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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왕국 2화
1. 새로운 세상에 떨어지다 (2)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치채지 못했을 뿐 내 주위에는 상당히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사바나의 초원이라기보다 정글의 숲 한가운데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가이드가 쉬고 있던 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많이 걸었나? 그보다 이런 숲이 있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여기는 대체…….”
미간을 찡그리며 처음 마주한 나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사자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수사자가.
“히…… 읍!”
소리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비명이라도 질렀다간 사자가 당장 내게 덤벼들 것 같았다. 그만큼 사자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자는 내 존재 자체가 굉장히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으르렁거리며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일 때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한 바가지씩 흘러내렸다.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아니 조금은 기대했었지만! 그래도 보자마자 화를 낼 줄은 몰랐다. 6년 전 짧은 만남에서 나와 사자 사이의 우정 비스무리한 게 피어나지 않았던 건가!
크르릉…….
사자가 커다란 발을 앞으로 한 보 내딛었다. 나는 떨리는 다리로 세 발자국 정도 뒷걸음질 쳤다가 사자의 얼굴이 더욱 사나워지는 걸 보고 다시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한 걸음 더 물러서려고 하는데…….
크왕!
사자가 갑자기 큰 울음소리를 냈다. 동시에 나는 출발 신호를 들은 달리기 선수처럼 곧바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멈추면 사자에게 잡아먹힐 거란 공포에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 나갔다. 깎아지른 절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발이 먼저 허공을 디뎠고, 한발 늦게 현실을 자각했다. 물러서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등 뒤에는 이미 나를 쫓아온 사자가 버티고 있었다. 당장 나를 맞이한 건 끝없는 추락뿐이었다.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절벽에 자란 나무에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마른 나뭇가지는 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힘없이 꺾이고 말았다.
“끄아아아악―!”
결국 나는 비명 소리와 함께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
기절하기 직전 상황까지 떠올린 나는 다시금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사자에게 물려 죽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절벽에서 떨어지는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고개를 들자 높다란 돌벽이 눈에 들어왔다. 안개가 처음보다 더욱 짙어져 절벽을 제대로 보기도 힘들었다. 어느 높이까지 치솟아 있는지, 저 위가 과연 내가 떨어진 지점이 맞는지 아리송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장비가 갖춰져 있다고 하더라도 저 가파른 절벽을 혼자 오르기 어려울 것이다.
기절하고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고장 난 손목시계는 계속 같은 시간만 가리키고 있었다. 떨어지기 직전이 오후 4시경이었고, 아직 해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나진 않았으려나?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절벽을 오르지 못한다면 우회하는 방법이라도 찾아야지. 분명 어딘가는 위로 올라가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절벽이 아니라면 분명 길이 있을 것이다.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 좌절하지 말자. 괜찮아.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비관에 빠지려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때마침 나를 위로하는 것처럼 뜨거운 바람이 살살 불어왔다.
……엥? 뜨거운 바람?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뜨거운 바람이 갑자기 불어올 리 없었다. 얼굴 앞에서 일부러 입김을 불지 않는 이상은.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큰 눈동자에 상대가 인간이 아님을 깨달았다.
까만 줄무늬와 흰 줄무늬를 지닌 상대는 다름 아닌, 얼룩말이었다.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가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성체보다는 약간 작지만 새끼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얼룩말을 보고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프리카에 왔으니 동물이 나타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육식동물을 마주친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사자가 여기까지 나를 따라왔나 싶어 괜히 겁먹은 모양이다.
하지만 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건 뭐지?”
어디선가 들려온 한국말에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두 마리의 얼룩말 이외에는.
“정말 이게 뭘까?”
설마…… 설마……!
천천히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나를 보며 얼룩말 두 마리가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나도 처음 봐. 이건 무슨 종이지?”
“어떻게 해? 보고를 먼저 해야 할까?”
얼룩말 한 마리가 코를 내 얼굴로 들이밀었다. 얼룩말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동안 나는 패닉상태에 빠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그냥 절벽에서 떨어진 거 아니었어? 그럼 절벽 위도, 아래도 아프리카여야 하잖아. 그런데 왜 얼룩말이 한국말을 해? 왜? 어째서? 왜?
도대체 여긴 어디야?!



그곳은 비밀의 숲이고, 인간에게는 금기된 땅이며 동물들의 지상낙원이었다.
2. 정글의 왕 (1)


“역시 모르겠어.”
냄새를 맡던 얼룩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번에는 다른 얼룩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목덜미에 코를 들이댔다. 얼룩말의 얼굴이 가까워질 때마다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심장이 몸과 분리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나도 모르겠어. 이건 어떤 동물이지?”
“다리가 두 개인 거 보면 황새나 왜가리 아냐?”
“왜가리라고 하기에는 머리가 너무 커. 날개도 볼품없잖아.”
머리가 크다는 말에 순간 울컥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소두로 통했고, 어릴 적에는 머리가 작다고 놀림당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말을 하는 정체불명의 얼룩말에게 짜증 낼 만큼 겁을 상실하지는 않았기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인간치고는 머리가 작다는 이야기나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보다 닥친 현실을 파악하는 일이 내게는 더욱 시급했다.
진정하자. 진정하고 상황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내가 있는 곳은 케냐에 위치한 국립공원이다. 국립공원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어느 곳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중 한 곳임에는 틀림없다.
케냐는 탄자니아와 맞닿아 있으니 국경을 넘은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있던 곳은 분명 아프리카였다. 그곳에서 사자를 만났고 절벽에서 떨어졌으며 얼룩말을 만났다.
그런데 어째서 얼룩말이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는 거지? 여기는 아프리카가 아닌 건가? 혹시 떨어지면서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나? 그래서 동물의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설마 나는 죽은 건가?
차라리 여기가 천국이나 지옥이라고 하면 납득하기가 쉬울 것이다.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한 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거기다 여기는 아프리카니까 아프리카의 천국이라면 동물이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동물이 말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죽었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콱, 얼룩말이 코로 내 정수리를 짓누르는 바람에 침울한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해? 해괴망측한 침입자가 여기까지 왔다는 걸 들키면 분명히 벌 받을 거야. 경비를 맡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우리는 어쩜 이렇게 운이 나쁠까.”
“우리? 우리가 아니라 너겠지. 이 지역은 네 담당이잖아. 분명히 사부가 네 뒷다리를 뜯어먹을걸.”
“그럴 리가. 경비를 맡은 건 너랑 나니까 공동책임이지. 그리고 사부는 네 앞다리가 더 맛있어 보인다고 그랬어.”
“하긴, 멍청한 네 살을 먹으면 자기도 멍청해질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분명해.”
“뭐?! 내가 멍청하다고? 네가 아니라?”
“내가? 당연히 아니지!”
얼룩말들의 표정이 일순 돌변했다. 아무래도 멍청하다는 말은 그들의 아킬레스건인 모양이었다. 사나워진 얼룩말들의 눈초리에 나는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얼룩말 한 마리가 먼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너 예전에 풀을 정신없이 뜯어먹다가 하이에나한테 잡아먹힐 뻔한 적 있었지? 어떻게 사자도 아니고 하이에나한테 잡혀가냐? 그것도 아직 새끼인 놈한테!”
“뭐라고? 새끼 아니었거든! 다 큰 놈이었거든!”
그에 질세라 다른 얼룩말이 반박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풀 뜯어먹다가 독수리한테 잡혀갈 뻔한 적 있었지? 하긴 너 같은 건 하늘에서 보면 시체랑 완전 똑같겠지.”
“시체라고? 웃기지 마. 완전 근육빵빵이야!”
얼룩말이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 상체를 뽐내며 말했다. 다른 한 마리도 지지 않고 두 발을 들어 올려 자신의 덩치를 자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긴개긴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침입자인 나를 앞에 두고 쓸데없이 말다툼하는 두 마리 다 바보멍청이였다.
하지만 반대로 이건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눈앞에는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있고, 그다지 머리가 좋지도 않은 듯하니, 말로 잘 구슬려 보면 여기에 대해 술술 이야기해 줄지 모른다. 정말로 이곳이 천국의 어디쯤인지 지옥의 입구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직 아프리카에 있는 것이 맞는지. 현재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야 벗어나든 체념하든 할 게 아닌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이는 얼룩말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이…….”
이유가 어찌 됐든 얼룩말들은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나와도 대화가 통할 거라 생각했다.
“으아아악! 마, 말했다?!”
“으악! 말을 했어! 말을 했다!”
그래서 내 한마디에 얼룩말들이 그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다.
“역시 이건 동물인가? 동물인 거야?!”
“몰라! 처음 보는 거라고!”
얼룩말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평소보다 두 배나 커진 눈동자에는 경악과 공포가 가득했다.
그중 한 마리는 뒷걸음질 치다 뒤로 넘어지는 몸 개그까지 보여 주었다. 사자가 나타났어도 이 정도였을까 싶을 만큼 놀라운 반응이었다.
“저, 저기. 궁, 궁금한 게 있는데요!”
덩달아 나까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래도 이야기는 꼭 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목소리까지 높였으나 그들에게서 원하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우와아아아악!”
내 목소리에 놀란 얼룩말들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던 것이다.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붙잡을 틈도 없었다.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도 그렇게 우스운 꼴로 도망가지는 않을 거야. 점점 멀어지는 얼룩말들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얼룩말들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주변에는 흙먼지만 자욱했다.
“뭐야. 소리 지르고 싶은 건 나라고.”
소리 내어 말하니 더욱 비참한 기분이 들어 눈물이 찔끔 나왔다.
정말 이상한 상황이었다. 천국이나 지옥의 어느 곳이라면 인간이 말을 한다고 놀라는 얼룩말이 있을까? 다 같이 죽은 처지인데?
게다가 나는 한국 사람이고 얼룩말들은 야생동물이었다. 얼룩말이 한국말을 하는 상황이 훨씬 더 이상하고 충격적인 상황이어야 하잖아.
오히려 내가 말하는 걸 듣고 얼룩말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는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혹시 기절해서 아직 꿈속을 헤매는 중인가?
“으악! 아파!”
볼을 세게 꼬집었다가 너무 아파서 얼른 손을 놓았다. 손을 뗀 후에도 뺨을 통해 전해지는 통증이 무척 생생했다.
굳이 뺨이 아니더라도 상처 난 몸 여기저기서 이미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아픔이 느껴진다면 꿈은 아닌 게 분명했다.
나는 굳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처음처럼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 또 다른 동물은 있지 않을까 싶어 몸을 쭉 펴고 주변을 꼼꼼히 둘러보았으나 당장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절벽을 마주 보았다.
손을 펴 절벽 위에 대자 딱딱한 암석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번에는 엄지손가락으로 조금 세게 절벽을 문질렀다. 상처 난 손가락 끝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꿈이 아니다. 환상도 아니야.
눈앞의 절벽이 허상이 아니라는 건 절벽 위에서 떨어진 사실도 환상이 아니라는 것. 그런데 이렇게 높은 절벽이 왜 갑자기 나타났을까. 가이드와 차로 돌아다니는 동안 절벽은커녕 우거진 숲도 보지 못했는데.
사바나 초원에 이렇게 거대한 산림이 있다는 게 말이 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건너편에 자리 잡은 거대한 숲을 바라보았다.
내 키의 열 배는 가뿐히 넘는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마치 정글의 입구처럼 보이는 그곳은 이미 사바나의 초원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장소를 본 적은 있다. 바로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 보았던 숲.
여기가 국립공원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절벽 위에서 본 숲이 아래에도 있으니 죽어서 별세계에 왔다거나 내가 모르는 세계로 넘어간 건 아닐 터이다. 하지만 아직 케냐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있었다. 어째서 케냐 국립공원에 초원과 정글이 공존하는 것이며, 갑자기 나타난 얼룩말들은 어떻게 당연하단 듯 사람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나를 대하는 얼룩말들의 태도도 이상했다. 날 보고 무슨 종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모습에서 유추해 보자면 얼룩말은 인간을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하다.
인간을 모른다? 본 적이 없다고? 아무리 야생동물이라도 국립공원을 오가는 사람들 중 한 명도 본 적이 없을까? 가이드나 관계자도 들어오지 못하는 장소가 있는 걸까.
멍하니 숲을 바라보던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가만히 앉아서 고민한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일단 주변 탐색부터 해 보자. 무엇보다 수상해 보이는 저 숲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나무 사이로 들어서자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빼곡하게 들어선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빛이 비치는 곳을 따라 가지를 헤치고 숲 안쪽으로 들어섰다.
처음 숲에 들어설 때는 입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수풀이 무성했는데, 숲 안쪽에는 제법 제대로 된 길이 있었다. 빛이 곧바로 들어와 어둡지도 않았다.
나는 쭉 뻗은 길을 따라 성큼 걸었다. 바닥에 쌓인 나뭇잎을 밟을 때마다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따뜻한 햇볕을 받고 자란 푸른 나무들도 보기 좋았다. 이곳이 케냐의 대평원 아래 위치했다는 사실만 빼면 무척이나 평범한 숲이었다.
평범한 숲을 둘러봐 봤자 여기가 어딘지 알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아까 만났던 얼룩말들을 찾아보는 편이 나으려나.
그때 마치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자, 자자자자잘, 잘못, 잘못했습니다!”
분명 얼룩말 중 하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곧장 소리가 난 곳으로 뛰어가지는 않았다. 얼룩말의 목소리에서 공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연신 사과하는 얼룩말은 확실히 겁에 질린 상태였다.
아까 함께 있던 얼룩말이 아닌 다른 동물도 있는 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고막이 찢어질 만큼 커다란 울음소리에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른 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맹수의 포효 소리는 바로 옆에서 내지르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이 울음소리 알고 있어. 아주 잘 알고 있지.
천천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이 움직일 때마다 삐거덕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찰나의 시간 동안 내 예상이 틀리길 기도했다. 결코 사자가 아니기를. 하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갈기는 틀림없는 수사자의 것이었다.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간신히 두 손으로 막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시끄럽게 뛰기 시작했다. 심장 소리 때문에 내 존재가 들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인 채 두 동물을 지켜보았다.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가?”
분노에 찬 사자가 얼룩말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저음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자를 바라보았다. 사자도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말을 할 줄 아는 동물은 얼룩말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그럼요, 그럼요. 알고 있다마다요!”
“그런 놈이 인간을 두고 도망쳤다?”
사자가 얼룩말에게 다가가며 비아냥거렸다. 뒷걸음질 치는 얼룩말은 눈에 띄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 그게 인간인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사자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금빛 눈동자에 분노가 서리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멀리서 지켜보는 나조차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었다.
“처음 보는 생물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너희만 도망쳤다. 게다가 그것이 인간이라고? 인간이 얼마나 해로운 존재인지 정말 모른단 말이냐?”
“죄, 죄송합…….”
“아무리 너희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하나 너희에게 경비를 맡겼다면 목숨을 걸고 일을 수행해야 할 터. 경비를 소홀히 한 죄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얼룩말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자에게 용서를 빌었다. 얼룩말이 고개를 숙일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이마가 상당히 아플 텐데도 얼룩말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으나 마냥 그를 동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사자와 얼룩말의 대화를 통해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사자는 얼룩말과 달리 인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분명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처음 마주친 동물이 얼룩말이 아닌 사자였다면 이미 나는 비명횡사해서 진짜 천국을 구경하고 있었겠지.
게다가 눈앞의 수사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절벽 위에서 만난 사자보다 어리고 강해 보였다. 사자에게 들킨다면 꼼짝없이 잡아먹힐 게 분명했다.
도망친다면 사자의 신경이 얼룩말에게 집중된 지금뿐이었다.
얼룩말은 계속 큰 소리로 용서해 달라며 울부짖었고 사자도 그런 얼룩말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나뭇잎 밟는 소리가 그들의 말소리에 녹아들길 바라며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져 동물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게 돼서야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발을 디딜 때마다 뼈 마디마디가 쑤셔 왔지만 멈춰 설 수 없었다.
오로지 사자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앞만 보고 뛰고 또 뛰었다. 또 다른 동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래 봤자 밀림의 왕 사자보다는 무섭지 않을 것이다.
“어디 가는 거지?”
“그야 사자에게서 도망을, ―히익!”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무심코 대꾸했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돌에 부딪히고 나뭇가지에 긁히면서 여섯 바퀴를 더 굴렀다.
온몸이 아프기는 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숲 반대편까지 데굴데굴 굴러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늘의 최고위 포식자 독수리와 마주하는 것보다 아픈 편이 백 배 천 배 나았다.
내가 착각한 걸 거야. 사자를 피하자마자 독수리를 만날 리 없잖아. 내 인생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닐 거야.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한 뒤 한쪽 눈을 살며시 떴다. 그럼 그렇지. 눈앞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안심하며 몸을 일으킨 나는 곧바로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독수리를 발견하고 바닥을 기며 뒤로 물러났다. 독수리는 나무 위에서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지? 도망가야 하나? 긁힌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바닥으로 대충 닦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독수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사자와는 또 다른 황금빛 시선이 무척 따가웠다. 혹시 독수리도 인간을 처음 봐서 신기한 건가 싶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던 걸 생각하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렇다면 인간을 알고 있는 또 다른 동물인 셈이었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사자와 달리 당장 공격하지 않는 걸 보면 대화의 여지는 있지 않을까? 독수리의 눈치를 살피며 피를 닦아 내다가 상처가 가장 심한 부위를 건드리고 말았다. 나는 상처를 부여잡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많이 아픈가?”
“당연하죠.”
내가 대답하고도 놀라 독수리를 획 올려다보았다. 독수리는 여전히 나무 위에 그대로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예상외로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는 나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나는 모든 용기를 끌어 모아 외쳤다.
“저는 독수리가 좋아요!”
뜬금없는 소리에 독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도 예쁘고 홍학도 아름답지만요.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면 속이 탁 풀리는 기분이거든요. 얼굴도 잘생겼고, 거대한 날개하며……. 진짜 완전 멋있어요!”
독수리가 조금이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 주길 바라며 필사적으로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던 도중 독수리가 하늘을 나는 영상이 떠올라 흥분할 뻔하기도 했지만 뒤늦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내 진심이 조금은 통했던 걸까. 독수리의 시선이 처음보다 누그러진 기분이 들었다.
“저기, 독수리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독수리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그러나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등 뒤에서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이다.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이 아이인가.”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가 나타났는지 알 수 있었다. 분노에 찬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얼룩말과 함께 있었던 수사자였다.
어째서 독수리와는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했을까. 독수리도 결국 이곳의 동물이었다.
나를 도와주려고 나타난 게 아니라 그저 사자가 나타날 때까지 내 발목을 붙잡기 위해 곁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독수리를 칭찬한 내가 바보지.
원망스러운 눈길로 독수리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이제 와서 독수리를 원망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앞에는 독수리, 뒤에는 사자. 이제는 도망칠 길도 없었다. 사자의 거친 숨소리가 목덜미에 와 닿았다.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통스러운 건 싫으니까 차라리 한 방에 죽여 줬으면 좋겠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마지막 소원을 빌었다.
크르릉.
하지만 당장 달려들어 내 목을 물어뜯을 줄만 알았던 사자는 목을 울리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고요한 숲속에는 사자의 숨소리와 초침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렸다. 30초 정도 기다렸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자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나와 사자 사이에 독수리가 있었다.
“무슨 짓이냐.”
사자가 사나운 눈으로 독수리를 노려보았다.
“그에게 먼저 보고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
“인간이란 어차피 똑같은 족속.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
“그걸 판단하는 건 그이지 네가 아니야. 사부, 너는 이곳에서 추방당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