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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트 블뤼테 2화
01화 - 그 꼴통 (2)
어쩔 수 없었다. 너무도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러게 누가 1년 동안 잠수를 타래? 만약 아가온이 1년간 자신과 함께 보모 노릇을 열심히 해 주었다면 얼마든지 대 줬을 것이다. 대 주기만 하겠나? 아마 입으로도 해 줬을 걸?
그렇게 튀어 버린 후 1년 동안 감감무소식일 땐 언제고, 나타나자마자 하자고 들러붙는데 마음이 동해도 괘씸해서 상대해 주기 싫었다.
“잘 됐다. 너 꼴통 좀 봐. 나 잠 좀 자게. 저거 언제 사고 칠지 몰라. 저번처럼 폐하께서 아끼는 장난감 하나 망가트렸다간 내가 죽어난다고.”
“또 자?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또? 너 또라 그랬어? 내뺀 누구 덕분에 1년 동안 단 한 시간도 못 잤는데, 또?”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죽여 버리겠다는 듯 이시스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짓궂게 입꼬리를 올린 아가온은 마치 고귀한 레이디를 모시듯 깍듯한 자세로 문 쪽을 향해 손짓했다.
소리 내어 콧방귀를 뀌어 준 후 이시스는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침대 쪽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기운만 아니었더라면. 고개를 돌리자 곤히 잠들어 있던 라네프가 상체를 일으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꼬맹이답지 않은 위압감을 풍기며 이시스를 바라보는 마왕자의 모습에 아가온은 혀를 내둘렀다. 징글징글한 놈. 고작 300살도 안 된 애송이가 이런 기운이라니. 기운만 보면 여느 고위 마족 못지않았다.
이제 몇 년만 있으면 성체가 될 마왕자는 알을 깨고 나왔을 때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열둘 정도 되는 사내아이와 엇비슷했다.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뿜으며 도통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라네프의 모습에 이시스는 본능적으로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엄연히 말하면 라네프의 힘은 지금도 이시스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마왕은 자신을 닮아 능력이 특출하다며 자화자찬했다.
만약 라네프가 마음먹고 이시스를 죽이고자 한다면 이시스는 그를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쩐 일에선지 마왕자가 이시스를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공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300살에 가까워지자 이성이란 것이 조금이나마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시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부수려 했던 어린 시절이 더 좋았다. 지금의 마왕자는 예전보다 얌전하긴 하지만, 눈에 띄게 불어난 힘 때문에 어째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라, 깼네. 그럼 난 가 봐도 되지?”
“뭐?”
“난 먹이나 사냥하러 갈게. 그럼 나중에 봐, 자기.”
“뭐?! 잠깐! 아가온! 야, 이 망할 자식아!”
쪽, 하고 이시스의 볼에 베이비키스를 날린 아가온은 순식간에 방 안에서 사라졌다. 라네프와 단둘이 남겨진 이시스는 진심으로 성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망할.”
***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라네프의 나이가 300살에 가까워지자 자신에 대한 집착이 늘어 가는 것 같았다. 이시스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라네프는 처음엔 이시스를 보자마자 적의와 파괴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집착 증세를 보였다. 예를 들어 잠에서 깨어났는데 이시스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발광을 하며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망가트렸으며, 방에서 탈출해 복도를 거닐던 종 몇을 찢어 죽였다.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거의 폭주 수준이었다. 고작 1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시스 혼자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제발 진정하라고 비는 쪽에 가까웠다.
그나마 다행 중 다행인 것은 이시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르고 달래면 얌전해진다는 것이었다. 어르고 달래기가 통하는 존재는 이시스 단 하나였다. 친아버지인 마왕의 말조차도 안 듣는 라네프가 이시스의 말이라면 귀를 기울인다는 점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요즘 들어 도통 잠을 자지 않는 라네프 때문에 이시스는 피곤해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마 진짜로 그렇게 죽어 버린다면 과로사로 죽은 최초의 고위 마족이라고 온 세상에 알려져 비웃음거리가 되겠지.
망할 놈의 꼴통 꼬맹이 때문에 단골 술집마저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내내 곁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이시스의 욕구 불만은 나날이 늘어 가고 있었다.
이시스는 미간을 좁히며 잠들어 있는 라네프를 내려다보았다. 낮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로 돌아가 풀썩 몸을 눕힌 그는 말없이 멍하게 천장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도 보이는 족족 라네프가 찢어발기는 바람에 가져올 수도, 읽을 수도 없었다. 마왕을 물리치는 용사, 절절한 사랑 이야기 등의 소설이란 책은 마계에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계에 내려가 직접 구해 와야 했다.
그런 귀한 책들을 소환해서 읽다가 어떤 사달이 날지 몰라 유일한 취미인 독서마저 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안겨 준 마왕에게 속으로 쌍욕을 날리던 이시스는 똑똑, 하고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뾰족한 귀를 쫑긋거렸다.
“이시스 님, 접니다.”
집사 아메나크였다. 그는 흔한 마족답지 않게 온화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노 집사였는데, 유일하게 이시스가 마음을 놓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전대, 전전대, 전전전대, 전전전전대 등등의 마왕들을 전부 모셔 왔던 아메나크는 그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는 마신의 육신 일부일 것이다, 마신 본인일 것이다 등등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기본적으로 고위 마족의 수명은 대략 3천 살, 마왕의 경우는 3천에서 4천 정도이다. 그러니까 아메나크는 적어도 1만 살은 거뜬히 넘는다는 거다.
그런 그에 비하면 이제 고작 500살이 넘은 이시스는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변함없이 극진하게 왕을 모시는 아메나크를 이시스는 쭉 동경해 왔다. 성은 내팽개치고 이리저리 놀러 다니는 마왕보다 훨씬 더.
“일은 무사히 마치셨습니까?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네요.”
“이것저것 걱정이 되어서요. 전하께서는 별일 없으십니까?”
“별일 없었겠어요? 아메나크 님이 자리 비우신 동안 죽어 나간 종이 열이 넘습니다. 저도 왼팔이 뜯겨 나가서 재생하는 데에만 열흘이 걸렸다고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듯 이시스는 이를 으득 갈았다. 정말 생각할수록 열 받는다. 먹이를 양껏 먹은 후 잠들어 있는 꼴통을 놔두고 아주 잠깐, 단 몇 시간 동안만 자리를 비웠던 적이 있었다.
때마침 마왕성에서 가까운 곳에 꽤나 강한 마물이 어슬렁거린다는 소식을 듣고 웬 떡이냐 싶어 먹이 사냥을 나갔었다. 기본적으로 마물들은 마족의 도시에서 거리가 먼 곳에서 둥지를 만들고 살아가는 편이었다.
마족의 마을과 가까운 곳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상급 또는 고위 마족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저승행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짐승에 가까운 마물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생존본능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결국 마물들은 마을이나 도시와는 거리가 먼 숲에서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그런 마물 중에서도 마력이 높은 마물이 마왕성 주변을 어슬렁거린다는 건, 고깃덩어리가 저절로 입으로 굴러들어 오는 거나 다름없었다. 상급 마족에 버금가는 마물은 그 수가 적어서 찾는 것도 힘들었기에 이시스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푹 잠들어 있는 라네프가 설마 몇 시간 내로 깨겠어, 하고 안심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사냥을 마친 후 그 마물이 가진 마력을 모두 마물의 심장에 압축시켜 옮겼다. 심장을 갖고 돌아오자마자 열렬히 반기는 라네프 때문에 결국 그날, 이시스는 왼쪽 팔을 잃었다. 물론 열흘 만에 모두 재생했지만.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린다. 망할 놈의 자식,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자신이 없다고 그렇게 불만을 표출하다니. 만약 자신이 고위 마족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외팔이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괘씸해 죽겠다.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물을 하나 가지고 왔지요.”
“선물?”
아메나크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펼쳐 보았다. 그의 손 주변 허공이 몇 초간 비틀리기 시작하더니, 비어 있던 손바닥 위에 붉디붉은 홍옥 하나가 생겨났다.
홍옥은 여인네의 주먹 하나 정도의 크기였는데, 얼핏 봐도 그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단번에 저 빨간 공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시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뭡니까?”
“카르마나 님의 피입니다. 사실 자신의 수명을 늘리는 데 쓰려고 하셨는데, 전하께 주신다고 하네요. 강력한 슬립 마법이 걸려 있어서 섭취한 다음엔 적어도 500년은 일어나지 못할 겁니다.”
‘500년’이라는 단어에 이시스의 귀가 쫑긋거렸다. 카르마나는 마신의 이름이었다. 대충 봐도 어마어마한 기운이 감돈다 싶었는데, 설마 마신의 피일 줄이야.
그나저나 마신의 피라니, 정말 알아차리고 나자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그 무시무시한 걸 태연하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다니. 새삼 아메나크가 더 대단해 보였다.
“500년 씩이나?”
“정확하진 않지만, 어쩌면 더 길 수도 있습니다. 카르마나 님의 힘 덕에 마법의 효과가 더 극대화될 확률도 있으니까요. 그보다 더 길 수도 있겠죠. 성체가 되신 후에도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카르마나 님의 피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니까요.
다만, 폐하의 수명을 늘릴 수준이라면 그 정도는 걸릴 겁니다. 이시스 님이 정하실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땐 폐하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아메나크의 말을 듣자마자 이시스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500년이라니. 그 정도면 아직 8년이라는 시간이 남은 보모 생활이 지금부로 끝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정말? 정말일까? 하지만 마지막 말이 심히 거슬린다. 차라리 바닥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믿을지언정 현 마왕은 안 믿는 게 이시스였다. 그래도, 명색이 마신의 피인데 한낱 상급 마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겠지?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해방되셨네요.”
지금이야 ‘전하, 전하.’ 하고 꼬박꼬박 라네프를 깍듯이 칭하지만, 평소 이시스가 마왕자를 부르는 호칭이 ‘꼴통’에다가 남몰래 코를 꼬집거나 막는다든지, 몸을 뒤집는다든지 하는 귀여운 행동으로 불만을 표출한다는 것을 아메나크는 잘 알고 있었다.
왕자가 유독 이시스에게 집착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내심 안쓰러웠다. 마신의 피는 그런 이시스에게 특별히 내리는 마왕의 선물 같은 거였다.(사실 삶이 너무 지루해서 수명을 더 늘리기는 싫고, 그렇다고 마신의 피를 소멸시키자니 아깝고, 놔두자니 처치 곤란이라 대충 아들에게 버린 것에 가까웠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8년이나 단축된 보모 생활에 이시스는 너무도 행복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낙이 아니라 지옥에서의 해방 정도겠지만.
“아, 깨셨습니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이시스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얌전히 잠들어 있던 라네프가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똑같은, 감정 없는 그 시선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불안했다.
혹시 아메나크 님과의 대화를 다 엿들은 건 아니겠지? 저 꼬맹이가 자신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자길 잠들게 한 후 도망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사고를 칠지 몰랐다.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이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네프가 평소와 다름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걸어와 옷자락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아메나크와의 밀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듯싶었다.
이시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능숙하게 라네프를 안아 들었다. 라네프 또한 익숙하다는 듯 이시스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아메나크는 이시스의 품에 안긴 채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어 대는 어린 마왕자의 모습에 허허 웃음 지었다.
자신에게 살기를 드러내면서도 두 눈은 끊임없이 이시스를 좇는다. 역대 마왕 중 이토록 특정 인물에게 집착과 관심을 보이는 왕자는 없었기에 아메나크 또한 신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깨셨습니까? 좀 더 주무시지.”
망할 꼴통. 왜 이리 빨리 깨고 난리야. 마신의 피는 어떻게 흡수시키는 건지, 잠들고 나면 곧바로 내 성으로 돌아가도 되는 것인지 등등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는데.
이시스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겉으로는 방긋 웃으며 라네프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자가 보면 아주 다정한 아버지로 볼 법한 광경이었다. 물론, 아버지라 칭하기에 이시스의 외모가 매우 아름답고 어리긴 하지만.
“악!”
애써 부드럽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더니만, 돌아오는 건 두피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이었다. 라네프가 이시스의 탐스러운 금발을 손으로 잡아당긴 것이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이시스는 당겨지는 머리카락에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보통 인간들은 마족은 흑에 가깝고, 천족은 백에 가깝다고 알며 천족들은 다 금발에 은발, 마족들은 다 시커먼 피부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물론 천족들은 대부분이 밝은 피부와 밝은 머리 색, 밝은 눈동자를 가지긴 했지만 마족들은 아니었다. 천족과는 달리 다양한 생김새와 색깔을 지니는 게 마족이었다. 천족들은 그들의 계층인 하층민부터 천사장까지 전부 인간에 가까운 외모를 지녔지만, 마족은 아주 다양했다.
인간이 보면 그대로 쇼크사할 만큼 흉악하게 생긴 마족도 있었고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마족도 있었다. 물론 고위 마족은 전부 아름답고 인간의 형태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인간들이 흔히 생각하는 ‘성스러운 색깔, 사악한 색깔’ 등 색깔에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이시스의 금발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며, 살짝 생기 있어 보이는 피부는 멋모르는 인간이 보면 딱 천사라고 오해할 만한 생김새였다. 라네프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과 다른 머리 색에 흥미를 느낀 것인지 그는 연신 이시스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악, 아, 아픕니다!”
마음 같아선 마법으로 제압하고 싶었으나 이미 라네프는 자신의 힘을 능가했다. 힘을 썼다가 오히려 당할지도 모른다. 내심 마음속으로 라네프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이시스는 라네프가 잡아당기면 잡아당기는 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시스를 구해 준 건 다름 아닌 아메나크였다.
“전하, 진정하시지요.”
양손을 들고 진정하라는 듯 손짓하며 다가오는 아메나크의 모습에 라네프는 눈동자를 빛냈다. 노골적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마왕자의 모습에 아메나크는 곤란하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다가가면 당장이라도 공격할 만한 기운 때문에 아메나크 또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역대 마왕들을 오래 모신 전적이 있다 할지라도 차기 마왕이 될, 이제 성체에 가까워진 마왕자를 제압할 만한 힘이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메나크 님, 좀 도와주시죠? 이러다가 머리카락 왕창 뽑히겠습니다!”
“흠,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전하께서 흥미를 잃으실 때까지 이시스 님이 참는 방법밖에는. 아까 한 말 기억나시죠? 그러니 조금만 참으세요.”
‘곧 마신의 피를 흡수시키고 널 해방시켜 줄 테니 조금만 참으라.’는 아메나크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이시스는 젠장, 하고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성을 오래 비워 둔 탓에 처리할 일들이 또 생겼다며 자리를 비운 아메나크 덕분에 이시스는 또다시 마왕자와 단둘이 남겨졌다. 여전히 라네프는 이시스의 머리칼을 붙잡고 놔주지 않고 있었다.
지금처럼 얌전히 잡고만 있으면 오죽 좋을까. 수틀리기만 하면 세게 잡아당기는 통에 이시스의 혈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이시스는 이를 갈며 이 망할 꼴통이 머리카락을 놔주고 나면 당장 짧게 잘라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배는 안 고프십니까? 갈증은요? 좋아하시는 글루돈 족의 피를 대령할까요?”
“…….”
“잘 드셔야 잘 크시죠. 좀 드세요.”
“…….”
“안 졸리십니까? 악!”
어떻게든지 자신을 떼어 내려고 안달복달하는 이시스를 라네프는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간단히 묵살했다. 덕분에 이시스는 거의 사흘 동안 꼼짝없이 마왕자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발 머리카락 좀 놔주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먹이는 왜 안 먹는다고 고집인지. 설마 진짜 엿들은 게 아닐까? 아니, 아니다. 정말로 엿들었다면 이렇게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그칠 리가 없지. 아마 진즉 목이 꺾였을 것이다.
일하던 종들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뒤 이시스는 라네프를 안고 정원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마왕의 취향인 푸른 장미가 지천으로 널린 이 정원은 이시스 또한 매우 마음에 들어 하는 곳이었다.
기분이 내킬 때마다 자신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라네프 때문에 이시스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이시스는 벤치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빨리 이 망할 꼬맹이에게 마신의 피를 흡수시켜야 하는데. 이렇게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덕분에 이시스는 최근 사흘이 300년처럼 느껴졌다. 라네프가 마신의 피를 흡수해 잠들고 나면 당장 해방되는데. 하루빨리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는 온몸이 근질거렸다.
“그렇게 제 머리카락이 마음에 드십니까? 당장 잘라 드릴까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던 이시스는 다시금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기는 라네프의 행동에 빽 비명을 질렀다. 뭐야, 잘라 준다니까 그것도 싫다는 건가?
“마음에 든다면 잘라 드린다 한 것뿐인데 왜 또 잡아당기십니까? 악!”
이런 젠장. 이 망할 꼴통 꼬맹이가 진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이시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계속해서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에 불만을 가진 것 같았다.
“안 자르겠습니다. 안 자르면 되잖아요. 그러니 그만 좀 잡아당기세요. 진짜 아픕니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겠다는 이시스의 말에 라네프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시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 자르기는 개뿔. 당장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짧게 잘라 버릴 테다.
“앗, 전하. 저기 좀 보십시오. 임프입니다.”
“…….”
“귀엽죠? 아, 이쪽으로 온다.”
임프는 성인의 손바닥 크기 정도의 정령으로, 특이하게도 마계에서 살아가는 정령이었다. 마정령이라고도 불리는 임프는 그 생김새가 아주 우스꽝스럽게 생겼다. 매부리코에 울퉁불퉁한 얼굴과 날카로운 손가락 등.
임프 또한 마계에서는 마물로 취급하지만, 마족들의 눈에 띄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 유일한 마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인간계로 비교한다면 마물들은 해충, 임프는 나비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01화 - 그 꼴통 (2)
어쩔 수 없었다. 너무도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러게 누가 1년 동안 잠수를 타래? 만약 아가온이 1년간 자신과 함께 보모 노릇을 열심히 해 주었다면 얼마든지 대 줬을 것이다. 대 주기만 하겠나? 아마 입으로도 해 줬을 걸?
그렇게 튀어 버린 후 1년 동안 감감무소식일 땐 언제고, 나타나자마자 하자고 들러붙는데 마음이 동해도 괘씸해서 상대해 주기 싫었다.
“잘 됐다. 너 꼴통 좀 봐. 나 잠 좀 자게. 저거 언제 사고 칠지 몰라. 저번처럼 폐하께서 아끼는 장난감 하나 망가트렸다간 내가 죽어난다고.”
“또 자?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또? 너 또라 그랬어? 내뺀 누구 덕분에 1년 동안 단 한 시간도 못 잤는데, 또?”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죽여 버리겠다는 듯 이시스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짓궂게 입꼬리를 올린 아가온은 마치 고귀한 레이디를 모시듯 깍듯한 자세로 문 쪽을 향해 손짓했다.
소리 내어 콧방귀를 뀌어 준 후 이시스는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침대 쪽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기운만 아니었더라면. 고개를 돌리자 곤히 잠들어 있던 라네프가 상체를 일으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꼬맹이답지 않은 위압감을 풍기며 이시스를 바라보는 마왕자의 모습에 아가온은 혀를 내둘렀다. 징글징글한 놈. 고작 300살도 안 된 애송이가 이런 기운이라니. 기운만 보면 여느 고위 마족 못지않았다.
이제 몇 년만 있으면 성체가 될 마왕자는 알을 깨고 나왔을 때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열둘 정도 되는 사내아이와 엇비슷했다.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뿜으며 도통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라네프의 모습에 이시스는 본능적으로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엄연히 말하면 라네프의 힘은 지금도 이시스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마왕은 자신을 닮아 능력이 특출하다며 자화자찬했다.
만약 라네프가 마음먹고 이시스를 죽이고자 한다면 이시스는 그를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쩐 일에선지 마왕자가 이시스를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공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300살에 가까워지자 이성이란 것이 조금이나마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시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부수려 했던 어린 시절이 더 좋았다. 지금의 마왕자는 예전보다 얌전하긴 하지만, 눈에 띄게 불어난 힘 때문에 어째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라, 깼네. 그럼 난 가 봐도 되지?”
“뭐?”
“난 먹이나 사냥하러 갈게. 그럼 나중에 봐, 자기.”
“뭐?! 잠깐! 아가온! 야, 이 망할 자식아!”
쪽, 하고 이시스의 볼에 베이비키스를 날린 아가온은 순식간에 방 안에서 사라졌다. 라네프와 단둘이 남겨진 이시스는 진심으로 성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망할.”
***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라네프의 나이가 300살에 가까워지자 자신에 대한 집착이 늘어 가는 것 같았다. 이시스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라네프는 처음엔 이시스를 보자마자 적의와 파괴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집착 증세를 보였다. 예를 들어 잠에서 깨어났는데 이시스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발광을 하며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망가트렸으며, 방에서 탈출해 복도를 거닐던 종 몇을 찢어 죽였다.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거의 폭주 수준이었다. 고작 1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시스 혼자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제발 진정하라고 비는 쪽에 가까웠다.
그나마 다행 중 다행인 것은 이시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르고 달래면 얌전해진다는 것이었다. 어르고 달래기가 통하는 존재는 이시스 단 하나였다. 친아버지인 마왕의 말조차도 안 듣는 라네프가 이시스의 말이라면 귀를 기울인다는 점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요즘 들어 도통 잠을 자지 않는 라네프 때문에 이시스는 피곤해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마 진짜로 그렇게 죽어 버린다면 과로사로 죽은 최초의 고위 마족이라고 온 세상에 알려져 비웃음거리가 되겠지.
망할 놈의 꼴통 꼬맹이 때문에 단골 술집마저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내내 곁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이시스의 욕구 불만은 나날이 늘어 가고 있었다.
이시스는 미간을 좁히며 잠들어 있는 라네프를 내려다보았다. 낮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로 돌아가 풀썩 몸을 눕힌 그는 말없이 멍하게 천장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도 보이는 족족 라네프가 찢어발기는 바람에 가져올 수도, 읽을 수도 없었다. 마왕을 물리치는 용사, 절절한 사랑 이야기 등의 소설이란 책은 마계에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계에 내려가 직접 구해 와야 했다.
그런 귀한 책들을 소환해서 읽다가 어떤 사달이 날지 몰라 유일한 취미인 독서마저 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안겨 준 마왕에게 속으로 쌍욕을 날리던 이시스는 똑똑, 하고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뾰족한 귀를 쫑긋거렸다.
“이시스 님, 접니다.”
집사 아메나크였다. 그는 흔한 마족답지 않게 온화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노 집사였는데, 유일하게 이시스가 마음을 놓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전대, 전전대, 전전전대, 전전전전대 등등의 마왕들을 전부 모셔 왔던 아메나크는 그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는 마신의 육신 일부일 것이다, 마신 본인일 것이다 등등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기본적으로 고위 마족의 수명은 대략 3천 살, 마왕의 경우는 3천에서 4천 정도이다. 그러니까 아메나크는 적어도 1만 살은 거뜬히 넘는다는 거다.
그런 그에 비하면 이제 고작 500살이 넘은 이시스는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변함없이 극진하게 왕을 모시는 아메나크를 이시스는 쭉 동경해 왔다. 성은 내팽개치고 이리저리 놀러 다니는 마왕보다 훨씬 더.
“일은 무사히 마치셨습니까?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네요.”
“이것저것 걱정이 되어서요. 전하께서는 별일 없으십니까?”
“별일 없었겠어요? 아메나크 님이 자리 비우신 동안 죽어 나간 종이 열이 넘습니다. 저도 왼팔이 뜯겨 나가서 재생하는 데에만 열흘이 걸렸다고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듯 이시스는 이를 으득 갈았다. 정말 생각할수록 열 받는다. 먹이를 양껏 먹은 후 잠들어 있는 꼴통을 놔두고 아주 잠깐, 단 몇 시간 동안만 자리를 비웠던 적이 있었다.
때마침 마왕성에서 가까운 곳에 꽤나 강한 마물이 어슬렁거린다는 소식을 듣고 웬 떡이냐 싶어 먹이 사냥을 나갔었다. 기본적으로 마물들은 마족의 도시에서 거리가 먼 곳에서 둥지를 만들고 살아가는 편이었다.
마족의 마을과 가까운 곳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상급 또는 고위 마족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저승행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짐승에 가까운 마물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생존본능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결국 마물들은 마을이나 도시와는 거리가 먼 숲에서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그런 마물 중에서도 마력이 높은 마물이 마왕성 주변을 어슬렁거린다는 건, 고깃덩어리가 저절로 입으로 굴러들어 오는 거나 다름없었다. 상급 마족에 버금가는 마물은 그 수가 적어서 찾는 것도 힘들었기에 이시스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푹 잠들어 있는 라네프가 설마 몇 시간 내로 깨겠어, 하고 안심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사냥을 마친 후 그 마물이 가진 마력을 모두 마물의 심장에 압축시켜 옮겼다. 심장을 갖고 돌아오자마자 열렬히 반기는 라네프 때문에 결국 그날, 이시스는 왼쪽 팔을 잃었다. 물론 열흘 만에 모두 재생했지만.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린다. 망할 놈의 자식,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자신이 없다고 그렇게 불만을 표출하다니. 만약 자신이 고위 마족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외팔이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괘씸해 죽겠다.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물을 하나 가지고 왔지요.”
“선물?”
아메나크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펼쳐 보았다. 그의 손 주변 허공이 몇 초간 비틀리기 시작하더니, 비어 있던 손바닥 위에 붉디붉은 홍옥 하나가 생겨났다.
홍옥은 여인네의 주먹 하나 정도의 크기였는데, 얼핏 봐도 그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단번에 저 빨간 공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시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뭡니까?”
“카르마나 님의 피입니다. 사실 자신의 수명을 늘리는 데 쓰려고 하셨는데, 전하께 주신다고 하네요. 강력한 슬립 마법이 걸려 있어서 섭취한 다음엔 적어도 500년은 일어나지 못할 겁니다.”
‘500년’이라는 단어에 이시스의 귀가 쫑긋거렸다. 카르마나는 마신의 이름이었다. 대충 봐도 어마어마한 기운이 감돈다 싶었는데, 설마 마신의 피일 줄이야.
그나저나 마신의 피라니, 정말 알아차리고 나자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그 무시무시한 걸 태연하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다니. 새삼 아메나크가 더 대단해 보였다.
“500년 씩이나?”
“정확하진 않지만, 어쩌면 더 길 수도 있습니다. 카르마나 님의 힘 덕에 마법의 효과가 더 극대화될 확률도 있으니까요. 그보다 더 길 수도 있겠죠. 성체가 되신 후에도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카르마나 님의 피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니까요.
다만, 폐하의 수명을 늘릴 수준이라면 그 정도는 걸릴 겁니다. 이시스 님이 정하실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땐 폐하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아메나크의 말을 듣자마자 이시스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500년이라니. 그 정도면 아직 8년이라는 시간이 남은 보모 생활이 지금부로 끝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정말? 정말일까? 하지만 마지막 말이 심히 거슬린다. 차라리 바닥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믿을지언정 현 마왕은 안 믿는 게 이시스였다. 그래도, 명색이 마신의 피인데 한낱 상급 마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겠지?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해방되셨네요.”
지금이야 ‘전하, 전하.’ 하고 꼬박꼬박 라네프를 깍듯이 칭하지만, 평소 이시스가 마왕자를 부르는 호칭이 ‘꼴통’에다가 남몰래 코를 꼬집거나 막는다든지, 몸을 뒤집는다든지 하는 귀여운 행동으로 불만을 표출한다는 것을 아메나크는 잘 알고 있었다.
왕자가 유독 이시스에게 집착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내심 안쓰러웠다. 마신의 피는 그런 이시스에게 특별히 내리는 마왕의 선물 같은 거였다.(사실 삶이 너무 지루해서 수명을 더 늘리기는 싫고, 그렇다고 마신의 피를 소멸시키자니 아깝고, 놔두자니 처치 곤란이라 대충 아들에게 버린 것에 가까웠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8년이나 단축된 보모 생활에 이시스는 너무도 행복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낙이 아니라 지옥에서의 해방 정도겠지만.
“아, 깨셨습니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이시스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얌전히 잠들어 있던 라네프가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똑같은, 감정 없는 그 시선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불안했다.
혹시 아메나크 님과의 대화를 다 엿들은 건 아니겠지? 저 꼬맹이가 자신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자길 잠들게 한 후 도망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사고를 칠지 몰랐다.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이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네프가 평소와 다름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걸어와 옷자락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아메나크와의 밀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듯싶었다.
이시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능숙하게 라네프를 안아 들었다. 라네프 또한 익숙하다는 듯 이시스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아메나크는 이시스의 품에 안긴 채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어 대는 어린 마왕자의 모습에 허허 웃음 지었다.
자신에게 살기를 드러내면서도 두 눈은 끊임없이 이시스를 좇는다. 역대 마왕 중 이토록 특정 인물에게 집착과 관심을 보이는 왕자는 없었기에 아메나크 또한 신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깨셨습니까? 좀 더 주무시지.”
망할 꼴통. 왜 이리 빨리 깨고 난리야. 마신의 피는 어떻게 흡수시키는 건지, 잠들고 나면 곧바로 내 성으로 돌아가도 되는 것인지 등등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는데.
이시스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겉으로는 방긋 웃으며 라네프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자가 보면 아주 다정한 아버지로 볼 법한 광경이었다. 물론, 아버지라 칭하기에 이시스의 외모가 매우 아름답고 어리긴 하지만.
“악!”
애써 부드럽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더니만, 돌아오는 건 두피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이었다. 라네프가 이시스의 탐스러운 금발을 손으로 잡아당긴 것이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이시스는 당겨지는 머리카락에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보통 인간들은 마족은 흑에 가깝고, 천족은 백에 가깝다고 알며 천족들은 다 금발에 은발, 마족들은 다 시커먼 피부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물론 천족들은 대부분이 밝은 피부와 밝은 머리 색, 밝은 눈동자를 가지긴 했지만 마족들은 아니었다. 천족과는 달리 다양한 생김새와 색깔을 지니는 게 마족이었다. 천족들은 그들의 계층인 하층민부터 천사장까지 전부 인간에 가까운 외모를 지녔지만, 마족은 아주 다양했다.
인간이 보면 그대로 쇼크사할 만큼 흉악하게 생긴 마족도 있었고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마족도 있었다. 물론 고위 마족은 전부 아름답고 인간의 형태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인간들이 흔히 생각하는 ‘성스러운 색깔, 사악한 색깔’ 등 색깔에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이시스의 금발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며, 살짝 생기 있어 보이는 피부는 멋모르는 인간이 보면 딱 천사라고 오해할 만한 생김새였다. 라네프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과 다른 머리 색에 흥미를 느낀 것인지 그는 연신 이시스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악, 아, 아픕니다!”
마음 같아선 마법으로 제압하고 싶었으나 이미 라네프는 자신의 힘을 능가했다. 힘을 썼다가 오히려 당할지도 모른다. 내심 마음속으로 라네프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이시스는 라네프가 잡아당기면 잡아당기는 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시스를 구해 준 건 다름 아닌 아메나크였다.
“전하, 진정하시지요.”
양손을 들고 진정하라는 듯 손짓하며 다가오는 아메나크의 모습에 라네프는 눈동자를 빛냈다. 노골적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마왕자의 모습에 아메나크는 곤란하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다가가면 당장이라도 공격할 만한 기운 때문에 아메나크 또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역대 마왕들을 오래 모신 전적이 있다 할지라도 차기 마왕이 될, 이제 성체에 가까워진 마왕자를 제압할 만한 힘이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메나크 님, 좀 도와주시죠? 이러다가 머리카락 왕창 뽑히겠습니다!”
“흠,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전하께서 흥미를 잃으실 때까지 이시스 님이 참는 방법밖에는. 아까 한 말 기억나시죠? 그러니 조금만 참으세요.”
‘곧 마신의 피를 흡수시키고 널 해방시켜 줄 테니 조금만 참으라.’는 아메나크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이시스는 젠장, 하고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성을 오래 비워 둔 탓에 처리할 일들이 또 생겼다며 자리를 비운 아메나크 덕분에 이시스는 또다시 마왕자와 단둘이 남겨졌다. 여전히 라네프는 이시스의 머리칼을 붙잡고 놔주지 않고 있었다.
지금처럼 얌전히 잡고만 있으면 오죽 좋을까. 수틀리기만 하면 세게 잡아당기는 통에 이시스의 혈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이시스는 이를 갈며 이 망할 꼴통이 머리카락을 놔주고 나면 당장 짧게 잘라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배는 안 고프십니까? 갈증은요? 좋아하시는 글루돈 족의 피를 대령할까요?”
“…….”
“잘 드셔야 잘 크시죠. 좀 드세요.”
“…….”
“안 졸리십니까? 악!”
어떻게든지 자신을 떼어 내려고 안달복달하는 이시스를 라네프는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간단히 묵살했다. 덕분에 이시스는 거의 사흘 동안 꼼짝없이 마왕자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발 머리카락 좀 놔주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먹이는 왜 안 먹는다고 고집인지. 설마 진짜 엿들은 게 아닐까? 아니, 아니다. 정말로 엿들었다면 이렇게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그칠 리가 없지. 아마 진즉 목이 꺾였을 것이다.
일하던 종들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뒤 이시스는 라네프를 안고 정원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마왕의 취향인 푸른 장미가 지천으로 널린 이 정원은 이시스 또한 매우 마음에 들어 하는 곳이었다.
기분이 내킬 때마다 자신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라네프 때문에 이시스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이시스는 벤치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빨리 이 망할 꼬맹이에게 마신의 피를 흡수시켜야 하는데. 이렇게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덕분에 이시스는 최근 사흘이 300년처럼 느껴졌다. 라네프가 마신의 피를 흡수해 잠들고 나면 당장 해방되는데. 하루빨리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는 온몸이 근질거렸다.
“그렇게 제 머리카락이 마음에 드십니까? 당장 잘라 드릴까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던 이시스는 다시금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기는 라네프의 행동에 빽 비명을 질렀다. 뭐야, 잘라 준다니까 그것도 싫다는 건가?
“마음에 든다면 잘라 드린다 한 것뿐인데 왜 또 잡아당기십니까? 악!”
이런 젠장. 이 망할 꼴통 꼬맹이가 진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이시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계속해서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에 불만을 가진 것 같았다.
“안 자르겠습니다. 안 자르면 되잖아요. 그러니 그만 좀 잡아당기세요. 진짜 아픕니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겠다는 이시스의 말에 라네프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시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 자르기는 개뿔. 당장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짧게 잘라 버릴 테다.
“앗, 전하. 저기 좀 보십시오. 임프입니다.”
“…….”
“귀엽죠? 아, 이쪽으로 온다.”
임프는 성인의 손바닥 크기 정도의 정령으로, 특이하게도 마계에서 살아가는 정령이었다. 마정령이라고도 불리는 임프는 그 생김새가 아주 우스꽝스럽게 생겼다. 매부리코에 울퉁불퉁한 얼굴과 날카로운 손가락 등.
임프 또한 마계에서는 마물로 취급하지만, 마족들의 눈에 띄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 유일한 마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인간계로 비교한다면 마물들은 해충, 임프는 나비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