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앙스트 블뤼테 6화
02화 - 테른 산맥 (2)
“이봐, 이거 얼마야?”
“예에, 동자 열 전입니다요, 나리.”
딱 봐도 부잣집 도련님 같은 이시스의 모습 때문에 새파랗게 어린 놈이 반말을 찍찍 깐다고 툴툴대지도 못하고 상인은 굽신거려야만 했다. 상인의 말에 이시스는 다시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자? 동자가 뭔가?”
“예?”
“처음 듣는데.”
그럴 만도 했다. 여태껏 이시스가 만져 본 인간의 돈은 금화가 전부였으니. 하지만 그런 이시스의 속사정을 모르는 상인은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여관에서 일하며 눈치만 쌓아 온 제이가 선수를 쳤다.
“여, 여기요! 열 전.”
“예. 고오맙수다. 작은 도령. 거, 큰 도령 참 무지하구만.”
“뭐?”
“이, 이시스 님! 빨리 가요!”
허허, 웃으며 상인이 말했다. ‘무지’라는 상인의 말에 이시스가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또다시 눈치 백 단 스킬이 발동한 제이 덕분에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벅저벅 길을 걸으며 천 끈의 끝에 매달린 새빨간 돌을 이시스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목걸이를 제이에게 휙 내던졌다.
얼떨결에 목걸이를 받아 든 제이는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이시스를 올려다보았다.
“난 최고급 보석이 아니면 취급 안 해. 그건 너나 가져.”
“아 네에! 감사합니다, 헤헤.”
“돈은 네가 냈잖아. 그럼 네가 산 건데 뭐가 감사해?”
정말 모자라는군. 정작 무지한 건 이 녀석인데 누가 무지하다는 건지. 이시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그런 이시스의 모습에도 제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요! 이시스 님이 저에게 선물해 주신 거잖아요? 이렇게 좋은 옷도 입혀 주셨는데.”
“……하여간 인간 꼬마는 알 수가 없어.”
인간이란 원래 이렇게 멍청한 존재인가? 쯧쯧. 이시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이시스가 주긴 했지만 정확히는 자신이 계산한 목걸이를 목에 건 제이는 연신 헤헤, 하고 웃었다.
“근데요, 이시스 님.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긴. 네가 드래곤이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길은 알고 가시는 거예요?”
“…….”
뚝. 제이의 물음에 이시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자리에 서서 이시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테른 산맥이 어디인지, 어느 방향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걷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자괴감에 짜증이 치솟은 이시스는 홱 제이를 돌아보았다. 아까보다 표정이 험악해진 이시스의 얼굴에 제이는 움찔 몸을 굳혔다.
“너 테른 산맥이라고 알아?”
“네? 아, 아뇨.”
“흠.”
일단 지도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시스의 목소리를 들은 제이는 화색을 띠며 외쳤다. 잡화점에 가면 분명 지도를 팔 것이라는 제이의 말에 이시스는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잡화점의 위치는 제이가 알고 있었다. 제이가 안내하는 대로 잡화점으로 향한 이시스는 또다시 처음 접하는 생소한 잡동사니에 시선이 팔렸다. 그런 이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이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궁금한 것도, 호기심도 많으신 악마님이구나.
최소 자신보다 몇백 살은 더 많을 이시스가 귀엽다는 듯 제이는 헤헤 웃었다. 한참을 잡동사니에 정신이 팔려 있던 이시스는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리며 잡화점 주인에게 물었다.
“이봐. 테른 산맥이라고 아나?”
“아, 예에. 알긴 압니다. 헌데 거긴 기온이 매우 낮고 환경이 열악해서 사람들이 얼씬도 안 하는 지역입죠. 근데 거긴 왜……?”
“그 지역 지도, 혹시 구할 수 있나?”
“예. 아마 있을 겁니다.”
잡화점 주인은 서둘러 찬장을 뒤졌다. 테른 산맥의 지역 지도를 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어디에 뒀는지 기억도 잘 안 나긴 했지만 분명 있긴 있었다.
잡화점 주인이 지도를 찾는 동안 이시스는 다시금 잡화점 안에 늘여져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건들을 보고 만지작거리던 이시스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제이에게 물었다.
“꼬맹아. 여기 있는 물건들은 가격이 얼마 정도 하는지 알아?”
“예에? 어어……글쎄요.”
아무리 여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도 잡화점의 물건들이 얼마인지 자세히는 모르는 제이였다. 제이가 말끝을 흐리자 이시스는 품 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금화를 보고 제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거 하나면 얼마나 살 수 있어?”
“우와…… 금화다. 이시스 님! 금화 한 닢이면 여기 있는 물건들 중 절반은 살 수 있을 걸요?”
“호오, 그래?”
생각보다 인간들의 물건은 값이 그리 나가지 않나 보군. 화색을 띤 이시스는 잡화점 입구에 있는 장바구니를 낚아채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담기 시작했다. 물건들이 점점 쌓이고 쌓이자 제이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걸 다 어떻게 갖고 가시려고……. 제이의 불안한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이시스는 신나게 물건을 담았다. 지도를 찾아 나온 잡화점 주인이 장바구니에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물건들을 발견하곤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걸 다 사시려고요?”
“그래. 듣자 하니 금화 한 닢이면 된다던데? 잔돈은 필요 없어.”
툭, 이시스가 손안에 있던 금화를 주인에게 던졌다. 금화를 두 손으로 받은 주인의 입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입을 쩍 벌어졌다. 금화라니. 금화 한 닢이면 거의 서민들의 반년 생활비나 다름없었다.
요리조리 돋보기로 동전을 살피던 주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덜덜 떨리는 입으로 조심스레 되물었다.
“저, 정말 거스름돈은 필요 없으십니까?”
“그래. 지도는 구했나?”
“예, 예에! 여기, 여기가 테른 산맥입니다. 테른 지역은 여기서 동쪽으로 쭉 가면 나옵니다. 근데 이 지역은 왜……?”
“그건 알 필요 없고.”
생긋 웃으며 지도를 접어서 품 안에 넣은 이시스는 허공에 작게 손짓했다. 그 순간 제이와 잡화점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시스의 손짓에 따라 허공에 이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물건들이 누가 손도 대지 않았는데 자기가 알아서 붕 뜨더니 그 이공간 속으로 쏙쏙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법사였던가? 난생처음 보는 경악스러운 광경에 잡화점 주인은 기절할 것처럼 넋을 잃었다. 마법사는 보기 드문 존재였다. 모든 마법사는 왕궁에서 관리하는 데다가 그 수가 아주 적었기 때문에 고위층 귀족을 제외한 서민들은 평생 마법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 마법사라면 아마 어마어마한 부자겠지. 그러니 이 큰돈을 선뜻 내어 주고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고 그러는 것일 터였다. 그나저나 마법사가 이런 잡동사니는 왜 필요한 거지? 의아했지만 이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금은 큰돈이 생긴 것에 기뻐하는 것이 먼저였다.
“우와아! 이시스 님, 너무 신기해요!”
“시끄럽고, 어서 가자. 여기는 마…… 흠흠. 여기는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서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가 없어.”
마족들은 인간계로 내려왔을 때 힘에 제약이 생긴다. 마계에서 쓸 수 있는 마력의 1/10 정도밖에 쓸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아주 먼 거리를 워프로 이동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테른 산맥에 매개체를 심어 놓았다면 그쪽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제이는 함께 이동할 수 없었다. 마계에 제이를 데리고 간다면 아마 1분도 지나지 않아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 갈 것이다. 나약한 인간은 마계의 어두운 기운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일단 마을을 벗어나 마법을 이용해 빨리 이동해야겠다. 이시스는 이공간을 다시 닫고는 제이를 어깨에 둘러멨다. 짐짝처럼 이시스의 어깨에 둘러메진 제이는 당황하며 버둥거렸지만, 제이가 얌전히 있으라는 듯 엉덩이를 때리자 얌전해졌다.
“동쪽이란 말이지?”
이시스는 동쪽을 향해 워프를 시전했다. 조용해진 잡화점 안에서 잡화점 주인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살면서 마법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이런 진귀한 광경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워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
마리는 마왕성의 시녀다. 마왕성의 종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대우받는 신분이었다. 허드렛일을 함에도 하급 마족 취급을 받는 종들은 항상 마왕성에서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빨래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식사를 한 후 도맡은 청소를 마친 후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오늘은 빨랫감이 별로 나오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왕자의 방문을 연 마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악스러운 광경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툭, 하고 떨어트렸다.
“아, 아……. 지, 집사님…… 집사님……!”
겁에 질려 연신 벌벌 떨던 마리는 이내 황급히 마왕자의 방에서 뛰쳐나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미친 듯이 아메나크를 찾아다녔다. 공포감에 소변을 지려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업무를 보던 아메나크는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여는 마리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치켜떴다.
“무슨 일이지?”
“지, 집사님……! 그게, 그게!”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 보도록.”
마리는 마왕자의 방 청소를 담당하는 시녀였다. 그걸 떠올린 아메나크는 마왕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눈을 가늘게 떴다. 마왕자는 마신의 피를 먹은 후 그 힘을 별다른 문제 없이 잘 흡수시키고 있었다.
마신의 피가 아니었다면 진즉 성체가 되었겠지만, 마신의 피 덕분에 거의 100년간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덕분에 마왕은 대체 아들놈은 언제 깨어나는 거냐고 그를 닦달하는 중이었다.
성체가 될 때까지 별다른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일이 터진 건가. 아메나크는 미간을 좁혔다.
아메나크의 모습에 점차 안정을 되찾은 마리는 후우, 후우 하고 연신 심호흡을 하며 덜덜 떨리는 입으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뭐,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알겠다. 넌 따라오지 마라.”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는 아메나크의 말에 마리는 눈에 띄게 안심했다. 곧바로 마왕자의 방 앞으로 워프한 아메나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 안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무슨.”
방 안의 광경은, 아메나크가 경악하기에 충분했다.
***
여태껏 이시스가 겪은 ‘어린아이’는 참을성 따위는 제로고, 원하는 대로 다 하려고 하며 본능을 숨기지 않고 귀찮게 사고만 치는 존재였다. 그래, 라네프가 그랬다.
‘전하, 그건 드시면 안 됩니다! 지지입니다!’
에비! 지지야, 지지! 그렇게 말하는 이시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먹어 치우는 라네프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아주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라네프는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는 종 하나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아파 오는 머리에 이시스는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짚었다. 아, 씨벌. 왜 저런 불량식품을 먹고 지랄이야. 아무리 마력이 강한 마왕자라고 해도 저 정도의 독성을 지닌 먹이를 먹는다면 탈이 날 것이 분명했다.
본디 생물은 아프면 예민해진다. 예민해지면? 흉포해진다. 기분이 좋을 때도 흉포한 저 꼴통이 예민해진다면 어떤 후폭풍이 있을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제발 제가 주는 것만 드세요. 그런 불량식품은 먹으면 탈 납니다.’
널 걱정해서가 아니라 네가 그딴 걸 처먹고 나한테 화풀이하는 걸 걱정하는 거다, 이 꼴통 새끼야.
그렇게 대놓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최근 들어 꼴통 꼬맹이가 자신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아 이시스는 최대한 말을 조심하고 있었다. 저번에 ‘꼴통’이라고 자신만 들릴 정도로 한 마디 중얼거렸는데 그때 머리칼을 다 쥐어뜯겼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나왔었다. 나쁜 시키. 꼴통을 꼴통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른단 말이냐. 꼴에 꼴통이라고 부르면 기분 나쁜가 보지? 이시스는 속으로 퉷, 하고 침을 뱉었다.
‘자, 어여 물 드세요. 그리고 그 입 좀 닦으세요. 더러워.’
‘우쭈쭈. 착하지?’라는 듯한 말투에 앳된 눈이 가늘어졌다. 억지미소를 지으며 물컵을 들이대는 이시스를 가늘게 뜬 눈으로 조용히 바라보던 라네프는 빛의 속도로 이시스의 검지를 물어뜯었다.
‘악!’
생글생글 미소 짓던 이시스가 기겁을 하며 손을 치웠다. 이미 이시스의 손은 검지가 댕강 잘려 피를 내뿜고 있었다. 억울함과 빡침이 섞인 표정으로 이시스는 라네프를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은근 불만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던 라네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진 건 기분 탓인가?
‘전하. 전 먹이가 아닙니다. 대체 몇 번을 말씀드려야 알아들으실 겁니까?’
저 망할 꼴통 새끼. 분명 알면서 저러는 것일 거다.
당장이라도 목을 따 주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참으며 이시스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손가락이야 금방 재생되긴 하겠지만 통증은 어쩌란 말이냐. 욱신거리는 손의 통증에 이시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땐 그랬었지. 이시스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허허, 하고 영혼 없는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왜 옛날 생각이 들었냐고? 지금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는 꼬맹이 하나 때문이다.
“흑흑, 어떡해요. 죄송해요…….”
“……하아.”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이렇다. 제이를 안고 마법을 이용해 이동하던 이시스는 배가 고프다는 제이의 말에 이동을 멈추고 사냥감이 없는지 둘러보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
하찮은 인간 꼬맹이의 배고픈 투정 따위 그냥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꼴통 옆에서 200년 가까이 보모 짓을 하다 보니 습관이 생긴 것인지 이시스는 제이의 배고픈 투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숲 속에서 먹잇감을 찾던 이시스는 제이의 비명 소리에 성급히 워프했다. 그리고 곰에게 습격을 당하고 있는 제이를 발견하고 그 앞을 몸으로 막았다. 물론 곰은 단번에 해치웠다. 그런데, 곰을 해치우는 와중 곰의 발톱에 손가락이 긁혀 피가 난 것이다.
물론 이런 간지럽지도 않은 생채기 따위는 10분이면 깨끗하게 싹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제이는 이시스의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발견하곤 엉엉 울면서 이렇게 귀찮게 굴기 시작했던 것이다.
똑같은 오른손의 검지다. 그런데 한 꼬마는 물어뜯고, 한 꼬마는 자기 때문에 상처가 생겼다고 질질 짠다. 어린아이란 존재는 역시 귀찮아. 그런 생각을 하며 이시스는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마족이다. 이딴 상처 따위 조금만 지나면 씻은 듯 없어진다고. 그만 짜.”
“하지만, 하지만…….”
제이는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다친 적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평범한 인간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봤을 땐 이시스의 손가락의 상처는 아주 크게 보일 법도 했다. 물론 라네프에게 손가락뿐만 아니라 한쪽 팔 전체를 물어뜯기고 잘리기를 밥 먹듯 하던 이시스에게 이딴 상처 따위는 긁힌 축에도 못 꼈지만.
계속해서 훌쩍거리며 ‘죄송해요, 죄송해요.’를 고장 난 오르골처럼 반복하는 제이의 모습에 짜증이 치민 이시스는 쓰읍! 하며 눈을 치켜떴다.
“안 그쳐! 계속 짜면 두고 갈 줄 알아.”
“끅, 네에.”
제이는 힘겹게 딸꾹질을 하며 대답했다. 이시스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정말 꼬맹이들은 귀찮아. 이렇게 보니 차라리 그 꼴통이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 꼴통은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뜯고도 의기양양한 표정만 지었지 이렇게 질질 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꼴통이 사고를 치면 그냥 꼴통에게 이를 갈며 욕만 퍼부으면 끝인데, 이 꼴통은 답이 없다. 질질 짜니 욕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달래자니 성격이 못 받쳐 주고. 젠장. 이번 일이 끝나면 꼬맹이들과는 아주 상종을 하지 말아야지.
“어어?”
“봐. 없어졌지?”
“우와아…….”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시스의 손가락에 제이는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이내 이제서야 안심했다는 듯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헤헤 웃었다.
허, 참.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울며불며 질질 짜더니 뭐가 좋다고 그리 실실 쪼개는지. 정말 어이가 없어진 이시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울다가 웃으면 똥꼬에 털 난다.”
“네에?”
“막 치렁치렁하게, 발목까지 자랄걸?”
“그, 그건 싫어요.”
그럼 울지 마.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이시스는 툭 말을 내던졌다. 순진한 제이는 이젠 절대로 울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넵! 하고 외쳤다. 내, 참. 뭐하는 짓인지 이시스는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웃지 말라는 말은 안 하는 이시스였다.
제이는 이제 갓 11살이 된 어린아이다 보니 체력이 많이 약했다. 이시스 혼자였으면 쉬지 않고 하루 종일 이동할 수 있었겠지만, 제이는 불가능했다. 슬립 마법을 건 후 움직이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방법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시스의 마법 덕분에 평범한 인간의 걸음걸이보다 몇십 배는 빨리 이동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하루에 한 번씩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이시스의 마법 덕분에 제이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아주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휴식을 취할 때마다 이시스가 안락한 침대가 있는 이공간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장장 100년 동안 잠을 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시스는 딱히 자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제이가 일어날 때까지 멍을 때리거나 이공간에 결계를 쳐 두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마실을 즐겼다.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맞춰 주는 이시스가 사실 아주 상냥한 사람, 아니 악마라는 것을 진즉 알아차린 제이는 연신 이시스만 보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어느새 날씨와 기온이 평범한 어린아이가 견딜 수 없는 곳까지 다다르자 이시스는 마법으로 제이의 주변 1m에 동그란 돔을 형성했다. 그 안을 따뜻하게 유지해 준 덕분에 제이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곳에서도 추위 하나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이시스의 마법 덕분에 평범한 인간이 말을 타고 몇 달을 달려야 하는 거리를 단 열흘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길 봐도 눈밭, 저길 봐도 눈보라인 환경 때문에 제이는 본능적으로 겁을 잔뜩 먹은 상태였다.
“정말 안 추우세요?”
“그렇다고 했잖아.”
“헤헤.”
헤헤는 무슨. 뭐가 저리 좋다고 웃어 대는 것인지, 이시스는 보면 볼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그는 플라이 마법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마족 특유의 뛰어난 시력으로 공중에서 주변을 훑은 이시스는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곤 제이를 한쪽 팔로 안은 채로 다시금 하늘로 뛰어올랐다. 제이는 겁먹은 표정으로 이시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마 이 주변이 맞을 거야. 마력이 강하게 느껴지는군.”
“와아, 정말요?”
“그렇게 좋아? 잡아먹힐지도 모르는데.”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자 제이는 ‘아, 그랬었지. 참.’ 하며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떠날 때는 먹이가 되어 잡아먹혀도 괜찮다고 웃었지만, 막상 도착 직전이 되자 두려움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픽 웃으며 이시스는 되물었다.
“왜? 무서워? 지금이라도 돌아가?”
“그, 그건 싫어요. 잡아먹혀도 좋으니 드래곤을 만날래요.”
“고집하고는.”
부와 권력을 버리고 고작 커다란 도마뱀을 목숨 걸고 보겠다는 인간도 너밖에 없을 거다. 이시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쪽 팔로 제이를 안고 알디스의 레어를 찾아 연신 날아가던 이시스는 귀를 쫑긋거렸다.
02화 - 테른 산맥 (2)
“이봐, 이거 얼마야?”
“예에, 동자 열 전입니다요, 나리.”
딱 봐도 부잣집 도련님 같은 이시스의 모습 때문에 새파랗게 어린 놈이 반말을 찍찍 깐다고 툴툴대지도 못하고 상인은 굽신거려야만 했다. 상인의 말에 이시스는 다시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자? 동자가 뭔가?”
“예?”
“처음 듣는데.”
그럴 만도 했다. 여태껏 이시스가 만져 본 인간의 돈은 금화가 전부였으니. 하지만 그런 이시스의 속사정을 모르는 상인은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여관에서 일하며 눈치만 쌓아 온 제이가 선수를 쳤다.
“여, 여기요! 열 전.”
“예. 고오맙수다. 작은 도령. 거, 큰 도령 참 무지하구만.”
“뭐?”
“이, 이시스 님! 빨리 가요!”
허허, 웃으며 상인이 말했다. ‘무지’라는 상인의 말에 이시스가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또다시 눈치 백 단 스킬이 발동한 제이 덕분에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벅저벅 길을 걸으며 천 끈의 끝에 매달린 새빨간 돌을 이시스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목걸이를 제이에게 휙 내던졌다.
얼떨결에 목걸이를 받아 든 제이는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이시스를 올려다보았다.
“난 최고급 보석이 아니면 취급 안 해. 그건 너나 가져.”
“아 네에! 감사합니다, 헤헤.”
“돈은 네가 냈잖아. 그럼 네가 산 건데 뭐가 감사해?”
정말 모자라는군. 정작 무지한 건 이 녀석인데 누가 무지하다는 건지. 이시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그런 이시스의 모습에도 제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요! 이시스 님이 저에게 선물해 주신 거잖아요? 이렇게 좋은 옷도 입혀 주셨는데.”
“……하여간 인간 꼬마는 알 수가 없어.”
인간이란 원래 이렇게 멍청한 존재인가? 쯧쯧. 이시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이시스가 주긴 했지만 정확히는 자신이 계산한 목걸이를 목에 건 제이는 연신 헤헤, 하고 웃었다.
“근데요, 이시스 님.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긴. 네가 드래곤이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길은 알고 가시는 거예요?”
“…….”
뚝. 제이의 물음에 이시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자리에 서서 이시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테른 산맥이 어디인지, 어느 방향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걷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자괴감에 짜증이 치솟은 이시스는 홱 제이를 돌아보았다. 아까보다 표정이 험악해진 이시스의 얼굴에 제이는 움찔 몸을 굳혔다.
“너 테른 산맥이라고 알아?”
“네? 아, 아뇨.”
“흠.”
일단 지도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시스의 목소리를 들은 제이는 화색을 띠며 외쳤다. 잡화점에 가면 분명 지도를 팔 것이라는 제이의 말에 이시스는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잡화점의 위치는 제이가 알고 있었다. 제이가 안내하는 대로 잡화점으로 향한 이시스는 또다시 처음 접하는 생소한 잡동사니에 시선이 팔렸다. 그런 이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이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궁금한 것도, 호기심도 많으신 악마님이구나.
최소 자신보다 몇백 살은 더 많을 이시스가 귀엽다는 듯 제이는 헤헤 웃었다. 한참을 잡동사니에 정신이 팔려 있던 이시스는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리며 잡화점 주인에게 물었다.
“이봐. 테른 산맥이라고 아나?”
“아, 예에. 알긴 압니다. 헌데 거긴 기온이 매우 낮고 환경이 열악해서 사람들이 얼씬도 안 하는 지역입죠. 근데 거긴 왜……?”
“그 지역 지도, 혹시 구할 수 있나?”
“예. 아마 있을 겁니다.”
잡화점 주인은 서둘러 찬장을 뒤졌다. 테른 산맥의 지역 지도를 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어디에 뒀는지 기억도 잘 안 나긴 했지만 분명 있긴 있었다.
잡화점 주인이 지도를 찾는 동안 이시스는 다시금 잡화점 안에 늘여져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건들을 보고 만지작거리던 이시스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제이에게 물었다.
“꼬맹아. 여기 있는 물건들은 가격이 얼마 정도 하는지 알아?”
“예에? 어어……글쎄요.”
아무리 여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도 잡화점의 물건들이 얼마인지 자세히는 모르는 제이였다. 제이가 말끝을 흐리자 이시스는 품 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금화를 보고 제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거 하나면 얼마나 살 수 있어?”
“우와…… 금화다. 이시스 님! 금화 한 닢이면 여기 있는 물건들 중 절반은 살 수 있을 걸요?”
“호오, 그래?”
생각보다 인간들의 물건은 값이 그리 나가지 않나 보군. 화색을 띤 이시스는 잡화점 입구에 있는 장바구니를 낚아채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담기 시작했다. 물건들이 점점 쌓이고 쌓이자 제이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걸 다 어떻게 갖고 가시려고……. 제이의 불안한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이시스는 신나게 물건을 담았다. 지도를 찾아 나온 잡화점 주인이 장바구니에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물건들을 발견하곤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걸 다 사시려고요?”
“그래. 듣자 하니 금화 한 닢이면 된다던데? 잔돈은 필요 없어.”
툭, 이시스가 손안에 있던 금화를 주인에게 던졌다. 금화를 두 손으로 받은 주인의 입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입을 쩍 벌어졌다. 금화라니. 금화 한 닢이면 거의 서민들의 반년 생활비나 다름없었다.
요리조리 돋보기로 동전을 살피던 주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덜덜 떨리는 입으로 조심스레 되물었다.
“저, 정말 거스름돈은 필요 없으십니까?”
“그래. 지도는 구했나?”
“예, 예에! 여기, 여기가 테른 산맥입니다. 테른 지역은 여기서 동쪽으로 쭉 가면 나옵니다. 근데 이 지역은 왜……?”
“그건 알 필요 없고.”
생긋 웃으며 지도를 접어서 품 안에 넣은 이시스는 허공에 작게 손짓했다. 그 순간 제이와 잡화점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시스의 손짓에 따라 허공에 이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물건들이 누가 손도 대지 않았는데 자기가 알아서 붕 뜨더니 그 이공간 속으로 쏙쏙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법사였던가? 난생처음 보는 경악스러운 광경에 잡화점 주인은 기절할 것처럼 넋을 잃었다. 마법사는 보기 드문 존재였다. 모든 마법사는 왕궁에서 관리하는 데다가 그 수가 아주 적었기 때문에 고위층 귀족을 제외한 서민들은 평생 마법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 마법사라면 아마 어마어마한 부자겠지. 그러니 이 큰돈을 선뜻 내어 주고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고 그러는 것일 터였다. 그나저나 마법사가 이런 잡동사니는 왜 필요한 거지? 의아했지만 이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금은 큰돈이 생긴 것에 기뻐하는 것이 먼저였다.
“우와아! 이시스 님, 너무 신기해요!”
“시끄럽고, 어서 가자. 여기는 마…… 흠흠. 여기는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서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가 없어.”
마족들은 인간계로 내려왔을 때 힘에 제약이 생긴다. 마계에서 쓸 수 있는 마력의 1/10 정도밖에 쓸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아주 먼 거리를 워프로 이동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테른 산맥에 매개체를 심어 놓았다면 그쪽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제이는 함께 이동할 수 없었다. 마계에 제이를 데리고 간다면 아마 1분도 지나지 않아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 갈 것이다. 나약한 인간은 마계의 어두운 기운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일단 마을을 벗어나 마법을 이용해 빨리 이동해야겠다. 이시스는 이공간을 다시 닫고는 제이를 어깨에 둘러멨다. 짐짝처럼 이시스의 어깨에 둘러메진 제이는 당황하며 버둥거렸지만, 제이가 얌전히 있으라는 듯 엉덩이를 때리자 얌전해졌다.
“동쪽이란 말이지?”
이시스는 동쪽을 향해 워프를 시전했다. 조용해진 잡화점 안에서 잡화점 주인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살면서 마법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이런 진귀한 광경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워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
마리는 마왕성의 시녀다. 마왕성의 종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대우받는 신분이었다. 허드렛일을 함에도 하급 마족 취급을 받는 종들은 항상 마왕성에서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빨래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식사를 한 후 도맡은 청소를 마친 후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오늘은 빨랫감이 별로 나오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왕자의 방문을 연 마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악스러운 광경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툭, 하고 떨어트렸다.
“아, 아……. 지, 집사님…… 집사님……!”
겁에 질려 연신 벌벌 떨던 마리는 이내 황급히 마왕자의 방에서 뛰쳐나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미친 듯이 아메나크를 찾아다녔다. 공포감에 소변을 지려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업무를 보던 아메나크는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여는 마리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치켜떴다.
“무슨 일이지?”
“지, 집사님……! 그게, 그게!”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 보도록.”
마리는 마왕자의 방 청소를 담당하는 시녀였다. 그걸 떠올린 아메나크는 마왕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눈을 가늘게 떴다. 마왕자는 마신의 피를 먹은 후 그 힘을 별다른 문제 없이 잘 흡수시키고 있었다.
마신의 피가 아니었다면 진즉 성체가 되었겠지만, 마신의 피 덕분에 거의 100년간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덕분에 마왕은 대체 아들놈은 언제 깨어나는 거냐고 그를 닦달하는 중이었다.
성체가 될 때까지 별다른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일이 터진 건가. 아메나크는 미간을 좁혔다.
아메나크의 모습에 점차 안정을 되찾은 마리는 후우, 후우 하고 연신 심호흡을 하며 덜덜 떨리는 입으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뭐,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알겠다. 넌 따라오지 마라.”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는 아메나크의 말에 마리는 눈에 띄게 안심했다. 곧바로 마왕자의 방 앞으로 워프한 아메나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 안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무슨.”
방 안의 광경은, 아메나크가 경악하기에 충분했다.
***
여태껏 이시스가 겪은 ‘어린아이’는 참을성 따위는 제로고, 원하는 대로 다 하려고 하며 본능을 숨기지 않고 귀찮게 사고만 치는 존재였다. 그래, 라네프가 그랬다.
‘전하, 그건 드시면 안 됩니다! 지지입니다!’
에비! 지지야, 지지! 그렇게 말하는 이시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먹어 치우는 라네프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아주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라네프는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는 종 하나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아파 오는 머리에 이시스는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짚었다. 아, 씨벌. 왜 저런 불량식품을 먹고 지랄이야. 아무리 마력이 강한 마왕자라고 해도 저 정도의 독성을 지닌 먹이를 먹는다면 탈이 날 것이 분명했다.
본디 생물은 아프면 예민해진다. 예민해지면? 흉포해진다. 기분이 좋을 때도 흉포한 저 꼴통이 예민해진다면 어떤 후폭풍이 있을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제발 제가 주는 것만 드세요. 그런 불량식품은 먹으면 탈 납니다.’
널 걱정해서가 아니라 네가 그딴 걸 처먹고 나한테 화풀이하는 걸 걱정하는 거다, 이 꼴통 새끼야.
그렇게 대놓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최근 들어 꼴통 꼬맹이가 자신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아 이시스는 최대한 말을 조심하고 있었다. 저번에 ‘꼴통’이라고 자신만 들릴 정도로 한 마디 중얼거렸는데 그때 머리칼을 다 쥐어뜯겼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나왔었다. 나쁜 시키. 꼴통을 꼴통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른단 말이냐. 꼴에 꼴통이라고 부르면 기분 나쁜가 보지? 이시스는 속으로 퉷, 하고 침을 뱉었다.
‘자, 어여 물 드세요. 그리고 그 입 좀 닦으세요. 더러워.’
‘우쭈쭈. 착하지?’라는 듯한 말투에 앳된 눈이 가늘어졌다. 억지미소를 지으며 물컵을 들이대는 이시스를 가늘게 뜬 눈으로 조용히 바라보던 라네프는 빛의 속도로 이시스의 검지를 물어뜯었다.
‘악!’
생글생글 미소 짓던 이시스가 기겁을 하며 손을 치웠다. 이미 이시스의 손은 검지가 댕강 잘려 피를 내뿜고 있었다. 억울함과 빡침이 섞인 표정으로 이시스는 라네프를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은근 불만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던 라네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진 건 기분 탓인가?
‘전하. 전 먹이가 아닙니다. 대체 몇 번을 말씀드려야 알아들으실 겁니까?’
저 망할 꼴통 새끼. 분명 알면서 저러는 것일 거다.
당장이라도 목을 따 주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참으며 이시스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손가락이야 금방 재생되긴 하겠지만 통증은 어쩌란 말이냐. 욱신거리는 손의 통증에 이시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땐 그랬었지. 이시스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허허, 하고 영혼 없는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왜 옛날 생각이 들었냐고? 지금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는 꼬맹이 하나 때문이다.
“흑흑, 어떡해요. 죄송해요…….”
“……하아.”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이렇다. 제이를 안고 마법을 이용해 이동하던 이시스는 배가 고프다는 제이의 말에 이동을 멈추고 사냥감이 없는지 둘러보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
하찮은 인간 꼬맹이의 배고픈 투정 따위 그냥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꼴통 옆에서 200년 가까이 보모 짓을 하다 보니 습관이 생긴 것인지 이시스는 제이의 배고픈 투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숲 속에서 먹잇감을 찾던 이시스는 제이의 비명 소리에 성급히 워프했다. 그리고 곰에게 습격을 당하고 있는 제이를 발견하고 그 앞을 몸으로 막았다. 물론 곰은 단번에 해치웠다. 그런데, 곰을 해치우는 와중 곰의 발톱에 손가락이 긁혀 피가 난 것이다.
물론 이런 간지럽지도 않은 생채기 따위는 10분이면 깨끗하게 싹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제이는 이시스의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발견하곤 엉엉 울면서 이렇게 귀찮게 굴기 시작했던 것이다.
똑같은 오른손의 검지다. 그런데 한 꼬마는 물어뜯고, 한 꼬마는 자기 때문에 상처가 생겼다고 질질 짠다. 어린아이란 존재는 역시 귀찮아. 그런 생각을 하며 이시스는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마족이다. 이딴 상처 따위 조금만 지나면 씻은 듯 없어진다고. 그만 짜.”
“하지만, 하지만…….”
제이는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다친 적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평범한 인간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봤을 땐 이시스의 손가락의 상처는 아주 크게 보일 법도 했다. 물론 라네프에게 손가락뿐만 아니라 한쪽 팔 전체를 물어뜯기고 잘리기를 밥 먹듯 하던 이시스에게 이딴 상처 따위는 긁힌 축에도 못 꼈지만.
계속해서 훌쩍거리며 ‘죄송해요, 죄송해요.’를 고장 난 오르골처럼 반복하는 제이의 모습에 짜증이 치민 이시스는 쓰읍! 하며 눈을 치켜떴다.
“안 그쳐! 계속 짜면 두고 갈 줄 알아.”
“끅, 네에.”
제이는 힘겹게 딸꾹질을 하며 대답했다. 이시스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정말 꼬맹이들은 귀찮아. 이렇게 보니 차라리 그 꼴통이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 꼴통은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뜯고도 의기양양한 표정만 지었지 이렇게 질질 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꼴통이 사고를 치면 그냥 꼴통에게 이를 갈며 욕만 퍼부으면 끝인데, 이 꼴통은 답이 없다. 질질 짜니 욕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달래자니 성격이 못 받쳐 주고. 젠장. 이번 일이 끝나면 꼬맹이들과는 아주 상종을 하지 말아야지.
“어어?”
“봐. 없어졌지?”
“우와아…….”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시스의 손가락에 제이는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이내 이제서야 안심했다는 듯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헤헤 웃었다.
허, 참.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울며불며 질질 짜더니 뭐가 좋다고 그리 실실 쪼개는지. 정말 어이가 없어진 이시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울다가 웃으면 똥꼬에 털 난다.”
“네에?”
“막 치렁치렁하게, 발목까지 자랄걸?”
“그, 그건 싫어요.”
그럼 울지 마.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이시스는 툭 말을 내던졌다. 순진한 제이는 이젠 절대로 울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넵! 하고 외쳤다. 내, 참. 뭐하는 짓인지 이시스는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웃지 말라는 말은 안 하는 이시스였다.
제이는 이제 갓 11살이 된 어린아이다 보니 체력이 많이 약했다. 이시스 혼자였으면 쉬지 않고 하루 종일 이동할 수 있었겠지만, 제이는 불가능했다. 슬립 마법을 건 후 움직이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방법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시스의 마법 덕분에 평범한 인간의 걸음걸이보다 몇십 배는 빨리 이동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하루에 한 번씩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이시스의 마법 덕분에 제이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아주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휴식을 취할 때마다 이시스가 안락한 침대가 있는 이공간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장장 100년 동안 잠을 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시스는 딱히 자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제이가 일어날 때까지 멍을 때리거나 이공간에 결계를 쳐 두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마실을 즐겼다.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맞춰 주는 이시스가 사실 아주 상냥한 사람, 아니 악마라는 것을 진즉 알아차린 제이는 연신 이시스만 보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어느새 날씨와 기온이 평범한 어린아이가 견딜 수 없는 곳까지 다다르자 이시스는 마법으로 제이의 주변 1m에 동그란 돔을 형성했다. 그 안을 따뜻하게 유지해 준 덕분에 제이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곳에서도 추위 하나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이시스의 마법 덕분에 평범한 인간이 말을 타고 몇 달을 달려야 하는 거리를 단 열흘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길 봐도 눈밭, 저길 봐도 눈보라인 환경 때문에 제이는 본능적으로 겁을 잔뜩 먹은 상태였다.
“정말 안 추우세요?”
“그렇다고 했잖아.”
“헤헤.”
헤헤는 무슨. 뭐가 저리 좋다고 웃어 대는 것인지, 이시스는 보면 볼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그는 플라이 마법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마족 특유의 뛰어난 시력으로 공중에서 주변을 훑은 이시스는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곤 제이를 한쪽 팔로 안은 채로 다시금 하늘로 뛰어올랐다. 제이는 겁먹은 표정으로 이시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마 이 주변이 맞을 거야. 마력이 강하게 느껴지는군.”
“와아, 정말요?”
“그렇게 좋아? 잡아먹힐지도 모르는데.”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자 제이는 ‘아, 그랬었지. 참.’ 하며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떠날 때는 먹이가 되어 잡아먹혀도 괜찮다고 웃었지만, 막상 도착 직전이 되자 두려움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픽 웃으며 이시스는 되물었다.
“왜? 무서워? 지금이라도 돌아가?”
“그, 그건 싫어요. 잡아먹혀도 좋으니 드래곤을 만날래요.”
“고집하고는.”
부와 권력을 버리고 고작 커다란 도마뱀을 목숨 걸고 보겠다는 인간도 너밖에 없을 거다. 이시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쪽 팔로 제이를 안고 알디스의 레어를 찾아 연신 날아가던 이시스는 귀를 쫑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