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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왕국 1화
기나긴 절벽 끝에서 마주한 것은…….
1. 새로운 세상에 떨어지다 (1)


“아야야.”
나는 눈을 뜨자마자 두 팔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처음에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다음 팔과 어깨, 등 온몸이 고통을 호소해 한참 동안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고통이 잦아들 때까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려고 고개를 든 순간, 다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긴…… 어디야?”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무척 낯설었다. 드넓은 초원과 우거진 숲은 20년 넘게 도시에서 살아온 나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장소였다.
“대체 왜 내가 여기에…….”
정신을 잃었다가 막 깨어난 참이라 아직 상황판단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멍하니 나무만 올려다보고 있다가 불현듯 기절하기 전 상황을 떠올렸다.
“아!”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다 신음하며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몸 마디마디가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고, 통증 때문에 허리를 제대로 펴기도 힘들었다.
또다시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이를 악물고 흐트러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은 좀 걸렸지만 서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굳은 팔과 어깨를 주무르거나 조금씩 움직여 주니 그럭저럭 움직일 만했다. 생각보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삐끗한 허리와 다리에 크게 긁힌 상처 외의 눈에 띄는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머리도 한결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다리의 상처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높디높은 절벽. 목을 한껏 뒤로 젖혀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커다란 절벽이었다. 나는 감탄과 한숨을 동시에 내뱉었다.
상상해 본 적도 없다. 내가 저렇게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다니.
절벽 위는 짙은 안개에 싸여 있어 육안으로는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절벽은 그저 높기만 한 게 아니었다. 폭은 더 넓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노려보았지만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절벽의 시작이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절벽의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배낭이 눈에 들어왔다.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까지 메고 있었던 배낭은 현재 처참해진 모습으로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떨어지면서 배낭이 쿠션 역할을 해 준 덕분에 살아 있는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가방이 있었더라도 수십 미터나 되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과연 가능한가…… 까지 생각하고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당장 처한 상황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서 미칠 지경인데 무서운 상상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생명체는 보이지 않는 텅 빈 초원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절벽의 한기에 더욱 간담이 서늘해졌다.
힐끔 올려다본 절벽은 여전히 높고 가팔랐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절벽을 오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타지까지 와서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절벽에 몸을 기댔다. 온몸에서 힘을 풀자 자연스레 고개가 바닥을 향했다. 눈을 감으며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까지의 상황을 떠올렸다.

처음 이곳 아프리카 케냐를 찾은 건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사진작가이자 강사인 아버지는 자연이나 야생동물 사진을 찍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녔다.
어릴 적부터 그 사진들을 보고 자란 나 역시 아버지의 뒤를 쫓아다니며 사진 찍기를 즐겼다.
아쉽게도 아버지와 달리 사진에 재능은 없어 작가가 되는 길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싸구려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몇 번인가 아버지 뒤를 따라다녔다.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좋았다. 중학생 때 방문한 아프리카 케냐의 국립공원도 여러 장소 중 한 곳이었다.
아프리카까지 쫓아올 수 있었던 건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여름방학 때이기도 했고, 직전 기말고사에서 그럭저럭 좋은 성적도 받았다.
그때쯤 인터넷에서는 ‘사자와 인간의 우정’이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잠깐 인기를 끌었고, 때마침 아버지의 취재 지역을 들은 나는 조르고 졸라 아버지를 쫓아 아프리카로 향했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에도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꼬박 하루가 걸려 국립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으나 대자연을 보는 순간 지친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벅찬 감동만이 밀려들었다. 중학교 2학년에게도, 이미 세 번이나 방문한 적이 있는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본 광경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사륜구동차를 빌려 평원을 가로지르자 그곳에는 동물원에서 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만큼의 수많은 동물들이 있었다.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누우 떼와 얼룩말의 뒤를 쫓는 치타, 진흙탕에서 목욕을 하는 코끼리까지. 드넓은 땅과 그곳을 뛰어다니는 야생동물은 보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버지 역시 처음 온 것처럼 들뜬 표정이었다. 동물을 마주할 때마다 아버지는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아버지와 닮은 나 역시 들뜨긴 마찬가지였다.
“재인아! 여기 봐, 여기!”
앞장서서 걷던 아버지가 들뜬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꼭대기를 가리켰다. 둥지 밖으로 어린 새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히 내민 모습이 보였다.
“우와!”
아기새를 보자마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TV나 사진에서만 보던 귀여운 아기새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더욱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까치발로 서서 둥지를 올려다보았다.
아기새는 배가 고픈지 계속 부리를 뻐금거리며 어미새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둥지 밖으로 내민 머리 쪽으로 중심이 쏠려 둥지가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어라? 저러다 떨어지는 거 아냐?”
아버지도 걱정됐는지 불안한 얼굴로 아기새를 지켜보았다.
삐이삐이, 계속 소리 내며 울던 아기새가 갑자기 울음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걱정이 먼저 들었다. 긴장한 채로 나와 아버지는 둥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별안간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아기새가 둥지 밖으로 훌쩍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 어어?!”
“아, 아빠! 아빠 어떻게 해요!”
당황한 내가 소리 질렀고 아버지도 허둥대며 대답했다.
“바, 받아야지!”
“어떻게요?!”
“손!”
아버지가 소리치기 무섭게 머리 위로 두 손을 뻗은 나는 어디로 떨어질지 몰라 나무 주변을 동동 뛰어다녔다. 국립공원에 오자마자 동물의 시체를, 그것도 어린 새가 죽은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필사적이었다.
그동안 새는 짧은 날개를 열심히 움직였지만 다시 날아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차츰 아래로 떨어지는 새를 지켜보면서 머릿속에서는 온갖 나쁜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재인아, 오른쪽! 오른쪽이다!”
“으갸악!”
아버지의 외침에 황급히 오른쪽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새를 받을 수 없었다. 손바닥 하나 정도 거리가 부족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작은 키와 짧은 팔을 원망했다. 아기새는 이제 거의 바닥까지 떨어졌고,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재인아.”
아까와 달리 침착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보니 참혹한 현장 대신 새 한 마리가 아기새를 물고 하늘로 오르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어느 틈엔가 위험을 감지한 어미새가 나타나 재빨리 아기새를 낚아챈 것이었다.
“우와…….”
아기새를 처음 발견했을 때와 다른 감동이 밀려들었다.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새끼가 위험에 처하자마자 나타난 어미새는 아기새를 둥지에 되돌려 놓고 다시 먹이를 찾아 떠났다. 물가 쪽으로 날아가는 어미새의 모습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멋지지?”
나는 말 대신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아버지가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홀로 주변을 돌아다녔다.
근방은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스태프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기에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홀로 휴식을 취하는 수사자 한 마리를 발견했을 때에도 크게 무섭지 않았다. 훈련된 사자 중 하나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괜찮겠다는 안일한 판단에 나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사자를 지켜보았다.
사자는 수사자를 중심으로 무리 생활을 하니 암사자 여러 마리와 함께 있는 게 보통일 텐데 내가 발견한 사자는 무리와 함께 있지 않았다. 혹시 암사자들이 사냥을 나간 걸까 싶었지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얼룩말의 사체가 보였다.
식사 후 곧바로 사냥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싸움에서 진 사자인걸까? 오른쪽 눈에 길게 난 상처를 보면 싸움에서 지고 도망쳐 온 것일지도 몰랐다.
무리와 떨어진 수사자가 신기해서 나는 꽤 오랫동안 묵묵히 사자를 지켜보았다. 집요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사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울타리나 철조망 없이 사자와 마주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무서웠다. 아무리 훈련이 되어 있다고 해도 야생에서 살고 있고, 고기를 먹는 육식동물이었다.
사자가 덤벼들면 제대로 반항해 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날카로운 이빨과 사나운 발톱을 지닌 사자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사자와 마주하고 나서야 뼈저리게 느꼈다.
맹수와 눈싸움에서 지면 그대로 잡아먹힌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떨리는 와중에도 눈에 힘을 주고 사자를 노려보았다. 속으로는 사자와 인간의 우정 이야기를 떠올리며 ‘위험하지 않아, 무섭지 않아.’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긴 눈싸움에서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수사자였다. 가는 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던 사자는 작게 콧바람을 일으키고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큰둥한 태도가 마치 ‘나는 배가 부르니 지금은 너를 살려 주겠노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를 무시하는 태도에 화가 나기는커녕 ‘감사합니다, 사자님!’ 하며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자의 관심이 확실히 나에게서 떨어진 걸 확인하고 겨우 숨을 내쉬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사자님의 심기가 나빠지기 전에 도망가야지. 사자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데, 갑자기 누군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확 잡아챘다.
“으읍!”
간신히 비명을 삼키고 뒤를 돌아보니 눈을 반짝이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불안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오오! 재인아. 저기 봐라. 사자가 있어.”
“아빠, 쉿! 쉿!”
나는 다급히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입을 막았다. 간신히 사자의 관심을 돌렸는데 아버지의 눈치 없는 행동에 또다시 위험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사자의 귀가 움찔거렸다. 순간 긴장감이 주변을 감쌌다.
“별일이네. 수사자가 혼자 있는 건가?”
정확하게는 내 주변만.
“샤크에게 듣긴 했지만 정말 무리에서 떨어진 사자가 있었구나. 왜 혼자 있는 거지? 눈에 난 상처는 최근에 다친 거랬나?”
굳은 얼굴로 사자를 살피는 나와 달리 눈치를 밥에 말아먹은 아버지는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나는 사자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려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죽으면 다 아빠 탓이에요.”
사자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내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겁에 질린 내 목소리가 우습다는 듯 껄껄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목을 붙잡고 짤짤 흔들어 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웃음소리였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위협하지 않으면 사자도 다짜고짜 공격하지 않아. 게다가 샤크도 위험하지 않다고 말했고, 봐라. 편하게 쉬고 있잖아.”
“그래도, 눈빛이 무섭잖아요.”
사자를 힐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때마침 사자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또다시 사자와 눈이 마주쳤다. 뒷말을 하다 들킨 기분이 들어 황급히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나를 떠나지 않는 매서운 눈동자에 등 뒤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죄송해요, 사자님. 제가 간댕이가 부었나 봐요.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울상을 짓는 나와 반대로 아버지는 더욱 눈을 빛내며 사자를 바라보았다.
“뭐, 뭐하세요?”
앞으로 한 발 내딛는 아버지의 상의를 재빨리 붙잡았다. 그의 두 손에는 여지없이 카메라가 있었다.
“이건 하늘이 내려 준 기회야.”
“죽을 자리를 마련해 준 건 아니고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지만 아버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옷을 붙잡고 늘어지는 나를 끌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재인아, 계속 옷 잡고 있으면 위험해.”
“아버지가 더 위험해요.”
“한 장만 찍고 갈 거야. 걱정 마. 괜찮다니까? 사자도 그냥 큰 고양이야.”
“사자랑 고양이가 어떻게 같아요…….”
울상을 지으며 반박했으나 아버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리를 붙잡으며 말려 봤자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더욱 신이 난 얼굴로 사자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갈 뿐이었다. 나도 겁 없이 사자의 주위를 맴돌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겁이 없다 못해 우주로 날려 버린 듯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끌려가면서도 등 뒤에 숨어 사자의 상태를 살폈다. 사자는 조금씩 곁으로 다가오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사자에게 다가갈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이 다가가는데 사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망치거나 우리를 위협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 눈빛은 마치,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의 눈과 흡사했다. 우리 집 고양이도 새로운 장난감을 보여 주면 비슷한 눈을 하곤 했다.
하지만 같은 고양잇과 동물이라도 발의 크기도 발톱의 크기도 다른걸. 고양이에게 당해 너덜너덜해진 인형에 내 모습을 대입한 순간 온몸이 부들거렸다.
“화장실 가고 싶어도 참아라.”
“…….”
그런 거 아니라고요. 속으로 꿍얼거리다가 사자와 눈이 마주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사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다리가 후들거리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게 고정된 사자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더욱 공포감을 조성했다.
아버지보다 어리고 약해 보이는 내가 만만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나를 살펴보는 건가? ……진짜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조금씩 사자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불안감과 공포가 점점 고조됐다.
크르릉.
사자의 울음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사자와의 거리는 30m 남짓.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사자가 공격해 온다면 도망치지 못할 만큼 가까운 거리기도 했다. 사자가 우리에게 달려들면 한순간에 죽겠구나 싶은 생각에 턱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진짜로 위험한 것 같…….”
간신히 소리 내어 아버지를 말리려고 했으나 갑자기 사자가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사자의 황금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과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뒤섞여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래도 여러 경험 덕분인지 아버지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몸을 움직였다.
“괜찮아. 도망친다고 뛰면 오히려 더 위험해.”
나를 안심시키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를 향해 곧바로 걸어오는 수사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사자한테서 도망칠 수 있지? 살고 싶어. 죽기 싫다고! 패닉 상태로 뒤죽박죽이 된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제대로 도망치는 방법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평범한 대한민국 중학생이 야생에서 사자와 마주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이제 사자와의 거리는 고작 10m.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우리를 향해 사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울었다.
“으아악!”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아버지도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향이 아닌 아프리카의 땅에서 나는 빛을 발하지도 못하고 죽는구나. 그때는 꼼짝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사자는 기어이 바닥에 드러누운 내 앞까지 다가왔다. 날카로운 이빨이 눈앞에서 번뜩였다. 눈을 감지도 못하고 굳은 나를 내려다보던 사자는 내 손에 들린 카메라를 발견하고 입으로 낚아챘다.
그 순간 손등에 살짝 닿은 사자의 콧김이 고스란히 피부로 전해졌고,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굳게 쥐었다. 하지만 겁에 질린 게 무색하게 카메라를 입에 문 사자는 유유히 아버지와 내 사이를 지나가 버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사자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겁에 질린 내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은 것만 같았다. 그러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나를 두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자가 완전히 보이지 않은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현지 스태프인 샤크가 나타났다. 말없이 사라지지 말라는 샤크의 호통 소리를 한 귀로 들으면서 사자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지켜보았는지 무슨 의도로 카메라를 뺏은 건지, 그리고 정말 나를 보고 웃은 건 맞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이렇다 할 답은 찾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금방 그 자리를 떠나야 했고, 그 후 나는 아버지와 사흘을 더 케냐에 머물렀으나 수사자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혼자 일주일 더 머무른 후에도 수사자를 만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이것이 6년 전의 이야기. 그리고 올해 나는 다시 한번 여름방학을 맞아 케냐 국립공원을 찾아왔다. 아르바이트로 조금씩 모은 돈을 모두 쏟아부었다.
굳이 케냐까지 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해 보고 싶은 일은 6년 전 만났던 특별한 수사자와의 재회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나는 많이 후회했다. 나를 공격하지 않는 사자를 상대로 너무 겁을 먹었던 게 아닐까. 차분하게 대했더라면 좀 더 사자와 교감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사자가 나를 살려 준 건 단순한 변덕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만난다고 하더라도 6년 전의 어렸던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사자를 다시 만나 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를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나는 케냐행 티켓을 끊었다. 6년 동안 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현지 사정은 어떤지 아무런 정보도 알아보지 않고 홀로 무작정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커다란 배낭 하나만 메고 공항을 빠져나오자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다가왔다.
“Mr. 리?”
“네, 네.”
어색하게 영어로 대답하자 남자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태프 샤크를 대신해서 나를 안내해줄 가이드였다.
그와 나는 서로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둘 다 영어가 서투른 탓에 제대로 된 대화는 나누지 못하고 곧장 차를 타고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첫날은 가이드가 안내해 주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고 다음날 아침을 먹자마자 다시 그와 함께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근처에서 머무른 덕에 도착하는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멀리 익숙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해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6년 만에 본 국립공원의 초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케냐에 오는 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역시 오길 잘했다. 기특하다, 나! 한 손으로 앞머리를 열심히 쓸어내리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국립공원 내부로 들어가니 암사자 여러 마리가 커다란 바위 위에 옹기종기 모여 낮잠을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한가로이 쉬고 있는 동물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예쁘다. 진짜 멋져.”
사자를 보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가이드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국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는 그는 내게 특별히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가이드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고 나도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키도 크고 몸도 좋아 보이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은 사정권 외입니다요. 창밖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전이 지날 무렵 우리는 다른 사자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찾는 수사자는 없었다. 오른쪽 눈에 상처를 입은 수사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사자는 이게 전부예요?”
내 물음에 가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있습니다. 사자를 보고 싶어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끄는 동물이나 풍경은 많았지만 6년 전 만난 수사자부터 찾고 싶었다.
혹시나 가이드가 이유를 물어보면 어쩌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바로 차를 움직였다.
가이드가 자동차로 사자가 이동할 만한 장소를 탐색하는 동안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혼자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 나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살펴보았다.
하지만 느지막한 오후까지 찾아다녀도 수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좌절과 실망으로 바뀌어 갔다.
6년이면 아직 사자가 살아 있으리라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야생동물에게 6년이란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긴 시간이었던 것이다.
“왜 없는 거야.”
창틀에 몸을 기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백미러로 나를 살펴보던 가이드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 때문에 가이드까지 고생하고 있는데 도리어 그가 나를 걱정해 주는 상황이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쉬었다 가죠.”
내 말에 가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한 나무 아래 차를 세웠다. 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나도 뒤따라 내렸다.
쉬지 않고 운전을 하느라 힘들었는지 가이드는 나무에 기대어 앉자마자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수사자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았는데. 설마 진짜로 죽은 건가? 다시는 볼 수 없는 걸까.
아니야, 국립공원은 넓으니 하루 만에 못 찾는 게 당연할지도 몰라. 돌아가는 비행기는 닷새 후에 있으니 그 전에 열심히 찾아다닌다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배낭끈을 꼭 쥐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앞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었다.
“우와…….”
생각에 빠진 채 어슬렁거리다 보니 나무가 코앞까지 와 있는지도 몰랐다. 나무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겨우 꼭대기가 보일 만큼 거대했다.
응? 그런데 아까도 이런 나무가 있었나? 이 정도로 크다면 차를 타고 다닐 때에도 보였을 텐데?
이상한 기분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연기밖에 보이지 않더니 차츰 익숙해진 시야에 또 다른 나무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