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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트 블뤼테 3화
01화 - 그 꼴통 (3)


애초에 마족을 공격하지 않기도 하고 정령이라는 특성상 숲을 가꿔 나가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기에 마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족들에게 예쁨 받는 존재였다.
생김새는 우스꽝스러웠지만 이시스는 손바닥만 한 몸집에 날개를 팔락거리며 날아다니는 임프가 귀여웠다.
이시스는 생긋 웃으며 날개를 팔락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임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임프는 조심스럽게 이시스의 손 위에 안착했다. 자신의 눈동자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임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정말 귀엽다. 곧 성으로 돌아가게 되면 한 마리 키우든가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던 이시스는 키이이,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임프의 몸에 새파란 불이 붙자 화들짝 놀라며 입을 벌렸다.
“전하!”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임프는 결국 흔적 없이 불타 사라졌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귀여운 임프를 불태워 죽여 버리다니. 이시스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라네프를 불렀다.
“임프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일 필요까진 없었잖습니까!”
아쉬움에 단호하게 그를 혼내던 이시스는 다시금 두피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망할, 이 꼴통을 혼내려던 자신이 바보 멍청이지. 옛날부터 그랬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거나 하면 그게 무엇이든 이리 파괴욕을 드러내곤 했다.
“어라, 웬일로 밖에 나와 있어?”
이시스가 앉아 있는 벤치 앞에 인간 남성 한 명 정도 크기의 뒤틀림이 생기고, 익숙한 기운과 함께 아가온이 나타났다. 이시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가온을 노려보았다. 망할 자식. 그렇게 내뺄 땐 언제고 어디서 뻔뻔한 낯짝을 들이밀어?
“넌 대체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건데?”
“너무하네. 우리 왕자 전하 진수성찬 차려 주겠답시고 고생하고 온 남편한테.”
“누가 남편이야!”
당장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는 듯 살기를 내뿜는 이시스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는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시스의 품에 안긴 채 아가온을 바라보던 라네프의 주변에 어두운 기운이 휘몰아쳤다. 당장이라도 공격할 것만 같은 어린 맹수의 모습에 아가온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부터 라네프는 아가온을 유독 싫어했다. 지금처럼 대놓고 이를 드러내는 상대는 아가온밖에 없었다. 고위 마족 중에서도 마계에서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힘이 강한 아가온이었기에 라네프 또한 섣불리 공격하진 못했다.
“바가지는 그쯤 하고, 자.”
이시스는 그가 휙 던지는 물건을 낚아챘다. 뭐야, 하고 중얼거리던 이시스는 익숙한 물건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건…….
“이, 이거…….”
“그래. 그거야. 아메나크한테서 받아 왔지.”
“으악!”
확인 사살을 해 주는 아가온의 말에 이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마신의 피를 들고 있던 손을 몸 쪽으로 감췄다. 바닥으로 떨어지려던 마신의 피를 마법으로 단번에 낚아챈 아가온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미쳤어? 깨졌으면 어떡하려고?”
“이걸 나한테 주면 어떻게 해? 도로 가져가!”
“너 말고 쟤한테 손댈 수 있는 자가 없잖아.”
“윽…….”
그래, 그건 맞다. 지금으로선 친아버지인 마왕의 손길조차도 거부하는 라네프와 접촉할 수 있는 건 이시스밖에 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울상 짓던 이시스는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아가온의 마법으로 인해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마신의 피가 천천히 이시스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눈을 질끈 감고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하던 이시스는 아가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이시스의 물음에 아가온은 작게 허공에 손짓을 했다. 그러자 성인 여성 주먹만 했던 홍옥이 순식간에 작은 구슬만큼 작아졌다. 덕분에 이시스는 다시금 기겁했다. 저 미친놈……! 겁 없이 마신님의 피를 마음대로……!
“먹여.”
“뭐?”
“그냥 먹이면 돼.”
정말? 놀랍다는 듯 이시스는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작은 구슬을 바라보았다. 그래, 물론 이 정도 크기라면 어린아이가 삼키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겠지만.
설마 삼키자마자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기거나 하진 않겠지? 아니, 무슨 상관이야. 이걸 먹이라고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왕님이고 건네준 건 집사다. 만에 하나 잘못된다고 해도 그 책임은 두 분에게 있는 거나 다름없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이시스는 조심스럽게 라네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하.”
도통 입을 열지 않는 라네프 때문에 이시스는 구슬을 고쳐 잡았다. 손가락으로 꼬집듯 잡은 후 라네프의 입가에 갖다 대며 그는 다시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드세요. 네?”
대놓고 입에 갖다 대자 라네프는 싫다는 듯 고개를 피하며 이시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시스는 아가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먹이는 것 말곤 다른 방법 없어?”
“아마도.”
이시스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먹이면 된단 말인가? 보아하니 라네프 또한 평소에 먹던 먹이와는 확연히 다른 기운을 머금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듯했다.
“전하, 저 좀 보세요.”
“이거 드시면, 제가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선에서 한 가지 소원을 들어 드릴게요.”
자신을 보라는 이시스의 말에 라네프는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애써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시스는 라네프에게 또박또박 이해시키듯 말을 이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며 이시스의 눈을 바라보는 라네프의 눈동자는 여전히 감정 없이 차가웠다. 한참 동안을 표정 변화 없이 이시스를 바라보던 라네프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손바닥 쪽으로 향했다.
‘나이스!’를 외치려던 입을 간신히 붙잡고 이시스는 조심스럽게 라네프의 입에 마신의 피를 갖다 댔다. 어린아이의 작은 입이 천천히 열리고, 구슬을 입 안으로 밀어 넣은 이시스는 긴장감에 숨을 참았다.
꿀꺽, 하고 들려오는 소리와 동시에 라네프는 그대로 눈을 감고 곯아떨어졌다. 마신의 피라고 하기에 온몸에서 막 빛이 난다거나 인장이 생겨 난다거나 폭발하거나 그러는 게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조용한 반응이었다.
눈을 감고 품 안에서 축 늘어져 있는 라네프의 모습을 멍하게 내려다보던 이시스의 눈에서 감격 어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진짜 해방이다…….”

***

“두 분 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시스 님이지만요, 하고 덧붙이려던 아메나크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시스는 보모 꼴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감격해 아직도 정신이 멍해 보였다.
그런 이시스를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아가온은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대체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으면 저 정도로 감동할까.
“폐하께서, 바라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전 딱히 없습니다. 그냥 당분간 귀찮게만 하지 말아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하하, 네.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시스 님은?”
“예? 아, 저도 마찬가집니다.”
장장 200년 가까이 사람을 고생시켰는데, 또 귀찮게 하면 정말 농담 안 하고 인간계로 튀어 버릴 것이다. 진심이었다.
드디어 이별이구나. 마신의 피를 먹일 때 들어줄 수 있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었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어차피 성체가 되고 난 후엔 약속에 대해서 기억도 못 할 것임이 분명한 데다 마족이 약속은 무슨 약속.
그걸 믿고 냉큼 받아먹다니, 아직 어리긴 어리구나 싶었다. 귀여운 녀석.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하러 갈까?”
“빨리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뭐 어때? 이제 네가 원하는 그 잠, 방해꾼 없이 실컷 잘 텐데. 그전에 해방된 기념으로 한잔 해야지.”
어깨를 감싸며 싱글벙글 웃어 대는 아가온을 이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근 192년 동안 이 자식 때문에 열 받은 거 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린다. 저놈의 아랫도리, 언젠가 잘라 버리든가 해야지.
투덜거리면서도 이시스는 군소리 없이 아가온과 함께 중앙광장을 지나쳐 번화가로 향했다. 저녁때쯤 되자 번화가는 여러 마족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여기 오는 게 몇 년 만인지. 이시스는 다시금 감격의 눈물을 찔끔거렸다.
“어어? 이게 누구십니까? 아름다운 이시스 님 아니십니까? 거의 100년 만이지요?”
“잘 지냈나? 용케도 안 망했네.”
“하하하. 그야 아가온 님 덕분입죠.”
“흐응, 그래?”
얼마나 많이 드나들었으면 저런 소리가 나올까 싶어 이시스는 다시금 아가온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자식. 자신은 꼴통 꼬맹이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자긴 이런 곳에서 마시고 놀았단 말이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시스의 모습에 아가온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하하 웃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다 잊어.”
“누구 맘대로? 오늘 네가 다 사라. 머트! 여기 비싼 안주 다 내어 와. 오늘 진짜 마시고 죽을 거니까.”
흥, 하고 코웃음을 치는 이시스의 모습에 아가온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유니콘의 피를 섞어 만든 귀한 과실주와 술들, 진수성찬에 가까운 안주들이 차려지고 이시스와 아가온은 잔을 부딪치며 축배를 들었다.
단숨에 술을 들이켠 이시스는 캬아,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이제야 해방되었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어차피 아가온이 다 계산할 거니까 부담 없이 먹어 치워 주마, 하고 중얼거리며 이시스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술과 음식을 먹고 마셨다.
“이건 뭐야?”
“아, 그거? 인간들이 가장 선호하는 맥주라는 술이야.”
“으엑. 무슨 맛이 이래? 쓰잖아.”
“네가 너무 단 술만 좋아해서 그렇지. 성에 박혀 있는 동안 몰랐겠지만 요즘 이 술은 못 구해서 난리야. 이 술의 주재료가 보리라는 곡식인데 마계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하거든.”
그래도 난 달달한 술이 좋아, 하고 대답하며 이시스는 혀를 내둘렀다. 정말 달달한 술만 마시는 그의 입맛에 인간들이 주로 마신다는 맥주라는 술은 너무 썼던 것이다.
질색을 하며 맥주를 한쪽으로 밀어낸 이시스는 평소 좋아하던 달콤한 과실주를 다시금 입에 머금었다. 그래, 자고로 술은 이래야지. 뭐하러 쓰기만 한 술을 마셔?
“그래, 소감이 어때?”
“말이라고 하냐? 행복해 죽겠다.”
말이 200년이지, 체감상 거의 2000년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이제 마음 편히 지낼 날만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산 채로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그 악독한 마왕 놈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겠지.
어린 짐승의 뒷바라지를 200년 가까이 하다 보니 이미 심성이 꼬일 대로 꼬여 버린 이시스는 ‘너도 예외는 없다!’며 아가온의 발을 꾹 지르밟았다.
“이건 또 뭐야? 처음 보는 건데.”
“그건 나도 처음 보는데?”
이시스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접시에 담겨 있는 하얗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덩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얀색 가루가 솔솔솔 뿌려져 있는 작고 동글동글한 덩어리. 처음 접하는 생소한 음식에 선뜻 먹어 보지 못하고 포크로 쿡쿡 찔러 대기만 하던 이시스는 옆을 지나가는 종을 냉큼 붙잡았다.
종은 자신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이시스의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두 사람에게서 고위 마족 특유의 기운이 풀풀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퍼뜩 고개를 조아렸다.
“이봐. 이건 뭐지?”
“예? 아, 예에. 이건 떡이라는 것입니다.”
“떡?”
“예. 몇 년 전부터 인기가 아주 좋은 간식거리입니다. 인간계에서 들여온 음식인데, 쫄깃쫄깃하고 달콤해서 많이들 찾습니다.”
“뭐야. 이것도 인간들이 먹는 음식이라고?”
달콤하단 말이지? 이시스는 기대 어린 표정으로 포크를 들었다. ‘떡’을 쿡 찍어 입으로 가져간 이시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 전체에 쫙쫙 들러붙는 이 식감과 달콤한 맛. 정말 신세계였다.
성에서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하는 동안 새로운 것들이 많이 생겨났구나 싶었다. 먹는 것을 배를 채우는 것과 별개로 하나의 쾌락으로 여기는 인간들이나 음식이나 요리에 집착하지만, 최근 몇백 년 전부터 마계에서도 요리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예전엔 날것을 뜯어 먹거나 불에 굽는 것 말고는 별다른 요리법이 없었지만 최근엔 인간들처럼 마족들 또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먹는 것이 추세였다.
마계의 환경 특성상 인간계처럼 다양한 식재료를 구할 수 없어 인간계에선 아주 흔하디흔한 요리도 마계에선 아주 귀하게 취급되었다.
물론, 음식을 먹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는 고위 마족들의 경우는 극소수들만 요리나 음식에 관심을 가졌다. 이시스는 그중 하나였다. 따로 인간 출신 뱀파이어 하나를 자신의 성에 전속 주방장으로 데려올 만큼 이시스는 음식을 먹는 것, 특히 달콤한 것에 환장했다.
“최근엔 네이라가 인간계 음식으로 사업을 한다고 하던데? 개체 수가 가장 많은 중급 마족들의 입맛에 맞춰서.”
“네이라라면, 칼루나 지역 성주 말인가?”
“그래. 듣자 하니 인간 계약자가 상인이라고 하더군. 마계엔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마정석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식재료나 요리들을 들여오는 모양이야. 사업이 잘되어서 입이 아주 귀에 걸렸던데?”
“흐응.”
그 여자도 참 귀찮게 사는구만. 이시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 그로선 잘된 일이다. 항상 맛없고 형편없는 마계의 식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그 또한 인간계로 가서 마음에 드는 것들을 가져올 수 있었지만 그놈의 귀차니즘이 문제였다. 주방장 엠마가 해 주는 디저트나 요리도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고.
꼴통 꼬맹이에게서 해방된 기념으로 자신 또한 인간계에 갔다 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듣자 하니 인간계에선 맛있는 음식들이 길거리에 널렸다던데. 아아, 일단 잠부터 늘어지게 잔 후에 생각해야겠다.
“이시스.”
“뭐야?”
쪽, 갑작스레 목뒤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느낌에 이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아가온이 입꼬리를 씩 울렸다. 웃기지도 않다는 듯 작게 콧방귀를 뀐 이시스는 차갑게 말했다.
“꺼져.”
하고 싶으면 직접 하든가. 어디서 마법으로 장난질인지. 관심 없다는 듯 달콤한 술을 홀짝이던 이시스는 다시금 아가온의 기운이 노골적으로 목덜미를 끈적이게 훑어 내리자 눈을 치켜떴다.
아가온은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이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시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능청맞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계속해서 모른 척 술만 홀짝이던 이시스는 아가온이 탁자 위에 금화 몇 개를 올려놓자 힐끗 시선을 돌렸다. 금화를 올려놓자마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술집 의자는 어느새 침대로 바뀌어 있었다.
쓸데없이 화려한 이 침실은 분명 아가온의 성이 틀림없었다. 이시스는 들고 있던 잔을 귀찮다는 듯 허공에 집어 던졌다. 공중으로 떠오른 술잔은 깨지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오는 아가온의 손길을 느끼며 이시스는 다시금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그냥 해.”
이시스는 아가온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다리를 벌리자 흠칫 몸을 굳히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마족들은 개체마다 특정 욕구가 과하게 도드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아가온은 성욕이었고, 이시스는 식욕이었다.
물론 딱 잡아 말하자면 식욕이라기보다 달콤한 것을 취하려는 욕망에 가깝지만. 아가온과 이시스는 상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아가온은 성욕이 왕성한 대신 음식에 딱히 관심이 없었고, 이시스는 식욕이 왕성한 대신 성욕이 적었다.
성적 쾌감을 즐기고 원하는 아가온과 달리 이시스는 그저 배출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해서 그는 애무나 전희 등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시스에게 성관계란 그저 일시적인 욕구를 빠르게 해소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인 아가온은 이시스가 바라는 대로 손을 거두었다. 다리를 올려 완전히 침대 위로 올라온 이시스는 얌전히 누웠다. 아가온은 여기까지가 이시스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만족한다는 듯 냉큼 침대 위로 올라왔다.

***

장장 200년 만에, 아니 정확히 192년 만에 자신의 성으로 돌아온 이시스는 다시금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집사 엔크스와 종들 또한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근 200년 동안 정말 편하고 좋았는데. 이제 끝이로군요.”
주방장 엠마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시스는 지금 이 기분이라면 그녀가 자신에게 쌍욕을 해도 너그러이 봐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난 지금부터 한 100년쯤 푹 잘 생각이니까. 그때까지 다시 자유를 만끽하라고, 엠마.”
하루 종일 성 곳곳을 싸돌아다니며 200년 만에 맞이하는 자신의 러브하우스를 물고 빤 이시스는 곧바로 방에 틀어박혔다. 방과 붙어 있는 서재가 그의 보물 1호였다.
책은 인간계에서도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서민들은 살 엄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책값은 비쌌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다. 마찬가지로 마계에서도 책은 그다지 대중화된 물건이 아니었기에 고위 마족 또는 상급 마족들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마저도 이런 이야기책은 마계에선 거의 구할 수 없는 책이었기에 이시스는 책 한 권을 종 백 명보다 더 귀히 여겼다.
책 한 권, 한 권을 꺼내고 펼쳐 보던 이시스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전부 최소 30번 이상은 읽어 봤던 책들이다. 고위 마족은 기억력이 거의 엘프나 드래곤급이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게 192년 전이었지만 한 글자, 한 글자를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다.
슬슬 질리니 새로운 책을 구해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시스는 들고 있던 책을 다시금 책장에 꽂아 넣었다.
“아, 그렇지. 200년 가까이 흘렀으니 인간계도 변화가 있겠지? 어쩌면 책이 흔한 물건이 되었을지도 몰라.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신간들이 많이 나왔겠지?”
“최근 인간들의 인쇄술이 아주 많이 발전했더군요. 책을 이제 쉽게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주인님.”
“정말?”
엔크스의 말에 이시스는 화색이 돌았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아?”
“얼마 전에 인간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마력이 뛰어난 인간 하나가 절 소환했는데, 얼마 안 가 죽더군요. 인간은 너무 약해서 탈인 것 같습니다.”
그는 ‘거의 300년 만의 부름이었는데…….’ 하고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인간계로 통하는 문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건 황족과 고위 마족밖에 없었다.
종, 중급, 상급 마족들은 인간의 소환에 응하는 방법 말고는 인간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마족들은 인간과의 계약에 목을 매었다.
계약을 하고 나면 인간의 영혼도 자신의 것이 되며 지루한 마계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지기에 마족들에게 인간과의 계약은 최상의 유희거리였다.
“죽어서 다행이군. 엔크스가 없으면 내 성은 누가 돌보라고?”
“너무하십니다, 주인님.”
이시스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소파에 등을 기댄 그는 행복하다는 듯 하아, 하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꿈만 같다. 그 망할 꼴통 꼬맹이에게서 벗어나 안락한 자신의 성에서 이리 숨을 돌리고 있는 이 상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