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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트 블뤼테 5화
02화 - 테른 산맥 (1)
사실 제이는 드래곤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관심이 아니라 아예 광팬 수준이었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을 하고 드물게 주인아주머니에게 용돈을 받으면 그 돈을 모으고 모아서 드래곤과 관련된 책이나 물건을 사는 데에 썼다.
제이의 보물 1호는 드래곤 서적, 드래곤 모형이었다. 이 두 가지는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보물이었다. 제이의 소원은 드래곤을 실제로 보는 것이었다.
제이의 말을 들은 이시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그냥 돈이나 출세는 어떠냐고 물어도 아이는 확고했다. 차라리 부와 명예를 안겨 주는 것이 백배는 더 쉬울 것이다. 그런데 하필 드래곤이라니.
곤란하다는 듯한 이시스의 표정에 제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돼요? 이시스 님이 이뤄 주실 수 없는 소원이에요?”
“아니 뭐……그런 건 아니다만.”
다만, 그 도마뱀 새끼들은 원체 마족들을 싫어해서 말이지. 이시스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삼켰다. 사실 이시스도 딱 잡아 말하자면 이제 갓 성체가 된 새파란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성체가 되고 자신의 성을 가진 후에는 성에만 틀어박혀 책만 주구장창 읽어 댔고, 인간계에 몇 번 간 적은 있지만 그 또한 책을 구하기 위해서가 다였다.
그러다 마왕성으로 납치(?)되어 꼴통 꼬맹이 하나 돌보느라 이종족은 인간 외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드래곤은 그 또한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드래곤의 존재는 잘 알고 있었다. 마법을 위한 생명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법으로 드래곤을 이길 종족은 없었다. 마왕이나 천사장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물론 웬만한 고위 마족들도 성체 드래곤급 힘을 가지긴 했지만 딱 잘라 말하자면 마법 하나만으론 드래곤을 이길 수가 없었다. 드래곤은 그 개체 수가 백을 넘지 않았으며 인간계에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살아갔다.
물론 인간이 살 수 없는 눈으로 뒤덮인 산맥이나 화산 근처, 바닷속 등이 드래곤들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보니 살면서 드래곤을 실제로 본 인간은 거의 드물었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드래곤은 전설의 생명체나 다름없었다.
제이의 실망 어린 표정에 잠시나마 고민에 빠졌던 이시스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성급히 입을 열었다.
“이봐. 꼬맹아.”
“네?”
“조금만 기다려. 드래곤 보게 해 줄게.”
“정말요?!”
“그래.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 아, 그리고 이 책은 아무한테도 보여 주면 안 돼. 알겠어?”
“네!”
기운을 차린 제이의 모습에 이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마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드래곤을 볼 방법, 한 가지가 떠올랐다.
바로 자신의 어머니, 셀마였다. 셀마는 고위 마족 중에서도 서열이 상위권이었으며 한때는 장로직에 있었던 여자였다. 이젠 귀찮은 일은 싫다며 장로직을 다른 자에게 떠넘기고 여행만 주구장창 하고 있는 날라리였다.
분명 기억이 확실하다면 셀마가 인간계에서 유희를 즐길 때 드래곤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 드래곤과 몇십 년을 교류했다고도 했었다. 그렇다면 셀마를 통해 드래곤과 만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다.
사실 이시스는 자신이 왜 그 어리벙벙한 꼬마의 소원을 이토록 열심히 들어주려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하찮은 인간 꼬맹이 따위, 그냥 무시하면 그만인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잘 안 가자 그는 대충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라고 결론을 내렸다.
마계로 돌아오자마자 이시스는 셀마의 성으로 향했다. 셀마의 성은 그녀의 취향답게 성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명색이 고위 마족이니 겉치레로 ‘성’이라고 부를 뿐, 그녀의 거처는 절대로 성이라고 칭할 정도가 못 되었다.
셀마의 성은 그러니까 땅 밑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동굴 속 내리막길로 쭉 걸어가다 보면 흙으로 되어 있는 문 하나가 나왔다. 아주 미로가 따로 없을 정도로 셀마의 성은 넓고, 초라했다. 물론 있을 건 다 있었다. 가구도, 종도, 집사도.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난 정말 지상이 좋아. 이시스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내저었다.
“마왕자 보모 노릇에서 졸업했다더니, 정말인가 보구나.”
근 250년 만에 만나는 아들의 모습에도 셀마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뭐, 마족에게 모자간의 애틋한 정을 바라는 것 따위가 모순이지만.
흙으로 되어 있는 테이블과 의자에 앉은 셀마는 귀찮다는 듯 아들에게 툭 말을 내던졌다.
“그래, 무슨 일이니?”
“어머니, 인간계에서 여행했다고 하셨죠?”
“그래. 그랬었지. 근데 그건 왜?”
“그때 드래곤 만났다고 하셨죠? 제 기억이 맞다면 꽤 친하게 지냈다면서요?”
이시스의 말에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게 친한 건가. 헷갈리는구나. 원래 드래곤이나 우리나 꿈을 꿀 땐 그 역할에 맞게 행동하니…….”
“일단 만난 건 확실하죠? 몇십 년 동안 교류도 하셨고요?”
“그래. 그건 맞다. 근데 그건 왜?”
“그 드래곤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서요.”
“흠…….”
이시스의 말에 그녀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내가 기억하기론 아마 테른 산맥에 큰 동굴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 레어를 짓고 살고 있을 거다. 이름은 알디스, 이제 막 3천 살 정도 되었을 걸? 그것 말고는 딱히 아는 게 없구나.”
“테른 산맥이요?”
“그래. 그쪽 지역이 원래 실버 드래곤들의 영역이거든. 근데 그건 왜?”
“아아, 그런 게 있어요. 제가 드래곤을 좀 만나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네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셀마는 작게 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잡아먹혀도 난 모른다, 아가야.”
“설마 잡아먹히기야 하겠어요?”
에이, 어머니도 참. 하하 웃으며 덧붙이는 이시스에게 그녀는 ‘농담 아닌데…….’라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알기론 자신의 아들 이시스는 고위 마족들 중에서도 힘이 약한 편에 속했다.
성격 또한 마족보단 인간에 가까웠고. 물론 인간과 비교하자면 보통 인간들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고위 마족이라기엔 이시스의 성향이나 성격은 좀 별종에 속했다.
뭐, 잡아먹히든 말든 이제 성체이니 자신과는 별 상관없긴 하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셀마는 마시던 차를 계속해서 홀짝였다. 자신이 기억하기론 그 도마뱀 양반, 분명 얼마 전에…….
“어머나. 가 버렸네.”
어미로서의 최소한의 양심 때문에 그 사실을 가르쳐 주려던 셀마는 이미 사라져 버린 이시스의 빈자리를 보며 생긋 웃었다. 뭐 어쩌겠는가. 자신은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바보 같은 아들놈이 못 듣고 날라 버린 건데.
“엄만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못 들은 건 너란다, 이시스.”
셀마는 호호호, 하고 재밌다는 듯 웃음 지었다.
***
“이시스 님!”
“얌전히 기다렸어?”
“네!”
곧바로 인간계로 돌아온 이시스는 열렬히 자신을 반기는 제이의 모습에 의기양양하게 웃음 지었다. 일단 드래곤이 있는 장소는 알아냈다. 뭐, 셀마의 아들이라고 그러면 적어도 잡아먹진 않겠지. 그래도 명색이 고위 마족인데.
최악의 경우 꼬맹이가 잡아먹히는 일은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그 생각을 하자 이시스는 무언가가 껄끄러웠다.
“야, 꼬맹아. 너 근데 만약에 도마뱀한테 잡아먹히면 어떡할래?”
“네?”
제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시스는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좀 무서워? 그럼 지금이라도 소원을 바꾸…….”
“괜찮아요!”
다시금 웃으며 외치는 제이의 모습에 이시스는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도마뱀의 밥이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다고? 저번에 그래도 영악한 면이 있었다고 했던 말 다 취소다. 이거 정말 바보 천치 아냐.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딴 도마뱀 하나 보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속으로 쯧쯧 혀를 차는 이시스와는 반대되게 제이는 정말 괜찮다는 듯 눈을 접고 웃었다.
“드래곤을 보는 게 제 평생소원이었는걸요? 죽는 한이 있어도 전 꼭 드래곤을 만나 보고 싶어요.”
“그래? 그럼 뭐. 진짜 잡아먹혀도 난 안 구해 준다.”
“네!”
제이는 헤헤, 하고 웃음 지었다. 그런 천진난만한 표정에 어이가 없어진 이시스는 다시금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잡아먹힌다면 고작 10년 남짓 살고 죽어 버리는 건데 뭐가 괜찮다는 건지. 아무래도 정말 좀 모자란 놈인가 싶었다.
“그럼, 갈까.”
“네?”
“네는 무슨 네야. 용새끼 보고 싶다며? 그럼 떠나야지. 내가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산만 한 도마뱀 여기까지 데려올 재주는 없어.”
헐. 그렇구나……. 제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래도 여관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듯싶었다. 생글생글 미소 짓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울상이 되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아이의 모습에 다시금 낮은 한숨을 내쉰 이시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해 주마.”
“이시스 님이요?”
“그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제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시스는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다음 날 날이 밝은 후 이시스는 마법을 이용해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했다. 둔갑이라고 해 봤자 그저 좀 더 인간답게 피부색엔 생기를 부여하고 뾰족한 귀를 둥글게 만들었으며 날카롭고 붉은 눈동자를 평범한 갈색 눈동자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인간 귀족들이 입는 옷 또한 마법으로 만들어 낸 이시스는 아주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여관을 방문했다. 어젯밤 아이가 끊임없이 말해 주던 여관 주인 부부는 딱 아이가 말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돈을 밝히는 배 나온 중년 남자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번지르르하고 딱 봐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치는 이시스의 모습에 연신 싱글벙글 미소 지으며 알랑댔다. 여주인은 그와 상반되게 확실히 인품이 부드러워 보였다.
“혹시 제이라는 아이가 있나?”
“예? 아, 예에. 그건 왜 물으시는지…….”
“그 아이가 내 형님의 아이와 아주 닮았더군. 아이를 잃은 형님께서 제이를 후원하고 싶어 하신다.”
“예에?!”
주인 부부는 이시스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길거리에서 발견한 갓난아이가 딱 봐도 돈 많은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과 연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외모가 귀티 나면 또 몰라, 제이는 웃을 때 눈웃음이 귀엽게 보이는 것 말고는 어디 하나 귀티 나는 구석이 없었다. 작은 눈과 주근깨 가득한 얼굴. 딱 봐도 그저 흔하디흔한 평민이었다.
“아주 데려가겠다는 것은 아니나, 형님께서 직접 보고 싶어 하시더군.”
이시스는 탁자 위에 주머니 하나를 툭 내던졌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남자는 냉큼 주머니를 낚아채 열어 보았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만 같은 표정이 되었다. 주머니 안에는 딱 봐도 값이 엄청날 것 같은 보석 몇 개와 금화가 있었다.
대충 계산해도 1년은 먹고살 만한 돈이다……! 그렇게 판단한 남자는 입이 귀에 걸려 두 손을 모으고 다시금 이시스에게 알랑대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리. 그러셨군요. 정말 은혜롭고 훌륭하십니다! 쓸모없는 어린아이를 거두느라 아주 힘들기 그지없었지요. 사람이 덕을 쌓으면 그대로 돌아온다더니, 그게 정말인가 봅니다.”
남자의 말에 여주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덕은 무슨. 아이가 생기지 않아 친자식으로 생각하고 거둔 제이를 그저 일만 시키고 부려 먹을 땐 언제고.
남편과는 다르게 제이를 진심으로 아끼고 자식처럼 생각하는 여주인은 남편의 뻔뻔한 거짓말에 울화가 치밀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아이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여관에서 일을 한다고 하니 아주 안타까워하셨지. 직접 만나 여러 가지를 가르치고 싶어 하셨다.”
“아, 예, 예에! 저, 저희가 아주 빚더미에 앉아 있다 보니 제이를 번듯하게 가르치지도 못하고, 그럴 때마다 너무너무 가슴이 찢어지고 아팠습죠……. 불쌍한 것.”
‘불쌍하기는. 학교는 돈이 들어 보내지 않는다고 으름장을 놨던 주제에.’
여주인은 다시금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저 아름답고 기품 있는 귀족 나리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럼, 아이를 불러 주겠나?”
“예에, 물론이지요!”
남자는 혹여나 이시스가 보석이 담긴 주머니를 다시 가져갈까 봐 서둘러 품 안에 숨기곤 활짝 웃었다. 그리고 2층으로 향해 제이를 불러들였다.
제이는 어젯밤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인간처럼 보이는 이시스의 모습에 신기해하며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그러다 이내 절대로 자신을 알은체하면 안 된다는 이시스의 말이 떠오르자 웃음을 지우고 입을 꾹 닫았다.
“욘석아, 냉큼 인사드리지 못해?”
“네, 네에.”
남자는 제이의 등을 억지로 숙여 이시스에게 인사를 시켰다. 아이를 함부로 대하는 남자의 모습에 이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이는 당장이라도 이시스에게 ‘아름다운 이시스 님!’ 하고 부르며 달려가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이와 이시스의 얼굴을 불안한 표정으로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여주인은 머뭇머뭇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그런데…… 어느 가문의 분이신지.”
“어허! 당신 그 무슨 무례한 태도야! 얼른 사과드려!”
혹여나 이 아름다운 남자가 제이를 데려가 해코지라도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된 여주인은 우물쭈물 눈동자를 굴렸다. 여주인의 쓸데없는 입놀림에 혹여나 이시스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남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내를 질책했다.
그래도 저 여자는 꼬맹이가 걱정되긴 하나 보군. 속으로 작게 웃음을 터트린 이시스는 입을 열었다.
“말해도 잘 모를 걸세.”
“아, 예에…….”
“걱정하지 마시게. 아이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네.”
“아이고, 해라니요! 이 여편네가 멋모르고 나불댄 것입니다. 그러니 기분 푸시지요, 나리.”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알랑대는 남자의 모습에 이시스의 눈초리가 다시금 사나워졌다.
“자네한테 한 말이 아니다. 그 입 좀 다물어 주겠나?”
“예, 예에.”
자신에게는 반말을 찍찍 내뱉으면서 아내에겐 존중하는 듯한 말투를 쓰는 이시스의 모습에 남자의 표정이 뒤틀렸다. 여주인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중이었다.
그런 여주인을 안심시키듯 이시스는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형님은 좋은 분이시지. 아마 아이를 친자식처럼 잘 챙겨 주실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예에……. 제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나리.”
“그럼, 아이를 데려가겠네.”
“예! 어서 데려가시지요. 제이, 이놈. 나리께 정중히, 또 정중히 예의 바른 모습만 보여야 한다! 알겠어?”
“네, 아저씨.”
남자가 목소리를 깔고 다그치듯 외치자 제이는 겁먹은 듯 두 손을 모으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시스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사악한 고위 마족인 자신 앞에서는 그리 조잘거리고 겁 하나 먹지 않더니, 고작 저 인간 남자가 무서워서 위축되는 꼴이 웃겼다. 겁을 먹는 상대가 틀렸잖아, 멍청한 꼬맹이가. 얼마나 자신을 무르게 봤으면(이시스는 자신이 무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등을 떠미는 남자의 행동에 이시스에게 다가간 제이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참았다. 그렇게 이시스는 제이를 데리고 여관을 나올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관을 나오자마자 제이는 언제 긴장하고 겁먹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입을 조잘거렸다. 대마족인 자신보다 그 하찮은 인간 남자를 더 무서워하다니. 이시스는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이시스 님, 너무너무 멋졌어요! 한 번만 더 웃어 주시면 안 돼요?”
“싫어.”
“웃어 주세요, 네? 너무너무 예뻤단 말이에요.”
“나 예쁜 건 나도 잘 알아.”
툴툴거리긴 하지만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이시스의 모습에 제이는 헤헤, 하고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제이는 이시스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에게 약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듯했다.
힐끗 제이를 돌아본 이시스는 아이가 입고 있는 복장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뭐야, 저 후줄근하고 초라한 옷차림은. 옆에 데리고 다니기 창피하잖아. 얇아서 분명 추울 것 같은데.
미간을 좁히고 제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시스는 작게 손짓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러냐는 듯 이시스를 올려다보던 제이는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이 확 바뀌자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우와! 이시스 님! 제 옷이 바뀌었어요! 이시스 님이 하신 거예요?”
“조용히 해. 시끄러워.”
반질반질하고 질 좋은, 부잣집 도련님들이나 입을 법한 옷차림으로 변하자 제이는 연신 우와, 우와, 감탄하며 눈을 빛냈다. 그런 제이를 힐끗 바라보며 이시스는 한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좀 낫다. 이제 좀 봐 줄 만하군. 아까까진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비렁뱅이가 아우야, 하고 부를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새로운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이는 싱글벙글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렇게 제이의 이시스를 향한 애정도가 하늘까지 치솟고 있던 와중, 번화가를 걷던 이시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장신구들을 파는 작은 노점상이었다.
“이시스 님?”
조개껍데기, 세공이 되지 않은 돌멩이 등으로 만들어진 장신구에 눈이 팔려 있는 이시스에게 제이는 쪼르르 달려왔다.
여태껏 마계에서 투명하고 아름다운 보석만 접해 왔던 이시스에게 이런 장신구는 아주 생소한 것이었다. 붉은 돌을 천 끈으로 엮은 목걸이를 바라보며 이시스는 제이에게 물었다.
“이건 뭐지? 처음 보는 보석인데.”
“네? 아아, 저건 보석이 아니에요. 그냥 예쁜 색의 돌을 깎아서 만든 거예요!”
“호오. 인간들은 돌멩이로도 장신구를 만드는 모양이군?”
이시스의 말을 들은 장신구 상인은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인간이면서 인간이니 하는 말을 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02화 - 테른 산맥 (1)
사실 제이는 드래곤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관심이 아니라 아예 광팬 수준이었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을 하고 드물게 주인아주머니에게 용돈을 받으면 그 돈을 모으고 모아서 드래곤과 관련된 책이나 물건을 사는 데에 썼다.
제이의 보물 1호는 드래곤 서적, 드래곤 모형이었다. 이 두 가지는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보물이었다. 제이의 소원은 드래곤을 실제로 보는 것이었다.
제이의 말을 들은 이시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그냥 돈이나 출세는 어떠냐고 물어도 아이는 확고했다. 차라리 부와 명예를 안겨 주는 것이 백배는 더 쉬울 것이다. 그런데 하필 드래곤이라니.
곤란하다는 듯한 이시스의 표정에 제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돼요? 이시스 님이 이뤄 주실 수 없는 소원이에요?”
“아니 뭐……그런 건 아니다만.”
다만, 그 도마뱀 새끼들은 원체 마족들을 싫어해서 말이지. 이시스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삼켰다. 사실 이시스도 딱 잡아 말하자면 이제 갓 성체가 된 새파란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성체가 되고 자신의 성을 가진 후에는 성에만 틀어박혀 책만 주구장창 읽어 댔고, 인간계에 몇 번 간 적은 있지만 그 또한 책을 구하기 위해서가 다였다.
그러다 마왕성으로 납치(?)되어 꼴통 꼬맹이 하나 돌보느라 이종족은 인간 외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드래곤은 그 또한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드래곤의 존재는 잘 알고 있었다. 마법을 위한 생명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법으로 드래곤을 이길 종족은 없었다. 마왕이나 천사장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물론 웬만한 고위 마족들도 성체 드래곤급 힘을 가지긴 했지만 딱 잘라 말하자면 마법 하나만으론 드래곤을 이길 수가 없었다. 드래곤은 그 개체 수가 백을 넘지 않았으며 인간계에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살아갔다.
물론 인간이 살 수 없는 눈으로 뒤덮인 산맥이나 화산 근처, 바닷속 등이 드래곤들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보니 살면서 드래곤을 실제로 본 인간은 거의 드물었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드래곤은 전설의 생명체나 다름없었다.
제이의 실망 어린 표정에 잠시나마 고민에 빠졌던 이시스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성급히 입을 열었다.
“이봐. 꼬맹아.”
“네?”
“조금만 기다려. 드래곤 보게 해 줄게.”
“정말요?!”
“그래.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 아, 그리고 이 책은 아무한테도 보여 주면 안 돼. 알겠어?”
“네!”
기운을 차린 제이의 모습에 이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마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드래곤을 볼 방법, 한 가지가 떠올랐다.
바로 자신의 어머니, 셀마였다. 셀마는 고위 마족 중에서도 서열이 상위권이었으며 한때는 장로직에 있었던 여자였다. 이젠 귀찮은 일은 싫다며 장로직을 다른 자에게 떠넘기고 여행만 주구장창 하고 있는 날라리였다.
분명 기억이 확실하다면 셀마가 인간계에서 유희를 즐길 때 드래곤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 드래곤과 몇십 년을 교류했다고도 했었다. 그렇다면 셀마를 통해 드래곤과 만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다.
사실 이시스는 자신이 왜 그 어리벙벙한 꼬마의 소원을 이토록 열심히 들어주려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하찮은 인간 꼬맹이 따위, 그냥 무시하면 그만인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잘 안 가자 그는 대충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라고 결론을 내렸다.
마계로 돌아오자마자 이시스는 셀마의 성으로 향했다. 셀마의 성은 그녀의 취향답게 성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명색이 고위 마족이니 겉치레로 ‘성’이라고 부를 뿐, 그녀의 거처는 절대로 성이라고 칭할 정도가 못 되었다.
셀마의 성은 그러니까 땅 밑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동굴 속 내리막길로 쭉 걸어가다 보면 흙으로 되어 있는 문 하나가 나왔다. 아주 미로가 따로 없을 정도로 셀마의 성은 넓고, 초라했다. 물론 있을 건 다 있었다. 가구도, 종도, 집사도.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난 정말 지상이 좋아. 이시스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내저었다.
“마왕자 보모 노릇에서 졸업했다더니, 정말인가 보구나.”
근 250년 만에 만나는 아들의 모습에도 셀마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뭐, 마족에게 모자간의 애틋한 정을 바라는 것 따위가 모순이지만.
흙으로 되어 있는 테이블과 의자에 앉은 셀마는 귀찮다는 듯 아들에게 툭 말을 내던졌다.
“그래, 무슨 일이니?”
“어머니, 인간계에서 여행했다고 하셨죠?”
“그래. 그랬었지. 근데 그건 왜?”
“그때 드래곤 만났다고 하셨죠? 제 기억이 맞다면 꽤 친하게 지냈다면서요?”
이시스의 말에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게 친한 건가. 헷갈리는구나. 원래 드래곤이나 우리나 꿈을 꿀 땐 그 역할에 맞게 행동하니…….”
“일단 만난 건 확실하죠? 몇십 년 동안 교류도 하셨고요?”
“그래. 그건 맞다. 근데 그건 왜?”
“그 드래곤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서요.”
“흠…….”
이시스의 말에 그녀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내가 기억하기론 아마 테른 산맥에 큰 동굴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 레어를 짓고 살고 있을 거다. 이름은 알디스, 이제 막 3천 살 정도 되었을 걸? 그것 말고는 딱히 아는 게 없구나.”
“테른 산맥이요?”
“그래. 그쪽 지역이 원래 실버 드래곤들의 영역이거든. 근데 그건 왜?”
“아아, 그런 게 있어요. 제가 드래곤을 좀 만나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네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셀마는 작게 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잡아먹혀도 난 모른다, 아가야.”
“설마 잡아먹히기야 하겠어요?”
에이, 어머니도 참. 하하 웃으며 덧붙이는 이시스에게 그녀는 ‘농담 아닌데…….’라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알기론 자신의 아들 이시스는 고위 마족들 중에서도 힘이 약한 편에 속했다.
성격 또한 마족보단 인간에 가까웠고. 물론 인간과 비교하자면 보통 인간들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고위 마족이라기엔 이시스의 성향이나 성격은 좀 별종에 속했다.
뭐, 잡아먹히든 말든 이제 성체이니 자신과는 별 상관없긴 하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셀마는 마시던 차를 계속해서 홀짝였다. 자신이 기억하기론 그 도마뱀 양반, 분명 얼마 전에…….
“어머나. 가 버렸네.”
어미로서의 최소한의 양심 때문에 그 사실을 가르쳐 주려던 셀마는 이미 사라져 버린 이시스의 빈자리를 보며 생긋 웃었다. 뭐 어쩌겠는가. 자신은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바보 같은 아들놈이 못 듣고 날라 버린 건데.
“엄만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못 들은 건 너란다, 이시스.”
셀마는 호호호, 하고 재밌다는 듯 웃음 지었다.
***
“이시스 님!”
“얌전히 기다렸어?”
“네!”
곧바로 인간계로 돌아온 이시스는 열렬히 자신을 반기는 제이의 모습에 의기양양하게 웃음 지었다. 일단 드래곤이 있는 장소는 알아냈다. 뭐, 셀마의 아들이라고 그러면 적어도 잡아먹진 않겠지. 그래도 명색이 고위 마족인데.
최악의 경우 꼬맹이가 잡아먹히는 일은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그 생각을 하자 이시스는 무언가가 껄끄러웠다.
“야, 꼬맹아. 너 근데 만약에 도마뱀한테 잡아먹히면 어떡할래?”
“네?”
제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시스는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좀 무서워? 그럼 지금이라도 소원을 바꾸…….”
“괜찮아요!”
다시금 웃으며 외치는 제이의 모습에 이시스는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도마뱀의 밥이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다고? 저번에 그래도 영악한 면이 있었다고 했던 말 다 취소다. 이거 정말 바보 천치 아냐.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딴 도마뱀 하나 보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속으로 쯧쯧 혀를 차는 이시스와는 반대되게 제이는 정말 괜찮다는 듯 눈을 접고 웃었다.
“드래곤을 보는 게 제 평생소원이었는걸요? 죽는 한이 있어도 전 꼭 드래곤을 만나 보고 싶어요.”
“그래? 그럼 뭐. 진짜 잡아먹혀도 난 안 구해 준다.”
“네!”
제이는 헤헤, 하고 웃음 지었다. 그런 천진난만한 표정에 어이가 없어진 이시스는 다시금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잡아먹힌다면 고작 10년 남짓 살고 죽어 버리는 건데 뭐가 괜찮다는 건지. 아무래도 정말 좀 모자란 놈인가 싶었다.
“그럼, 갈까.”
“네?”
“네는 무슨 네야. 용새끼 보고 싶다며? 그럼 떠나야지. 내가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산만 한 도마뱀 여기까지 데려올 재주는 없어.”
헐. 그렇구나……. 제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래도 여관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듯싶었다. 생글생글 미소 짓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울상이 되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아이의 모습에 다시금 낮은 한숨을 내쉰 이시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해 주마.”
“이시스 님이요?”
“그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제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시스는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다음 날 날이 밝은 후 이시스는 마법을 이용해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했다. 둔갑이라고 해 봤자 그저 좀 더 인간답게 피부색엔 생기를 부여하고 뾰족한 귀를 둥글게 만들었으며 날카롭고 붉은 눈동자를 평범한 갈색 눈동자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인간 귀족들이 입는 옷 또한 마법으로 만들어 낸 이시스는 아주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여관을 방문했다. 어젯밤 아이가 끊임없이 말해 주던 여관 주인 부부는 딱 아이가 말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돈을 밝히는 배 나온 중년 남자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번지르르하고 딱 봐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치는 이시스의 모습에 연신 싱글벙글 미소 지으며 알랑댔다. 여주인은 그와 상반되게 확실히 인품이 부드러워 보였다.
“혹시 제이라는 아이가 있나?”
“예? 아, 예에. 그건 왜 물으시는지…….”
“그 아이가 내 형님의 아이와 아주 닮았더군. 아이를 잃은 형님께서 제이를 후원하고 싶어 하신다.”
“예에?!”
주인 부부는 이시스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길거리에서 발견한 갓난아이가 딱 봐도 돈 많은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과 연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외모가 귀티 나면 또 몰라, 제이는 웃을 때 눈웃음이 귀엽게 보이는 것 말고는 어디 하나 귀티 나는 구석이 없었다. 작은 눈과 주근깨 가득한 얼굴. 딱 봐도 그저 흔하디흔한 평민이었다.
“아주 데려가겠다는 것은 아니나, 형님께서 직접 보고 싶어 하시더군.”
이시스는 탁자 위에 주머니 하나를 툭 내던졌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남자는 냉큼 주머니를 낚아채 열어 보았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만 같은 표정이 되었다. 주머니 안에는 딱 봐도 값이 엄청날 것 같은 보석 몇 개와 금화가 있었다.
대충 계산해도 1년은 먹고살 만한 돈이다……! 그렇게 판단한 남자는 입이 귀에 걸려 두 손을 모으고 다시금 이시스에게 알랑대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리. 그러셨군요. 정말 은혜롭고 훌륭하십니다! 쓸모없는 어린아이를 거두느라 아주 힘들기 그지없었지요. 사람이 덕을 쌓으면 그대로 돌아온다더니, 그게 정말인가 봅니다.”
남자의 말에 여주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덕은 무슨. 아이가 생기지 않아 친자식으로 생각하고 거둔 제이를 그저 일만 시키고 부려 먹을 땐 언제고.
남편과는 다르게 제이를 진심으로 아끼고 자식처럼 생각하는 여주인은 남편의 뻔뻔한 거짓말에 울화가 치밀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아이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여관에서 일을 한다고 하니 아주 안타까워하셨지. 직접 만나 여러 가지를 가르치고 싶어 하셨다.”
“아, 예, 예에! 저, 저희가 아주 빚더미에 앉아 있다 보니 제이를 번듯하게 가르치지도 못하고, 그럴 때마다 너무너무 가슴이 찢어지고 아팠습죠……. 불쌍한 것.”
‘불쌍하기는. 학교는 돈이 들어 보내지 않는다고 으름장을 놨던 주제에.’
여주인은 다시금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저 아름답고 기품 있는 귀족 나리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럼, 아이를 불러 주겠나?”
“예에, 물론이지요!”
남자는 혹여나 이시스가 보석이 담긴 주머니를 다시 가져갈까 봐 서둘러 품 안에 숨기곤 활짝 웃었다. 그리고 2층으로 향해 제이를 불러들였다.
제이는 어젯밤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인간처럼 보이는 이시스의 모습에 신기해하며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그러다 이내 절대로 자신을 알은체하면 안 된다는 이시스의 말이 떠오르자 웃음을 지우고 입을 꾹 닫았다.
“욘석아, 냉큼 인사드리지 못해?”
“네, 네에.”
남자는 제이의 등을 억지로 숙여 이시스에게 인사를 시켰다. 아이를 함부로 대하는 남자의 모습에 이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이는 당장이라도 이시스에게 ‘아름다운 이시스 님!’ 하고 부르며 달려가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이와 이시스의 얼굴을 불안한 표정으로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여주인은 머뭇머뭇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그런데…… 어느 가문의 분이신지.”
“어허! 당신 그 무슨 무례한 태도야! 얼른 사과드려!”
혹여나 이 아름다운 남자가 제이를 데려가 해코지라도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된 여주인은 우물쭈물 눈동자를 굴렸다. 여주인의 쓸데없는 입놀림에 혹여나 이시스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남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내를 질책했다.
그래도 저 여자는 꼬맹이가 걱정되긴 하나 보군. 속으로 작게 웃음을 터트린 이시스는 입을 열었다.
“말해도 잘 모를 걸세.”
“아, 예에…….”
“걱정하지 마시게. 아이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네.”
“아이고, 해라니요! 이 여편네가 멋모르고 나불댄 것입니다. 그러니 기분 푸시지요, 나리.”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알랑대는 남자의 모습에 이시스의 눈초리가 다시금 사나워졌다.
“자네한테 한 말이 아니다. 그 입 좀 다물어 주겠나?”
“예, 예에.”
자신에게는 반말을 찍찍 내뱉으면서 아내에겐 존중하는 듯한 말투를 쓰는 이시스의 모습에 남자의 표정이 뒤틀렸다. 여주인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중이었다.
그런 여주인을 안심시키듯 이시스는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형님은 좋은 분이시지. 아마 아이를 친자식처럼 잘 챙겨 주실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예에……. 제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나리.”
“그럼, 아이를 데려가겠네.”
“예! 어서 데려가시지요. 제이, 이놈. 나리께 정중히, 또 정중히 예의 바른 모습만 보여야 한다! 알겠어?”
“네, 아저씨.”
남자가 목소리를 깔고 다그치듯 외치자 제이는 겁먹은 듯 두 손을 모으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시스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사악한 고위 마족인 자신 앞에서는 그리 조잘거리고 겁 하나 먹지 않더니, 고작 저 인간 남자가 무서워서 위축되는 꼴이 웃겼다. 겁을 먹는 상대가 틀렸잖아, 멍청한 꼬맹이가. 얼마나 자신을 무르게 봤으면(이시스는 자신이 무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등을 떠미는 남자의 행동에 이시스에게 다가간 제이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참았다. 그렇게 이시스는 제이를 데리고 여관을 나올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관을 나오자마자 제이는 언제 긴장하고 겁먹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입을 조잘거렸다. 대마족인 자신보다 그 하찮은 인간 남자를 더 무서워하다니. 이시스는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이시스 님, 너무너무 멋졌어요! 한 번만 더 웃어 주시면 안 돼요?”
“싫어.”
“웃어 주세요, 네? 너무너무 예뻤단 말이에요.”
“나 예쁜 건 나도 잘 알아.”
툴툴거리긴 하지만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이시스의 모습에 제이는 헤헤, 하고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제이는 이시스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에게 약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듯했다.
힐끗 제이를 돌아본 이시스는 아이가 입고 있는 복장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뭐야, 저 후줄근하고 초라한 옷차림은. 옆에 데리고 다니기 창피하잖아. 얇아서 분명 추울 것 같은데.
미간을 좁히고 제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시스는 작게 손짓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러냐는 듯 이시스를 올려다보던 제이는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이 확 바뀌자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우와! 이시스 님! 제 옷이 바뀌었어요! 이시스 님이 하신 거예요?”
“조용히 해. 시끄러워.”
반질반질하고 질 좋은, 부잣집 도련님들이나 입을 법한 옷차림으로 변하자 제이는 연신 우와, 우와, 감탄하며 눈을 빛냈다. 그런 제이를 힐끗 바라보며 이시스는 한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좀 낫다. 이제 좀 봐 줄 만하군. 아까까진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비렁뱅이가 아우야, 하고 부를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새로운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이는 싱글벙글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렇게 제이의 이시스를 향한 애정도가 하늘까지 치솟고 있던 와중, 번화가를 걷던 이시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장신구들을 파는 작은 노점상이었다.
“이시스 님?”
조개껍데기, 세공이 되지 않은 돌멩이 등으로 만들어진 장신구에 눈이 팔려 있는 이시스에게 제이는 쪼르르 달려왔다.
여태껏 마계에서 투명하고 아름다운 보석만 접해 왔던 이시스에게 이런 장신구는 아주 생소한 것이었다. 붉은 돌을 천 끈으로 엮은 목걸이를 바라보며 이시스는 제이에게 물었다.
“이건 뭐지? 처음 보는 보석인데.”
“네? 아아, 저건 보석이 아니에요. 그냥 예쁜 색의 돌을 깎아서 만든 거예요!”
“호오. 인간들은 돌멩이로도 장신구를 만드는 모양이군?”
이시스의 말을 들은 장신구 상인은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인간이면서 인간이니 하는 말을 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