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6화


방으로 들어오는 건 청소로봇과 의사 그리고 남자뿐이었다. 남자는 방에 들어오면 소파에 앉아 나를 감상했다. 그는 나를 개처럼 대했다. 집 잘 지키는 개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종종 그의 사생활을 보여 주곤 했다.
이홍이란 남자는 지나치게 우아하다가도 가끔은 조련되지 않는 사나운 맹수 같았다. 그는 종종 내가 있는 방에서 식사를 하곤 했는데, 어떤 날에는 우아하게 칼질을 했지만 기분이 내키지 않은 날이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음식을 맨손으로 집어 먹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마치 내가 통째로 집어 삼켜지는 것 같아 눈살이 찌푸려졌다.
남자의 사생활 중, 참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정사였다. 그는 항상 단단한 근육을 지닌 남자만을 안았다. 그것은 정사가 아닌 힘겨루기 같았다. 잡아먹고, 올라타고, 잡아먹는. 처음에는 같은 남자끼리 붙어먹는다는 사실이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더러웠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정사에 면역이 됐는지 그 소리를 들으며 잘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무료하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니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제쯤 경이를 볼 수 있는 걸까.
남자에게 으르렁거리며 내 동생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면, 그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참다 참다 못해 그에게 달려들면 그는 소파 한구석에 있던 지팡이를 들고 사정없이 내리쳤다. 무자비한 매질 아래서 나는 그의 다리에 매달려 경이를 내놓으라 소리쳤지만, 다리에 매달려 복날 개와 같이 맞는 순간 드는 생각은 정말 죽겠구나였다. 숱하게 버려져는 봤지만 이렇게 맞아 본 적은 없었다. 나름 맷집이 세다고 자부했던 나지만 결국 아파 신음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처럼 욱신거리는 몸을 안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그가 마음 상한 애완견을 달래듯 중얼거렸다.
“차차 보여 줄게.”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마. 그땐 네 개고 뭐고 너부터 죽여 버릴 거야.”
“아무렴.”
남자는 웃으며 터진 입가를 꾹 눌러 왔다.
“그렇지만 주인을 물어 죽이는 개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해.”
입술에 닿는 따끔거림에 눈가를 찌푸리는 나와 달리 그는 더없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자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귀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흐윽 아하요. 터기…….”
“칭얼거리지 마. 입 다물고 네 할 일이나 해.”
작은 흐느낌이었다. 그 흐느낌이 익숙해 눈이 부스스 떠졌다. 형아, 형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꿈같아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한 번 더 부르는 소리에 그것이 진짜라는 걸 깨닫고 몸을 당겨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검붉은 흉기를 입에 물고 낑낑대는 경이와 느긋하게 누워 그것을 즐기는 남자가 있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나는 경이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그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분하고 분했다. 하지만 날아간 주먹을 남자는 간단히 걷어 냈다.
“정신을 덜 차렸나 보군.”
나를 내려다보며 남자는 천천히 퍼스너를 올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얼음이 녹지 않은 잔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잔에서 진한 알코올 냄새가 흘러나왔다.
“뭐하는 거야!”
떨고 있는 경이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과 따듯한 체온을 가진 그는 분명 경이가 맞았다. 내가 죽이려고 했던. 지키지 못한 내 동생. 주먹이 꽉 쥐었다.
“네가 보고 싶어 했잖아. 그래서 데리고 왔는데 왜 그런 반응인지 모르겠군.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용도에 맞게 쓴 건데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지? 애완견은 애완견답게 예뻐해 주고 있는데 왜 화를 내는데?”
이, 이 새끼가! 또 달려들었다가 남자의 밀침에 꼴사납게 튕겨 나갔다. 남자의 몸은 단단한 쇠였다. 제국에선 한계를 지닌 몸 대신 기계를 이식한다더니 그가 그 경우였다. 사람의 몸으로 그에게 뛰어드는 건 결국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화나고 분한 마음을 내리누를 수 없었다.
“형아 아파! 그만해, 그만해.”
또 한 번 달려들려는 내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경이다.
“형아 아프니까 그만해. 무서운 사람이야. 무서운…….”
무서운 사람을 중얼거리던 경이는 히익거리더니 내 뒤로 몸을 숨겼다.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몸을 떠는 경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건들면 죽여 버린다 했잖아!”
“시끄럽군. 그렇게 왕왕 짖길 원하면 개 우리에 넣어 줄게.”
개라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반응하는 건 경이다. 경이는 개를 무서워했다.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 짓는 개들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빌자. 잘못했다고 빌자, 형아.
벌벌 떨며 경이는 내 손을 부여잡아 왔다. 가느스름하게 떨리는 그 어깨가 애처로웠다.
그에게 빌자고?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저 남자에게 빌어야 하는데?
경이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형아 제발. 제발.”
경이는 잘잘못을 따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이 순간이 지나길 바랄 뿐이다. 남자가 인터폰을 누르자 제복을 입은 군인 하나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우리에 집어넣어.”
군인은 힐끔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따라오라고 눈짓을 했다.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떠는 경이는 내 손을 잡고 고개를 흔들며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귀를 울리고 뇌를 울려 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 정맥이 도드라졌다.
“잘못했어.”
머리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잘못을 비는 어투가 아니군.”
“잘못했습니다.”
“자세도 건방지잖아.”
무릎을 꿇었다.
“더 낮춰.”
허리를 낮추는 시늉을 하자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게 딱 너희 자리야. 그걸 명심해.”
남자가 손짓하자 위협적으로 서 있던 군인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나는 굽힌 허리를 피지도 못한 채 주먹으로 땅을 내리쳐야 했다. 비참하고 가여워서.
분해하는 내 허리를 경이가 안아 왔다. 미안해. 경이는 그 말을 속삭였다. 도대체 왜 네가 미안한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모든 일의 원흉은 내가 강하지 못해서인데. 너는 왜……. 경이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향내 나는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게 다 내가 강하지 못해서다.

***

경이가 옆에 있었지만, 현재에 안주할 수 없었다. 긴장하고 또 긴장해야 됐다. 경이의 가느다란 목에 못 보던 것이 걸려 있었다. 은색의 반짝이는 목걸이였다. 펜던트를 엎어 보자 그 뒤에는 뽀삐라는 우스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뽀삐.
사람에게 붙일 수 없는 그 이름을 경이에게 줬다. 진짜 남자의 애완견이라는 듯. 화가 나 목걸이를 잡아채어 던져 버리자 그 뜻을 모르는 경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왜 예쁜데?”
“버려.”
내 말에 경이는 입을 내밀었다. 삐진 경이에게 나중에 더 예쁜 걸 주겠다고 하자 그제야 헤실헤실 웃으며 내 목을 끌어안아 왔다.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오는 경이다.
“경아 넌 내가 밉지도 않아?”
“형아가 왜?”
내가 널 죽이려고 했잖아. 헤븐에 데려다준다고 거짓말하고. 널 지켜 주지도 못했어. 그런 난…….
“나쁜 사람이잖아.”
“아냐! 형아는 좋은 사람이야! 아주, 아주 착한 사람이야!”
경이는 내 목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내게 형만큼 친절한 사람은 없어. 다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걸. 속달속달 누가 들을까 작게 속삭이는 경이는 눈치가 많이 늘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게 궁금해 경이의 손을 잡고 몇 번을 물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몰라 잘 기억나지 않아. 나는 잘 몰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경이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말해 봐.”
계속되는 애원에 경이의 눈이 흐려진다. 달싹이며 여러 번 망설이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러니까. 형아…….”

헤븐에 데려간다던 형은 주궁장창 잠을 잤다. 전날 밤 엄마랑 아빠랑 만나게 해 준다더니 형만 헤븐에 가려나 보다. 무릎을 끌어안고 형을 바라보았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새하얀 이불과 형 옷을 적시는 새빨간 피를 보고 죽음이란 것에 가까워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형은 계속 쿨럭대면서도 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형아, 미미한테 가? 할머니한테 가?”
계속 물어도 나쁜 형아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찰랑이는 바다같이 파랗게 질려 가는 형이 추운가 싶어 이불을 끌어올려 목까지 덮어 주었다. 조금이라도 형이 죽음으로 가는 걸 멈추고 싶어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형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러면서도 형은 나를 볼 때면 그 마음을 숨기기 바빴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형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다.
나도 형 따라 죽을 거야. 그래서 다음 생에 또 태어나면 형 동생으로 태어날 거야. 소우가 그랬다. 사람은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고. 그걸 윤회라고 한다고. 다음 생에 형 동생으로 태어나면 그때는 모자라지 않게 태어나서 형 호강시켜 줄 거야. 엄마 보고 싶다고 보채지도 않고.
계속 그 말을 읊으며 형이 죽기를 기다렸다.
‘넌 참 속도 편하구나.’
침대 2층에 사는 남자가 날 보며 질렸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형의 눈을 까집고 입을 벌려 보았다.
‘살기에는 늦었나.’
남자의 손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형이 헤븐에 가는 걸 방해받는 거 같아 그의 손을 치워 버리고 형을 꼭 끌어안았다.
‘만지지 마. 형은 헤븐에 가려는 거야!’
‘헤븐! 헤븐! 너희 형제들은! 너 그곳이 어떤 곳인지나 알고 말하는 거야?’
‘알아! 엄마랑 아빠랑 우리 집이 있는 곳이잖아.’
하아. 남자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더니 내게 고함을 지른다.
‘헤븐은 망자들이 사는 곳이야. 차고 시리고 원성이 가득한 곳. 넌 네 형이 불쌍하지도 않나? 평생 널 위해서 살다 간 네 형이 말이야.’
차갑고 습한 곳? 그 헤븐이 그 헤븐이 아니야? 형이 그래서 나를 데려가지 않은 거구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따끔거리는 목을 매만지며 형을 바라보다 형을 안고 울먹거렸다.
‘넌 이기적이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네 형을 얼마나 구속했는지 넌 모르지.’
‘아, 아냐.’
‘됐어. 너 같은 걸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멍청한 짓인데.’
남자를 쇠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가 낸 소리에 하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쇠창살로 문을 두드린 사람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밖에서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라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
남자가 나가고 몇 분 되지 않아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들어와 형을 흔들어 보았다. 뭐 하는 거냐고 그들을 밀쳤지만, 오히려 그들의 손에 내가 떠밀렸다. 형은 의사들의 손에 어디론가 가 버렸다. 형을 잡기 위해 옷을 그러쥐어 봤지만 구둣발에 채여 형의 옷을 놓쳤다.
문이 닫힌다. 완벽하게 하나였던 우리는 드디어 떨어졌다. 사라진 형을 보며 문에 기대 엉엉 울었다. ‘형…… 형, 가지 마. 그런 곳에 가지 마.’ 그 말만을 외치며.
이제 이 작은 방에 남은 것은 나와 소우뿐이었다. 나는 밤마다 소우의 옆에 누워 훌쩍였다. 그러면 소우는 ‘걱정 마. 네 형 금방 올 거야.’ 그렇게 말해 주었다.
‘소우야, 어떻게 하면 형이랑 내가 행복할 수 있어?’
‘돈이 많아야 해. 그래야 여기를 나갈 수 있어. 그래서 좋은 집 사는 거야. 요새 같은 집을 지어서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게. 그래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옛날 형도 그랬다. 돈이 많아서 헤븐에 갈 수 있다고.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다 돈 때문이구나. 돈 때문이야. 나는 돈을 탓하며 소우의 옆에서 잠들었다.
형이 사라진 다음 날, 하얀 제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들이닥쳤다. 따라오라는 손짓에 형을 만나게 해 주는 건가 싶어 따라갔다.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무서운 남자였다. 남자는 요리조리 내 얼굴을 훑어보더니 오라고 손짓을 했다. 싫다고 고개를 흔들자 남자는 사정없이 뺨을 내려쳤다. 그리고…….

“그리고 어제 같은 거 시켰어. 턱이 아픈데 울면 시끄럽다고 막 때리고 그랬어.”
말을 끊은 경이가 사납게 눈을 치켜뜨곤 남자의 목소리를 흉내를 냈다.
“이 개새끼는 못 쓰겠군, 사냥개는 못 되니깐 애완견이래. 무서웠어.”
그게 꽤 서러웠던 건지, 아니면 맞은 게 아팠는지 경이는 내 품에 머리를 비벼 오며 울먹였다.
“그래서 지우개로 빡빡 지우려고. 난 이제 아무것도 몰라.”
경이는 계속 손을 들어 무언가를 지우는 시늉을 했다. 그 손짓이 애처로워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식으로 애완동물 취급받으면서 갇혀 살 바에야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나았다. 그래서 우리만의 헤븐을 만드는 거야.

***

그날 이후로 나갈 궁리를 하다 지나가는 말로 남자에게 물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하자 남자는 마음대로라고 대답하곤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인가 싶어 남자를 보았지만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는 게 전부였다. 그 후 보란 듯이 출입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작은 라이터를 던졌다. 텅텅텅- 소리를 내며 라이터가 굴러갔는데도 센서가 작동하지 않았다. 발을 뻗어 봐도 작동되지 않았고 고개를 빼도 군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 근처로 군인들이 지나다니지 않았다. 이 정도면 방생이 아닌가.
내적갈등이 일었다. 도망갈지, 말지. 이미 답은 하나에 마킹 해 놓고 그게 옳은 답인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나는 경이를 바라봤다.
“경아, 숲 구경 갈래?”
“웅!”
밖은 숲이었다. 이 저택만 벗어나면 몸을 숨길 수 있겠지. 그리고 지긋지긋한 제국의 국경을 넘어 신성도시로 망명하자. 그곳은 아무리 제국군이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범죄자들의 망명지로 유명했다.
나는 경이의 손잡고 냅다 뛰었다. 비상계단까지 걸어가도 군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밖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그것이 이상해 고개를 돌려 보아도 주변이 너무나 조용했다.
정신없이 달리다 숲이 깊어지고 나서야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늦췄다. 경이의 손을 잡고 그대로 계곡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계곡의 끝에는 분명 강이 존재할 테니까. 내 손을 꼭 잡은 채 노래를 흥얼거리던 경이가 우뚝 멈춰 섰다.
“왜?”
내가 묻자 경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딘가를 응시했다.
“형아야, 계속 똑같은 길을 걷는 거 같아. 저 부러진 나무 아까도 봤는데 지금 또 나왔어.”
경이는 부러져 밑동만 남은 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분 탓이겠지.”
경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응, 그런가? 경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래를 불렀다. 신나서 노래를 부르던 경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배고프다고 칭얼거렸다. 배를 부여잡고 배고프다를 중얼거리는 경이 덕분에 내 배에도 신호가 왔다. 햄버거, 피자, 치킨을 읊어 대는 경이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났다.
“여길 나가면 먹자.”
“웅.”
이 숲을 나가서 역 근처 무료 급식소에서 들르면 끼니는 간단히 해결이 됐다. 그게 아니면 구걸이라도 해야 하나. 한숨이 입술을 뚫고 나왔다.
세 시간 정도 계곡 주위를 계속 걸어가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살던 곳에 이렇게 높은 산이 있었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공국은 주업이 농부인 사람이 대다수였었다. 그 정도로 평지가 많았다. 제국의 손에 먹히기 전까지는. 산이라곤 야트막한 산이 전부일 텐데. 어째서 내려가도 끝이 없는 걸까.
“형아, 봐 봐. 저거 또 나왔어.”
경이가 손가락으로 아까 보았던 부서진 나무를 가리킨다. 번개에 맞아 그슬린 자국이 있는 나무 밑동을 수없이 봤었다. 경이의 말이 맞다. 이상했다. 그 자리에서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숲에는 그 흔한 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두두둑- 두두두둑.
어렴풋이 무언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둑- 두두두둑.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경이는 내 손을 놓고 달려가 어푸어푸 소리를 내며 세수를 하더니 두 손을 모아 물을 떠먹으며 배를 채웠다. 이 계곡의 물을 다 먹어 버리겠다는 듯이 전투적으로 떠먹던 경이는 멍하니 서 있는 내 쪽으로 다시 달려왔다.
“형아! 언제쯤 밥 먹을 수 있어?”
“모르겠어.”
“멀었어?”
“잘 모르겠어.”
이 숲이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어. 여기를 벗어날 수 있는지.

***

숲을 떠돌아다닌 지 만 하루가 돼서야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다른 방향으로 걸어도 결국 빙빙 돌게 되어 있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는 배고픔과 근육통에 시달려 얼마 가지 못하고 나무 그늘 아래 누웠다. 물로 배를 채우는 것엔 한계가 있었고 오래된 걸음은 배고픔을 부추겼다. 경이는 울먹거리다 잠으로 배고픔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지독한 건 몸을 타고 올라오는 홧홧함이었다.
분명 신종 독으로부터 살아났고, 그 후 별 탈 없이 지냈다. 의사들은 중화제라며 주사를 놓아 주었었고, 몸에 퍼졌던 독의 혈중 농도가 줄어들어서 안정권에 들어섰다며 차트를 뒤적거리기도 했었다. 분명 중화제라고 했는데 완치된 게 아니었나? 바들바들 몸이 떨렸다. 한 번 더 다가오는 죽음을 보고 있을 수만 없었다.
다시 돌아가야 했다. 이홍, 그자가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래서 잡지 않았던 거였나? 집 나간 개새끼가 다시 돌아올 걸 알고 있었기에.
벌떡 일어나 누워서 자는 경이를 흔들었다. 그런데 경이의 반응이 이상했다. 엎드려 고개를 박고 자는 경이를 깨워도 반응이 없었다.
“경아, 경아. 일어나 봐.”
떨리는 손끝으로 몸을 흔들자 경이는 그제야 힘없이 고개를 든다.
“배가 고파서 힘이 없어.”
“다시 돌아가야 해. 그 집으로. 숲 구경 그만하고 돌아가자.”
“거긴 싫은데.”
경이가 잠에 덜 깬 채로 웅얼거렸다. 그곳은 나도 싫었다. 그렇지만 내가 죽어 널 혼자 남기는 것보다 나았다. 널 혼자 남기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거다. 내가 죽는 건 네가 죽었을 때. 힘이 없어 자꾸만 고꾸라지려는 경이를 등에 업고 반대 반향을 향해 걷고 걸었다. 가느다란 팔이 내 목을 끌어안아 왔다. 내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형.”
“응.”
“형아.”
“왜?”
경이는 덥고 마른 숨을 내 목 뒤로 뱉으며 나를 끊임없이 불렀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그리고 경이의 입술을 뚫고 나온 마지막 말은 내 머리를 내리쳤다.
“몸이 따가워.”
따가워? 그것은 신종독과 같은 증상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고개를 돌리니 경이가 힘없이 눈을 깜박거리며 숨을 내쉬고 있었다.
“울렁거려, 형.”
순간 웩웩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얼굴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죽은피가.
“뜨거워.”
“개자식! 개자식!”
저택에 머물러 있을 남자를 욕하며 울컥 피가 배어 나오는 경이의 입을 소매로 훔쳤다.
“형아.”
자그마한 손이 내 목을 두드렸다.
“언제부터 그랬어.”
“어제부터 계속 따가웠어”
미리 말했어야지! 미리! 나는 경이를 계곡 주변에 앉히고 두 손으로 물을 떴다.
“형아가 거길 나가고 싶어 했잖아. 나 때문에 또 형이 포기할까 봐.”
눈을 내리깐 경이가 웃었다. 그 웃음이 눈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그게 마음 아파 계곡물을 떠 경이의 입 주위를 닦아 주었다.
“형, 이제 나 죽을 수 있지?”
경이는 신나서 떠들어 댔다. 계곡 물로 퍼져 나가는 검붉은 피를 보며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이제 형 따라갈 수 있는 거잖아. 나 혼자인 게 무서웠어. 근데 형아가 가고 싶어 했던 곳 가니까. 슬퍼도 참았어. 나 잘했지?”
“경아.”
“레이 형이 그랬어. 헤븐은 춥고 차가운 곳이라고. 그래서 나 안 데리고 가려다가 내가 눈에 밟혀서 다시 돌아온 거지? 헤헤, 우리 같이 가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목구멍까지 울음이 차올랐으니까. 경이의 얼굴에 묻은 피를 물로 씻겨 주고 옷소매로 물기를 닦아 냈다.
“경이랑 가기 싫어? 추운 곳이라서 안 데리고 가려는 거야?”
“아냐.”
“그럼 경이랑 갈 거지?”
“그래.”
신난다, 경이는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말을 묻지 못했다. 너는 살고 싶었던 게 아니냐고. 말갛게 웃는 너는 이미 자라 있었다. 항상 어리게 보던 네가. 나는 그런 네게 묻는 대신 너의 손을 꽉 잡았다.

***

남자를 찾아 되돌아가려던 우리는 무덤을 찾아 떠돌아다녔다. 우리의 헤븐을. 왜 죽는 걸 선택하냐고, 남자에게 찾아가 목숨을 구걸하라고 어리석다 말하겠지만, 날 보고 어리석다 하는 사람들을 비웃어 주고 싶었다. 방생하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방치한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하라고? 그렇게 잔인한 남자에게?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경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한참을 걷다가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하얀 앉은뱅이 꽃들이 핀 적막한 곳. 그곳에 우리는 드러누웠다. 드높게 뻗은 나무들 때문에 하늘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경이의 몸을 꼭 끌어안자, 경이가 노래를 시작했다. 마지막이 될 자장가를.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어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지입을- 봅니다.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 노래에, 아가는 소록소록 잠이 드읍니다.
따듯하게 뛰는 우리의 맞닿은 심장이 꺼지기를, 그리고 마지막에 꺼지는 심장이 나이기를 바랐다.

***

과거 이야기를 하고, 소원도 말하고, 옛날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물같이 흘려보냈다. 다행히도 경이의 숨이 먼저 꺼져 갔다. 지독한 독기는 우리를 좀 먹었고 영원할 것 같은 암막에 갇혔을 때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끝이라고. 영원한 숙면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눈을 떴을 때, 저승이 아닌 ICB 안에 들어 있었다. 쏟아지는 잠에 다시 눈을 감았다 뜨니 또 그 원목 방이었다. 탈출은 꿈이었나 싶었다. 나는 눈을 비볐다.
“어리석었어.”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집 나간 개새끼는 결국 죽게 돼, 사냥꾼에 잡혀서든지 아니면 굶어서든지. 어떻게든 죽는 것이 주인 잃은 개들의 종착역이지.”
남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느릿하게 사고하며 밖을 내다보았다. 아침 해가 떠 있었다. 선명한 파란 하늘에 떠 있는 붉은 해는 괜스레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