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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트 블뤼테 4화
01화 - 그 꼴통 (4)
엠마에게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잔뜩 만들게 해서 혀를 즐겁게 해야지. 최근 들어 달콤한 차가 잘 나오던데 차도 종류별로 쟁여 놔야겠다. 그나저나 인간들의 인쇄술이 발전했다니, 정말 이리 기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인간계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어 인간계로 향하고 싶었지만, 밀려오는 수면욕에 그는 백기를 들었다. 그래, 달콤한 음식을 먹는 것도, 재밌는 책을 읽는 것도 일단 자고 난 다음 하자.
이시스는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법을 이용해 평소 즐겨 입는 부드러운 실크 원피스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로 향했다.
“주무시려고요?”
“응. 내가 일어나기 전까진 깨우지 마. 누가 와서 내 성 깨부수는 거 아닌 이상.”
하아암, 하고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한 이시스는 나른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휘장을 닫았다. 그리고 행복해 죽겠다는 듯 헤벌쭉 미소 지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이시스는 길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
이시스는 정말 딱 100년을 채우고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우선 기지개를 편 후 다시금 침대에 드러누웠다.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기어 나오는 건 부지런한 종들이나 하는 짓이다.
100년 동안 침대에 붙어 있었으면서 질리지도 않는지, 넓은 침대 위를 뒹굴거렸다. 그야말로 완벽한 폐인의 모습이었다. 침대 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집사와 엠마를 시켜 디저트를 먹고 책을 읽는 생활로 1년을 보낸 이시스는 드디어 침대를 기어 나왔다.
침대 위에서 안 움직이긴 했지만, 그래도 1년 동안 뒹굴다 보니 심심하기도 해서 이시스는 아가온의 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성주는 이미 자리를 비운 후였다.
난데없이 찾아온 불청객 이시스를 아가온의 종들은 생각 외로 반겨 주었다. 본디 함부로 주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존재는 마왕이 아닌 이상 못마땅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가온이 무슨 언질을 준 것인지 하나같이 이시스를 반겼다.
“이시스 님이 찾아오시면 이쪽으로 모시라는 주인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뭐? 어디?”
“일단 따라오십시오.”
집사의 말에 따르면 아가온은 몇 년 전에 유희거리를 찾아 인간계로 향했다고 한다. 떠나기 전에 혹시라도 이시스가 자신을 찾아오면 서재로 안내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했다.
집사를 따라 서재에 도착한 이시스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책장 몇 개와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아가온의 서재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책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을 빼고는.
“‘주는 건 아니야.’라고 하시던데요?”
“뭐?”
미간을 찌푸린 이시스는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원래 아가온의 책장엔 이렇게 책이 많지 않았었는데. 그러니까, 지금, 이 책들을 빌려주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깜빡깜빡,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이시스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처음 보는 책들을 귀신같이 캐치한 그는 손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십 권의 책들을 꺼냈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던 수십 권의 책들이 알아서 질서 정연하게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읽고 싶은 책 순서대로 책을 쌓은 이시스는 냉큼 기다란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럴 땐 엠마의 레드베리 쿠키를 입에 물어야 하는데. 하지만 자신의 성으로 이 책들을 가지고 돌아가기엔 그 기다림의 시간마저 아까웠다.
“음? 그림이잖아?”
처음으로 펼친 책은 요리책이었다. 이시스가 소설책이 아닌 요리책을 맨 처음 꺼낸 이유는 최근 엠마의 똑같은 요리, 똑같은 디저트에 지겨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그림 하나와 그 밑에 빼곡히 적혀 있는 글자들. 아무래도 요리법이 정리되어 있는 책인 듯싶었다. 제목도 [밥 아저씨의 참 쉬운 요리 교실]이었다.
휘적휘적 책장을 대충대충 넘겨 보던 이시스는 자신의 눈길을 끄는 페이지에 눈을 치켜떴다. 소제목으로 커다랗게 적혀 있는 [비프스튜 만들기]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비프스튜는 약 1000년 전부터 모든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사랑하고 있는 가장 대중적인 음식이며 5대 영양소가 골고루 갖춰져 있어 건강에도 좋다. 테이안 제국 24대 황제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비프스튜로 꼽았으며…….’
“대중적이면서 인간들이 1000년 동안 사랑해 온 음식?”
호오오. 이시스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인간은 그저 살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는 타 종족과 달리 인간은 수많은 디저트와 음식들을 발명해서 혀를 즐겁게 하는 종족이 아니던가.
인간만큼 요리에 영혼을 바치는 종족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장장 천 년 동안 사랑한 음식이라고? 이시스의 두 눈동자가 다시금 반짝거렸다.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
이시스는 허공에 작게 손짓했다. 뒤틀림과 함께 이공간이 나타나고, 그는 냉큼 책들을 그 이공간에 처박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아가온의 성을 떠났다.
자신의 성으로 워프한 이시스는 헐레벌떡 엠마를 찾았다. 엠마는 귀찮고 짜증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엠마, 비프스튜 만들어. 인간들이 천 년 동안 사랑한 음식이라던데?”
“그건 무슨 병신 같은 소리에요? 인간들이 가장 질려 하는 음식이 아니라요?”
“여기 나와 있어.”
특유의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툭 내뱉었다. 그리곤 이시스가 펼쳐 보이는 책의 페이지를 읽어 내리더니,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밥 아저씨는 무슨. 개나 소나 다 먹는 게 비프스튜예요. 그때그때 있는 거 아무거나 야채, 고기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잡탕인데 무슨.”
“넌 못 믿겠어. 여기 밥 아저씨는 인간들이 천 년 동안 사랑한 음식이라고 했다고.”
“먹을 게 없으니 천 년 동안 어거지로 먹은 거겠죠.”
‘네! 비프스튜는 아주 환상적인 음식이에요! 인간들이 천 년 동안 사랑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죠!’라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약 30년을 인간이자 요리사로 살았던 엠마가 인간의 음식에 대해서 더 잘 알겠지만, 그래도 이시스는 굳게 믿었다. 요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인간들 사이에서 천 년 동안 없어지지 않고 가장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던 비프스튜가 환상적일 맛일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엠마는 인간 시절 거식증 환자가 아니었던가? 요리를 하는 직업을 가지고도 음식을 안 먹어 반송장으로 살았다고 들었는데. 음식을 즐기지 않는 엠마니 환상적인 음식도 그녀에겐 그저 맛없는 소여물이나 다름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시스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만들어 줘.”
“안 돼요.”
“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오는 거절에 이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살기를 내뿜었다. 그런 이시스의 살기를 느낀 엠마는 울컥한 표정으로 그가 갖고 있던 책을 빼앗아 탁자 위에 펼치곤 쾅, 하고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자, 봐요. 준비 재료. 쇠고기, 양파, 당근, 감자 등 각종 야채, 그리고 토마토소스, 화룡점정으로 파슬리! 어느 것 하나 마계에선 구할 수 없는 재료들이에요. 아, 하나 있구나. 물. 물 끓여 드려요?”
“비슷한 재료 못 구해?”
“못 구해요.”
“알아서 잘 만들어 봐.”
“물 끓여 드릴 테니 비프스튜라고 생각하고 드시든가요.”
“……무능한.”
불만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이시스에게 엠마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홱 돌렸다. 어두운 기운을 풀풀 풍기며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끊어 가며 말을 이었다.
“인간계로 가서 구해 오시죠, 주인님. 그게 싫으시면 평소대로 오크고기 수프와 검은 빵이나 드시고요.”
아, 그건 싫다. 오크고기 수프와 검은 빵은 이제 신물이 난다. 불만 어린 표정으로 엠마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이시스는 다시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재료만 구해 오면, 꼭 만들어 주기다?”
“구해 오기나 하시죠.”
뱀파이어 특유의 푸른 입술이 곡선으로 휘어졌다. 이시스는 다짐했다. 기필코 인간들이 천 년 동안이나 사랑해 왔던 음식, 비프스튜를 꼭 먹어 보고야 말겠다고.
***
보통 인간계로 통하는 게이트는 그 매개체가 필요했다. 고위 마족들은 컵, 옷, 책 등의 평범한 물건부터 신체 일부, 종으로 만든 박제 등 아주 다양하게 매개체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그 매개체는 그 본 주인이 가장 중요시하는 물건이어야만 했다.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물건이 다 매개체가 될 수는 없었다. 이시스의 경우는 책이었다.
매개체를 한 곳을 지정해 숨겨 놓으면 마계에서 문을 열 시 그 매개체와 통하게 된다. 때문에 매개체는 인간들이 자주 돌아다니는 곳에는 숨겨 놓을 수 없었다. 마계로 통하는 문을 발견하게 된다면 귀찮은 소란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이시스는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숲 속에 책을 숨겨 두었다. 예상대로라면 자신의 성 안에서 게이트를 연 이시스는 분명 매개체가 숨겨져 있는 숲 속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런데…….
“뭐야?”
“헐.”
미간을 찌푸린 이시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게이트를 통해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 꼬맹이 하나, 그리고 좁아터진 방.
“처, 천사?”
“틀렸다, 꼬맹아. 난 천사 따위가 아니라 고귀하고 아름다운 마족이야. 한 번만 더 날 토 나오는 천계 조류 새끼들 따위로 부른다면 산 채로 목을 따 버리겠다.”
흐흐흐, 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구겨 사악하게 웃은 이시스는 자신의 말에도 겁먹기는커녕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기억이 분명하다면 매개체는 인적 드문 숲 속에 있어야만 했다. 설사, 인간이 그 주변을 돌아다니더라도 고위 마족의 매개체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만질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 매개체가 왜 이런 하찮은 인간 꼬마 따위의 좁은 방구석 안에서 쫙 펼쳐져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된단 말이야.
이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들었다. 방바닥에 펼쳐져 있던 책이 허공에 떠올라 그의 손에 안착했다.
“아가온, 이 망할 자식이…….”
책 표지에 적혀 있는 아가온의 기운과 [재밌을 것 같아서 그랬어♡]라는 토 나오는 메모 하나. 눈을 감으며 한숨을 푹 내쉰 이시스는 여전히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걸 어떻게 한담.
“이봐, 꼬맹이.”
“네!”
“날 못 본 척하는 게 네 유일한 살길이다. 알겠지?”
“악마신가요? 제가 악마를 소환한 거예요?!”
“…….”
또다시 겁을 먹기는커녕 개소리를 지껄이는 꼬마의 모습에 이시스의 이마에 힘줄 하나가 돋아났다. 물어뜯고 파괴욕만 드러내는 누구누구와 다르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저렇게 올려다보니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사실, 이시스는 자신은 모르겠지만 타 마족들과 달리 너그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머릿속으론 아, 이 귀찮은 꼬맹이를 당장 찢어 죽여 버릴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행동으로 실천하진 못하는 모습만 봐도 답이 딱 나왔다.
“아냐. 넌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자고 일어나면 다 잊는 거야.”
“악마군요! 악마는 원래 이렇게 생겼구나! 천사보다 더 아름다워요!”
“망할…….”
밀려오는 두통에 이시스는 손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철부지 꼬맹이가 발견할 게 뭐람. 이 망할 자식을 그냥. 다음번에 만나면 그 빌어먹을 물건을 두 동강 내 버리겠어…….
악독한 인간이 발견했으면 쉽게 죽이기라도 했을 텐데. 이리 천진난만한 핏덩어리가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이건 뭐 손도 못 대겠다. 아, 마신이시여. 이시스는 진심으로 마신을 불렀다.
“잘 들어, 꼬맹아. 어딜 가서 악마를 소환했다느니, 악마를 봤다느니 하면 넌 악마에 영혼을 팔았다며 아마 화형을 당할 거다. 아니면 산 채로 실험체가 될 수도 있겠지. 그걸 원하지는 않지?”
아주 바보 천치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린 이시스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절대로 날 봤다는 소리를 다른 인간에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럼 이만.”
“악마님! 가지 마세요!”
“켁!”
워프 마법으로 자리를 뜨려던 찰나, 아이가 다리에 들러붙어 버렸다. 이시스는 짜증 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아이를 돌아보았다.
“꺼져! 난 비프스튜를 먹어야 한다고!”
“비프스튜?”
“오, 너도 알아? 비프스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근엄하게 눈과 목소리를 내리깔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비프스튜를 알아듣는 듯한 꼬마의 모습에 이시스가 눈을 반짝였다.
“비프스튜가 드시고 싶으신 거예요, 악마님?”
“그래! 난 빨리 비프스튜 재료를 구해서 엠마에게 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거 놔.”
그냥 힘으로 뿌리치고 가 버리면 될 것을. 이시스는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었다. 분명 그 꼴통 꼬맹이 때문에 꼬맹이란 꼬맹이들에겐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게 틀림없다며 그는 이를 갈았다.(사실 이시스는 작고 약한 생물에 원래 약했다.)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뭐?”
아이의 외침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비프스튜를? 네가? 요리의 종족이라는 인간들이 천 년 동안 사랑한 그 훌륭하고 환상적인 음식을, 고작 열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핏덩이가 만든다고?
어이없어하는 이시스의 눈빛에서 불신을 읽은 것인지, 아이는 활짝 웃으며 다시금 대답했다.
“전 여관에서 일하고 있어요. 비프스튜는 수십 번도 더 만들어 본 걸요!”
“정말이냐?”
“네! 여관 손님들도 제가 만든 스튜가 맛있다고 팁도 주셨어요! 저 정말 잘 만들 수 있어요. 그러니까 가지 마세요, 네?”
“흠.”
아이의 말에 이시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러고 보니 엠마가 뱀파이어가 된 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했지? 족히 500년은 넘었다고 알고 있는데. 500년이야 마계에서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인간계에서는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다.
그런 엠마가 ‘밥 아저씨의 참 쉬운 요리 교실’의 책에서 나오는 비프스튜를 그대로 만들 수 있을까? 엠마가 만드는 비프스튜라면 그러니까 500년 전의 비프스튜라는 얘긴데……차라리 이 꼬맹이가 만드는 게 더 인간들이 사랑하는 비프스튜에 가깝지 않을까?
골똘히 생각하던 이시스는 힐끗 자신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빨리 먹어 보고 싶기도 하고, 그냥 모른 척 넘어가 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좋아. 한 번 만들어 봐.”
“정말요? 그럼 안 가실 거죠?”
“그래. 그러니까 빨리 만들어 보기나 해.”
이시스의 말에 아이는 다시금 활짝 미소 지으며 ‘네!’ 하고 크게 대답했다.
아이의 이름은 제이라고 했다. 어차피 아이를 ‘꼬맹이’라고밖에 부르지 않는 이시스는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된다고 툴툴거렸지만 아이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이시스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이의 작은 방은 여관에서 창고로 쓰던 곳이었다. 오갈 데 없는 천애고아인 자신을 여관 주인이 거둬 주었다고 아이는 말했다. 뚱한 표정으로 귀찮다는 듯 먼 산만 바라보는 이시스에게 아이는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아무래도 말이 많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듯싶었다. 자신의 부모님은 누군지 모르지만 분명 좋은 분이셨을 거라는 둥, 손님들 중에 용병 아저씨 한 분이 계시는데 그 아저씨는 험악한 외모와는 달리 올 때마다 팁을 꼬박꼬박 주셔서 그 아저씨가 참 좋다는 둥, 설거지가 조금만 쌓여도 주인아저씨가 화를 내서 그때그때 접시를 씻어 줘야 한다는 둥 끊임없이 조잘거리면서도 정작 야채 다듬기, 고기 썰기 등 할 건 다 하는 아이가 이젠 신기할 지경이었다.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뜨겠군. 이시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쇠고기는 내일 만들 스테이크 재료예요. 질이 아주 좋아요! 스튜용 고기와는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악마님이 드실 거니까 특별히 제가 선심 쓰는 거예요.”
제이는 싱싱해 보이는 고기를 썰며 콧대를 세웠다. 제이가 했던 말들은 들은 척 만 척 흘려보내던 이시스는 식재료에 대한 말이 나오자 호오, 하고 관심을 보였다.
“그나저나, 너 언제까지 날 악마라고 부를 거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악마님이시잖아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악마도 우리처럼 이름이 있나요?”
“당연하지. 하찮은 인간 따위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이름이지만, 넌 내게 비프스튜를 만들어 주기로 했으니 특별히 부르는 것을 허락해 줄게. 난 이시스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부를 수 없는 고귀한 이름’을 비프스튜에 팔아먹은 이시스는 의기양양하게 후후, 하고 웃음 지었다.
“와아, 악마님 얼굴처럼 예쁜 이름이네요!”
“악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그나저나 내일 쓸 좋은 고기라면 그 깐깐한 여관 주인이 트집 잡지 않겠어?”
들은 척 만 척하더니, 그래도 제이가 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마치 자신을 걱정해 주는 듯한 이시스의 말에 제이는 감동했다는 듯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주인아저씨는 설거지나 청소 따위만 신경 쓰시거든요. 식재료가 없어지거나 해도 잘 모르세요. 그래서 제가 몰래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나눠 주곤 해요.”
“흐응.”
완전 어리벙벙한 바보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영악한 구석이 있었군. 픽,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린 이시스는 계속해서 제이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고기와 야채를 깍둑썰기 하고, 깨끗한 물을 끓이고 소금을 뿌리고.
생각보다 요리법은 간단해 보였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비프스튜의 고운 자태에 이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완성이에요. 한 번 드셔 보시겠어요?”
제이의 말에 이시스는 고민하지 않고 냉큼 수저를 들었다. 기대 어린 표정으로 한 숟가락을 퍼서 입에 가져간 이시스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오오, 하고 감탄했다.
확실히 마계에서 흔히 먹는 오크고기 수프나 검은 빵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과연, 인간들이 천 년간 사랑해 왔던 음식이라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
연신 감탄을 감추지 못하며 이시스는 금방 한 솥을 다 비웠다. 만족스러운 듯 나른한 한숨을 내쉬는 이시스에게 제이는 또다시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것도 드셔 보시겠어요? 주인아주머니께서 만드신 특제 푸딩이에요!”
“푸딩? 그게 뭐지?”
“달콤한 디저트에요. 아주 맛있어요. 사실 아주머니께서 저에게 주신 건데 악마님께 드릴게요.”
저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먹지 못하는 귀한 거예요, 하고 말하는 제이는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달콤한 디저트라는 말에 얼굴이 밝아진 이시스는 어린아이 손바닥 크기의 푸딩을 한입에 먹어 치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이는 ‘난 한 시간 동안 아껴서 먹는데, 역시 악마님은 다르네요!’ 하고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물컹물컹하고 부드러운 질감과 달콤한 맛, 그리고 향긋한 바닐라 향기에 취해 있는 이시스의 눈은 거의 하트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달콤한 푸딩의 여파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이시스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는 제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인간계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기분 좋게 웃었다.
비프스튜도, 푸딩도 아주 환상적이었다. 사실 요리 수준이 나날이 발전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비프스튜란 그저 고기와 야채를 넣고 끓인 단순한 음식이었지만 마계의 맛없는 음식에 익숙해져 있던 이시스에겐 그야말로 환상의 요리로 다가왔던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이에게 이시스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꼬맹아. 네가 만든 비프스튜도 푸딩도 아주 맛있었어. 그 답례로 네가 원하는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줄게. 물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만.”
부를 원하면 부를, 권력을 원하면 권력을 쥐여 주지. 이시스는 그렇게 덧붙였다. 이래 봬도 고위 마족이다. 인간이 흔히 바라는 돈이나 명예, 권력 등을 이루어 주는 것은 껌이었다.
이시스의 말에 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드래곤을 보고 싶어요!”
그는 순식간에 얼굴을 구겼다. 너무도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01화 - 그 꼴통 (4)
엠마에게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잔뜩 만들게 해서 혀를 즐겁게 해야지. 최근 들어 달콤한 차가 잘 나오던데 차도 종류별로 쟁여 놔야겠다. 그나저나 인간들의 인쇄술이 발전했다니, 정말 이리 기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인간계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어 인간계로 향하고 싶었지만, 밀려오는 수면욕에 그는 백기를 들었다. 그래, 달콤한 음식을 먹는 것도, 재밌는 책을 읽는 것도 일단 자고 난 다음 하자.
이시스는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법을 이용해 평소 즐겨 입는 부드러운 실크 원피스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로 향했다.
“주무시려고요?”
“응. 내가 일어나기 전까진 깨우지 마. 누가 와서 내 성 깨부수는 거 아닌 이상.”
하아암, 하고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한 이시스는 나른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휘장을 닫았다. 그리고 행복해 죽겠다는 듯 헤벌쭉 미소 지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이시스는 길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
이시스는 정말 딱 100년을 채우고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우선 기지개를 편 후 다시금 침대에 드러누웠다.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기어 나오는 건 부지런한 종들이나 하는 짓이다.
100년 동안 침대에 붙어 있었으면서 질리지도 않는지, 넓은 침대 위를 뒹굴거렸다. 그야말로 완벽한 폐인의 모습이었다. 침대 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집사와 엠마를 시켜 디저트를 먹고 책을 읽는 생활로 1년을 보낸 이시스는 드디어 침대를 기어 나왔다.
침대 위에서 안 움직이긴 했지만, 그래도 1년 동안 뒹굴다 보니 심심하기도 해서 이시스는 아가온의 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성주는 이미 자리를 비운 후였다.
난데없이 찾아온 불청객 이시스를 아가온의 종들은 생각 외로 반겨 주었다. 본디 함부로 주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존재는 마왕이 아닌 이상 못마땅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가온이 무슨 언질을 준 것인지 하나같이 이시스를 반겼다.
“이시스 님이 찾아오시면 이쪽으로 모시라는 주인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뭐? 어디?”
“일단 따라오십시오.”
집사의 말에 따르면 아가온은 몇 년 전에 유희거리를 찾아 인간계로 향했다고 한다. 떠나기 전에 혹시라도 이시스가 자신을 찾아오면 서재로 안내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했다.
집사를 따라 서재에 도착한 이시스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책장 몇 개와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아가온의 서재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책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을 빼고는.
“‘주는 건 아니야.’라고 하시던데요?”
“뭐?”
미간을 찌푸린 이시스는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원래 아가온의 책장엔 이렇게 책이 많지 않았었는데. 그러니까, 지금, 이 책들을 빌려주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깜빡깜빡,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이시스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처음 보는 책들을 귀신같이 캐치한 그는 손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십 권의 책들을 꺼냈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던 수십 권의 책들이 알아서 질서 정연하게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읽고 싶은 책 순서대로 책을 쌓은 이시스는 냉큼 기다란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럴 땐 엠마의 레드베리 쿠키를 입에 물어야 하는데. 하지만 자신의 성으로 이 책들을 가지고 돌아가기엔 그 기다림의 시간마저 아까웠다.
“음? 그림이잖아?”
처음으로 펼친 책은 요리책이었다. 이시스가 소설책이 아닌 요리책을 맨 처음 꺼낸 이유는 최근 엠마의 똑같은 요리, 똑같은 디저트에 지겨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그림 하나와 그 밑에 빼곡히 적혀 있는 글자들. 아무래도 요리법이 정리되어 있는 책인 듯싶었다. 제목도 [밥 아저씨의 참 쉬운 요리 교실]이었다.
휘적휘적 책장을 대충대충 넘겨 보던 이시스는 자신의 눈길을 끄는 페이지에 눈을 치켜떴다. 소제목으로 커다랗게 적혀 있는 [비프스튜 만들기]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비프스튜는 약 1000년 전부터 모든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사랑하고 있는 가장 대중적인 음식이며 5대 영양소가 골고루 갖춰져 있어 건강에도 좋다. 테이안 제국 24대 황제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비프스튜로 꼽았으며…….’
“대중적이면서 인간들이 1000년 동안 사랑해 온 음식?”
호오오. 이시스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인간은 그저 살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는 타 종족과 달리 인간은 수많은 디저트와 음식들을 발명해서 혀를 즐겁게 하는 종족이 아니던가.
인간만큼 요리에 영혼을 바치는 종족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장장 천 년 동안 사랑한 음식이라고? 이시스의 두 눈동자가 다시금 반짝거렸다.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
이시스는 허공에 작게 손짓했다. 뒤틀림과 함께 이공간이 나타나고, 그는 냉큼 책들을 그 이공간에 처박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아가온의 성을 떠났다.
자신의 성으로 워프한 이시스는 헐레벌떡 엠마를 찾았다. 엠마는 귀찮고 짜증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엠마, 비프스튜 만들어. 인간들이 천 년 동안 사랑한 음식이라던데?”
“그건 무슨 병신 같은 소리에요? 인간들이 가장 질려 하는 음식이 아니라요?”
“여기 나와 있어.”
특유의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툭 내뱉었다. 그리곤 이시스가 펼쳐 보이는 책의 페이지를 읽어 내리더니,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밥 아저씨는 무슨. 개나 소나 다 먹는 게 비프스튜예요. 그때그때 있는 거 아무거나 야채, 고기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잡탕인데 무슨.”
“넌 못 믿겠어. 여기 밥 아저씨는 인간들이 천 년 동안 사랑한 음식이라고 했다고.”
“먹을 게 없으니 천 년 동안 어거지로 먹은 거겠죠.”
‘네! 비프스튜는 아주 환상적인 음식이에요! 인간들이 천 년 동안 사랑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죠!’라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약 30년을 인간이자 요리사로 살았던 엠마가 인간의 음식에 대해서 더 잘 알겠지만, 그래도 이시스는 굳게 믿었다. 요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인간들 사이에서 천 년 동안 없어지지 않고 가장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던 비프스튜가 환상적일 맛일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엠마는 인간 시절 거식증 환자가 아니었던가? 요리를 하는 직업을 가지고도 음식을 안 먹어 반송장으로 살았다고 들었는데. 음식을 즐기지 않는 엠마니 환상적인 음식도 그녀에겐 그저 맛없는 소여물이나 다름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시스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만들어 줘.”
“안 돼요.”
“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오는 거절에 이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살기를 내뿜었다. 그런 이시스의 살기를 느낀 엠마는 울컥한 표정으로 그가 갖고 있던 책을 빼앗아 탁자 위에 펼치곤 쾅, 하고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자, 봐요. 준비 재료. 쇠고기, 양파, 당근, 감자 등 각종 야채, 그리고 토마토소스, 화룡점정으로 파슬리! 어느 것 하나 마계에선 구할 수 없는 재료들이에요. 아, 하나 있구나. 물. 물 끓여 드려요?”
“비슷한 재료 못 구해?”
“못 구해요.”
“알아서 잘 만들어 봐.”
“물 끓여 드릴 테니 비프스튜라고 생각하고 드시든가요.”
“……무능한.”
불만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이시스에게 엠마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홱 돌렸다. 어두운 기운을 풀풀 풍기며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끊어 가며 말을 이었다.
“인간계로 가서 구해 오시죠, 주인님. 그게 싫으시면 평소대로 오크고기 수프와 검은 빵이나 드시고요.”
아, 그건 싫다. 오크고기 수프와 검은 빵은 이제 신물이 난다. 불만 어린 표정으로 엠마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이시스는 다시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재료만 구해 오면, 꼭 만들어 주기다?”
“구해 오기나 하시죠.”
뱀파이어 특유의 푸른 입술이 곡선으로 휘어졌다. 이시스는 다짐했다. 기필코 인간들이 천 년 동안이나 사랑해 왔던 음식, 비프스튜를 꼭 먹어 보고야 말겠다고.
***
보통 인간계로 통하는 게이트는 그 매개체가 필요했다. 고위 마족들은 컵, 옷, 책 등의 평범한 물건부터 신체 일부, 종으로 만든 박제 등 아주 다양하게 매개체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그 매개체는 그 본 주인이 가장 중요시하는 물건이어야만 했다.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물건이 다 매개체가 될 수는 없었다. 이시스의 경우는 책이었다.
매개체를 한 곳을 지정해 숨겨 놓으면 마계에서 문을 열 시 그 매개체와 통하게 된다. 때문에 매개체는 인간들이 자주 돌아다니는 곳에는 숨겨 놓을 수 없었다. 마계로 통하는 문을 발견하게 된다면 귀찮은 소란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이시스는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숲 속에 책을 숨겨 두었다. 예상대로라면 자신의 성 안에서 게이트를 연 이시스는 분명 매개체가 숨겨져 있는 숲 속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런데…….
“뭐야?”
“헐.”
미간을 찌푸린 이시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게이트를 통해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 꼬맹이 하나, 그리고 좁아터진 방.
“처, 천사?”
“틀렸다, 꼬맹아. 난 천사 따위가 아니라 고귀하고 아름다운 마족이야. 한 번만 더 날 토 나오는 천계 조류 새끼들 따위로 부른다면 산 채로 목을 따 버리겠다.”
흐흐흐, 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구겨 사악하게 웃은 이시스는 자신의 말에도 겁먹기는커녕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기억이 분명하다면 매개체는 인적 드문 숲 속에 있어야만 했다. 설사, 인간이 그 주변을 돌아다니더라도 고위 마족의 매개체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만질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 매개체가 왜 이런 하찮은 인간 꼬마 따위의 좁은 방구석 안에서 쫙 펼쳐져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된단 말이야.
이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들었다. 방바닥에 펼쳐져 있던 책이 허공에 떠올라 그의 손에 안착했다.
“아가온, 이 망할 자식이…….”
책 표지에 적혀 있는 아가온의 기운과 [재밌을 것 같아서 그랬어♡]라는 토 나오는 메모 하나. 눈을 감으며 한숨을 푹 내쉰 이시스는 여전히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걸 어떻게 한담.
“이봐, 꼬맹이.”
“네!”
“날 못 본 척하는 게 네 유일한 살길이다. 알겠지?”
“악마신가요? 제가 악마를 소환한 거예요?!”
“…….”
또다시 겁을 먹기는커녕 개소리를 지껄이는 꼬마의 모습에 이시스의 이마에 힘줄 하나가 돋아났다. 물어뜯고 파괴욕만 드러내는 누구누구와 다르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저렇게 올려다보니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사실, 이시스는 자신은 모르겠지만 타 마족들과 달리 너그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머릿속으론 아, 이 귀찮은 꼬맹이를 당장 찢어 죽여 버릴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행동으로 실천하진 못하는 모습만 봐도 답이 딱 나왔다.
“아냐. 넌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자고 일어나면 다 잊는 거야.”
“악마군요! 악마는 원래 이렇게 생겼구나! 천사보다 더 아름다워요!”
“망할…….”
밀려오는 두통에 이시스는 손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철부지 꼬맹이가 발견할 게 뭐람. 이 망할 자식을 그냥. 다음번에 만나면 그 빌어먹을 물건을 두 동강 내 버리겠어…….
악독한 인간이 발견했으면 쉽게 죽이기라도 했을 텐데. 이리 천진난만한 핏덩어리가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이건 뭐 손도 못 대겠다. 아, 마신이시여. 이시스는 진심으로 마신을 불렀다.
“잘 들어, 꼬맹아. 어딜 가서 악마를 소환했다느니, 악마를 봤다느니 하면 넌 악마에 영혼을 팔았다며 아마 화형을 당할 거다. 아니면 산 채로 실험체가 될 수도 있겠지. 그걸 원하지는 않지?”
아주 바보 천치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린 이시스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절대로 날 봤다는 소리를 다른 인간에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럼 이만.”
“악마님! 가지 마세요!”
“켁!”
워프 마법으로 자리를 뜨려던 찰나, 아이가 다리에 들러붙어 버렸다. 이시스는 짜증 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아이를 돌아보았다.
“꺼져! 난 비프스튜를 먹어야 한다고!”
“비프스튜?”
“오, 너도 알아? 비프스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근엄하게 눈과 목소리를 내리깔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비프스튜를 알아듣는 듯한 꼬마의 모습에 이시스가 눈을 반짝였다.
“비프스튜가 드시고 싶으신 거예요, 악마님?”
“그래! 난 빨리 비프스튜 재료를 구해서 엠마에게 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거 놔.”
그냥 힘으로 뿌리치고 가 버리면 될 것을. 이시스는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었다. 분명 그 꼴통 꼬맹이 때문에 꼬맹이란 꼬맹이들에겐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게 틀림없다며 그는 이를 갈았다.(사실 이시스는 작고 약한 생물에 원래 약했다.)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뭐?”
아이의 외침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비프스튜를? 네가? 요리의 종족이라는 인간들이 천 년 동안 사랑한 그 훌륭하고 환상적인 음식을, 고작 열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핏덩이가 만든다고?
어이없어하는 이시스의 눈빛에서 불신을 읽은 것인지, 아이는 활짝 웃으며 다시금 대답했다.
“전 여관에서 일하고 있어요. 비프스튜는 수십 번도 더 만들어 본 걸요!”
“정말이냐?”
“네! 여관 손님들도 제가 만든 스튜가 맛있다고 팁도 주셨어요! 저 정말 잘 만들 수 있어요. 그러니까 가지 마세요, 네?”
“흠.”
아이의 말에 이시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러고 보니 엠마가 뱀파이어가 된 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했지? 족히 500년은 넘었다고 알고 있는데. 500년이야 마계에서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인간계에서는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다.
그런 엠마가 ‘밥 아저씨의 참 쉬운 요리 교실’의 책에서 나오는 비프스튜를 그대로 만들 수 있을까? 엠마가 만드는 비프스튜라면 그러니까 500년 전의 비프스튜라는 얘긴데……차라리 이 꼬맹이가 만드는 게 더 인간들이 사랑하는 비프스튜에 가깝지 않을까?
골똘히 생각하던 이시스는 힐끗 자신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빨리 먹어 보고 싶기도 하고, 그냥 모른 척 넘어가 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좋아. 한 번 만들어 봐.”
“정말요? 그럼 안 가실 거죠?”
“그래. 그러니까 빨리 만들어 보기나 해.”
이시스의 말에 아이는 다시금 활짝 미소 지으며 ‘네!’ 하고 크게 대답했다.
아이의 이름은 제이라고 했다. 어차피 아이를 ‘꼬맹이’라고밖에 부르지 않는 이시스는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된다고 툴툴거렸지만 아이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이시스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이의 작은 방은 여관에서 창고로 쓰던 곳이었다. 오갈 데 없는 천애고아인 자신을 여관 주인이 거둬 주었다고 아이는 말했다. 뚱한 표정으로 귀찮다는 듯 먼 산만 바라보는 이시스에게 아이는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아무래도 말이 많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듯싶었다. 자신의 부모님은 누군지 모르지만 분명 좋은 분이셨을 거라는 둥, 손님들 중에 용병 아저씨 한 분이 계시는데 그 아저씨는 험악한 외모와는 달리 올 때마다 팁을 꼬박꼬박 주셔서 그 아저씨가 참 좋다는 둥, 설거지가 조금만 쌓여도 주인아저씨가 화를 내서 그때그때 접시를 씻어 줘야 한다는 둥 끊임없이 조잘거리면서도 정작 야채 다듬기, 고기 썰기 등 할 건 다 하는 아이가 이젠 신기할 지경이었다.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뜨겠군. 이시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쇠고기는 내일 만들 스테이크 재료예요. 질이 아주 좋아요! 스튜용 고기와는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악마님이 드실 거니까 특별히 제가 선심 쓰는 거예요.”
제이는 싱싱해 보이는 고기를 썰며 콧대를 세웠다. 제이가 했던 말들은 들은 척 만 척 흘려보내던 이시스는 식재료에 대한 말이 나오자 호오, 하고 관심을 보였다.
“그나저나, 너 언제까지 날 악마라고 부를 거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악마님이시잖아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악마도 우리처럼 이름이 있나요?”
“당연하지. 하찮은 인간 따위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이름이지만, 넌 내게 비프스튜를 만들어 주기로 했으니 특별히 부르는 것을 허락해 줄게. 난 이시스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부를 수 없는 고귀한 이름’을 비프스튜에 팔아먹은 이시스는 의기양양하게 후후, 하고 웃음 지었다.
“와아, 악마님 얼굴처럼 예쁜 이름이네요!”
“악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그나저나 내일 쓸 좋은 고기라면 그 깐깐한 여관 주인이 트집 잡지 않겠어?”
들은 척 만 척하더니, 그래도 제이가 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마치 자신을 걱정해 주는 듯한 이시스의 말에 제이는 감동했다는 듯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주인아저씨는 설거지나 청소 따위만 신경 쓰시거든요. 식재료가 없어지거나 해도 잘 모르세요. 그래서 제가 몰래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나눠 주곤 해요.”
“흐응.”
완전 어리벙벙한 바보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영악한 구석이 있었군. 픽,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린 이시스는 계속해서 제이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고기와 야채를 깍둑썰기 하고, 깨끗한 물을 끓이고 소금을 뿌리고.
생각보다 요리법은 간단해 보였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비프스튜의 고운 자태에 이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완성이에요. 한 번 드셔 보시겠어요?”
제이의 말에 이시스는 고민하지 않고 냉큼 수저를 들었다. 기대 어린 표정으로 한 숟가락을 퍼서 입에 가져간 이시스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오오, 하고 감탄했다.
확실히 마계에서 흔히 먹는 오크고기 수프나 검은 빵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과연, 인간들이 천 년간 사랑해 왔던 음식이라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
연신 감탄을 감추지 못하며 이시스는 금방 한 솥을 다 비웠다. 만족스러운 듯 나른한 한숨을 내쉬는 이시스에게 제이는 또다시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것도 드셔 보시겠어요? 주인아주머니께서 만드신 특제 푸딩이에요!”
“푸딩? 그게 뭐지?”
“달콤한 디저트에요. 아주 맛있어요. 사실 아주머니께서 저에게 주신 건데 악마님께 드릴게요.”
저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먹지 못하는 귀한 거예요, 하고 말하는 제이는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달콤한 디저트라는 말에 얼굴이 밝아진 이시스는 어린아이 손바닥 크기의 푸딩을 한입에 먹어 치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이는 ‘난 한 시간 동안 아껴서 먹는데, 역시 악마님은 다르네요!’ 하고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물컹물컹하고 부드러운 질감과 달콤한 맛, 그리고 향긋한 바닐라 향기에 취해 있는 이시스의 눈은 거의 하트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달콤한 푸딩의 여파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이시스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는 제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인간계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기분 좋게 웃었다.
비프스튜도, 푸딩도 아주 환상적이었다. 사실 요리 수준이 나날이 발전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비프스튜란 그저 고기와 야채를 넣고 끓인 단순한 음식이었지만 마계의 맛없는 음식에 익숙해져 있던 이시스에겐 그야말로 환상의 요리로 다가왔던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이에게 이시스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꼬맹아. 네가 만든 비프스튜도 푸딩도 아주 맛있었어. 그 답례로 네가 원하는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줄게. 물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만.”
부를 원하면 부를, 권력을 원하면 권력을 쥐여 주지. 이시스는 그렇게 덧붙였다. 이래 봬도 고위 마족이다. 인간이 흔히 바라는 돈이나 명예, 권력 등을 이루어 주는 것은 껌이었다.
이시스의 말에 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드래곤을 보고 싶어요!”
그는 순식간에 얼굴을 구겼다. 너무도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