능만이 존재하는 짐승과도 같았다. 때문에 살욕, 식욕, 수면욕만 존재하는 흉포한 어린 개체는 부모가 적절히 조절하며 육아를 맡아야 했다.
본능대로 먹고 부수기만 하는 것이 어린 마족이 하는 일이었다. 고위 마족의 마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위 마족의 성장에 이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담을 그릇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불완전한 육체로 성체가 되어 그 힘을 담는다면 몸이 갈가리 찢어지고 말 것이다. 최소한 수천의 마물과 종을 상대할 만한 힘을 가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했다.
물론 이시스 또한 300년이라는 성장의 시간을 보낸 후 성체가 되었다. 보통 성체가 되고 나면 대부분의 마족들은 성체가 되기 전의 기억을 잃는다. 9할 정도가 그러했다.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 성체가 되는 고위 마족은 소수였다.
이시스가 그 소수 중 하나였다. 이제 겨우 성체가 된 후 50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꼼짝없이 마왕자의 보모가 되게 생겼다. 고위 마족은 어린 개체를 대부분이 부모가 돌보지만, 왕족들은 달랐다. 마왕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왕족의 보모 노릇은 고위 마족들 중 한 명이 맡게 된다.
‘왕으로서 일이 바빠 그렇다’고 갖다 붙이지만 사실 ‘먹고 자고 난폭하기만 한 어린 마족을 돌보는 일이 귀찮아서’라는 이유가 90%일 것이다. 이시스는 그런 마왕자를 돌보는 고위 마족으로 운 없게 발탁된 것이다.
어쩌겠는가, 마왕의 명령인데. 울며 겨자 먹기로 이시스는 마왕성으로 향했다. 이미 마왕은 싸질러 놓은 제 자식에겐 관심조차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이리저리 놀아나기 일쑤였다. 왕자를 돌보는 일은 고스란히 이시스의 몫이 되었다.
처음 마왕자를 접한 이시스는 자신이 맞이할 200년에 애도를 표했다. 아아, 나는 꼼짝없이 200년이란 세월을 지옥에서 보내야겠구나. 마왕자 라네프는 상상 이상으로 난폭, 아니 흉포했다.
이시스를 보자마자 왕자는 그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이미 성에서 일하는 상급 마족 몇을 죽였다는 보고를 들은 그는 차기 마왕의 힘이 생각보다 강할 것이라 추측했다. 아무리 왕족이라지만 태어난 지 10년도 안 된 갓난아이에 가까운 어린아이가 상급 마족을 죽였다면, 성체가 된 후엔 그 힘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고위 마족 중에서 이시스는 그리 힘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원래 성격 자체가 살생을 즐기지 않는 데다가 고위 마족치고는 약한 육체 때문에 고위급 중에선 최하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마왕의 핏줄이라 할지라도, 핏덩어리 하나 제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고위 마족 중에서 약한 편이었으니까.
모든 마족은 한낱 마물이라 할지라도 특유의 마력을 지닌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는 먹이나 노리개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마족들은 동족을 먹고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점점 강해지는 존재였다.
고위 마족들은 200년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먹이를 섭취한다. 웬만한 상급 마족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이성이 없어 마물에 해당하는 마족들이 주식이었다.
먹이를 먹은 후에는 그 힘을 흡수한다. 흡수 중의 어린 개체는 먹이를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보통 고위 마족이나 왕족들은 힘이 강한 상급 마족급 먹이를 섭취한 후엔 거의 반년간을 흡수하는 데 사용했다. 그 때문에 많은 고위 마족들은 조금 힘겹더라도 힘이 강한 마물을 사냥하곤 했다. 흡수 기간엔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시스 또한 강한 힘을 가진 먹이를 사냥해서 먹이면 조금이나마 편안할 거라는 계산을 하곤 그에 이행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대로 평탄히 흘러가질 않았다. 아무리 강한 먹이를 먹여도 마왕자 라네프는 1, 2주 만에 먹이를 더 갖다 바치라며 날뛰었다.
꼬박꼬박 먹이를 사냥하는 데에 지친 이시스는 참다못해 발광하며 마왕을 찾아다니기에 이르렀다. 이시스의 어머니는 그가 성체가 된 후 그리 난폭하게 군 건 처음 봤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마왕자의 육체가 너무 강해 이시스 하나로는 감당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마왕은 보모 하나를 더 붙여 주었다. 그렇게 이시스는 200년이라는 세월을 사냥만 하면서 보냈다. 200년 동안 피 냄새를 질릴 정도로 맡다 보니 이제 살육은 지긋지긋했다.
이제 몇 년만 지나면 이 지긋지긋한 보모 노릇(이라고 적고 먹이 사냥꾼이라고 읽는다)도 끝이구나. 그 생각을 하자 저 빌어먹을 꼬맹이가 조금은 귀여워 보이는 것도 같았다.
마왕자는 그가 사냥해 온 먹이들을 모조리 먹어 치운 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고위 마족이라고 해도, 상급 마족에 버금가는 마물들을 몇 주 간격으로 사냥하려면 많은 양의 마력이 필요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이시스는 라네프를 바라보며 나른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들어 있을 땐 천사라고 말해도 믿을 것 같다. 핏기 없는 창백한 피부에 분홍빛 생기만 돋는다면 천족에 버금가는 미모였다.
물론 고위 마족들은 다들 우월한 외모를 자랑했지만, 마왕자는 그 급이 달랐다. 성체가 되고 나면 얼마나 잘생겨질까. 고작 200년 가까이 보모 노릇을 했다고 엄마라도 된 것인지, 이시스는 고개를 저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시스.”
낯익은 기운이 방 한쪽에 몰아치고, 이윽고 이시스와 함께 마왕자 보모 노릇을 하고 있는 아가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켜뜬 이시스는 그를 바라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저 망할 놈의 자식. 아가온은 라네프가 유독 이시스에게만 집착 수준으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이처럼 수시로 모습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수시로 튀었다.
사냥감만 던져 준 후 튀어 버리는 아가온 때문에 보모 노릇은 이시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말이 보모지, 아가온은 먹이를 사냥해 오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었다. 혹시 모를 불상사 때문에 마왕자의 곁을 지키는 것도, 난폭하게 사고를 치는 왕자의 뒷감당도 모두 이시스의 몫이었다.
그런 아가온이 이시스는 너무나도 얄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얄미운 것은,
“보고 싶었어, 자기.”
“꺼져.”
이처럼 소리 소문 없이 없어졌다가 나타나선 노골적으로 치근덕댄다는 것이다. 1년 만에 나타나 놓고, 뭐가 어쩌고 어째? 이시스의 붉은 눈동자에 살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시스의 가는 허리를 팔로 감으며 그의 목에 입을 맞추던 아가온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냉정하네.”
“터진 입이라고 잘도 나불거리지?”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듯 이시스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런 이시스의 살벌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아가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애정표현을 해 댔다.
사실 이시스와 아가온은 옛날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아가온 또한 고위 마족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파란 나이였다. 그는 이시스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다.
서로의 성 또한 가까운 곳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었다. 가까운 것보단 아가온이 무단으로 이시스의 영역에 침입했던 이유가 컸지만 말이다.
보통 고위 마족들은 무단으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예민했다. 지금이야 서로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 전 먼저 전서를 보내거나 종을 보내거나 둘 중 하나를 필수적으로 지키지만, 예전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래서 고위 마족들의 싸움이 커지자 마왕이 ‘그럼 너네도 간 보고 왔다 갔다 하든가.’라면서 법을 정해 주었다. 인간들도 아니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원성이 자자했지만 실제로 침입 문제 때문에 귀한 인재 하나가 죽어 나간 사건 때문에 규칙을 정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통하는 종족이 아니었기에 딱히 정해진 법 따위는 없었지만 그들에게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은 몇 있었다. 그중 하나가 타 영역에 무단을 침입하지 말 것이었는데, 그 또한 당사자가 조용히 넘어가기만 한다면 별문제 없었다.
이시스는 살육을 즐기지 않는 성격 때문에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아가온을 그냥 무시했다. 고위 마족씩이나 되어서 인간들이나 볼 법한 책이나 읽고 앉아 있는 이시스에게 흥미를 느낀 아가온은 그 후로 노골적으로 이시스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이시스가 라네프는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된다고 마왕에게 하소연하고 나서, 마왕이 두 번째 보모를 물색하던 때였다. 아가온이 마왕자의 보모 노릇을 스스로 청하기까지 했다.
“하지 마. 꼴통 깨.”
“지금 기운으로 봐선 최소 두 달은 안 일어날 것 같은데?”
“믿으면 안 돼. 안심했다가 저놈한테 뒤통수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자신에게 몸을 붙이며 노골적으로 옷 안을 헤집는 아가온의 행동에 이시스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밀어냈다. 마족은 개체마다 욕구를 느끼는 타입이 다양했는데, 아가온은 그중에서도 색욕이 왕성한 편이었다.
덕분에 색욕에는 별 관심이 없던 이시스마저 휘둘릴 정도였다. 오랜만에 이시스의 아름다운 몸을 취할 생각에 들떠 있던 아가온은 노골적으로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